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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농장 1980년대
용호농장 1990년대
용호동 용호농장 지역 1953년
용호동 용호농장 (구남, 일명 문촌) 1991
용호동 나환자 정착촌, 용호농장의 유래
한센인들이 자립을 위해 운영한 농장이 위치한 곳이라 하여 용호농장 마을이라 불렀다.
용호농장 마을로 한센인이 이주한 때는 1946년 상애원[1909년 영국 구라선교회에 의해 감만동에
설립되어 1910년 개원하였으며 호주선교회의 맥켄지 선교사가 관리한 한센인 수용 및 치료시설]
의 한센인이 소록도로 강제 이주되면서 당시 소록도이주를 거부한 전염성이 없는 음성 한센인이
용호동에 정착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일본군 주둔지로 부서진 대포와 병영
시설만이 있어 출입이 통제된 곳이었다고 한다.
1948년 경상남도 도립 나요양소로 틀을 갖춘 뒤, 1961년 국립용호병원으로, 1968년에는 국립
소록도 나병원 용호분원이 되었다. 광복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외지의 한센인이 이주하며 규모가
커지고, 교회와 주택, 채소· 양계·양돈을 위한 농장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마을이 확대되자 1975년
용호 농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부산 광역시 남구 용호2동으로 편입되었다.
마을의 규모가 가장 컸을 때는 7,000여 명의 주민이 돼지 20만~30만 마리, 닭 200만 마리 이상을
사육하였고. 가구판매단지로도 알려졌었다. 이후 2000년 1월 ‘용호 농장 지구 단위 계획구역’으로
지정되어 철거되기 시작해, 2004년 완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2005년 용호동 오륙도SK뷰 아파트공사가 착공되었으며 2008년10월 완공 입주하였다.
오륙도앞 해안가에 오륙도 해맞이 공원과 스카이워크도 만들어져 멋진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용호동 나환자 정착촌 상애교회는 2004년3월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1047-2번지 일원3000여평
대지로 이전 65세대의 주택을 건축하여 새 터전에서 교회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2019년 현재 정관 신도시에 낙원대 실버타운(4층 건물)과 창대교회로 자리잡고 있다.
창대교회와 낙원대 실버타운 2017
용호동 SK뷰 아파트 2008
용호동 오륙도SK뷰 아파트 전경
용호동 SK뷰 아파트 2019
용호동 SK뷰 아파트 2020 (우측편에 이기대 산책길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인다)
1980년7월1일 같이 임용한 동기 중에 정한용이란 친구가 위 구남 용호농장 문촌에서
닭 키우면서 살았었고. 그 친구 한테 계란을 산 기억이 나네요..
그 친구가 대연성당에서 결혼식 하는 날 성당 안 식장에 들어갔는데 정한용이가 보여
"한용아 축하한다"고 악수를 청했는데.. 주빗주빗 하면서 하는 소리가 "정한용씨
동생입니다" 하더군요., 진짜 쌍둥이 보다 더 닮은 것 같더라고요.. ㅎ
세월이 억수로 많이 지나고 나이도 묵어가니 별 생각이 다 나네요.. 주절거려 봅니다.
임용 첫해인 1980년11월, 창설기념일 회식행사하고 공병단 수불과 사무실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이 창설기념일 체육대회에서 공병단이 축구우승을 비롯 좋은 성적을 내어 종합우승을 했었지요.
선줄 왼쪽 부터 김동인, 박병학, 이름 생각안남, 황규종, 정한용, 황영일, 이성국, 김성은,
않은 줄 왼쪽부터 서부윤, 문순태, 조용만, 중간에 않은 친구도 울 동기인데 이름이 생각 안나네요..
저 사진에 보니 벌써 먼저가신 사람이 내가 알기로 세분이 보이네요,,
문순태, 이성국, 박병학, 먼저 가신 분의 명복을 빌어 봅니다.
오륙도 상공에서 본 부산진구, 연제구, 남구, 수영구, 동래구, 해운대구 모습 2020
기자의 눈으로 본 용호농장의 마지막 봄 이야기
03.05.03 17:33l최종 업데이트 03.05.08 17:20l 최승희(kotani)
1.
오늘도 그는 며칠 밤을 새웠다.
그곳에 다녀온 지도 벌써 2주 째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그는 아직 원고의 첫 페이지도 끝내지 못했다.
흑백의 필름들과 피처럼 진하지만 낡고 강렬한 컬러 색조들이 이리저리 그의 책상을 어지럽게 이미지를
만들며 흐르고 있지만 그는 그것들을 도통 정리하지 못하고 다시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만다. 컴퓨터를
끌까하다가 포기하고 샤워실에 들어간다.
찬물을 틀어 놓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고 난 뒤라 정신이 몽롱하지만 조그만 여행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작업은 그 시작의 엄두를 잡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히 그 끝을 어림잡기가 힘이든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끼고 돌아본 부산의 조그만 언덕배기 동네의 흔적을 어떻게든 나름대로 정리를 해야 했다.
하지만 내가 봐도 그는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는 냉장고에 재워놓은 얼음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 넣은 후 다시 내뱉는 담배질을
연실 거듭하고서야 결국, 스토리가 없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만으로 여행기를 완성하기로 작정했다.
어떤 여행이든 작가가 느끼는 솔직 담백한 여행기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번엔 그 여행기마저 작은 파노라마라
는 이미지에 그냥 얹어 놓기로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내용인즉슨 자신의 여행기 대신 그것들을 대신
할 짧게 부서진 작은 이미지의 조각들로 그 우울한 여행 퍼즐을 맞춰가기로 한 것이다. 난 절대 동의할 수 없었
지만 작자가 그렇게 한다는 데야 어찌할 방도가 없어 난 그저 내래이션만을 빌려주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용호동의 이야기는 앞과 뒤가 없는 비상식적인 스토리없는 단서적인 그림으로만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 용호동의 색들 |
ⓒ 최승희 |
2.
2003년 4월이 끝나갈 무렵 그는 밤 10시 30분 서울발 부산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모인 사람들은 깊어
가는 밤 시간에도 어디론가 떼를 지어 긴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도 사람 사는 내음이 흠씬 풍기는 그
대열에 슬쩍 끼여 있었다.
심야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부산시 남구소재에 있는 작은 마을 용호동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왜 용호동
을 찾았을까? 사실 그가 용호동을 알게되고 찾아가게 된 계기는 그렇게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언제인가 부산
국제영화제 주간에 문득 TV를 보다가 장선우 감독이 만든 "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란 영화의 무대배경이
되었다는 장소에서 조감독과 사회자가 영화 에세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는 그 프로그램
의 배경지가 된 부산 용호동이라는 곳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오륙도를 동그랗게 안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잔잔한 산골짜기에 노인의 주름살처럼 깊게 패인 주검같은 집들과 공장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산허리
의 낡은 공동주택들의 이미지는 그에겐 단 한번도 이 땅에서 구경할 수 없었던 깊은 이미지로 날카롭게 각인
되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 새벽에 바라본 용호농장의 풍경 |
ⓒ 최승희 |
줄달음하는 호기심 속에 찾아본 그곳은 처음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우리네 삶의 깊고 우울한 역사를 내포
하고 있는 한센병 환자들의 집성촌이었다. 그는 그 곳을 향해 지금 내려가고 있었다.
3.
5월을 시작하는 어둠이 깊게 깔리고 플랫폼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기차들의 궤적을 보며 부산에
가까이 왔음을 직감한 그는 갑자기 차내의 정적을 깨는 발칙한 벨소리로 요동치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의 주인공은 부산토박이 선배. 며칠 전 친한 모임의 선배님들과 그가 부산에 함께 내려간다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이제서야 그 메시지를 받은 모양이었다.
" 문디 자슥아. 와 인자 전화하노? "
선배의 여전한 걸걸한 목소리로 서로의 반가운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그는 그렇게 정겹게 쓰이는 부산사투리
의 원조인 문디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거칠게 다가옴을 느꼈다. 그가 용호동을 내려가기로 작정한 후 해방 후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음성나환자 집성촌에 대한 자료들을 모조리 훑어보았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당시의
음성나환자들에게 남겨진 고통의 흔적들이 일반인들은 알지 못하는 깊은 수렁의 세월이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문둥병에서 비롯된 문디라는 말이 스스럼 없는 사이에 자주 쓰이는 일반적 호칭이
되어 버렸으니 그것 자체가 그는 참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사실 음성나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다. 한센병이라는 구체적인 병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긴 세월
동안 치유불능, 혹은 가까이 하면 안되는 사람들로 분류되어 격리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제 3 법정 전염병일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기차는
부산에 도착했다.
▲ 부산으로 오는 기차안에서 광안대교를 넘어.... |
ⓒ 최승희 |
4. 그는 마중 나온 지인의 차에 올라 새벽을 가르고 용호동에 올랐다. 용호동은 부산시 남구의 동남쪽 끝에
있는 인구 10만의 대표적인 주거지역으로 남구에서 그 넓이가 두 번째로 크고 서쪽으로 대연동, 용당동과
접하고, 나머지 삼면은 해안에 접해 있는 지역이다. 새벽에 용호동 산꼭대기에 올라와 있으니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동네 개들만 요란하게 낯선 방문자를 경계한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날이 샐 때까지 사람들이 떠난 지붕에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가방에서 그가 모아 놓은 작은 자료들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 용호포구로 내려가는 길 |
ⓒ 최승희 |
5.
그가 펼쳐든 자료에는 이런 기록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용호동은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용호동은 조선시대에는 분개[盆浦]라 했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에는 집은 별로없고, 소금을 굽는 동이
[盆](분)만 여기저기 있어 동이가 있는 갯가[浦](포)라는 뜻에서 분개라고 하였다. 분개에서 언제부터 소금을
구웠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400년 전에 석포 마을의 동쪽에 사분개 염전을 시작한 것이
분개 염전의 시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바다가 자연 매립되어 남쪽으로 해안이 이동함에 따라
지금의 용호동쪽으로 염전이 옮아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염전분이 24군데나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에는 6곳의 염전구역으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 ==>용호본동(용호1동)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자료를 뒤적이다 아무리 봐도 뭔 소린지 잘 몰라 그냥 가방에 쿡 하고 쑤셔 넣고 다른 자료를 찾았다.
'전에 다른 게 있었는데'하면서. 그러고는 꼬깃꼬깃한 파일 모듬 안에서 한 장의 접혀진 자료를 꺼내곤 그
기사를 골똘하게 다시 읽어보았다. 동네 개들의 짖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고 여명이 터 오기 시작했다.
『 부산시 남구에 소재한 용호2동에 만들어진 용호농장은 "원문 : 일제강점기 시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나병환자들을 따로 격리하기 위해 만든 음성 나환자 집성촌이었다." "수정 :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0년에
감만동에 개원한 나환자 수용 및 치료시설인 상애원에 있던 나환자들을 1946년 소록도로 이주 시켰는데
이를 거부한 일부 음성 나환자들이 정착하면서 조성된 마을이다." 하지만 이제는 의학의 발달로 극소수의
음성 나환자 만이 있을 뿐, 나머지 가구들은 영세가구 공장이나 양계를 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은 나환자
들이 떠나간 마을의 폐가를 헐값에 빌려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용호2동 용호농장에 대한 설명이다.
『 부산 남구청은 음성나환자 집단 거주지인 용호동 용호농장 안에 아파트 3천여 가구를 짓기 위해 24일 개발
업체와 지역주민 3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설계 안에 대한 공청회를 가졌다. 개발업체는 이날 오륙도가
보이는 바다 쪽 아파트 층수를 23층으로 낮추고 중앙지역은 47층 높이로 모두 3353가구를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아파트는 다음달 중 교통영향평가를 마치고 3월 건축심의를 거쳐 착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것이 그가 가진 용호동에 대한 전부의 자료였다.
▲ 용호동 가구단지의 풍경 |
ⓒ 최승희 |
6.
날이 밝고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선명하게 마을이 들어왔다. 그는 그렇게 많이 부산을 왔었
지만 오늘처럼 그렇게 오륙도를 가까이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물이 날 때면 섬이 여섯 개, 물이 차면
다섯 개로 보인다고 해서 지어진 오륙도는 아직도 용호동을 관통해 낚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의 길이 있는 곳
이었다. 그래서 오륙도가 보이는 용호동의 작은 포구엔 낚시집들과 매점들이 아직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작은 마을버스들이 가끔씩 사람들을싣고서 산등성이를 넘나들고있었다.그는 마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이미 떠난 공가들이 음습한 용호농장의 모습을 만들고 있었고 그런 공가들 사이로 개들이 짖는 집들
은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들이었다. 뉴스기사로 볼 때 그가 찾은 4월의 끝이자 5월의 시작은 공교롭게도
용호동의 마을이 맞이하는 마지막 봄인 셈이었다. 작은 골목에는 조그만 덩어리로 모여있는 유채 꽃만이 용호
농장의 마지막 봄을 위해 악착같이 노란 꽃을 피우고 있었다.
▲ 용호동의 작은 골목길을 따라 |
ⓒ 최승희 |
7.
섬 전체는 작은 공동체였다. 아직 한가운데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자촌들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좁지만 작은
마당엔 꽃들이 가득한 조그맣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가꾸어져 있었다. 마을 외곽에 버려진 가구공장들과 건물의
잔해들과는 달리 사람들이 살고있는 중앙부에는 오래 전부터 가꾸어 왔을 용호동의 사람사는 모습들이 아직도
건재하게 오랜 풍경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다.
한센병으로 인해 신체가 불편해 보이는 몇 분의 모습들을 대하고 그는 직접 용호동의 역사를 듣기 위해 어렵게
말 걸기를 시도해 보았으나 그 분들은 한결같이 옅은 웃음만을 만들어 줄 뿐 쉽게 말문을 열지 않으셨다.
그러다가 조그만 우물가 앞에서 아주머니가 요즘은 용호동이 개발이 된다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하셨다. 이제는 영원히 사라질 동네이니 그 모습을 담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얘기다.
어찌보면 나도 그런 낯선 방문객이었던 셈이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도 평생 한번 가 보지 않았다고 실토할
만큼 일반인들과 오랫동안 격리되어 있던 작은 마을 용호농장은 그렇게 개발의 막바지 기로에 서 있었다.
아주머니가 소개한 것처럼 용호동 마을은 아름다운 골목들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조망할
수 있는 바다의 풍경이 있고 사람들은 직접 손으로 돌담을 쌓아 거기에 담쟁이를 길렀다. 산 위쪽의 가구
공장과 집들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빠져나갔음을 보여주듯 적막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아마 마을
버스가 드나드는 작은 마을의 중심부도 이제는 떠날 채비를 하며 다가오는 개발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 마을버스 종점에서 |
ⓒ 최승희 |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은 그야말로 제2의 고향인 셈이지만 달리 보면 그네들의 삶의 유배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그는 울적한 기분을 떨쳐낼 재간이 없었다. 하루종일 마을을 둘러보다가 산중턱에 앉아
마을을 조망해 본다.
지난해 강원도의 작은 마을 철암을 방문했을 때 낯선 외부인들이 프로젝트 시티라는 명제를 걸고 마을을 복원
해 보려고 했던 시도들이 문득 다시 생각났기 때문이다. 철암 프로젝트는 지금도 진행중이겠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용호동의 낯선 방문자인 그도 이곳의 역사를 산 느낌으로 알지 못하고 그저 서성대는 주변인일 수밖에 없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여행이 파편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기인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 있었다. 원래 한센병은 음성으로, 신체접촉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지
않지만 일제강점시절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우리 땅의 한센병 환자들을 애초부터 일반인들과 격리하는
수용시설을 만들었다. 소록도가 그 시초인 셈이었다. 한센병은 완치가 가능한 법정 전염병이다. 하지만 일제의
이러한 격리수용은 직접적인 신체접촉으로도 병이 전염되지 않는 일반 한센병 환자들을 우리 주변에서 완전히
격리시키는 씻을 수 없는 역사를 만들고야만 것이다. 용호동 집성촌 역시 그렇게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소외
되어야만 했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 속에서 이루어졌으리라.
▲ 아직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거촌 |
ⓒ 최승희 |
7.
이제는 우리시대에 사라지는 동네, 그는 용호동의 이미지를 담았다. 동네엔 작은 개들이 사라질 골목을
아쉬워하며 연신 짖어대고 있었고 높은 산 봉오리에 설치된 확성기에서는 재개발조합에서 흘러나오는
안내방송으로 작은 동네는 더욱 축축하게 가라앉아 보였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쉬움을 표할
필요는 없지만 해방이후 만들어온 작은 집성촌이 어쩌면 구성원들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정착될
수밖에 없었던 한센병 집성촌은 이제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의 변화를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렇듯 사람들의 손길이 스며있는 작은 골목길들이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한다고 생각을 하니 그 때 그가
다시 돌아와 바라 본 오륙도의 풍경은 그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부산의 역사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보자고 아웅대며 개발논리로 무장한 한국근대사의 역사
위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던 부산 용호동의 역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마을 길만이 자근자근하게 대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 뿐, 아무도 나서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는 이곳을 말하고 있지는 않았다.
8.
사람답게 사는 법을 거부당한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밀려 조그맣게 꾸며져 온 산등성이의 작은 마을 용호동은
그래서 우리의 역사와도 전혀 무관하지 않은 동네였다. 그는 용호동의 가장 높은 곳에서 이제는 사라지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애잔함을 남겨주고 있는 용호동의 작은 길들을 자꾸 떠올렸다.
어울려서 살아가는 법을 잘 모르던 시기, 일단 내가 잘 살고 봐야만 했던 삶의 투쟁의 시기를 이제 갓 넘어온
우리네 인생에서 용호동의 작은 창문들과 골목길 위에 핀 작은 꽃들 그리고 담쟁이들은 그에게 많은 말들을
아끼고 있었다. 없앤다고 없어지지 않을 흔적들에 대해.
완치되어도 상처의 흔적은 남기고 살아야하는 한센병 사람들처럼 우리역시 개발의 논리와 흔적을 지워야만
편안해지는 열등한 신분상승의 억지속에서 그만큼 고통스럽게 스스로 없애버린 기억을 채우며 살아갈 것이다.
▲ 오륙도가 보이는 언덕위에서 |
ⓒ 최승희 |
9.
이제 그는 마지막으로 그 느낌을 정리하고자 애쓴다.
용호동은 즐거운 여행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작은 포구, 일상, 그리고 고단한 삶의 대화들이 가꾸어
낸 부산의 작고 외진 어떤 마을일뿐이다. 거기엔 소외된 역사의 흔적이 있었고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양계
를 하고 가구를 만들면서 삶을 이어온 사람 공동체였다. 이제 용호동은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를 뒤로 하고
근사하고 멋진 바다 풍경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론가 떠나고 또 다른 사람들이
그전에 이곳에 있었던 역사를 깔고 앉아 또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저 그는 대단찮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 여기에 이런 삶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아름다운 작은 마을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기록하고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 바로 그것뿐이었다.
그것을 여태 말로 풀지 못해 떠다니는 이미지로만 자꾸 풀어놓은 것이다.
난 생각한다. 그가 기록한 이미지들이 그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소중하게 만들어 놓은 삶의 잔재와 추억을
언젠가 떠올릴수 있는 작은장치가 되길 바란다고. 아마 그도 그 여행기에서 그바람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행을 끝내면서 궁금한 것 한가지, 그럼 난 누구인가?
" 난 당신이 나를 생각하듯 다른 사람이 당신처럼 느끼는 한 어떤 사람일 뿐이다 모든 사라지는 사물과 흔적
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는 당신과 내가 바로 나이다."
▲ 돌아오며 |
ⓒ 최승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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