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의 문제점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내용은 상당부분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가야사의 경우 거의 전부를 절사했다. 백제사의 경우도 쿠데타로 집권한 왕이 적어도 다섯이나 되는데 전부 정상적인 왕권승계로 기술하고 있다. 다섯 왕은 진사왕, 아신왕, 비유왕, 동성왕, 무령왕 등이다. 그리고 백제왕들 중에는 열도출신이 넷이나 있는데 이런 내용은 삼국사기에 안나온다. 열도출신 왕들은 비유왕, 문주왕, 동성왕, 무령왕이다. 동성왕은 가야왕족 김씨인데 백제왕족 여씨로 기술되어 있다.
신라사에도 석탈해 같은 경우는 쿠데타로 집권했는데 성씨가 다른 왕으로부터 양위 받았다고도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의 경우도 안원왕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그 뒤를 이은 양원왕은 왕자의 난에서 이겨 왕위에 올랐는데도 정상양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쿠데타와 왕자의 난이 일본서기에는 사실대로 나온다. 또한 석탈해는 연나라 용성국출신으로 발해만에서 이주해온 집단인데 왜국 다파나(대마도)출신이라고 기술하였고 지금의 영일과 월성에 있다가 일본 구주로 이주한 연오랑·세오녀에 대한 기록도 없다. 김수로왕의 아들·딸인 선견왕자와 묘견공주가 무리 3천을 이끌고 구주로 이주하여 야마다를 세운 기록도 안나온다.
신라에서 실성왕 2년에, 후에 눌지왕이 된 미사품의 아우 미사흔을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도 위사로 판단되고 그와 관련된 박제상전은 일본서기 신공기 5년조에 나오는 위사를 원전으로 하여 꾸민 열전으로 판단된다. 또 백제 아신왕 6년조에 나오는 전지태자 인질건도 보통의 인질건과는 성격이 판이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분쟁을 하는 아신왕에게 가야의 대화왕조 응신이 원군을 보내주는 조건으로 열도에 체류한 것이지 보통의 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삼국유사도 백제 동성왕이 열도출신이고 가야왕족이며 백제에 불교를 처음 도입한 왕이라는 것을 알고도 이를 설화로만 꾸미고 실사에는 내용이 없다. 삼국사기에서 이런 내용을 전부 절사해 버렸기 때문에 삼국유사조차도 실사는 싣지도 못하고 설화로 꾸며놓은 것이다.
백제불교는 침류왕 때 들어온 것이 아니다. 그 당시 침류왕은 반도 내에 있지도 못하고 열도에서 전사했다고 일본서기에 나온다. 삼국사기의 침류왕 불교도입기사는 서기에 침류왕이 전사하는 상황을 달리 꾸민 기사가 있는데 거기에 절을 짓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때의 침류왕의 분식이칭을 정확히 알아보고 위사인 줄 알면서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백제불교는 실제로 동성왕이 신라 소지왕의 도움을 받아 경주신라로부터 도입한 것이 처음이고 그것이 지금 전북 익산의 미륵사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동성왕을 등재한 서명기 11년 7월조에 보면 익산에 신수도를 건설하는 기사가 나오고 「서쪽백성은 궁을 짓고 동쪽백성은 절을 지었다」라고 나오는데 이때 동쪽백성이라는 것은 백제인이 아니고 백제의 동쪽에 있는 신라의 소지왕이 보내준 경주신라 기술자들이다. 삼국유사의 서동설화는 동성왕의 스토리이고 「동성왕이 말년에 웅진에서 익산으로 천도한 내용과 신라로부터의 불교도입, 제라동맹을 담은 설화」인 것이다.
삼국사기를 지을 때 백제본기는 허위로 꾸민 일본서기를 해독하여 그 사실을 많이 옮긴 것으로 나타난다. 표면적인 내용이 위사라는 것을 알고 그 이면에 숨긴 실사가 있다는 것도 알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심지어는 일본의 풍토기 내용을 약간 변조하여 옮긴 것도 있다. 일연도 일본서기를 해독하여 가야인이 대화왕조를 세운 것을 알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도 삼국유사에 나온다. 일본서기의 이면실사를 알았다는 강력한 근거로는 사기의 백제왕들 시호는 대부분 일본서기에 나오는 시호를 옮기거나 적당히 바꾼 것들이고 일부는 대륙사서에 나오는 왕의 휘와 일본서기에 나오는 열도시호를 합성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근초고왕, 근구수왕의 시호는 바꾼 것이고 그 전 선대의 초고왕과 구수왕의 시호는 近자만 떼고 그냥 적당히 갖다 붙인 것이다. 백제본기 근초고기 말미에 나오는 박사 고흥이 書記를 지었다는 기록도 일본서기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일본서기에 근초고왕을 등재한 이중기 4년 8월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중천황이 근초고왕을 등재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뜻이다.
백제왕들 중에는 일본열도에 원정 가서 전사한 왕이 셋이나 있는데 이것을 알고도 기술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근구수왕이 서기 384년 4월에 몰한 것으로 나오는데 일본서기를 해독해 보면 열도 미에[三重] 근방의 근강전투에서 서기 384년 2월 5일 가야군의 기습수공에 말려 전사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서기의 기원전 7세기 기록에 근강전투기록이 나오고 2월 5일에 전사했다는 사실은 근구수왕을 모델로 창작한 성덕태자 기록에서 정확히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백제본기 근구수 몰년기를 보면 2월조에 이상한 암호문이 나오는데 그 문장 속에 일본열도를 의미하는 日이 나오고 미에[三重]현을 의미하는 三重이 나오고 근구수왕을 은유한 宮中大樹가 저절로 뽑혔다[自拔]고 되어있다. 이것은 근구수왕이 일본열도의 삼중현 근방 근강에서 2월에 전사한 것을 알았다는 근거가 된다. 알고도 열도에서 있었던 모든 사실을 다 잘라서 버린 것이다. 일본서기의 분식기록들을 일일이 다 식별했었다는 뜻이 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近仇首王의 시호에 들어있는 仇首는 원수[仇]의 시조[首]라는 뜻으로 삼국사기 저자들이 붙인 시호로 판단된다. 원수[仇]는 倭寇를 가리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 근초고왕, 근구수왕이 일본왕실의 시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서기를 지은 사람들은 고귀하신[貴] 시조님[首]이라는 뜻으로 백제 근구수왕의 시호를 지었던 것이다. 또 근구수왕의 휘인 須를 넣은 시호도 있는데 역시 고귀하신[貴] 수님[須]이라는 뜻이다. 근구수왕의 열도시호는 貴首·貴須다. 또 신공기에 나오는 근구수왕의 이칭 久는 영원한[久] 시조님이라는 뜻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침류왕이 진사왕의 쿠데타로 패하여 전사했는데 이런 사실은 잘라버리고 도미열전으로 꾸며 맨 끝에 실어놓았다. 그마저도 왕실내부의 왕권쟁탈전을 여염집 부인의 지극한 정절을 강조한 스토리로 알아보기 어렵게 꾸며 실어놓았다. 都彌는 시호 枕流의 도미[枕]를 이두식으로 한자만 바꾼 것이다. 도미열전은 삼국사기 저자들이 지어서 실은 것으로 판단된다. 신라 내해왕세의 석우로를 모델로 하여 꾸민 물계자전의 주인공 역시 가공인물이고 이 열전은 석우로의 내해왕대의 활약만을 따서 물계자로 꾸며서 만든 설화다. 또 만주에 살던 동족인 말갈을 오랑캐 취급하고 가야인을 倭라고 한 것이 고려인들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왜는 전부 가야를 가리킨다. 반도에 있다가 열도로 건너가 버렸다고 우리민족으로부터 떨어낸 것이다. 말갈은 여러 설들이 많지만 부여로 판단된다.
기원전의 우리 역사도 거의 없다. 삼국사기보다 130년이나 늦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國祖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았다. 기원전 대륙에서 있었던 우리 고대인의 활동사도 없다. 예를 들어 고조선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예인 부여, 예맥, 옥저, 삼한에 대한 기록도 부실하다. 이것은 중국보다 우리 역사가 훨씬 뒤진다는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진한이나 변한이나 마한도 기원전에는 대륙에 있었다. 그런데도 반도로 이주한 후 반도 안에서 있었던 기록만 겨우 조금 기술했을 뿐이다. 그것도 연대를 후대로 낮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저런 근거를 대자면 훨씬 더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 든 여러 가지 근거만 가지고도 삼국사기에는 반도 밖의 연고를 끊기 위해 반도 밖에서 일어났던 많은 우리 고대인들의 활동기록을 알면서 의도적으로 절사하고 다른 기록들도 축소·왜곡하여 지은 잘못된 사서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대륙백제에 관한 기록이 대륙사서 아홉 종에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어렴풋이 짐작도 하기 어렵게 백제본기 동성기에 겨우 한 줄 나오고 대륙사서를 다 보고도 옮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동성기 10년조의 한 줄은 자치통감에 나오는 구절과 같다. 다만 최치원전에서 백제·고구려의 전성기 판도가 한 줄 더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해독하여 다 알았다는 것은 일본왕실의 시조가 근초고왕, 근구수왕이라는 사실을 다 알았다는 뜻이 되고 일본 고대의 대화왕조가 가야인이 세운 가야왕조라는 사실도 다 알고도 절사했다는 뜻이다. 가야사를 폐기한 것도 그 주력이 열도로 건너갔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고도 남아있던 일부가 신라에 흡수된 것이다. 가야가 신라에 투항한 것은 가야왕족인 동성왕이 백제왕족인 무령왕에게 암살당한 직후다.
고려인들이 삼국사기를 이렇게 절사, 축소, 왜곡하여 지은 것은 반도 밖의 연고를 주장하는 묘청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고 왕실 내분을 포함한 각종 내란을 방지하여 고려왕실을 보전하고 권신들의 지위를 오래도록 누리기 위한 목적으로 썼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도 그런 그 당시의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어서 수많은 사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서 빠진 사실 일부만 겨우 조금 더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의도적으로 삭제한 내용의 일부를 보완하는 데 의미를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한 것이기는 하다.
삼국사기는 이와 같이 절사, 축소, 왜곡되어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전부고 그것만이 옳다고 믿으면 잃어버린 고대사를 복원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삼국사기를 대부분의 연구가들이 관찬정사라고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지금의 통설은 반도사관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관찬정사일수록 문제가 되는 것은 통치이념에 반하는 모든 사실이 삭제된다는 것이다. 관찬정사라고 후세인을 위해서 고대에 있었던 사실을 충실히 알려주려고 썼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연구가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사내용 하나하나 잘 가려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사서는 위사와 실사가 섞여 있다. 따라서 위사와 실사를 가려보는 안목이 중요하지 관찬정사는 옳고 믿을 만하고 비정사는 믿기 어렵다고 하는 연구가가 있다면 그는 연구가로서의 기본적인 자질도 못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사의 복원은 아래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1) 왜곡된 史實을 바로 잡아야 한다.
2) 축소된 史實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3) 절사된 史實은 찾아서 보완해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하는데 있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도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부득불 우리 고대사 복원작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고 기타 우리의 다른 사서와 대륙측 사서, 일본사서에서 추려낸 실사를 더하여 보완,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의 실사를 분석해본 결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도 일종의 위서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리 고대인의 반도 밖의 활동사가 거의 대부분 절사된 위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서를 정사라고 금과옥조처럼 신봉을 하니 반도 밖에서 있었던 대륙관계사나 열도관계사의 설을 내세우면 오히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의 발로에서 견강부회한다며 극렬하게 비난만 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려인들이 반도사관을 주입하기 위해 교묘하게 반도내의 사건만 기술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어리석은 연구가들의 상투적인 행태다.
첫댓글 바른 우리의 역사를 빨리 회복해야 합니다. 역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강의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부식은 이미 유교사상및 사대주의에 깊히 물든 자로서 삼국사기의 저술 바탕을 보면, 단재선생이 지적한바대로 유교사상및 모화사상이 깔려있기 때문에 우리의 역사를 경시한 것이며, 또, 삼국사기 저술자체가 중국의 역사서를 참고로 하였기 때문에 모든 史實이 중국의 관점에서 기술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이전의 모든 기록들을 찾아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살려야 한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