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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0. (수)
금정문화회관 문화교실(지하) 19:00-21:00
2016 『길 위의 인문학』
부산사람, 인류의 진보를 묻다
1차 : 자유의 바다를 그리워한 음악가,
윤이상의 삶이 '유네스코 음악창의 도시'를 만들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언어로 동양과 서양에 향해 '대화'를 시작하였다.
모두가 함께하기를 원하는 것은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같이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닌 이유는 서로가 바라보는 지향점이 다르고, 이 지향점을 향하는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이를 다르게 해석하면 모두는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다르게 이야기 하는 이 언어를 어떻게 하면 공통된 부분이 많을 것인가 하는 부분이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문제 의식의 출발이자 결과물이다. 이에 윤이상 선생은 음악이라는 자신만의 언어를 통하여 동양과 서양의 만남을 위한 대화를 시도하였고, 이 대화는 동서양, 특히, 서양에서 인정 받으며 주목을 받게되어 20세기 한국의 작곡가로 세계에 자신의 예술혼을 전달하였다.
윤이상, Isang Yun
(1917. 9. 17. – 1995. 11. 3.)
출생 / 경상남도 산청
유년기 /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면
성장기 / 경상남도 통영군 통영면
학력
경상남도 통영보통학교 졸업
경상남도 통영 협성고등상업학교 중퇴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 졸업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 졸업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 졸업
독일 베를린 국립 예술대학교 음악대학원 졸업 (음악학 석사)
독일 튀빙겐 에베르하르트 카를스 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수상
1956년 서울시 문화상
1988년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1992년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공로상.
1995년 괴테 메달.
윤이상은
윤기현(尹基鉉)과 김순달(金順達)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보통학교를 졸업한 윤이상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영협성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결국 2년 후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1935년 상업학교에 진학하면 음악을 공부해도 좋다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일본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사는 지역에 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고 사회적, 정치적 의식을 갖게 됐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1939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치 도모지로에게 대위법과 작곡을 배웠다. 1941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 간 옥살이를 했다. 석방 후 다시 저항활동을 도모하다가 일본경찰을 피해 서울로 도피했다. 결핵으로 쓰러져 경성제대병원에 입원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김춘수·정윤주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부문을 맡았다. 이때 통영고등학교 등 통영의 거의 모든 학교의 교가를 작곡했다. (고려대학교 교가도 그의 작품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전쟁고아들에 대한 얘기를 듣고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일하다가 부산사범학교로 옮겨 음악을 가르치며 작곡을 했다. 이듬 해 8월 가곡집 《달무리》를 부산에서 출판했는데 여기에 실린 〈고풍의상〉이나 〈추천〉등은 60년대에 많이 불렸다. 1950년 1월 30일 같은 학교에 국어 교사로 있던 이수자와 결혼했다. 같은 해 8월 첫 딸 정이 태어났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의 전시작곡가협회에서 활동하고 부산고등학교에서 일하다가 1953년 휴전되자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대학교 예술학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4년 ‘전시작곡가협회’였다가 서울에서 새로 태어난 ‘한국작곡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글 《악계구상의 제 문제》를 썼다.
1956년 4월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 트리오》로 ‘제5회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습득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소프라노 유성녀
윤이상: 고풍의상(古風衣裳)
1956년에는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에 베를린으로 갔다. 그의 스승으로는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이 있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가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시킨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윤이상, "예악"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
1963년 4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 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6월 17일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969년 자살을 시도한 윤이상은 결국 음악 작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오페라 《나비의 꿈》을 썼다. 완성된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을 통해 독일에 전달되어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크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는데, 31회의 커튼콜을 받는 등 큰 호평을 받았다. 옥중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율》과 《영상》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축이 되어 200여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서명한 사람 중에는 페르 뇌고르, 루이지 달라피콜라, 죄르지 리게티, 아르네 멜내스, 카를하인츠 슈톡하우젠, 요제프 카일베르트, 마우리치오 카겔, 오토 클렘퍼러, 한스 베르너 헨체, 하인츠 홀리거 등이 있었다. 1967년 12월 13일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2월 25일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세계 음악가들의 격한 저항으로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가 작곡한 음악의 연주를 금지했다.
1969년부터 1970년까지 하노버 음악대학,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윤이상은
1971년에 서독에 귀화하였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C%A4%EC%9D%B4%EC%83%81
https://www.youtube.com/watch?v=r9EEnHGaTIs
( 사용자 요청으로 소스코드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
윤이상 작품 목록
한국 가곡
《고풍의상》
《달무리》
《편지》
《추천》
오페라, 성악곡
독창, 합창, 관현악을 위한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1964)
오페라 《류퉁의 꿈》(1965)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 1968)
혼성 합창과 타악기를 위한 《나비의 꿈》(1968)
오페라 《요정의 사랑》(1969, 1970)
세 명의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나모(南無)》(1971)
오페라 《심청》(1971, 1972)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막을 축하하였다.
목소리, 기타, 타악기를 위한 《가곡》(1972)
타악기, 오르간, 혼성 합창을 위한《도에서(道-)》(1972, 1982)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2)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1987) 경련 스님, 박두진, 김남주, 고은 등의 시를 가사로 사용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칸타타이다.
소프라노, 3성부의 여성 합창과 다섯 개의 악기를 위한 《에필로그》(1994)
독주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쳄발로를 위한 《소양음》(1966)
오르간을 위한 《음관들(陰管-)》(1967)
첼로를 위한 《활주》(1970)
오보에를 위한 《피리》(1971)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오르간을 위한 《단편》(1975)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대왕의 주제》(1976)
플루트 독주를 위한《살로모》(1976)
하프 독주를 위한 《균형을 위하여》 (1987)
플루트를 위한 《소리》(1988)
플루트를 위한 《가락》
리코더를 위한 《중국의 그림》(1993)
협주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5, 1976)
플룻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77)
클라리넷과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곡》(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1번》(1981)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2번》(1983-1986)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제3번》(1993)
실내악곡
현악 사중주 제1번
현악 사중주 제2번
현악 사중주 제3번(1959)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1959)
한국 정악(正樂)의 색채를 담았다.
실내 앙상블을 위한 《로양》(1962-1964)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歌詞)》(1963)
플룻과 피아노를 위한 《가락》(1963)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노래》(1964)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律)》(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影像)》(1968)
플룻, 오보에, 바이올린을 위한 《삼중주》(1972, 1973)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1972-1975)
세 성부와 타악기를 위한 《추억》(1974)
관악기, 하프, 타악기를 위한 《조화》(1974)
오보, 클라리넷, 바순을 위한 《론델》(1974)
실내 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단편》(1976)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1976)
오보에,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1979)
관악기, 타악기, 콘트라베이스를 위한 《무궁동》(1986)
관악기와 현악 5중주를 위한 《거리(距離)》(1988)
《실내협주곡 제1번》(1990)
《실내협주곡 제2번》(1990)
관현악곡
관현악을 위한 《바라》(1960)
대관현악을 위한 《교향악적 정경》(1960)
현악 합주를 위한 《교착적 음향》(1960)
관현악을 위한 《유동(流動)》(1964)
대관현악을 위한 《예악(藝樂)》(1966)
대관현악을 위한 《차원》(1971)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 음형들》(1972)
대관현악을 위한 《서곡》(1973)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환상 《무악》(1978)
관현악을 위한 《서주와 추상》(1979)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
《교향곡 제1번》(1982, 1983)
《교향곡 제2번》(1984) 《교향곡 제3번》(1985)
교향곡 제4번 《어둠 속에서 노래하다》(1986)
대편성 관현악과 바리톤 독창을 위한 《교향곡 제5번》(1987)
대관현악을 위한 《윤곽》(1989)
관현악을 위한 메멘토 《화염에 휩싸인 천사》(1994)
Exemplum, In Memoriam Kwangju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0074256
"윤이상 음악을 정치적 그늘로부터 자유롭게 하라"
한국사회에서 '경계'를 상징하는 두 사람이 있다. 윤이상과 송두율. 남과 북, 동양과 서양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던 이들은 모국에서 법으로 단죄된 경험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두 번째 인생을 독일에서 살게 된다. 그중 윤이상은 69년 조국에서 추방된 후 1995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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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이상-경계선상의 음악> 책표지 | |
ⓒ2005 한길사 |
1993년 윤이상 선생의 작품이 국내에서 해금되고, 2년후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윤이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일생을 조명하는 시도들이 있는가 하면, 음악적 성과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오고 있다. 최근 한길사에서 나온 <윤이상-경계선상의 음악>은 예술가 윤이상의 음악학적 연구서 중 하나이다.
지은이 윤신향은 1988년 <상처입은 용>이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윤이상을 접한 후 줄곧 윤이상 연구에 몰두해왔다. 윤신향은 기존의 연구가 국내에서는 한국전통음악이나 동양철학의 시각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독일에서는 악곡 분석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지은이는 "대표적인 작품 분석을 통해 동서문화의 정신적 상관관계와 거기서 파생하는 문화적 소통관계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 책은 "제3세계 인류집단의 제1세계로의 이주현상을 매개"로 한 <예악>을 비롯하여 <가곡> <영상> <무악>과 같은 60~70년대 윤이상의 대표작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단순히 음악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역사적 철학적 맥락에서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윤이상의 작품세계는 "인생의 절반씩을 두 세계에서 살았던 그의 문화적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창작은 베를린에서 이루어졌지만, 그의 전반기의 삶은 통영에서 펼쳐졌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 대로 윤이상은 경계선에 놓여 있었으나, '작곡적 중재'를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윤이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계 상황의 작곡가이다. 작품의 경계뿐만 아니라, 두 세계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로 인한 지각의 경계,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문화적 경계가 그것이다. 또한 현대사가 남겨놓은 남북의 이념적 경계도 그의 앞에는 가로놓여 있었다. 이 경계 상황은 곧 외세의 정치경제적 압력, 그리고 한국사회의 정체적 위기와 직결되며, 그는 작곡적 중재를 통하여 이들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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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
ⓒ2005 한길사 제공 |
아쉬운 건 이 책이 대중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책에는 음악을 전공하거나 서양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특히 총 4부 중에서 2부, 3부는 전문지식이 없이는 접근이 힘들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은이는 "윤이상의 음악적 사고를 근원에서부터 파헤치기 위해서는 두 음악세계, 즉 서양 현대음악과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고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인식의 바탕 위에서 쓴 책이기에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평가가 정치적 문제로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윤신향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한다. 그동안 윤이상은 예술가로서 평가받기보다는 '동백림간첩단사건'의 당사자로, 나라 밖 통일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더 알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지은이는 이제라도 동양과 서양, 남과 북이 윤이상 연구를 통해 현대사를 비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 나아가 그를 정치적 그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자고 결론을 내린다.
"윤이상의 음악을 남북이 공히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는 과거사 규명과 명예회복이 정치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분명하다. …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그의 예술정신에 대한 탐색을 소외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 불가피한 정치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음악을 정치적 그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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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피한 정치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음악을 정치적 그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사진은 '동백림간첩단사건'으로 법정에 선 윤이상. |
ⓒ2005 한길사 제공 |
"윤이상은 큰 인물이다. 그래서 그 전체를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어떤 사람은 통일운동가로서의 그를 얘기하고, 어떤 사람은 작곡가로서의 그를 얘기한다. 또 다른 사람은 현대작곡가인 그를 주목하고, 다른 사람은 민족음악가인 그를 주목한다. 그의 대강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그러저러한 여러가지 관심들이 모여서 하나의 큰 전체를 이룰 때에야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그는 크다.“
작곡가 이건용
"윤이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계 상황의 작곡가이다. 작품의 경계뿐만 아니라, 두 세계 사이의 시공간적 거리로 인한 지각의 경계, 그리고 이 모두를 포괄하는 문화적 경계가 그것이다. 또한 현대사가 남겨놓은 남북의 이념적 경계도 그의 앞에는 가로놓여 있었다. 이 경계 상황은 곧 외세의 정치경제적 압력, 그리고 한국사회의 정체적 위기와 직결되며, 그는 작곡적 중재를 통하여 이들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윤이상 경계선상의음악> 232p.
윤신향 지음. 한길사
"내 음악은 우주의 큰 힘, 눈에 보이지 않는 큰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윤이상선생의 묘비문
"윤이상은 고향인 통영에서 퍼 온 흙 한줌과 함께
여기 잠들어 있다."
통영문화협회 사진,
위쪽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음악가 윤이상, 세 번째 시인 김춘수,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화가 전혁림, 세 번째 시인 유치환.
첫댓글 동경할 수 있는 자유의 바다가 있기에
행복합니다.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
시원한 노랫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