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들의 문화사업 1
의료사업
최초의 국립병원인 광혜원은 알렌의 간청으로 정부의 허락을 받아 1885년 2월 25일 설립되었다. 광혜원은 곧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887년에 알렌이 워싱턴 국무성의 한국담당 서기관으로 임명을 받아 미국으로 떠나게 되자 후임으로 헤론(Dr. John H. Heron)이 제중원 운영의 책임을 맡았다. 이 해에 제중원은 구리개, 즉 현재의 을지로 2가로 이전하였다. 1888년에는 미스 호톤(Miss Dr. Lillian S. Horton)을 맞이하여 부인 병실을 증설했다.
1893년 선교연합회는 의료 사업을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부산, 평양, 대구, 선천, 청주, 강계, 전주, 광주, 혜주, 안동, 원산, 군산, 목포, 개성, 춘천, 인천, 진주, 성진, 함흥 등 전국의 각 주요 도시에 병원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1893년 11월 애비슨(Dr. O. R. Avison)은 제중원 원장이 되자 재정지원을 맡고 있는 장로교 선교회의 기관으로 체제를 변경하였다. 이때부터 제중원은 매달 연 500명의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으며 점점 불어나는 많은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서 병원을 확장해야 했다.
애비슨은 안식년에 뉴욕에서 열린 선교회의 석상에서 그 계획을 알리며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자 클리브랜드의 실업가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가 15,000불을 헌금했으며, 그 후 대지와 건물을 위해 3배나 되는 돈을 더 기증했다. 이리하여 1904년 9월 23일에 병원 건축을 위해 헌금한 이의 이름으로 명명한 세브란스 병원(The Severance Memorial Hospital)은 14개 분과를 가진 큰 병원으로 개원했다.
감리교 선교부는 1885년 9월 10일에 진료소를 설치하여 스크랜톤의 주도하에 의료 사업을 개시하였다. 스크랜톤은 한국으로 와서 처음 2,3개월 동안 광혜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하다가 자기 사저에 따로 병원을 마련하였다. 그는 정동에 새 건물을 마련하여 1886년 6월 15일에 정부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병원을 개원했는데 이것이 바로 시병원(施病院)이다. 시병원은 고종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스크랜톤은 서민들을 더 쉽게 상대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1894년 남대문 근처 빈민 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그는 또한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위한 병원 설립을 구상하고 미국 감리교 선교 본부에 여의사를 보내 주도록 요청했다.
1887년 10월 20일에 미스 하워드(Miss Dr. Meta Howard)가 입국하자 감리교 선교회는 그를 원장으로 세워 이화학당 구내에서 한국 최초의 부인전용병원을 시작했다. 명성황후 민비가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1892년 보고여관은 동대문에 분원을 설치하고 볼드윈 시약소(Boldwin Dispensary)라고 이름하였다. 1899년 가을에 병원 본원을 정동에서 동대문으로 이전하여 분원과 합하였다. 1909년 동대문 옆에 한국 최대 규모의 부인병원을 착공하여 1912년에 준공했다. 이 병원은 1897년 10월에 내한하여 5년동안 동대문병원에서 일하다가 순직한 여의사 해리스를 기념하여 '릴리안 해리스 기념 병원(The Lillian Harris Memorial Hospital)'으로 개칭하였고, 1930년부터는 동대문 부인병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감리교 의사들은 주로 지방에서 환자를 돌본 반면에 장로교 의사들은 서울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며 한국인의 의학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는 1896년 부산에서 의료 사업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평양에서는 북장로교 선교회가 의료 사업을 시작했다. 성공회는 1890년 인천에서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1895년 한국 전역에 콜레라가 만연하여 서울에서만 약 한 달 반 만에 5,000명이 사망하자 애비슨은 초교파적으로 치료반을 조직하여 전염병 퇴치를 위해 일했다. 정부는 애비슨의 지시에 따라 예방, 소독, 주의 사항 등을 포고하였다. 선교사들을 이렇게 성실하고 헌신적인 사랑의 봉사를 통해 국민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었다.
제중원과 알렌 (사진출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역사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