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당(羅唐)연합군의 백제공격이 660년3월에 시작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도 1592년 4월에 시작되었으며 모두 음력(陰曆)이다.
이 두 전사(戰史)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양력으로 보면 4-5월에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구한말 대륙의 조선을 방문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게 되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이해하게 된다.
이사벨라 버드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그녀의 기록에서 장강(長江-양자강)은 3월말부터 강물의 수위가 상승하기 시작하여 8월에 되면 최고점에 이르렀다가 12월부터 1월까지 수위가 서서히 낮아진다고 하면서, 이러한 수위의 변화는 일년내내 지속되는 현상이면서 여름에는 수면이 8-9m상승함에 따라 급류가 없어지고 평온하게 흐르는 물줄기로 변한다는 엄청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이에따라 강변에 살던 사람들은 집이 모두 물에 잠겨 뗏목을 타고 산에서 집 주위를 배회하며 살핀다고 또한 기록하고 있다.
현 필리핀과 대만 그리고 대륙 동남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왜국(倭國)의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침략의 서막을 4월에 잡은 것은 바로 동남풍이 불어 조선남쪽 부산(釜山)에 연한 장강의 수위가 서서히 상승함에 따라 배들이 손쉽게 장강으로 진입할 수 있고 또한 높은 수위로 인해 암초가 사라져 배가 전복될 위험이 없었기에 4월을 택했음을 우리는 이사벨라 버드비숍의 기록을 통해 간파해 낼 수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후반기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직접 조선에 오겠다고 했을 때 그의 가신들이 후년4월까지 기다리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봄철부터 시작되는 조수(潮水)에 의한 수위상승을 기다렸다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 되겠다.
이렇게 장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현 삼협(三峽)댐이 위치한 현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의 계곡지역이 견부(肩部)의 도움없이도 배가 부드럽게 거슬러 올라갔음을 또한 기록은 알려주고 있는데, 모두 이 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내용이자 전사(戰史)의 깊은 내막들이다.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역사(歷史)를 고증(考證)하고 그 강역(疆域)을 밝혀냄에 있어 이러한 지리적(地理的) 특성을 알아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함과 동시에 과학적 고증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일이기에 이후로도 많은 지리적 연구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사안이다.
당(唐)나라 수군(水軍) 또한 장강(長江)의 수위가 높아져 뱃길이 안정화된 봄철 4월을 공격시기로 정한 이유도 이제 명확해 졌다.
장강(長江)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동정호(洞庭湖)의 수위도 높아지고 이에 따라 금강(錦江)의 수위도 높아져 전선(戰船)이 조수(潮水)를 타고 바람과 같이 백제(百濟)의 부여(扶餘)에 다다랐던 것임을, 이러한 지리적 특성을 알고 있던 충신 성충(成忠)의 간언을 흘려버린 의자왕(義慈王)은 천추(千秋)의 한(恨)과 함께 대륙 한복판 백제(百濟)의 남부여(南扶餘) 역사를 비장감 어린 낙화암(落花巖)에 아로새기고 사라져 버렸음을 후인(後人)은 슬퍼할 따름이다.
2.
이전의 글에서 백제(百濟) 부여(扶餘) 위치를 살펴보았다.
부여의 위치가 확정되면 공주(公州)라는 충청도의 지명 또한 확연해 지는데 바로 부여의 북쪽에 공(公)이라는 한자와 모양이 일치하는 공산(公山)을 찾으면 될 일이다.
그 산의 뒤쪽이 계룡산(鷄龍山)이고 그 계룡산이 뻗어내린 산맥이 바로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된다.
공주(公州)는 백제 22대 문주왕(文周王,재위475-477) 때 처음 수도인 웅진(熊津)성이 되면서 백제의 핵심지로 떠오른다. 26대 성왕(成王,523-554)에 의해 천도할 때까지 5대 63년(475~538)간 나라의 수도였으며, 의자왕이 660년 나당연합군과의 전쟁때 사비(泗沘)를 떠나 웅진(熊津)에서 마지막으로 항거했고 이후 당(唐)나라는 웅진(熊津)을 백제 지역의 중심지로 파악해 이곳을 중심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했다.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626-681)이 나당전쟁에서 당군(唐軍)을 축출한 이후 신문왕 때 웅천주(熊川州)를 설치, 신라 경덕왕 때 웅주(熊州)로 개칭했다. 9주5소경 중 웅주(熊州)의 치소가 있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충청도(忠淸道) 전체를 관할하는 충청감영과 관찰사가 주재하던 중심도시로 '공충도', '공홍도', '공청도' 라는 말에서 모두 공(公)자가 들어간 것을 보면 공주(公州)가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7권 공주목(公州牧)에 보면, 공산(公山)에 대해 산의 형상이 공(公)자형으로 되었기 때문에 공산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래 지도에서 보면 명확히 공(公)자 형상을 한 산의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또한 계룡산(鷄龍山)은 정감록(鄭鑑錄)에서 말한 사람이 반드시 산다는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있는데 아래 지도를 보면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충분히 수긍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서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맥이 바로 차령산맥(車嶺山脈)이 되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이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말한 “차현(車峴)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해 달려 있다”는 문구는 바로 아래 지도의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좌측 이른바 한족(漢族)과 남만(南蠻)의 강역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을 일이다.
또한 지도를 보면 계룡산(鷄龍山) 계곡줄기의 모습들이 마치 닭발처럼 선명하게 보이며 길게 이어져 왜 계룡산이라 불렀는지 그 이유를 유추하게 해주고 있다.
이렇게 조선역사의 공주(公州)와 계룡산(鷄龍山)은 대륙 장강(長江)줄기에 연하고 우측으로 제주도(濟州島)에 접한 동정호(洞庭湖)의 서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내려뻗은 차령산맥(車嶺山脈)의 안쪽에 위치하면서 충청도(忠淸道)라 불리고 또한 동정호의 서쪽에 있다하여 호서(湖西)지방이라 불리었음을 정확히 고증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또하나 명확히 할 것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란 책은 조선의 역사강역을 고증하는데 아무 쓸모없는 종이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명확히 지명의 역사를 싣고 있어 조선사 강역(疆域)을 찾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고금지명대사전은 한족(漢族)역사를 규정짓기 위해 만든 날조된 거짓의 책이었음을 인지한다면 더 이상 우리 조선의 역사를 찾고 고증(考證)하는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을 펼쳐놓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어리석은 행위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모택동의 간교한 술책에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안되겠다.
고금지명대사전이 대륙조선사(大陸朝鮮史) 고증의 기본서적으로 인식되던 시절 대륙 한양성 하나 찾아내지 못했던 사실이 이의 한계성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이 책을 가지고 공부하다보면 역사고증은 어느새 다시 반도조선사로 귀결되게끔 만들어져 있다.
3.
위의 내용을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이 볼 수 있다.
2022.06.22.松溪
첫댓글 자료ᆢ 고맙습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40년전 우리나라 지도책에서 보였다가 사라진 차령산맥.....
다음 논문이 기다려지네요
위성지도로 보니깐 公 자가 딱 보이네요. 공산 그 자체네요. 감사합니다.
세계테마기행에서 장자제는 여러번 봤는데 장자제시는 조선의 어디였는지 몹시 궁금해집니다.
구글어쓰에서 보기 https://bit.ly/3bpQjZ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