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최후를 스스로,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문제...
얼마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의 안락사 뉴스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요 며칠 일본 영화 <플랜 75>를 소개하는 기사가 언론에 많이 노출되고 있군요.
이 영화는 2022년 6월에 개봉(일본에서)되었던 영화로 최근(2024.2.7)에 한국에
개봉되어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영화에 대한 글이 일찍이 우리 <<공부방 23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공부방의 해당글을, 싣고자 합니다.
긴 글이라 끊어서, 나누어 올립니다.
--------<<일본불교사공부방 23호>>2022.11.1발행---------
「PLAN75」& 등등(etcetera)
한기표 / 일본불교사공부방 독자
1. 「PLAN75」
츠노타니 미치(角谷ミチ). 올해 78세.
일자리를 잃었다. 남편과 사별 후 생활의 버팀목이 되어온 호텔 객실 청소부에서 잘린 것이다. 호텔 측에서 밝힌 해고 사유는, “노인에게 왜 일을 시키느냐?”라는 항의 때문이란다. 실제로 그러한 항의나 투서가 과연 있었을까, 자못 미심쩍어 하는 동료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사용자 측에서 그렇다고 하는데…
가진 돈도, 의지할 가족도 없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무력하고 쓸모없어진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뿐이다. 사회 분위기 ―‘플랜75’가 정착되어가는― 에 더욱 좌절한다. 일자리 주선 부처 담당자의 권유(충고?)대로 이제 그녀 앞에 놓인 선택지는 ‘플랜75’밖에 없음을 절감한다.
‘플랜(プラン/plan)75’는 무엇인가? “75세 이상 노인들에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 지원한다”는 모토를 내건, 정부 차원의 정책이다. 사후에 집안 정리도 책임져 줄 것이며, 화장이든 매장이든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죽을 권리(?)를 보장하고 지원해 준다는 제도다. 고독사의 불안도 없어진다.
‘플랜75’ 신청자들을 위해 24시간 가동되는 상담 콜센터 직원은 “마음이 변해 본인이 원하면 언제든 중지 가능”하다고, 안심시키는 친절한 멘트를 잊지 않는다(그런데 이 말이, 정부나 공무원의 강제나 권유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의 자발적 선택일 뿐 어떤 비자발적 개입도 없노라고, 거듭 다짐받는 듯 느껴지는 것은 나의 기분 탓인가?).
그러나 화장장 인근 시설에서 독극물에 의해 최후를 맞을 것이며, (사후 집안 정리라는 명분으로) 남은 가재도구나 유품들은 리사이클 업자들에 의해 착복되거나 이리저리 마음대로 처분될 수도 있다는 등의 정보는 굳이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신청자 쪽에서도 굳이 묻지 않는다.
정책이 시행된 지 3년이 흘렀다(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2025년).
처음에는 이 생경하고도 해괴한 정책에 대한 반감과 저항들이 적지 않았으나 어느새 일본 사회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매년 급증하는 노령자 사회복지비용과 연금의 부담에서 손자(미래 세대)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선택할 필요가 있지 않나?”라든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죽을 수 있으니 다행 아냐?”라는 의식이 정착되어가는 것이다. 초창기에 날달걀 투척을 당하는 등 곤욕을 치르던 공무원들도 이제 당당하게 거리와 공원으로 다니며 노인들의 참여를 권한다.
길거리 대형 전광판에서는 연신 “(플랜75를) 선택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는 공익광고가 흘러나온다. 익숙해진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풍경이다. 시청 등 관공서에 설치된 창구뿐 아니라 신청자 편의(?)를 위해, 시내 곳곳에 코로나 선별진료소처럼, 임시 천막을 치고 ‘플랜75’ 신청서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신청서를 낸 사람은 10만 엔의 위로금을 받는다. 이 돈으로 생애 마지막 온천 관광을 가는 노인들로, 여행사는 호황을 누린다.
급기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정부 당국자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플랜75’의 호응에 힘입어 ‘플랜65’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아… ‘plan65’가 정착되면 그 다음은 ‘plan55’를 검토하게 되는 수순인가? 바야흐로 정부 차원의 안락사(?)제도가 공공연히 용인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대략 소개하자면 「PLAN75」는 이런 내용의 영화다. 감독은 하야카와 치에(早川千絵 1976-), 올해 칸영화제(75회)에서 카메라 도르 특별 언급상(Camera d’Or Special Mention Award)을 수상해 주목을 받았다(2022.6.17.).
아직(2022년 8월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개봉되지 않았지만 여러 언론에서 회자되고 있다. 영화 관련 프로그램보다 사회문제나 경제 관련 코너에서 「PLAN75」가 종종 다루어진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문제는 일본만의 일이 아닌, 우리에게도 이미 당면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하야카와 감독은 방송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키워드는 고령화 문제”라고 밝힌 바 있다).
참고로, 2019년에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2020년생) 일본인의 기대수명(簡易生命表)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성별 | 평균 수명 | 건강 수명 |
남 | 81.64세 | 72.68세 |
여 | 87.74세 | 75.38세 |
2021년 9월의 총무성 발표에 의하면 일본의 75세 이상 인구는 1,880만(남자 742만/여자 1,138만)명으로 전체 인구(1억2,522만)의 15% 이상을 차지한다. 이 말은 곧 ‘플랜75’가 영화적 상상력에 그치지 않고 현실화된다고 가정할 때, 현재 인구의 15% 이상이 순간 삭감될 수도 있다는 단순 계산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통계청(KOSIS) 발표에 의하면 한국인의 기대수명(2020년생)은 남성 80.5세, 여성 86.5세, 건강수명은 남녀 평균 66.3세다. 정부 차원의 온갖 지원과 대책에도 불구하고 출산 인구는 나날이 감소하고 있는 반면, 급증하는 고령 인구로 인한 보건 의료비와 사회복지비용 폭증, 연금 고갈 가속화, 그로 인한 미래 세대의 부담과 노소(老少) 간의 갈등 등, 고령화 사회 문제는 특정 국가나 사회의 차원을 넘어선 전 세계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장수, 초장수는 이미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볼멘소리들을 공공연하게 하는 세상이다. 우리 언론에서 이 영화 「PLAN75」를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며 일본 외에도 프랑스, 카타르, 필리핀 같은 나라가—흥행이 보장되는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아닌, 사회문제를 다룬 휴먼드라마 장르인—이 영화에 제작비를 댔다는 사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하게 되돌아보자. 이것이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일까? 요즘처럼 방송만 틀면 100세 시대를 외치며 인생은 70부터라 호언하지도 않았고, 생산인구 대비 노령인구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한 미래 세대의 부담이 현실화되지도 않았고, 급증하는 노령인구로 인한 노인복지비용의 지출과 연금 고갈 가속화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지도 않았고, 그 무엇보다도 평균 수명이 훨씬 짧았던 그 옛날을 살았던 노인들의 세상은 어떠했는가?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고로 인간에게 죽음은 늘 절대적 필연이 아니었던가?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 중에서도 이쯤에서 떠올리게 되는 일본영화 한 편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 영화의 이름이, 우리의 ‘고려장(高麗葬)’ 설화와 흡사한 이야기를 다룬, 「나라야마 부시코」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지인이 카톡을 보내왔다.
“그거 봤어? 요즘은 유전유효(有錢有孝) 무전무효라네.”
“(미리 자식에게 재산을) 안 주면 시달려 죽고, 찔끔찔끔 주면 졸려서 죽고, 한꺼번에 다 주면 굶어 죽는다네. 좀 서글프네.”
결국 그와 나는 “비전박토 땅뙤기 한 뼘 물려줄 것 없는 우리 같은 늙은이는, 그럼 자식들한테 미안해서 죽어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위로를 나누었다.
세태를 반영한 문장과 함께 그가 보내준 인터넷 기사 링크를 따라 들어가 보니 「노령화시대, ‘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라는 제하의 기사(2022.8.7.동아일보)였다. 실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건—오래 어머니 간병에 지친 딸이 저지른 간병 살인—을 계기로 쓴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서(이제는 부모를 버려야 한다 시마다 히로미, 지식의 날개) 소개를 겸해서, 쓴 기사인 모양이다. 기자의 말대로, 부모 자식 서로가 이제 전통적인 유교 관념에 기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타이밍 한 번 절묘하지! 부모를 갖다 버리는 「나라야마 부시코」 이야기를 하려던 이참에 이런 카톡이라니… 그렇지, 바로 눈앞에 닥친 나의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