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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67
1232독, 돌아갈 귀(歸) - 네 번째
어제 정토문헌학회 공부방에서 제2회 월례발표회가 열렸습니다.
<<유심안락도사기>>를 통해 보는 발보리심(發菩提心)과 칭명염불(稱名念佛)의 관계를 주제로, 효신스님께서 발표하시고 미탄스님께서 논평하셨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진지한 대화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무량수경>> 퀴즈 – 1’을 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답을 보내주셨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답을 맞춰 주셨습니다. ‘견경(見敬)’의 목적어는 그 문장 표면에는 안 나타나지만 문맥을 통해서 본다면 ‘불(佛)’입니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법(法)’으로 보는 의견 역시 없지 않았습니다. 의적(義寂)스님이 그러하였습니다. 범본을 살펴보면, ‘견경’에 해당하는 부분은 ‘선서(善逝)를 염하면서’라는 말로 나옵니다. ‘선서’는 부처님의 별명이지요. ‘염하면서’라는 말을 <<무량수경>>에서는 ‘견경’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무량수경>> 퀴즈 – 2’ 문제 드립니다. <<무량수경>> 상권에 보면, 사십팔원과 사서게(四誓偈)가 나오고 법장비구의 수행 시절을 말씀하는 중에 ‘불생욕각진각해각(不生欲覺瞋覺害覺), 불기욕상진상해상(不起欲想瞋想害想)’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각’과 ‘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차이는 없는데 그저 반복했을 뿐일까요?
갖고 계신 <<무량수경>> 번역본이나 강의본이 있다면 먼저 확인해 보시고 ---, 아, 인터넷 검색도 좋겠습니다. 또 주변 도반들끼리 상의해 보거나, 다니시는 절의 스님께 질문을 해서라도 답을 알려주십시오.
이 ‘퀴즈’는 신란스님께서 <<교행신증>> 제3 신권에서 인용한 경문을 우선적으로 번역하고 해설하는 원고를 작성한 뒤, 여러분들께 설문(設問)하는 것입니다. 상품은 없지만,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이제 ‘오늘의 「정신게」’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역시 고딕으로 크게 키워놓은 ‘돌아갈 귀’에 주목해 주십시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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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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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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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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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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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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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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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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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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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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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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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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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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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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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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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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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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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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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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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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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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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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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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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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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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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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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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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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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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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교행신증』 제2권)
네 번째 ‘돌아갈 귀’는 담란스님 찬탄 부분에서 나옵니다. 담란스님에 대한 신란스님의 존경의 정도는 그분에게 3송을 바치고 있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용수나 천친과 마찬가지로 ‘보살’로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세 송 중에서 첫 번째 송에 ‘돌아갈 귀’가 나옵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이 첫 번째 게송은 담란스님의 삶과 관련되는 내용입니다. 담란스님은 중국 역사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에 태어나서 활동합니다.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 시대가 끝나고 수나라가 들어오기 전의 시대입니다.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제6권에 실린 담란 전기(傳記)에 따르면, 성씨는 알 수 없지만 집이 오대산 인근이었다고 합니다. 출가는 아마도 15세(志學) 이전에 하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분이 공부한 전공분야입니다. “사론(四論)과 불성(佛性)에 더욱이 깊이 연구하는 바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사론은 바로 용수보살의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그리고 용수의 제자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이 셋에 <<대지도론>>을 포함합니다. 앞의 세 가지 론만을 부를 때는 삼론이라고 합니다. 삼론종이라는 종파가 바로 그 세 가지 논서를 연구하는 종파입니다. 담란스님을 이해하는 데는 일단 ‘사론’ 전공이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아니, 어쩌면 전기(轉機)가 찾아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대집경(大集經)>>을 읽는 중이었습니다. <<대보적경>>, <<대집경>>, 이런 경전들은 말이 경이지, 하나의 경이 아니라 사실은 ‘경전 모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과 뜻이 너무나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통탄하면서, 주석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병이 찾아왔습니다. 아마 무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까요? 일단 먼저 몸을 추슬러야 할 것입니다. 담란스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뒤에 다시 불법을 연구하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질병을 치유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속고승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숨이라는 것이 위태롭고 약해서 일정하다고 할 수 없으니, 본초(本草, 약초) 를 다루는 여러 경전에서 올바른 치료법이 다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불로장생하는 – 인용자) 신선들이 가끔 나타났었다. 마음과 원하는 바가 가리키 는 바는 이 (신선들의 불로장생하는 – 인용자) 법을 닦는 것이다. 결과를 얻고 난 뒤에 불법을 숭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렇게 담란스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가는 인물이 바로 도홍경(陶弘景, 456-536)입니다. 호가 ‘화양은거(華陽隱居)’라서 속고승전에는 ‘도은거’라고 나옵니다. 중국에 여행 갔을 때 사가지고 온 간명 도교사전을 찾아보니, 도홍경은 도교와 불교를 함께 숭상했고, 본초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합니다. 본초학은 한방 약학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한의학 발전에도 기여한 것이 크다고 평가받습니다.
그런 만큼 담란스님이 찾아갈 만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로부터 ‘선경(仙經) 10권’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경’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는 비술을 담은 책으로 생각됩니다. 이를 가슴에 품고, 담란스님은 돌아옵니다. 이제 그 비술대로 수련하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낙양(洛陽)으로 가는 길에 보리류지(菩提流支) 삼장을 만납니다. ‘중국의 삼장 보리류지(菩提流支)’라고 하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중국’은 아마도 ‘인도’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속고승전>>이 전하는 담란스님과 보리류지 삼장의 문답을 옮겨봅니다.
담란: (인도에서 온 – 인용자)불법 중에도 장생불사하는 방법이 있어서 이 땅의 선경보다 뛰어난 점이 있습니까?
보리류지: (땅에 침을 뱉으면서) 이 무슨 말입니까? 서로 비교가 안 됩니다. 이곳에 어디 장생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비록 장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잠깐 죽지 않는다 뿐이지 마침내는 다시 삼유(三有, 三界)를 윤회하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보리류지 삼장은 담란스님에게 <<관무량수경>>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 :
이것이 참으로 신선되는 방법입니다. 이에 의지하여 수행한다면 장차 생사해탈 을 얻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마침내 담란스님께서는 도교의 신선술에 의지하려던 마음을 버리고서 불교로 돌아옵니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것도 삼론종이나 사론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토불교로 귀의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스님이 “갖고 있던 신선되는 비법(仙方)을 불태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속고승전>>이 전하는 이야기를 근거로 해서 신란스님은 “삼장류지수정교, 분소선경귀락방”이라고 찬탄한 것입니다. ‘락방으로 돌아오다’는 이야기는 락방, 즉 극락을 말하는 정토불교로 귀의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리류지 스님이 ‘퉤’하고 땅에다가 침을 뱉었다는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그 침뱉기야말로 위대한 탄이초(歎異抄)입니다. 외도(外道)의 신선술에 의지하면서, 오래 살고 싶고, 장생불사하는 신선이 되려는 그 마음에 침을 뱉은 것입니다. 탄이하지 않고서는 불법은 지켜지지 않습니다. 한번 볼까요? 이렇게 탄이를 받았던 담란스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 분인지 말입니다.
처음에 (천친보살이 – 인용자) ‘귀명무애광(歸命無碍光), 원생안락국(願生安樂國)’이라 하였다. 이 중에 의혹할 수 있다. 의혹하여 말하기를, “생이라는 것은 유(有)의 뿌리이며, 뭇 누추한 것들의 근본이다. (이생의 – 인용자) 생을 버리고 (극락의 – 인용자) 생을 원한다면, 생이 어찌 다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저 정토를 장엄(莊嚴)한 공덕의 원만함을 관찰해야 한다. 저 정토는 곧 아미타여래의 청정한 본원의 무생지생(無生之生)이니 (욕유, 색유, 무 색유의 – 인용자) 삼유의 허망한 생과는 같지 않다. 생이라는 것은 진실로 무생 이니, 생이 어찌 다하겠는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몸이 아파서, 신선술을 익혀서 건강을 회복한 뒤에 불법을 숭상하겠노라 말하던 그 사람이 하는 말과는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이 ‘무생지생’이라는 말이고, ‘생이 진실로 무생’이라는 말입니다. 극락의 왕생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생을 이렇게 말하는 데, 그의 본래 전공이었던 삼론, 사론의 힘이 있다는 점은 두 말할 나위 없습니다. 삼론이나 사론은 공(空)을 말하는 불교 아닙니까. 공을 말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생은 곧 무생의 생이라서 생은 곧 무생입니다. 따라서 무생의 생은 다함이 있을 수 없는 생인 것이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담란스님의 영향을 우리의 원효스님 역시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량수경종요>>의 대의(大意)에서 “무생임을 깨닫는 까닭에 생이 아님이 없다(悟無生故, 無所不生)”이라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담란스님에 의해서 불교의 극치가 정토 안에서도 구현되었습니다. 참, 잊을 수 없는 것은 보리류지 스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인연으로 담란스님은 마침내 보리류지 스님이 번역한 천친보살의 책 <<무량수경우파제사원생게>>, 줄여서 <<정토론>>(내지 <<왕생론>>)에 주석을 합니다. <<무량수경우파제사원생게주>>, 줄여서 <<정토론주>>(내지 <<왕생론주>>)를 쓰시는 것이지요. 위에서 인용한 ‘무생지생’ 이야기도 바로 그 <<정토론주>>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정토불교의 역사에는 두 분의 보리류지 스님이 있습니다. 지금 담란스님과 인연이 있는 보리류지는 菩提流 ‘支’라 씁니다. 200년 뒤, 당나라 때 <<대보적경>>을 번역한 보리류지가 또 있습니다. 그분은 ‘志’라고 씁니다. <<무량수경>>의 이역본 중 하나로 <<무량수여래회>>를 말씀드릴 때가 있습니다만, <<무량수여래회>>는 바로 <<대보적경>>을 이루는 하나의 경전으로서 菩提流志스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보리류지는 범어로는 Bodhiruci이고, 뜻으로 번역하면 도희(道希)입니다. 북인도 출신. 菩提流支스님은 527년 북위에서 왕생하시고, 菩提流志스님은 727년 당나라 때 왕생하십니다.
이제 편지를 마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여름 날씨에 건강하십시오. 나무아미타불
(2024년 6월 29일) 김호성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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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퀴즈 <<무량수경>> 퀴즈 – 2 문제입니다.
<<무량수경>> 상권에 보면, 사십팔원과 사서게(四誓偈)가 나오고 법장비구의 수행 시절을 말씀하는 중에 ‘불생욕각진각해각(不生欲覺瞋覺害覺), 불기욕상진상해상(不起欲想瞋想害想)’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각’과 ‘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차이는 없는데 그저 반복했을 뿐일까요?
갖고 계신 <<무량수경>> 번역본이나 강의본이 있다면 먼저 확인해 보시고 ---, 아, 인터넷 검색도 좋겠습니다. 또 주변 도반들끼리 상의해 보거나, 다니시는 절의 스님께 질문을 해서라도 답을 알려주십시오.
이 ‘퀴즈’는 신란스님께서 <<교행신증>> 제3 신권에서 인용한 경문을 우선적으로 번역하고 해설하는 원고를 작성한 뒤, 여러분들께 설문(設問)하는 것입니다.
상품은 없지만,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무량수경>>퀴즈 -2에 대한 (2024.7.14.편지4-68에 보내오신) 편지의 정답부분을 부기합니다---------
지난 편지에서 내드렸던 ‘<<무량수경>> 퀴즈 – 2’도 많은 분들이 호응해 주셨습니다.
퀴즈가 있어서 편지가 더 재미있어졌다고 말씀해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퀴즈 – 2’는 다소 어려웠습니다.
일단, ‘각’은 ‘깨달을 각(覺)’입니다.
하지만, ‘욕각진각해각욕(欲覺瞋覺害覺 -한자첨기, 동행이인 )’에서는 ‘깨달음’의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깨달음은 좋은 뜻인데, 어찌 욕심이나 분노나 남을 해치려는 마음과 어울릴 수 있겠습니까.
‘각’에는 감각이나 지각의 뜻도 있습니다만, 불교에서는 표면적이라 할까, 아니면 일회적이라 할 까, 그렇게 깊지 않게 슬쩍 인식하는 것을 ‘각’이라고 합니다. 범어로는 ‘vitarka’라고 합니다.
그 반면에 ‘상’은 ‘생각 상(想)’입니다.
범본에서는 ‘saṁjñā’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금강경>>에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我相人相壽者相 -한자첨기, 동행이인 ) ’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상’과 같은 의미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서로 相’이라 되어 있는데, 그 뜻은 ‘생각할 想’과 같은 뜻입니다.
이때의 ‘생각할 상(想)’은 깊은 생각입니다. 관념이나 철학이나 주의주장이나 이념을 뜻합니다.
그러니 욕각은 그저 지나가는 생각으로 욕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욕상은 욕심을 내는 것이 하나의 인생철학이나 가치관이 되어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그 어느 쪽이든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으므로, 이 ‘각’과 ‘상’의 두 구절을 하나로 합쳐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상 편지4-68 모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