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청년 백수가 아줌마에게 주는 조언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을 읽고
김은희
2015년 1월 29일 저녁 7시 30분, 군포중앙도서관 세미나실.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의 연속 등장에 현기증을 느꼈다. 분명 한국어인데도 한 마디도 이해되지 않는 개념들 - 리좀, 영토화-탈영토화, 도주선, 얼굴성, 기관 없는 신체, 기계, 되기, 리토르넬로, 매끈한 것과 홈 파인 것 등 - 때문에 흡사 외계어가 둥둥 떠다니는 우주선 안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그 날은 나무인문학회 세미나 첫 날, 들뢰즈와 가타리가 쓴 <천 개의 고원> 서문과 1,2장을 발제자가 요약하여 읽어주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책도 읽지 않고 간 것이 화근이었다. (책을 읽고 갔어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겠지만.)
작년과 그 이전 해, <이기적 유전자>와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어 내고 아마도 지적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나보다. 혼자 읽기 어려운 책 – 예를 들어 <논어집주>, <총균쇠> 등- 함께 읽어 나가는 인문학회 신입회원 모집공고를 보고 ‘나도 이제 수준을 높여야 할 때가 왔다’며 떡하니 신청을 한 것이었다. 질 들뢰즈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형국이었다. 2시간 반 동안 마치 중학교 1학년 행렬을 겨우 배운 녀석이 미분과 적분을 설명하는 수학 선생님 앞에서 입을 헤 벌리고 넋이 나가 있는 모양새로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만 둘까? 도대체 이 어려운 책을 뭣 하러 공부를 해? 시험 볼 것도 아닌데......아니야, 나만 모르는 게 아니었어. 인문학회 기존 회원들도 이해가 안 된다고 난리였잖아. 한 챕터씩 꼭꼭 씹어 읽으면 하나라도 건지는 게 있겠지.’ 인문학회에 남기로 즉 <천개의 고원>을 읽어 내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시작했으니 끝마쳐야 한다는 강박때문인지, 어떤 매혹적인 끌림을 느낀 건지 모르겠지만 인생에 수많은 만남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책과의 만남이었다.
책이 너무 어려우니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읽은 책이 <리좀, 나의 삶 나의 글>이다. 이 책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남산강학원’에서 인문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칭 청년백수 김해완이 <천개의 고원>을 15주에 걸쳐 읽으며 변화된 심경과 삶을 적어 나간 글이다. 어찌 보면 분량이 많은 <천개의 고원>의 독후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독후감에 대한 독후감을 쓰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이 책의 저자가 1993년생이라는 데 놀랐다. 그러나 책을 읽어나가면서 철학서의 개념 하나하나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생각하는 치열함에 더욱 놀랐다. 초반엔 대학이라는 정규코스를 거부하는 용기가 부러웠지만 ‘반복’되는 공부라는 일상을 글쓰기를 통해 ‘차이’로 만들어내는 그녀만의 리듬이 대단하다고 여겨졌다.
팔과 다리와 눈, 코, 입이 있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조건과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에 내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 있기에, 움직이기에, 단 한순간도 욕망하기를 멈추지 않기에 나는 ‘나’라는 지속성을 계속 획득한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나 때문에 애가 끓고 할머니가 돈에 집착하실 때 이 힘 모두가 그녀들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확신한다. 절망하는 사람, 분노하는 사람, 세계 멸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욕망하는 기계를 작동시키고 있다. p.109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공부하라고 대안학교를 보냈는데도 중간에 자퇴를 하고 나온 딸, 중졸 백수를 자처하며 서울에 따로 살면서 취업준비도 하지 않고 책만 들여다 보고 있는 딸을 생각하며 어느 엄마가 애가 끓지 않겠는가. 그런 엄마의 속상함과 불안을 통해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를 보는 그녀의 시각에는 분명 비범함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가장 본받고 싶은 저자의 태도이다. 내가 밥벌이에도 소용없을 철학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저자처럼 생각해보려 한다. 철학자가 일생을 거쳐 만들어낸 개념 하나가 내 일상에 반짝 하고 들어와 늘 보는 내 시각을 비틀어 다르게 생각할 여지를 준다면, 그래서 들뢰즈의 표현대로 하나의 도주선을 그리게 된다면 분명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도주선은 일상을 벗어난 그 무엇이 아니라, 기존 배치를 당연하게 생각하며 그 배치에 일상으로 묶으려 하는 관성을 뚫고 나가는 힘이다.
“애들 영어는 어떻게 시키고 있어? 안 하고 있다고? 이제 4학년 되는데? 하이고! 영어는 초등학교 때 시켜도 늦어요. 나중에 어쩌려구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어?”라며 사교육을 부추기는 이웃집 엄마(내겐 다행스럽게도 없지만)의 말에 흔들려 당장 영어학원을 알아본다면 그것은 대한민국의 교육의 배치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익숙한 감정 - 불안을 조성하는 코드-코드화를 떨쳐내고 아이의 내재적 능력과 미래를 믿는 (내 경우엔 너무 믿어서 탈이지만) 마음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당당히 도주선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도주선을 타다보면 미지의 땅을, 그리고 감각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게서 달아나는 것이다. 익숙한 감각과 계속 작별하는 것이다. 도주선은 이 끈질긴 노력 속에서만 길을 열어준다. 도주는 일상의 잡다한 것들 속에서 도주를 ‘포착’하고 그것들을 ‘이음으로써’ 세계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그리는 작업이다. 한 땀 한 땀. 지각할 수 없는 시간을 내 삶으로 조금씩 끌어들이면서. 이때 지각은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 기예가 된다. 도주자는 영토에 머무르되 의존하지는 않는다. 도주선을 그리려면 영토에 기대려는 마음 자체와 절연해야 한다. 그래서 도주자는 일탈자와 다르다. 일탈자가 무조건 제도권의 반대노선을 탄다면, 도주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낯선 영역을 향해서 신중하게 나아간다. p.152
또 하나 책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글쓰기이다. 삶을 다르게 살기 위해 쓰기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주장한다.
권태, 시시함, 별 볼 일없는 자신과 빛나는 삶의 순간까지 모두 부정하지 않고 내 삶으로 긍정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까지 연구실에서 배운 것은 이것 하나다. 바로 글쓰기다. 굴곡 없는 일상을 경험하면서, 나는 역으로 왜 ‘쓰기’가 ‘살기’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았다. 일상은 항상 반복된다. 이 반복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시간은 당연히 점점 더 무뎌지고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이 일상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포착한다. 삶에서 재료를 끄집어 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조형해서, 그 결과물을 삶에게 다시 선물로 돌려주는 과정이다. 이 사이에서 타자와 만날 수 있는 여백이 생기게 된다. p.282
동네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책 좀 읽는다는 나. 그러나 읽는 책에 비례하여 삶이 변하지 않았던 것은 일상의 반복을 차이로 바꾸는 글쓰기가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독서도 상당히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천개의 고원>을 읽으려 애쓰면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나 쓰는 작업 없이 독서에 그친다면 마치 기차 역 플랫폼까지 가는 것을 여행의 전부로 아는 사람과 같다.. 진정한 여행은 기차를 올라타야 시작되는데 기차의 종착역이 어디라는 것만 알고 돌아온다면 얼마나 우습고도 허망한 일인가 말이다.
22살 청년백수는 오늘 자신의 책을 읽은 42살 아줌마에게 조언한다. <천개의 고원>을 통해 알아 나가는 개념을 삶 속에 적용하고, 도주하며, 글쓰기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 나가라고. 그것이 <천개의 고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라고.
첫댓글 우리의 샛별님께서 자주 글을 올려달라고도 하시고 진정한 의미에서 새해가 되기도 했으니 카페에 올리는 글을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회원님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와 멋져요!!
올 한해 더 멋지게 변할 쌤의모습이 기대됩니다~~
엄지공주님 역시 멋지게 변할 모습에 미리 기대 만빵~^^
독후감의 독후감 벌써 다 쓰셨군요.ㅋㅋ
읽기와 50
쓰기가 50 으로 완성됐을 때.... 완변한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도 요즘 그 문제에 허덕이고 있답니다.
그 일상의 책읽기 반복을
그 험난한 쓰기로 바꾸는 노력의 차이를 하려니..
안 그래도 살림하기 어려운 아줌마는 더욱 어렵답니다. 꿍. ㅋㅋ
그래도 차이를.. 한 고원씩 넘을 때마다
천 개의 고원을 넘는 그 날까지 오늘을 살아보렵니다.
샛별 선생님은 이미 글쓰기 고수~~잖어요.
100일 글쓰기도 끝내시고 서평쓰기 열심히 하시니까~~^^
항상 화이팅입니다.
글 올려주니 카페가 더욱 풍성해져요.
탱큐~~~ ㅎㅎ
회원수 21~ㅋㅋㅋ
자다가고 좋아요. 21을 생각하면요~~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