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승정원일기
고종21 1884년 백두산 등에 제사를 지내는 일을 허락해 주기를 청하는 유학 김상봉의 상소
신의 어리석은 충정에 원하는 바의 일단을 이에 감히 말미에 붙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은 생각건대, 명산 대천(名山大川)에 제사를 지내 비는 것은 옛날 명왕(明王)들 역시 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계룡산 다섯 산은 모두 나라를 진압하는 명산입니다. 참으로 지성으로 기도하면 나라의 운명과 천명을 오래 가게 할 수 있습니다. 신이 감히 견마(犬馬)의 정성으로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하는 뜻을 둔 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중대하므로 사사로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려 신의 기도를 허락하시면 들어가는 전폐(奠幣)의 물자를 신이 스스로 마련하여 다섯 산에 각기 100일을 한정으로 하고 천신의 국가에 대한 정성을 만분의 일이나마 바치고자 하는데, 성상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삼가 비옵건대, 천지 부모께서는 굽어살펴 주소서
2.일성록
1)정조9년 1785 성정각에서 일제학 김종수(金鍾秀)를 소견하였다. 그러고 나서 신의 손을 끌어다가 무릎 위에 두고는 ‘나라가 셋으로 나뉜다.〔三分〕’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또 말하기를, ‘나는 이미 하동(河東) 선장촌(先場村)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있는 지가 오래되었다. 문광겸(文光謙)이라는 사람이 이 일을 도맡아 하고 있으니 그대도 같이 가고 싶다면 모든 일을 이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앞으로 세계는 귀천이 없어지게 되니 우리들이 하향한 뒤에 큰일을 하게 되어 시조(始祖)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흉언과 패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마는 끝내 이인의 이름과 이른바 이인을 알고 지낸다는 사람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난리가 나더라도 김종수와 송재경(宋載經)이 전관(銓官)을 맡고 있을 때일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급급히 내려가지 않으면 그대 집안의 신주(神主)는 우물에 던져지는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그는 상자 속에 새로 만든 짚신을 넣어 두었는데, 만약 사변이 나면 신고 가기에 매우 편하고 가벼우리라고 스스로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도적은 북방(北方)에서 먼저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2)문양해(文洋海)라고 하는데, 또한 신이합니다. 제가 간성에서 하동으로 옮겨 올 때 이인이 수부(水府)에 칭념(稱念)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오게 했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지리산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선원(仙苑)이 있는데 여러 신선들이 매우 많고 최고운(崔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지금까지 생존해 있습니다. 저의 자식은 이미 선가(仙家)의 보종(報鍾)과 두타(頭陀)의 직임을 거쳤습니다. 저의 자식의 노사(老師)는 나이가 지금 250세이고 이름은 이현성(李顯晟)이며 도호(道號)는 성거사(成居士)입니다.’ 하였습니다. 그 밖의 요탄한 말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구명겸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그는 여러 대에 걸친 훈척(勳戚)의 집안으로서 몰래 반역(叛逆)의 모의를 마음대로 꾀하고 하늘까지 닿는 화(禍)를 양성하였으니, 국법으로 볼 때 반드시 성토해야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공공(公共)의 논의에 속하는 것이다. 정작 내가 매우 미워하고 분개하는 것은 그처럼 흉악한 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 원문 35자 도삭 -
형구(刑具)를 채우는 형전을 어찌 유사(有司)가 살펴 청하기를 기다리겠는가. 대체로 절차를 무시하고 자주 측근에 두었고 심지어 장임(將任)에 의망(擬望)하려고 하였던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집안을 위해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작년 봄의 옥사(獄事) 때에 그가 긴밀하게 개입하여 심지어 궐 안에서 내응하려는 계획까지 하였으니, 그가 어찌 요행히 피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역적 이율(李?)로 하여금 문양해(文洋海)에게 사주(四柱)를 보내서 보여 주게 하고, 지리산(智異山)의 이인(異人)과 내통하여 삼도(三道)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에 궐 안에서 내응할 대장의 운명이 좋은지의 여부를 질문하게 하였는데, 주고받은 서찰이 역적 이율의 문서에서 발각되었고, 이 일이 또 문양해가 끌어대서 고한 공초에서 나왔다. 그러나 내가 특별히 보통 사람들의 마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죄과로 치부하였다.
3.조선왕조실록
1)태조 1년 임신(1392,홍무 25) 태조가 잠저에 있을 당시 여러 가지 개국의 조짐이 나타나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꿈에 신인(神人)이 금자[金尺]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와 주면서 말하기를,
2)세종 오례 / 길례 서례 / 변사 변사(辨祀)
악·해·독(嶽海瀆)은 각각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며,【다만 삼각산(三角山)과 백악(白嶽)만은 붙여 동쪽에 있게 하고, 서쪽을 향하게 한다.】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만약 절후가 가물어서 북교(北郊)에서 망기제(望祈祭)를 지낼 때에는 악·해·독과 여러 산천(山川)의 신위를 각각 그 방위(方位)에 설치하되 모두 안쪽을 향하게 하고,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 동방(東方)은 동해(東海)와 여러 산천으로 하고, 남방(南方)은 지리산(智異山)·남해(南海)·웅진(熊津)·가야진(伽倻津)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중앙(中央)은 삼각산(三角山)·한강(漢江)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서방(西方)은 송악(松嶽)·서해(西海)·덕진(德津)·평양강(平壤江)·압록강(鴨綠江)과 여러 산천으로 하고, 북방(北方)은 비백산(鼻白山)과 여러 산천으로 한다.】 폐백(幣帛)
3)세종 19년 정사(1437,정통 2) 예조에서 악·해·독·산천의 단묘와 신패의 제도를 상정하다 전라도. 나라에서 행하는 남원부(南原府)의 지리산은 중사이고, 묘의 위판은 지리산지신이라고 쓰고
4)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이 주(州) 서쪽에 있다.【일명(一名) 두류산(頭流山)이다. 대천왕사(大天王祠)가 있다.】 쌍계사(雙溪寺)는 주(州) 서쪽 화개곡(花開谷)에 있다.【전우(殿宇)는 허물어졌고 신라 때에 창건한 조사전(祖師殿)만이 있다. 절 앞에 문(門)처럼 생긴 돌이 있는데, 최치원이 그 위에 쓰기를,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어제 쓴 것과 같이 분명하다. 동변(東邊)의 한 돌에는 ‘쌍계’ 두 자를 새기고, 서변(西邊)의 한 돌에는 ‘석문’ 두 자를 새겼다.】
5)세종 지리지 / 경상도 / 진주목 / 김해 도호부
김해 도호부(金海都護府)
6)세종 지리지 / 전라도
명산(名山)은 지리산(智異山)【일명 지리(地理), 또는 방장(方丈), 또는 두류(頭流)라 한다.】인데 남원(南原)에 있으니, 그 동쪽은 진주(晉州)·곤남(昆南)이요, 북쪽은 함양(咸陽)·산음(山陰)이요, 서쪽은 구례(求禮)요, 남쪽은 광양(光陽)이다. 웅장하게 높이 하늘에 우뚝 치솟아, 산허리에 간혹 구름이 머물고, 비가 오고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그 위는 맑게 개어 평상시와 같으며, 가을철 서늘하면 매떼[鷹]가 모여들므로 잡아다가 나라에 바친다. 속설에 전하기를, “태을(太乙)이 그 위에 살고, 여러 신선(神仙)이 모이며, 여러 용(龍)이 살고 있다.” 고 한다. 두보(杜甫)의 시에 소위 “방장은 삼한 밖이라.[方文三韓外]” 한 주(註)와 《통감집람(通鑑輯覽)》에 이르기를,
7)세종 지리지 / 경상도 ·지리산(智異山)【진주(晉州)에 있다.】·
8)세종 지리지 / 경상도 / 경주부
금송정(琴松亭)【금오산의 꼭대기에 있으니,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타면서 놀고 즐기던 곳이다. 보고는 신라의 사찬(沙?) 옥공영(玉恭永)의 아들로서 경덕왕 때 사람이다. 지리산 운상원(雲上院)에 들어가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배워 스스로 새 곡조 30곡을 지어서 전하니, 현학금(玄鶴琴)이라 이른다. 또는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옥보고가 선도(仙道)를 얻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9)태조 2년 계유(1393,홍무 26)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
이조에서 경내(境內)의 명산(名山)·대천(大川)·성황(城隍)·해도(海島)의 신(神)을 봉(封)하기를 청하니, 송악(松岳)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和寧)·안변(安邊)·완산(完山)의 성황(城隍)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智異山)·무등산(無等山)·금성산(錦城山)·계룡산(鷄龍山)·감악(紺嶽)·삼각산(三角山)·백악(白嶽)의 여러 산과 진주(晉州)의 성황(城隍)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護國)의 신(神)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劉敬)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태조 2년 계유(1393,홍무 26) 정도전이 몽금척·수보록·납씨곡·궁수분곡·정동방곡 등의 악장을 지어 바치다 수보록(受寶?). 주상 전하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어떤 사람이 지리산(智異山) 석벽(石壁) 속에서 이상한 글을 얻어 바쳤는데, 뒤에 임신년에 이르러, 그말이 그제야 맞게 되었으므로, 수보록(受寶?)을 지었습니다. 저 높은 산에는 돌이 산과 가지런했는데, 여기서 이를 얻었으니 실로 이상한 글이었습니다. 용감한 목자(木子)가 기회를 타서 일어났는데, 누가 그를 보좌하겠는가? 주초(走肖)가 그 덕망 있는 사람이며, 비의(非衣) 군자(君子)는 금성(金城)에서 왔으며, 삼전 삼읍(三奠三邑)이 도와서 이루었으며, 신도(神都)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王位)를 8백 년이나 전한다.’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받았으니, 보록(寶?)이라 하였습니다.
10)태종 9년 기축(1409,영락 7)
건원릉에 비석을 세우다. 비문은 권근의 찬 건원릉(健元陵)에 비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이러하였다.
11)세종 18년 병진(1436,정통 1) 경상도 감사에게 백성들의 숭배와 신앙을 금하게 하다
이 앞서 종[婢] 중이(衆伊)란 자가 상언(上言)하기를,
12)연산군 4년 무오(1498,홍치 11) 사초 사건의 주모자 김일손의 행적에 관한 이종준·정여창 등의 공초 내용
하고, 정여창(鄭汝昌)은 공초하기를,
13)연산군 8년 임술(1502,홍치 15) 장령 김천령이 충의위 마숭조가 죄를 변명하는 단자에 대하여 아뢰다 장령 김천령(金千齡)이 아뢰기를,
14)중종 11년 병자(1516,정덕 11) 조강에서 대간이 기신재·장리와 임유겸 등의 일을 아뢰고, 재변으로 변방의 방비를 논의하다 전라도·경상도 등에서는 본디 매[鷹]가 나지 않으므로 매양 지리산(智異山)·비로봉(毘盧峰)·반야봉(般若峰) 등에 가서 얻었는데, 그 험준하고 현절(懸絶)함은 산승(山僧)일지라도 발 붙이기 어려워서 잡기가 매우 곤란하므로 부득이 신역(身役)을 면제하였으나, 그 신역을 면제받은 자는 다 다른 곳에서 사서 진상(進上)에 이바지하는데, 매 한 마리의 값이 무명 30여 필(疋)이나 되므로 전지를 죄다 팔기까지 하니, 백성의 큰 폐해입니다. 두 도(道)의 진상을 줄여서 백성의 폐해를 덜게 하소서.”
15)선조수정실록 1년 무진(1568,융경 2)
우의정 민기의 졸기 ‘민공(閔公)이 경상(卿相)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추앙을 않는 것이다. 만약 청량산(淸?山)【이황(李滉)이 있는 곳.】이나 지리산(智異山)【조식(曺植)이 있는 곳.】에 가 있으면 경상의 자리에 있는 명망보다 더 존중을 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준경이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16)선조수정실록 22년 기축(1589,만력 17) 한준·박충간·이축·한응인 등이 정여립의 모반에 대한 변서를 올리다
이보다 앞서 1백여 년 전에, 민간에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일어난다.’는 참언(讖言)이 있었다. 여립이 요승(妖僧) 의연(義衍)과 모의하여 이를 옥판(玉版)에 새긴 다음 지리산 석굴 안에 간직하였다. 의연이 승도인 도잠(道潛)·설청(雪淸) 등과 산을 유람한다고 핑계하고 지리산에 이르러서는 ‘아무 방위에 보기(寶氣)가 있다.’ 하고 같이 가게 하여 옥판을 찾아내어 여립에게 돌려주니, 여립이 같은 동아리에게 비밀히 보여주고는 그 말을 누설하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17)선조 27년 갑오(1594,만력 22)
비변사에서 입암 산성 등의 수축을 총섭장 유정과 승군에게 책임지울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18)인조 20년 임오(1642,숭정 15) 국가의 기강, 국경의 수비, 인심의 이반, 상벌 시행에 관한 정언 하진의 상소문
요즘에는 또 하나의 명목을 새로 만들어 지리산 이십삼봉 별장(智異山二十三峯別將)이라 칭하고 승녀와 무당까지도 다 신포(身布)를 걷고 산골짜기 화전(火田)도 일체 구실을 징수하니, 이 어찌 성세(盛世)의 일입니까.
19)정조 9년 을사(1785,건륭 50) 숙장문에서 문양해 등을 친국하다
숙장문(肅章門)에서 나아가서 친국(親鞫)하였다. 문양해(文洋海)에게 묻기를,
4.문집총서
1)간이집 제8권 환경록(還京錄) □ 상인(□上人)이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 송운(松雲)을 만나 보려 할 때 차운하여 지어 주다. 2수(二首)
누가 나와 그대를 두 개의 문으로 나누리요 / 誰把渠吾作二門 [주C-001]송운(松雲) : 사명당(四溟堂) 즉 유정(惟政)의 별호이다. |
2)계곡선생집 제26권 칠언 고시(七言古詩) 47수
방장산 노래를 지어 대방으로 떠나는 고 사군 용후 을 전송하다[方丈山歌 送帶方高使君 用厚]
삼한의 경계 벗어나 우뚝 솟은 방장산 / 三韓之外方丈山
자라도 꼼짝 않는 높고 험준한 그 자태 / 六鰲不動高??
백두대간(白頭大幹) 남쪽 해변가로 흘러내려 / 白頭南流窮海際
천지 간에 빼어난 기운 서리게 하였도다 / 秀氣橫蟠天地間
이따금씩 만나는 동천복지엔 / 洞天福地往往在
선조와 용상들이 서성거리고 / 仙曹龍象相盤桓
어딘가엔 청학이 또 깃을 치고 있을텐데 / 靑鶴高栖在何許
산신령이 속물들에게 보여 줄 리 있겠는가 / 俗客欲尋神鬼?
고운이 떠난 뒤로 천 년 세월 흘렀는데 / 孤雲一去已千春
농서공자도 일찍이 길 잃고 헤맸다오 / ?西公子曾迷津
나의 전송 받으며 그곳으로 가는 그대 / 送君却向此中去
영주산의 바람과 이슬 아직도 몸에 배어 / 瀛州風露猶在身
발 딛는 산곡(山谷)마다 안개와 노을 서리리니 / 萬壑煙霞生脚底
신선들도 그대에게 함께 노닐자 청해 오리 / 群仙乞與雙?輪
비결 속에 숨겨진 글 단서를 찾아내면 / 秘訣隱文細紬繹
신선들 세계도 손 가까이 있을테니 / ?臺絳闕爲比?
하룻밤 자고 떠나간 영가야 말해 무엇하리 / 永嘉蠟?豈足道
구루산의 단사법(丹砂法) 일찍 터득할 일이로다 / 句漏丹砂苦不早
그대 귀거래사(歸去來辭) 읊을 일 있겠는가 / 知君不用賦歸來
그윽한 사색 자아내는 영산(靈山)의 경관(景觀) / 靈區物色供幽討
석수도 바람 결에 그냥 굳게 하지 말고 / 石髓莫遣風吹堅
청정으로 얼굴 색깔 혈기 돌게 할 일이라 / 靑精解使顔色好
그리고 속진(俗塵) 속의 친구도 생각해서 / ?憐故人在塵土
한 다발 금광초를 나눠 줬으면 / 須分一束金光草
[주C-001]방장산(方丈山) : 봉래(蓬萊)ㆍ영주(瀛州)와 함께 전설적인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꼽히는데, 여기서는 지리산(智異山)을 가리킨다.
[주C-002]대방(帶方) :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주D-001]삼한의 …… 방장산 : 삼한(三韓)은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인데, 두보(杜甫)의 시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위치하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솟아 있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라는 구절이 있다. 《杜少陵時集 卷3 奉贈太常張卿? 20韻》
[주D-002]자라도 …… 자태 :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海) 동쪽에 방장ㆍ영주ㆍ봉래 등 다섯 산이 있는데 신선들이 살고 있다. 산이 파도에 밀려 떠다니자 상제가 큰 자라들로 하여금 머리로 떠받치게 하였다.”고 하였다.
[주D-003]동천복지(洞天福地) : 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36동천(洞天)과 72복지(福地)로, 천하의 절승(絶勝)을 의미한다.
[주D-004]선조(仙曹)와 용상(龍象) : 도가(道家)의 선인(仙人)과 불가(佛家)의 고승(高僧)을 말한다. 지리산 천왕봉(天王峯)과 반야봉(般若峯)에 태을(太乙)이 거하는데, 이곳에 군선(群仙)이 모이고 용상(龍象)이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9 南原都護府》
[주D-005]고운(孤雲) : 최치원(崔致遠)의 자(字)이다.
[주D-006]농서공자도 …… 헤맸다오 : 이백(李白)이 하늘 나라에서 유배당한 적선(謫仙)의 처지로 세파(世波)에 부대끼며 살았던 것을 의미하는데, 《신당서(新唐書)》 권202에는 이백이 황노(黃老)를 좋아하여 청산(靑山)에 들어가서 생을 마감하려다가 결국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기사가 기재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이백은 흥성 황제(興聖皇帝)의 9세 손으로서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과 같은 농서(?西) 성기(成紀) 사람인데, 그가 지은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도 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주D-007]영주산의 …… 배어 : 한라산(漢拏山)을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이라고도 하는데, 고용후가 제주 고씨(濟州高氏)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8]하룻밤 …… 무엇하리 : 선불교(禪佛敎)에서 말하는 깨달음 같은 것은 거론할 것도 없다는 말이다. 당(唐) 나라 영가(永嘉)의 현각선사(玄覺禪師)가 조계(曹溪)의 육조대사(六祖大師)를 만나 언하(言下)에 계오(契悟)하고 하룻밤을 묵은 뒤 떠나갔으므로 당시에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렀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傳燈錄 卷5》 《宋高僧傳 卷8》
[주D-009]구루산의 단사법(丹砂法) : 불로장생하는 금단(金丹)의 제조법을 말한다. 구루산(句漏山)은 도서(道書)에서 말하는 제22번째의 동천(洞天)으로서 진(晉) 나라 갈홍(葛洪)이 금단을 만들며 수도한 곳이다.
[주D-010]석수(石髓) : 석종유(石鍾乳), 즉 돌 고드름의 이명(異名)인데, 선인(仙人)들이 곧잘 이것을 복용한다고 한다. 《本草 石髓》
[주D-011]청정(靑精) : 도가(道家)에서 청정석(靑精石)을 가지고 만드는 밥 이름으로, 오래 복용하면 안색을 좋게 하고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한다. 《本草 靑精乾石飯》
[주D-012]금광초(金光草) : 명경초(明莖草)의 일종으로 선인(仙人)이 복용하는 풀 이름이다.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백수<百壽>
여든한 살을 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망구(望九)라고 하는데 할망구의 어원이다. 아흔한 살은 백세를 바라본다는 망백(望百)이다. 백세를 백수(百壽), 또는 기수(期壽)라고 한다. 수명(壽命)을 관장하는 별이 수성(壽星), 즉 남극성(南極星)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효무본기(孝武本紀)』에는 무제(武帝)가 태일신(泰一神)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수성이 출현해 깊은 광채를 빛냈습니다”라고 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기 주석서인 『사기 색은(索隱)』은 “수성이 보이면 천하의 다스림이 편안하기에 이렇게 말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반면 수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병란(兵亂)이 일어난다고 여겼다. 옛 왕실에서 수성에 제사한 것은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었다. 조선은 물론 고려에서도 춘분과 추분 때 남교(南郊)에서 노인성에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 태종 21년(1411)부터는 주(周)나라를 따라 추분날만 지냈다.
장수의 비결이 있었을까? 북송(北宋)의 섭몽득(葉夢得)이 지은 『석림연어(石林燕語)』에 따르면 송나라 문언박(文彦博)이 80세의 나이로 치사(致仕:사직을 요청함)하자 신종(神宗)이 “섭생하는 것도 역시 도(道)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문언박은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속박되지 않고 생활하며(任意自適), 외물(外物)에 화기(和氣)를 손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고, 술 마시다 좋다 싶으면 즉시 중지합니다”라고 답하니 신종이 명언이라고 여겼다 한다. 먹는 것도 장수의 중요한 조건이다. 도가(道家)에서는 청정석(靑精石)으로 지은 청정반(靑精飯)을 먹으면 안색(顔色)이 좋아지고 장수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두보는 ‘이백에게 준 시(贈李白)’에서 “어찌 청정반으로, 내 안색 좋게 할 길이 없겠는가(豈無靑精飯 使我顔色好)”라고 읊었다.
죽학노인(竹鶴老人)으로 불린 명나라 하징(何澄)은 아흔아홉까지 살았는데 장수 비결을 묻는 서남(徐南)에게 “맛있는 것은 많이 먹지 않고 맛없는 것은 전혀 먹지 않았을 뿐이다”고 답했다. 도시의 백세노인이 늘어났다는 보도지만 출근길 지하철엔 신문 줍는 노인이 늘어난다. 황제가 태학(太學)에 삼로오경(三老五更)을 초청해 직접 옷소매를 걷고 희생(犧牲:제사 지낸 소)을 베어 대접하는 것을 단할(袒割)이라고 했다. 조선의 세종이나 정조도 자주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어 노인들을 높였다. 경로(敬老)는 한 사회의 도덕성을 재는 척도다.
3)계곡선생집 제25권 오언 고시(五言古詩) 162수 진일에게 줌[贈眞一]
묘향산과 지리산 모두 / 妙香與智異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지맥(支脈)이듯 / 皆自白頭分
남쪽의 혜능(慧能)과 북쪽의 신수(神秀) / 南能與北秀
똑같이 석가의 제자로다 / 同出釋迦文
원래 돈 점의 두 가르침 없었거늘 / 頓漸無二敎
어찌하여 분분하게 말싸움을 일삼는가 / 諍論何紛紛
두 분 선사(禪師) 응당 그렇지 않았으련마는 / 二師不應爾
후학들이 잘못 듣고 헤매는도다 / 後學迷所聞
남쪽 구름은 수레 위의 일산(日傘) 같고 / 南雲如車蓋
북쪽 구름은 모락모락 향불 연기 연상되는데 / 北雲如?薰
두 구름 합쳐 하나가 되면 / 兩雲合爲一
마침내 거대한 불법(佛法)의 구름 이루리라 / 遂成大法雲
대사는 이 뜻을 아는가 모르는가 / 師乎會此否
나의 뜻 정말로 은근하다오 / 我意良慇懃
총림(叢林) 중에서 한창 이 문제를 가지고 쟁론을 벌이고 있기에, 내가 타성일편(打成一片)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주D-001]남쪽의 …… 신수(神秀) : 당(唐) 나라 선사(禪師)인 혜능과 신수 모두 중국 선종(禪宗)의 제5조(祖)인 홍인(弘忍)에게 사사(師事)하였는데, 혜능은 영남(嶺南)에 있으면서 홍인의 의발(衣鉢)을 이어받아 제6조(祖)가 되었고, 신수는 북쪽에서 활약하면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귀의를 받는 등 교화를 펼쳤다. 《傳燈錄》 《宋高僧傳 卷8》
[주D-002]돈(頓)ㆍ점(漸)의 두 가르침 : 이른바 남돈북점(南頓北漸)의 설로서, 혜능의 남종(南宗)은 돈오성불(頓悟成佛)을 주장하고, 신수의 북종(北宗)은 점점수증(漸漸修證)을 위주로 하는 것이다. 《傳燈錄》
[주D-003]남쪽 구름은 …… 연상되는데 : 단박에 깨달아 최고의 경지를 구현하려는 남종의 초월적 성격과,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가 완성태를 이루려는 북종의 점진적 속성을 절묘하게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4)계곡선생집 제33권 칠언 절구(七言絶句) 2백 91수(首) 벼슬을 그만두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임동야를 전송하며[送林東野謝事南歸]
물은 맑고 대숲은 그윽 은자가 거처할 곳이로다 / 水竹淸幽隱者居
손님 잘 좀 봐 달라고 산신령에게 전해 줌세 / 寄語山靈好看客
은어 학사 이제 막 관을 벗어 걸었으니 / 銀魚學士?冠初
[주D-001]용유동(龍游洞) : 함양(咸陽) 남쪽으로 40리 지점에 있다.
[주D-002]은어 …… 걸었으니 : 시종신인 문학사의 직책을 사직했다는 말이다. 은어(銀魚)는 당(唐) 나라 때 5품(品) 이상의 관원이 패용(佩用)했던 은(銀)으로 만든 어부(魚符)이다. 한(漢) 나라 봉맹(逢萌)이 왕망(王莽)의 폭정을 접하고는, 곧장 의관(衣冠)을 벗어 성문(城門)에 걸어 놓고 가족과 함께 요동(遼東)으로 떠난 고사가 있다. 《後漢書 逸民傳 逢萌》
5)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승려 웅십이 두류산에서 찾아와 소요결 한 권을 선물로 주면서 시 한 편을 내놓기에 차운하여 사례하다[山人雄什 自頭流來訪 以逍遙訣一秩見贈 兼有詩 次韻以謝]
듣건대 산승(山僧)들이 결하할 때는 / 聞說山人結夏處
흰 구름만 오갈 뿐 암자 문 걸고 있다는데 / 白雲長閉一茅庵
천하에 이름난 탕휴의 글 구하려고 / 湯休秀句名天下
계순의 깊은 정 해남 땅 부러 찾아가서 / 契順深情訪海南
귀한 글 입수하곤 그 게송(偈頌) 전해 주려 / 已把瓊編傳衆偈
지팡이 짚고 험한 산길 홀로 넘어 오셨구려 / 獨携?杖度千巖
예로부터 두류산엔 고승(高僧)이 많다는데 / 頭流自古多龍象
언제쯤 인끈 풀고 함께 수행해 볼거나 / 解印何時共爾參
[주C-001]소요결(逍遙訣) : 조선 승려 소요 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문집이다. 부휴(浮休)에게 장경(藏經)을 배우고 서산(西山)에게서 선지(禪旨)를 깨우쳤는데, 지리산 연곡사와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부도탑(浮屠塔)이 있다.
[주D-001]결하(結夏) : 승려들의 하안거(夏安居)를 말한다. 음력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일체 외출하지 않고 이 기간 동안 한데 모여 수행하며 정진을 한다.
[주D-002]탕휴(湯休) : 남조(南朝) 송(宋)의 승려 혜휴(惠休)를 말한다. 시문에 능하여 세조(世祖)로부터 환속의 명을 받고 탕(湯)의 성을 하사받았다. 여기서는 소요 태능을 가리킨다.
[주D-003]계순(契順) : 당(唐) 나라 정혜사(定慧寺) 수흠(守欽)의 문도(門徒) 탁계순(卓契順)으로, 아마도 웅십이 소요 태능의 문도였던 듯하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39 차운정혜흠장로견기(次韻定慧欽長老見寄)의 서(序)에 “소주(蘇州) 정혜사 장로 수흠이 그 문도 탁계순을 혜주(惠州)로 보내 나의 안부를 묻고” 운운 하였다.
6)계곡선생집 제31권 칠언 율시(七言律詩) 2백 33수(首)
다시 앞의 운을 써서 기옹에게 수답한 시 여섯 수[復用前韻 奉酬畸翁 六首]
오악 찾아보는 일 너무 늦어 유감이라 / 五嶽尋眞恨已遲
천지간에 몸담고서 몇 번이나 생각하였던가 / 側身天地幾含思
청운의 뜻 이룰 그릇 원래 못 되어 / 靑雲器業元非分
백발이 다 되도록 시만 잡고 고생하네 / 白首辛勤只爲詩
중산의 절교서(絶交書)가 오는 것도 당연한 일 / 中散書來應告絶
만용보다 높은 관직 어떻게 걸맞으리 / 曼容官過豈相宜
그래도 나의 뜻 알아 주는 우리 기옹 / 知音賴有畸翁在
시와 술로 정녕코 세모를 함께 보내리라 / 文酒丁寧歲暮期
번지처럼 농사 기술 배었어도 무방한데 / 何妨農圃學樊遲
한창 때에 충분히 생각 못한 게 유감이오 / 恨不當年爛熟思
조정에서 반악처럼 일찍도 센 귀밑머리 / 雲閣早彫潘岳?
만년에 부질없이 두릉의 시만 읊고 있소 / 暮途空詠杜陵詩
책 보기도 귀찮아서 던져 버리고 / 殘書總向?時卷
잠 깬 뒤엔 그저 쓴 차만 입에 대오 / 苦茗偏於睡後宜
서쪽 시내 궁벽진 그대의 집 빼고 나면 / 除却西街幽僻處
말 타고 찾아갈 곳 그 어디 있으리요 / 出門騎馬與誰期
쫓기는 계절의 변화 도시 멈출 줄을 몰라 / 節序相催苦不遲
중방 제결의 때 그윽한 감회 느껴지네 / 衆芳??感幽思
아직도 못 올린 삼천 독 문장 / 文章未奏三千牘
풍자하는 백일시를 그 누가 진달할까 / 風刺誰陳百一詩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썰렁한 막다른 길 / 末路凉凉無籍在
좋은 기회 놓쳐버린 위태로운 신세로세 / 危踪落落失便宜
어느 때나 임금 은혜 모두 보답하고 / 何時報答君恩畢
한가한 시간 얻어 숙원을 풀 수 있을런지 / 乞得閒身果夙期
화기로운 태평 시대 어찌 이리도 더디어서 / 玉燭元和何太遲
우리 임금 공연히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하나 / 空勞聖主劇焦思
이 나라에 우국지사 없지도 않은 터에 / 非無憂國忘家士
흉적 없애 복수하는 시를 아직 못 읊다니 / 未賦除兇雪恥詩
오늘날 중책 맡은 자 상책 올려야 마땅하니 / 今日登壇須上策
예로부터 방편으로 오랑캐 달래 왔었다오 / 古來和虜出權宜
모두 떨어진다고 사천이 아뢸 따름이랴 / 司天但奏?頭落
실제로 오랑캐 조만간 망하리라 / 早?亡胡會有期
한가한 때 맞는 흥취 어찌 더디게 할까 보냐 / 閑時?興肯敎遲
남쪽 기슭 이름난 동산 그리워지지 않소 / 南麓名園佳可思
맑은 대자리 성긴 발 멋진 손님 묶어두고 / 淸?疎簾留勝客
옥 같은 샘물 그윽한 골 새로운 시 솟아나리 / 玉泉丹壑入新詩
시가(市街)와 붙었어도 속진(俗塵)의 내음 하나 없고 / 地連朝市無塵到
수레 소리 끊긴 골목 게으른 자에게 적격이오 / 巷絶輪蹄興懶宜
휴가 얻어 다시 한 번 찾아와 주지 않으려오 / 休沐不妨重命駕
언제 올지 이 늙은이 묻고만 싶소이다 / 老夫還欲問前期
당성의 소식 어찌 이리도 늦은지 / 唐城消息寄來遲
헤어진 뒤 구슬프게 정운시(停雲詩) 읊었노라 / ??停雲別後思
자금은 장유의 생각 애가 타는데 / 紫禁常懸長孺戀
청산에선 응당 사가의 시 있었으리 / 靑山應有謝家詩
우리의 명성 위협하는 후생들 반갑소만 / 後生不厭聲名逼
말계는 오직 취향이 같아야 어여쁘지 / 末契唯憐臭味宜
곡구자진께서도 생각하고 계시는지 / 谷口子眞還憶否
한 잔 술에 바둑 두며 언제나 흉금 헤쳐 볼까 / 棋樽何日寫心期
[주D-001]오악(五嶽) : 다섯 개의 명산.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동쪽의 금강산(金剛山), 서쪽의 묘향산(妙香山), 남쪽의 지리산(智異山), 북쪽의 백두산(白頭山), 중앙의 삼각산(三角山)을 가리킨다.
[주D-002]중산의 절교서(絶交書) : 삼국 시대 위(魏) 나라의 중산대부(中散大夫)를 지낸 혜강(?康)이 자신을 그의 후임자로 천거한 자(字)가 거원(巨源)인 산도(山濤)에게 절교하는 글을 보낸 고사가 있다. 《문선(文選)》에 그의 여산거원절교서(與山巨源絶交書)가 실려 있다.
[주D-003]만용보다 높은 관직 : 6백 석(石)보다 높은 직질(職秩)을 가리킨다. 한(漢) 나라 병만용(?曼容)이 6백 석에 불과한 관직에 몸을 담고 있다가 왕망(王莽)이 정권을 잡자 고향에 돌아간 고사가 있다. 《漢書 卷72, 卷88》
[주D-004]번지(樊遲) : 공자의 제자로 농사일을 배우기를 청하였다. 《論語 子路》
[주D-005]반악(潘岳) : 진(晉)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추흥부(秋興賦)에 “余春秋三十有二 始見二毛”라는 말이 있다.
[주D-006]두릉(杜陵) : 두릉(杜陵)에 거하며 두릉포의(杜陵布衣)라고 자호(自號)했던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를 가리킨다.
[주D-007]중방 제결의 때 : 온갖 꽃이 시드는 처량한 시절이라는 말이다. 제결(??)은 두견새로 이 새가 울면 꽃이 시든다고 한다. 《초사(楚辭)》 이소(離騷)에 “恐??之先鳴兮 使百草爲之不芳”이라 하였고, 백거이(白居易)와 소식(蘇軾)의 시에도 각각 “殘芳悲??”과 “只恐先春??鳴”이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集 卷16 東南行 一百韻》 《蘇東坡詩集 卷8 和致仕張郞中春晝》
[주D-008]삼천 독(三千牘) : 임금에게 올리는 장편의 상소문을 말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 때 동방삭(東方朔)이 처음 장안에 들어와 삼천 독의 주문(奏文)을 바쳤던 고사가 있다. 《史記 滑稽列傳》
[주D-009]백일시(百一詩) : 한(漢) 나라 응거(應?)가 당시의 세태를 준열하게 비판한 풍자시의 편명(篇名)이다.
[주D-010]모두 …… 따름이랴 : 천문상으로 오랑캐의 별이 떨어질 뿐만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두(?頭)는 묘수(昴宿)로 호성(胡星)이고, 사천(司天)은 관상감(觀象監)의 별칭이다.
[주D-011]당성(唐城) : 남양(南陽)의 옛 이름이다.
[주D-012]정운시(停雲詩) : 친구를 생각하는 노래를 말한다. 진(晉) 나라 도잠(陶潛)의 ‘정운시서(停雲詩序)’에 “停雲思親友也”라 하였다.
[주D-013]자금(紫禁) : 임금이 있는 곳으로 궁정(宮廷)을 가리킨다.
[주D-014]장유(長孺) : 강직하게 간언을 하여 사직신(社稷臣)으로 일컬어졌던 한(漢) 나라 급암(汲?)의 자(字)인데, 태자 세마(太子洗馬)를 역임했던 급암에 빗대어 왕세자의 사부였던 정홍명(鄭弘溟)을 가리키는 말이다.
[주D-015]사가(謝家) : 남조(南朝) 송(宋)의 시인 사영운(謝靈運)을 가리킨다. 참고로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記得謝家詩 淸和卽此時”라는 표현이 있다. 《白樂天詩後集 卷20 首夏猶淸和聯句》
[주D-016]말계(末契) : 장자(長者)와 후배와의 교의(交誼)를 말한다.
[주D-017]곡구자진(谷口子眞) : 곡구(谷口)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한(漢) 나라 정자진(鄭子眞)으로, 기옹이 정씨(鄭氏)이기 때문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계곡선생집 제30권 칠언율(七言律) 1백 60수(首)
말이 병들어 김제의 시골 객사에서 머무는 동안 뜰에 심어 놓은 여러 가지 식물들을 한가로이 바라보면서 그냥 흥에 겨워 읊어 본 다섯 편의 시[馬病留金堤村舍 閒看園中雜植 ?成五?]
맨드라미꽃[?冠花]
홍색 자색 응어리져 유독 선명한 꽃 / 凝丹疊紫獨分明
어찌나 비슷한지 그 이름 얻고도 남겠고녀 / 形似居然强得名
밤에 서창 향할 때는 말을 알아듣는 듯 / 夜向書窓如解語
새벽에 객점 지날 때면 닭 소리 들리는 듯 / 曉過茅店若聞聲
새빨간 봉선화 함께 잘도 어울리고 / 鳳仙灼灼堪同進
시퍼런 마치현(馬齒?)과 한 번 싸우러 덤벼들 듯 / 馬齒靑靑漫欲爭
진짜인지 가짜인지 지금도 도대체 혼동이 돼 / 眞假至今都不較
가을날 뜨락에서 내 눈만 희롱당하누나 / 小畦秋日弄微睛
담배[南靈草]
가느다란 줄기 하나 성긴 꽃 무성한 잎 / 疎花?葉擢纖莖
신농씨(神農氏) 본초경을 뒤져도 안 나오네 / 不入神農本草經
그 누가 이 담배를 동방에 전했을까 / 誰遣孤根來日域
남만(南蠻)의 선박 따라 푸른 바다 건넜으리 / 却隨蠻舶過滄溟
오지와는 다르지만 종자가 원래 따로 있나 / 五芝雖異元無種
구절처럼 기특하게 향기 물씬 풍기누나 / 九節何奇漫自馨
약효 제대로 낼려면 불기에 바싹 말려야지 / 功用會須煩火候
한 번만 써 보면 신약(神藥)인 줄 당장 알리 / 藥欄眞覺有神靈
들국화[野菊花]
들국화도 엄연한 한화의 한 이름 / 自是寒花一種名
다만 연명 같은 지기가 없을 따름 / 獨無知己似淵明
격조를 논한다면 양보해야 하겠지만 / 若論標致應須遜
그윽한 향기 따진다면 가벼이 넘볼 수 없으리라 / 但鬪芬芳未可輕
계절 따라 찾아 주는 곤충들이 유일한 벗 / 賴得候蟲相籍在
하지만 오건 말건 나비 뜻에 맡겨 두네 / 任他游蝶不將迎
이제 이 늙은이 시 한 편 읊은 뒤론 / 從今老子題詩後
그대의 꽃잎 따려 유인이 찾아오리 / 會有幽人采落英
오죽(烏竹)
대나무 가지 간들간들 검은 옥돌 조각한 듯 / 玄玉彫成??枝
차군 중에 그대 격조 더욱더 기특하이 / 此君標格此尤奇
초 나라 강에 몸 던진 상비의 눈물 얼룩얼룩 / 楚江漫染湘妃淚
위 무공(衛武公) 찬탄한 기욱의 시 잘못됐네 / 淇澳虛陳衛武詩
곱게 화장하려는 듯 분가루 반들반들 / 香粉?來如潤色
눈꽃 소복이 쌓일 때면 모습 더욱 돋보이리 / 雪花封處轉多姿
남쪽 고을 고고(高高)한 대 어찌 헐 수 있으랴만 / 南州脩竹知何限
거친 뜰 그대 위해 잠깐 쉬어 가노라 / 爲爾荒園駐少時
감나무 숲[?林]
흰 이슬 맺히는 팔월달 남쪽 고을 / 八月南州白露繁
몇 그루 감나무에 뜨락이 환히 빛나누나 / 數株殷葉照荒園
한자의 시에 나오는 파리완을 대하는 듯 / 如看韓子???
형양의 먹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듯 / 似帶滎陽翰墨痕
객점 사립문도 문득 생기 넘치나니 / 店舍柴荊?起色
초 나라 귤나무에 비겨도 좋으리라 / 楚鄕橙橘好同論
두류산 아래로 거쳐서 갈 나의 발길 / 吾行會過頭流下
단풍 진 감나무 숲 산문(山門)에 끝없이 이어지리 / 無限霜林擁石門
[주D-001]마치현(馬齒?) : 쇠비름 풀로, 쐐기 형상의 긴 타원형 잎을 가지고 있다.
[주D-002]본초경(本草經) : 신농씨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 이름으로, 약초 3백 65종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주D-003]오지와는 …… 있나 : 담배도 영지(靈芝)처럼 신령한 약효를 발휘한다는 말이다. 오지(五芝)는 선약(仙藥)으로 꼽히는 다섯 종류의 영지이다. 《後漢書 馮衍傳下 注》 원문의 ‘元無種’은 “王侯將相 寧有種乎”의 고사를 원용한 것이다. 《史記 陳涉世家》
[주D-004]구절(九節) : 구절포(九節蒲)의 준말로, 창포(菖蒲)의 별칭이다.
[주D-005]들국화도 …… 이름 : 한화(寒花)는 추운 계절에 피는 꽃으로, 보통 국화를 가리킨다. 야국(野菊)도 국화 종류의 하나라는 말이다.
[주D-006]다만 …… 따름 : 국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도연명(陶淵明)처럼 돌보아 가꾸어 주는 사람 없이 홀로 피었다, 홀로 진다는 말이다.
[주D-007]유인(幽人) : 숨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주D-008]차군(此君) : 대나무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빈 집에 대나무를 잔뜩 심어 놓고는 “何可一日無此君邪”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晉書 王羲之傳》
[주D-009]초 나라 …… 얼룩얼룩 : 반죽(斑竹)이라는 말이다. 순(舜) 임금이 죽자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초 나라의 상수(湘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 눈물이 대나무에 얼룩져서 반죽이 되었다 한다. 《初學記 卷28 注》
[주D-010]위 무공(衛武公) …… 잘못됐네 : 《시경(詩經)》 위풍(衛風) 기욱(淇澳)에 “瞻彼淇澳 綠竹??”라고 하였는데, 녹죽(綠竹) 대신 오죽(烏竹)으로 표현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 시는 위 무공의 훌륭한 덕을 읊은 것이다.
[주D-011]흰 이슬 맺히는 : 처서(處暑)와 추분(秋分) 사이의 가을날을 표현한 말이다. 이때 음기(陰氣)가 점점 성해지면서 이슬도 흰 색깔로 변한다고 한다.
[주D-012]한자의 …… 파리완 : 한유(韓愈)의 시에 “두세 명 도사가 그 사이에 자리잡고, 파리 옥배(玉盃)에 영액을 자꾸 따라 마시누나.[二三道士席其間 靈液屢進???]”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영액은 홍시(紅?)를 가리킨다. 《韓昌黎集 卷4 遊靑龍寺 贈崔大補闕》
[주D-013]형양의 먹 자국 : 형양(滎陽)은 시(詩), 서(書),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던 당(唐) 나라 정건(鄭虔)을 가리킨다. 집이 가난해 종이를 구할 수 없자 감나무 잎에 붓글씨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新唐書 卷202》
[주D-014]두류산(頭流山) :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이다.
-치관화와 마치현의 싸움.
창과 방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확인 해볼 것.
7)계곡선생집 제29권 오언율(五言律) 148수 용성에 부임하는 정덕기를 전송하며[送鄭德基赴龍城]
승명전(承明殿) 직숙(直宿)을 돌연히 그만두고 / ?輟承明直
웅번 타고서 번화한 고을로 가는구나 / 態幡領劇州
방장산 손님이 되는 것은 물론이요 / 兼爲方丈客
광한루에 노닐면서 높은 흥취 즐기리라 / 高臥廣寒樓
이은이어니 이름에 누(累)될 게 뭐 있으랴 / 吏隱名何負
어버이와 임금 소원 한꺼번에 들어 줬네 / 君親願各酬
이처럼 뜻밖에 헤어지다니 / 居然聚散地
국화 피는 이 가을을 어떻게 하노 / 無奈菊花秋
[주C-001]용성(龍城) :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주C-002]정덕기(鄭德基) : 덕기는 정유성(鄭維城)의 자(字)이다.
[주D-001]승명전(承明殿) : 한(漢) 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전각 이름으로 시신(侍臣)들이 숙직했던 곳이다.
[주D-002]웅번(熊幡) : 수레 앞 턱의 가로나무가 곰 모양으로 된 것을 말하는데, 한(漢) 나라 때에는 공후(公侯)가 사용하다가 뒤에 와서는 지방관들이 타고 다니게 되었다.
[주D-003]방장산(方丈山) :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우리나라 지리산(智異山)의 별칭이기도 하다.
[주D-004]이은(吏隱) : 관직에 있으면서도 은자(隱者) 같은 생활을 하며 이록(利祿)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8)고려사절요 제31권 신우 2(辛禑二)
정사신우 3년(1377), 대명 홍무 10년
5월에 우리 태조가 삼사우사 김득제(金得齊), 지밀직 이임, 밀직부사 유만수와 함께 왜적을 경상도에 가서 쳤다.
○ 왜적이 밀성을 침범하니, 왕빈이 쳐서 물리쳤다.
○ 우가 순위부(巡衛府)에 이르기를, “손광유ㆍ김지서ㆍ곽언룡(郭彦龍)의 죄는 마땅히 군법으로 논하여야 하겠으나, 바야흐로 가뭄이 심하니, 사형을 감하여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내라." 하였다. 최영이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법을 굽혀 김진(金縝)을 용서하고, 지금 또 광유 등을 석방하니, 정사와 형벌이 이같아서야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오." 하였다. 우가 또 김진에게 옷과 말을 주어 소환하니, 최영이 불가하다 여겨 아뢰기를, “김진이 군사를 어루만지지 않았으며, 적을 보고도 전진하지 않아서 패군하기에 이르렀으니, 머리를 보전하는 것도 다행이거늘, 이제 도리어 후하게 하사하며 소환하니, 훗날에 공을 세우는 자가 있으면 무엇으로 대접하려 합니까. 상벌은 군주의 큰 권세이니, 거꾸로 시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그만두었다.
○ 가뭄으로 기우제를 지내고, 또 사찰에 두루 기도하였다. 최영이 도당(都堂)에게 크게 말하기를, “국가의 정사와 형벌이 문란하여,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있는 자는 벌을 주지 않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였다.
○ 경성이 바다에 인접하고 있어, 왜적의 침입을 헤아릴 수 없기에, 도읍을 내륙지방으로 옮기려고 기로 윤환(尹桓) 등을 모아 놓고 동(動)ㆍ지(止) 두 글자를 써서 가부를 의논하였다. 여러 사람이 이전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만일 변이 있으면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모두 동(動)자에 점을 찍고 서명하였으나, 오직 최영은 반대하고 군사를 징집하여 굳게 지킬 계책을 말하였다. 이인임이 말하기를, “지금 한재를 당하여 온 땅이 텅 비어 있어, 농부들이 밭가는 것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데, 또 군사를 징발하여 농사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다." 하였다. 경복흥ㆍ최영 등이 태조의 진전(眞殿)에 가서 동(動)ㆍ지(止)를 점쳐 지(止)자를 얻었다. 우가 이르기를, “도적이 매우 가까이 왔는데 점만 좇을 수 있는가." 하고, 정당문학 권중화(權仲和)를 철원(鐵原)에 보내어 집터를 살펴보게 하였다.
○ 우인열이 정예 기병 5백 명을 보내어 왜적을 사불랑송지(沙弗郞松旨)에서 치니, 적이 무너져서 배를 타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 죽고 화살에 맞은 자가 또한 많았다. 순라하는 군사가 또 말하기를, “적선이 해도(海島)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여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우리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이 흉흉하고 두려워 공포에 싸였다. 인열의 급보가 계속하여 이르니, 태조가 이틀 길을 하루에 행군하여 적과 지리산 아래에서 싸웠는데, 거리가 2백여 보쯤 되는 곳에 한 적이 돌아서서 몸을 구부리고 손으로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울 것이 없다는 모양을 보여 모욕하였다. 태조가 작은 화살을 쏘아서 한 화살에 거꾸러뜨리니, 이에 적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을 빼앗겼다. 즉시 크게 깨뜨리니, 적의 무리가 낭패하여 산에 올라 절벽에 임하였는데, 칼을 내밀고 창을 뻗친 것이 마치 고슴도치털 같아 관군이 올라갈 수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서 군사를 거느리고 치게 하였다. 비장이 돌아와 말하기를, “바위가 높고 깎은 듯하여 말이 올라가지 못합니다." 하였다. 태조가 꾸짖고, 공정왕(恭靖王 정종(定宗))에게 휘하의 날랜 군사를 나누어 주어 함께 가게 하였다. 공정왕이 돌아와 말하는 것이 역시 비장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친히 가 보겠다." 하고, 휘하 군사에게, “내 말이 먼저 오르거든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라."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어 그 지세(地勢)를 살펴보고 곧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렸다. 때는 한낮이라 칼빛이 번개 같았다. 말이 한 번 뛰어오르니, 군사(軍士)들이 혹은 밀고 혹은 붙잡으며 뒤를 따랐다. 이에 기운을 떨쳐 치니, 언덕에 떨어져 죽는 적이 태반이었다. 드디어 남은 적을 쳐서 섬멸하였다. 태조가 원래 인심을 얻었고, 또 군사가 정예하여 싸워서 이기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각 고을들이 가뭄에 구름과 무지개 바라보듯 하였다.
○ 김해 부사 박위(朴?)가 왜적을 황산강에서 쳐서 이겼다. 이전에, 왜선 50척이 먼저 김해 남쪽 포구에 이르러 뒤에 오는 적에게 방(榜)을 붙여 보이기를, “우리들이 마침 순풍을 만났으니, 황산강을 거슬러올라 곧장 밀성을 치자." 하였다. 박위가 정탐해 알고서 강 양쪽 언덕에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주사(舟師) 30척을 거느려 기다리고 있었다. 적이 과연 방 붙인 것을 보고 큰 배 한 척이 먼저 강 어귀로 들어왔다. 복병이 일어나고, 박위가 또한 돌진하여 막아 치니, 적이 낭패하여 스스로 칼질하여 죽고 물에 빠져 죽어 거의 전멸하였다. 강주(江州) 원수 배극렴(裵克廉)이 또 왜적과 싸우는데, 적의 괴수 패가대만호(?家臺萬戶)가 보졸을 시켜서 좌우를 호위하고 말을 뛰어 앞으로 나오다가 진흙에 빠져서 멈추니, 우리 군사가 맞아 쳐서 베었다.
○ 왜적이 강화로부터 양광도 바닷가의 고을들을 쳐서 함락시켰다. 이전에 적선이 겨우 22척이었는데, 우리 전함을 빼앗은 것이 많아 50척이나 되었다. 정탐하는 군사가 우리 전함을 바라보고 우리 군사라고 여겨 백성들이 모두 믿고 피하지 않았다가, 죽고 상한 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적이 또 경양(慶陽)과 안성군을 침범하니,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겁내고 나약하여 싸우지 못하고, 부원수 인해(印海)와 양천(陽川) 원수 홍인계(洪仁桂)를 불러 퇴각시켜서 가천역(加川驛)에 머물면서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요격하려 하였으나, 적이 바라보고 다른 길로 갔다. 안덕이 정예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하늘을 부르짖으며 통곡하였다. 적의 간첩을 사로잡아 물으니 간첩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의논하기를, '만일 양광도 여러 고을을 침공하면 최영이 반드시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올 것이니, 이에 빈 틈을 타서 바로 치면 경성을 도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했다. 이전에, 적이 안성에 들어와서 삼[麻]밭에 복병하고, 포로 3ㆍ4명을 시켜 밭두둑 위에서 농부인 체하고 밭을 매어 속이게 하였다. 수원 부사 박승직(朴承直)이 세 원수가 온다는 말을 듣고, 역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밭매는 자에게 묻기를, “적이 물러갔느냐. 세 원수가 어디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적은 이미 물러가고, 세 원수가 쫓아갔다." 하였다. 승직이 그 말을 믿고 곧 안성 관사로 들어갔다. 적의 복병이 뛰어나와 포위하니, 승직이 단기(單騎)로 포위를 뚫고 빠져 달아나고, 군사는 많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수원(水原)에서 양성(陽城)ㆍ안성에 이르기까지 쓸쓸하여 사람의 자취가 없었다. 체복사 최인철이 조정에 돌아와서 속여 말하기를, “신이 왕안덕ㆍ홍인계ㆍ인해를 독려하여 직산현(稷山縣)에서 왜적을 쳐 50여 급을 베었습니다." 하니, 우가 인철에게 말과 백금을 주고 안덕 등에게 옷ㆍ술ㆍ말을 주었으며, 찬성사 양백연, 평리 변안열ㆍ임견미를 보내어 싸움을 도왔다.
○ 우(禑)가 철원에 궁성을 쌓으라고 명령하니, 최영이 아뢰기를, “여름에 도읍을 옮기면 농사에 방해될까 걱정되고, 또 경성을 적에게 내주면 나라는 장차 날로 기울어질 터이니, 옳습니까." 하니,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 왜적 1백여 기가 남양(南陽)ㆍ안성ㆍ종덕(宗德) 등 현을 침범하고, 또 50척이 다시 강화를 침범하여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죽이고, 수자리 사는 군사로 사로잡힌 자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또 수원부를 침범하니 원수 양백연ㆍ나세가 전함 50척으로 쳐서 쫓았다. 나세가 강화 지경을 지나는데, 한 부인이 물가에 숨었다가 손가락질하며 말하기를, “적의 간첩이 저 민가에 들어 있습니다." 하였다. 나세가 빨리 달려가서 포위하고 불을 질러 적 29명을 죽였다.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 왜적이 경산부(京山府)를 침범하였다.
○ 우리 태조[我太祖 이성계]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 도순찰사로 삼고, 찬성사 변안열(邊安烈)을 체찰사로 삼아서 부(副)가 되게 하고, 우인열ㆍ도길부ㆍ박임종ㆍ홍인계ㆍ임성미ㆍ이원계를 원수로 삼아, 모두 태조의 절제를 받게 하였다. 군사가 장단(長湍)에 이르니 흰 무지개가 해를 꿰었는데,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승전할 징조다." 하였다. 왜적이 진포에서 패한 뒤로 군ㆍ현을 쳐서 함락시키고 살육과 약탈을 멋대로 하여 왜적의 기세는 더욱 치성해지고, 3도(道) 연해의 땅은 쓸쓸하게 텅 비었다. 왜란이 있은 이래로 이같이 참혹한 일은 없었다.
○ 왜적이 사근내역(沙斤乃驛)에 둔을 쳤는데, 원수 배극렴(裵克廉)ㆍ김용휘(金用輝)ㆍ지용기(池湧奇)ㆍ오언(吳彦)ㆍ정지(鄭地)ㆍ박수경(朴修敬)ㆍ배언(裵彦)ㆍ도흥(都興)ㆍ하을지(河乙沚)가 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수경과 배언이 죽고, 죽은 장교와 군사가 5백여 명이나 되었다. 왜적이 드디어 함양(咸陽)을 도륙하였다.
○ 9월에 우가 여러 어린놈들을 데리고 후원에서 말을 달리며, 혹 자기 손으로 밧줄을 날리어 말을 옭기도 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 우가 궁전 위에 올라가 기왓장과 조약돌을 가지고 사람을 치고, 또 후원에 들어가서 상호군 문달한(文達漢), 지신사 이존성과 활쏘기를 익히면서 존성의 갓을 벗기어 과녁을 만들었다.
○ 밀직부사 배극렴을 경상도 도순문사로 삼았다.
○ 왜적이 남원산성을 쳐서 이기지 못하고 물러가 운봉현(雲峯縣)을 불사르고, 인월역(引月驛)에 둔을 치고는 소문을 퍼뜨리기를, “장차 광주의 금성(金城 전남 담양(潭陽))에서 말을 먹여 북으로 올라가겠다." 하니, 안팎이 크게 진동하였다.
○ 우가 밤에 환관들과 함께 밀직사사 유수(柳遂)의 집에 이르러 그 딸을 찾았다. 수가 아뢰기를, “신에게 딸이 있는 것은 국인이 모두 아는 바인데, 만일 빙례(聘禮)를 행하신다면 신이 감히 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날 밤 우가 그 집에 5번이나 갔으나 마침내 얻지 못하였다.
○ 우리 태조가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니, 배극렴 등이 와서 길에서 배알하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태조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면서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이제 적을 만났는데도 치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고, 드디어 여러 장수의 부서를 정하고서 밝아 오는 아침에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雲峯 전북 남원)을 넘어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는 황산(荒山) 서북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태조가 길 오른편의 험한 지름길을 보고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이 길로 나와 우리 배후를 습격할 것이다. 내가 이 길로 나가겠다." 하였다. 여러 장수는 모두 평탄한 길로 나갔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날쌘 것을 바라보고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는데, 해는 벌써 기울었다.
태조가 험한 길에 들어서니, 과연 적의 기예(奇銳) 부대가 튀어나왔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개를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柳葉箭)을 50여 발이나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활시위 소리에 따라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세 번을 만나 무찔러 섬멸하였다. 또 땅이 진흙탕이어서 저편과 우리가 모두 그 속에 빠져 서로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나와서 보니 죽은 것은 모두 적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적이 산에 웅거하고 굳게 지키니,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요해처에 나누어 웅거하게 하고, 휘하 이대중(李大中) 등 10여 명을 시켜서 도전하였다. 태조가 올려치니 적이 죽을 힘을 다하여 충돌하므로, 우리 군사가 뿔뿔이 쫓겨 내려왔다. 태조가 장사(將士)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말이 넘어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태조가 다시 나팔을 불게 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기어올라 적진에 충돌하였다. 적장 한 사람이 창을 끌고 곧장 태조의 뒤로 달려와 매우 위급하였는데, 부하 장수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크게 소리치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하였으나,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므로 두란이 쏘아 죽였다. 태조는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면 바꿔 타고,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또 바꿔 탔으며, 나는 화살이 태조의 왼편 다리를 맞혔으나 태조가 화살을 빼어 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싸우자 군사들은 태조가 부상한 것을 알지 못했다. 적이 태조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태조가 기병 두어 사람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다. 적과 또 충돌하여 태조가 선 자리에서 8명을 죽이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를 지휘하여 말하기를,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용기가 백백해서 사람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적은 박혀 있는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였다. 태조가 그 용맹하고 날쌤을 애석하게 여겨 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하였다. 두란이 여쭈어 말하기를, “만일 생포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나가며 쏘니, 바로 투구 꼭지를 맞히었다. 투구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자, 그 자가 급히 바로 썼다. 태조가 곧 쏘아서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 죽이니, 그제서야 적의 기운이 꺾였다.
태조가 몸을 뽑아 쳐들어가니, 적의 정예 부대가 거의 다 죽었다. 적의 통곡하는 소리는 마치 수만 마리의 소가 우는 것 같았으며,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여러 군사가 승승하여 달려 오르며 북 치고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사면으로 공격하여 드디어 크게 깨뜨리니,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 간이나 빛이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말이 1천 6백여 필이며 병기는 무수하였다.
처음에는 적이 우리의 10배였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말하기를, “천하에 적을 전멸시키는 나라는 없다." 하고 마침내 끝까지 쫓지 않고 퇴진하여 크게 군악을 울리고 나희(儺?)를 베푸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는데, 수급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장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 땅에 부딪치며 살려 주기를 빌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맡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적의 용맹한 자는 거의 다 죽었다." 하였다. 그때 사로잡혔던 자가 적진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태조의 포진(布陣)이 정제한 것을 바라보고 그 부하에게 말하기를, '이 군사의 기세를 보니 지난날의 여러 장수와 비교가 안 된다. 오늘의 일은 너희들이 각자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아기발도는 그 섬에서 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왜적들이 그의 용맹에 감복하여 주장을 삼으려고 굳이 청하여 왔다. 여러 적의 괴수들도 매양 그를 볼 때에 반드시 꿇어 엎드렸으며, 군중이 그의 호령에 따라서 모두 진퇴하였다.
이번의 행군에서 군사의 장막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었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대가 나무보다 가벼워서 멀리 운반하기에 편하기는 하나, 역시 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내가 싸 가지고 온 그 전 물건은 아니다. 묵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탄복하여 모두 버렸다. 태조는 이같이 이르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다. 동녕(東寧)의 싸움에서 태조가 그 장수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는데, 처명이 은혜에 감복하여 태조에게 맞은 화살 흔적을 볼 때마다 반드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항상 좌우에서 시종했는데, 이번 싸움에도 처명이 말 앞에서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공민왕 1(恭愍王一) 정유 6년(1357), 원 지정 17년
○ 왜적이 승천부(昇天府)의 흥천사(興天寺)에 쳐들어와 충선왕(忠宣王)과 한국공주(韓國公主)의 영정을 가지고 갔다.
○ 윤월에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옥룡기(玉龍記 옥룡자 도선(道詵)의 비결)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오행으로 보아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이다. 흑(黑)을 부모(父母)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는다. 만일 풍속(風俗)이 토질에 순응하면 창성하고 역행하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풍속이란, 군신(君臣)과 백성의 의복ㆍ관개(冠蓋)ㆍ악조(樂調)ㆍ예기(禮器)ㆍ집용(什用)이 그것입니다. 이후로는 문무백관은 흑의(黑衣)에 청립(靑笠)을 하고, 승복은 흑건(黑巾)에 대관(大冠)을 하며, 여자는 흑라(黑羅)를 입도록 하소서. 또 모든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빽빽하도록 하고, 그릇은 유동(鍮銅)이나 질그릇을 써서 토풍(土風)에 순응하게 하소서." 하여,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신종 정효대왕(神宗靖孝大王) 갑자 7년(1204), 송 가태 4년·금 태화 4년
○ 12월에 최충헌을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어사대사로 삼았다. 왕은 충헌이 자기를 세운 공이 있으므로, 충헌을 신하로 대우하지 않으며, 항상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불렀다. 이때 한유한(韓惟漢)이란 사람이 있어 대대로 서울에 살았는데, 충헌이 국정을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난이 장차 일어날 것이다.” 하면서, 드디어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에 숨었다. 조정에서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고, 마침내 그곳에서 한평생을 마쳤다.
○ 양광도 안찰사 곽공의(郭公儀)가 욕심이 많고 비루하니, 백성 가운데 그를 원망하는 이가 많았다. 유사가 그 배리(陪吏)를 잡아 국문하였으나, 공의가 일찍이 박희(博?)로써 충헌과 교분을 맺은 까닭에 끝까지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다만 그 배리만 매질하였다.
신유신우 7년(1381), 대명 홍무 14년
○ 봄 2월에 이인임을 문하시중으로, 최영을 수시중(守侍中)으로 삼았다.
○ 왜적이 영해부(寧海府 경북 영덕(盈德)를 불태웠다.
○ 문하평리 나세(羅世)를 동강(東江) 도원수로, 황상(黃裳)을 서강(西江) 도원수로 삼고, 강 연안의 요소에 모두 원수를 두어 왜적을 방비하였는데, 모두 열 다섯 곳이었다.
○ 왜적이 강릉도(江陵道)를 침범하니, 첨서밀직(簽書密直) 남좌시(南佐時)와 밀직부사 권현룡(權玄龍)을 보내어 쳤다. 이때에 강릉도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방비가 매우 소홀하였으므로 동지밀직 이숭(李崇)을 보내어, 교주도(交州道) 군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 최영이 바닷가에 있는 주ㆍ군에 3년간의 조세를 감면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하였다.
○ 왜적이 송생(松生)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평해(平海)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 등지를 침범하고 드디어 삼척현을 불태웠다.
○ 왜적이 지리산에서 도망하여 무등산으로 들어가 규봉사(圭峯寺) 바윗돌 사이에 목책(木柵)을 세웠는데, 삼면이 절벽이고 벼랑을 따라 작은 비탈길만 있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수 있었다. 전라도 도순문사 이을진(李乙珍)이 결사대 1백 명을 모집하여 높은 곳에 올라 돌을 굴려 내리고 불화살을 쏘아 목책을 불사르니, 적이 궁지에 빠져 벼랑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나머지 적은 바다로 달아나서 작은 배를 훔쳐 타고 도망하였다. 전 소윤(少尹) 나공언(羅公彦)이 빠른 배로 추격하여 모두 죽이고, 13명을 생포하였다.
○ 5월에 왜적이 이산수(伊山戍)를 침범하니, 양광도 도순문사 오언(吳彦)이 싸워 물리치고, 사로잡은 적 9급을 베었다.
○ 계림(鷄林) 원수 윤호(尹虎)가 왜적 10여 급을 베었다.
○ 경도(京都)에 있는 한 여승이 미륵보살이라 자칭하니, 사람들이 모두 믿고 다투어 쌀과 베를 보시하므로, 사헌부에서 곤장을 때려 귀양보냈다.
○ 안동 병마사 정남진(鄭南晉)이 왜적을 쳐서 16급을 베었다. 왜적이 또 영해부(寧海府)를 침범하였다.
○ 경상도 고령군(高靈郡)에 흉년이 들어서, 버린 아이가 길에 가득하고, 굶어 죽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 6월에 왜적이 비인현(庇仁縣)을 침범하고, 또 영주(永州)를 불태웠다.
○ 왜선 50척이 김해부를 침범하여 산성을 포위하니, 원수 남질(南秩)이 쳐서 물리쳤다. 남질이 또 영해ㆍ울주(蔚州)ㆍ양주(梁州)ㆍ언양(彦陽) 등처에서 다섯번 싸워 8급을 베었다.
○ 전 밀직사 지용기를 전라ㆍ경상도의 조전원수로 삼았다.
○ 지문하부사상의 이인(李?)이 졸하였다.
○ 왜적이 울진현을 침범하니, 권현룡(權玄龍)이 싸워 물리치고, 20급을 베고 말 70필을 노획했다.
○ 우가 술에 취하여 용수산(龍首山)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떠메어 돌아오니, 최영이 울며 간하기를, “충혜왕(忠惠王)이 호색하였으나 반드시 밤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였고, 충숙왕(忠肅王)이 놀기를 좋아하였으나 반드시 제때에 놀아서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였는데, 지금 전하는 놀고 장난하기를 절도없이 하여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게까지 되어도 신등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하겠습니까." 하니, 우가 말하기를, “이제부터 고치겠다." 하였다.
○ 가을 7월에 왜적이 김해부를 침범하였다.
○ 우의 생일이므로 일죄(一罪) 이하를 사하였다. ○ 우가 여러 기생들을 궁중에 모아 놓고 밤새도록 놀이를 하였는데, 이로부터 안 노는 날이 없었다.
○ 왜적이 고성현(固城縣)을 침범하니, 남질이 싸워 8급을 베었다.
○ 9월에 왜적이 서주(瑞州)를 침범하였다.
○ 우가 밤에 환관을 데리고 궁 담을 넘어서 나갔다. 숙직하는 신하들이 우의 간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놀랐는데, 한참 만에 돌아왔다.
○ 왜적이 임하현(臨河縣)을 침범하였다.
○ 왜적이 반남현 (潘南縣 전남 나주)을 침범하니, 원수 지용기와 이을진이 적과 싸워 물리치고, 배 한 척을 잡아서 불태우고 9급을 베었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도 많았다.
○ 왜적이 보령현(保寧縣)을 침범하고, 또 밀성현(密城縣)을 침범하였다.
○ 우가 밤에 여리(閭里)에 돌아다니며 놀다가 길에서 순라하는 관원을 만나 쫓아가며 쏘았다. 이후부터 매일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는 것이 예(例)가 되었다.
9)고봉집 제1권 [시(詩)○외집(外集)] 태운의 시축에 차운하다〔次太雲詩軸韻〕
내가 지리산에서 놀다가 / 我遊智異山
절간에서 우연히 사흘을 잤구나 / 大乘偶三宿
중이 아침저녁으로 와서 / 有僧朝暮來
자주 반가운 눈으로 대해 주네 / 屢對雙眼碧
우리 도가 오래도록 비색하니 / 吾道久否塞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아야 하리라 / 闢之必須廓
돌아보니 나의 힘은 미약하지만 / 顧我力已薄
몸은 그 옆에 있음 다행히 여긴다 / ?念身幸側
말을 남겨 네 중들에게 일깨우노니 / 留語警汝僧
부디 마음과 자취 갈라 놓지 마소 / 愼莫判心迹
[주D-001]물리쳐서……하리라 : 이단의 학설을 물리쳐야만 사도(斯道)가 밝아진다는 뜻이다. 한유(韓愈)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양자운(揚子雲)이 이르기를 ‘옛날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정도(正道)를 막으므로 맹자께서 말씀하여 물리쳐서 환하게 터놓았다.〔古者楊墨塞路 孟子辭而闢之廓如也〕’ 하였다.”라고 한 말이 보인다.
잡저(雜著) 천사(天使) 허국(許國)ㆍ위시량(魏時亮)의 문목(問目)에 대해 조목조목 답함
? 본국(本國) 아무 도(道)의 벼슬아치나 선비 혹은 백성 가운데 이미 죽었거나 또는 살아 있는 사람들로서 어떠한 이행(異行)과 효제(孝悌)와 절의(節義)가 있는지, 또 공맹(孔孟)의 심학(心學)을 잘 알거나 기자(箕子)의 주수(疇數)를 아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 거주지와 성명과 사실을 하나하나 기록하라.
본국은 바다 밖에 궁벽하게 위치해 있고 땅덩이는 작지만, 백성들의 성품이 어질고 유순하여 선(善)에 잘 흥기하기에 이행과 효제와 절의가 있었던 사람들이 사서(史書)에 끊이지 않으니, 지금 그 수를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우선 그중 한두 가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자현(李資賢)은 고려 때 사람인데, 용모가 훌륭하고 성품이 총민하였습니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악서 승(大樂署丞)이 되었는데,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춘주(春州)의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가 거친 밥을 먹고 베옷을 입고 살면서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즐겼습니다. 고려 예왕(睿王)이 누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에 “새의 본성대로 새를 길러서 종고(鐘鼓)의 걱정이 없게 하시고, 물고기를 관찰하여 물고기를 알아서 강호(江湖)를 좋아하는 물고기의 본성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불러올 수 없음을 알고 특별히 남경(南京 한양(漢陽))에 행차하여 그의 아우 자덕(資德)을 파견하여 가서 효유하게 하니, 그제야 부름에 응하여 왔습니다. 왕은 이에 그를 삼각산(三角山)에 머물도록 명하였습니다. 그 후 재차 만났을 적에 왕이 심성을 기르는〔養性〕 요법을 물으니, 그는 “욕심을 줄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으나, 그는 굳이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습니다.
한성한(韓性漢)-‘성(性)’ 자는 ‘유(惟)’ 자일 듯하다.-은 고려 신왕(神王) 때 사람입니다. 그는 최충헌(崔忠獻)이 국정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보고는 “난(難)이 곧 일어날 것이다.” 하고, 마침내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은거한 채 고절(苦節)을 맑게 닦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그의 인품을 높게 여겼습니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서대비원 녹사(西大悲院錄事)로 삼았으나 취임하지 않고, 더 깊은 골짜기로 옮겨가 살면서 종신토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0)국조보감 제30권 선조조 7 22년(기축, 1589)
○ 황해도 관찰사 한준(韓準),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 안악 군수(安岳郡守) 이축(李軸),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 등이 고변하는 글을 올려 "전 수찬 정여립이 모반한다.”고 하였는데, 여립이 망명(亡命)하였다.
당초 여립이 견책을 자주 입고 호남으로 돌아갔는데, 조정이 늘 청망(淸望)에 주의(注擬)하였으나 상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여립이 본디 발호(跋扈)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억누름이 심하게 되자 배반하려는 모의를 더욱 펴게 되었다. 이에 강학(講學)을 가탁하여 무뢰배를 불러 모았는데, 무사와 승도(僧徒)들도 그 가운데 섞여 있었다. 또 해서(海西)는 풍속이 완악(頑惡)한데다가 일찍이 임꺽정(林巨正)의 난리가 있음을 보고 황해 도사(黃海都事)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안악(安岳) 사람 변숭복(邊崇福)ㆍ박연령(朴延齡), 해주사람 지함두(池涵斗) 등과 몰래 서로 교결하여 돌려가며 꾀어내니 응하는 자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여립은 잡술에 두루 통하여 국가에 장차 임진왜변(壬辰倭變)이 일어날 것을 알고 때를 타고 갑자기 일어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이웃 고을의 여러 무사, 공사천(公私賤) 중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 등과 대동계(大同?)를 만들어 매월 15일에 한 곳에 모여 활쏘기를 겨루고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즐기었다.
수십 년 전에 천안(天安)의 사노(私奴) 길삼봉(吉三峯)이란 자가 용맹이 뛰어나 흉포한 도적이 되었다. 관군이 매양 체포하기 위해 엄습하였으나 그때마다 탈주하였으므로 이름이 국내에 자자하였다. 여립이 지함두(池涵斗) 등으로 하여금 해서 지방에 말을 퍼뜨리기를,
하고, 또 말하기를,
하였다. 팔룡은 곧 여립이 꾸민 호(號)인데, 실정을 모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으로 알았다. 이때 해서에 떠도는 말이 자자하였는데,
하였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현혹되어 왁자하게 전파하였다.
여립이 사기(事機)가 상당히 누설된 것을 보고 변란을 일으키려는 계책을 결정하였다. 이에 비밀로 부서(部署)를 약속하여 이해 겨울 말에 서남 지방에서 일시에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서울을 침범하기로 하였다.
해서(海西) 구월산(九月山)의 중 가운데 호응하는 자가 있었다. 중 의엄(義嚴)이 그 정상을 염탐하고 재령 군수(載寧郡守) 박충간(朴忠侃)에게 비밀히 말하였으나 충간이 망설이며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다. 안악(安岳)의 교생(校生) 조구(趙球)가 항상 여립의 제자라고 하면서 도중(徒衆)을 많이 모아 술을 마셨는데 종적이 평소와 달랐다. 그러자 군수 이축(李軸)이 엄습하여 잡아다가 실상을 물었다. 조구가 속일 수 없음을 알고 모든 역상(逆狀)을 고발하였다. 이축이 서간으로 박충간을 초청해서 모였는데, 신천 군수(信川郡守) 한응인(韓應寅)은 명사(名士)로서 조정에 신임을 받을 수 있다 하여 조구를 신천에 보내어 연명하여 감사 한준(韓準)에게 보고하게 하니, 한준이 장계를 올려 고변하였다.
이달 2일 초저녁에 상이 편전에 나아가 삼공, 육승지(六承旨), 입직 도총관(都摠管) 2원, 홍문관의 상하번(上下番)을 불러 좌ㆍ우 사관과 함께 입시하게 하고, 상이 신하들에게 "여립이 어떠한 사람인가?” 물으니, 영상 유전(柳?), 좌상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인품은 모른다.”고 대답하였고, 우상 정언신(鄭彦信)은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고변의 장계를 들어 상 아래로 내던지며 이르기를,
하고, 승지를 시켜 읽도록 하였다. 흉모(凶謀)가 낭자하자 좌우 신하들이 모두 목을 움츠리고 등에 땀이 배었다. 대신이, 금부 도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여립 등을 체포하고 고변한 자까지 아울러 잡아오게 할 것을 청하였고 유전(柳?)은 토포사(討捕使)를 나누어 파견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변숭복(邊崇福)은 일명 사(?)인데 용맹이 뛰어났다. 조구(趙球)가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안악(安岳)으로부터 여립에게 달려가서 고하였는데 4일 만에 금구(金溝)에 이르렀다. 여립이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는데 도사 유담(柳湛)이 이튿날 달려가 엄습하였으나 잡지 못하니 도성 안이 진동하였다. 상이 역적의 무리를 친히 국문하였다.
정여립이 도망하여 진안(鎭安)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는데 현감 민인백(閔仁伯)이 수색하여 잡았다. 여립이 밭 가 풀더미 속에 숨어 있었는데 관군이 포위하자 여립은 형세가 궁박하게 되어 자살하였다. 정여립의 시체를 군기시 앞에서 형벌을 가하고 그의 무리들을 모두 사형시켰다.
역적이 복주(伏誅)된 일을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
성종조 3 21년(경술, 1490)
○ 정여창(鄭汝昌)을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으로 삼았다. 정여창은 우후(虞侯) 정육을(鄭六
乙)의 아들이다. 정육을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죽었으므로 조정에서 규례를 따라 군직(軍職)에 제수하였는데, 정여창이 말하기를,
하며 지리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의 근원을 깊이 탐구하고, 마침내 체용(體用)의 학문을 파고들었다. 이때에 이르러 사섬시 정 조효동(趙孝仝)이 상소하여 천거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던 것이다.
국조보감 제10권 세조조 1 1년(병자, 1456)
○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 3. 삼각산(三角山)을 중악(中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동악(東嶽)으로, 구월산(九月山)을 서악(西嶽)으로, 지리산(智異山)을 남악(南嶽)으로, 장백산(長白山)을 북악(北嶽)으로 삼고 그 밖의 악진(岳鎭), 해독(海瀆), 명산(名山), 대천(大川)의 사전(祀典)을 고쳐 정하는 일, 4.
세조조 4 11년(병술, 1466)
○ 대사헌 양성지가 상소하기를,
하였다.
11)기옹만필(畸翁漫筆) 정홍명(鄭弘溟) 저 《기옹만필(畸翁漫筆)》 은 광해군(光海君)ㆍ인조(仁祖) 연간의 청초고고(淸楚孤高)한 문사로 알려진 기암(畸庵) 정홍명(鄭弘溟)이 역사ㆍ유학(儒學) 관계의 자료 및 선비들의 숨은 일을 모아 적은 책이다.
○ 천연(天然)은 남쪽의 중인데, 키가 8척이요 담력이 뛰어났다. 일찍이 길을 가다가 지리산을 지나는데 곁에 소위 천왕봉 음사(天王峰淫祠)가 있었다. 이전부터 괴이한 영험으로 알려졌으며 지나는 사람이 만약 경건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몇 걸음을 못 가서 사람과 말이 쓰러져 죽는다 하니, 지나가는 객들이 무서워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천연이 괴이하고 망령된 것이라 하여 팔을 휘두르며 지나갔는데, 별안간 탔던 말이 땅에 넘어졌다. 천연은 매우 성내어 곧 죽은 말을 가져다 사당 가운데에서 도살하여 피로써 사당의 벽을 더럽히고 다시 주먹을 휘둘러 신상(神像)을 쳐부순 다음 불을 놓아 태우고 갔는데, 그 뒤로는 신의 괴이한 영험이 드디어 없어지고 상인이나 길손들이 편안히 지나게 되었다.
퇴계와 고봉이 모두 시를 지었으며, 당시의 명사들이 화답하여 읊은 이가 매우 많았다. 천연은 일찍부터 고봉을 찾아 《주역》을 배워 매우 뜻을 통달하였다. 퇴계와 고봉이 성리(性理)에 대하여 논변하게 되자 천연은 서신을 가지고 왕래하여서 그 사이의 논변하는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무신년(1608, 선조 41)에 내가 일이 있어 신천(信川)에 가니, 천연이 듣고서 소를 타고 왔다. 그때 나이 80여 세였는데, 여전히 건강하였다. 옛 일을 말할 때에는 피곤한 기색이 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베개를 가지런히 하고 며칠 밤을 지내며 듣지 못했던 일들을 많이 들었는데, 참으로 방외(方外)의 기걸이었다. 천연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 하였다.
12)난중잡록 1(亂中雜錄一) 기축년 만력 17년, 선조 22년(1589년)
가을 9월. 홍문관 수찬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주살(誅殺)되다. 정 여립은 전주 사람으로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나 세상을 뒤덮었다. 그는 조정에서 물러나와 집에 있으면서 고매(高邁)하고 자중(自重)하는 체하여 관직을 사퇴하고 받지 않았으며, 나라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사림(士林)에서는 달려가서 한 번이라도 그를 만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그는 황해도 안악(安岳)ㆍ재령(載寧) 사람들과 몰래 반역을 모의하고 요사스러운 중 법연(法涓)을 시켜 왕래하면서 연락하게 했다. 재령 군수 박충간(朴忠侃)이 고변(告變)하는 글을 올리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전주에서 정여립을 잡았다. 그때 정여립은 금구(金溝) 별장에 있었는데, 일이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자기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함께 그의 도당 변숭복(邊崇福)ㆍ지경함(池景涵) 등을 거느리고 진안(鎭安)으로 도피하였다가 본현(本縣)의 원 민인백(閔仁伯)에게 잡히는 바 되다. 정여립과 변숭복은 곧 목을 찔러 자살하다. 민인백은 정옥남과 지경함을 생포하고 역적의 시체들을 운반하여 모두 서울로 보내다. 변숭복은 일명 사(?)라 했고, 지경함은 일명 함도(涵道)라 했는데, 나들이하고 길을 다닐 때면 두 가지 이름을 썼다.
○ 정옥남과 지함도가 서울에 잡혀오다. 지함도가 공술(供述)하기를, “저는 주먹으로 반석을 치면 돌이 부서져서 번갯불같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래서 도당 중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운운.” 하다. 즉일로 그들을 다 능지 처참(陵遲處斬)하게 하고, 민인백에게는 통정대부를 가자(加資)하고 예조 참의를 제수(除授)하다. 이듬해에는 녹훈(錄勳)하고 여양군(驪陽君)을 봉하다.
○ 서울과 지방의 사림(士林)들 중에는 역적 정여립에 관련되어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조정 안에서도 말에 연루되어 형을 받은 사람이 많다. 좌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강계(江界)로 귀양가서 돌아오지 못했고, 이조 참의 백유양(白惟讓)은 불복하고 죽었으며, 그의 아들 백진민(白震民)은 신문을 받고 공술하기를, “아비가 모르는 것을 아들이 어떻게 알겠소. 죄가 있고 없음은 증거가 푸른 하늘에 있소. 둥우리가 뒤엎어졌는데 알[卵]이 어찌 홀로 온전하리오. 더 심문할 것도 없고 속히 죽여 주기 바라오.” 당시에 공술한 말들이 한정 없이 많았지만 이 말이 간략하고 분명하며 가장 슬프고 가련하다. 하고, 뒤이어 곤장을 맞다가 목숨을 잃다.
겨울 12월. 전라도 생원 정암수(丁?壽)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줄거리는 정 여립이 반역한 정상을 상세히 진술하고, 또 전에 정여립이 지리산에 들어가 열병(閱兵)할 때, 옥과(玉果)의 선비 양형(梁泂)이 문서를 맡아 보았다는 내용이다. 양형은 벌써 잡혀서 죽었다. 그런데 비답(批答)에 이르기를, “역적 모의의 전말을 너희들이 이토록 자세히 알았다면 왜 일찍 와서 고변하지 않았느냐.” 하고, 금부에 명해 체포하여 심문하게 하였으나, 도사가 정암수 등을 잡아서 천안(天安)까지 오자 석방하라는 특명이 내리다. 남원 사람으로 역적 사건에 연좌되어 잡혀 심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은 자는 정자(正字) 조유직(趙惟直)과 선비 신여성(申汝成) 두 사람뿐이었으며, 역적 명부에 길삼봉(吉三峯)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잡지 못했고, 진주 사람 최영경(崔永慶)의 호가 삼봉(三峯)이라 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갑오년 만력 22년, 선조 27년(1594년)
6월 3일 새벽에 지진이 있어 오시(午時)에 천지가 진동하고 큰비가 오고 다음날 또 천둥이 치고 큰비가 왔다. 원수 권율이 영남으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다음날 구례로 향하여 영남으로 돌아가 산음(山陰)에 주둔하였다.
○ 전일에는 민간이 비록 군색하였으나 혹 곡식을 저장한 사람이 있었으므로 소ㆍ말ㆍ잡물을 팔고 바꿀 곳이 있었고 또 관곡(官穀)을 내어 놓아 여러 곳에서 팔기도 하더니, 지금은 공사(公私)가 함께 고갈되어 시장에 한되의 쌀도 없었다. 이때에 소ㆍ말이 있는 자가 명 나라 병사에게 파니, 하루에 소 1백 마리를 도살하고 사경(四境)에 소ㆍ말ㆍ닭ㆍ개도 역시 다 없어졌다.
○ 전주 부윤 홍세공(洪世恭)으로 본도 순찰사를 삼고, 이정암(李廷?)은 도로 전주 부윤이 되고, 김경서(金慶瑞)는 경상 우병사가 되었다.
○ 김희(金希) 등이 여러 번 거창ㆍ안음ㆍ함양 지방에서 도적질하므로 본도 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수색하여 잡게 하였더니, 군사가 무너져 퇴각하였다. 권율이 또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으로 독포대장(督捕大將)을 삼아서 김희를 토벌하였다. 이때에 영남 사람 임걸년(林傑年)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주둔하고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
12월 권율(權慄)이 성주(星州)로부터 순찰하여 충청도에 이르렀다가 전라도로 내려와서 전주를 경유하여 남원에 이르러 비밀리 근처의 고을로 하여금 내적(內賊)을 잡게 하였다.
5일 남원 판관 김유(金?)가 원수의 명령을 받아 운봉 현감 남간(南侃)과 더불어 경계에 모여 추동(楸洞)의 적을 잡기를 의논하였는데 해가 오정이 되도록 두 관원은 헤어지지 않았다. 김희(金希)ㆍ강대수(姜大水) 등이 고파(高波)와 더불어 합세하여 도당 1백 50여 명을 거느리고 번암(番?) 남원부 동서쪽 10리에 있다. 으로부터 갑자기 무산(毋山) 서하도(西下道) 마연촌(磨硯村)현(縣) 북쪽 5리에 있다. 에 이르러 도적질을 하여 소ㆍ말ㆍ재물을 모두 찾아서 약탈하고 나이 젊은 부녀를 잡아 묶어서 앞세워 몰고 갔는데, 봉사(奉事) 허여형(許汝衡)의 아내도 역시 잡혀간 가운데 들었다. 남간이 듣고 본현으로 달려 돌아와서 비밀리 독포장(督捕將) 정기룡(鄭起龍)에게 통지하였다. 정기룡이 방금 함양에 있다가 곧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달려서 정동치(井東峙)운봉현 동북쪽 40리 함양 지경에 있다. 에 이르러 남간과 상의하여 가만히 정탐하여 보니, 적당(賊黨)이 방금 율곡(栗谷) 운봉 북쪽 50리에 있다. 에 모여서 술자리를 크게 벌여서 연일 마시고 놀았다. 부근의 관원과 본 고을 경내의 사람과 남간이 거느린 군사 수백 명도 반은 김희의 앞잡이들이라 말을 믿을 수 없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아니하였다. 오직 허씨ㆍ장씨 집의 아내를 구출하는 것이 급하므로 적의 뒤를 밟아 알아내어 달려와 보고하였다. 정기룡ㆍ남간이 밤에 포위하니, 적들이 알고도 더욱 노래하고 춤을 추며 출전할 뜻이 없는 것같이 하다가 날이 밝을 때에 일시에 고함을 지르며 요란히 쏘며 포위를 뚫어 관군(官軍)이 무너져 퇴각하자, 적들이 천천히 나가서 안음(安陰) 길로 향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고파가 장성(長城)에서 패하여 죽고 장녀(張女) 등이 돌아왔다. 임걸년(林傑年)이 지리산의 여러 절을 다 무찌르니 중들과 인민이 피해를 입음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향로봉(香爐峯)에 주둔했다가 운봉 군사에게 밤에 습격을 당하여 패하여 달아났다.
*임걸년 부가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제도(諸道)에 토적(土賊)이 일어나다
이때 곳곳에 도적이 일어났다. 양주에는 강한 도적 이능수(李能水)가 있고, 이천에는 현몽(玄夢)이 있었다. 충청도에도 역적들의 난리가 잇달아 일어났다.
○ 갑오년 봄에 홍산(鴻山) 사람 송유진(宋儒眞)이 모반하였다. 적들이 밀서를 전주에 보냈는데, “임금의 악함은 고쳐지지 않고 부당은 타파되지 않았다. 부역이 많고 중하니 생민이 편치 못하다. 목야(牧野)에 용맹을 떨치니 비록 백이ㆍ숙제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백성을 위로하고 죄있는 자를 토벌한 것을 실로 탕(湯)과 무왕(武王)보다도 빛나도다.”하는 구절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의병장 이산겸(李山謙)이 한 짓이라고 무고하였으므로 산겸이 전주 무군사(撫軍司)에 가서 변명하였으나 잡혀 죽었다. 《조야참재》 《조야기문》에는 계사년 12월이라고 되어있다. 산겸은 지함(之?)의 아들이다. 의병조에 적혀 있다.
○ 도원수가 호서 역적들에게 격문을 보냈는데, “이것은 진실로 장강(張綱)을 만나지 못한 것이니, 어찌 반드시 우후(虞? 한 나라 때의 사람으로 지방 수령이 되니, 도적이 자취를 감추었다.)를 기다리랴. 항복을 받는 장막을 설치해서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사람을 기다리고 선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서 장차 어두운 곳에서 탈출하는 무리를 받아들이라.” 하였다.
○ 정월에 송유진은 참형을 당하였다. 그 무리 오윤종(吳允宗)ㆍ김천수(金千壽)ㆍ이춘복(李春福)ㆍ김언상(金彦祥)ㆍ송만복(宋萬福)ㆍ이추(李秋)ㆍ김영(金永) 등이 함께 죽임을 당하였고, 고발한 사람 홍우(洪瑀)ㆍ홍각(洪慤)은 모두 당상에 가자 되었다. 《일월록》
○ 이때 유진이 도적의 무리를 불러 모아서 격문을 돌리고, 겁탈하고 노략질하니 서울이 진동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유성룡에게 대궐안에 들어와 숙직하도록 명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런 위태롭고 염려스러운 때에 갑자기 대신을 불러들여서 시위하게 하면 더욱 백성들의 마음을 놀라게 할 것이옵니다.” 하니, 임금이, “경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아니하니 무원형(武元衡)의 일을 보지 않았는가.” 하였다. 《조야첨재》
○ 갑오년 여름에 토적이 사방에서 일어나 천명 만명으로 떼를 지었는데, 남원과 운봉(雲峯) 등지에서 더욱 심하였다. 대낮에도 못된 짓을 자행하고 나타났다 숨었다 하면서 도적질하니 그 형세가 날로 성해져서 관가에서도 금하지 못하고 길도 막혔다. 이때 밀과 보리가 익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좀도둑질을 하므로 밭 지키는 사람이 많이 살해되었다.
○ 남원의 토적 김희(金希)와 영남의 도적 임걸년(林傑年)이 가장 횡포하였다. 도원수가 전라 병사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잡도록 하였더니 군사가 무너져서 물러났다. 원수가 다시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을 독포대장(督捕大將)으로 삼아서 토벌하게 하였다. 8월에 기룡이 도적 이복(李福)의 목을 베자 그 무리들이 김희와 합하였다.
○ 남원의 토적 고파(高波)가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이교점(梨橋店)에 왔다. 점 사람이 고발하므로 판관 김류(金瑠)가 군사 4백 명을 동원하여 점마을을 덮쳤으나 도적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밥을 지어 먹고 활을 힘껏 당기어 갑자기 나와서 관군을 쏘아대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김류도 물러났다. 도적들은 그가 돌아가는 길에 먼저 가서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오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갑자기 활을 쏘아서 김류의 말 안장을 맞혔다. 김류는 겨우 몸만 빠져 나와서 성중으로 달려 들어갔다.
○ 김희ㆍ강대수(姜大水)ㆍ고파 등이 합세하여 약탈하였다. 운봉 현감 남간(南侃)이 독포장 정기룡에게 통지하였더니, 기룡이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운봉으로 달려와서 모였다. 도적들이 한창 술자리를 베풀고 대대적으로 모여 있었는데, 관리와 군졸이 태반이나 도적의 무리였으므로 이쪽의 계획이 대부분 누설되었다. 기룡ㆍ김류ㆍ남간 등이 밤을 타서 나아가 포위하니 도적들은 이를 알고도 더욱 풍악을 치면서 싸울 작정을 하지 않았다. 해가 뜰 무렵에 적들이 고함을 치면서 포위망을 뚫고 나오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도적들은 느릿느릿 천천히 갔다.
○ 임걸년이 지리산의 사찰을 모두 무찔렀다.
○ 임실(任實)의 도적들도 노략질을 하였으나 관군은 여러 번 패전하였다. 도적이 드디어 도장(都將) 등을 죽이고 소굴로 돌아가면서, “전주ㆍ남원에서도 우리를 당해내지 못하는데 너희같은 쇠잔한 고을이 우리를 감히 도모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남원 등 일곱 고을 군사가 협력하여 회문산(回文山)에 모여 있는 도적을 잡는데 산에 불을 지르고 나무를 찍어내고 사면으로 공격하여 포위하니, 도적들이 지탱하지 못하여 높은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한 곳에 웅거하기도 하였으나 연일 굶주리고 피곤하여 능히 싸우지 못하였다. 관군이 밤을 타서 백여 명을 잡아 죽이니 회문산 길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 을미년 봄에 영남 관군이 도내의 도적 김희ㆍ강대수를 토벌하여 죽였고, 장성(長城) 사람이 또 고파를 죽이니 길들이 비로소 소통되었다.
○ 병신년 7월에 홍산(鴻山) 도적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일으켰다. 몽학은 성질이 본래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처음에 부장이 되었다가 국사의 위태함을 보고 한현(韓玄) 등과 함께 몰래 반역을 꾀하여 불량배들을 불러 모으니, 이때 백성들이 난리와 관리의 침탈의 혹독함에 곤란을 겪고 있었으므로 도적을 따르는 자가 바람 앞에 풀이 쓰러지듯 하여 며칠도 안되어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임천(任川)ㆍ홍산ㆍ청양(靑陽)ㆍ정산(定山)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으며, 임천 군수 박진국(朴振國)은 포로가 되었다. 병사 이시언(李時言)이 군사를 내어 토벌하였으나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져서 도원수 권율에게 위급함을 보고하였다.몽학이 홍주(洪州)를 포위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성을 굳게 지키고 대항하여 여러 날이 되어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몽학은, “한현이 만약 왔다면 목사의 머리는 깃대 끝에 달려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면서 군사를 옮겨서 덕산(德山)으로 향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안도하였다. 적들이 서울로 쳐들어가겠다고 말을 퍼뜨리니 성안 인심이 흉흉하며 두려워하였고, 진위(振威) 수원의 백성들은 모두 떠날 태세로 짐을 메고 서 있었다.이때 적병이 지나가는 곳의 밭을 김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하던 자는 막대기를 들고 분주하게 기꺼이 따라 나섰다. 박진국이 적들 속에서 빠져나와 원수부에 고하기를, “서산 군수 이충길(李忠吉)이 그 아우 세 명과 함께 적당과 몰래 통하였다.” 하니, 원수가 감사를 시켜 공주(公州)에 잡아 가두게 하였다.
○ 권율이 전라 감사 이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경유하여 이산(尼山)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적군의 형세가 대단히 성하다는 말을 듣고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金德齡)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올 것을 명하였다. 또 영남에 명하여서 항복한 왜인을 거두어 거느리고 오도록 하였다. 호남 군사는 석성(石城)에 주둔하였다. 전주 아병(牙兵) 윤성(尹誠)이 장사 십여 명을 뽑아서 밤에 적진에 들어가 전통(傳筒)을 쏘여 큰 소리로 호통치니 적군의 무리가 크게 놀라서 아우성치며 시끄러웠다.윤성이 고함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군이 각각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니 내일이면 마땅히 무찔러 죽일 것이다. 너희들 중에는 협박을 받아서 따라 온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괴수를 목베어 와서 항복한다면 같이 죽는 것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니, 적의 무리들이 이 말을 듣고 다투어 병기를 가지고 막사 안으로 돌입하여 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목베었다. 그러자 적군이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한현은 수천 군사를 거느리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시언과 홍가신이 군사를 보내어 공격하여 현을 사로잡아 군중에서 목베었다. 그 뒤 33년에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홍가신 등 네 사람이 녹훈되었다.
○ 이몽학은 경구(京口)에 사는 서자이다. 불량하여 행실이 좋지 않으므로 그 아버지에게 쫓겨나서 충청ㆍ전라도 사이를 왕래하였다. 한현(韓絢)이 선봉장이 되었을 때 그 군대에 예속되어 한현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몽학이 먼저 홍산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고을 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또 임천 원 박진국을 사로잡으니 인심이 와해되어서 연달아 6, 7 고을이 함락되었다. 한현은 일이 성사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호응하지 않았다. 몽학이 홍주로 진격하자 목사 홍가신은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어찌 할 방책이 없어 성문만 닫고 있을 뿐이었다.원수의 종사관(從事官) 신경행(辛景行)이 마침 왔다가 격문으로 수사 최호(崔湖)를 불렀다. 최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니 인심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무장 박명현(朴命賢)은 날래고 용맹하며 꾀가 있는 사람인데 상제(喪制)로서 그 고을에 있었다. 가신이 부르니 명현이 곧 군복을 입고 성에 들어왔으므로 성을 더욱 굳게 지키게 되었다.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그 무리를 속여,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ㆍ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 하니, 무리들이 그렇게 여겼는데, 홍주에 이르러서 적의 군사들은 수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고 군사들의 기세가 꺾여서 밤중도 되지 않아 군대가 무너졌다. 홍산 현감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던 윤영현이 적진에서 뛰어나와 성 아래에 이르러, “도적들이 무너져 흩어지니 추격하시오.” 하고 소리쳤다.성중에서는 믿지 않고 영현을 묶어 들이게하였는데, 새벽이 되어 보니 적의 군사가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성중에서 비로소 후회하여 군사를 풀어서 추격하여 사로잡고 죽인 것이 많았고, 적의 부하 임억명(林億明)이 몽학을 목베어 바쳤다. 한현도 일이 발각되어 목베었다. 《자해필담(紫海筆談)》
○ 적은 이덕형(李德馨)의 공훈과 명망이 중하므로 문초 받을 때에 덕형을 끌어다 넣었으므로 덕형이 거적을 깔고 엎드려 40일 동안 처분을 기다렸다. <한음묘지(漢陰墓誌)>
○ 그때 가신은 민병을 모으고 또 고을에 거주하던 무장 임득의(林得義)ㆍ박명현 등을 불러서 성을 지킬 계획을 하였는데, 남포(藍浦) 현감 박동선(朴東善)이 사변 소식을 듣고 수사 최호(崔湖)에게 급히 보고하고, 군사를 내어 홍주를 구원하려고 하니, 최호가 동선에게 급히 와서 서로 의논하자고 하였다. 동선은 곧 군사를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가자고 하였으나 최호는 수군은 육지에서 싸우는 군사가 아니라고 하여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있으므로 동선이 큰 소리로, “이때가 진정 어떤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차이를 따지고 있소?” 하였다.드디어 수영의 군사를 모두 동원시키고 또 보령(保寧) 현감 황응성(黃應星)에게 명하여 본 고을 군사를 모아서 함께 충주 성으로 들어갔다. 성중에서는 구원병을 얻어 기세가 자못 떨쳐졌다. 이에 적들이 어두움을 타고 도망쳤다. 《조야첨재》
○ 몽학의 무리가 도망쳐 흩어지니 명현 등이 성에서 나와 추격하였다. 권율이 수색하여 체포하도록 명령하니 고을에서 각각 수색 체포하였다. 권율이 즉시 심문하여 자복을 받고 모두 경옥(京獄)에 넘겼다. 임금은 동의금 윤승훈(尹承勳)을 직산(稷山)에 보내서 죄의 경중을 심문하여 위협받은 어리석은 백성은 가벼운 쪽으로 석방하고, 경옥에 넘긴 자는 백여 명인데 처형한 자는 법과 같이 처자를 종으로 삼고 재산을 적몰하였다.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중외에 선유하였다. 《조야첨재》
○ 충용장군 김덕령이 곤장에 맞아 죽었다. 아래에 자세히 적었다.
○ 곽재우(郭再祐)는 잡혔다가 은명을 받아 진에 돌아갔다.
○ 몽학이 선봉장이 되어 정산(定山) 쌍방축(雙方築)에서 군사를 모았는데 거의 6, 7백 명이나 되었다. 7월 6일 새벽에 홍산(鴻山)에 들어가서 현감 윤영현을 체포하고, 이어 임천으로 가서 또 군수 박진국을 체포하였다. 7일에 정산을 함락시키니 현감 정대경(鄭大卿)은 몸을 빼어 달아났고, 8일에는 청양(靑陽)을 함락시키니 현감 윤승서(尹承緖)가 또 도망쳤으므로 수일 동안에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9일에 대흥(大興)을 함락시키니 군수 이질수(李質粹)가 또 도망쳐 산중에 들어가서 보고서를 만들어 사람을 보내어 신평(新平)ㆍ대진(大津)을 거쳐 서울에 도달하여 비변사(備邊司)에 바치게 하였으니 큰 길이 이미 막혔기 때문이었다. 적의 무리들 중에 병기를 가진 자는 군관ㆍ무사 등 수백 명 뿐이고, 그 밖에는 모두 시골 백성들로 맨손이었다. 9일에 적은 홍주를 침범하려 하였는데, 이보다 먼저 고을 관속 이희(李希)ㆍ신수(申壽) 두 사람이 목사 홍가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거짓 항복하는 체하여 도적들의 행세를 자세히 정탐하여 오겠다.” 하고, 함께 광시역(光時驛)으로 갔다.길가에서 거짓말로 적에게 불기를 원한다고 하니 대흥에서 서로 보자고 하여, 고을에 이르러 의자에 걸터 앉아서 불러보니, 적이 말하기를, “오늘도 아직 시간이 이르니 홍주로 공격해 가려고 한다.” 하였다. 이희ㆍ신수가, “홍주에서는 성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갑자기 들어갈 수 없다. 우리들이 먼저 들어가서 다시 허실을 살피고 와서 보고한 뒤에 가는 것이 좋겠다. 그러면 우리들도 성 안에서 호응하겠다.” 하니, 적이 그대로 머물고 출발하지 않고 그 이튿날 회보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으므로 늦게서야 출발하였다.이희와 신수는 돌아와서 가신에게 보고하고 성을 지키는 기구를 정비하여 더욱 견고하고 주밀하게 하였다. 고을에 살던 무장 박명현이 난이 일어난 처음부터 성에 들어오니 목사가 그를 의지하여 중하게 여겨 무사로서 유명한 자들이 많이 모였다. 체찰사의 종사관 신경행이 마침 내포(內浦)에 왔다가 변고를 듣고 이웃 고을 수령들에게 전령하였고, 수사 최호(崔湖)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러 모든 조치가 완비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이희와 신수가 꾀를 써서 도적의 공격을 늦추게 한 힘이었다. 명현이 무사를 보내어 적의 선봉을 맞아 공격하여 잡은 숫자가 많았다.적은 고을 성에서 2, 3리 쯤 되는 거리에 다섯 개의 진을 쳤는데 한 진에는 각각 천여 명이나 되었다. 저녁 때에 적장 몇 사람이 말을 달려 성 아래로 와서, “천운이 이와 같은데 성중 사람들은 어찌 나와서 응하지 않는가.” 하고 소리쳤다. 밤에 성중에서는 화포(火砲)와 화전(火箭)을 쏘아서 동문 밖 인가를 불사르니 불꽃이 하늘까지 비추었다. 병사 이시언(李時言)은 온양(溫陽)을 경유하여 바로 홍주를 향하여 이미 예산(禮山) 무한성(無限城)에 도착하였고, 어사 이시발(李時發)은 유구(維鳩)에 진을 쳤으며, 중군 이간(李侃)은 청양에 진을 치고서 모두 홍주로 오려 하니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쳐졌다.11일 새벽에 적이 스스로 무너져 도망가므로 명현이 성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청양에 이르렀다. 적이 주둔하고서 항거하였으나 최호와 여러 장병들이 또 많이 도착하였다. 적장의 막하였던 김경창(金慶昌)ㆍ임억명(林億明)ㆍ태근(太斤) 등 세 사람이 몽학의 머리를 베어 바치니 오합지졸이 일시에 흩어졌다.서울에 거주하던 겸사복 한현이 몽학을 지시하여 군사를 일으키게 하고는 도망가서 면천(沔川) 시골 집에 숨어서 성패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적의 무리로 잡힌 자들이 대부분 한현을 주모자라고 하므로 한현을 잡아서 국문하니 죄상이 모두 드러났다. 함께 모의한 자 중에 두드러진 자는 모두 체포되어 죽임 당하였다. 《갑진만록(甲辰漫錄)》 ○ 《공신록》에는 신경행의 경(敬)자가 경(景)자로 되어있다.
○ 처음에 역적이 일어났다는 보고가 매우 급하니 훈련대장 조경(趙儆)이 소속 경병(京兵) 8백 명을 거느리고 싸우러 가기를 자청하였고 도감도청(都監都廳) 윤경립(尹敬立)도 그를 따랐다. 11일에 서울을 떠나서 진위(振威)에 도착하였는데 적이 패하였다는 보고가 왔으므로 군사를 돌리도록 명령하였으며, 황해ㆍ강원ㆍ경기 군사들도 불렀는데 이때에 와서 모두 정지시켰다.김경창ㆍ임억명은 특별히 가선에 승진시키고 태근은 발탁되어 6품 실직을 제수받았는데, 얼마 뒤에 대간들이 경창은 두 번째 공이라고 논하여 통정으로 내렸다. 이희와 신수 등도 6품 실직에 제수되었으며, 이시언은 첫번째 공으로 최호와 함께 가선에 승진되고, 이시발과 홍가신은 통정이 되었다. 박명현이 처음에는 상을 받지 못하였다가 조정에서 여러 번 청한 뒤에 가선에 승진되었다.
○ 그때 혜성이 자미 제좌(紫薇帝坐)를 매우 급하게 범하더니 평정되어 곧 사라졌다.
○ 갑진년 4월 청난공신에 홍가신ㆍ박명현ㆍ최호ㆍ신경행ㆍ임득의 다섯 사람이 녹훈되었다.
[주D-001]목야(牧野) : 주 나라 무왕이 은 나라 임금 주(紂)를 토벌할 때 목야에서 싸우는데, 무왕의 장수 강태공이 매처럼 용맹하였다. 무왕이 출병할 때에 백이ㆍ숙제가 옳지 못하다고 말린 일이 있다.
[주D-002]탕(湯)과 …… 빛나도다 : 탕(湯)은 자기의 임금인 걸(傑)을 쳤고, 무왕은 자기의 임금인 주(紂)를 쳤다. 여기서 빛이 난다는 말은, 무왕이 탕의 자손인 주를 친 것이 탕이 걸을 친 것보다도 공이 크다는 것이다.
[주D-003]장강(張綱) : 한 나라 때의 사람인데 장영(張?)이란 도적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홀몸으로 적진에 들어가서 달래어 항복을 받았다.
[주D-004]무원형(武元衡)의 일 : 당 나라 때 반란을 일으킨 번진(藩鎭)들을 토벌하려 하는데, 번진이 당 나라의 정승인 배도(裵度)와 무원형을 암살하려고 자객을 보냈는데 배도는 칼을 맞았으나 다행히 죽지 않았고 무원형은 칼맞아 죽었다.
[주D-005]자미 제좌(紫薇帝坐) : 자미성(紫薇星)은 황제를 상징하는 별인데 이것을 제좌라고 한다.
慶尙左道水軍節度使贈兵曹判書李公神道碑銘 약헌집(約軒集)
時有林傑年者。嘯聚爲劇盜。橫行殺人。公嘗暮過山谷間。傑年率徒數百。欄截公去路。公策馬直前無怖色。傑年曰。汝爲誰。公?聲曰。吾李某也。遂按劍瞋目曰。汝等弄兵潢池。敢梗聖化。何能保其首領耶。因反復善諭之。賊大感畏。卽投兵解散。
金陵集卷之十八 宜寧南公轍元平著
贈兵曹判書知義禁府事行慶尙道左道水軍節度使李公墓表
公善射。力能搏虎。少時行山谷中。時林傑年聚徒數百人爲盜。橫行殺人。見公遮路。使不得行。且問汝爲誰。公瞋目按劒曰。吾乃李某也。汝等敢爲亂耶。傑年爲?謝。謂其徒曰。此壯士也。不可犯也。捨之而去。
난중잡록 3(亂中雜錄三) 정유년 만력 25년, 선조 30년(1597년) 이 책은 지금부터 약 4백 년 전 전라도 남원에서 유학자이며 무용(武勇)을 겸비한 의병장(義兵將)으로 이름이 높은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선생이 저술한 야사(野史)이다. 전체를 총괄하여 〈산서야사(山西野史)〉 또는 〈대방일기(帶方日記)〉 등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어서, 이조 중기 전란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는 동시에 그 시대의 정치ㆍ문화ㆍ사회ㆍ당쟁ㆍ외교 등 관계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11일 오후에 흉악한 적이 숙성령(宿星嶺)을 넘어서 혹은 10여 명 혹은 20여 명씩 끊임없이 잇따라 내려 보내 원천(原川)의 촌락을 정탐하고, 밤에는 성밑에 들어와서 엿보고 돌아갔다. 다음날 행장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넘어 원천(原川) 원평(院坪)에 주둔하고 선봉이 이미 요천(蓼川) 가에 진출하였는데, 동남 4ㆍ50리 안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가리우고 포성이 땅을 진동하였다. 나는 아직 왜놈을 직접 겪어보지 못하였으므로 용추(龍湫)한 고을은 군사를 피할 수 있다 하여 동형(洞兄) 진사 정사달(丁士澾)과 양덕해(梁德海) 형과 상의하였다. 적이 이리로 오리라는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에 정진사는 파근원(波根源) 아래로 들어가고, 양형은 나를 따라서 상룡추(上龍湫) 가로 들어갔더니, 이날 밤에 본촌(本村) 사람이 적에게 잡혀 결박되었다가 도망해 왔다. 이것을 보고 비로소 병화(兵禍)의 참혹한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는 잠깐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곧 양형과 더불어 가솔 80여명을 이끌고 무산(毋山)쪽으로 달아나 장차 멀리 가고자 하였더니, 팔량현(八良峴)에서 패한 병사가 달려와서 말하기를, “영남의 적이 이미 산음ㆍ안음에 이르러 조만간에 여기에 도착할 것이다.” 하므로, 양형과 더불어 노상에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을 걱정하였더니, 운봉현 선비 주난수(周蘭秀)란 사람이 지리산 서쪽 기슭으로부터 달려와서 큰소리로 급히 외치기를, “당신들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닥친 것을 모르오? 대방(帶方)의 연기와 불꽃은 하늘에 치솟고, 영남의 포성은 땅을 진동하니, 이 깊은 산 험한 골짜기를 잃으면 중도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우리는 이미 큰 산에 막을 쳐 놓았으니, 당신들은 멀다 여기지 말고 한 곳에 함께 머물면서 같이 죽기로 마음을 맹세하면, 산을 수색하는 자질구레한 도적은 걱정할 것이 없소.” 하였다. 나는 양형에게 말하기를, “이 말도 역시 이치가 있다. 지금 만약 거기에 갔다가 화를 당한다 해도 그것은 주군(周君) 때문이요, 가족을 보존하고 생명을 건진다 해도 그것도 주군 때문이다.” 하고, 곧 망랑현(望?峴)에 올라가 밤을 지내었다.
14일 적병이 숙성(宿星)ㆍ원천(原川)으로부터 산으로 흩어져 학익진(鶴翼陣 학이 날개 펴듯 좌우익을 펴고 몰려오는 진법의 하나)을 벌리고 내려오는데 잠시도 쉴 사이 없이 성밖에 와서 사면으로 나누어 에워싸고 토목(土木)의 역사를 전보다 더욱 급하게 서두르며 비운장제(飛雲長梯)를 많이 만들어 성에 오르는 기구로 삼고, 대무천(大毋泉) 모퉁이에다 풀ㆍ짚단ㆍ흙ㆍ돌을 운반하여 참호를 메워 길을 내고 그 밖에도 장대를 가로 매었는데 그것이 거의 백여 보에 이르렀다. 민가의 판자를 가져다가 장대에 기대어 죽 늘어 세우고, 또 성밖의 장벽을 뚫어 모두 총쏘는 곳으로 삼았다. 또 높은 사다리를 삽교(?橋) 모퉁이에다 매어 성안을 굽어보면서 무수한 탄환을 쏘아대니, 이 성의 안팎을 지키던 명 나라 사병들이 일시에 모두 죽어버려 동남 모퉁이의 성첩이 다 비게 되었다. 정오에 적병이 또 칠전(漆田)으로부터 고함치며 돌진하면서 일시에 총을 쏘아대니, 탄환이 우르릉거리는 뇌성과 쏟아지는 우박 같아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서문의 왜적은 수송용 차에다 만복사(萬福寺) 절 이름. 서문밖 2리 앞에 있는데 5백 나한(五百羅漢)이 있었다. 의 사천왕(四天王)을 싣고 와 성밖을 돌며 시위하니 대군이 더욱 놀랐다. 양원은 말하기를, “적병은 연일 도전하고 아군은 움츠려들어 약세를 적에게 보인 것이 진실로 적지 않았으니, 이제 군대를 내보내 공격해야 한다.” 하자, 중군은 말하기를, “이것은 안전한 계책이 아니니 성을 굳게 지켜 응원군을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듣지 아니하고 곧 천여 명의 군병을 모아 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적병은 속임수로 물러갔다. 아군이 돌다리 밖까지 따라가자 적병은 문밖으로부터 상하로 잠복하였다가 기어서 앞으로 나와 포위하고 무찔러 죽일 심산이었다. 양원이 급히 주라를 불게 하고 초요기(招搖旗)를 여러 차례 펄럭이니 성밖의 군사들이 도로 들어왔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수삼 명이었다. 날이 저물자 군사를 거두어 굳게 지켰다. 이날 적병 50여 명이 운봉현(雲峯縣)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15일 양원이 동문의 성위에 있으면서 주라를 몇 차례 불게 하였으나 성중은 고요하므로 관가(管家 하인)를 시켜 성위로 나가서 크게 두어 번 소리치게 하니, 왜놈 5명이 달려서 동문 밖 돌다리까지 와 꿇어앉아 전갈이 있기를 청하였다. 양원이 통사(通事)로 하여금 몇 마디 말을 설파하게 하니, 다섯 왜놈이 방암봉(訪岩峯)으로 달려 돌아갔다가 곧 다시 돌아와 또한 몇 마디 말로 보고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양원이 적병에게 서로 사자(使者)를 내왕하게 하자고 말하자, 명병(明兵)을 먼저 보내라고 회보하였다.”고 말하나, 자세하지 않다. 양원이 그 자리에서 관가(管家) 두 사람을 불러 이야기하여 내보내니, 왜놈의 사자가 명병을 대동하고 방암봉을 향하여 갔다. 적의 장수와 만나 일을 의논하였는데, 행장(行長)은 음식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저녁 때에 왜장의 사자 5명이 말을 타고 와서 곧장 동문에 이르니, 양원이 통사를 시켜 왜사(倭使)를 대동하여 남문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양원이 용성관(龍城館)에 들어가 앉아 왜사를 만나 의논하니, 왜사는 행장의 말이라면서, “빨리 성을 비기 바랍니다.” 하였다. 양원이 말하기를, “내가 15세부터 장수가 되어 천하를 횡행하면서 싸워 이기지 못한 적이 없소. 이제 정병 10만 명으로 이 성을 지키는데, 퇴각하라는 명령은 없었소.” 하니, 왜사들이 도로 남문으로 나아갔다. 왜사가 또 전언하기를, “천여 명의 잔졸을 가지고 어떻게 백만의 군대를 당할 것입니까? 천장(天將)께서는 조선에 무슨 은혜가 있어 후회할 일을 남기려 하시오?” 하였다. 양원이 몇 마디 말을 일러 보냈다. 여러 날 포위당하였는데 적의 형세는 더욱 성하여 호호탕탕하고 위급하기가 바람탄 불과 빠른 우레 같았다. 점차 성에 다가와 더욱 공세를 퍼부우니 우리 형세는 다급하여 날마다 점점 외롭고 위태해 갔다. 성 내외의 명 나라 병사들이 서로 부르짖기 시작하고, 우리 나라의 남녀들도 동분서주하며 울었다. 적이 이것을 알고 침공을 배나 더했다. 이날 밤에 큰비가 오자 적병은 어둠을 틈타 성을 공격하였는데, 우리 군대와 중국 군대는 맞아 싸우느라 잠자고 밥먹을 틈도 없었다. 이때 심산궁곡까지도 왜적의 발굽에 거의 짓밟혔고, 운봉(雲峯)ㆍ주성(周性)의 무리들도 모두 약탈을 당했다. 나와 양형(梁兄) 및 백암(白?) 이공직(李公直)의 부형과 가족 수백 명이 돌의 모서리를 붙잡고 기어서 내려갔다. 황류동(黃流洞)지리산의 황령사(黃嶺寺)와 향로봉의 사이에 있는데, 수원(水源)은 반야봉(般若峯)에서 나와 삼기(三岐) 묘봉(?峯)을 두루 돌아서 내려온다. 에 이르러 밤을 지냈다. 날마다 고성(孤城)을 바라보니 적병이 달 무리처럼 에워싸 위급하였다.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낮과 같이 밝았다. 저 관군들이 힘을 다하여 지키고 방어하는 고생과 흉한 왜적이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형상을 생각하니 가슴 아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음과 눈물이 함께 나오고, 한숨 짓고 탄식하였다.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만일 1개 여단의 군대가 내 손에 있다면, 한 번 죽음을 무릅쓰고 전진하여 나아가 성원하여 아군이 갈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고, 저 왜적들의 집어 삼킬 듯한 기세를 꺾는 것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만 애석하다! 수양(?陽) 한 성이 함락에 임하여서는 장순(張巡)의 한쪽 손으로는 공효를 이룰 수 없었고, 하란(賀蘭)의 주둔병이 이미 흩어지니 제운(霽雲)의 혈성(血誠)도 무엇에 쓰겠소. 뜻은 있으나 속수무책이니 다만 통분할 뿐이오.” 하니, 모든 병사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 청정 등의 군사가 함양(咸陽)에 이르렀는데, 선봉 수천 명이 진군하여 황석성(黃石城) 밑에 임박하여 통사(通事)를 시켜 개산(介山)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라.” 하였다. 백사림(白士霖)이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왜적이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개산을 죽인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적병이 고함쳐 말하기를, “성을 비어 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 하니 백사림이 줄을 타고 성에서 매달려 내려가고 군사는 무너져 달아났다. 적이 입성하여 마구 죽이니,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ㆍ안음 현감(安陰縣監) 곽준(郭?) 등은 가족과 함께 죽었으며, 근처 첩입관(疊入官)과 장졸 등 죽은 자가 5백여 명에 달했다. 개산은 김해(金海) 사람이다. 아버지가 임진란 초부터 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계책을 도왔다.
이날 나는 정령성(鄭嶺城)으로 향하였는데, 몇 대의 빠른 인마가 월운령(月雲嶺)으로부터 달려와 나에게 고하기를, “적병이 벌써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살상과 노략질이 한창 혹심하여 우리들은 피해 달아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즉시 돌려서 무산(毋山)으로 향하니 적병이 또한 가득하므로, 판왕령(板王嶺)으로 올라가 부운령(浮雲嶺)모두 지리산 서쪽 기슭의 재 이름. 을 지나 도로 고촌으로 내려왔다. 이튿날 용추의 산막으로 돌아오니 본촌 사람으로 화패(禍敗)를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인월(引月)의 왜적은 다 영남으로 들어갔다가 이어서 좌도(左道)의 옛 소굴로 돌아갔다.
-인근 지명이 상세하다. 김덕령의 죽음.
병신년 만력 24년, 선조 29년(1599년)당학(唐?)이 전국에 전염되어 사람마다 앓지 않는 이가 없었다.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 사는 역적 이몽학(李夢鶴)의 군사가 일어났다. 이몽학은 본시 흉하고 교활한 무리로서 처음에 편비(?裨)가 되어 종군하였다가 국사가 어렵고 위태한 것을 알고 감히 하늘을 쏠 꾀를 내어 동료 한현(韓玄) 등과 가만히 반역을 도모하여 도당을 모았다. 이때에 백성들이 난리와 온갖 침노에 곤궁해졌다가 한 번 풍문을 듣자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여 수일이 못 되어 군사가 만여 명이 되었다. 6일에 나아가 임천(林川)과 홍산을 함락시키고, 그 길로 청양(靑陽)ㆍ정산(定山) 등 여섯 고을을 함락시켰다. 임천 군수 박진국(朴振國)이 아전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늘 적중에 머물렀다. 이때 이시언(李時言)이 본도 병사(兵使)로서 군사를 발하여 잡으려 하다가 관군이 두 번이나 무너졌다. 이에 원수에게 위급함을 보고하니 권율이 전주에 있다가 곧 전라 감사로 하여금 군사를 전주에 모이게 하였다.
○ 이몽학이 홍주(洪州)를 포위하니 목사 홍가신(洪可臣)이 굳게 지켜 막아 싸우니, 이몽학이 수일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물러나면서 말하기를, “만약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기 끝에 달 것이다.” 하였다. 덕산(德山)길로 향하면서 도처에 거짓말로 꾀기를, “읍내나 촌에 사는 백성들은 편안히 있고 동하지 말라. 이번 거사는 남아 있는 백성을 수화(水火) 가운데서 구제하려는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장군 김덕령(金德齡)과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 등은 다 우리와 공모되었으니, 마땅히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서울로 향하리라.” 하였다. 이름 드러난 사람들을 거짓 끌어대는 것은 저희들 군사가 믿을 데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함이니, 음흉하고 교활한 꾀가 불측하다.
12일 도원수 권율이 전라 감사 박홍로(朴弘老)와 모든 장수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礪山)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였다. 권율이 길에서 적세가 매우 치성함을 듣고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오게 하고, 또 군관을 영남 여러 진(鎭)에 나누어 보내어 항복한 왜병을 수합하여 거느리고 오게 하였다. 이때에 남원 판관 김유(金?)는 이미 갈리고 이덕회(李德恢)가 대신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군사를 거느리고 따라와 토벌하였다.
○ 적병이 서울로 간다고 큰소리를 치니 서울이 술렁거리고 두려워하고, 진위(振威)ㆍ수원(水原) 땅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짐을 꾸려 가지고 있었다. 이때에 반군이 지나는 곳마다 밭을 매던 자는 호미를 들고, 행상(行商)하던 자는 지팡이를 들고 분주히 즐겨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 이것이 어찌 그 본심일까?
○ 임천 군수가 적중에서 나와서 원수에게 고하기를, “서산 군수 이충길(李忠吉)이 그의 동생 3명을 거느리고 몰래 역당에게 붙어서 왕래하면서 서로 돕는다.” 하므로, 권율이 본도 감사로 하여금 비밀리에 이충길을 잡아서 공주에 가두었다.
○ 권율이 호남 군사로 하여금 나아가 석성(石城)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전주 판관 □□이 척후장(斥候將)으로서 먼저 들어가 적을 정탐하였다. 판관의 아병(牙兵) 윤계(尹誡)가 장사 10여 명을 모집하여 밤에 적의 진중에 들어가서 총통을 연달아 쏘며 큰소리로 외치니, 적도들이 크게 놀라 떠들었다. 윤계가 외치기를, “도원수와 전라 감사와 충용장군이 각기 군사와 말 수만을 거느리고 이미 이 땅에 도착하였으니 내일은 마땅히 소굴을 무찔러 죽여 남김이 없게 할 것이다. 너희 적들 가운데는 아마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따른 자가 많을 것이니, 만약 적장을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면 몰사하는 화를 면할 수 있으리라.” 하였더니, 적의 무리들이 들어 알고는 다투어 칼을 가지고 장막 가운데 돌입하여 이몽학을 누운 자리에서 베어 죽이고 일시에 무너져 흩어졌다. 한현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홍주 땅에 주둔하였는데, 이시언이 본주의 목사 홍가신과 진군하여 치니 적병이 패하여 달아나고, 한현은 생포되어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충청도가 다 평정되었다. 그 뒤 33년 을사년에 홍가신 등 4인을 정난공신(靖亂功臣)으로 녹(錄)하였다.
○ 충용장군 김덕령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처음에 역적 이몽학이 잡혀 죽은 뒤에 문서를 수색하여 보니, 김ㆍ최ㆍ홍 삼성(三姓)이 있었다. 한현이 생포를 당하자 원수가 물으니, 공술하기를, “김덕령ㆍ최담령ㆍ홍계남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곽재우(郭再佑)ㆍ고언백(高彦伯)도 다 우리의 심복이다.” 하였으므로, 권율이 곧 갖추어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김덕령 등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역적을 토벌하라는 원수의 명령을 받고 진주로부터 운봉(雲峯)에 도착하였다. 충청도가 평정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원수에게 휴가를 청하여 광주(光州)에 갔다 오려 하였으나 권율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김덕령이 본진으로 돌아왔다가 곧 진주 옥에 잡혀 갇히었다. 임금이 원수의 계를 보고 조정의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김덕령은 용기와 힘이 뛰어나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체찰부에 보내어 일이 있다고 핑계하여 덕령을 불러와서 그 자리에서 사로잡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어떤 이는, “그것은 불가합니다. 김덕령은 일개 미친 자이니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간사한 꾀를 써서야 어찌 아랫사람을 통제하겠습니까? 법대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옴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선전관은 무인이라 위임하여 보낼 수 없으니, 근신(近臣)을 보내라.” 하고, 승지(承旨) 서성(徐?) 등을 보내어 선전관과 도사를 거느리고 가서 김덕령을 잡게 하였더니, 당도한즉 덕령이 옥에 갇힌 지 며칠이 된 상태였다. 27일에 서성 등이 김덕령을 잡아서 남원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러 옥에 가두고 국문하였다. 곽재우 등도 또한 잡혀서 서울에 왔다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어 진으로 돌아갔다.
○ 중외의 대소 신료ㆍ기로ㆍ군민ㆍ한량인 등에게 내린 교서는 아래와 같다.
왕은 이렇게 이르노라. 민망하다. 임금인 내[矛]가 이 큰 난리를 만나서 큰 원수를 갚지 못하고 큰 수치를 씻지 못하여, 비록 너희 신민의 위에 있으나 항상 슬프고 답답하여 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 없는 것과 같더니, 지금 이 역적의 변이 또 위급한 때에 발생하였으니, 진실로 내가 나라 다스림을 잘 못하므로 말미암아 화란이 생긴 것으로, 마음이 아프고 얼굴이 부끄러워 진실로 어찌할 바를 모르겠노라. 아! 충청도 한 지방이 어찌 모두 올빼미의 당이리요마는, 조그마한 한두 놈이 휘파람을 불어 모으자 수일이 못 되어 따르는 자가 바람에 풀 쓰러지듯 하였으니, 고요히 생각하니 허물이 돌아갈 데가 있다. 감히 백성이 죄가 있다 하랴. 나는 생각하니, 전란의 결과로 백성의 죽은 것이 대개 열에 여덟, 아홉이 되고, 다행히 살아 남은 자도 겨우 실낱 같은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데도 위로하여 안정시키기를 먼저하지 않고, 토색을 일삼아서 가혹한 납세와 부역의 명목이 고슴도치털처럼 많아서 명 나라 병사가 먹을 것을 여기에서 판출(辦出)하고, 경비의 지출이 여기에서 나오고, 이것으로써 군사를 교련하고, 이것으로써 성을 쌓아서 골수가 이미 다 빠졌는데도 납세를 독촉함이 더욱 준엄하고, 근력이 이미 다 되었는데도 부역에 징발하기를 더욱 급히 하였고, 하물며 전라ㆍ충청도에 조금 완전하다 하여 역(驛)의 징발이 더욱 심하고, 더구나 형벌을 함부로 혹독히 하여 사람 보기를 풀 보듯 하니, 백성들이 해독을 못견디어 원망이 일어나 흙처럼 무너지고 지붕의 기와처럼 풀릴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위에서 전혀 몰라서 일찍이 능히 몸으로 고충을 겪고 비용을 절약하기를 구천(句踐 월(越) 나라 2대 왕)과 같이 하여 백성의 힘을 조금 쉬게 하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위로하며 어루만지기를 연 소왕(燕昭王)과 같이 하여 민심을 조금도 위로하지 못하여, 나의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맺혀 일어나 난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내가 백성을 저버렸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이 꾀는 말에 빠진 것이 또한 어찌 그 본정이랴. 이에 특히 협박당하여 붙은 자들을 치죄하지 않기로 뜻을 두었으나, 또 능히 때에 미쳐 선처하지 못하여 체포할 즈음에 옥석이 함께 타는 화를 면하지 못하여 거듭 백성에게 죄를 얻었으니 더욱 부끄럽고 슬퍼함이 깊도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비록 어두우나 또한 백성의 힘이 다 되어서 조금 쉬게 하여야 할 것을 알지마는, 왜적이 변방에 눌러 있은 지 이미 5년에 충돌의 화가 조석지간에 긴박하니, 사세가 속수무책으로 앉아 망하기를 기다릴 수는 없으므로, 군사를 교련하여 적을 방어할 계획을 하여 성을 쌓아 험한 데를 질러 막을 준비를 하고, 양식을 모아 군사에게 공급할 차림을 한 것은 모두 백성을 위하여 화(禍)를 제거하여 함께 보존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백성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노라. 나는 살릴 도리로써 부리는 것인데, 받들어 시행하는 자들이 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서, 백성을 보존하려는 거사가 한갓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결과가 되어 점차 원망이 쌓여 도적이 일어나게 만들었으니, 모두 내가 밝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조종(祖宗)이 태평을 거듭하여 경사를 쌓은 2백여 년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는 모두 길러줌을 받아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덕택 속에서 살고 죽고 하였는데, 보잘것없는 나의 몸에 미쳐서 외난(外難)이 이미 극심한데 내란이 또 일어나서 한 물(物)도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죽은 이가 서로 베개하였고, 태(胎)와 알[卵]까지도 싹 없어졌으니, 한밤중에 반성하여 일찍이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다. 역적의 괴수가 이미 처형되었으니 마땅히 위로하여 안정시킴이 시급하다. 대개 법으로써 백성을 안정시키려 하면 백성이 더욱 요란하고, 덕으로써 백성을 감화시키면 백성이 복종하기 쉬운 것이니, 난을 겪은 지방에는 빨리 연좌(連坐)의 법을 생략하고, 너그러운 덕을 펴서 전과 같이 안심하고 살게 하라. 또 사람을 말로써 감복시킴이 실천으로써 감복시킴만 못하고, 어질다는 소문은 실지로 어진 정치를 하는 것만 못하다. 오늘날 백성에게 해독(害毒)이 되는 것이 공납과 부역과 성지(城池)를 쌓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또한 마땅히 그 많고 적음을 요량하고, 그 완급(緩急)을 알아 내어 감할 것은 감하고, 중지할 것은 중지하여 한 가지 한 가지를 조치하여 백성들의 편의를 위주하여서 거듭 걱정과 해를 끼침이 없게 하고, 요역(?役)을 가볍게 하고 부역을 줄이어 정치가 공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도록 하여 한 가지로 태평의 정치에 이르게 하라. 이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라.
8월 24일 충용익호장군(忠勇翼虎將軍) 김덕령이 옥에서 죽었다. 김덕령이 전에는 비록 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죄가 아니었으므로 잡히는 날에 원통하게 여기는 이가 많았으나, 당국자들이 모두 시기하여 하나도 구(救)하는 이가 없어서, 어떤 이는 모함하기를, “김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 베듯 하였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고, 또 반역할 골상(骨相)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몰래 옥리(獄吏)를 사주하여 속히 죽이도록 하였다. 옥중에 있은 지 무릇 20여 일에 형벌로 문초하기 여섯 번에 다리뼈가 이미 부러졌으나 그래도 능히 무릎으로 걸었고, 볼기에 곤장을 때렸으나 목숨은 오히려 붙어 있어 동정이 평상시와 같았다. 조용히 스스로 변명하기를, “신이 만약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령을 받고 운봉까지 도착하였으며, 또 명령을 받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번 죽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은 계사년에 자모(慈母)가 죽었는데, 3년상의 애통을 잊고 원수를 갚으려고 분발하여 상복을 벗고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러 해 종군하여도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여 충성도 펴지 못하고 효도에도 어기었으니, 죄가 이에 이르니 만번 죽어도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구구한 속마음은 천지가 굽어 보시나이다. 신은 지금 목숨이 다 되어 가니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마는 다만 원하옵건대 죄 없는 최담령(崔聃齡)은 죽이지 마옵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김덕령이 형장(刑杖)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니, 참으로 적(賊)이로다.” 하고, 옥중에서 문초받기 위하여 대궐 뜰에 출입할 적에 그가 힘을 부릴까 의심하여 큰 나무에다 묶어서 옹위하여 다니게 하더니 이에 이르러 죽었다.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이름이 중국과 오랑캐 지역에 가득 찼었다. 전에 영남에 있을 때에 손으로 범 두 마리를 때려 잡아서 왜인에게 자랑하여 팔았다. 온 나라 사람들이 그를 의지하여 안심하였고, 왜놈도 또한 겁내어 항상 스스로 계엄하여 경계를 지키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는데, 국운이 불행하여 죄가 아닌데 죽였도다. 하늘이 그에게 수년의 수명을 더 주었더라면 정유년의 적이 어찌 전라ㆍ충청도에 쳐들어 올 수 있었으랴. 당시에 뜻 있는 이는 개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뒤에 뒤떨어졌던 왜적이 듣고는 그 진위(眞僞)를 알고자 하여 원수에게 통지하여 충용장군을 보기를 요청하니, 원수는, “집에 돌아가 상(喪)을 마친다.”고 답하였다. 그가 죽은 것을 자세히 알고는 모든 적추(賊酋)들이 술을 마시며 서로 축하하고 날뛰며, 기운을 내기를, “전라ㆍ충청도에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무술년 만력 26년, 선조 31년(1598년)
10일 곤양(昆陽)의 왜적 4백여 명이 하동(河東)ㆍ악양(岳陽)을 경유하여 지리산의 쌍계(雙溪)ㆍ칠불(七佛)ㆍ연곡(燕谷)의 여러 사찰로 들어가 수색하며 도둑질하다가, 반야봉(般若峯)을 넘어 14일에 몰래 남원의 황령(黃嶺)ㆍ운봉(雲峯)의 대암(臺?) 등의 절에 이르러 함부로 살육 약탈하고, 여러 왜적이 다시 칠불사로 집합하여 먼저 몇 놈의 적을 보내어 석주성(石柱城)을 밀탐하였다. 구례의 원 이정남(李挺男)이 적이 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가서 석주성(石柱城)을 정탐하다가 길에서 정탐하는 적을 만나 추격하여 잡으려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정남이 그대로 석주성에 있으면서 망을 보는데 왜병 수백 명이 돌진하여 성 밖에 이르러 오니, 정남이 후퇴하여 달아나자 적병이 용두까지 추격하여 왔다. 평안도 군사가 본도 병사와 같이 막아 싸우는데 명군이 계속하여 이르니 군세가 매우 성하였다. 적은 벌려서서 시위하다가 저녁 때에 이르러 물러갔다. 이광악ㆍ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바로 돌아왔다.
29일 명군 수천 명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였다가 이내 곡성으로 향하였다. 이방춘(李芳春)ㆍ우백영(牛伯英)은 성중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흑성(黑城)의 안가산(眼架山)에 진치고, 남방위(藍芳威)는 운봉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삼가(三嘉)로 향했다.
○ 승총섭(僧摠攝) 유정(惟政)은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주포(周浦)에 진을 쳤다.
○ 이광악의 장계로 인하여 함평 현감(咸平縣監) 김식(金軾)을 붙잡아 간 것은 군공(軍功)의 장계를 없애려 한 일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옥 안에 있으면서 형벌을 19차례나 받다가 용서를 받아 거제로 정배되었다.
○ 사천의 적 5백여 명이 진주를 경유하여 지리산으로 난입하여 두류(頭流)ㆍ금대(金臺)ㆍ안국(安國) 등의 절을 뒤지고 살육과 약탈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방위는 군사를 보내 공격하여 쫓았다.
9월 1일 명군 수천 명이 서울로부터 남원에 도착하여 백평(白坪) 뒷산에 진을 쳤다. 2천ㆍ3천 명씩 띄엄띄엄 내려오고 모두 인솔한 장수가 있었는데, 군사 기밀이 엄밀하여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13)농암집 제21권 서(序) 관서(關西) 승(僧) 현소(玄素)를 증별한 서
나는 어려서부터 유람을 좋아하여 국내의 산천을 모두 돌아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동쪽으로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여 드넓은 동해에 이르러 해와 달이 뜨는 곳을 구경하고, 영랑(永郞)과 술랑(述郞)의 유적을 더듬어 본 뒤에 서쪽으로 천마산(天磨山)과 성거산(聖居山)에 들어가 박연폭포(朴淵瀑布)의 장관을 구경하고, 남쪽으로 월출산(月出山)에 올라 남해를 굽어보았다. 또한 일찍이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거처하며 춘주(春州 춘천(春川)) 곡운(谷雲)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고, 기타 마니산(摩尼山), 수양산(首陽山), 용문산(龍門山) 같은 곳도 모두 일람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내 산천 가운데 열에 한둘에 불과하고, 세상에서 큰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智異山), 태백산(太白山), 한라산(漢拏山) 같은 곳은 모두 미처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들으니, 묘향산(妙香山)은 특히 여러 산 중 가장 웅장하고 빼어나며 사찰도 가장 정결하고 아름다운 데다 고승(高僧)과 이름난 승이 가장 많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매우 보고 싶었으나 거리가 멀어 가 보지 못하였다.
작년에 서쪽으로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살수(薩水)를 굽어보고, 백상루 위에서 동북으로 바라보니 묘향산이 백 리 밖에 있어 이틀이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 여행길이 급하여 가 볼 겨를이 없었으니, 지금까지도 한스럽다.
이제 삼각산(三角山)에서 관서 승 현소를 만났는데, 그는 나를 위해 묘향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매우 상세히 말해 주었다. 나는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많이 듣고는 만사를 제쳐 두고 가 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현소는 용모가 단아하고 정숙하며 말에 깊은 맛이 있었다. 일찍이 묘향산에 들어가 10년 동안 좌선(坐禪)하다가 얼마 전에 산을 나와 이곳저곳을 두루 유람하여 칠보산(七寶山), 금강산, 용문산, 보개산(寶蓋山) 등 여러 산을 두루 거쳐서 이곳에 왔는데, 이제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을 생각이라 하였다.
나는 묘향산을 마음속에 그린 지가 오래이니, 조만간에 꼭 한번 가 볼 생각이다. 전에 나는 금선대(金仙臺)와 불영대(佛影臺)에 입정(入定)하는 승이 늘 많다고 들었는바, 그곳에서 그대를 찾아볼 생각인데, 그때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떠날 때에 이 글을 써서 기약하는 바이다.
14)다산시문집 제18권 서(書) 최 승지에게 답함
숙야재(夙夜齋)의 상량문(上梁文)을 삼가 지어 바칩니다. 다만 한강 선생(寒岡先生 한강(寒岡)은 정구(鄭逑)의 호)의 도학(道學)과 절의(節義)의 성대함을 아무리 형용(形容)하려 해도 절반도 할 수 없었으니, 부끄럽고 두렵습니다.
옛날에 들으니 지리산에서 나는 뱀이 징벽(?癖 구체증(久滯症))과 유주담연(流注痰涎)과 모든 응체(凝滯)의 질병을 녹혀 없앨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이름을 잊었는데 수소문하여 6~7마리만 얻어서 부쳐주시렵니까? 구하기 어려우면 그만두어도 됩니다.
다산시문집 제13권 서(序) 영남(嶺南)으로 유람가는 승려(僧侶) 해일(海鎰)을 전송하는 서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남쪽으로 뻗어내려서 칠보산(七寶山)ㆍ철령(鐵嶺)ㆍ추지령(湫池嶺)ㆍ기달산(??山)ㆍ오대산(五臺山)이 되고, 또 남쪽으로 태백산(太白山)이 되고, 서쪽으로 주흘산(主屹山)ㆍ속리산(俗離山)이 되며, 추풍령(秋風嶺)에서 약해진다. 그리고 또 남쪽으로 지리산(智異山)이 되어 바다를 만나 멈춘다. 그 동쪽은 옛날 신라(新羅)ㆍ가락(駕洛)ㆍ오가야(五伽倻)의 땅이고, 그 서쪽은 옛날 백제(百濟)의 고을들이다.
산맥이 멈출 즈음에는 솟아오르고 나는 듯하며, 움추러들고 분노하는 듯한 기상이 더욱 심하다. 그러므로 그 정기(精氣)가 모이게 되어 기이하고 걸출한 선비가 많은데, 그 중에는 불우한 자가 나와서, 이따금 부처에 귀의함으로써 스스로 고상하게 여기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리산 주변에 고승이 많으니, 이것은 그 지형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다.
승려 해일(海鎰)은 강진(康津) 사람이다. 젊을 적에 글을 좋아하다가 얼마 뒤에,
하였고, 얼마 뒤에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얻어서 읽고는,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부처에 귀의하니, 군자(君子)들은 그를 애석히 여겼다.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계해년(1803, 순조 3) 봄에 단월전(檀越錢 보시(布施)로 내놓은 돈) 15~16만 전을 얻어서 다 백련사(白蓮寺)에 시주(施主)하였다. 백련사는 낡고 헐어서 불사(佛事)가 많이 폐기되었는데, 그제서야 다시 일어났다.
백련사의 중수를 마친 뒤에 동으로 지리산의 동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이른바 아름다운 산수(山水)를 두루 구경하는 동시에 고승들과 노닐고자 하여 떠날 적에 나의 증언(贈言)을 청하였다. 나는 졸렬하여 증언(贈言)을 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고사(古事) 하나를 적어서 부응한다.
옛날에 약심(?甚)이란 중이 불경을 보는 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보는 책은 모두 글이고, 내가 보는 책은 모두 선(禪)이오.’ 하자, 주자(朱子)는, 그가 삼약삼보리심(三若三菩提心)을 발하였다고 허여하였다. 나는 그대가 관람하는 산천과 인물이 모두 선(禪)임을 알았으니, 내가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주D-001]성인의 찌꺼기다 : 독서는 성인이 하던 찌꺼기라는 뜻에서 소용없는 물건의 비유에 쓰인다. 《회남자(淮南子)》 도음훈(道應訓)에 “제 환공(齊桓公)이 당(堂)에서 글을 읽는데, 윤편(輪扁 수레 바퀴 만드는 공인)이 당 아래서 환공에게 묻기를, ‘임금께서 읽는 것은 무슨 책입니까?’ 하자, 환공이 ‘성인의 글이다.’ 하니, 윤편은 ‘그 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므로, 환공은 ‘이미 죽었노라.’ 하니, 윤편이 ‘이는 성인이 찌꺼기일 뿐입니다.’ 하였다.”
[주D-002]삼약삼보리심(三若三菩提心) : 불교(佛敎) 용어로 삼보리(三菩提)는 성문보리(聲聞菩提)ㆍ연각보리(緣覺菩提)ㆍ제불보리(諸佛菩提). 삼약삼보리는 혹 삼막삼보리(三?三菩提)가 아닌지 자세하지 않으나, 삼막삼보리는 즉 정변지(正遍知)ㆍ정변도(正遍道)ㆍ정등정각(正等正覺)으로서 부처가 깨달은 지혜를 말함.
대책(對策) 지리책(地理策) 건륭(乾隆) 기유년(1789) 윤(閏) 5월에 임금이 내각(內閣)에서 직접 시험을 보인바, 어비(御批)에 수위를 차지하였다.
신(臣)은 대답합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천하에서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지리인 반면에, 천하에서 구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지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이 일찍이 관찰하건대, 천문(天文)과 역법(曆法)에 대하여 선기(璿璣)나 주비(周?) 이후로 무려 수백 학자들이 해ㆍ달과 오위(五緯 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오성(五星))의 여러 별들이 운행하는 전차(?次)와 도수(度數)를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합니다. 그 중에 서로 모순되고 틀린 의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두(北斗)가 운행하는 묘리와 일식(日食)ㆍ월식(月食)이 번갈아 나타나는 차례에 대해서는, 대체로 정연(整然)한 바가 있습니다. 아, 더할 나위 없이 높은 것은 하늘입니다. 그 범위가 넓고 형체가 묘연하여, 다만 지혜로써 헤아릴 바가 아니지만, 한 번 눈을 들 적마다 우주의 절반 가량이 시야에 들어와 모든 별들의 부착(附着)과 전차(?次)의 위치들을 환히 관찰할 수 있으므로 역법가(曆法家)들이 이것을 바탕으로 천문(天文)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한 걸음 밖에는 발로써 나아갈 수 없고 큰 바다 너머는 시력으로써 미칠 수 없습니다. 즉 그 사이에 어찌 국경의 한계와 풍랑의 험란한 애로가 없겠습니까. 아무리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여 치밀하게 알아보고 싶어도 형편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만약 자장(子長 한(漢) 나라 사마천(司馬遷)의 자)처럼 천하를 유람하고 장건(張騫 한(漢) 나라 성고(成固) 사람)처럼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능히 알 수 있는 것은 산천ㆍ이수(里數)의 구분과 궁실ㆍ의복의 제도 따위에 불과할 것이요, 그 민요(民謠)나 풍속의 다른 점과 관방(關防 국경(國境)의 수비)이나 보화의 구별에 대해서는 끝내 두루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천하에서 다 연구할 수 없는 것은 지리(地理)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漢) 나라는 천하를 평정할 적에 제일 먼저 지도와 호적을 입수하였고, 당(唐) 나라도 천하를 통일할 적에 지도를 고찰하였다고 하였으며, 역대의 사가(史家)들도 각각 지리를 기록하여 그 지방의 경계를 구분하고 토산물을 고찰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천하를 통치하는 것이 마치 한 가정을 다스리는 것처럼, 마루ㆍ아랫목ㆍ윗목 따위를 불가불 구분하여야 하고 마구간ㆍ창고ㆍ부엌 따위도 불가불 알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규모를 확정하고 명령을 내려 한 제왕(帝王)의 정치를 시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신이 ‘천하에서 구명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도 지리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지금 그 지리에 대해 불가불 구명하여야 하겠지만 그 이치를 끝내 다 연구할 수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고원(高遠)한 것에만 힘쓰고 가까운 것을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된 병폐입니다만, 그 중에도 유독 우리나라가 더합니다. 비록 성명(聲明)과 문물(文物) 등은 중국에서 모방하여 왔을지언정 도서(圖書)의 기록에 있어서는 마땅히 우리나라 것에 밝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경 밖에 있는 신기한 것을 탐색하여 연구할 수 없는 것을 연구하려 하는 것보다는 우리나라의 국토 안에 있는 가까운 것을 조사하여 밝혀야 할 것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현명한 질문을 내리시어 천하의 산천을 낱낱이 드는 한편, 우리나라의 위치에 대해서까지 수많은 말씀을 하문하시므로, 신은 과문(科文)의 격식을 생략하고 사실만을 모조리 털어 조목조목 의논드리겠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땅은 만물을 싣고 있는 큰 수레와 같습니다. 《주역(周易)》에 ‘땅의 모양이 순하다.’고 일컬은 것은, 특히 땅의 높고 낮은 모양을 논하였을 뿐입니다. 땅이 높은 것은 산악(山嶽)이나 구릉(丘陵)이 되고 낮은 것은 분연(墳衍 물가와 평지)이나 원습(原濕 마른 땅과 젖은 땅)이 되므로, 지리를 분별하는 학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만 동쪽과 서쪽은 가는 데마다 지형이 바뀌어 그 분포가 넓은 반면에 남쪽과 북쪽은 원래 고정된 극(極)이 있어 그 회전하는 것이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그리고 산택(山澤)에는 짐승과 어류(魚類) 등이 적성에 알맞고 구분(丘墳)에는 과일나무와 콩ㆍ팥 등이 알맞으니, 동물들의 번식 여부와 식물들의 성장 여하가 다 지리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주례(周禮)》직방씨(職方氏)에 이를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관자(管子)》지원편(地員篇)에도 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였습니다. 고인(古人)은 지리학에도 이처럼 힘을 기울였는데, 더욱이 임금으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분이야 어찌 이를 계승하는 데 힘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생각하건대, 증자(曾子)가, 땅이 둥글다고 한 말은 선거리(單居離 증자(曾子)의 제자)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만약 하늘이 둥글고 땅이 네모지다면 하늘이 땅의 네 귀퉁이를 가리지 못할 것이라는 설이 있게 되었고, 제가(諸家)에서 땅이 네모지다고 한 말은 실지 《주비경(周?經)》끝에,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비경》은 하늘과 땅을 측량하는 것으로, 땅을 측량하는 법은 네모진 것이 아니면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네모진 것으로 비유한 것이지, 땅의 본래 모양은 참으로 둥근 것입니다. 주자(朱子)는 땅이 만두(饅頭)처럼 생겼다는 비유에서 곤륜산(崑崙山)의 등성이를 만두의 뾰족한 부분에 비유하였으니, 이는 아마 땅이 울퉁불퉁하고 하나로 뭉쳐진 가운데 곤륜산이 더욱 튀어나온 것을 말한 것입니다. 땅의 동쪽과 하늘의 서쪽이 부족하다는 말은, 우물 속의 개구리가 하늘을 이야기하는 격일 뿐인데, 어찌 여기에까지 참론(參論)할 수 있겠습니까.
구주(九州)에 대한 말은 추연(鄒衍 전국시대 제(齊) 나라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공주(?州)ㆍ감주(?州)ㆍ융주(戎州)ㆍ기주(冀州) 등은 실제 고증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구주의 경계를 자세히 알 수 없고, 사극(四極 사방의 끝)에 대한 말은 《이아(爾雅)》에 나타난 것으로, 동쪽의 태원(泰遠)과 서쪽의 빈국(?國)도 어디까지나 중국의 폭원(幅員 지면의 면적과 둘레) 안에 있을 뿐이므로 사표(四表)가 넓고 아득하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지만, 28수(宿)마다 각각 분야(分野 천문가(天文家)가 중국 전역의 이름을 28수로 구분 명명한 것을 말함)가 있다는 말은, 온 하늘의 별자리와 도수를 중국에서만 독차지할 수 없는 것이므로 본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광승(廣乘)과 장리(長離)는 《운급칠첨(雲?七籤)》에 나타난 것으로, 오악(五嶽)만이 진(鎭)이 된다는 것은 본래 일정한 이치가 없는 말입니다. 무슨 산인들 어찌 오악이 될 수 없겠습니까. 추연(鄒衍)이 말한 대영(大瀛)도 《십주기(十洲記)》에 기입되었지만, 사해(四海)는 본시 일체로서 이 지구(地球) 안에 감싸여 있는데 어디에 그처럼 큰 바다가 더 있겠습니까. 이 따위 말들은 모두 황당하여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그에 대한 방위나 이름들을 탐구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북계(北界 중국의 북쪽 경계)는 삼위(三危)에서 동쪽으로 예맥(濊貊)까지이고, 남계(南界 중국의 남쪽 경계)는 민산(岷山)과 파총산(??山)에서 동쪽으로 동구(東?)와 민중(?中)까지이니, 이는 천상(天象)을 가져 남ㆍ북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이며, 그리고 음렬(陰列)은 견산(?山)과 기산(岐山)에서 서경(西傾 산 이름)까지이고, 양렬(陽列)은 민산에서 파총산까지이니, 이는 지면(地面)을 가져 네 조각으로 구분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론이 지역에 국한되었으므로 자세히 따질 나위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오경(五經)에 실린 으뜸되는 산들에 대하여 《산해경(山海經)》을 상고하건대, 계수나무[桂]와 궤나무[?]는 초요산(招搖山)이나 단호산(單狐山)에서 생산된다고도 하였고, 산쥐[獸 쥐 모양에 얼룩무늬가 있는데, 이를 먹으면 목의 혹이 치료된다고 함]와 용어[? 얼룩소 모양에 호랑이무늬가 있는데 돼지처럼 운다고 함]는 감조산(甘棗山)이나 속주산(?山)에서 산다고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해경》이 본래 괴이하고 황당한 것들이 수두룩하므로, 오악(五嶽)의 자리를 《산해경》에서 말한 초요산ㆍ감조산 따위에 양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독(四瀆)의 원류에 대해서도 《풍속통(風俗通)》을 상고하건대, 제수(濟水)는 찬황산(贊皇山)에서 나온다 하였고, 또 《지지(地志)》를 상고하건대, 소계산(昭稽山)은 평씨현(平氏縣)에 있는데 회수(淮水)가 거기에서 나온다 하였으니, 제수와 회수의 원류는 이 찬황산과 소계산인 듯합니다.
황하(黃河)의 구곡(九曲)에 대해서는 그 말이 《하도강상(河圖絳象)》에서 나왔는데, 곤륜산과 권세성(權勢星)은 지수 일곡(地首一曲)에 해당하고, 용문산(龍門山)과 영석성(營石星)은 지근 사곡(地根四曲)에 해당합니다. 청초(靑草) 등 오호(五湖)에 대해서는 그 말이 장발(張勃)의 《오록(五錄)》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능고(菱皐)에서 서유(胥游)까지를 통틀어 진택(震澤)이라 부르고, 사양(射陽)에서 조만(?滿)까지를 통틀어 태호(太湖)라 불렀습니다. 한 가지 물이 오호가 된 것이 어찌 황하가 구곡이 있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무열(無熱)은 바로 아뇩달(阿?達)의 별명이고, 천손(天孫)은 바로 노(魯) 나라 태산(泰山)의 별칭으로, 이 두 가지 설이 혹은 패엽경(貝葉經 불서(佛書)의 별칭)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박물지(博物志)》에 기록되기도 하였으므로, 신은 감히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귀허(歸墟)와 미려(尾閭 바닷물이 새는 곳)는 정포(鄭圃 열자(列子)가 살았던 땅 이름으로 열자를 가리킴)의 미언(微言)에서 나왔고, 천지(天池)와 남명(南溟 남쪽에 있는 큰 바다)은 장원(莊園 장주(莊周)가 칠원리(漆園吏)로 있었으므로 그의 별칭이 되었음)의 우언(寓言)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령신(巨靈神)이 화산(華山)을 쪼개 버렸다는 말은 《수경(水經)》주에 나타났고, 공공씨(共工氏)가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는 말은 《회남자(淮南子)》에 실려 있습니다. 하신(河神)이 우(禹)임금에게 녹자(綠字 부서(符瑞))를 주었다는 말은 《진서(晉書)》지리지(地理志)에서 나왔고, 경진(庚辰)이 무지기(無支祈)를 구금시켜 버렸다는 말은 《악독경(嶽瀆經)》에서 나왔으며, 태장(太章)과 수해(?亥)가 측정한 거리가 다르다는 말은 《회남자(淮南子)》에서 나온 것입니다. 《회남자》에,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와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가 각각 2억 3만 3천 5백리 75보(步)이다.” 하였다. 이따위 황당한 이야기는 거의가 다 경도(經道)에 위배되고 정당한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신은 감히 자세히 논하지 않겠습니다.
오복(五服)과 구복(九服)의 제도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전복(甸服)과 후복(侯服)의 이름들은 우(虞) 나라나 주(周) 나라가 고치지 않았지만, 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 등은 주 나라에 이르러 구복으로 변경되었으니, 이는 폭원(幅員)이 더욱 넓어짐에 따라 제도가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이 기주(冀州)와 옹주(雍州)에 들락날락한 것은 아마 양쪽 고을에 걸쳐 있었기 때문일 터이고, 타수(?水)와 잠수(潛水)가 강수(江水)와 한수(漢水)에서 분파(分派)되었다는 것은, 아마 물길이 변천되었기 때문일 터인데, 공안국(孔安國)ㆍ정현(鄭玄)ㆍ반고(班固)ㆍ응소(應?) 등이 다르게 해석하여, 양주(梁州)ㆍ형주(荊州)ㆍ파군(巴郡)ㆍ촉군(蜀郡) 등지에서 발원된다고들 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참으로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므로, 신은 감히 주착없이 논하지 않겠습니다. 갈석(碣石 산 이름)이 좌우(左右)로 있다는 것은, 왕응린(王應麟)의 《지리통석(地理通釋)》을 상고하건대, 수성현(遂城縣)에 있는 산을 좌갈석(左碣石), 평주부(平州府)에 있는 산을 우갈석(右碣石)이라 하였고, 적석(積石 산 이름)이 대소(大小)로 있다는 것은, 《십도산천고(十道山川考)》를 상고하건대, 용지현(龍支縣)에 있는 산을 대적석(大積石), 부한현(?罕縣)에 있는 산을 소적석(小積石)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갈석산(碣石山) 오른쪽을 끼고 간다는 주석(注釋)이나, 적석산(積石山)이 일명(一名) 당술산(唐述山)이라는 말들을 어찌 번거로이 변론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삼강(三江)을 어떤 이는 누강(婁江)ㆍ동강(東江)ㆍ송강(松江)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민산강(岷山江)ㆍ파총강(??江)ㆍ예장강(豫章江)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으며, 어떤 이는 한 원류로서 강 이름만 다를 뿐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구강(九江)을 어떤 이는 원수(沅水)ㆍ점수(漸水)ㆍ진수(辰水)ㆍ유수(酉水) 등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오백강(烏白江)ㆍ오강(烏江)ㆍ방강(?江)ㆍ균강(?江) 등으로 해당시키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한 원류로서 물구비만 다를 뿐이라고도 하였으며, 구천(九川)과 구택(九澤)은 혹 구주(九州)의 천택(川澤)들을 통틀어 논한 것 같기도 하고, 혹 천택들의 일정한 수를 실지로 지칭한 것 같기도 하니, 이는 모두 우공(禹貢)에 보이는 산천(山川)들을 다르게 해석한 것들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삼강과 구강 등은 아마 원류가 하나라는 말이 근리한 듯싶고, 구천과 구택 등은 아마 통틀어 논하였다는 말이 맞는 듯싶습니다. 그러나 대지(大地)가 아득하고 산천들이 빙 둘러 있어서 그 지리(地理)를 진정 다 연구할 수 없습니다. 주자(朱子)는 대현(大賢)이요, 소식(蘇軾)ㆍ귀유광(歸有光)ㆍ왕세정(王世貞) 등은 모두 대유(大儒)인데다가 중국에 태어났어도 오히려 일치된 의론이 있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 선비들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감히 개인의 억측으로써 밝으신 질문에 누를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주(州)나 현(縣)을 연혁(沿革)하였던 제도는 역대마다 동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秦) 나라는 봉건(封建)을 폐지하여 중앙 권력을 튼튼히 하고 지방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호걸(豪傑)들이 여기저기서 봉기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었고, 한(漢) 나라는 관리들이 법을 준수하여 선량하였으나, 통치가 잘못되어 옛날의 연수(連帥) 제도만 못하였으니 진 나라나 한 나라의 정치도 진정 잘된 것이 아니며, 당(唐) 나라는 번진(藩鎭)들이 우뚝 강성하여 끝내는 치위(淄魏)의 환란(患亂)을 불러들였고, 송(宋) 나라는 조치가 유약하여 정강(靖康 북송 흠종(北宋欽宗)의 연호)의 화란(禍亂)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당 나라나 송 나라의 제도도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별이나 바둑알처럼 나열되어 상국을 호위하도록 한 열토(裂土) 제도로는 명(明) 나라가 잘하였고, 남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천하를 통일한 국토 확장으로는 원(元) 나라가 제일입니다. 그러나 그 중의 잘하고 못한 등급에 있어서는 신이 감히 주착없이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낙양(洛陽)은 적의 위협을 받았고, 금릉(金陵)은 궁벽한 곳에 위치했고, 변경(?京)은 황하(黃河)가 터지는 걱정이 있고, 연경(燕京)은 오랑캐가 침범하기도 하였는데, 오히려 천하를 제어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신의 생각으로는, 대사마(大司馬)가 구기(九畿 구복(九服)과 같음)의 부세(賦稅)를 맡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이는 대개 구복(九服) 여러 나라들로 하여금 빙 둘러서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도록 한 것으로, 그 엄밀한 호위와 몇 겹의 방어가 진(秦) 나라의 함곡관(函谷關)에 비교할 바 아니었으며, 반맹견(班孟堅 맹견은 동한(東漢) 반고(班固)의 자)의 이도부(二都賦 동도부(東都賦)와 서도부(西都賦)를 말함)에, 지리의 좋고 못한 점으로 시작하여 덕화(德化)가 깊고 얕은 것으로 끝맺었으니, 동경(東京 낙양(洛陽)의 별칭)이 장구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산하의 힘만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제(齊) 나라와 양(梁) 나라는 금릉(金陵)에 수도를 정하여 그 열토가 강북(江北 양자강(揚子江) 북쪽)을 넘지 못했고, 수 나라와 송 나라는 변경(?京)에 수도를 정하여 그 호령이 하삭(河朔 황하(黃河) 북쪽)까지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천하를 제어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금 나라와 원 나라 이후로 언제나 연경에 수도를 정하여 오랑캐들을 위압시켰으니, 이는 이른바 요해지를 지키고 두뇌부(頭腦部)를 점거한 셈입니다. 그들이 사방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을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돈황(燉煌)과 장액(張掖)은 참으로 흉노(匈奴)의 오른팔에 해당하고, 복여(福餘)와 태령(泰寧)은 충분히 몽고를 방어할 수 있는 요새지인데, 그 지방을 영토 안으로 떼어들이거나 방어선을 철수함에 따라, 흉노가 쇠약해지기도 하고 몽고가 번성해지기도 하였던 것은 정말 자연의 형세입니다. 서촉(西蜀)을 점거하고서 남방을 넘보았기에 진(晉) 나라가 기각(?角)의 형세를 얻었고, 회(淮)를 지키고서 강(江)을 보전하였기에 유송(劉宋 남조(南朝) 시대 송(宋) 나라 별칭)이 천하를 제압할 수 있는 계책을 보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손호(孫皓 오주(吳主) 손권(孫權)의 손자)가 포착하지 않았다면 진(晉) 나라가 장강(長江)을 날아서 건널 수 없었을 것이요, 송 나라는 내부에서 변란이 있는 이상 한쪽 구석에서 끝내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였으므로 신이 감히 이 두 마디 말을 전하(殿下)에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우리나라가 산을 짊어지고 바다에 둘러싸였으므로 지리(地利)는 험고(險固)한 면이 있고, 중국 제도를 이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혁시켰으니, 문물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가 진정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조선으로 이름을 얻은 것은 벌써 기자(箕子) 이전부터였고, 숙신(肅愼)으로 명명된 것은 공자(孔子)의 옛집 벽 속에서 나온 《상서(尙書)》에 실려 있으니, 이로 본다면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불려지게 된 것은 매우 오랩니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나누어 설치한 것에 대하여 신은 생각하건대, 사군 중에 진번(眞番) 1군(郡)만이 지금 우리나라 국경 밖에 있고, 그 이외 3군은 그 지방들을 뚜렷이 지적하여 증명할 수 있습니다. 낙랑은 지금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이요, 현도(玄?)는 지금 함경남도의 1천 리쯤 되는 지방이요, 임둔(臨屯)은 지금 저수(?水) 이남 열수(洌水) 이북으로서 경기(京畿)의 북쪽 교외 지방입니다. 그런데 한 소제(漢昭帝) 시원(始元) 5년에 이르러서는 사군을 도로 혁파하고 2부(府)로 만들어, 현도 옛 지방을 낙랑 동부로, 임둔 옛 지방을 낙랑 남부로 한 다음, 이내 현도군은 진번 옛 지방으로 소속시켜 고구려 등 3현(縣)을 통솔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반고(班固)의 지리지(地理志)에, 현도와 낙랑 등 2군(郡)만이 실려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입니다. 진번은 압록강 이북에서 흥경(興京) 이남까지가 모두 그 지역입니다.
신이 삼가 반고의 지리지를 살펴보건대, 이른바 누방(鏤方)은 지금의 덕천군(德川郡)에, 증지(增地)는 지금의 증산현(甑山縣)에 해당하고, 해명(海溟)은 해주(海州), 점제(?蟬)는 연안(延安), 대방(帶方)은 장단(長湍), 열구(列口)는 강화(江華)이며, 화려(華麗)나 불이(不而)는 영흥(永興)과 함흥(咸興)의 경계 안에 있었던 지역들입니다. 한지(漢志)나 위사(魏史) 등을 고찰하고 《수경(水經)》이나 《통전(通典)》 등을 고증하여 보면 모두들 확실한 증거가 있지만, 책문(策文)의 체제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신이 감히 번거로이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당 고종(唐高宗)이 구부(九府)를 옛날대로 설치한 것에 대해 신이 생각하건대,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그 지역을 분할하여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 등 오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었고, 또 그 뒤에 이세적(李世勣)이 평양(平壤)을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로 만드는 한편, 유인궤와 상의하여 고구려의 여러 성(城) 중에 도독부(都督府) 및 주(州)ㆍ군(郡) 등을 설치할 만한 곳을 편리한 대로 분할하여 모두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으니, 이른바 구부라는 이름은 이세적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당(唐) 나라에서 설치하였던 주(州)ㆍ부(府) 등은 모두 신라에게 병합되어 버렸고, 한사군(漢四郡)처럼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삼한(三韓)의 분속(分屬) 시비(是非)에 대하여는 신이 《두씨통전(杜氏通典)》을 살펴보건대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북쪽은 낙랑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변진(弁辰 변한(弁韓))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남쪽은 왜국(倭國)과 인접해 있다.’ 하였고, 또 ‘변진은 진한과 뒤섞여 살았다.’ 하였고, 끝으로 ‘삼한은 백제와 신라에게 병탄(幷呑)되었다.’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마한은 지금 호서와 호남 지방이요, 진한과 변한은 지금 영남 지방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린, 최치원(崔致遠)이 태사(太師)에게 올린 서장(書狀)에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고 하였습니다. 최치원이 마한을 고구려라고 한 것은 기준(箕準)이 본래 평양에서 금마(金馬)로 천도(遷都)함으로써 평양이 결국 고구려의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처럼 말한 것인가 봅니다. 그러나 변한이 백제라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모든 역사를 고찰하여 보아도 분명한 증거가 없습니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이 진한의 남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가 어찌 신라의 남쪽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호조 참의(戶曹參議) 신(臣) 한백겸(韓百謙)은, 수로왕(首露王)이 세웠던 금관가락(金官駕洛)을 변진(弁辰)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고칠 수 없는 정론인가 합니다. 삼국(三國)의 국경 구분에 대하여는 신이 생각하건대, 신라의 강토는 바로 지금 영남의 관할 지역인 반면에, 봉화(奉化)에서 해안 이북으로 강릉(江陵)까지도 신라의 옛 강토였습니다. 또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금 청주(淸州)ㆍ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ㆍ보은(報恩) 등 여섯 고을도 본래 신라에 소속되었습니다. 이는 아마 추풍령(秋風嶺) 일로(一路)의 산맥이 나지막하기 때문에, 신라의 강토가 점차 이처럼 확장되었던 것인가 봅니다. 백제의 국경은 본래 한강 이북까지를 점거하였다가, 뒤에 고구려의 괴롭힘을 받아 결국에는 한강 이남에서 남쪽으로 전라도 지방까지를 전부 차지하였을 뿐입니다.
고구려의 국경에 대해서는 주몽(朱蒙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의 이름)이 국가를 건립한 처음에는 지금의 소자하(蘇子河) 이북까지뿐이었는데, 그의 아들 유리왕(瑠璃王)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압록강 이북까지를 차지하였고, 동천왕(東川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패수(浿水) 이북까지를 차지하였으며, 광개토왕(廣開土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저수(?水) 이북까지를 차지하였고, 장수왕(長壽王) 시대에 이르러서는 한강 이북까지를 차지하여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를 점차 먹어들어와, 마침내는 그 절반 가량을 차지하였습니다. 옥저(沃沮)는 본래 스스로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명주(溟州) 동쪽과 한강 이남은 잠깐 차지하였다가 도로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역사에 실려 있으므로 신이 자세히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점제(?蟬)가 지금 어느 도(道)에 소속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점제는 낙랑군(樂浪郡)에 소속되어 있다.’ 하였고, 탄열(呑列 현명(縣名)) 주(注)에, ‘열수(洌水)가 8백 20리를 흘러서 서쪽 점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니, 열수는 지금의 한강이며 점제의 옛터는 당연히 강화(江華) 근방에 있을 터인바, 지금 연안(延安)ㆍ배천(白川) 등을 옛적에 점제로 불렀던 것이 읍지(邑志)에 실려 있으니, 점제는 지금의 황해도에 소속된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개마(蓋馬)가 과연 어느 산(山)인가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의 《한서》지리지를 살펴보건대 ‘서개마(西蓋馬)가 현도군(玄?郡)에 소속되어 있다.’ 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이 개마국(蓋馬國)을 직접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을 군(郡) ㆍ현(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서개마는 지금 말하는 분수령(分水嶺)인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한서(漢書)》에 이미 ‘서개마가 있다.’ 하였으니, 당연히 동개마(東蓋馬)도 있어야 할 터인바, 아마 백두산이 동개마가 아니겠습니까. 《통전(通典)》에 ‘동옥저(東沃沮)는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하였으니, 개마는 곧 백두산입니다.
마한이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마한의 멸망이 왕망(王莽) 원년(9)에 있었던 일로 백제사(百濟史)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백여 년 뒤 한 안제(漢安帝) 때에 이르러서 고구려 태조(太祖)가 마한 ㆍ예맥(濊貊) 등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玄?城)을 포위하였고, 《통전》에 또 ‘진 무제(晉武帝) 함녕(咸寧) 연간에 마한왕(馬韓王)이 와서 조회(朝會)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본다면 마한이 전후에 걸쳐 두 나라가 있었는가 봅니다. 예맥이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예맥은 북부여(北夫餘)의 본래 이름인데, 강릉(江陵)을 예(濊), 춘천(春川)을 맥(貊)이라고 한 것은 중세에 모칭(冒稱)한 것입니다. 아마 옛날에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동쪽 강릉으로 도읍을 옮긴 까닭에 마침내 강릉이 예로 모칭되었는가 봅니다. 《한사(漢史)》나 《위지(魏志)》 등이 이미 없애버릴 수 없는 전적(典籍)으로 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 춘천을 맥이라고 한 것은 분명한 증거가 없고, 오직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에, 명주(溟州)를 예, 삭주(朔州)를 맥으로 보았는데, 명주는 강릉이고 삭주는 춘천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모든 사기들을 고찰하여 보면 예맥이 본래 두 종류가 아닌데, 어찌 꼭 강릉ㆍ춘천 두 고을에다 분속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금 춘천에 맥국(貊國) 옛터가 있다는 것은, 춘천이 본래 낙랑의 옛나라였으므로 맥국으로 모칭된 것입니다. 고구려가 두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고구려는 본래 현도현(玄?縣)의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고구려가 현도현을 차지하기 전부터 벌써 고구려로 불렀기 때문에, 고구려가 두 개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옥저(沃沮)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첫째 북옥저(北沃沮)는 한 성제(漢成帝) 시대에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이 북옥저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성읍(城邑)으로 만들었으며, 위 명제(魏明帝) 시대에는 고구려왕이 왕기(王?)에게 축출당하여 북옥저로 망명하였던 것이 그곳입니다. 그 둘째 동옥저(東沃沮)는 《후한서(後漢書)》에 이른, 불내예(不耐濊)가 바로 그곳입니다. 그 셋째 남옥저(南沃沮)는 김부식(金富軾)이 말한, 남옥저 사람들이 서쪽으로 부양(斧壤)에 이르러 백제한테 항복하였다는 곳입니다. 지금으로 고찰하여 본다면 북옥저는 지금의 육진(六鎭) 지방이 그곳이고, 동옥저는 철관(鐵關) 이북 지방이며, 남옥저는 철령(鐵嶺) 이북 지방입니다. 그런데 《일통지(一統志)》에는 전혀 고찰하지도 않고서 경솔하게 지금 해성현(海城縣)을 옥저의 옛땅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본래 《요사(遼史)》의 잘못된 점입니다. 《요사》에서, 발해 오경(渤海五京)을 잘못 요동(遼東) 지방에다 배열시켰기 때문에 옥저도 요동 지방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역시 주착없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옥저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안시(安市)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지리지(地理志)를 살펴보건대, ‘안시현(安市縣)은 본래 요동군(遼東郡)에 예속되었다.’ 하였고, 또 ‘요수(遼水)는 서쪽으로 안시현을 거쳐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으며, 《요사》지리지에는 ‘철주(鐵州)의 건무군(建武軍)은 본래 한(漢) 나라 안시현이었다.’ 하였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첫째입니다. 또 《성경속지(盛京續志)》를 살펴보건대, ‘요양(遼陽)의 동북쪽 사이에 안시의 옛성이 있었다.’ 하였으니, 이 문자가 비록 신빙성이 없는 것 같지만, 약간은 믿을 만한 점도 있습니다. 지금 《당서(唐書)》에 의하면, 이적(李勣)이 요수(遼水)를 건너 맨 먼저 개모성(蓋牟城)을 위시하여 동쪽으로 사비성(沙卑城)을, 또 동쪽으로 요동성을, 다시 동쪽으로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안시성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안시성이 과연 개모성 70리 근방에 있었다면, 그가 백암성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벌써 2백 리 밖이 됩니다. 그가 꼭 건안(建安)을 공격하지 않고서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려 한 것은 안시성이 그들의 뒤를 차단시켜버릴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가령 안시성이 본래 백암성 서쪽에 있었다면, 비록 건안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안시성이 진작 그들의 뒤를 차단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시성이 백암성 동쪽에 있다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당(唐) 나라 시대의 안시성과 한(漢) 나라 시대의 안시성이 똑같지 않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둘째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 ‘안시성은 일명(一名)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환도는 지금 강계부(江界府) 북쪽 강 건너 지역에 있었습니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시대에 일찍이 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셋째입니다. 신이 또 여지서(輿地書)를 살펴보건대, 용강현(龍岡縣)에도 안시 옛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말한다면 안시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패수(浿水)가 세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기(史記)》에는 ‘위만(衛滿)은 패수를 건너 왕험성(王險城 지금 평양의 옛 이름)에 도읍하였고, 섭하(涉河)는 패수를 건너 한(漢) 나라 요새지(要塞地)로 들어왔고, 순체(荀?)는 패수를 건너 우거(右渠)를 공격했다.’ 하였으니, 이는 압록강을 패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한서(漢書)》에는 ‘패수는 서쪽으로 증지(增地)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압록강을 마자수(馬?水)로 보았으며, 《당서(唐書)》에는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임해 있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대동강(大同江)을 패수로 보았던 것입니다. 《일통지(一統志)》에는 요동의 헌우락(?芋?)을 옛날 패수로 지칭한 것이 있고, 《고려사》에는 평주(平州)의 저탄수(猪灘水)를 패수로 모칭(冒稱)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패수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그런데 《황화집(皇華集)》에는 압록강만을 패수로 보았고, 김부식은 대동강만을 패수로 보았으니, 신의 얕은 식견으로는 분석 판결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수경(水經)》에 실려 있는 패수만은 분명히 지금의 대동강입니다.
부여(扶餘)가 4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 첫째 북부여(北扶餘)는 바로 고구려와 백제의 종주(宗主)입니다. 《후한서(後漢書)》및 《위지(魏志)》에 모두 ‘부여국(扶餘國)은 고구려 북쪽에 있다.’ 하였고, 《통전(通典)》에는, ‘부여국은 장성(長城) 북쪽에 있는바, 현도(玄?)까지의 거리가 1천 리이다.’ 하였는데, 지금 《성경지(盛京志)》에 실려 있는 개원현(開原縣)이 바로 그 북부여의 옛땅입니다. 둘째 동부여(東扶餘)는 한(漢) 나라 초기에 북부여왕(北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동해(東海)의 해변으로 천도(遷都), 그 땅은 가섭원(迦葉原)인데, 가섭은 본시 하서(河西)의 전음(轉音)으로서 지금의 강릉(江陵)이 바로 그곳입니다. 셋째 졸본부여(卒本扶餘)는 고구려 시조가 처음에 북부여(北扶餘)에서 졸본(卒本)으로 도망쳐 와서 지어진 명칭입니다. 넷째 사비부여(泗?扶餘)는 백제 문주왕(文周王)이 웅진(熊津 공주(公州)의 옛 이름)으로 천도(遷都), 사비수(泗?水 백마강(白馬江)의 옛 이름) 상류에 거주하면서 지어진 명칭입니다. 대방(帶方)이 다섯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한서》지리지를 삼가 살펴보건대 ‘낙랑의 속현(屬縣) 중에 대방이 있다.’ 하였고, 또 ‘대수(帶水)는 서쪽으로 대방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는데, 대수는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이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첫째입니다. 한 나라 말기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나눠 주둔하여 유염(有鹽)을 차지하고 대방군(帶方郡)을 설립하였는데, 유염은 지금의 연안(延安)이며, 그 뒤에 그 지방의 추장(酋長)이 대방을 점거하여 대방왕(帶方王)이 되었는데, 백제 책계왕(責稽王)이 대방왕의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둘째입니다. 한 질제(漢質帝) 시대에 고구려가 요동을 기습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살해하였고, 그 뒤 수 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내린 조서(詔書)에, ‘12군(軍)은 점제(?蟬)와 대방 등처로 출동하여 압록강 서쪽에서 회합하라.’ 하였으니, 아마 요동 지방에도 대방이 있었던가 봅니다. 이것이 대방 문제의 셋째입니다. 이세적(李世勣)이 주(州)ㆍ부(府) 등을 배치할 때에 올린 주문(奏文)에 ‘대방주(帶方州)는 본래 죽군성(竹軍城)이다.’ 하였는데, 죽군성은 지금 나주(羅州)에 소속된 회진(會津)의 옛 현명(縣名)이므로, 대방이란 이름이 회진으로 옮아갔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넷째입니다. 백제가 평정된 뒤에 신라는 차츰 백제의 땅을 차지하였고, 당 나라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대방주 자사(帶方州刺史)로 임명하여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동쪽에서의 침범을 방어하도록 하였으므로, 대방이란 이름이 남원으로도 옮아갔으니, 이것이 대방 문제의 다섯째입니다. 그러나 요동 지방에는 본래 대방이 없습니다. 《한서》에 실린 대방은 여백으로 거론한 말이요, 수 양제(隋煬帝)의 조서(詔書)에 말한 대방은 그저 과장한 것에 불과하니, 거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신이 또 《고려사》를 살펴보건대 ‘남원부(南原府)는 후한 건안(建安 헌제(獻帝)의 연호) 연간에 대방군이 되었다.’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면 김부식의 백제사에 어찌 이런 말이 없겠습니까. 백제가 멸망하기 전에는 중국의 발자취가 한번도 열수(洌水)의 남쪽까지 미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남원을 갑자기 한(漢) 나라의 군(郡)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치입니다. 가야(伽倻)가 여섯 개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생각하건대, 육가야(六伽倻)는 다 김해(金海)를 종주(宗主)로 삼았는데, 김해는 금관가야(金官伽倻), 고령(高靈)은 대가야(大伽倻), 고성(固城)은 소가야(小伽倻), 성주(星州)는 벽진가야(碧津伽倻), 함안(咸安)은 아나가야(阿那伽倻), 함창(咸昌)은 고령가야(古寧伽倻)로 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가야는 변진(弁辰)입니다. 《위서(魏書)》지리지(地理志)에, 변진이 본래 12국(國)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사(新羅史)에는, 포상 팔국(浦上八國)이라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지금의 칠원(漆原)ㆍ웅천(熊川)ㆍ함안(咸安)ㆍ고성(固城) 등입니다. 만약 가야 6군(郡)에다가 포상 8국을 합하여 그 중에서 중복된 것을 빼버리면, 변진 12국이 그 숫자에 꼭 맞습니다.
신라에서 오악(五嶽)과 구주(九州)를 봉한 것에 대해서는, 북쪽 태백산, 남쪽 지리산, 동쪽 토함산, 서쪽 계룡산이 중악(中嶽)과 아울러 오악이 되고, 사벌(沙伐)인 상주(尙州), 삽량(?良)인 양주(良州), 두병(豆倂)인 전주(全州), 하슬(何瑟)인 명주(溟州) 등 오주(五州)와 아울러 구주가 됩니다. 고려가 사경(四京)과 십도(十道)를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통고(通考)》를 살펴보건대, 고려왕이 촉막군(蜀莫郡)에 거주하면서 이를 상경(上京)으로 삼는 한편, 신라의 옛 도읍 경주, 백제의 옛 도읍 금마(金馬), 기자(箕子)의 옛 도읍 평양을 동경(東京)ㆍ남경(南京)ㆍ서경(西京)의 삼경(三京)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사경이요, 그 뒤 성종(成宗)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십도를 정하였으니, 관내도(關內道)ㆍ중원도(中原道)ㆍ하남도(河南道)ㆍ영남도(嶺南道)ㆍ영동도(嶺東道)ㆍ산남도(山南道)ㆍ강남도(江南道)ㆍ해양도(海陽道)ㆍ삭방도(朔方道) 등을 개성부(開城府)와 아울러 십도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흥왕(眞興王)이 북쪽 국경을 순수(巡狩)한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진흥왕 16년에 북도(北道)를 순수하여 고구려와 국경을 정하였는데, 그 순수비(巡狩碑)가 함흥부(咸興府) 북쪽 황초령(黃艸嶺) 기슭에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요,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개칭한 것에 대해서는 앞서 이른, 사벌(沙伐)이 상주(尙州)로, 삽량(?良)이 양주(良州)로 된 것 따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대저 땅을 아침에 얻었다가 저녁에 잃어버린 것은 국토를 개척한 공적을 훌륭하게 말할 수 없고, 속된 명칭을 버리고 우아한 것을 취한 것은, 지명(地名)을 변경한 아름다움을 소홀하게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발해(渤海)가 절반 가량은 거란에게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이 살펴보건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에 발해가 뒤를 이어 일어났는데, 당 현종(唐玄宗) 시대에 이르러서는 발해왕 대조영(大祚榮)이 부여(夫餘)ㆍ옥저(沃沮)ㆍ조선 땅들을 모조리 차지하여 국토가 사방으로 수천 리나 되었습니다. 가탐(賈耽)의 《군국지(郡國志)》에 ‘발해의 땅이 동쪽 천정(泉井 덕원(德原)의 옛 이름)에서 서쪽 책성(柵城)까지 통틀어 39역(驛)으로서, 압록강(鴨綠江) 이북까지 강토를 멀리 개척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遼) 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로는 압록강 이북 지방은 모조리 요 나라의 통치권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오직 압록강 이남에 있는 보주(保州)와 정주(定州)만이 그런대로 신라에 예속되었으며, 그 뒤에 고려 태조도 발해의 옛 강토를 수복 개척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입니다.
탐라(耽羅)가 9한(韓) 중 넷째 번에 해당한 것에 대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건대,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기록된 9한 중에 그 첫째가 일본(日本), 셋째가 오월(吳越), 다섯째가 응유(鷹游), 일곱째가 단국(丹國), 아홉째가 예맥(濊貊)이고, 중화(中華)가 둘째 번, 탐라가 넷째 번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그 의례(義例)가 거칠고 번잡하므로, 수다스럽게 변론할 나위가 없다고 봅니다. 대체 우리나라가 오래도록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어 본래 문헌적인 증거가 없고, 소위 전해 오는 사적(史籍)은 거의가 황당 저속한 아야기들로서, 혹은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고도 일컫고, 혹은 난태(卵胎)가 표류한 박[壺] 속에 간직되었다고도 일컬어, 사람과 귀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뒤섞여 사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신은 우리나라 풍속이 현원(玄遠)한 데만 치달리는 것을 깊이 개탄한 나머지, 성조(聖朝)에서 가까운 것을 관찰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천지가 개벽하여 인류가 처음 생겨났을 적에는 문물이 갖춰지지 못하고 예의가 밝지 못하여 모두가 미개(未開)된 때문에 새나 짐승들과 함께 떼지어 살아오다가 다행히도 그 중에 성인(聖人)이 나서야 하늘의 밝은 명(命)을 받아 인류의 윤기(倫紀)를 세움으로써 문질(文質)이 함께 숭상되고 예악(禮樂)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자연의 형세입니다. 우리나라는 신라와 고려 이후로 날로 문명(文明)을 이룩하여 오다가 아름답게도 성조(聖朝)에 이르러서는 문명이 한창 융성한 시기를 만났습니다. 광대한 국토와 배치된 주(州)ㆍ군(郡)은 모두 조종(祖宗)의 큰 계책이요, 풍요한 물산(物産)과 문명스러운 풍속은 참으로 중국 이외의 나라가 숭앙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옛 제도에만 인습한 지 이미 오래되어 그 폐단이 더욱 심하여졌으니, 신이 성책(聖策) 중에 지리(地利)를 찬미하신 것에 대하여 과문(科文)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낱낱이 들어 논하여도 괜찮겠습니까. 신은 주ㆍ군을 배치한 제도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팔도(八道)를 구분함에 있어 경기(京畿)만 피폐(疲弊)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중앙을 튼튼히 하고 지방을 약화시키는 의의와, 강한 데 처하여 약한 것을 통치하는 법에 모두 부합되지 않은 것입니다. 신이 우공(禹貢)을 살펴보건대, 기주(冀州)에는 유독 공물(貢物) 바치는 것을 말하지 않았는데, 아마 천자(天子)의 봉내(封內)에 공물을 요구하지 않은 것은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고 있기 때문인가봅니다. 한(漢) 나라의 경조(京兆)가 풍익(馮翊)과 부풍(扶風)으로 좌우의 보좌를 삼았으니, 이 또한 천자의 수도를 호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서였고, 당(唐) 나라의 장안(長安)과 명(明) 나라의 순천(順天)도 그 관할(管轄)의 웅장함이나 반거(盤據)의 넓은 것이 모두 제로(諸路)나 제성(諸省) 따위에 감히 비교할 수 없었으니, 역대의 수도와 주(州)ㆍ군(郡)에 대해 배치한 것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잔약한 현(縣)이나 조그마한 읍(邑)들은 국명(國命)을 받드는 데 지쳐 있고, 산중의 화전민(火田民)이나 해변의 어부(漁夫)들은 세금을 바치는 데 시달려 있는가 하면, 여주(驪州)와 양주(楊州) 등처의 기름진 논밭은 모조리 호족(豪族)들의 소유가 되어 버렸으며, 흉악하고 약삭빠른 자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나라의 덕택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부병(府兵 궁성(宮城)이나 조정을 수위하는 병사)의 제도와 숙위(宿衛 숙직하여 왕궁(王宮)을 지킴)하는 법이 모두 경기(京畿) 내에 있는 둔전(屯田)에 의뢰하는 실정인데, 지금 경영(京營)의 둔전으로서 경기 내에 있는 것들을 개인 소유의 논밭에 비교하면 1백분의 1도 못 되어, 가까운 지방을 버리고 먼 지방에서 가져오고 있으니, 불편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충청도 첫 경계선에서 저탄(猪灘) 이남까지 10여 군(郡)ㆍ현(縣)을 떼어서 경기 내로 편입시키는 한편, 여러 도(道)에 흩어져 있는 오영(五營) 소속의 둔전들을 모두 시가(時價)에 따라 교환해서 경기 내로 이전시켜, 경기의 사방 1백 리 되는 지방에서 병사(兵士)와 농부가 한 덩어리로 되어 왕궁(王宮)을 호위하도록 한다면, 국세(國勢)가 더욱 튼튼하게 되고 병력(兵力)도 더욱 강성하게 될 것입니다. 진(鎭)이나 보(堡)의 제도에 대해서도, 처음 배치하였을 적에는 반드시 믿을 만한 점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조그마한 진이나 잔약한 보에는 영솔하고 있는 민병(民兵)이 1백 호(戶)도 못 되는 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잔약한 병력을 가지고는 좀도둑을 방어하는 데에도 힘이 부족할 터인데, 더구나 몽고(蒙古)나 여진(女眞) 등의 철기(鐵騎)를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 진이나 보의 명칭들이 어떤 것은 3~4글자가 겹쳐서 비속하고 해괴스럽습니다. 무신(武臣)으로서 그곳에 부임한 자가 그런 명칭을 관함(官銜)에다 사용하고 있으니, 이는 절대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변방의 보루(堡壘)들을 합쳐서 하나로 만들거나 통합해서 영(領)을 설치하거나 하여 그 세력을 강화시키며, 그 관직 명칭도 경덕왕(景德王)이 고을 이름들을 고치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복잡한 것은 삭제하고 간소하게 만들어 모두 두 글자로 된 명칭을 쓰도록 한다면, 변방이 더욱 튼튼하여지고 비속한 풍속도 더욱 깨끗이 씻어질 것입니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상마(桑麻)에 대한 정사(政事)는 성왕(聖王)들이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주 문왕(周文王)의 제도와 맹자(孟子)의 학문이 맨 먼저 힘쓴 바는, 오묘(五畝)의 주택 담장 밑에 뽕나무를 심은 것에 불과합니다. 엎드려 보건대,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도 수령(守令)들의 정치 실적을 평가할 적에 흔히 뽕나무를 심은 실적으로써 정하였으니, 이는 한(漢) 나라의 유법(遺法)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이 일찍이 안주(安州)를 다스릴 적에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도록 하여 1만 그루가 훨씬 넘은바, 서쪽 백성들이 그 뽕나무를 힘입었고, 지금까지도 그 뽕나무를 ‘이공상(李公桑)’이라 부르고 있으니, 이 역시 옛날 순리(循吏 법에 따라 성실하게 근무하는 관리)가 남긴 뜻입니다. 지금 마땅히 이 법을 밝혀 수령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의무적으로 뽕나무를 심어서 그 실효를 거두도록 하는 것도 근본을 튼튼히 하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화(寶貨)의 생산은 반드시 깊은 산이나 큰 골짜기에 있는 법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악(山嶽)들이 웅장하고 거대하여 값진 산물(産物)들이 풍족한데, 금(金)ㆍ사(砂)ㆍ은(銀)ㆍ횡(? 동(銅)이나 철(鐵)이 들어있는 광물(?物) 덩어리) 등을 캐는 데에 모두 금령(禁令)이 정해져 있고, 구리[銅]를 다루는 대장간이나 철물(鐵物)을 취급하는 점포에도 모두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기 때문에 부유한 백성은 삭탈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경영하지 않고, 가난한 백성은 자산(?産)을 실패하고서 딴 데로 이사하는 실정이니, 지금이라도 밝은 교지(敎旨)를 특별히 내려서 여러 도(道)에 구리가 생산되는 광산(鑛山)에는 백성들이 대장간을 차리도록 허가해 주고, 모든 산의 철물을 다루는 점포에는 세법(稅法)을 완화해 주시면 산택(山澤)에서 나온 이득이 날로 흥성하여 백성이나 국가가 모두 부유해질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균로(筠? 화살대)가 생산되는 것도 국가의 귀중한 물건입니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의 화식전(貨殖傳)에서, 균로를 누차 말하였습니다. 예부터 전쟁하는 시대에 화살이 다되어 성(城)이 함락된 것은, 대체적으로 죽전(竹箭)이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남쪽 고을에서 생산되는 균로가 매우 풍요하지만, 우리나라 풍속은 일마다 허위를 좋아하여 살촉[鏃]이 없는 살대들만 집집마다 전통[?]에 가득 차 있으니, 이 역시 이상하지 않습니까. 옛적에는 화살을 사용함에 있어 살촉이 없는 화살은 있지 않았으므로 삼련(參連)이나 백시(白矢) 따위도 모두 과녁을 꿰뚫었습니다. 예사(禮射 대사(大射)ㆍ빈사(賓射)ㆍ연사(燕射))에서도 그처럼 과녁을 꿰뚫었는데, 더구나 무예(武藝)에서야 어찌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살촉이 없는 화살에 대한 말은, 다만 안지추(顔之推)의 《가훈(家訓)》에 나타나 있을 뿐으로 강남(江南) 사람들이 이를 ‘박사(博射 돈을 걸고 도박으로 하는 활쏘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화살은 무슨 법을 따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활쏘기를 시험보이는 살대까지도 다 불로 쪄서 껍질을 벗겨 버리기 때문에 쉽사리 부러지고, 비로 인한 습기에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활을 쏘는 사람들은 오직 곧은 화살만을 상품으로 여기고, 변란(變亂) 따위에는 마음도 두지 않으니,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화살 문제를 무신(武臣)들에게 물어서 그 이해(利害)를 자세히 파악하여, 국가에서나 개인들이 소장한 화살을 물론하고, 살촉이 없거나 껍질을 벗겨 버린 살대 따위를 엄금시킨다면 아마 변란을 만났을 때 믿고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삼(人蔘)과 녹용(鹿茸)에 관한 폐단에도 조정에서의 토론이 벌써 오래되었고 여러 고을에서의 호소가 끊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개혁할 가망이 없어 시달리는 고생을 구제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민망스럽습니다. 신은 일찍이 듣건대, 강계(江界)의 호구(戶口)가 늘거나 감소되는 것이 언제나 인삼에 대한 행정이 관대하거나 잔학함에 비례된다고 하니, 이는 아마 강계에서 생산되는 이익이 충분히 생활을 튼튼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여겼다가, 착취해 가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더하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일정한 거주지가 없어서인가봅니다. 신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 문제에 특별한 배려를 더하여 멀리까지 굽어 살피시어, 가혹한 세금 징수를 중지시키고 백성들을 불러들여 편안히 모여 살도록 해주신다면 인삼과 녹용의 행정이 차츰 관대 공평해질 뿐 아니라, 국경의 요새지(要塞地)에 백성들이 날로 번성하여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옛날 선왕의 제도는 도끼를 제때에 산림(山林)에 들어가도록 하고,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들여넣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주례(周禮)》에, 임형(林衡 관직 이름으로 산림(山林)을 관장하였음)과 택우(澤虞 관직 이름으로 천택(川澤)을 관장하였음)는 나무를 심고 물고기나 자라를 양식시켰고, 《시경(詩經)》에는 ‘무성한 갈대밭에서 한 번 쏘아 다섯 수퇘지 잡았는데 아, 저 추우(騶虞 흰 바탕에 얼룩무늬가 있는 인수(仁獸)로 성인(聖人)의 덕화에 감응하여 나타난다고 함)여[彼茁者? 一發五? ?嗟乎騶虞]’ 하였는데, 선유(先儒) 중에 어떤 이는, 추우는 관직의 이름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시인(詩人)이 초목이나 짐승들의 번성함을 탄미한 데는 그 근거가 없지 않을뿐더러, 산림이나 천택에 대한 행정이 국가에 소중한 것임도 알 수 있습니다. 우(虞) 나라에서는 사공(司空 수리(水利)와 토지를 관장하는 벼슬)을 설치하고, 주(周) 나라에서는 택우와 임형을 설치하였던 것이 모두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황장(黃腸 소나무의 누른 심(心)으로 만든 관(棺))의 재목을 키우기 위하여 지정된 산이나 침원(寢園 임금의 능묘(陵墓)) 이외에는, 일찍이 나무를 심어 기르는 행정이 있지 않았으므로, 모든 산들이 벌거숭이가 되어 재목이 매우 드무니, 지금부터서라도 옛날 제도를 밝히는 한편, 월령(月令 《예기(禮記)》의 편명으로 12개월 동안 시행할 정사(政事)가 기록되었음)의 문자도 곁들여 상고하여, 산림(山林)을 맡길 관원을 특선하여 전임시킨다면, 궁실(宮室)이나 관곽(棺槨)에 쓰일 재목들에 어느 정도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해안에 사는 주민들의 말을 듣건대 ‘균역법(均役法)이 설치된 뒤부터는 고기잡는 통발을 절반 가량 철거하였을 뿐 아니라, 어획량도 전날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신은 앞으로 어민(漁民)들의 세금만 무거워지고 임금의 혜택이 결여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이라도 만약 세금을 조금 완화시켜서 남는 이익이 있도록 해준다면, 진주(眞珠)가 다시 합포(合浦)로 되돌아왔던 기적이 아마 옛날의 미담으로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성책(聖策 임금의 책문)에서 처음에는 산해(山海) 따위에 대한 지리(地理)를 서론하고 다음에는 땅에서 생산되는 지리(地利)로써 결론하면서, 염려되는 조건들을 낱낱이 열거하고 무식한 사람들의 설명을 굽어 요구하시니, 이는 성인(聖人)이 나무꾼에게도 자문(諮問)하는 의의입니다. 신이 아무리 무식한 존재이지만, 평소 들었던 것이야 어찌 감히 다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관방(關防)이 허술한 점은 참으로 주상께서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신은 듣건대, 병사(兵士)란 1백년 동안 써먹지 않을지언정 하루라도 방비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고, 《주역(周易)》에는 ‘조심스럽게 호령하여 방비하였기 때문에 밤중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걱정이 없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빨이란 단단한 것도 씹을 수 있지만 모래나 조약돌이 밥 속에 섞여 있으면 이빨이 혹 이지러질 수도 있는 것이며, 발이란 구덩이도 뛰어넘을 수 있지만 컴컴한 밤에 잘못 웅덩이에 빠지면 발이 혹 부러질 수도 있는 것이니, 이는 뜻밖에 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적(敵)과 인접하고 있어, 서해에 걱정스러운 것은 해적들입니다. 옛날에 이점(李?)ㆍ전임(田霖)ㆍ조원기(趙元紀) 등이 서해로 나아가 해적들을 정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들이 정토록(征討錄)에 실려 있지 않으므로 그 전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아마 조그마한 섬이었나 봅니다. 또한 왜적(倭賊)에 대한 걱정거리는, 원(元) 나라 군사들이 대마도(對馬島)를 침공한 후부터 원한을 맺었다가 국조(國朝) 중엽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하였습니다. 남쪽의 변방뿐만 아니라 혹은 동쪽 변방, 혹은 서쪽 변방 곳곳마다 걱정거리가 되어 오다가, 임진년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난일들은 이미 끝났으니, 정말 왜적을 방어하는 데 좋은 대책만 세운다면 아마 앞으로는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염려하여야 할 곳은 서쪽과 북쪽 2도(道) 지방입니다. 우리나라 병력(兵力)이 중고(中古)에는 그런대로 강성하여 과거에 건주위(建州衛)와 이마거(尼麻車)도 정벌(征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태평을 누린 지 오래되고 인심들이 안일(安逸)에 빠져서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놀라 머리를 싸고 쥐처럼 숨어버리곤 합니다. 만약 이러한 군사를 가지고 변란에 대처하면, 우선 관방(關防)을 굳게 하고 성지(城池)를 튼튼히 하는 것이 참으로 오늘날 서둘러야 할 일들입니다. 동선(銅仙)이나 청석(靑石) 등은 서로(西路)의 큰 방어선이라 부르고, 조령(鳥嶺)이나 죽령(竹嶺) 등은 남도의 험한 관문이라 칭하여, 조그마한 성을 쌓거나 성문을 고수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신의 천견(淺見)으로는, 이에 대해 그윽이 웃었습니다. 왜냐하면 속언(俗言)에, 염소를 잃고서 우리를 고친다는 것과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격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병자호란 때는 청병들이 청석령(靑石嶺)으로 해서 쳐들어왔으므로 마침내 청석령을 관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신출귀몰하는 적병(敵兵)이 다른 도로를 이용하여 곧장 쳐들어올지도 알 수 없으니, 청석령 한 군데쯤은 잃어버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왜적들이 조령으로 해서 쳐들어왔으므로 마침내 조령을 관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다음에 허술한 점을 이용하여 무방비한 곳을 기습하는 적병들이 다른 도로를 이용하여 돌격해 들어올지도 알 수 없으니, 조령의 관방 하나쯤은 방치해 버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서로(西路)에서는 청석령보다 백치(白峙)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고, 남로(南路)에서는 조령(鳥嶺)보다 추풍령(秋風嶺)을 염려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마땅히 그 형편을 관찰하고 이해를 조사하여, 백치에 있는 성(城)이나 보루(堡壘)들을 더욱더 보수하는 한편, 추풍령 위에도 성이나 보루들을 빨리 쌓아 조령에 방비한 것과 똑같이 한다면, 아마 목탁을 쳐서 도적을 대비하는 의의에도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지(城池)의 제도에 있어서는 더욱 논할 것이 있습니다. 신라와 고려 이전에는 우리나라 병력의 강성함이 천하에 제일이었습니다. 무릇 수(隋)ㆍ당(唐)처럼 전쟁을 자주하는 나라로서도 우리나라를 칼로 대나무 쪼개듯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신이 과거에 여러 도(道)를 다닐 적에 도로 옆의 높은 산에 성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적마다 질문해 보면, 왜적들의 성터라고 대답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지는 왜적들의 성터가 아니라, 바로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등 삼국(三國)이 나누어 점거하고 있을 당시에 쌓았던 산성(山城)들이었습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건대, 이 책은 왜적들이 쳐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간행(刊行)된 것으로서, 모든 군(郡)의 고적(古蹟)에 실린 산성(山城)들을 이루 셀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삼국시대에 전쟁이 상호 잇달았기 때문에 모두들 산성을 쌓아서 전쟁이 없을 적에는 산성에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전쟁이 나게 되면 곡식들을 거두어 산성 안으로 들어가버린 듯합니다. 이는 이른바, 들을 깨끗이하고 보루를 견고히 하는 계책인 것입니다. 저 산성을 공격해온 적들은 시일을 오래 끌면 군량(軍糧)을 지탱할 수 없고, 급작스럽게 핍박할 경우 산성에서 내려와 공격할까 두려워하게 마련이므로 아군이 칼날을 겨루기도 전에 적들이 반드시 스스로 퇴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통이 편리한 고을과 큰 도시들이 성(城)이나 관문(關門)도 없이 큰 들판에 흩어져 있는데다가 곡식과 쌀들이 날로 불어나고 창고가 해마다 가득 채워지는 형편이니, 혹시 변란(變亂)이 나게 된다면 자연 손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서 곡식들을 적에게 바치고 말 터이니 아, 민망스러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여러 도(道)의 수령(守令)들로 하여금 옛 성들의 형편을 조사 보고하게 한 다음 그 중에 높고 평평하면서 돌이 많고 물이나 샘이 고갈되지 않는 곳을 선택하여 성첩(城堞)들을 수축하여야 합니다. 또한 관방(關防)에 관계되는 지방은, 혹은 그곳으로 읍(邑)을 옮기기도 하고 혹은 창고의 곡식과 군기(軍器)를 옮기기도 하며, 또는 읍내(邑內)의 부호가(富豪家) 10여 집들을 이사시켜 성안에서 살도록 한다면, 변란이 났을 때 피난할 데가 있게 되는 한편, 적병들에게 무기(武器)나 식량(食糧)을 보태주는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경기(京畿) 내의 병곤(兵?) 제도는, 지금의 제도를 고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신은 가만히 관찰하건대, 당(唐)ㆍ송(宋) 시대에는 재상들이 흔히 절도사(節度使)의 직책을 겸임하여, 혹은 육부 상서(六部尙書)로서 제로(諸路)의 사상(使相 당ㆍ송 시대에 절도사의 별칭)을 겸임하기도 하고, 혹은 내한 학사(內翰學士)로서 제주(諸州)의 수신(守臣)을 겸임하기도 하였으니, 우리나라의 수어사(守禦使)나 총융사(摠戎使)가 어찌 당ㆍ송 시대의 사상이나 수신과 다르겠습니까. 그런데 논하는 이들이, 병곤이 왕성(王城) 안에 있는 것도 부당하고, 재상이 외번(外藩)의 직책을 겸임하는 것도 부당하다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총융사는 마땅히 강도(江都)에 소속되어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수어사는 마땅히 광주(廣州)로 나가야 한다고도 하여, 발언(發言)들은 조정에 분분하지만 결국 이익된 것도 손해된 것도 없으므로 신은 감히 그 사이에 나서서 거들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 안에 저축된 곡식이 1만 섬에 불과하여 5일의 군량도 되지 못하였으므로 그 뒤에 섬 수를 늘려서 15만 섬까지 되었다 하는데, 지금은 다시 해마다 감축되고 달마다 축소되어 4~5만 섬에 불과한가 하면, 그 중 절반 가량은 언제나 민간(民間)에 나누어 방출되어 있기 때문에 성안에 저축된 실제 수량은 2만 섬에 불과합니다. 군량 저축이 이 모양인데 어떻게 성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다시 섬 수를 증가시킨다면, 광주(廣州)의 오랜 폐단 중에 그 곡식 담당이 가장 큰 문제이니, 여기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더 괴롭힐 수는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관찰하건대, 남한산성 동문(東門)의 수구(水口) 밖에는 산이 겹겹으로 둘러싸여 물이 30리쯤 흘러서야 비로소 큰 시내로 들어가고, 그 시냇물은 10여 리쯤 흘러서야 큰 강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신의 생각에는, 군량을 강 연안 여러 고을에다 분담시키는 한편, 수구(水口)의 물이 시내로 들어가는 곳에다 별도로 창고 하나를 설치해 놓고 군량을 배로 운반하여 출납(出納)하도록 한다면, 광주의 백성들만 일방적으로 고생하는 염려가 없을 것이요, 군량도 빨리 떨어지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 수구는 비할 데 없이 험하고 좁으므로 두어 성가퀴로써 가로막아버리면 한 사람이 그곳을 지켜낼 수 있고, 험난한 산길이 여기저기 연결되어 있으므로 군량을 운반하는 데도 적(敵)이 겁탈해 가거나 뒤를 차단해 버리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강도(江都)를 관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교동(喬桐)의 지원에 힘입고 있기 때문인데, 언젠가는 교동을 강도에 통합하기도 하였고, 언젠가는 교동을 따로 두기도 하여 의론들이 여러 갈래였고 배치를 누차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 교동을 다시 두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아무튼 신이 듣건대, 강화도(江華島)가 험고(險固)한 것은 전적으로 삼면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우뚝 서 있고 한쪽은 진창으로 되어 있어, 아무리 배가 있어도 육지에 올라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진창에 죄다 전석(?石)을 깔아 놓아서 아무리 천군만마(千軍萬馬)라도 마음대로 한꺼번에 치달릴 수 있다고 합니다. 진정 이와 같이 한다면 해중(海中)의 다른 외딴섬들도 죄다 보장(保障)의 땅이 될 만한 터인데, 무엇 때문에 강화도를 취택하였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전석을 빨리 철거해 버리고 언제나 파자(?子 대나무로 발처럼 엮은 물건)를 깔고서 통행하여야만 혹시 뜻하지 아니한 변란을 당하더라도 천연의 험지(險地)를 비로소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울릉도(鬱陵島)와 손죽도(損竹島) 등을 빈 섬으로 방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울릉도는 옛날 우산국(于山國)으로 신라 지증왕(智證王)이 정복하였던 곳입니다. 화살대나 담비가죽과 기이한 나무나 진귀한 식품 등의 생산이 제주도보다 많고 또 수로(水路)가 일본과 가까이 인접해 있으므로, 만일 교활한 왜인들이 몰래 와서 울릉도를 먼저 점거해 버린다면 이는 국가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백성들을 모집하여 울릉도로 들어가서 살도록 하는 한편, 진보(鎭堡)의 설치도 지연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당시에 울릉도를 빈 채로 방치해 둔 것은 일본과 약속한 데서 나온 것이므로 약속을 위반할 수 없다고 하지만, 이런 말은 너무나 고지식할 뿐, 국가를 위하는 계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손죽도는 조그마한 섬인데다가 우려할 만한 문제거리도 없으니, 비록 방치해두더라도 해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폐사군(廢四郡)을 다시 두는 것에 있어서는, 신의 생각으로는 국가의 대계(大計)가 이보다 더 시급한 것이 없다고 봅니다. 압록강이 서쪽으로, 국토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라고 부르는데, 이 폐사군 중간에는 압록강이 띠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이래로 압록강 연안에 살고 있던 여러 오랑캐 종족들이 손쉽게 건너와서, 어떤 자는 나무 위에 집을 얽고 거주하여 해를 경과하기도 하고, 어떤 자는 땅에 굴을 파고 거처하여 계절을 넘기기도 하면서, 산삼(山蔘)을 캐어 나물로 만들기도 하고 사슴을 잡아 안주로 만들기도 하며, 심지어는 활과 창을 메고서 우리나라 사람들과 접전(接戰)을 벌이므로, 조그마한 진(鎭)이나 잔약한 보(堡)로서는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데도, 수신(守臣)이나 도신(道臣) 등은 그런 사실들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니, 앞으로 닥쳐올 걱정거리가 지금보다 더 클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빨리 조정에 하문하여 지금이라도 폐사군을 다시 두어서 조종(祖宗)이 물려준 강토를 공고히 하는 한편, 정장(亭障 국경 요새지에 있는 방어 초소)에 감도는 나쁜 기운을 쓸어버리는 일도 지연시킬 수 없다고 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어(魚)ㆍ염(鹽)에서 나오는 이익들을 하민(下民)들에게 전속시키고 있는데, 이른바 균역법(均役法)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도 중국의 강소성(江蘇省)이나 절강성(浙江省) 등 해안 지방에 비교하면, 지극히 가볍다고 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생업에 재미를 붙이지 못하고 물건이 식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현령(縣令)들이 징수하는 세금이 국가의 공공 세금보다 갑절이나 되고, 아전(衙前)이나 장교(將校)들의 위엄이 관청의 공문첩보다 더 높기 때문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안렴사(按廉使)의 절목(節目) 중에 이 조목을 거듭 강조하여, 어장(漁庄)이나 염분(鹽盆)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관리들의 침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한다면, 어염업(魚鹽業)에 종사할 사람들이 많아져 국중에 어물(魚物)이나 소금 따위가 흔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금(金)이나 은(銀) 등의 행정에 있어서는, 신이 신라의 옛 역사를 읽어본바, 해마다 바치는 황금의 수량이 적지 않았으니, 금을 캐는 광산(鑛山)이 옛날부터 있었던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강계(江界)의 은파동(銀坡洞)에서만 은을 제련하도록 허가해 주고, 각 도(道)의 모든 산에는 일체 대장간을 금지시키고 있으니, 신은 이것이 무슨 법인지 모르겠습니다. 금이나 은 따위를 사용할 때에 이르러서는, 한번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이 수만 냥의 은을 가져가고, 상서(象胥 통역관(通譯官)의 옛이름)가 몰래 가져가는 것도 몇천 냥이 되는 줄 모르는데, 연경에서 무역해 온 것은 능단(綾緞)ㆍ금수(錦繡) 등 쉽사리 낡아버릴 물품에 불과합니다. 대저 금이나 은 따위는 예나 지금이나 녹슬지 않지만, 능단 따위는 세월이 지나면 티끌처럼 낡아버리므로, 결국 우리나라의 은화(銀貨)는 전부 수출되어 버리는 반면에 중국의 능단 따위는 한없이 생산될 터이니, 어찌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연경 시장에서는 은 가격을 모두 육해법(六解法)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지금부터는 국내에서도 모두 이 육해법을 사용하여 시행한다면, 통역관(通譯官)들이 우리나라에서 은(銀)을 사서 중국으로 수출한들 본전도 건지지 못할 터이므로, 자연 과외(科外)의 은은 반드시 가져가지 아니하여, 국내의 은화(銀貨)가 어느 정도 넉넉해질 것입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리학은 선비가 반드시 힘써야 하고 왕자(王者)가 반드시 이용하여야 할 것으로서, 성야가 점유하고 곤여가 싣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빠짐없이 그 강역(疆域)을 구별하고 풍속을 기록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명산ㆍ지산의 분맥에 대해서는 곽박(郭璞)이 《산해경주(山海經注)》를 저술하였고, 출수ㆍ수수의 수로(水路)에 대비해서는 관자(管子 제(齊)의 관중(管仲)을 말함)가 지수편(地數篇 《관자(管子)》의 편명)을 기록하였습니다. 《관자》에 "동ㆍ서ㆍ남ㆍ북은 각각 2만 6천 리이고, 출수와 수수는 각각 8천 리이다.” 하였다. 제(齊)ㆍ양(梁)에서 수(隋)ㆍ당(唐)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날의 지리서는 비록 없어졌지만, 그 뒤의 지리서가 계속 나와서 마치 안개가 일고 까치가 날아오르듯 성행하고, 실으면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대들보까지 꽉 차게 많았으므로 이것으로써 백성을 다스려 모든 이해(利害)를 알려주고, 또 이것으로써 교화(敎化)를 선양(宣揚)하여 항간의 가요(歌謠)를 살폈습니다. 이 때문에 성명(聲明)과 문물(文物)이 사방의 종주국(宗主國)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선비들만은 지리서를 상고하고 조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어 지리에 소홀하고 어두운 점이 많으므로, 광막한 천하는 고사하고 우리나라 안의 것도 멀거니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즉 김 태사(金太師 고려 김부식(金富軾)을 가리킴)의 《삼국사기》지리지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을 모두 미상(未詳)으로 말하였고,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지리지에도 잘못된 데를 이루 다 셀 수 없으며, 《여지승람》에는 연혁(沿革)에 대한 사실들을 싣지 않았고, 《문헌비고》에는 빠뜨린 명론(名論)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지리서를 편찬할 때마다 자기를 두둔한 견해만을 잡기(雜記)하여 은연히 취택하고 빼버리는 사심이 작용되었기 때문에 지금껏 세상에 유명한 지리서가 1부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만나기 어려운 것도 시기이고 놓치기 쉬운 것도 기회라 합니다. 지금 성명(聖明)께서 즉위하신 뒤로 문치(文治)가 훌륭하므로 지극한 교화가 인재를 양성시키고 군신 사이가 서로 감응되어, 진신대부(縉紳大夫)로서 문리(文理)에 밝은 이들이 조정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는 천년 만에 가끔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 마땅히 밝은 유지(諭旨)를 특별히 내리시어, 학식이 넓고 기질이 민첩하여 대중들의 추앙을 받는 인사로 하여금 지리서를 편찬하게 하는 한편, 두어 사람을 별도로 뽑아 그의 보조원으로 임명하시고,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의 범례(凡例)를 모방하되,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서 지리서 1부를 편성하여야 합니다. 지리서를 편찬함에 있어, 피차간의 강역 한계는 아주 세밀하게 밝히고 고금의 연혁된 제도는 그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산은 그 산맥들을 기록하고 물은 원류(源流)와 분파(分派) 등을 구별하며, 옛 사적 중에 정벌(征伐)이나 공수(攻守)에 관한 사실들은 무엇보다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효자나 열녀 등 인물은 행적이 탁월하고 순정하여 온 세상이 모두 아는 바가 아니면 대체적으로 산삭해 버리고 간략하게 다루며, 제영시(題詠詩)에 대해서도 1백 수 중에 한 수씩만을 보존하여 그 규례를 엄하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기이한 것을 좋아하고 사물을 널리 아는 선비들을 재차 뽑아서, 상흠(桑欽)의 《수경(水經)》과 역도원(?道元)의 《수경주(水經注)》를 모방하여, 동국수경(東國水經) 1부를 편찬, 지리서와 함께 출간하여 비부(?府)에 올려 놓고 명산(名山)에 간직하고 팔도(八道)에 반포한다면, 우리나라 강역이 본래 작기 때문에 빠짐없이 수록되어, 천년 동안의 비루한 점을 시원스럽게 씻어버리고 일대의 저작을 쇄신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 역시 전하의 문치에 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한다면, 우리나라의 산천ㆍ풍속과 관방(關防)ㆍ토산물 등의 다른 점이나, 성조(聖朝)의 계책ㆍ공렬(功烈)과 조치(措置)ㆍ제작(制作) 등의 훌륭한 점을 한번 보아서 모두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참으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옛말에, 만들었기 때문에 간직할 수 있었다고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소서. 신은 이상과 같이 삼가 대답합니다.
[주D-001]오물(五物) : 산림(山林)ㆍ천택(川澤)ㆍ구릉(丘陵)ㆍ분연(墳衍)ㆍ원습(原濕)의 다섯 지역에서 생산되는 물건을 말한다.
[주D-002]선기(璿璣) : 옛날에 천문(天文)을 관측하는 기계임. 혼천의(渾天儀).
[주D-003]주비(周?) : 옛날 산법(算法)의 하나. 구고(句股)의 법칙으로서 하늘ㆍ땅의 높이와 두께 및 해ㆍ달의 운행(運行)하는 것을 추탁(推度)하여 그 도수(度數)를 알아내는 산법을 말한다.
[주D-004]성명(聲明) : 성은 석(錫)ㆍ난(鸞)ㆍ화(和)ㆍ영(鈴) 등의 방울소리를 가리키고, 명은 해[日]ㆍ달[月]ㆍ별[星辰] 등을 깃발에 그려 하늘의 밝은 것을 상징한 것으로, 거식(車飾)ㆍ의장(儀仗) 등의 제도를 뜻한다. 《左傳 桓公 2年》
[주D-005]문물(文物) : 문은 의상(衣裳)에 불[火]ㆍ용(龍)ㆍ보불(??) 따위를 그린 문채를 가리키고, 물은 오색(五色)으로 수레ㆍ기계 등을 꾸며서 천지 사방을 상징한 것으로, 의상ㆍ수레ㆍ기계 등의 제도를 뜻한다. 《左傳 桓公2年》
[주D-006]사유(四維) : 건(乾 서북)ㆍ곤(坤 서남)ㆍ간(艮 동북)ㆍ손(巽 동남) 등 사방의 간방(間方)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사방(四方)의 뜻으로 쓰였다.
[주D-007]땅의 …… 부족하다고 : 《회남자(淮南子)》천문훈(天文訓)에, “옛적에 공공(共工)이 전욱(?頊)과 서로 제(帝)가 되려고 다투다가 공공이 머리로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천주(天柱 하늘을 받치고 있다는 기둥)가 부러지고 지유(地維 지구를 얽어서 유지하고 있다는 밧줄)도 끊어져서, 하늘은 서ㆍ북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해ㆍ달ㆍ별들은 그쪽으로 운행(運行)하고, 지구는 동ㆍ남쪽이 부족하게 되었기 때문에 물이나 티끌 따위는 그쪽으로 모인다.” 하였다.
[주D-008]사표(四表) : 28수(宿)의 밖에 상ㆍ하ㆍ동ㆍ서가 각각 1만 5천리로서 사유(四維)의 끝이 되는 곳을 말한다.
[주D-009]오경(五經) : 《산해경(山海經)》에 보이는 남산경(南山經)ㆍ서산경(西山經)ㆍ북산경(北山經)ㆍ동산경(東山經)ㆍ중산경(中山經)을 통칭한 말.
[주D-010]오호(五湖) : 《후한서(後漢書)》풍연전(馮衍傳) 주(註)에, “태호(太湖) 부근에 있는 5개의 호수로 격호(?湖)ㆍ조호(?湖)ㆍ사호(射湖)ㆍ귀호(貴湖) 및 태호 등이다.” 하였고 《서언고사(書言故事)》지명류(地盟類)에는, “파양(?陽)ㆍ청초(靑草)ㆍ동정(洞庭)ㆍ단양(丹陽)ㆍ태호 등이다.” 하였다.
[주D-011]거령신(巨靈神)이 …… 쪼개 버렸다고 : 거령은 하수(河水)의 신령(神靈) 이름. 《수경주(水經注)》에, “화산(華山)은 본래 하수 연안에 위치하였는데, 하수가 통과하면서 굽이쳐 흘러가므로 하수의 거령신이 화산을 손으로 떼밀고 발로 차서 돌로 쪼개 버렸는데, 거령신의 발자국이 지금도 바윗돌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였다.
[주D-012]공공씨(共工氏)가 …… 들이받았다고 : 공공씨는 《좌전(左傳)》 두예(杜預)의 주(註)에, 소호씨(少?氏)의 불초(不肖)한 아들로 되어 있다. 앞의 주 7) 참조.
[주D-013]하백(河伯)이 …… 주었다고 : 하백은 하신(河神). 하도는 《서경(書經)》 고명(顧命) 채전(蔡傳)에, “복희(伏羲)가 천하를 다스릴 적에 용마(龍馬)가 하수(河水)에서 나오자, 그 용마의 등에 있는 문형(文形)을 본받아 팔괘(八卦)를 그어 하도를 만들었다.” 하였는데, 《진서(晉書)》지명지(地盟志)에는, “옛적에 대우(大禹)가 탁하(濁河 황하(黃河))를 관찰하다가 녹자(綠字 부서(符瑞))를 받았다.” 하였고 《송서(宋書)》부서지(符瑞志)에는, “우 임금이 하수를 관찰할 적에 키 큰 인어(人魚)가 나와서 ‘나는 하수의 신령이다.’고 하면서, 하도를 주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법도를 일러준 다음 이내 하수로 들어가 버렸다.” 하였다.
[주D-014]경진(庚辰)이 …… 구금시켰다는 : 경진은 우 임금을 도와 홍수(洪水)를 다스린 귀신 이름. 《고악도경(古岳瀆經)》에 “우 임금이 홍수를 다스릴 적에 동백산(桐柏山)에서 회와(淮渦)의 물귀신 무지기(無支祈)를 얻었는데, 묻는 대로 응답을 잘할 뿐더러 물을 박차고 공중으로 뛰어오르기도 하여 오랫동안 쳐다볼 수가 없으므로 우 임금이 그를 경진에게 맡기나, 경진이 마침내 구족산(龜足山) 기슭에 구금시켜 버렸다.” 하였다.
[주D-015]오복(五服) : 옛날 천자(天子)의 왕기(王畿) 밖을 5백 리마다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 지역을 말하는데, 요(堯) 임금 시대에는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수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 등이고, 주(周) 나라 시대에는 후복ㆍ전복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 등이었다.
[주D-016]구복(九服) : 주(周) 나라 시대에 왕기(王畿) 밖을 5백 리마다 9등급으로 구분한 지역을 말하는데,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男服)ㆍ채복(采服)ㆍ위복(衛服)ㆍ만복(蠻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藩服) 등이다.
[주D-017]수해(?亥)와 …… 다른 것은 : 수해와 태장(太章)은 모두 우 임금의 신하들로서 걸음을 잘 걸었다. 《산해경(山海經)》해외동경(海外東經)에, “우 임금이 수해에게 명하여 동극(東極)에서 서극(西極)까지 걸어보도록 한바, 그 거리가 5억 10만 9천 8백 보(步)였다.” 하였고 《회남자(淮南子)》 추형훈(墜形訓)에는, “우 임금이 태장(太章)을 시켜 동극에서 서극까지 걸어보도록 한바, 그 거리가 2억 3만 3천 5백 75보였다.” 하여 그 거리가 각각 다르게 기록되었다.
[주D-018]삼강(三江) : 《서경(書經)》 우공 채전(禹貢蔡傳)에는 누강(婁江)ㆍ동강(東江)ㆍ송강(松江)을 삼강으로 보았고, 송(宋)의 소식(蘇軾)은 민산강(岷山江)ㆍ파총강(??江)ㆍ예장강(豫章江)을 삼강으로 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주D-019]구강(九江) : 《서경》 우공 채전에는, 동정호(洞庭湖)에 합류되는 원수(沅水)ㆍ점수(漸水)ㆍ원수(元水)ㆍ진수(辰水)ㆍ서수(?水)ㆍ유수(酉水)ㆍ예수(澧水)ㆍ자수(資水)ㆍ상수(湘水)를 구강으로 보았는데, 《심양지기(尋陽地記)》에는, 오강(烏江)ㆍ봉강(蜂江)ㆍ오백강(烏白江)ㆍ가미강(嘉靡江)ㆍ견강(?江)ㆍ원강(原江)ㆍ늠강(?江)ㆍ제강(提江)ㆍ균강(?江)을 구강으로 보았다. 이 밖에도 여러 설이 있다.
[주D-020]구천(九川) : 《서경》 익직(益稷) 채전에, 중국 구주의 시내를 통틀어 말한 것으로 보았는데, 왕선겸(王先謙)은 약수(弱水)ㆍ흑수(黑水)ㆍ양수(?水)ㆍ강수(江水)ㆍ연수(沇水)ㆍ회수(淮水)ㆍ위수(渭水)ㆍ낙수(?水) 등을 구천으로 보기도 하였다.
[주D-021]구택(九澤) : 《서경》 우공 채전에, 중국 구주(九州)의 연못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보았는데, 《병아(騈雅)》석지(釋地)에는, 구구(具區)ㆍ운몽(雲夢)ㆍ포전(圃田)ㆍ망저(望諸)ㆍ대야(大野)ㆍ현포(弦蒲)ㆍ혜양(?養)ㆍ창우(暢紆)ㆍ소여기(昭餘祈)를 구택으로 보기도 하였다.
[주D-022]무열(無熱)은 …… 별명이고 : 아뇩달(阿?達)은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설산의 북, 향취산의 남쪽에 있다는 연못[池]을 가리키는데, 무열은 아뇩달의 별명인 무열뇌(無熱腦)의 준말로, 곧 청량(淸?)이라는 뜻이다.
[주D-023]연수(連帥) : 주(周) 나라 시대에 제후(諸侯)들의 위에 있어 한쪽 지방을 지배하던 우두머리인데, 10개 제후국의 우두머리를 수(帥)라고 한다.
[주D-024]치위(淄魏)의 환란(患亂) : 당 덕종(唐德宗) 2년에 번진(藩鎭)에서 절도사(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치주(淄州)와 청주(靑州) 등지를 차지하고서, 위주 절도사(魏州節度使) 전열(田悅)과 반란을 꾀한 변을 말한다.
[주D-025]정강(靖康)의 화란(禍亂) : 북송 흠종(北宋欽宗) 정강 2년에 금(金) 나라 군사가 남쪽으로 쳐들어와서 북송의 수도 변경(?京)을 함락시키고 휘종(徽宗)과 흠종을 사로잡아간 난리를 말한다.
[주D-026]성주(星主) : 본래 탐라(耽羅 제주도(濟州島))의 우두머리에게 주던 칭호인데, 후에는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주D-027]발해 오경(渤海五京) : 상경 용천부(上京龍天府)ㆍ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ㆍ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ㆍ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ㆍ서경 압록부(西京鴨綠府)를 말한다.
[주D-028]삼련(參連) : 오사(五射)의 하나로, 화살 한 개를 먼저 쏜 다음 이어서 화살 세 개를 연속해서 쏘는 것을 말한다. 《周禮 地官 註》
[주D-029]백시(白矢) : 오사(五射)의 하나로, 살대는 과녁[侯]에 걸려 있으면서 살촉만 과녁을 꿰뚫고 지나서, 그 살촉이 하얗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周禮 地官 註》
[주D-030]균역법(均役法) : 조선 영조 26년에 설치된 법. 종래에 양민(良民)이 신역(身役)의 대가(代價)로 바치는 군포(軍布)가 1인당 2필이었던 것을 반감하여 1필로 하고, 이에 따른 결손액(缺損額)은 어세(漁稅)ㆍ염세(鹽稅)ㆍ선박세(船舶稅)와 은결(隱結)의 결전(結錢) 등으로 보충하였다.
[주D-031]진주(眞珠)가 …… 기적이 : 잃어버렸던 것을 도로 찾는 데 비유한 말. 《후한서(後漢書)》순리(循吏) 매상전(孟嘗傳)에, “합포군(合浦郡)에서는 곡식 대신 바다에서 진주(眞珠)만 생산되므로 그것을 교지(交趾)와 통상하여 식량을 수입하였다. 그런데 앞서 합포군에 부임한 태수들이 탐욕을 부려 진주를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진주가 마침내 교지로 차츰 옮아가버려 가난한 사람들이 길가에서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마침 합포군에 부임해온 맹상(孟嘗)이 전날의 폐단을 개혁하고 백성들의 생업을 영위하도록 하자, 1년도 채 못되어 교지로 옮아갔던 진주들이 다시 합포군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주D-032]목탁을 …… 대비하는 : 《주역(周易)》계사(繫辭) 하(下)에, “문을 겹으로 설치하고 목탁을 쳐서 도적을 대비한다.” 하였는데, 모든 일에 미리 경계하고 방비하는 것을 뜻한다.
15)다산시문집 제2권 시(詩)
남원 광한루에 올라[登南原廣寒樓]
층층 성벽 굽은 보루 강을 베고 누웠는데 / 層城曲壘枕寒流
만마관을 지나오니 광한루 여기 있네 / 萬馬東穿得一樓
유수의 진영에는 정전 이미 묵히었고 백제말에 유인궤(劉仁軌)가 이곳에 정정(井田)을 개척하였다. / 井地已荒劉帥府
대방의 나라 요새 예로부터 철벽이라 남원은 대방이 아니었는데 특별히 유인궤로 인해 이름을 얻었다. / 關防舊鞏帶方州
쌍계의 푸른 풀에 봄 그늘 고요하고 / 雙溪草綠春陰靜
팔령의 만발한 꽃 전장 기운 걷혔네 / 八嶺花濃戰氣收
봉홧불 들 일 없고 노래와 춤 성하거니 / 烽火不來歌舞盛
수양버들 가지에다 배 매고 머무노라 / 柳邊猶繫木蘭舟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그 지역을 분할하여 웅진(熊津)ㆍ마한(馬韓)ㆍ동명(東明) 등 오도독부(五都督府)를 설치하였으며, 그 뒤에 유인궤(劉仁軌)가 남원(南原)에 유진(留鎭)하면서 남원을 대방주(帶方州)로 만들었고, 또 그 뒤에 이세적(李世勣)이 평양(平壤)을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로 만드는 한편, 유인궤와 상의하여 고구려의 여러 성(城) 중에 도독부(都督府) 및 주(州)ㆍ군(郡) 등을 설치할 만한 곳을 편리한 대로 분할하여 모두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으니, 이른바 구부라는 이름은 이세적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당(唐) 나라에서 설치하였던 주(州)ㆍ부(府) 등은 모두 신라에게 병합되어 버렸고, 한사군(漢四郡)처럼 오래도록 유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황산대첩비를 읽고 나서[讀荒山大捷碑]
시냇가 팥배나무 가지에다 말을 매고 / 溪邊繫馬杜棠枝
단장 짚고 올라가 황산비를 읽으니 / 杖策上讀荒山碑
삼엄하고 강한 필치 호랑이가 숨죽이고 / 鐵??巖伏虎豹
번쩍번쩍 현란한 빛 도깨비가 도망가네 / 璘?煜?遁??
빛나는 위력 무섭기 어제와도 같은데 / 赫赫神威凜如昨
그 당시에 몸소 만난 자들이야 어쨌겠나 / 何況當年身値之
사마귀도 존경할 만 개구리도 대견하다 / 螳螂可敬蛙可式
아기발도 그 또한 기특한 남아로세 / 阿只拔都奇男兒
사람 나이 열다섯은 어리기 짝이 없어 / 人年十五?小耳
파피리 불어대고 죽마 탈 시절인데 / 蔥笛堪吹竹堪騎
감히 규염 자부하고 길리가 되어서는 / 敢與?髥作?利
만리 바다 넘어 대장기를 휘둘렀네 / 越海萬里專旌麾
붉은 활로 백보에서 항아리 끈 떨구었고 태조(太祖)는 항상 붉은 활을 지녔는데 일찍이 퉁두란(?豆蘭)과 무예를 겨룰 때 항아리의 끈을 쏘아 떨어뜨렸다. / ?弓百步落??
나무 등지고 활 쏘아 안위를 다투었네 / 負樹發箭爭安危
요망한 별 떨어지자 뭇 혜성이 넘어져 / 妖星旣隕衆彗倒
시냇돌에 천년토록 검붉은 피 배어 있네 / 澗石千年殷血滋
정공은 무모하고 화상은 버릇없으니 / 鄭公無謀和尙?
천심 이심 마땅히 뉘에게로 돌아갈꼬 / 天意人心當屬誰
이 한 일로 밤중 골짝 배 이미 자리 옮겨 / 此擧夜壑舟已徙
위화도 회군할 때 기다릴 것 없었다네 / 不待威化回軍時
[주C-001]황산대첩비 : 이성계(李成桂)ㆍ이두란(李豆蘭) 장군이 고려 우왕 6년(1380)에 지리산 근방 황산에서 왜적 아기발도(阿只拔都)군을 물리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선조 10년(1577)에 세운 승전비(勝戰碑)로,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雲峯面) 화수리(花水里)에 있었는데 왜정 때 파괴되고 지금은 파편만 남아 있다 한다. 김귀영(金貴榮)이 비문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쓰고 남응운(南應雲)이 각자(刻字)하였다.
[주D-001]사마귀도 …… 대견하다 : 앞발을 들어 수레를 막는 사마귀와 우물 안에서 뛰어노는 개구리가 힘이 미약하고 소견이 좁기는 하지만, 강한 적에 대항하는 의기와 양양자득한 뜻은 높이 살 만하다는 것이다. 곧 15세의 소년 적장 아기발도를 비유한 것이다.
[주D-002]감히 …… 되어서는 : 규염은 당 태종(唐太宗) 때 부여에 침입하여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다는 전설상의 인물로 성은 장씨(張氏)라 하고, 길리는 역시 당 태종 때 돌궐족(突厥族)의 왕인데 강한 군사력으로 해마다 중국을 침공하여 괴롭히다가 병부 상서 이정(李靖)에게 패하여 장안(長安)으로 압송된 뒤 귀순하여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을 지냈다. 모두 아기발도를 비유한 것이다.《?髥客傳》《唐書 卷215上 突厥上》
[주D-003]정공은 …… 버릇없으니 : 정공은 정몽주(鄭夢周), 화상은 신돈(辛旽)을 가리킨 듯하나 자세치 않다.
[주D-004]이 …… 옮겨 : 《莊子》 大宗師의 “배를 산골짝에 감추고 산을 못 속에 감춘다면 단단히 감췄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밤중에 힘이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나 버리는데 어리석은 자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에서 나온 말로, 이성계가 황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둘 때 나라를 차지하는 대세는 이미 그에게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두치진에서[豆?津] 하동부(河東府)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있다
마부가 길을 몰아 골짜기를 벗어나니 / 鳴騶引頸欣出谷
푸른 봄물 들 나루에 배가 가로 떠 있구나 / 野渡舟橫春水綠
따뜻한 모래판에 이제 막 장이 서니 / 沙平日煖市初集
일만 부엌 연기 나고 술과 고기 널려 있네 / 萬?煙生羅酒肉
강기슭의 마소는 서로 얼려 장난하고 / 岸邊牛馬交相?
포구에 모인 돛대는 다발처럼 빽빽하다 / 浦口帆檣森似束
서쪽에는 이요 북쪽에는 사벌이라 / 西通帶方北沙伐
큰 규모의 장사꾼들 여기에 모여드네 / 豪商大賈於斯簇
송경 애주 비단이 멀리 거쳐 들어오고 / 松京愛州轉錦綺
울릉도와 탐라도의 생선도 들어오지 / 鬱陵?羅輸魚鰒
어지러이 오고감은 모두가 이익 때문 / 穰穰往來摠爲利
물욕에 어두운 세상 뉘 능히 만회하려나 / 誰能挽世塗耳目
돌아보니 남악은 안개 속에 잠겼는데 / 回看南嶽鎖煙霧
청학이 높이 날아 쫓아가기 어렵구나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는데 이때 나는 아내를 데리고 있었으므로 두루 구경하지 못했다. / 靑鶴高飛杳難逐
[주D-001]대방 : 남원(南原)의 별칭.
[주D-002]사벌 : 상주(尙州)의 별칭.
[주D-003]송경 애주 : 송경은 개성(開城)의 별칭이고 애주는 중국 안남(安南)의 북쪽 지방을 가리킨다.
지리산 높고 높아 삼만 길 우뚝한데 / 智異高高三萬丈
꼭대기의 푸른 뫼는 편평하기 손바닥 / 上頭碧?平如掌
그 가운데 암자 하나 대사립이 두 짝이요 / 有一草菴雙竹扉
흰 눈썹의 스님이 검은 법복 걸치었네 / 有僧白毫垂緇幌
솔잎으로 미음 끓여 간혹 목을 축이고 / 松葉稀?或沾喉
칡덩굴로 모자 엮어 항상 이마 가렸는데 / 葛絲煖帽常覆?
중얼중얼 천백 번 불경을 외우다가 / ??念經千百遍
갑자기 고요해져 아무 소리 들리잖네 / 忽爾寂然無聲響
서른이라 세 해를 산을 아니 내려오니 / 三十三年不下山
세상 사람 어느 누가 그 얼굴을 기억하리 / 世人那得識容顔
피고 지는 꽃잎일랑 전혀 아니 살펴보고 / 花開花落了不省
오락가락 흰 구름과 한가롭기 일반일레 / 雲來雲去只同閑
표범은 소매 끌며 뜰앞에서 장난하고 / 文豹牽??庭畔
다람쥐는 염불 들으며 창틈에서 놀고 있네 / 斑?聽偈遊?間
인삼이 땅에 널려도 캐는 사람 없고요 / 蔘芽滿地無人採
노루 사슴 울어대며 제멋대로 다닌다네 / ?鹿??自往還
이 스님의 이름자를 장차 누가 알 것인고 / 此僧名字將誰識
안개 노을 겹겹이 푸른 산을 덮었거니 / 煙霞疊鎖蒼山色
태백산에 용 가둔 일 뭇사람이 의심하고 / 太白藏龍衆共疑
소림사에 면벽한 일 우매한 자 이해 못해 / 少林面壁愚莫測
듣자하니 설파대사 선정에 들었다는데 / 吾聞雪坡入禪定
혹시 그의 높은 행적 여기 숨지 않았나요 / 無乃高?此逃匿
연공은 고개 숙여 대답하려 하지 않고 / 蓮公?首不肯答
그분과 헤어진 뒤 소식 없다 이를 따름 / 但道別來無消息
[주D-001]태백산에 …… 의심하고 : 태백산은 중국 섬서(陝西) 주질현(??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흔히 종남산(終南山)이라 부른다. 당 나라 때 태백산 중봉(中峯) 꼭대기에서 살던 수백 살 먹은 인도에서 온 고승이, 깊은 못에 사는 악독한 용이 오랫동안 못된 짓을 하자 그것을 잡아 그릇에 가둬버렸다는 데서 나온 말로, 지리산에 있는 이름 모를 고승의 신통력을 믿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岑嘉州詩》卷2 太白胡僧歌에 “창가에서 석장으로 두 호랑이 싸움 말리고 침상 밑의 바리때엔 한 마리 용을 가뒀다네[窓邊錫杖解兩虎 牀下鉢盂藏一龍]” 하였다.
[주D-002]소림사에 …… 못해 : 소림사는 중국 숭산(崇山)에 있는 절 이름이고, 면벽은 벽을 마주 대한다는 뜻이다. 양(梁) 나라 때 인도의 중 달마(達磨)가 중국에 들어와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벽을 마주하고 좌선(坐禪)한 끝에 도를 얻었다는 데서 나온 말로, 지리산의 고승이 도를 얻기 위해 고행을 쌓은 사실을 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高僧傳》
담헌서(湛軒書) > 외집 2권 > 항전척독(杭傳尺牘) >
건정동필담(乾淨?筆談)
15일 편지를 다음과 같이 보냈다.
그 동국기략(東國記略)은 이러하다.
(한 귀는 망각하고 기억하지 못함)
긴 바람 불어 황혼 달을 보내니 / 長風吹送黃昏月
사롱 속 은촉불이 암담한 중이네 / 銀燭紗籠?淡中
한 번 금강산을 봤으면 하네 / 一見金剛山
벽공은 가을에 흰 부용을 묵었네 / 瑤空秋束白芙蓉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군사를 돌린 후에 윤소종(尹紹宗)이 정지(鄭地)를 통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면서 《곽광전(?光傳)》을 품고 와서 바쳤다. 조인옥(趙仁沃)으로 하여금 읽게 하고 들었는데, 인옥이 왕씨를 다시 세우자는 의론을 극력 진술하므로 태조가 왕씨의 후손을 세우려 하였다. 그러자 조민수(曺敏修)는 우(禑)의 외삼촌인 이임(李琳)의 척당(戚黨)으로서, 우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이색(李穡)에게 문의하여 드디어 의론을 확정하여 창을 세웠다. 태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문 앞에 찾아와 이상한 글을 바치면서 말하기를,
하였다. 그 글에
는 등의 말이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 영접해 들이게 하였는데, 이미 떠나버려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려의 서운관(書雲觀)에 비장된 기록에 「나무를 세워 아들을 얻는다[建木得子]」는 말이 있고, 또 「왕씨가 망하고 이씨가 일어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끝내 고려가 망할 무렵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 또 사람의 운명을 잘 알아 맞히는 혜징(惠澄)이란 자가 사사로이 그의 친한 사람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그 친한 사람이 묻기를,
하니, 혜징이 말하기를,
하였다.
동계집(桐溪集) > 동계집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
칠언절구(七言絶句)
우연히 읊다.
기와도 담도 무너져 들쑥마저 보이는데 / 瓦落垣頹見野蓬
근래에 사우가 나를 기다렸네 / 年來四友待桐翁
하루아침에 초가집을 후딱 지었더니 / 一朝茅棟居然就
방장산이 앞에 놓여 늦바람을 보내 주네 / 方丈當前送晩風
주D-001]사우(四友) : 동계 자신이 거처하는 집 주위에 심어 놓고 벗처럼 여겼던 국화, 대나무, 매화, 소나무를 말한다.
[주D-002]방장산(方丈山) : 지리산(智異山)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 동국이상국전집 제35권 > 비명(碑銘)ㆍ묘지(墓誌) >
조계산 제2세 고 단속사주지 수선사주 증시 진각국사(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의 비명 병서(幷序) 봉선술(奉宣述) 비석에 새길 때 비면이 좁기 때문에 산삭하기를 청하였고, 여기에는 예전 것대로 하였기에 두 본이 같지 않다.
또 지리산(智異山) 금대암(金臺庵)에 거할 때에 대(臺) 위에서 연좌(宴坐)하는데 눈이 이마가 묻힐 정도로 쌓였으나, 오히려 우뚝하게 앉아 마치 마른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죽었는가 의심하고 흔들었으나 반응이 없었으니, 그의 각고(刻苦)는 이와 같았다. 무릇 도(道)와 함께 정기가 응결되어 생사를 도외시하고 형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서 그 누가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태화 무진년에 보조국사가 국사에게 사석(師席)을 계승시키고 곧 안규봉(安圭峯)으로 물려가려고 하니, 국사는 굳이 사양하고 드디어 지리산으로 가서 수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주D-007]연좌(宴坐) : 정좌(靜坐)하여 심사 묵념(深思?念)하고 무심(無心)의 경지에 들어가 심성(心性)을 구명(究明)하는 참선술(參禪術)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文集) > 동국이상국전집 제38권 > 도량재(道場齋) 초(醮)ㆍ소(疏) 제문(祭文) >
도량재(道場齋)도량재(道場齋)도량은 불공드리는 장소이고 재는 시식(施食)인데, 재연(齋筵)ㆍ재회(齋會) 등을 마련하여 부처에게 공양(供養)드리는 것을 말한다. 초(醮)ㆍ소(疏) 제문(祭文) 동경 초토병마(東京招討兵馬) 때에 지었다.
지리산대왕(智異山大王)에게 올리는 축원문 부사(副使) 이하가 행하였다.
모 등(某等)은 모두 비재(非才)로서 원수(元帥)의 요좌(寮佐)에 보임되어 장차 동도(東都)를 문죄(問罪)하려 합니다.
대저 일군(一軍)의 생사와 성패는 모두 통군(統軍)에게 달렸으니, 사람의 몸에 비기면 통군은 머리요, 요좌(寮佐)는 손이고 군졸(軍卒)은 발이니, 어찌 머리에 병이 있는데 손과 발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군사가 선주(善州)에 머무르고 있는데, 통군(統軍) 상서(尙書) 김공 모(某)가 갑자기 미질(微疾)에 걸려 기거가 불편합니다. 생각건대 산과 들에서 노숙하면서 바람과 안개를 맞아서 일어난 병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무슨 까닭이라도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일군(一軍)이 걱정과 두려움에 싸여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사와, 감히 중성(衆誠)을 내어 경건히 우리 대왕(大王)의 영(靈)에 기도 드립니다.
만일 신통한 힘을 빌어 보지(保持)하고 구호하여, 김공(金公)으로 하여금 병이 낫는 기쁨이 있게 하여 즉시 건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신다면, 삼군(三軍)의 복일 뿐만 아니라 대왕의 위령(威靈)도 더욱 드러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우선 옷 한 벌을 올려 작은 성의를 펴고, 병이 쾌유되면 다시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려,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겠습니다.
석계징 유 지리산 서(釋戒澄遊智異山序)
김종직(金宗直)
서방의 성인으로는 모니(牟尼)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고, 동쪽의 산으로는 두류산(頭流山)보다 더 높은 곳이 없다. 불법을 배우는 사람은 모니를 표준으로 삼으니 곧 용수(龍樹)ㆍ마명(馬鳴)ㆍ달마(達摩)ㆍ임제(臨濟)는 훨씬 아래층에 속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산을 구경하는 사람도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금강산(金剛山)은 동쪽에 웅장하고, 묘향산(妙香山)은 북쪽에 웅장하고, 구월산(九月山)은 서쪽에서 웅장하지만, 남쪽의 두류산에 오르게 되면 곧 웅장하던 세 산은 눈아래에 깔려 있어 흙 무더기와 같이 보인다. 어찌 이 뿐이랴. 천하의 항산(恒山)ㆍ대산(垈山)ㆍ형산(衡山)ㆍ화산(華山)도 또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에 바쁠 것이다. 징상인(澄上人)은 모니(牟尼)를 배우는 사람이다. 젊어서 덕원군(德原君) 서(曙)를 섬기면서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꺼려하는 적이 없더니, 늦게야 불교를 좋아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명산을 두루 참배하는데, 계를 지키는 행세가 맑고 높아서 그 도를 닦는 사람이 다투어 그를 사모하였다. 얼마 후에 대방(帶方 남원(南原)의 옛 칭호)으로부터 두류산에 놀아, 반야봉(般若峯)에 오르며 천왕봉(天王峯)을 넘어 높은 대(臺)에 앉아서 부처께 예불하여 청학동(靑鶴洞)에 가서 신선을 찾았다.
이제는 그의 행장을 거두어 가지고 봉천사(奉天寺)에 들어가서 거처하는데, 향을 피우며 벽을 향해 앉아서 그 스승의 이른바 성(性)을 찾고 있으니, 징(澄)의 뜻은 다만 자기가 모니에게 귀의(歸依)하려는 것뿐 아니라, 그의 옛주인을 위하여 복(福)의 터전을 낚으며 구제하는 길을 터놓아 그로 하여금 장차 복을 얻게 하려는 것이니, 징(澄)은 또한 충성스럽도다. 나는 공자의 학도다. 그러나 산을 좋아하는 것은 징과 마찬가지인데, 웅장한 산 세 곳은 모두 먼 지역에 있으므로 가서 구경할 길이 없어 평소에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더니, 신묘년에 함양(咸陽) 군수로 가게 되니 두류산이 바로 그 남쪽지역에 있었으므로, 한번은 뜻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사무를 제쳐놓고 그 꼭대기에까지 올라가서 제법 공자(孔子)께서 천하를 작다고 하시던 뜻을 체험해 보았는데, 5년이 지났건만 몽매간에도 정신은 언제나 천왕봉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징(澄)과 같은 사람과 함께 다시 이 봉우리에 올라가서 산과 물이 퍼지고 솟은 것이라든지, 큰 물고기[鯤]와 큰 새[鵬]가 변하는 것이라든지, 해와 달이 출몰하는 것을 마음대로 구경하여 마음속의 울적함을 다시 상쾌하게 하여 볼 수 있을꼬. 비록 그러나 징(澄)이 구경하는 것은 움직이는 것은 움직이는 대로요, 고요한 것은 고요한 대로이겠으나, 내가 보는 것은 움직이는 것으로 인하여 고요함을 찾으며, 고요함을 안하여 움직이는 것을 찾는 것이니, 움직임과 고요함이 본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이것은 나와 징이 일부러 다르게 보려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스승의 학설이 본시 이러했는데 나도 그 까닭은 알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 > 속동문선 제5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우연히 긴 시를 지어 권 사군(權使君) 연형(年兄)에게 보내어 일찬(一粲)에 이바지함[寒風樓偶得長韻錄似權使君年兄博粲]
유호인(兪好仁)
지난 날 그대 일찍 난봉서를 하직하고 / 往日早辭鸞鳳署
도문서 전별 받고 강을 건너갈 때 / 祖罷都門過江去
멀리 방장산(지리산(智異山))이 하늘 높이 솟은 곳 / 望中方丈倚天高
한 조각 뜬구름 어디론지 아득했더니라 / 一片浮雲杳何處
당귀를 가득히 쥐고 정에 연연하여 / 滿把當歸情眷戀
가다가다 길에 주계현(무주(茂朱))을 들렸더니 / 行行路出朱溪縣
소나무ㆍ계수나무 숲속에 높이 누운 / 故人高臥松桂林
그대와 술잔 앞에서 옛 얼굴을 다시 대했네 / 解后尊前舊顔面
그대나 나나 각기 반백된 인생 / 人生半白各華顚
등불을 다 돋우니 밤은 길기도 해라 / 挑盡燈花夜如年
난간에 털썩 앉아 새벽토록 이야기 / 頹然曲檻不知曉
언뜻 꿈을 깨니 시내 건너 몰아오는 풍우 / 夢斷隔溪風雨天
솔바람 휘부는 소리가 골안을 움직이고 / 笙鍾鱗甲動萬壑
캄캄한 밤 우렛소리 멋대로 우루릉대고 / 屛??隆恣飜覆
집채 같은 물결이 쿵 쾅 쏟아져 / 洪濤巨浪劈張龍
노기가 지축을 꺾을 듯도 하더니 / 怒氣猶將折坤軸
촌남 석양에 갈매기가 번뜩이고 / 村南夕照?鷗鷺
구름 건너 먼 산에 하늘이 반쯤 드러나 / 雲外遙岑天半露
이윽고 물상들이 차츰 갈라져 보이고 / ?臾物像漸離披
눈에 가득 운산이 모두 아릿다웠네 / 滿眼溪山俱態度
아스라한 연기 속에 만 송이 버들가지가 / 蒼茫煙柳更萬朶
허리를 흔들흔들 예쁘기도 하여라 / ??腰支工?娜
이런 경치에 좋은 시가 없을 수 없어 / 此間不可無好吟
그대가 절반을 내게 나눠 주었지 / 使君一半分輸我
긴 휘파람 몇 소리가 바위 골짝 울리니 / 數聲長嘯振岩谷
안개ㆍ놀이 돌아보며 다투어 아양떨었네 / 煙霞顧眄爭容悅
좌로 황학을, 우로 홍애를 부르니 / 左招黃鶴右洪厓
곁사람이 우리를 신선인 줄 알았네 / 傍人解道天上客
날마다 늦도록 맑은 놀이 실컷 하니 / 遲回日日飽淸賞
도처에 군은이 소방에 미치었네 / 到處君恩及疎放
이로써 노래 지어 승유를 적노니 / 是用作歌記勝遊
구태여 벽을 쓸고 현판을 달 것도 없으리 / 不須掃壁隨銀榜
[주C-001]한풍루(寒風樓) : 무주(茂朱) 객사(客舍) 앞에 있던 누다.
꿈에 청학동에 논 사[夢遊靑鶴洞辭]
유호인(兪好仁)
낭만히 노는 어떤 손이 청구에 비껴 서니 / 客有漫浪遊兮?靑丘
천고에 아득히 짝이 없네 / 曠千古兮杳寡?
절운관을 높이 쓰고 / 冠切雲之嵯峨
명월주 차고 임구를 울리며 / 佩明月兮鳴琳球
몸에는 산뜻하고 화려한 비단 도포 / 披錦?之鮮麗兮
자줏빛 연기를 입었으며, 봄 구름으로 수놓았네 / 衣紫煙兮繡春雲
나의 차림도 으리으리하니 / 顧余飾之陸離
?기는 향내도 그윽해라 / ?菲菲兮淸芬
요염하고 곱고 매혹적인 그 맵시 / 妖姸?好有餘濃兮精神
황홀한 정신이 높이 놀아 닭의 무리에 뛰어난 봉이로세 / ?迅邈超謝乎鷄群
광한전에 올라 계수를 만지고 / 攬桂樹於廣寒
부상의 아침 햇살을 손으로 떨치며 / 拂朝暾兮扶桑
허공에 솟아 올라 항해를 움켜 마시니 / 凌大漠而飮沆瀣兮
인간이 어디메뇨, 티끌만 아득해라 / ?人?兮塵杳茫
취수 서쪽 끝 만 리에 / 翠水之西極萬里兮
반린을 타고 백봉을 몰아 / 駕斑麟而?白鳳
곧바로 곤륜산으로 노닐러 가니 / 逕?遊乎?岡
서왕모가 생긋 웃으며 부드러운 낯으로 / 金母啓齒色敷?兮
청조를 시켜 경장을 따라 주네 / 令靑鳥導余以瓊漿
바람 연에 노을 수레로 훨훨 몰아가니 / ?輦霞輧馭汗漫兮
휘휘, 덜커덩, 달리는 소리 온 우주를 뒤흔드는데 / ????乎鴻?之宅
비렴이 길을 맑혀 줌이여 / 飛廉屛?吸?繡卒兮
붉은 구름 저쪽에 아득히 보이누나 / 隔紅雲兮空??
부구선인이 방장산의 선관을 관할하다 / 浮丘管轄乎方丈之館兮
아양떨며 눈짓하며 드디어 나를 황홀히 부르는구나 / ????遂招予乎??
주궁ㆍ패궐이 허공에 둥실 늘어서 있고 / 朱宮貝闕?以跨虛兮
우의가 너울너울 서늘한 바람에 춤추는데 / 羽衣翩??然騰颯
위에는 고요하고 툭 틔어서 막힘이 없고 / 上寥廓沆?而無?兮
밑에는 또 끝간 데를 몰라라 / 下積蘇兮又焉極
대지가 축을 붙들고 빙빙 돌아가고 / 大地互回而控軸兮
별들이 두루 깔려 수없이 반짝이네 / 星辰環布而錯落
너울너울 세 번 향수에 목욕하고 천궐에 나아가 / 翼翼三熏仰覲天表兮
단신으로 자신 앞에 머리를 숙이니 / 瀝血寸丹首稽乎紫宸
자신전은 빛나고도 그지없이 깊은데 / 紫宸煜?而沕穆兮
기기괴괴, 얼기설기, 드높이 주순을 걸쳐 지었네 / ????嵬架乎朱?
옥황께서 우위를 거느리고 엄연히 척강하사 / 玉皇羽衛儼陟降兮
중기중기한 창합들을 굽어보시니 / 俯?闔之??
번개가 신동에 번쩍, 뇌성이 천소를 도와 / 電?神瞳雷助天笑兮
태허의 온 봄을 만드시네 / 陶大虛之一春
늘어선 선관들이 구름 달리듯, 안개 일 듯 / 森官府之雲奔霧?兮
오채의 조복을 번쩍이고 / 烱五彩之??
옥녀와 시동들이 / 仍玉女而與侍裔兮
예쁜 맵씨로 분분히 나타나 / 紛群妙之綽約
머리엔 태화ㆍ신영의 상투를 짜고 / 戴太華晨?之?兮
발에는 현경ㆍ봉문의 신을 신었구나 / 履玄瓊鳳文之?
비경을 시켜 팔랑을 타고 / 令飛瓊兮禪八琅
능화를 명하여 경을 치니 / 敎凌華兮?石轟
뭇 음악이 쾅쾅 번갈아 나오는데 / 衆音之迭進兮
이따금 현운의 법곡도 들리는고야 / 間玄雲之法曲
만년 만에 한 번인 이 기회를 만났으니 / 幸萬期而邂逅兮
그 동안 동해가 뽕밭으로 변했으리 / 亦變東海兮桑田
외람되이 우러러 월계를 더럽힌 날 / ?仰塵兮月階
이 좋은 저녁이 묻노라 어느 핸고 / 玩今夕兮何年
청은의 비록을 내게 수여하며 / 授我以靑隱之錄
동화의 높은 각을 내게 빌려 주며 / 假我以東華之閣
거승의 꽃을 내게 먹여 주며 / ?我以巨勝之花
화지의 샘물을 내게 권하면서 / 侑我以華池之泉
초남의 명령나무를 어루만지며 / 撫楚南之冥靈
8천 년 뒷 기약을 나와 맺은 후에 / 要後期於八千
인하여 조용히 나를 달래며 / 仍誘余以縱臾
육신에게 자문하여 내주는 선결 / 咨六神而與訣
이 태현이 아득하고 황홀하니 / 曰玆大玄杳兮惚兮
무위의 처음을 혹 얻을지니 / 無爲之先?可得兮
네 삼시를 치고 네 욕심을 가시면 / 攻而三尸淨而欲兮
도가 바로 네게 있는데 눈썹 보지 못하누나 / 道則在爾而不見睫兮
이와 서캐같은 하천한 몸이 / 顧??之下賤
진원의 우악하신 총은을 입사와 / 荷眞元之寵渥
백붕 같은 하사를 내리오시니 / 等百朋兮起壽
상제여, 만수무강, 아름다이 즐기옵소서 / 頌神休兮於樂
문득 하늘 닭이 날개쳐 꼬끼요 울고 / 忽天鷄之??
새벽 종이 쾅쾅 울려오기에 / 晨鍾轟隱乎??
내 혼이 황홀하여 인간으로 돌아오니 / 魂恍惚兮歸來
몸에 밴 하늘 향기 아직도 풍겨 있네 / 尙天香兮未歇
다만 보이는 건 목객이 시를 읊고 산 원숭이 달 아래 휘파람 부는데 / 但見木客吟詩山?嘯月
만규에 피리 소리, 천암이 검극인 듯 / 萬竅笙?千巖劍戟
아득한 세계가 참인가 환이런가 / 眩眞幻於古?國
안개만 부질없이 모이락 흩어지락 / 空漲霧之?翕
아, 이것이 조물주가 나를 희롱함인가 / 噫?此乃造物者?我邪
나도 또한 모르겠네, 하늘이 왜 까마득하고 땅이 왜 탁한지 / 吾亦未知天何爲而玄地何爲而濁
해와 달이 왜 오락가락하는지, 바람과 구름이 왜 변하고 없어지는지 / 日月何爲兮往來風雲何自兮變滅
분분한 시비가 만 가지로 다르거니 / 紛是非之吹萬
신세를 일락에 부침만 못하리라 / 曷若付身世於一?
진실로 인생이 우주 안에 / 信乎寓形宇內
삶이 아득히 털끝처럼 가는 것인데 / 渺然毫髮
벌레의 팔이나 쥐의 간으로 / 蟲臂鼠?
내 멋대로 살리라 / 隨吾所適
올라가면 옥당에 금마 / 升則玉堂金馬
물러나면 운천에 계수나무 있는계곡 / 退則雲泉桂壑
고관대작을 영통의 지역에 비기고 / 擬簪笏於?通之域
만상을 초월하고 우주를 나오면 / 超萬象而出宇宙
큰 바다가 고대 술병으로 보이고 / 坐見瀛海爲窪尊
태산이 조그만 송편이 되어 / 岱輿爲??
삼광보다 더 오래 늙지도 않고 / 後三光而不老
희황이 모두 아래로 깔보이리니 / 下羲皇而高視
이런 뒤에 사람들이 다 이르기를 천하의 즐거움을 한몸에 모은 자는 / 然後人皆謂萃天下之樂者
오유자라 하리라 / 孰有浮於烏有子
[주C-001]청학동(靑鶴洞) : 지리산(智異山)의 가장 깊숙한 동학(洞壑)에는 청학(靑鶴)이 깃들여 있고 신선들이 산다 하며 역대 시인들의 제영(題詠)이 많다.
[주D-001]절운관(切雲冠) : 굴원(屈原)의 초사(楚辭)에서 나왔는데, 당시의 높은 관(冠)이다.
[주D-002]항해(沆瀣) : 북방의 밤중 기운이 어리어 맺는 맑은 이슬이다.
[주D-003]천소(天笑) : 이백(李白)의 시에, “옥녀(玉女)가 투호(投壺)하니 천제(天帝)가 웃는다.”는 말이 있다.
[주D-004]동해가 …… 변했으리 : 선녀(仙女) 마고(麻姑)가 왕방평(王方平)에게 말하기를, “동해(東海)가 물이 말라서 뽕밭으로 변하는 것을 세 번이나 보았다.” 하였다.
[주D-005]초남(楚南)의 명령(冥靈)나무 : 《장자》에, “초(楚) 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란 나무가 있는데, 8천 년은 봄이 되고 8천 년은 가을이 된다.” 하였다.
[주D-006]삼시(三尸) : 도가(道家)에서, “사람의 몸에 삼시충(三尸蟲)이 있는데, 그것이 없어져야 오래 산다.” 하였다.
[주D-007]목객(木客) : 산중에 있는 도깨비 종류인데, 형체가 사람과 비슷하다.
[주D-008]일락(一?) : “예와 지금이 모두 한 언덕의 여우와 같다[古與今如一丘之?].” 이라 옛글이 있다.
[주D-009]영통(?通) : 말똥은 통(通)이라 하고, 돼지똥을 영(?)이라 한다.
[주D-010]오유자(烏有子) : 오유(烏有)는 어찌 있겠느냐는 뜻인데, 오유자(烏有子)는 실제로 없는 공상적(空想的)인 인물로 쓰는 것이다.
해동제국기 서문[海東諸國記序] 신숙주(申叔舟)
전조(前朝)의 말엽에 국정이 문란하여 어루만짐을 잘못하니 드디어 변방에서 난리를 일으켜 연해 수천 리의 땅이 폐허가 되었는데, 우리 태조께서 분연히 일어서서 지리산ㆍ동정(東亭)ㆍ인월(引月)ㆍ토동(兎洞)에서 수십 차례를 싸우고서야 왜적이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였다.
영봉산 용암사 중창 기(靈鳳山龍岩寺重創記)
박전지(朴全之)
무외(無畏) 국통이 하산(下山)한 곳인 용암사는 진양(晉陽) 속현(屬縣)의 반성(班城) 동쪽 모퉁이 영봉산(靈鳳山) 속에 있다. 옛날에 개국(開國)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지리산(智異山) 주인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만일 세 개의 암자를 창립하면 삼한(三韓)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한 비밀스런 부탁으로 인하여 이에 세 개의 암자를 창건하였으니, 곧 지금의 선암사(仙岩寺)ㆍ운암사(雲岩寺)와 이 절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절이 국가에 대하여 큰 보탬이 되는 것은 고금 사람이 함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창건한 연대가 멀어지고 또 주지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지붕이 허물어지고 상설(象設)이 퇴색되고 대장(大藏)이 썩고 무너져 장차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우리 국통이 젊은 나이에 승과(僧科)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올랐는데, 곧 명리(名利)에서 벗어나 산으로 돌아다니며 암자에 머문 것이 여러 해 되었다. 임금께서 대사의 소행을 들으시고 대덕(大德) 6년 임진년 여름에 특별히 중사(中使) 지후(祗侯) 김광식(金光軾)을 보내어 대사를 월출산(月出山) 백운암(白雲庵)에서 맞이하여 명하기를, 원찰(願刹)인 묘련사(妙蓮社)의 주지가 되게 하였다. 10년 병오년 겨울에 이르러 법호(法號)를 올려, 백월 낭공 적조 무애 대선사(白月朗空寂照無?大禪師)를 삼았다. 이듬해 정미년 여름에 심왕(瀋王)이 부왕과 함께 제자의 예를 행하려 하니, 왕사(王師)로 봉하고 법호를 불 보조 정혜 묘원 진감 대선사(佛普照靜慧妙圓眞鑑大禪師)로 올렸다. 이에 임금께서 유명한 절로 하산소(下山所)를 삼으려 하였다. 이때에 금장사(金藏寺)에 주지가 없고 퇴락되었다. 선사의 생각에 그것을 다행으로 여겨 두세 번 거듭 청하여 하산소로 삼아 즉시 금당(金堂)을 개조하고, 아울러 자마 금박(紫磨金薄)으로 주불(主佛) 미륵여래(彌勒如來)와 보처(補處)인 두 보살(菩薩)의 상을 개수하였으니, 첨의찬성사 대학사 이산(僉議贊成事大學士李?)이 지은 기(記)가 있다. 지대(至大) 원년 무신년 가을 심왕이 즉위하던 날에 선사를 청하여 용상(龍床)에 올라 나란히 앉고, 또 선교각종(禪敎各宗) 산문도반(山門道伴) 총섭조제(摠攝調提)의 호(號)를 올리고, 이어서 공의사(共議事)를 맡겨 제수하였다. 기유년 겨울에 임금이 국청사(國淸寺)에 옮겨 머물게 하고, 오대(五臺)ㆍ수암(水岩)ㆍ조연(槽淵)ㆍ안락(安樂)ㆍ마류(碼?) 등 다섯 절도 이 절에 예속시켜 하원(下院)으로 삼았다. 이어서 도감(都監)을 세워 수리하니 선사가 달친(達?)의 봉급을 모두 희사하여 금당(金堂)을 창건하고, 아울러 주불(主佛)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보처(補處)인 두 보살의 상을 만들어 모두 만금(滿金)으로 장식하고, 첨의정승 대학사 여흥군(僉議政丞大學士驪興君) 민지(閔漬)에게 기(記)를 쓰게 해 게시(揭示)하고, 하원(下院) 다섯 절은 내 뜻이 아니라 하여 모두 환본(還本)시켰다. 2년 경술년에 이르러 임금이 다시 형원사(瑩原寺)로 옮겨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그 절이 전대(前代) 국통의 하산소이므로 선사가 사양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이루지 못하여 또한 금당과 여러 낭무(廊?)를 개수하였다. 황경(皇慶) 2년 계축년 여름 6월에 금상 왕위를 이었는데, 겨울 11월에 이르러 부왕의 명령을 이어 다시 선사를 책봉하여 국통으로 삼고, 대 천태종사 쌍홍 정혜 광현 원종 무외 국통(大天台宗師雙弘定慧光顯圓宗無畏國統)이란 법호를 올렸다. 연우(延祐) 갑인년 봄 정월에 대사가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임금을 뵙고 형원사의 주지를 사양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절을 제외하고는 편안할 만한 곳이 없는데 왜 굳이 사양하는가.” 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저는 본래 주지가 되지 않기로 맹세하였는데, 이제 면하지 못하여 주지를 하고 있으니 절이라는 이름만 얻으면 족합니다. 쇠잔하고 성하고, 편하고 편하지 않느냐는 것으로 괘념하겠습니까.” 하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2년 을묘년에 왕의 전지(傳旨)를 제찰사(提察使) 한중희(韓仲熙)와 염장 별감(鹽場別監) 이백경(李白經)에게 내려 일을 시작하여 거듭 경영하게 하였다. 3년 병진년 가을에 제찰사 박효수(朴孝修)가 또한 임금의 명령을 받아 크게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4년 정사년에 제찰사 정안교(鄭安校)와 5년 무오년에 제찰사 이황(李?)과 염장 별감 방우정(方于楨)이 또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역사를 감독하여 준공하였는데, 모두 새로 지은 것이 80여 칸이고 옛것을 중수한 것이 20여 칸이었다. 기와를 이은 것은 물고기의 비늘과 같고, 처마는 날개 쳐 나는 것 같고, 색칠한 담은 산가지를 놓은 것처럼 종횡으로 하였으며, 돌길은 위아래에 구름처럼 연하였다. 전당의 안은 닥나무 종이로 바르고 왕골로 깔고 두루 단청을 칠하여 장엄한 것이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었다. 금당 주불(主佛) 석가여래의 큰 상과 별전(別殿)에 봉안한 관음(觀音)ㆍ정취(正趣) 두 보살을 수리함에 있어서 대사가 사적으로 저축한 것을 내놓고 또 다른 사람에게 모금하여 여러 인연을 갖추어서 황금이 여래의 몸에 가득 차고 다섯 가지 채색이 보살의 상에 번쩍인다. 대장경을 보충함에는 지난번의 염장 별감 이공과 방공이 별도로 임금의 명령을 받아 설전지(雪?紙) 3만여 장과 칠(漆)을 담은 함(函) 1백 40여 개를 만들어 받아 도왔다. 대사의 제자인 대선사 승숙(承淑)ㆍ중덕(中德) 일생(日生) 등이 강화(江華) 장판(藏板)한 집에 가서 빠진 함ㆍ권(卷)ㆍ장(張)을 찍어 와서 신본(新本)과 구본(舊本)을 합하여 도합 6백여 함을 만들었는데, 모두 누런 비단으로 책갑을 만들어서 새 전당과 새 창고 안에 안치하였다. 염장 별감 방공이 다시 임금의 명령을 받고 5년 11월 18일에 대사를 맞아 원(院)에 들어가서 약 7일 동안 성대하게 낙성(落成)의 법회(法會)를 열어 낮에는 대장경을 읽고 밤에는 현묘(玄妙)한 뜻을 말하여 임금의 수(壽)를 빌고 만민을 복되게 하였으니, 능사(能事)가 끝난 것이다.
아, 이상하다. 이제 국통이 삼대 임금의 옷을 걷어 올리는 예를 대대로 받아서 마침내 일국의 스승이 되어 부처님의 도(道)를 드날리고, 다시 현강(玄綱)을 진작하여 널리 불사(佛事)를 닦아서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였으니, 그 덕과 업을 어찌 다 의논할 수 있겠는가. 또 이 땅이 처음으로 도선 조사(道詵祖師)를 만나 비로소 4백 년 전에 창건하여 우리 태조(太祖)를 탄생하게 하여 삼국을 통일하여 한 뜰에 모이게 하였고, 중간에 불행히도 오랫동안 적막한 도량이 되었다가, 이제 다시 불승(佛乘)을 높이는 임금과 숙원(宿願)이 있는 종사(宗師)를 만나 4백 년 뒤에 다시 창건되어 셋을 모아 하나로 귀일시키는 법으로 복리(福利)를 넓게 드날렸으니, 그 앞뒤가 서로 부합되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신통한가. 어찌 땅도 만나는 때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좋은 일은 마땅히 아름다운 옥돌에 새겨 영원히 전해야 하고 빠뜨려 쓰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제 국통의 문인(門人)들의 부탁으로 대강 날과 달을 기록한다.
지리산 수정사 기(智異山水精社記)
권적(權適)
인류의 문명은 생긴 지가 오래다. 한없이 소박함을 상실하고 무궁한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일생 동안 헤매며 스스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모두 그렇다. 어떤 사람이 만일 부귀를 거름흙처럼 생각하고 공명을 헌신짝과 같이 버리며,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기쁘게 여겨 활기없는 마음과 메마른 모양을 하여 가지고 해탈하는 길을 찾으며 말하기를, “나만 스스로 구제되면 그만이지, 어떻게 남까지 구제할 수 있겠느냐.” 한다면, 이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는 좋겠으나 크지는 못하다. 만일 천하가 그러함을 민망히 여기어, 이른바 해탈하는 길을 찾고 이미 스스로 그것을 얻게 된 뒤에는 또한 다른 사람과 이를 함께할 것을 목표로 하여 물러나지 않은 뒤에 그만둔다면, 이것은 집 밖을 나서지 않고도 두 가지의 이익에 모두 만족할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은 위대한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이것이 수정사(水精社)가 지어진 이유이다. 사(社)의 주장은 이름이 진억(津億)이며 세속의 성은 이씨(李氏)다. 아버지 성(晟)은 비서감(秘書監)이었고, 어머니 전씨(全氏)는 용궁군 부인(龍宮郡夫人) 이었다. 8세부터 냄새나는 양념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고, 11세에 중이 되어 현화사(玄化寺) 혜덕왕사(慧德王師)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26세에 대선(大選)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학문과 실천이 날마다 발전되어 여러 사람이 모두 그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그의 성품이 세속적인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함께 공부하던 중 혜약(慧約) 등과 더불어 한탄하기를, “그 출가(出家)한 사람은 한번 해탈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이다. 만일 이것을 빙자하여 높은 명예나 후한 이익을 바란다면 어찌 본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로부터 아주 떠날 생각을 가졌다. 마침내 명산(名山)에 들어가서 깨끗한 사(社)를 꾸며 옛날 동산(東湖)과 서호(西湖)의 영향을 받으려 하였으나 적당한 장소가 문제였는데, 지리산(智異山)에 오대(五臺)라는 허물어진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지리산은 우리 나라의 큰 산인데 높고 깊으며 넓고 커서 천하에 견줄 만한 것 없고 오대사는 또 산 남쪽에 있는데 그곳은 산이 솟아올랐다 내려앉았다 한 것이 다섯 겹이나 되어 은은히 대(臺)를 포개어 놓은 것 같기 때문에 그 뜻으로 절 이름을 지은 것이다. 1천 봉우리가 둘러싸 옹호하며 모든 골짜기는 한 곳으로 모여들어 신선이나 성인이 꼭 그 안에 숨어 있는 듯하여 보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아찔해지고 마음이 도취된다.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일찍이 남쪽으로 다니다가 그곳에 이르러 머뭇거리며 두루 구경하고 이르기를, “여기는 큰 법이 머무를 곳이다.” 하였다 한다. 대사가 이 말을 듣고 용감히 갔으며, 가서는 희망하던 곳을 얻어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터를 닦았다. 해인사(海印寺)의 주지(住持) 승통(僧統)인 익승(翼乘)과 공배사(功倍寺)의 주지(住持) 승록(僧錄) 영석(瑩碩)이 크게 사재를 희사하여 그 경비를 원조하였고, 종실과 승상 이하 벼슬아치와 명망있는 이들, 선원(禪錄)과 강원(講院)의 명망 높은 중으로부터 일반 신도로서 사(社)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었다. 중 담웅(曇雄)과 지웅(至雄)은 기부할 사람을 모집하고, 순현(順賢)은 직접 공인(工人)을 데리고 연장을 잡고 일을 서둘러서 모두 건물 86간을 지었다. 불당과 거처방이 깨끗이 정돈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초연(超然)히 정토(淨士)에서 사는 듯한 감상이 생기게 하였다. 좌수(座首)인 법연(法延)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의 주상(鑄像) 한 분을 받들어 모시고, 승통(僧統)인 익승(翼乘)은 석탑(石塔) 한 자리를 세우고, 선사(禪師) 영성(永誠)은 인쇄한 대장경을 모시었다. 모든 생활 필수품과 공부하기에 필요한 기구가 극히 작은 것까지 다 준비되었다. 늙은 이는 편히 거처할 곳이 있고 병자는 요양할 곳이 있게 되었다. 사(社)에 모인 모든 사람은 온화하고 엄숙해 잘못이 있으면 충고하고 잘한 일은 칭찬하여, 서로 자극을 받아 밤낮으로 노력하며 함께 서방(西方)정토에 이르기를 목표로 하였다. 우수한 사람이나 덕망이 높은 이로서 사원(社院)에 거처하는 이에게는, 일정한 법규에 구애되지 않고 경을 읽든가, 염불을 하든가, 공부를 하든가 간에 마음대로 자유롭게 지내도록 하였다. 모든 사(社)에 참가한 사람에게는 그가 생존했거나 사망하였거나 불문하고 나무쪽에다 이름을 새겨두었다. 15일마다 점찰업보경(占察業報經)에서 말한 바에 의하여 나무쪽을 꺼내어 바퀴에 던져서 선악(善惡)의 보응(報應)을 점쳤다. 점쳐서 나온 대로 선과 악을 두 개의 상자에 나누어 놓고 그 악보(惡報)에 빠진 사람은 회원들이 그를 위하여 대신 참회하고 다시 바퀴에 던져서 선보(善報)를 얻게 한 후 그만둔다. 또 처음에는 선보를 얻었다가 나중에 악보로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다시 1년마다 한 번씩 바퀴에 던져 점을 쳐서 만일 다시 떨어져 버린다면 곧 처음과 같이 대신 참회한다. 이것은 구름처럼 모여든 대중과 함께 해탈을 얻어서 미래의 세계에까지 꺼지지 않는 법의 등불을 점하려 함이니, 이른바, “집 밖을 나서지 않고도 두 가지 이익에 모두 넉넉하다.” 한 것이다. 대사는 곧 수정(水精)한 개를 찾아내어 무량수 불상 앞에 걸어서 밝은 믿음을 표시하고, 그것으로 사(社)의 이름을 지었다. 송(宋)의 선화(宣和) 5년 계묘(癸卯)년 7월에 짓기 시작하여 건염(建炎) 3년 기유(癸酉)년 10월에 준공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3일간 베풀었다. 엄천사(嚴川寺)의 수좌(首座)인 성선(性宣)을 청하여 경문을 강설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동남해안찰부사 기거사인 지제고(東南海按察副使起居舍人知制誥)인 윤언이(尹彦?)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고, 인하여 은 2백냥을 내리시어 이를 칭찬하였다. 이로부터 먼 곳과 가까운 곳에서 마음을 돌려 승려와 속인이 몰려 들어와서 교화가 성대히 실시되었는데 그 업적은 근세 이래로 드문 일이었다. 대사는 사(社)의 사업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대중과 더불어 상의하고 나라에서 명령을 내리시어 일정한 규정을 삼을 것을 청하였다. 그것은 곧 지금부터 덕을 이루어 가지고 사원(社院)에 거주하는 사람 중에서 번갈아 가면서 사주(社主)가 되는데, 기한은 3년 전후로 정하고 서로 교대하여 감히 어기지 못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한 방법이다. 소흥(紹興)7년 정사(丁巳)에 대사는 사실을 기록한 것을 갖추어 가지고 청하여 아뢰기를, “중이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려우며, 도를 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 때를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진억(津億) 등은 다행히 나라가 평화롭고 국경에 일이 없어 큰 도를 넓힐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서 편안히 살면서 깨끗한 공부를 닦았습니다. 옛적에 혜원(慧遠)이 사(社)를 세우고, 6백 년이 지난 뒤에야 성상(省常)이 있었고, 성상이 사(社)를 세운 지 1백40여 년만에 지금 수정사(水精社)가 일어났으니, 시대를 만나기 어려운 것이 이러합니다. 또한 동림(東林)의 모임에는 팽성(彭城)의 유도민(劉道民)이 맹세한 글을 지었고, 서호(西湖)의 모임에는 광평(廣平)의 송백(宋白)이 비명(碑銘)을 지었습니다. 지금 사(社)를 얽어 놓음에 있어 그 성대함이 동림과 서호와 더불어 시대는 다르나 그 내용은 같으니, 유신(儒臣)에게 명하시어 그 전말을 기록하도록 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전하게 하신다면 또 거룩한 조정의 한 가지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께서 그의 요청을 허락하시고, 순금으로 만든 탑(塔) 한자리와 양곡 1천 석을 내리시고, 특별히 친서(親書)로 비문(碑文)을 써서 내리시어 전에 없었던 영광이 되었다. 다시 중사(中使)를 보내시어 불아(佛牙)를 모셔 앉히어 높이 숭상하는 뜻을 나타내시고, 신하 적(適)에게 명하여 “그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신이 불민하나 또 한 사(社)의 객원의 한 사람으로 끼어 있는 지라, 명령을 받고 두려워 무어라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으므로, 우선 그 연월(年月)만을 기록하여 둔다.
지리산암취후유작(智異山庵醉後有作)
석무명(釋無名)
이름과 이익을 구하는 것은 한가함만 못하거니 / 求名求利不如閑
구름과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춘 지 25년이었네 / ?跡煙霞二五閒
일을 좋아하는 어떤 사람이 와서 내게 술을 권하여 / 好事何人來勸酒
가사가 반쯤 젖었으니 푸른 산이 부끄럽다 / 袈裟半濕愧靑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