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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태후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아들 준이 열두 살쯤 되었다고 들었는데, 그 아이가 좀 장성하면 그것도 괜찮을 성 싶습니다.”
“아이고 폐하, 그 말씀 거두어 주소서. 제가 망발을 했나 봅니다.”
흑치 부인이 갑자기 쩔쩔매었다.
“아니오, 흑치 부인. 염려하지 마시오. 이 아이도 언젠가는 시집을 가야 하지 않겠소?”
무 태후가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 때 미시아가 무 태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소녀는 평생 폐하 곁에서 폐하를 모시고 싶사옵니다.”
곁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태평공주가 남모르게 입을 비쭉거렸다.
무 태후가 웃으며 미시아에게 대꾸한다.
“나는 늙어서 곧 죽을 터인데, 그대는 아직 새파란 젊은이이니 내 곁에만 있다가는 혼기를 놓칠까 두렵네.”
‘어마마마가 돌아가시면, 황실 관례에 따라 감업사로 출가시키는 게 마땅하지 않아요?’
태평공주는 이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으나, 감히 발설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 태후가 이미 황제나 마찬가지니, 황제를 모시는 여인은 황제가 죽을 경우 다른 남자와 혼인할 수 없고 절에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었던 태평공주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시면, 그녀를 회의대사님께 맡기는 게 좋겠어요.”
미시아는 몹시 당혹스러웠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백마사의 사주 회의가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두뇌회전이 대단히 빨랐던 회의는, 태평공주의 말을 들으며 은근한 쾌감을 느꼈다.
‘이건, 그녀를 내 종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닌가?’
무 태후는 태평공주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무라지는 않았다.
내친 김에 태평공주는 한 마디 더 뱉었다.
“백마사는 여승들의 도량道場이 아니지만, 미시아의 신상 문제는 회의대사님께 의뢰하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아미타불! 공주마마의 말씀을 해득하지 못하는 소승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소서.”
회의가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합장했다. 태평공주의 발언으로 주변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회의가 다시 말했다.
“공주마마, 소승은 그 말씀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주변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봄바람은 가볍게 살랑거렸으나 미시아의 가슴은 무거웠다. 미시아는 태평공주의 말에 깊은 모멸감을 느꼈으나, 용기를 내어 주변의 공기를 수습했다.
“그 때 가서 소녀가 백마사를 찾아와 대사님의 고결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소녀에게는 큰 영광일 것입니다.”
“오! 공주마마의 말씀은 바로 그런 뜻이었군요.”
회의가 낯을 활짝 펴며 미시아를 향해 말했다.
“이건 자랑이 아닙니다만, 소승이 지금껏 연구한 것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입니다. 혹시라도 고해인생에 관해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언제든 백마사를 찾아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사님. 소녀는 조상 대대로 삼신일체 상제님을 섬기고 있지만, 대사님을 깊이 존경해왔습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잡겠습니다.”
회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감당키 어려운 말씀입니다. 소승이 비록 오랜 세월 불법을 공부했다고 하나 어찌 함부로 남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제 말은, 단지 인생사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 상대 정도는 되어 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고맙습니다. 대사님.”
미시아가 허리를 숙여 그에게 예를 표했다.
“혹시 마음속에 백팔 번뇌가 가득한 날이라도 오면, 여기 계신 흑치 부인과 함께 들르십시오. 흑치부인께서는 예불禮佛을 하러 이곳을 가끔 방문하십니다.”
미시아는 이 때다 싶어 흑치부인을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백마사에 오실 때는 저도 불러 주세요. 폐하께서 허락하시면,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태평공주는 미시아가 자신의 모멸 섞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회의에게 다가가려 하자, 그녀의 의도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미시아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건 무 태후도 마찬가지였다.
미시아는 나이가 어렸으나, 그들의 그런 의문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미시아가 덧붙여 말했다.
“저는 원래 불법의 오묘함에 대해서는 말만 들었지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제 폐하의 사람이 되었으니, 폐하께서 몹시 존경하시는 회의대사님으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미타불! 시주施主님의 마음이 참으로 곱기 이를 데 없습니다.”
결국, 그들의 이야기는 당초 미시아를 회의의 종으로 넘겨준다는 개념에서, 미시아가 회의로부터 불법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의미로 변질되고 말았다.
태평공주는, 겉으로 입을 비쭉거렸으나, 속으로 자신의 계획이 아직 장애물 없이 순탄하게 굴러가는 것 같아 기뻤다. 태평공주는 속으로 뇌까렸다.
‘흥! 네가 제아무리 영리한 백여우라도 내가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시아는 미시아 나름대로 앞으로의 정황을 헤아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흑치부인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독실한 불자인 듯한 이 여인과 절에 동행해야 한다. 비록 저 백여우 태평공주 이영월이 나를 태자전하(고조영)에게서 떼어놓고 또 음란한 요승 회의에게 붙이고자 온갖 그물을 쳐놓았다 하더라도, 나의 보도寶刀는 아직 녹슬지 않았다. 흥! 네가 나를 너무 만만하게 보았지.’
몇 달 전 무 태후와 함께 영주를 방문해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미시아의 현란한 무예를 구경했던 태평공주는 별 이유 없이 미시아가 미웠다. 어떻게 하면 미시아를 골탕 먹일 수 있을까 궁리하며 벼르고 있다가 묘안을 짜낸 것이 바로 그녀를 회의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영악하기 그지없던 태평공주는 그녀가 고조영을 바라보던 눈빛에서 그녀와 고조영 사이가 남다르다는 것을, 영주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남몰래 미시아의 거동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고조영이 현장에 나타나는 순간, 미시아의 낯빛과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포착하고,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아마도 너의 보도寶刀를 믿나본데, 그 보도는 내 그물을 찢지 못하고 오히려 네 자신만을 상해할 것이다.’
일련의 암투가 태평공주와 미시아의 마음 속에서 파동치고 있을 때 두 사람 사이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왔다. 그 때 태평공주와 미시아는 서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는데, 둘 사이로 한 백의여인이 말없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미시아가 흘낏 돌아보니, 어느 샌가 여미아가 자기 곁에 와 서 있는 것이다. 여미아의 얼굴은 평온하고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여미아는 미시아 자신의 이 처연하고도 비장한 가슴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태평무사한 표정이다.
태평공주는 쌍둥이 자매 여미아와 미시아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깊은 의혹을 떨칠 수 없었다.
‘어째서 두 여인은 낯의 외양이 아주 흡사한데, 풍기는 분위기가 이토록 상이한가? 이 둘은 틀림없이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임장청이 심어놓은 고려의 세작들인지도 모른다.’
이런 느낌에 속으로 자신도 몹시 놀라며 태평공주는 새삼 여미아의 얼굴을 남몰래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일면으로 포근하고 따스하며 다른 면으로 엄숙하고 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평온하고 천진난만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이 여인은 혹시 미혼대법迷魂大法을 깊이 터득한 희대의 요녀가 아닐까?’
태평공주는 갑자기 속이 오싹해지며 경각심이 고도로 발동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암암리에 여미아에게 접근해 그녀의 팔목을 움켜쥐고 말았다.
‘아차!’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탓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놓으려는 찰나, 여미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평공주를 돌아보며 웃었다.
“공주마마! 하늘이 너무 청명하고 봄꽃들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요. 이곳은 마치 선경仙境 같군요.”
태평공주는 대답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입을 열어 얼버무렸다.
“흐응, 응, 그래요. 하지만 아가씨의 얼굴이 더 아름다워요.”
“공주마마께서 이토록 제게 친근하게 해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여미아는 태평공주 곁으로 한걸음 다가가 바짝 붙어 섰다.
“흐흠! 공주마마의 향취가 어쩜 이렇게 좋아요?”
여미아는 태평공주의 몸에 뿌려진 향수를 은근히 칭찬한 후 고개를 돌리며 미시아에게 말했다.
“언니, 이리와요. 저랑 같이 손잡고 걸어요.”
“으응? 그, 그래.”
미시아가 얼떨결에 여미아 곁에 붙어 섰다. 여미아가 미시아의 오른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러고 보니, 태평공주와 여미아, 미시아 세 여인이 서로 손을 잡고 걷고 있는 형국이었다.
여미아가 태평공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아씨는···.”
여미아의 뜻을 알아차린 태평공주가 앞 쪽에 있는 이루하를 불렀다.
“이루하 아가씨! 이리 오세요. 우리 같이 손잡고 걸어요.”
“네?”
이루하는 뒤를 돌아보며 세 여인이 나란히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에, 속으로 매우 의아하고 또 한편으로 우습기도 해서 피식 웃으며 걸음을 멈추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태평공주가 그녀의 다른 한 손으로 이루하의 손을 잡았다. 꽃 같이 아름다운, 그러나 신분은 각각 천양지차인 네 여인이 손에 손을 잡고 걷고 있는 모습은, 한편으로 장관이고 한편으로 기이하고 다른 일면으로 매우 다정해보였다.
이런 광경을 슬그머니 쳐다보던 회의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세상에 살다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아, 저 네 여인이 모두···.”
회의는 엉뚱한 생각에 침을 한 차례 꿀꺽 삼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회의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곁에 있는 무 태후에게 말했다.
“폐하, 공주마마와 아가씨들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네 분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 같습니다. 오늘 제가 큰 복을 받나 봅니다. 폐하와 선녀들이 와서 저의 생일을 축하해주시니.”
무 태후가 네 여인을 흘낏 돌아보며 속으로 좀 언짢았으나 겉으로는 웃었다.
“대사님은 정말 인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 같은 추한 늙은이들은 곧 세상을 떠나야 하는 건데.”
무 태후의 말에 비로소 회의는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속으로 땀을 흘렸다.
“폐하,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폐하는 이 모든 꽃들의 왕이십니다. 꽃의 왕. 폐하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십니다.”
무 태후는 쓰디쓴 표정을 지으며 고소했다. 회의는 연달아 실언을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뒤에 있던 젊은 네 여인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종종걸음으로 두 사람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네 여인은 손을 풀고 좌우에 두 사람씩 무 태후 곁으로 다가가 그녀 곁에 바짝 기대며 무 태후의 팔을 붙잡았다.
“어마마마! 저희들은 폐하가 너무나 좋아요. 히히!”
태평공주가 희희낙락거렸다. 소녀들의 재롱에 마음이 풀어진 무 태후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말했다.
“그대들이 있어서 내가 요즘 살 맛 난다.”
“어마마마! 그게 진심이죠?”
“아무렴! 그렇고말고.”
“피이! 그게 사실이라면 한 가지 약속해줘요.”
“뭘?”
“여기 이루하 아가씨와 여미아도 궁성(북궁)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고 미시아 아가씨에게는 언제든 자신이 원할 때는, 오늘처럼 궁 밖에 자유로이 외출할 수 있게 해 주시고요.”
“글쎄, 후자는 내가 이미 어느 정도 허락해 놓은 사안이다만, 전자는 좀 지나친 요구가 아니냐?”
태평공주가 입을 비쭉거리며 반격했다.
“우리 때문에 살 맛 난다면서, 우리를 족쇄에 채워놓으려고 한다면, 누가 그 말씀을 믿겠어요?”
“미시아에게 더욱 자유로운 행보를 주는 건 내가 좀 고려해 보겠다만, 이루하 아가씨와 여미아는 궁 안의 여인들이 아닌데, 어찌 궁 안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겠느냐?”
“제 말이 바로 그 뜻이에요. 두 사람을 궁 안으로 불러들이라는 거예요.”
“무슨 명목으로? 그리고 이 사람들이 그걸 원하겠느냐?”
“원할 때는 궁중에 출입하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아요?”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그런 일은 사사로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이루하 아가씨는 이다조 장군 댁의 삼랑三郞 이기창 도령과의 혼담이 오가는 중인데.”
원래 태평공주의 본의는, 휴일에만 궁 밖에 나갈 수 있는 미시아에게, 상시 자유 외출권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만을 위해 부탁하면, 자신의 의도가 쉬이 드러날 수 있어서 엉뚱하게도 이루하와 여미아의 궁내 자유출입권을 보장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는데, 말을 내뱉고 보니, 이를 요령 있게 수습하기가 지난했다.
태평공주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겨우 말했다.
“그러니까, 작년 장생전 회합 때처럼 궁 안에서 친목모임이나 조촐한 잔치가 열리는 경우 등에, 궁문에서 제지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출입하면 되지 않겠어요? 우리 때문에 살 맛 난다면 그 정도 배려를 하는 것은 기본이 아닌가요?”
무 태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요리조리 엮는 말솜씨는 너를 못 따르겠구나. 좋다! 내가 너희들을 자주 불러서 식사도 같이 하고 서원西苑에서 놀기도 하지.”
“야호!”
태평공주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얘야! 공주마마의 체통 좀 지켜라.”
“어마마마, 고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당장 서원의 적취지積翠池에서 우리 젊은이들끼리 회의대사님의 생신잔치를 여는 게 어때요? 허락하시면 어마마마도 저희 젊은이 축에 끼워드릴게요.”
무 태후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물었다.
“비용은 누가 대고?”
“그건, 저와 어마마마가 양분해서 충당하면 될 것 같은데요?”
“양광(수양제)이 놀기 좋아하다가 망한 것을 너는 모르느냐?”
여전히 무 태후는 웃는 표정이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날이면 날마다 궁녀들을 거느리고 서원을 거닐며 적취지에 배를 띄우자는 말은 아니죠?”
태평공주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좋다. 그 대신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할 사람들의 명단을 네가 작성하되, 내게 최종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 때 곁에서 듣고 있던 회의가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소승을 향한 각별한 관심에 소승은 감격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하오나 소승은 사바세계와의 인연을 끊은 지 오래입니다. 어찌 금산옥수金山玉水에서 유흥을 즐길 수 있사오리까?”
태평공주가 입을 비쭉이다가 대꾸했다.
“오늘은 대사님의 날이니, 장소만 서원과 적취지일 뿐, 대사님이 선사禪寺에서 즐기시는 조촐한 식탁을 저희들도 맛보고 대사님의 선시禪詩 몇 수를 듣는다면, 그것도 저희 같은 가련한 중생들이 부처님의 미로迷路 같은 심오극난極難한 도를 깨달아, 백팔번뇌로부터 해탈하는데 큰 보탬이 될 것이옵니다.”
“아미타불! 소승을 그렇게까지 헤아려 주시니, 그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소승은 비록 심오극난한 도도 터득하지 못했고 선시禪詩도 잘 짓지 못하나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대사님, 고맙습니다.”
태평공주가 명랑하게 말하며 부언했다.
“그럼 제가 오늘 밤 연회에 참석할 사람들의 명단을 부르겠습니다. 어마마마께서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빼주시고, 탈락된 사람 가운데 필요한 분은 넣어주세요.”
태평공주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우선 여기 계신 고조영 장군님과 이해고 장군님, 이루하 아가씨와 여미아, 미시아, 우림군의 사비우 장군, 연헌성 장군, 이기원 장군, 이기창 도령, 무후군의 무유서 장군···.”
태평공주의 이름 나열이 끝나자 무 태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세 사람이 빠진 것 같구나.”
“누구 누구요?”
“너와 나, 그리고 회의대사님.”
“우린 주최자이고 회의대사님은 주인공이시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중요하지. 하지만 지자천려智者千慮에 필유일실必有一失이라. 또 한 분이 꼭 들어와야 할 것 같은데?”
“누구요?”
“어처 극시아.”
“아참, 그래요. 그분은 여미아, 미시아와 친자매간이니 참석하는 게 좋겠어요.”
“아직도 한 사람 더 남았다.”
“···?”
무 태후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말했다.
“그냥 해본 소리다. 자, 그럼 어서 가서 준비해야지.”
“어마마마는!”
태평공주가 샐쭉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을 펴고 무 태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어마마마, 어서 가요.”
일행이 사문寺門을 나서는 동안, 회의가 문 밖으로 멀리까지 전송했다.
무 태후가 주변을 둘러보고 가까이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태평공주에게 속삭였다.
“이것아!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오늘 밤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미시아는 나의 심복이다. 알겠느냐?”
태평공주가 입을 비쭉였다.
“피이! 엄마는 엄마생각만 해요? 이 딸 생각은 안 해줘요?”
“아직은 시기상조니, 오늘 밤은 그냥 넘겨라. 나의 계획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 네 뜻대로 하는 것도 늦지 않을 거다.”
태평공주가 어머니 무 태후의 얼굴을 빤히 쏘아보다가 대답했다.
“엄마나 허튼 수작 하지 마세요. 나도 엄마의 의중을 환하게 알고 있어요.”
“이게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내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거냐?”
“흥! 두고 보면 알겠죠?”
궁성에 들어온 무 태후는 짤막한 사신을 쓴 후, 비자 하나를 불러 은밀히 명했다.
“이 사신을 황상 폐하께 전해드리되, 반드시 이 말은 해야 한다. 오늘 저녁 인시寅時 경에 서원의 망월루望月樓로 오시되, 반드시 혼자 몸으로, 미복을 갈아입고 참석하시라고. 알겠느냐?”
실권은 없었으나 당시의 황제는 예종睿宗 이단李旦이었다.
그는 무 태후의 친 아들로서 당년 스물여섯 살이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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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8. 12. 한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