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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0:40-42
이번 한 주간 지율 스님의 이야기가 세상을 떠들썩 하게 했습니다.
경남 양산에 위치한 천성산을 관통해 건설되는 고속철도 공사의 중단을 위해 100 일을 단식했기 때문입니다. 터널 공사 때문에 천성산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천연 기념물인 도룡룡이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율스님이 공사 중단을 요구하면서 2001 년부터 반대 운동을 하면서 단식에 들어간지 100일 만에 정부가 손을 들어 버렸습니다.
방송은 지율스님 살리기를 부추겼고 불교계는 각 사찰마다 “ 지율스님 미안해요 ” 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3 개월간의 환경 영향 평가를 수락하고 이 후에 공사를 재개할지 백지화할지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여론은 떠들어 댑니다.
그런데 저는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공사 현장에 투입된 건설인력이 400 여명이랍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실업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지난 2년 7 개월의 공사 기간에도 지율 스님의 두 번에 걸친 단식과 소송으로 1년 3 개월의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하루 1 억 3 천 만원씩의 손해를 보았으니 그 금액이 얼마일까요 ?
이제 3 개월을 또 중단해야 하니 130억의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 공사가 완전 백지화 될 경우 2 조원의 국가제정 손실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저는 스님을 이해하고 싶고 환경이라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다루고 싶습니다. 하지만 도룡뇽의 서식처 보존을 위해서 국가적인 막대한 예산 낭비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를 먼저 묻고 싶습니다.
지금도 서민들이 어렵다고 합니다. 세금은 오르고 있습니다. 경기는 침체되어 회복의 기미가 없습니다.
환경 운동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짐승을 위한 환경운동만은 안됩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 운동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지율 스님의 소속이 천성산의 내원사 소속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 속내가 보여집니다.
결국 자신의 절간을 보호한다는 것이 아닐런지요
불교의 원래의 자리는 환경운동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인간 갱생 운동입니다.
욕심을 비운 원래의 자신을 발견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말하는 8 정도의 삶을 실천하여 극락정토를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삶의 가치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얻어지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 불교의 자리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자리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는 인간 구원입니다. 깨우침이 아니고 거듭남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기독교의 본래의자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마태 복음 10장의 결론 부분입니다. 10장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를 파송하시며 그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제자들이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를 비유하시며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왜냐면 성도가 추구하는 가치와 한 집안 식구라도 믿지 않는다면 그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믿음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었습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까지 보았던 말씀입니다.
이제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한 말씀을 더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갈 때 받는 대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42 절을 보시면 소자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켜 말씀하고 계시는 표현입니다. 제자들을 왜 예수님께서 작은 자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도라는 자리입니다.
성도라는 자리는 세상 사람으로부터 보잘것 없는 사람으로 비추어 지는 자리입니다.
세상 사람에게 대단해 보이고 화려해 보이는 자리가 아닌 정말 배우지 못하고 가지지 못하고 미련한 자들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냉수 한 그릇이라는 겁니다.
세상이 부귀영화와 영광으로 우리를 대접해 주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날 동안 큰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작은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작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다 복음의 증인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외에는 복음의 도구로 절대 쓰시지 않습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 외치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도 바울 사도 일행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한 때 여종하나가 귀신 들렸는데 귀신이 이렇게 외칩니다. “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전한다. ”
귀신이 전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이 귀신을 내어 쫒습니다.
이유는 이 복음이 우리에게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복받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만 맡겨져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도 우리에만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절대 일하지 않고 우리에게만 이 귀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작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작은 자가 된 이유는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커야 합니다. 화려해야 합니다. 잘되야 합니다. 살더라도 부자가 되어야 하고 차도 큰 차를 타야 알아주고 많이 배워야 알아줍니다.
우리도 큰 것을 추구한다면 세상이나 교회나 구분이 없어집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듣는 가장 무서운 소리는 “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다”는 겁니다.
믿는 사람도 똑같이 큰 것을 좋아하고 부자되는 것을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사실 가장 무서운 소리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되었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세상과 갈라선겁니다.
세상과 우리가 어떻게 갈라섰는가 ?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은 세상을 더 이상 육체로 보지 않습니다.보이는 크고 화려한 것을 쫒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것을 사모하며 생명과 영원한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가치 있어 하는 것을 더 이상 가치 있어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가 커지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작아지면 하나님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욕심이란 것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을 오도 합니다.
기독교를 통해서 크고자하는 , 높아지고자 하는 헛된 보상을 요구합니다.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자식 잘되고 이것이 목적이 되어 신앙 생활하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의 보상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냉수 한 그릇만이라도 받아 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복입니다. 더 이상의 대접은 없습니다.
복음이 언제 증거 되는지를 여러분 아십니까?
바울 사도가 매를 맞을 때 였습니다. 감옥에 갖히고 추위에 떨때 였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순교의 현장에서 피를 흘릴 때 였습니다.
세상적인 부와 권력이 있는 큰 사람으로 있을 때 복음이 확장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때는 위기를 당하였습니다.
복음은 작은자가 될 때 증거되는 겁니다.
세상이 가장 값있게 추구하는 것이 있다면 돈이고 건강이고 세상적인 힘입니다.
그런데 믿는자는 이런 것이 끊어지고 파괴 되었음에도 아직 살아있을 이유와 보람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기들 같으면 접시물에 코 박고 죽었을 텐데 감사하다며 웃고 사는 겁니다.
자신들은 벌고 벌어도 늘 부족해서 재테크 하는데 이 사람들은 없으면서도 십일조하면서 남을 돕고 사는 것이예요
이런 삶을 살면 세상 사람이 저사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 적이 보상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희 고향에는 큰 저수지가 있습니다. 어려서 여름에 더울 때면 어른들의 눈을 피해 몰래 멱을 감는 겁니다. 참 재미 있는데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래서 그 저수지에서 3년에 한번씩은 사람이 죽습니다.
저보다 두 살 아래였던 교회 다니는 동생이 친구들하고 멱을 감다가 그만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6명이 멱을 감았는데 하필 교회 다니는 아이가 죽은 겁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요
그 어머니가 아이의 퉁퉁 불어오른 시신을 안고 통곡을 하는데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겁니다.
예수 믿는데 왜 애가 죽냐는 거예요
하지만 이 어머니께서는 전혀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예전보다 더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겁니다 .
사람들이 더 쑥덕거립니다. 그 중에는 우리 어머니도 계셨습니다.
“미쳤지 예수 믿은 자식까지 죽인 여편네가 아죽 푹 빠졌구만”
그렇게 쑥덕거리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예수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기독교는 사람에게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이기에 한 세상 살아보니까 죽음 말고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죽음 앞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큰 게 없습니다. 오직 큰 것은 하나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자꾸 커질려 하고 있습니다. 작은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큰 자가 되고 섬김 받을려하고 온세상에 공포 할려고 합니다.
세상보다 더 커질려고 합니다. 거대한 이합집산이 되어가고 재벌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 이것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교황청이 있습니다. 현재 교황은 바티칸 궁전에서 삽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차는 벤츠에서 제작한 한대 밖에 없는 서서 탈 수 있는 리무진입니다. 미국의 대통령도 승용차를 탈 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그러나 교황의 승용차는 지붕이 올라가서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차에 오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왕관은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는데 요한 바오로 2세가 78년 취임할 당시 시가로 무려 65 억원이나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옷은 중세의 왕들이 입던 복장입니다.
교황이 공식 문서에 서명할 때 직함은 ‘ 그리스도의 종의 종’ 입니다.
이 문서를 받는 당신은 그리스도의 종이고 교황인 나는 당신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인간의 종이란 의미입니다.
그 왕관에 , 그 왕복에 , 그 왕궁에 , 그 전용차를 타면서 관연 그리스도의 종의 종으로서 만인을 위한 참된 섬김과 봉사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에게는 존경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입니다.저는 묻고 싶습니다. “ 교황님은 갈릴리 빈민촌에서 빈민들과 더불어 사시며 그들을 섬기셨던 예수님을 정말 믿고 계십니까? ”
우리라고 예외일까요 ? 화려함을 자랑하는 예배당, 잘먹고 잘살려는 보신주의 신앙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밟고 세상에서 출세하려는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기쁨이 무엇인가 ?
하나님과 화목하고 거룩한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목표하는데
하나님이 우리의 생애에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고후 4: 7-12을 다 함께 읽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껍데기가 화려하면 보배는 들어나지 않습니다.
보배가 가장 잘 들어나기 위해서는 깨어질 때입니다.
우리의 보배는 질그릇이 아니고 질그릇 안에 보배로 갖고 있는 영생을 보이기 위해서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을 세상은 모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깨어지는 일 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형통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과 원수가 되고 대접이라고 찬물 한사발입니다. 그럼에도 간혹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허락한 이유는 맡은 자로서 충성하는 가를 보기 위해서 이런 기회가 주어집니다.
기회가 큰 만큼 책망도 크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부귀영화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치 않는다면 심판은 더 크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극히 소수일 뿐 나머지는 다 어려운 길들로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이일에 불만이 있다면 절간으로 가야 한다.
하나님과 십자가가 증거되기 위해서는 포장지를 뜯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범사가 잘되고 예수를 믿으면 가정이 잘되고 예수를 믿으면 자녀가 잘되고 예수를 믿으면 건강해지고 예수를 믿으면 귀신이 십리 밖으로 물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거저 예수 믿으면 안되는 일 없습니다. 삼일 금식하면 안되는 일 없습니다. 이러면 좋겠지요 ‘
그럼 거기에는 예수가 증거되지 않습니다.
내가 강해 지면 생명의 증거와 영혼에 속한 표가 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길은 고달픈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매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때가 언제 입니까? 먹고 살만 할 때가 아닙니다.
전심으로 찾을 때는 졸딱 망했을 때이다.
이제 거울 한번 보세요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무리 분칠해도 돌아가신 친정 어머니의 얼굴이 나와요 ? 이제 할아버지의 얼굴이 나오고 할머니의 얼굴이 나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
예수 믿는다는 것이 뭔지 모르면 안됩니다. .
살만 하니까 예수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지시하는 삶을 거부하는 것은 그것은 바보입니다.
우리 솔직히 성도의 자랑이 뭔지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영광받으시고 도우시는 기적들을 경험한 적 있으십니까 ?
없단 말이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 듣기 싫지요 그래도 들어야 합니다. 저는 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발을 못 빼는 못난 짓을 빨리 거두어야 합니다
성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일입니다.
평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얼마나 쉽게 고백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법칙보다 세상의 법칙을 더 신빙합니다.
신앙이 엉뚱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큰자가 아니라 소자입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받을 것은 냉수 한 그릇입니다. 숭늉도 아니고 따뜻한 한잔의 커피도 아닙니다.
냉수 한그릇입니다. 냉수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원한 왕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이 무엇인지 우리의 자리가 얼마나 고귀한 자리인지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