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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021829 행한대로 보응하리라 230517
1.지난(수요예배) 시간에는 계021217 버가모교회에 보내는 편지
1)어떤 상황속에서도 인내하면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때 가장 훌륭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서머나교회는 핍박과 궁핍 속에서도 끝가지 믿음을 지킴으로 칭찬을 들었다
2)성도는 세상의 부(富)가 아니라 영적인 부가 참된 부라는 것을 인식하게 될 때 흔들리지 않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주님은 환란과 궁핍가운데 있는 서머나 교회에게 영적인 부자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의 재화(財貿)로 부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 재물로 부요해지기 위해 어떠한 불의도 자행하기를 서슴지 않고 있는 분위기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고 서머나 교회 교인들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빌3 : 8)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며 그것을 소유하는 것을 참된 부요라고 여기며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다.
참된 부요는 하늘에 쌓아둔 재화로 판단되는 것이다(마 6:19. 20).
3)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고난없이 영광없다.!!
-주님은 서머나교회가 받을 고난에 대해 그 고난은 몇 사람, 그리고 십일동안이라고 말씀하심으로 고난의 때가 길지 않을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에게 당할수 없는 고난, 그리고 긴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는다
4)믿음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어야 한다
-죽도록 충성해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셨다.
새명의 면류관은 영생의 면류관인데 죽도록 충성해야 얻는다는 것은 진실한 믿음의 사람이야 여생을 얻으며 그 믿음은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이라는 말씀이다.
-죽음을 무릅쓴 믿음!=>죽음이 두려워 도망치지 않는 믿음!
2.오늘은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편지의 말씀입니다.
본 단락은 본서의 형식적 수신자인 아시아 주 내에 있는 일곱 교회 중 네번째로 언급되고 있는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두아디라는 옛 무시아 지역의 수도였던 버가모가 천연적인 방어 요새를 갖추고 있지 못해 내륙으로부터 오는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비대가 항상 주둔해 있던 작은 도시였다.
그리고 이처럼 수도 방위 수비대가 항상 이 도시에 주둔했을 만큼 두아디라는 이 지역 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지역적으로는 작지만 크게 번창하여 염색 산업으로 유명한 공업 도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도시의 염색 공업 발달은 동업조합(同業組合)을 발달시켰고, 발달된 조합은 조합원의 친목이라는 명목 아래에서 우상 숭배와 음행을 성행하게 만들었다.
결국 두아디라도 앞의 거대한 세 도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와 다를 바 없이 우상 숭배와 행음이라는 죄악의 도시였으며.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는 그러한 죄악의 문화 속에 있을 수밖에 얼었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두아디라교회는 한편으로는 모범적인 신앙의 열심과 자세를 보였으나(19절)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이권을 계속 쥐기 위해 우상을 섬기고 행음하는(20절) 이율 배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결과 주님은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였고(21절). 그래서 주님은 끝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죄에 합당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22, 23절).
그러나 주님은 올바른 신앙을 지킨 남은 자들에게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시겠다는 축복을 약속하신다(24-29절),
이러한 두아디라교회는 신앙적으로는 성실한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타협주의적인 자세를 취한 교회의 전형이며, 교리(敎理)는 지키되 행위(行爲)는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2 : 1-7)와 반대되는 유형의 교회라 할 수 있다.
강해
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두아디라 교회. -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동남쪽으로 6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업도시였다.
옛 이름은 펠로피아(Pelopia) 또는 유힙피아(Euhippia)였으며, 오늘날에는 아킷사르(Akhissar)로 불리우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정복당한 후 그리스문명을 받아들였으나 B.C.190년경에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빌립보에서 개종한 자주 장사 루디아(행 16:14)가 이곳 출신이었듯이 이 도시는 염색공업으로 번성하였다.
이 도시도 이방신을 섬기는 데는 예외가 아니어서 여러 신들을 섬겼는데 그중 태양신 아폴로를 가장 열심히 섬겼다.
그리고 또 하나 특이할만한 것은 이교 신전에서 종교 제의와 관련된 음행이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20절의 이세벨이 이러한 신전의 여 사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하나 분명치 않다.
한편 이 도시에 언제 어떻게 복음이 전파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서머나나 버가모의 경우처럼 에베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을 전도한 바울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루디아의 전도도 한 몫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
-'눈이 불꽃 같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과 냉엄한 공의를 나타내 준다(렘 17 : 10).
사실 모든 인간은 불꽃 같이 밝은 그리스도의 눈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으며 (마 10 : 26)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지 않아 죄악의 더러움으로 얼룩진 자들은 모두 소멸될 수 밖에 없다(신 4 : 24) .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발은 몸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그리스도의 능력이 견고하여 장차 그 원수를 짓밟을 때에(마 22 :44) 영광된 승리를 성취할 것임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
이전에 십자가를 메고 가실 때의 주님의 발은 상처 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발에 못이 박혀 피를 흘렸으나 장차 심판의 주로 오실 때의 주님의 발은 그와 정반대로 세상을 딛고 원수를 심판하실 영광과 권능의 발인 것이다(19 : 15).
주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이처럼 모든 것을 궤뚫어 아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두아디라의 교인들이 이세벨을 받아들여 그가 가르치는 음행을 은밀히 저질렀기 때문이며(20절), 또한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시는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 죄악을 이기는 자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고 심판하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약속(26, 27절)을 보증해 주기 위해서이다.
한편 '하나님의 아들'은 본서에서는 본문에만 나타나는 칭호인데. 이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해 주는 칭호이다.
그러므로 이 칭호를 통해 저자는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인간의 모든 것을 궤뚫어 통찰하시며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속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버가모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칭찬은 버가모 교회가 지닌 성숙함에 대한 것이었다. 본절에는 다섯 가지 칭찬 덕목이 나타난다.
▶사업.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르가'는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연이어 언급되는 '사랑', '믿음', '섬김', '인내' 등의 제반 덕목을 포괄한다.
▶사랑. -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덕목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삶의 규범이다(마22:37-4-; 고전12:31-13:3).
▶믿음. -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되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데 '믿음'보다 '사랑'의 덕목이 먼저 언급된 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믿음보다 '사랑'을 강조한 듯하다.
그래서 말씀과 믿음의 바탕이 없는 사람들이 '이세벨'같은 이단을 수용한 듯하다.
▶섬김과 인내. - 이는 '사랑'의 외적 표현으로 칭찬받을 만한 훌륭한 덕목이다(롬15 :25; 고전16:15).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 보다 많도다. - 두아디라의 성도들이 그처럼 온전한 기독교의 덕목들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더욱 빛났던 것은 처음 믿을 때 보다 시간이 갈수록 더 온전한 기독인의 자세와 행위를 보였다는 점이다.
이는 처음에는 잘하다가 시간이 갈수록 신앙의 실천에 있어 점점 퇴보한 에베소 교회의 상황과 좋은 대조가 된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첫 사랑을 잃어 버렸으나(4절) 두아디라의 형제 들은 더욱 큰 믿음과 더욱 따뜻한 사랑과 더욱 깊은 소망을 키워나갔다.
다시 말해 두아디라의 성도들은 나날이 진보하고 성장해나가 많은 열매들을 맺은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 '이세벨'은 구약에 출현하는 악녀(惡女) 중 가장 대표적인 여자이다(왕상 16 : 31 : 21 : 25 :왕하 9: 7).
그녀는 시돈 왕의 딸로 북이스라엘의 제 7대 왕인 아합 왕(B. C.874-853)의 왕비가 된 여인으로서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끌어들여 우상숭배와 종교 제의와 관련된 음행을 이스라엘에 퍼뜨렸으며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그녀는 인간이 이 정도까지도 악해질 수 있다는 하나의 표본이었다.
여기서 이세벨은 두아디라에 있던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에서 여사제 역할을 하던 어떤 여인(들)이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와 자칭 선지자라 하며 교인들을 미혹시킨 것으로 보이며 그것을 저자는 상징적으로 '이세벨'이라 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 음행과 우상 제물을 먹는 것은 발람의 교훈 및 니골라당의 교훈과 상통한다(14, 15절).
그리고 본문에서의 음행은 문자 그대로 성적 범죄 행위이다.
아무튼 우상 숭배와 음행은 예루살렘 공회가 공식적으로 금한 것인데(행 15'20, 29) 당시 이단들은 아마도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왜곡하여 이러한 종교적 ․ 윤리적 방종을 부추긴 것같다.
특히 공업이 발달했던 두아디라는 상공업 도시라는 자유분방한 특성 때문에 거리낌없이 우상 숭배와 음행을 자행하였고 두아디라 교인들 중 일부가 그 풍조 속에서 미혹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두아디라에는 상공업과 관련된 각종 조합(組合)이 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합원들은 자주 모여 친목을 도모하였는데 식탁에는 으레껏 우상 신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 올랐으며 식사 이후에는 부정한 성행위가 동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여 동참하지 아니할 경우에는 조합원으로서의 권리에 제약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게 되므로 교인들 중에도 이에 응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대조가 되는데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대신 거짓선지자들을 끝까지 물리친 반면(2-4절).
두아디라 교회는 형제 사랑을 점점 키워 나간 대신 거짓 선지자를 물리치지 못했던 것이다.
인간은 완전치 못해서 교리에 치중하면 사랑의 실천을 등한시하게 되고 반대로 사랑에 치중하면 교리적인 미숙성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을 두 교회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온전한 성도는 양자를 균형 있고 조화롭게 유지해 가기 마련이다. 믿음과 사랑의 행위는 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양자를 온전히 행하도록 능력을 주시며 또 이를 기대 하신다(요일 3 : 10) .
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기회를 주었으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도카'로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동작의 연속을 나타내 주는 부정과거 형이고 '아니하는도다'는 '우 델레이'로 지금 현재의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내 주는 현재형이다.
따라서 본절은 이와 같은 시제의 차이를 통해 회개할 기회를 과거부터 주었었는데 지금도 회개치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사 범죄한 자에게도 이와 같이 기다림의 관용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용과 오래 참으심에는 정해진 기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가 지나기 전에 주께 우리 죄를 자백하여 용서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 위에 하나님의 사랑과 관용을 거부한 죄 까지 짊어지고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형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
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 이는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비문들에 보면 음행으로 인해 신의 벌을 받아 질병에 걸린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에 비추어 본다면 여기서의 '침상'은 사망을 상징해주는 잠자리가 아닌 몸져 눕는 병상을 의미한다(출 21 : 18).
즉 본문은 소아시아의 비문들에도 나와 있듯이 두아디라 교회가 우상 숭배 행위와 음행 따위의 죄악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아니하면 주께서 질병의 재앙을 내리시사 병상에 눕게 만들 것이라는 말씀이다.
물론 사람이 겪는 육체의 질병이 모두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는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질병을 내리시사 자기 백성을 징계하거나 악인들을 징벌하신 사례는 성경에 자주 언급되어 있다(출 9 : 8-12 ; 민 12: 9, 10 ; 삼하 24:15).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질병은 난잡한 성행위로 인해 성병에 걸리는 것과 더 나아가서는 그 질병으로 죽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 문맥상으로는 이세벨의 우상 숭배에 동참하며 간음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나 보다 넓게 해석하면 이세벨과 같은 죄를 범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일관된 분이시기에 두아디라의 음행 자들을 벌하신 그 방법으로 모든 음행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큰 환난가운데 던져졌다가 결국에는 영원히 죽임을 당하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악행을 한 자들이 현세에서 반드시 응징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몹쓸 질병으로 잠정적 심판을 받을 것이며 종국에는 주님의 최후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 혹자는 이것을 이세벨과 음행한 결과로 태어난 육체적 자녀로 이해하기도 하나, 영적으로 이세벨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이며 마귀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다(요일 3 :8, 10).
이처럼 이세벨의 교훈을 좇는 자도 이세벨의 자녀인 것이다.
이 표현은 요한이 즐겨 쓰는 표현으로 비록 교회 안에 있을지라도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님을 암시해 주고 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
'모든 교회'는 우주적 교회(Catholic church)를 지칭하며, '알지라'는 직역하면 '알게 되리라'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시사 다 알고 계신다(시 7 : 9).
그 앎을 통해 주께서는 끝까지 돌이키지 아니한 채 우상을 숭배하고 음행하는 자들을 주님의 최후 심판 날에 심판하실 것이며, 그것을 보고 또한 우주적 교회는 주님의 전지성과 통찰력 그리고 심판의 엄정성 등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 - 여기서 '뜻'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프로이'는 본래 인체의 기관 중 하나인 신장(雷臟)을 가리키는 낱말이었으나, 고대 헬라인들은 신장을 인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이 단어를 인간의 가장 깊은 '생각', 또는 '마음'을 지칭하는 낱말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간 내면의 중심 사상을 가리킨다. 그리고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도 본래는 심장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사람의 뜻(고전 4 : 5), 감정(롬9:2), 생각(롬 10:16)을 지칭하게 되었으며, 여기서도 그와 같이 인간의 '생각'과 '감정', '욕망' 따위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뜻과 마음이란 인간이 볼 수 없는 감추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그 눈이 불꽃 같은 모습, 즉 인간의 내면까지도 궤뚫어 통찰하시는 모습이다.
즉 하나님은 전지하시사 인간의 속마음과 은밀히 행하는 모든 행위까지도 낱낱이 알고 계시니 그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것이 없는 것이다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 이 말은 선악간에 정당하게 대우하신다는 말씀으로 하나님은 각 사람의 신앙과 행위에 따라 보응하시는 분이시다=>심는대로 거둔다.
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 이 남은 자들은 19절의 요소들을 다 소유한 것외에도 이세벨의 유혹을 물리쳐 그녀의 교훈을 받지 않은 순결한 자들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들은 아마도 많은 숫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아디라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20절) 많은 수의 교인들이 그 교훈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항상 어떠한 위기 상황하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굽히지 않는 자들을 남겨 두시는데 소위 이를 '남은 자'(remnant)라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진행시켜 나가시는 중에 당신의 언약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그 뿌리가 근절되지 않도록 섭리하고 계시는데 그 섭리에 의하여 보존되는 자들이 곧 남은 자'들이다 (창 22 : 15-18 ; 스 9:8 ; 롬 9 : 27).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 이 말은 풍자적인 표현이다. 당시 영지주의자들(Gnostics)은 '영지'(靈知). '곧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이 아니라 '사탄의 깊은 것'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교회에 만연하던 발람의 교훈이나 니골라당의 교훈, 그리고 이세벨의 교훈(6, 14, 20절) 등은 모두 영지주의의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탄의 깊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며, 저자는 그러한 이단의 가르침을 비꼬기 위해 그 거짓 가르침을 '소위 사탄의 깊은 것' , 즉 사탄의 '심오한 사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란 이단 사상에 물들지 않은 신실한 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 주님은 본문을 통해서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은 신실하기 때문에 이미 지키고 있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및 이세벨의 교훈을 좇지 않는 것 이외의 짐은 더 이상 지우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다른 짐'은 음행과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계말고는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겠다. 다른 것은 다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 '너희에게 있는 것'은 19절의 내용과 이세벨의 교훈을 지키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이 주의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주 안에서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굳게 잡고 지키는 동시에 이세벨의 교훈인 음행과 우상 숭배의 유혹을 이기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노라고 약속하고 계신다(26절).
두아디라의 남은 자들이 어떠한 수준에 있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인가를 잘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가장 적절한 신앙의 수준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다.
한편 주님은 두아디라 교인들에게 가장 적절한 수준을 제시해 주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저마다에게 그 받은 달란트대로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신령 한 눈으로 깨달아 알고 그에 합당한 삶을 부끄럼 없이 살아서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자들처럼 주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자가 모두 되어야 하겠다(엡4:1, 7).
=>지금 잡은 것을 끝가지 잡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 '이기는 자'라는 말은 일곱 교회에게 주어진 약속과 관련해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사항이다.
다음으로 여기서 '내 일'은 주님의 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소망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19절).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형제들은 처음에는 이 일을 잘하였으나 그만 중도에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여 믿음을 지키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 중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이 있었으니(24절) 그 남은 자들은 주님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처음 믿음과 행위를 지키는 한 주님의 상을 받을 것이었다.
아무튼 본문이 가르치는 요점은 주님의 일을 지키되 '끝까지' 지키라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우(愚)를 범했고(4절)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러나 그 양자의 태도는 모두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자는 끝까지 주 안에서의 믿음과 소망과 사람을 간직하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하여야 한다.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국을 치리 할 권세를 주셨다(마 28 :18).
주님은 이제 그 권세를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 곧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의 도리를 저버리지 않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 한 가지는 이처럼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이 권세를 주겠다고 하신 말의 정확한 의미는 그 권세를 양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백성이 주님이 행사하시는 권세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롬 8:17).
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 본문은 시 2 : 9을 인용한 문구이다.
여기서 '철장으로 질그릇을 깬다'는 것은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 통치권과 심판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끝까지 신앙의 정절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키고 행한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참여하여(26절), 악을 행하며 그 악한 가운데서 자신을 핍박하던 자들을 마치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듯이 쳐서 굴복시키게 될 것을 주님은 약속해 주시고 계신다.
한 마디로 주님은 끝날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자기 백성도 그 심판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미 그러한 약속을 능히 지키실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으므로(18절)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계 19 : 14)
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 앞 절에 이어 주님의 일을 끝까지 지키는 자에게 주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두 번째 것이다. '새벽 별'은 겔 22 : 16에 의하면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축복은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그와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21 : 3).
한편 주님을 별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광명한 새벽 별로 묘사한 것은 그의 영원한 통치와 찬란한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깨어 있는 자만이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듣고 아니 듣고는 그 교회(성도 개인)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상과 벌)도 그 자신에게 있다.
=>듣는 자의 결단을 촉구한 말씀이다.
정리 교훈(4)
첫째, 올바른 신앙이란 교리도 바르고, 행위도 바른 신앙이어야 한다
교리는 잘돼있는데, 행위가 선하지 않거나, 교리는 잘못돼 있는데 행위만 선해서는 안된다
성경적 바른 교리, 성경적 선한 행위가 필요하다
둘째, 하나님의 관용과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는 있다
-기회를 놓치면 심판만이 남는다.
->하나님은 두아디라의이세벨에게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나 회개하지 않음으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셋째, 하나님은 행한대로보응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으로, 행한대로심판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속일수없으며, 결국 행한 대로 엄중하게 심판을 받게 된다.
넷째, 이기는 자에게는 주님과 함께 만국을 다스릴 영광을 주신다
-영적 싸움은 피하거나 양보, 타협해서는 안되고 싸워 이겨야 한다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만국 다스릴 권세를 주시고, 새벽별을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