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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구분하여 크게 북부의 노를란드(Norrland), 수도 스톡홀름(Stockholm)과 그 북쪽 주변을 에워싼 중부의 스베아란드(Svealand), 그리고 고틀란드(Gottland)와 욀란드( and) 등의 발트 해 섬들을 포함한 남부의 예타란드(G aland) 등 3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또한 스웨덴은 행정 구역인 24개의 랜(l )과, 지방 구역인 25개의 란스캅(landskap)으로 나뉘어 있다. 랜은 중앙 정부의 지역 행정 단위로, 1600년대부터 존속되어 오고 있다. 랜에는 중앙 행정청의 지시 사항을 집행하는 주 행정 위원회가 있으며, 최고 책임자는 주지사이다. 란스캅은 중세기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지방 구역 단위로서 옛부터 정치적·역사적·지리적·문화적인 측면에서 구분되어 왔다. 이 란스캅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행정 구역인 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위치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스웨덴은 동서의 최장 거리가 499km, 남북의 최장 거리는 1574km에 이르는 가늘고 긴 모양의 나라로서, 국토의 7분의 1이 북극권에 속한다. 국토의 서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스칸디나비아 산맥이 노르웨이와의 국경 구실을 하고 있으며, 북동부는 핀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스웨덴 국토는 대부분이 바다와 접해 있어, 동부는 발트 해, 서남부는 스커게라크(Skagerrak)와 카테카트(Kattegat)의 양해협을 그리고 남부는 외레순드( esund)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와 면해 있다. 3. 면적 스웨덴의 면적은 44만 9964km2로서 한반도 크기의 두 배이며 영국 , 캘리포니아의 면적과 비슷하다. 스웨덴은 북구 제국 가운데 가장 크며 유럽에서 다섯 번째로 큰 국가이다. 스웨덴은 삼림이 50%, 경작지가 10%, 호수와 하천이 9%, 기타 31%로 구성되어 있으며, 호수의 숫자는 9만 6000여 개에 달한다. 4. 지세 지세는 노르웨이와 국경을 이루는 산악 지대로부터 동쪽으로 향해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비교적 높은 산은 북부의 국경 부근에 있다. 높은 산으로는 케브네카이세(Kebnekaise:2123m), 사렉쇼코(2089m), 슐리텔마(Sulitjelma:1908m) 등이 있다. 스칸디나비아 산맥으로부터 여러 강이 보트니아(Bothnia) 만과 발트 해로 흐르고 있다. 그 가운데서 긴 강으로는 토네(570km), 위메(450km), 률레(450km) 강 등이 있다. 노르웨이에서 시작하는 긴 강으로는 클라라 강이 있다. 이러한 긴 강이나 수많은 호수는 수력 발전에 이용될 뿐만 아니라, 목재의 수송로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중부 이북은 삼림이 풍부하나 경작지는 적으며, 남부는 비옥한 평야에 대규모로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발트 해에는 고틀란드와 욀란드 등 두 개의 큰 섬이 있다. 5. 기후 스웨덴은 알래스카나 남부 그린란드와 동일한 위도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들 지역보다는 훨씬 따뜻하다. 이는 멕시코 만 난류가 노르웨이 해안을 흐르고 있어,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역에 걸쳐 다소 훈훈한 서풍이 불고 있기 때문이다. 북부에 위치한 노를란드 지방은 전 지역이 1년 중 6개월 동안 눈으로 덮여 있으며, 특히 이 북부 지역은 6월과 7월의 수주일 동안 낮이 24시간 계속된다. 북위 68.3도에 위치한 아비스코에는 12월 초부터 다음해 1월 10일께까지 해가 전혀 뜨지 않고, 5월 말부터 53일 동안은 태양이 지지 않는 백야를 이룬다. 이에 반해서 남부 지방은 대체로 겨울이 짧고 날씨가 따뜻하다. 스웨덴은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관계로 남쪽의 스코네(Sk e) 지방은 연간 40일 정도 눈이 쌓여 있는데 비해 북쪽의 라플란드(Lapland) 지방에는 연간 200일이나 눈이 쌓여 있다. 또한 스웨덴 최남단에 위치한 말뫼(Malm 항구는 1개월 동안 바다가 어는 데 비해 핀란드와 접해 있는 북쪽의 하파란다 앞바다는 6개월 동안 얼어 있다. 북부, 중부, 남부의 평균 기온을 보면, 각각 2월에 12.8℃, 4.1℃, 0.6℃를 나타내고 있으며, 7월에는 각각 14.7℃, 16.2℃, 16.6℃를 기록하고 있다. 연간 강우량은 500~750mm로, 남동부의 발트 해 연안과 북부의 노를란드 내륙 지방은 강우량이 300~400mm로 적은 편이나, 서남부의 노르웨이 접경 고산 지대는 약 2000mm를 기록하고 있다. 6. 인구 스웨덴의 인구는 860만여 명, 인구 밀도는 1km2당 21명이다. 인구 밀도를 지역적으로 보면 노를란드가 5명, 스베아란드가 33.4명, 예타란드가 40.3명에 달한다. 스웨덴은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으나, 1980년대에 증가 추세를 보였다. 또한 평균 수명이 가장 긴 나라로서 남자의 평균 수명은 75세, 여자는 80세로 낮은 출산율과 사망률로 인하여 60세 이상의 노인들이 전체 인구의 20%를 점유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층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낮기 때문에 스웨덴은 노동력 부족 상태에 처하게 되어 외국 이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에는 약 70만 명의 외국인이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다. 70만 명 가운데서 약 50%는 핀란드인이며 나머지는 노르웨이, 덴마크, 동구 및 기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II. 역사 1. 선사 시대 스웨덴의 역사의 여명은 스웨덴을 덮고 있던 빙하가 녹아 내리기 시작하여 남방으로부터 민족이 이동해 온 때부터 시작된다. B.C. 3000년께 유랑 어민과 수렵민들이 스웨덴에 정착하여 곡식을 가꾸고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처음 그들은 돌과 흙으로 만든 연장을 사용하였으며, 그후 점차로 청동과 구리, 철로 만든 연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바위에 새겨진 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B.C. 1800~1500년께 사용했던 동기로 미루어 보아 이 민족은 대략 지중해 방면으로부터 이동해 왔다고 추측된다. 그후 800~1000년대에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멀리는 흑해와 지중해까지 석권하여 북구인의 위력을 유럽 전역에 광범위하게 확장하였다. 이는 스웨덴 역사상의 한 분기점으로 기록되고 있기도 하다. 바이킹 시대로부터 현재까지의 스웨덴의 역사는 매우 복잡하고 독특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스웨덴 역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중세부터의 역사를 크게 5개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2. 중세 중세 이전부터 스베아란드 지방의 멜라랜(M aren) 호수 주변에 살고 있던 스베아족은 촌락을 형성하고 집단 생할을 하였으며, 점차로 다른 부족을 흡수·지배하게 되었으니 그들의 해상 활동은 바이킹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 때 바이킹은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해로를 지배하면서 유럽과 동방 사이에서 무역을 행하였다. 그 당시 덴마크 영토였던 스웨덴 남부 지방에서 살고 있던 바이킹족은 서부 유럽과 영국의 도서 지방 침입에도 참여하였다. 바이킹족을 해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나 그들의 해상 약탈은 부분적인 현상이었으며, 실제는 당시 극도로 한랭한 기후 때문에 물자의 교류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서 남쪽으로 민족 이동을 시도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역사 학자도 있다. 볼가 강이나 드네프르 강 유역에 스웨덴계 바이킹의 대규모적인 식민지가 건설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노브고로트와 키예프는 역사적으로 유명하며, 콘스탄티노플까지 모피를 가지고 아라비아인들과 교역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가장 세력이 컸던 종족은 중부 지방의 스베아족과 남부 지방의 예타족이었으나, 600년께 스베아족이 예타족을 정복하여 부족 국가를 이루고 수도를 감믈라 웁살라로 정했다. 830년에는 안스가르라고 불리는 프랑스 수도사가 최초로 기독교 선교사로 스웨덴에 도착하였으며, 영국과 독일 북부로부터 온 카톨릭 선교사들은 많은 원주민을 개종시켜 성당을 세우고 교구를 설치하였다. 바이킹의 활동은 11세기에 종료되었으며 이 시기에 전국적인 통일의 기운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여러 지방에서는 각기 별개의 지방 법률을 보유하였으며, 왕족들은 권력 투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치가이며 새 왕조를 연 비르예르 얄(Birger Jarl)은 13세기 중엽에 법률을 통일하는 기초 작업을 끝내고 스톡홀름을 건설하여 수도로 정했다. 전국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법률은 1350년에야 채택되었다. 한자 동맹(Hansaneatic League) 시대에 들어가서는 스웨덴과 유럽 북부 상업 도시 사이에 무역이 증대되었고, 한자 동맹의 상인들은 고틀란드의 중심 도시인 비스비(Visby)와 수도 스톡홀름에 정착해 있었다. 이 시기에 한자 상인의 경제적·정치적 지배가 강화되어 스웨덴은 잠시나마 독일인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스톡홀름 원로원의 반수 이상을 독일인이 차지한 사실은 그 당시의 정세를 역력히 설명해 주고 있다. 3. 독립 대국 스칸디나비아 3국은 14세기 초반에 통합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319년부터 한 왕의 통치를 받았으며, 이어서 1397년에는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3국이 한 사람의 왕에게 지배를 받게 됨을 의미하는 역사적·국제적인 칼마르 동맹(Karlmarunionen)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한자 동맹의 지배권에 대한 방파제로서 결성된 것이었으나, 왕위권이 덴마크에만 부여되었던 관계로 스웨덴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었으며 점차 덴마크인들을 외국의 압제자로 간주하게 되었다. 1430년대에는 스웨덴의 농민 지도자 엥엘브렉트(Engelbrekt)가 덴마크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칼마르 동맹과 이 기구의 외교 정책에도 반항하였다. 그후 덴마크와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는 소리가 고조되었으며, 1521년에는 스웨덴의 젊은 귀족인 구스타브 에릭손 바사(Gustav Eriksson Vasa)가 또다시 반란을 일키고 성공함으로써, 스웨덴은 완전히 독립된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다. 15세기에는 귀족, 성직자, 상공인, 농민 등 4개 계급의 대표자들이 모인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의회가 구성되었다. 1523년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브 바사는 근대 주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는 1527년에 기독교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카톨릭 교회와 절연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를 받아들였다. 1560년에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1611년에 왕위에 오른 구스타브 바사의 손자인 구스타브 아돌프 2세(Gustav II Adolf)는 북방의 사자로 불렸는데, 그는 리보니아를 정복해 스웨덴 동부를 발트 해 유역까지 확장하고 중앙의 행정력을 개선, 강화하였다. 1630년에는 독일로 진격하여 30년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는 청교도의 한 선교사로서 브라이트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 연방을 패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1632년 뤼첸(L zen)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후 스웨덴은 1648년 웨스트파리아 조약에 의하여 독일 북부의 광대한 영토를 얻게 되어 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어서 칼 구스타브 10세(Karl X Gustav)는 덴마크를 패배시켜 현재의 남부 스웨덴 지방을 덴마크로부터 획득하였다. 이 때가 스웨덴이 군사적으로 가장 용맹을 떨쳤던 시기이다. 한편, 핀란드는 1100년께부터 해안 지대를 중심으로 장기간 스웨덴의 세력하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이 대국이 된 스웨덴도 1700~1721년의 북방 대전쟁에서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젊은 칼 12세(Karl XII)는 용감히 싸워 러시아군을 대파하고 덴마크와 폴란드를 항복시켰지만, 볼타바(Poltava) 전투에서 러시아에 크게 패한 후, 터키로 도주하여 1718년에 사망하였다. 결국 핀란드를 제외한 발트 해 남부와 서부에 있는 많은 영토, 그리고 북부 독일의 영토를 상실하여 스웨덴은 유럽의 강대국 대열에서 급속히 탈락하였으며 이로써 스웨덴의 대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4. 번영과 융성 1718~1772년까지는 스웨덴 의회의 역할이 상당히 두드러진 기간이었다. 이른바 하타르(Hattarna) 당과 뫼소르(M sor) 당으로 불리는 두 정당이 서로 정권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그들의 투쟁은 의회를 구성한 네 개의 계급간에 전개되었다. 왕의 절대 권한이 상당히 약화되었기에 정당들은 이 시대를 자유주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농업의 근대화와 함께 철광 생산이 증대되고, 외국 무역이 급속히 번창하였으며, 신문이 처음 발간되고 과학도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1772년에 즉위한 구스타브 3세(Gustav III)는 의회의 권한을 파기하고 새로운 전제 왕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주로 음악, 미술, 문학 등을 진흥시키는 데 노력하여, 이 시기에 스웨덴은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꽃을 피웠다. 스웨덴 한림원과 왕립 오페라 극장, 그 밖의 문화관들이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구스타브 3세가 1792년에 암살당한 후, 그의 아들인 구스타브 4세는 1805년에 러시아와 한편이 되어 나폴레옹에 선전 포고를 했으나, 그후에 러시아는 나폴레옹과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당시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를 잃게 되었다(1809년). 국민들은 왕의 퇴위를 강요하게 되어 구스타브 4세는 폐위되었다. 이 때 왕과 의회의 세력 균형을 꾀하고자 권력의 분립을 기초로 한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나폴레옹 휘하의 명장 베나도트를 스웨덴 왕위에 오르도록 초청하였다. 베나도트는 즉위하여 칼 요한 14세(Karl XIV Johan)가 되었으며, 그가 바로 스웨덴 현재 왕가의 시조이다. 5. 근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공격했을 때, 국민들은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핀란드 영토를 러시아로부터 되찾을 것을 기대했으나, 나폴레옹의 대국주의와 프랑스 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던 칼 요한 14세는 국민의 기대와는 반대로 러시아를 공격하는 모험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노르웨이를 양도받는 조건으로 1813년에 반나폴레옹 군에 가담했다. 스웨덴 군대는 그 당시 덴마크 군대와 동맹을 맺은 나폴레옹 군대와 최후의 전투를 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은 스웨덴 역사상의 마지막 전쟁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1814년 스웨덴은 덴마크로부터 노르웨이를 양도받았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이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나, 결국 1815년에 스웨덴과의 합병에 마지못해 동의하게 되어 1905년까지 합병이 지속되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나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가운데 발전이 계속되는 기간이었다. 농업을 발전시켜 농민들은 점차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지위를 강화해 나갔으며, 위생 시설과 식품 공급의 개선으로 사망률이 낮아짐과 동시에 급속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농민 계층이 늘어났으며, 그들의 생활은 점차로 비참해졌다. 그리하여 1860년대에서 1914년 사이에 스웨덴 인구 가운데서 약 100만 명이 신천지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이와 함께 사회 전반에 걸쳐 수많은 개혁이 단행되었다. 낡은 철강 공업은 점차로 근대화되었고, 제재업이 급속히 발달하였다. 1842년부터는 무상 초등 교육 제도를 확립하였고, 상업 은행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1850년대에는 국유 철도의 건설이 시작되고, 지방 행정 조직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1865년에는 4개 신분의 신분제 의회가 해체되고 처음으로 양원제 의회가 채택되었다. 1870년대에 이르러 가난한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으며, 국민의 대다수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은 처음으로 산업화의 물결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제재소와 펄프 공장 그리고 철강 회사들이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됨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물론 행정부와 일반 관리들은 새로운 산업 시대의 요구에 주저할 뿐만 아니라 이에 저항하였으며 새 시대에 따른 정치 개혁을 외면하였다. 이에 대하여 하층 계급에서 이른바 민중 운동이 일어났다. 공업화에 따라 노동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나 그 당시 이들은 투표권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은 강력한 조합과 정당을 결성하여 보통 선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1918년에 그 뜻을 이루게 되어 일반·보통 선거권이 인정되었다. 노르웨이와는 1814년 연합 왕국을 형성하였으나 이 동맹은 평화적으로 해소되었으며, 스웨덴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모든 전쟁으로부터 중립을 지키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비동맹 정책을 채택하였다. 스칸디나비아 3국은 1차 세계 대전중 협력하여 모두 중립을 유지하였다. 스웨덴의 비동맹 정책은 이 기간중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1차 세계 대전 후 스웨덴은 점차로 근대적인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1920년에는 사회 민주 노동당(Socialdemokratiska arbetarpartiet) 내각이 발족된다. 그러나 정권의 빈번한 교체로 인한 다수당 체제의 문제와 의사 진행 과정에서의 미숙함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1930년대는 스웨덴이 복지 국가로 발돋움한 시기였다. 세계 경제가 침체되었던 이 무렵, 1932년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국민 다수의 새로운 지지를 얻은 사회 민주당이 농민당(Bondef bundet)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침체된 국내 경제를 타개하기 위한 공익 사업을 계획하고, 농민 소득을 보조하며, 어린이를 위한 양육비를 책정하는 등 제반 개혁을 단행하여 사회 보장 제도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사회 민주당은 단독으로 혹은 다른 정당과 연합하여 1932~1976년까지 44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2차 세계 대전중에는 사회 민주당의 페르 알빈 한손(Per Albin Hansson)이 4개 정당의 연립 정부를 이끌면서 대외적으로 독일과 연합군에게 적당한 회유 정책을 쓰면서 평화를 유지하였다. 6. 전후 시대 2차 세계 대전은 종료되었으나 국제 정세는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1944년 9월 소련에 항복한 핀란드는 1947년에 대소 상호 우호 원조 조약을 체결, 강력한 소련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대전중 덴마크로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를 포함하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등 4개국은 새로운 북구 블록을 형성하였다. 북구 제국은 2차 세계 대전의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소국 단결의 필요성을 통감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전쟁 전이나 전후를 통해서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 집권한 국가였다. 이들 정당의 정책은 어디까지나 온건한 중도주의적인 것이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승리를 구가하면서 정치적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선 경제적 민주주의의 단계로 진입했다. 2차 세계 대전중 소련과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점령당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전후의 불안한 국제 정세와 소련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1949년 4월에 발족한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했으나 스웨덴은 계속 중립을 고수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중립 정책을 100년 이상이나 유지하고 있다. 타게 에르란데르(Tage Erlander)가 수상으로 재임한 1946~1969년까지의 기간중에 스웨덴에서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많은 사회 개혁이 이루어졌다. 연금 제도를 보완한 것을 비롯하여 사회 보장의 충실한 실시와 제반 복지 향상을 위한 정책이 추가로 수립되었다. 1971년 구성된 단원제 의회에서도 팔메(Palme) 수상이 이끄는 사회 민주당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3년 9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사회 민주당과 비사회계 블록간의 의회의 세력 분포는 175 대 175로 균등하게 나타났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덕망 있는 학자이던 구스타브 아돌프 6세(Gustav VI Adolf)가 서거하였고 그의 손자인 칼 구스타브 16세(Karl XVI Gustav)가 왕위를 물려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0년부터 장기 집권해 오던 사회 민주당은 1976~1982년까지 잠시 실권했다가 1982~1991년까지 재집권하였으며, 이 사이에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던 팔메 수상이 비명에 가고 그후 계속된 경제 사정의 악화와 국내외 정세의 변화로 1991년 9월 총선에서 다시 비사회계 정당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의 총선 결과 사민당은 또다시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1998년의 선거에서도 재집권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III. 정치 1. 개관 스웨덴에서의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는 1800년대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현재는 의원 내각제에 입각한 입헌 군주국으로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가 국가 원수이다. 그러나 국왕은 실질적인 정부의 수반으로서보다는 국가의 상징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수상이 이끄는 정부에 실질적인 권한이 있다. 지금의 수상은 사민당의 당수인 잉바르 칼손이다. 사민당은 100여 년 전에 창당하여 오랜 기간 동안 집권하면서 스웨덴을 최첨단 복지 국가의 반열에 올려 놓았으나 1990년대 초의 국제 경기 불황으로 잠시 실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민당은 1994년의 총선에서 국민들의 재신임으로 재집권하게 되었다. 스웨덴의 근대 국가의 헌법은 1809년 칼 13세가 즉위하면서 처음으로 채택되기 시작하였다. 헌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1809년의 정부 조직의 형태에 관한 법으로 관례상 `1809년 헌법'이라고 부른다. 이 헌법은 6월 6일에 공포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6월 6일을 국경일로 삼고 있다. 전 114조문으로 된 이 정부 조직법은 정부 권력과 국민 대표 기구와의 권한에 대한 원칙을 명시하고 행정과 사법 분야에 대한 기본 규정을 정의하고 있다. 그 동안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는데 현재 통용중인 정부 조직법은 1974년 개정안이다. 그 다음에 제정된 것이 의회의 업무를 규정한 1810년의 의회 조직법과 왕위 계승법, 그리고 1812년의 출판 자유법이다. 스웨덴의 헌법은 이 네 가지 기본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1809년에 제정된 헌법은 1973년과 1974년에 의회의 결정으로 개정되었는데, 이것은 그간에 축소된 왕권을 헌법 개정의 절차를 거쳐 재확인한 것이다. 구스타브 왕조의 전제가 무너지면서 현행 헌법의 골자를 마련한 스웨덴은 1900년대에 들어 정치 사회의 급격한 발전으로 헌법 조항 가운데서 일부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적인 헌법의 필요성이 긴박해졌고, 1954년부터 헌법 개정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1969년 의회에서 1971년부터 단원제를 실시한다는 확정을 보았고, 동시에 왕의 권한 축소에 관한 변경도 의결되었다. 공식적으로 국왕은 스웨덴의 국가 원수이나 국왕의 정치적 권한은 대폭 축소되었다. 즉, 실질적인 통치권은 정부에 있고 정부는 의회의 신임을 통해서만 비로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간단하게 말하자면 스웨덴은 입헌 군주국 형태의 의회 정치를 하는 나라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국왕의 지위는 1974년의 헌법 개정 때부터 대폭 축소되었다. 왕권 축소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내각 구성에 관한 왕의 영향력을 모두 박탈한 조항이다. 종전까지는 내각이 위기에 처해 사퇴했을 경우, 어느 정당의 지도자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임무를 맡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이 왕에게 있었다. 이와 같은 국왕의 대권마저 1975년 1월 1일을 기하여 의회의 의장에게 이양되었다. 새 헌법의 효력이 발생하기 전에는 모든 정부의 안건이 왕이 의장으로 있는 각의에서 공식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실상 왕이 주재하는 각의는 폐지되었다. 그간에 있었던 각의 주재권은 역시 왕에게 부여된 형식상의 권한에 불과했지만 이러한 형식마저도 이제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실질적인 정치 권한은 없다 하여도 국왕으로서의 명성과 인기 덕분에 일반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도 남아 있다. 2. 정치 형태 스웨덴에서의 통치권은 정부가 행사한다. 정부는 흔히 내각을 의미하며 내각 정부는 본래 3년마다 실시되는 총선에서 승리하는 다수당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4년마다 한 번 총선을 치르자는 의결이 통과됨으로써 다음번 총선은 1998년에 치러진다. 다수당의 당수는 자동적으로 내각의 수반, 곧 수상이 되며 내각 관료들도 다수당의 의원 가운데서 임명된다. 스웨덴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대체로 집권 정당이 의회에서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위 강력한 정권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사민당은 1976년 총선에서의 패배로 6년 동안 정권을 잡지 못하다가 1982년 총선에서 재집권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6년 탁월한 지도 능력을 갖춘 팔메 수상이 거리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비명에 간 후 당의 지도력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경제 사정마저 악화되어 1991년 9월의 총선 결과 비사회계 정당에 정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하지만 비사회계 정부가 들어서도 경제 회복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994년의 총선에서 국민들은 결국 사민당을 다시 선택하게 되었다. 정부의 권한과 조직 정부의 주요 업무는 새 법령 제안, 예산안 편성, 그리고 시행령을 제정·공포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정부는 외무부 장관을 주축으로 하여 스웨덴의 국제 관계 업무를 총관장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진다. 정부는 또한 중앙 행정청의 기관장과 군부의 고위 요직과 같은 고급 국가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도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정부는 다른 국가 기관으로부터 문제를 제기받았을 때 정부의 입장을 분명히 하여 문제 해결에 힘쓴다. 정부의 최고 책임자는 수상이다. 그를 보좌하는 십수 명의 장관들과 각료들이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이 각 부처의 장이 된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스웨덴 정부의 각 부처는 그 규모가 아주 작아 보통 한 부처의 직원이 10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가 행정의 대부분은 중앙 행정청에서 담당하는데 이 기관들은 각 부처에 대해 상당히 독립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정부의 부처에서는 정책의 방향과 윤곽만을 지시할 뿐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방안은 각 행정청에서 창의적으로 고안, 실시하고 있다. 스웨덴의 정부 기구에는 법무부, 국방부, 사회부, 체신부, 재무부, 내무부, 교육부, 농업부, 환경부, 노동부, 주택부, 공업부 등의 13개 부서가 있다. 각 부서는 대체로 비슷한 편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 부에는 여러 국이 있고, 국에는 국장이 있다. 장관을 보좌하는 우리 나라의 차관에 해당하는 직책도 있으며 차관 역시 장관과 같이 경력에 따라 임명되며, 정권이 교체되면 자동적으로 물러난다. 차관은 해당 부서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인 측면을 주로 담당한다. 의사 결정 공식적인 정부의 의사 결정은 매주 내각 청사에서 개최되는 내각 회의에서 결정되는데, 불과 반 시간 이내에 수백 건이 처리된다. 수상이 주재하는 이 회의는 일체 토론이 없는 형식상의 회의로 종전의 국왕 주재로 열리던 내각 회의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결정은 이른바 일반 준비 회의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회의 역시 수상 주재하에 전 각료가 모여 안건을 토의하는 비공식적인 회의로 일주일에 한두 번 열린다. 여기에서는 주로 의회에 제출할 법률안이나 시행령 등을 검토하고 의회에서 나온 질의에 대한 답변 자료를 토의한다. 입법 절차 개혁에 대한 발의는 의회가 제안을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시작되거나 정부가 직접 발의권을 행사함으로써 시작된다. 일단 발의가 시작되면 안건을 구제적으로 심의하도록 정부는 심의 위원회로 불리는 일종의 위원회나 위원단을 구성한다. 이 위원회는 보통 야당을 포함한 정치인과 비정치적인 전문 요원으로 구성된다. 이 전문 위원회 또는 위원단은 수년에 걸친 연구 조사와 심의 끝에 현안 문제에 대한 대책 즉 새로운 법률안을 제시한다. 제안된 안건은 새 개혁과 관계된 관청이나 기관으로 이첩되어 해당 기관들의 의견을 듣게 되는데, 이 참조 의견서의 회답을 토대로 하여 정부는 최종적인 법률안을 작성한 후 의회의 의결에 회부한다. 헌법상으로는 의회가 모든 입법권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 역시 법률안 발의권을 통하여 또는 집권당이 의회 내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제도상의 이점 때문에 입법 과정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중앙 행정청 정부와 의회가 결정한 정책이나 시행령 등은 주로 80여 개의 중앙 행정청에 의해 집행되는데, 행정청은 정부로부터 비교적 독립된 위치에 있으며 스스로의 책임하에 해당 분야의 제도를 개선할 수 있다. 각 행정청에는 총책임자인 청장과 간부 직원 및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비전문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있다. 비전문인은 해당 행정청의 관할 업무와 관련이 있는 사회 단체나 기구에 종사하는 사람으로 정부가 임명한다. 이것은 물론 관의 독주와 행정의 일방 통행을 지양하고 되도록이면 정책 적용 대상자의 의사와 이해 관계를 충분히 반영하여 보다 더 민주적인 행정을 운영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3. 의회 스웨덴 의회의 기원은 민중 봉기 지도자 엥엘브렉트가 1435년에 정신적 지도자, 세속적 권세가, 도시 상공인 대표자들을 소집한 데서 비롯되어, 1600년대에는 귀족·승려·상공인·농민의 4계급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로 그 토대가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66년에 대의 제도의 일대 개혁이 일어나 1원과 2원으로 구성되는 양원제가 실시되었고, 1971년부터는 의원 수 350명으로 구성된 단원제가 채택되었다. 정례적인 의회 선거는 1994년까지는 3년마다 한 번씩 9월 셋째주 일요일에 실시되었으나, 1994년의 법률안 개정으로 4년마다 실시하게 되었다. 투표 참가율은 매우 높아서 1994년 투표 때에도 거의 90%에 육박하였다. 유권자의 자격은 법적 무능력자를 제외하고 만 18세 이상인 전 스웨덴 국민으로 정하고 있다. 또한 단원제가 실시되고부터 새 선거제를 도입하여 총선거가 실시될 때 의회 의원, 주의회 의원, 지방 의회 의원 등 3개 차원의 의원을 동시에 선출한다. 총선거에서 전국 유권자 수의 4% 이하를 얻은 정당은 의회의 의석 배분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하는 제한 규정이 있는데, 이 규정의 목적은 의회 내에 군소 정당이 난립함으로써 나약한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예방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한 정당이 전국적으로는 4%의 지지를 획득하지는 못하였지만 어느 한 선거구에서 12%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면, 이 정당은 고정 의석을 배분받을 자격을 얻게 된다. 총선 결과가 발표되고 나서 2주일 후인 10월 첫주부터 새로 구성된 의회의 첫 회기가 시작된다. 의회의 권한으로는 법률 제정권뿐만 아니라 조세권, 국가 예산에 대한 회계 감사권, 정부와 중앙 행정청에 대한 국정 감사권도 갖게 된다. 국가 행정은 사정 옴부즈만(Ombudsman) 기구를 통해 의회의 통제를 받는다. 의회는 4명의 사정 옴부즈만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가 공무원과 지방 공무원의 직무를 감찰하게 한다. 일찍이 1809년부터 스웨덴이 최초로 실시한 이 제도는 오늘날 여러 선진국에서도 널리 선택되어 실시되고 있다. 4. 정당 현황 스웨덴의 민주주의는 다당 제도에 기초하고 있다. 스웨덴에 근대적 의미의 정당이 출현한 것은 산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현존하는 정당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 노동당으로 1889년에 창당되었다. 스웨덴의 정당들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흔히 사회주의계와 비사회주의계로 구분된다. 의회 의원 내 정당 가운데서 사민당과 공산당이 사회주의계 블록을 형성하는 반면, 중앙당과 국민당은 중도계로, 보수당은 우익계로 비사회주의 블록을 형성하고 있다. 참고로 1994년 총선의 각 정당별 득표율은 사민당 45.3%, 보수당 22.4%, 중앙당 7.7%, 국민당 7.2%, 공산당 6.2%, 녹색당 5.0%, 기독교 민주당 4.1%의 순으로 나타났다. 5. 지방 자치 스웨덴 국민은 3개 차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그 첫번째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사 결정 기관인 의회요, 두 번째가 각 주의 주의회를 의결 기관으로 하는 주자치구 의회이며, 세 번째가 지방 차원에서의 지방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초 자치 의회이다. 지방 자치는 스웨덴 민주주의 정치 체계의 핵심적 요소로서 행정 업무뿐 아니라 정치적인 결정권까지 중앙으로부터 지방으로 이양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결정권자와 주민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주민과 결정 책임자의 접촉을 용이하게 하여 결정된 내용과 지방민의 여론을 되도록이면 일치시켜 보려는 것이다. 지방 자치는 또한 지역 주민들을 민주 시민으로 육성하는 훌륭한 방편이 된다. 사람들은 지방 사업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며 따라서 책임감과 참여 의식을 갖게 된다. 또한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훈련을 쌓는 과정에서 자연히 사회 활동과 친근해져 차츰 국가 차원에서 정치적 자유를 떠맡을 소양을 갖추게 된다. 6. 외교 스웨덴의 대외 정책 스웨덴 대외 정책의 기본 원칙은 평화시에는 어떠한 군사 동맹에도 가담하지 않고, 전쟁시에는 중립을 지키는 데 있다. 따라서 2차 세계 대전 후 냉전 기간 중 NATO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운데 어느 편과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즉 스웨덴은 양대 세력간의 완충 지역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스웨덴은 스스로 중립국임을 선포하고 국토가 침해당하거나 교전장이 되지 않도록 자체 방위력을 갖추었다. 중립주의의 구비 요건 스웨덴이 중립국으로 남아 있으려면 모든 종류의 정치적·군사적 동맹에서 이탈해야 한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양대 군사 동맹뿐만 아니라 EU(유럽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91년 비사회계 연립 정부가 들어선 이후 EU에 가입하려는 노력이 일기 시작하였고, 결국 1994년 11월 13일의 국민 투표 결과 총투표율 82.4% 가운데 찬성 52.3%, 반대 46.8%로 스웨덴의 EU 가입이 가결됨으로써 1995년 1월 1일부로 스웨덴은 EU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중립 정책은 국제 사회에서 그 공신력을 잃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전쟁 발발시 스웨덴은 필경 전쟁 당사자 중 어느 편이 될 것이다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행동을 보여서도 안 된다. 동시에 스웨덴 국가 자체가 중립 정책을 의미하는 모든 조건을 스스로 갖춰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중립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가지도록 이 나라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국방력을 갖추고 있다. 강력한 국방력 없이는 어떤 침략자와도 싸워 버티겠다는 결의는 무의미한 것이다. 국방은 모든 남성으로 구성되는 국민 개병제에 기초하며 단지 침략에 대한 방위 목적에 있다. 적극적 중립 정책 스웨덴의 중립 정책은 그들의 여론이나 견해에 있어서까지 중립을 유지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제반 국제 문제에 관하여 자기들의 입장을 천명할 권리와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에 대해 무관심을 표시하는 것이 곧 중립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적극적인 중립 정책은 스웨덴의 자주성을 공고히 하며 중립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고히 만든다. 그들의 몇 가지 대외 정책의 기조를 살펴보면 첫째, 냉전 기간 동안에는 긴장 완화와 군비 축소였으며 둘째,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여 공평한 국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민족 자결의 원칙, 셋째가 경제적·사회적 정의 실현, 넷째가 인권 존중이다. 7. 우리 나라와의 관계 스웨덴과 우리 나라의 국교가 수립된 것은 1959년 3월의 일이며, 그간 두 나라 사이의 교류는 여러 방면에서 점차 증진되어 왔다. 1994년에는 국왕인 칼 구스타브 16세가 방한하여 산업 시설들을 돌아 보기도 하였으며, 판문점의 중립국 감독 위원회에는 스웨덴 장성들이 활동하고 있다. IV. 경제 1. 역사적 배경 스웨덴은 그들이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800~1000년부터 국제 무역에 크게 의존해 왔다. 이는 척박한 토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화롭게 사는 것이 불가능했던 스웨덴인들이 물자와 식량 확보를 위해 일찌감치 바다로 나서게 되면서부터 스웨덴의 산업적 전통이 수립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전통 아래 스웨덴은 현재 자유 무역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외 무역 정책으로 말미암아 현재 스웨덴이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면서 세계적 산업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외국 시장의 개방으로 스웨덴의 산업은 더욱더 전문화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덧붙여 스웨덴의 경제를 흔히 혼합 경제라고 말하는데 이는 스웨덴이 개인 소유와 자유 기업을 원칙으로 하되 국가가 정책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시에 소유권의 일부를 국가가 가지고 있는 체제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최근의 산업 경향 스웨덴은 산업 생산물의 약 45%를 수출하고 있으며 자동차, 트럭, 기계, 전기 및 통신 장비 등의 엔지니어링 제품이 총수출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제조 산업은 자본 집약 분야인 의약, 자동차, 통신 산업 등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산업 자동화와 경영 합리화로 육체 노동자의 필요성이 감소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본래 스웨덴 산업 부흥의 기점이 되었던 광업, 철강업, 제재, 펄프업의 장래는 매우 어두울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일부 기계 공작 분야에도 어려운 시기가 오고 있으며, 대신 고도의 기술과 대자본을 필요로 하는 화학 공업은 전망이 밝은 산업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러한 스웨덴의 산업계 동향을 토대로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진출한 스웨덴의 기업들에 대해 알아보겠다. 3. 주요 산업 분야와 그 기업들 이미 언급한 대로 스웨덴의 통신 산업은 매우 발달되어 있으며 이러한 통신 산업 분야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에릭손(ERICSSON)사이고 이미 우리 나라에도 진출해 있다. 스웨덴은 자동차 및 항공기 제조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볼보(VOLVO)와 사브스카니아(SAAB-SCANIA)는 뛰어난 제조 기술과 안정성으로 이미 우리 나라를 비롯한 극동 지역에서 두드러진 판매 실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볼보사는 최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환경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스웨덴 기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밖에도 석유 화학, 전자, 건설 및 광산 분야에 필요한 다양한 공업 장비의 제조·서비스 업체인 아트라스 코프코(ATLAS COPCO), 자동차 안전 장치를 개발·생산하는 업체인 엘렉트로룩스 아우토리브(ELECTROLUX AUTOLIV), 간선 도로 및 도심의 교통 분야에 적용되는 제품 생산 업체인 아베베 트란스포타순(ABB TRANSPORTATION), 각종 원재료의 생산 및 공급 업체인 산드빅(SANDVIK), 북유럽 최대의 제약 업체인 아스트라(ASTRA) 세계 최대의 트럭 장착용 관절식 크레인 제조 업체인 히아브(HIAB), 터널 및 암반 보강 회사이며 관련 장비를 생산하고 있는 스타빌라투르(STABILATOR), 액상 식품의 원액 처리 공정에서부터 포장, 유통까지의 전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는 테트라 팍(TETRA PAK), 조선 산업과 해양 산업 분야의 기술 정보 시스템을 제공하는 회사인 코세스(KCS) 등이 이미 우리 나라 시장에 진출해 있는 스웨덴 굴지의 기업들이다. 4. 경제 수준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꾸준한 성장을 보여 왔으나, 그후에는 성장에 따른 임금 상승과 석유 파동 등 국내외적 여건의 변화로 성장이 차츰 둔화되었다. 특히 광공업, 농수산업 분야가 GDP(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던 비율이 점진적으로 감소하였다. 상업 분야(도매, 소매, 호텔, 레스토랑)는 약간의 감소 추세를 보인 반면에, 다른 개인 기업들이 국내 총생산에서 점유하는 비율은 늘어났다. 괄목할 만한 경향은 GDP에서 차지하는 지방 정부의 역할이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1983년에는 이러한 추세가 반전되어 공업 분야가 급성장을 보여 제조업과 기업 활동의 GDP 점유율이 증가하였다. 공공 분야에 있어서는 특히 중앙 정부의 GDP에 대한 기여도가 줄어들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스웨덴 경제 정책의 목표는 완전 고용, 신속한 경제 성장, 개인 소득의 보다 균등한 분배를 달성하며 지역간 경제 균형과 합리적인 가격 안정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기본 정책 목표에 대해서는 제정당이 거의 의견의 일치를 보았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의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 목표에는 별로 변화가 없었다. 최근 등장한 중요한 경제 정책의 목표는 환경 보호, 직업 안정, 직업에 대한 만족도, 노사간의 공동 결정권, 개발 도상 국가에 대한 원조액 인상 등이다. 스웨덴의 금융 시장 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일반 국민의 예금을 활용하여 단기 신용을 대여해 주는 은행 제도가 있고, 또 하나는 공중이나 개인의 보험, 저축 또는 증권 발행을 통해 차용한 목돈을 활용해서 장기 대출하는 자본 시장 제도가 있다. 스웨덴에는 중앙 은행 이외에 세 종류의 은행이 있는데 이들은 상업 은행, 저축 은행, 협동 은행으로 각각 총예금액의 62%, 31%, 7%를 차지하고 있다. 은행과 우체국의 상호 봉사 협정이 체결되어 있어 손님들은 3800개의 각종 은행에서 뿐만 아니라 우체국에서도 웬만한 서비스는 다 받을 수 있다. 5. 대외 무역 스웨덴 기업체들의 해외 투자는 상당히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여러 기업체들이 이미 19세기 말께 해외에 현지 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의 해외 직접 투자는 크게 증가하였다. 중앙 은행에서 허가한 해외 직접 투자액은 1968년 6억 7200만 Skr(1996년 기준으로 1Skr은 우리 나라 돈으로 약 130원 정도이다)에서 1978년에는 30억 500만 Skr로 늘어났다. 1990년에는 590억 Skr에 달했는데 같은 해 해외 스웨덴 지사에서 근무하는 스웨덴 국민은 50만 명이나 되었다. 여러 개발 도상 국가들은 자국 내 통화 보유량을 고려하여 때로는 외국 제품을 수입하는 대신에 현지 생산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스웨덴이 개발 도상국에 공장을 설치하게 된 주요 동기가 되었다. 대개의 경우 저임금으로 외국에서 생산하는 것이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해외 진출을 선호한다. 이러한 이유로 방직 공업의 상당 부분이 해외 여러 나라로 옮겨졌다. 예를 들어 스웨덴 노동자들의 고임금과 비싼 세금을 피하기 위하여 포르투갈, 우리 나라, 대만 등에 가서 공장을 세우고 값싼 인력을 이용함으로써 많은 이윤을 얻고 있다. 스웨덴 기업체들의 우리 나라 진출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해외 생산과 고용을 증대하고 있는 대다수 회사들이 스웨덴 국내에서도 역시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이를 비율로 따져 보면 1970~1974년에 국내 산업체의 고용 증대는 연평균 0.1%로 상승한 반면에 해외 지사에서는 8%로 성장하였다. 이 사실은 기업의 해외 진출이 스웨덴 국내의 고용 문제에 아무런 손해를 입히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해외 생산을 통하여 현지 시장에 침투함으로써 모계 회사의 수출을 증대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만일 기업체들의 해외 진출로 인해 국내 실업이 생길 경우 정부는 산업 분포 정책에 따라 일자리가 없는 지역에 가서 공장을 설치하는 회사에 대해 보조금을 지원함으로써 취업의 기회는 만들어 준다. 1974년부터는 스웨덴 회사들은 최소 5년 기간의 외국채를 얻어 해외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1978년만 해도 스웨덴 해외 투자의 56%를 외국채에 의존하였고, 11%는 해외 취득 이윤으로 충당했다. 다만 17% 정도를 스웨덴으로부터 직접 자본 수출로 가져간 것이다. 최근 스웨덴의 직접 투자 대상국은 미국 다음에 브라질이고 북구와 서방 유럽 제국에도 상당한 액수가 투자되었다. 1990년 해외 스웨덴 기업체에 취업하고 있는 인원은 50만 명 이상으로 이 숫자는 스웨덴 국내 외국 회사가 고용하고 있는 인원보다 훨씬 더 많다. V. 문화와 생활상 1. 인종·언어·국민성 스웨덴의 인종은 스웨덴인이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우랄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핀(Fin) 족이 약 2만 명 정도 북부 국경 부근에 살고 있다. 스웨덴인은 게르만인의 한 갈래로 다른 인종과의 혼혈 정도가 적으며 매우 순수한 북유럽인이다. 언어 역시 북부 지방의 순수 토착민인 라프(Lapp) 족을 제외하고는 북게르만어파의 일종인 스웨덴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장은 평균 171cm이며 머리 생김새는 폭이 좁고 앞뒤가 긴 장두형으로 사지가 길며, 피부는 백색, 머리카락은 대체로 금발이고, 벽안을 가진 사람이 많다. 생활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며 합리적이다. 또한 고도의 준법 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불법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옛부터 자주 정신이 충만하여 공동의 이익에 관해서는 단결하고 협력하나 개인 생활에 있어서는 타인에 대해 간섭하거나 타인으로부터 간섭받는 것을 싫어한다. 2. 종교 스웨덴인들도 본래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자연 숭배 사상 등의 원시 종교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문화가 바이킹이 활동하던 시기인 9세기께부터 스웨덴에 서서히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에서의 기독교 정착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웁살라(Uppsala)에 근거를 둔 우상 숭배자들이 강력히 저항하고 있었고, 또한 민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북구 토속 신앙이 단시일에 소멸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결국 1150년께에 기독교가 승리를 거두어 스웨덴은 열렬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를 신봉하던 호족과 왕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결과이며, 1164년에는 웁살라에 처음으로 교구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517년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은 스웨덴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스웨덴을 덴마크로부터 독립시킨 구스타브 바사 왕의 개혁 정책과 맞물려 그 동안 왕족과 결탁하여 권세를 누리던 승려 계층이 물러나게 되었고, 결국 스웨덴은 개신교를 받아들여 루터교에 따른 새로운 국가 교회를 건립하였다. 스웨덴이 루터교를 받아들이고 약 300여 년은 카톨릭이나 다른 종교에 관해 매우 배타적이었으나 1800년대에 이르러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감으로써 서서히 이러한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현재 스웨덴 인구의 약 90%가 루터교 신자이며, 스웨덴이 오늘날 복지 국가로서 다른 나라의 부러움을 사게 된 원인 역시 루터교의 교리에 따른 자유·평등·박애 정신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3. 축제 스웨덴에서는 매년 6월 23일 또는 그 전 토요일 저녁부터 하지 축제를 시작한다. 이 축제는 겨울이 길고 자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크리스마스 못지않은 커다란 행사이다. 이날 저녁은 전국에 걸쳐 야외에서 백야의 하늘 아래 댄스 파티가 벌어진다. 이 하지 축제가 가장 성대하게 전통적인 형태로 시행되고 있는 곳은 달라나(Dalarna) 지방의 실얀 호반이며, 이 때에는 이 지방 사람뿐만 아니라, 국내외에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어 대성황을 이룬다. 이 밖에도 스웨덴은 독실한 기독교 국가로서 기독교 관련 행사는 모두 기념하여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4. 인물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스웨덴의 감독으로, 대표작에는 `세 편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 `여름의 간주곡', `여성들의 비밀', `모니카', `제 7의 봉인', `여름밤의 미소' 등이 있다.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가르보가 출연한 영화에서 가르보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 증명하듯 그녀는 뛰어난 연기로 형편 없는 대본과 감독을 구제한 스웨덴의 여배우이다. 군나르 뮈르달(Gunnar Myrdal):뮈르달은 1898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경제학자로 1974년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베틸 올린(Bertil Gotthard Ohlin):1899년 스웨덴의 클리판에서 출생한 경제학자이자 정치학자로 1977년 국제 무역 및 국제 자본 이동 이론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August Strindberg):우리 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국제적으로 유명한 작가이며 대표작으로는 소설에 『빨간 방 R a rummet』(1879), 희곡에 「숙녀 줄리 Fr en julie」(1888) 등이 있다. 칼 본 린네(Carl Von Linn :우리에게 이미 그 이름이 친근한 린네는 세계적인 식물학자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마틴손(Martinsson):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는 북구 문학의 거장으로 오늘날 문학적 대국주의를 타파하고 세계의 각광을 받은 작가이다. 5. 언론 매체 신문·잡지 19세기 말께 스웨덴에 초등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문맹이 거의 퇴치될 무렵, 스웨덴의 근대적 신문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엔 읽기 쉬운 내용을 다룬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라는 신문이 우선적으로 발행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많은 신문들이 발간되기 시작하였으나, 1945년부터는 광고 수익금에 의존하여 신문을 발행하는 방식 때문에 많은 신문사들이 파산하였다. 그러나 스웨덴의 헌법은 보도 기관이 다양한 의견을 골고루 취급하도록 명시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재정적 위기에 처한 신문사들을 구제하여 다양한 여론이 생성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보조금 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스웨덴 신문은 크게 중앙지와 지방지로 대별되는데, 중앙지는 스톡홀름에서 발행하여 전국으로 발송되는 신문이며, 대개의 도시들은 한 개 정도의 신문 밖에는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웨덴의 3대 도시인 스톡홀름, 말뫼, 요테보리(G eborg)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신문이 발간되고 있으며, 매일 신문이 발간되고 석간도 아울러 발간된다. 스웨덴 신문의 내용상 특징은 정치 기사를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특정 신문은 각기 특정 정당의 노선이나 이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다. 한편 스웨덴에서 가장 발간 부수가 많은 신문은 스톡홀름에서 발간되는 석간 신문인 『엑스프레센Expressen』이며, 두 번째가 바로 역사가 제일 긴 Dagens Nyheter이다. 일찍이 스웨덴은 헌법 조항으로 신문·출판의 자유를 채택하였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신문이 억압과 검열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1809년의 헌법 개정 이후 출판의 자유는 다시 부활되었다. 출판 자유법은 그후에도 개정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행 출판 자유법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인쇄물에 대한 사전 검열 및 기타의 제약은 명백히 금지되어 있으며 출판 자유법을 위반하는 일이 발생하면 편집장이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 또한 기자들의 소식통을 뒷조사하거나 밝히도록 강요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으며 범죄자의 사진이나 이름이 신문에 게재되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보도의 자유에서 제외되는 몇 가지 사항으로는 이적 행위나 선동 행위로 폭동이나 전쟁을 야기시키는 행위, 인종, 피부, 교리상의 이유로 소수 민족을 경시하거나 위협하는 일, 명예 훼손 등이 있다. 스웨덴의 정기 간행물은 2000~3000가지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주간지는 138가지이다. 통속적인 주간지가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는데 이들 45가지 잡지는 스웨덴 인구의 9%가 읽고 있다. 가장 많이 읽히는 잡지로는 『이세아쿠리엔ICA-kuriren』이 있는데 이 잡지는 소매상, 식료품 및 잡화 판매 업자들이 발행을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협동 조합과 도매 상회가 출간하는 『비Vi』라는 성인 교육에 관한 잡지가 널리 구독되고 있는데, 이 잡지는 주로 사회적·경제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스웨덴에는 정치·경제·문화 문제를 논의하는 전문적인 잡지가 거의 없는데, 이는 이러한 문제에 관한 기사가 일간 신문에서 무게 있고 진지하게 자주 토론이 되기 때문이다. 잡지 출판에도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해 왔으나 영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잡지에는 재정적 보조를 해주지 않았고, 경제 사정의 악화로 잡지에 대한 보조금은 대폭 삭감된 실정이다. 라디오·텔레비전 스웨덴에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은 정부의 주도하에 운영되지만, 프로그램을 감독하거나 정부측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개입시키지는 못하도록 되어 있다. 이미 수년 전에 스웨덴 정부가 모든 권리를 스웨덴 방송 협회에 양도하였고, 스웨덴 방송국은 대중 운동 단체 60%, 신문 협회 20%, 산업 및 무역 협회 20%의 공동 출자로 된 주식회사가 되었다. 스웨덴 방송 매체에 있어 특이한 사항은 소비자 보호 측면에서 상업 광고의 방송이 전면 금지되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단지 시청료와 프로그램의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1993년부터는 상업 광고 전문 채널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방송도 점점 영리 본위로 변해 가고 있다. 스웨덴의 텔레비전 제작물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인데 전체 제작물의 12%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갖게 하며, 창조력과 상상력을 길러 주는 동시에 활동적이고 비판력을 갖춘 어린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어린이 프로그램 이외의 프로그램 중 약 50%는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데, 그 가운데 50%는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유럽, 40%는 동유럽, 그리고 나머지 10%는 아프리카, 동양 특히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6. 생활상 성 문제:성 개방의 의미 스웨덴에서는 10대의 혼전 성행위가 아주 흔한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임신 후의 뒷처리이다. 그러나 기혼자의 경우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의 성 관계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더욱이 스웨덴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과 동등하기 때문에 남성측의 일방적인 외도는 전혀 용납되지 않는다. 스웨덴의 성 개방은 종교나 도덕 윤리관에 입각하여 전통적으로 성을 죄악시하고 금기시해 온 기성 세대의 관념을 타파하여 성도덕의 굴레로부터 젊은 여성들을 해방시켜 놓은 것이다. 따라서 순결이 결혼의 전제 조건이 될 수 없고, 결혼 후 여자측의 과거가 드러나 가정 파탄을 가져오는 일도 없다. 이러한 성 해방은 여성측의 일방적인 요구나 주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남성과 일반의 공감과 이해로써만 그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성행위는 오직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남녀간의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만 15세 이전의 성 관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결혼과 이혼, 독신 부모 요즘 많은 젊은 남녀는 결혼하지 않고 동거인으로서 같이 산다. 그러다가 아이가 생기면 결혼을 하거나 그냥 그대로 살기도 한다. 아이만 데리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러한 전반적인 추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전통적인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결혼식의 방법에는 교회 결혼과 시민 결혼의 두 가지가 있다. 결혼 당사자는 해당 교구 사무소에 결혼 자격 심사원을 제출하여 승낙을 받아야 한다. 자격이 인정되면 소속 교구에 있는 교회에 가서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르며, 식에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참석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결혼이다. 시민 결혼이란 지방 법원 판사나 주행정 위원회가 임명한 시민 결혼 집행인이 주례가 되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식장은 보통 법원 청사나 시청 건물이며 여기에서도 최소 두 명의 증인이 입회해야 한다. 식이 끝나면 결혼 증명서를 발급해 준다. 이 결혼식의 특색은 불과 2~3분이면 식이 모두 끝나고 증인 외에는 축하객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이혼은 재판소의 판결에 의해 결정된다. 부부가 이혼에 합의하고 둘 사이에 16세 이하의 자녀가 없을 경우에는 숙고 기간이 없이 바로 이혼할 수 있다. 그러나 부부 중 한쪽만 이혼을 원하거나 또는 둘 사이에 16세 이하의 자식이 있을 경우에는 6개월의 숙고 기간이 경과한 후에나 이혼이 성립될 수 있다. 만일 숙고 기간에 후회를 했을 경우 공동 명의로 이혼 신청을 취소할 수 있다. 최근 이혼 절차를 간소화한 개정법이 통과된 후부터 이혼이 급증하여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가고 있다. 이혼을 했거나 동거하다 별거중이거나, 결혼도 동거도 아닌 관계에서 아이를 낳았거나, 하여튼 아이와 함께 혼자 사는 남녀를 가리키는 명칭이 바로 독신 부모이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부모들도 결혼한 부부나 미혼 동거인과 똑같은 수준으로 잘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국가 정책이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탁아소 자리나 알맞은 주택을 우선적으로 배당하는 등 여러 가지 특별 배려를 하고 있다. 7. 관광지 말뫼와 룬드(Lund) 말뫼는 선진국으로부터 문명을 수입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상트 페테르(St. Peter) 교회와 여러 개의 박물관 그리고 1700개의 좌석을 가진 실험 극장이 또한 유명하다. 말뫼 시의 항구 가까이에 있는 말뫼 휴스 성은 14세기에 축조되어 16세기 중엽에 개축된 고성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말뫼와 인접해 있는 룬드 시는 웁살라와 함께 스웨덴의 전통적인 대학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룬드 성당은 로마네스크의 양식을 현세에 전해 주고 있는 성당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성당은 스웨덴의 대표적인 종교 건축물로서 그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블레킹에와 할란드 스코네의 동쪽에 위치한 블레킹에 지방은 스웨덴의 정원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남해안에서 동해안으로 길게 자리잡은 이 해안 지방은 내륙으로 들어가도 전원의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군항의 하나인 칼스크로나 시가 이 지방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카테카트 해에 면하고 있는 할란드 지방은 휴양 및 관광지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말뫼를 비롯하여 헬싱보리(H singborg), 할름스타드(Halmstad) 및 요테보리로 연결되는 서쪽 해안을 스웨덴 사람들은 서해안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지방은 스웨덴의 일급 별장지로 유명하다. 고틀란드와 욀란드 예타란드 지역에 속하는 고틀란드와 욀란드는 스웨덴 최대의 섬이며 관광 및 휴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따뜻한 기후와 아름다운 풍치 그리고 해수욕과 낚시에 쾌적한 이들 섬에는 여름철에 스웨덴 전역에서 많은 휴양객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수많은 별장들이 섬을 메우고 있다. 요테보리 요테보리는 스웨덴 제2의 도시로서 스웨덴 상공업의 중심지이다. 요테보리 중앙역 부근에 위치한 트래고오드스핼닝(Tr dsh ning) 식물원은 시민들의 산책과 휴식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최신 시설을 갖춘 시립 극장, 콘서트 홀, 그리고 스웨덴의 저명한 조각가 칼 밀레스가 만든 포세이돈의 분수로 유명하며 왕립 미술관 앞에 위치하고 있는 요타플라첸 광장 등이 요테보리 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스웨덴 중부 지방 스웨덴의 중부 지방인 스베아 지방은 울창한 삼림과 호수가 유명한 지방으로 주요 도시인 스톡홀름과 웁살라 등의 대도시가 있는 곳이다. 웁살라는 스톡홀름 북방의 약 70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스웨덴의 종교의 중심지이며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한때 왕정의 도읍으로써 각광을 받은 웁살라는 현재는 정치상의 중요성은 갖고 있지 않으나 스웨덴의 대주교가 여기에 있으며 스칸디나비아에서 최고의 전통을 가진 웁살라 대학이 자리잡고 있어 교육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달라나 지방은 스베아란드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명칭은 계곡지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일대는 삼림이 많아 목재 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많은 사람들은 여름철에 서해안이나 고틀란드 섬의 바다로 찾아가고 있으나 실얀 호수를 중심으로 한 달라나 지방으로도 많은 관광객과 휴양객이 몰려들고 있다. 특히 여름철 하지 축제 때는 전국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 와 달라나 특유의 민속 무용과 바이킹풍의 배를 실얀 호수에 띄우고 경주하는 광경을 참관한다. 스톡홀름 약 400년 동안 스웨덴의 수도로 있는 스톡홀름 시는 이 나라 동해안의 보트니아 만 입구에서 가까우며 멜라렌 호가 발트 해로 흘러나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스톡홀름에는 국왕과 정부 그리고 의회가 있으며, 수도이자 이 나라의 정치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스톡홀름 시내에는 왕궁과 대교회를 비롯한 각종 교회, 증권 거래소, 시 청사, 국립 박물관, 북구 박물관, 바사 전함 박물관 등의 유서 깊은 건물들과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 이 가운데서 바사 전함 박물관은 스톡홀름 앞바다의 물 위에 떠 있는 기묘한 해상 박물관으로 1628년 처녀 출항에서 침몰하여 30여 년 전에 인양된 전함으로 함내에서 2만 4000점에 달하는 물건이 수집되기도 하였다. 노를란드 스웨덴의 북부에 위치한 노를란드는 국토 면적의 58%를 차지하고 있으나 척박한 토양과 한랭한 기후 조건으로 인구 밀도가 아주 낮은 곳이다. 그러나 철강 및 삼림, 수력 자원이 풍부하여 스웨덴의 자원 지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백야와 오로라는 이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장관으로 이것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 또한 적지 않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스키장이 산재해 있는 아카 산과 스웨덴의 최고봉인 케브네카이세 산이 있으며, 인접한 스투라 쉐활렛(Storaf let)은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여름철에는 전국으로부터 관광객이 몰려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