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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윌리암 우드 1956년 미국 위스콘신주 출생. 텍사스주의 크라이스트 포 더 네이션즈를 졸업한 후 1976년에 선교사로서 일본으로 옴. 1988년 컬트(이단)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단체로서 ‘진리의 생명 전도협회’를 설립. 2001년 루사 라이스 신학교(미국죠지아주)에서 목회학 박사 취득(D.Min.). ‘컬트 연구재활센터’ 건설. 현재 ‘진리의 생명전도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고 선라이즈 크리스챤 센터 미사토교회의 협력목사로 재직중이다. 저서 : 여호와증인으로의 전도 핸드북(생명의 말씀사), 여호와증인의 가르침과 성경의 가르침(생명의 말씀사), 몰몬교와 기독교(생명의 말씀사), 여호와 증인 마인드 콘트롤의 실태(삼일서방), 일본어에 도전(아사히신문출판), 그 외 다수 진리의 말씀전도협회연락처 교회가 컬트화 되어갈 때 목차 Introduction
1) 어떤 30대의 주부로부터 상담의 전화가 걸려왔다. 다급해진 상황을 듣고 가슴이 저려왔다. 주부의 이야기에 의하면 최근 남편이 어떤 종교단체에 다니게 된 후, 다른 사람과 같은 인격으로 변해버렸다는 이야기다. 보통의 샐러리맨 생활을 하면서 새벽과 밤의 집회참가나 ‘봉사’에 전력을 쏟다보니 수면을 충분히 취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걱정을 하게 된 주부가 “다른 조용한 교회로 옮겼으면 좋겠어요”라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니깐, 남편은 가출을 하게 되어버렸다고 한다. 당분간 자신의 종교활동을 인정하고 종교단체로 와주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이혼했으면 한다”라고 남편은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 후 부인과 두 명의 자식을 위해 생활비를 비롯한 전혀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1978년 세상사람들을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대사건이 일어났다. 남미의 가이아나라는 나라의 정글 구석에서 912명의 사람들이 집단자살을 한 것이다. 그들은 ‘People's Temple(인민사원)’이라는 종교단체에 속한 신도들로 교조인 짐 죤스의 지시에 따라 독이 들어있는 쥬스를 마시고 스스로 귀한 생명을 던져버렸는데, 이 쇼킹한 사건이 일어난 후 ‘컬트3)’라고 불리는 종교단체와 그 활동, 그리고 주변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이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품게 된 것은 컬트교단의 교육 테크닉이다. 결국 어떻게 짐 죤스와 같이 한사람의 인간이 많은 사람들을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 근처의 아주머니가 “다음주 목요일에 큰 지진이 일어나니깐 지금 당장 피난 가는 것이 좋을 꺼야”라고 말한다면 그 말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그러한 발언을 한 사람이 유명한 대학의 교수라고 한다면, 그 경고는 신중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를 떠나서 교수에게 “바보 같은 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심리학자는 이것을 ‘권위의 법칙’이라고 한다.5) 종교단체의 창립자의 최대문제는, 이 ‘권위’의 문제이다. 결국 “내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구원받을 수 없다”라고 왜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가이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컬트교단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굉장히 민첩하게, 더군다나 효율 좋은 수단을 사용한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여 사람을 자기에게 의존시키게 한다. “당신은 혼자서 성경을 읽어도 모를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판단이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지금 악이 판치는 세상에서, 행복한 인생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그룹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들)이 계십니다. 그(들)는 하나님의 대변자(예언자, 충실한 종, 하나님이 쓰시는 유일한 전달의 경로)로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알고 있고,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따른다면 틀림없이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먼저 첫 번째로, 그러한 말에 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복잡하게 되고 홍수와 같은 정보가 범람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불안을 느끼고 있다.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모른다. 현대의 일반인에게 있어서 자기가 생각해서 판단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은 굉장히 서툴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위를 갖고 단순한 설명이나 회답을 보여주는 종교단체에게는, 그들은 굉장히 약한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고 “이것이 절대로 올바르다”라고 선언하는 종교단체가 있다면 그 말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고뇌를 덜 수가 있고, 안심감을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컬트교단은 신자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어있다. 1994년 4월 1일호 “워치타워”는 어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미담’을 소개하였다. ‘스페인어 판 “워치타워”는 십년전에 영어 판과 동시 발행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감상을 질문을 받은 한 사랑스러운 스페인인 자매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 저희들은 영어를 따라갈 수가 있기 때문에 똑같아지지요. 영어로 말할 때는 언제나 조직을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조직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굉장히 친근감을 느낍니다. 정말로 훌륭하고 끝내줍니다”’(32페이지).6) 세 번째로 사람들은 컬트교단의 유혹의 말에 사랑을 느낀다. 대가족이 핵가족화 되어 갈 때와, 핵가족이 개인화 되어갈 때, 종교 붐이 일어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래 있어야할 가족간의 교제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친척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쓸쓸함을 느낀다. 같은 지붕아래 살고 있어도 모두 자기 방을 갖고 있고 차분하게 이야기 나눌 공간이 없다. 아버지의 귀가가 늦다. 얼굴을 맞댈 기회가 있지만 언제나 화만 낸다. 어머니도 시끄러운 잔소리만 한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자란 인간은, 사랑에 대하여 굶주리고 목말라있음을 느낀다. 친밀하고 생기가 넘치는 공동체를 찾으려고 하기 마련이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며, 애정을 쏟아주는 공동체이다. 현대인의 뉴스를 모두 파악해 알아 버린 컬트교단은, 강력한 전도의 도구로써 ‘러브 샤워’라는 마인드 컨트롤의 테크닉을 이용한다. 조직에 대하여 관심을 표한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다. 몇 시간에 걸쳐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를 들어준다. 밥을 해주고 집의 청소도 도와준다. 이사를 하게 되면 신자가 모두 와서 도와주기도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러브 샤워’를 받은 자는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그와 동시에 ‘이 정도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종교단체는 없다’고 확신하게 되나, 그 사람이 알 수가 없는 것은 이 ‘러브샤워’에는 조건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 조건이란 조직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다. 결국 조직의 가르침을 모두 받아들여 고분고분 따르면 귀한 대접을 받지만, 조직에 대하여 의문을 품거나 그 가르침에 반발한다면 그 ‘러브샤워’는 멈추어 버리는 것이다. 거기서 ‘불순종한 인간’은 고민하게 되고 중대한 결단에 직면하게 된다. 자신의 양심을 지켜 진리와 진실을 철저히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참고 조직에 순응할 것인 가이다. 유감스럽지만 사랑 받은 경험이 별로 없는 현대인은, 같은 동료로서 인정받아, ‘러브샤워’를 계속 받기 위해서 조직에 순응하는 길을 고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전문가 사이에서 마인드 컨트롤의 최대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인간의 성장이 멈추어버린다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존하는 사이에는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고, 그 결과 정신적, 영적, 지적 성장이 멈추어 버린다. 본인은 훌륭한 인생을 발견하였다고 기뻐하겠지만, 그 ‘훌륭한 인생’을 계속 걸어가기 위해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결국 자기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된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컬트교단에 있어서 마인드 컨트롤의 문제는 수십년전부터 클로즈업되어 왔는데, 최근 ‘어떤 (기독교의) 교회에서 하고 있는 성경교육도,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이 아닐까?’라는 지적이 나오곤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면서 ‘절대복종’을 신자에게 요구하는데, 그 목회방침에 의해 신도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틀림없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라는 성구가 있다(히브리서 13:17). ‘장로들에게 순복하고’라고도 쓰여져 있다(베드로전서 5:5).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복종’이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영적 식별력을 갖고 있는 크리스천은 지도자의 이야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인 후, 그것이 성경에 충실한 메시지인가 아닌가를 주의 깊게 고려한다. 그리고 확실히 성경과 일치하는 지시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지시에 따르지만, 지도자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거나 성경에 반하는 결론에 달하는 경우 복종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다. 베드로가 말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라는 말은 유명하지만 (사도행전 5:29) 기억해야할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해 한 말이라는 것이다. 베뢰아사람들에게도 바울은 이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하였다(사도행전 17:11). 그들은 ‘선한 사람들’로 평가되었다. 성경에 충실하고 진실한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7) 실제로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았기 때문에 너희는 나를 복종하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것에 의하여 자기에게 권위가 없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충실한 목회자의 경우,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것에 의함이 아닌 모범을 보이는 것에 의해서 주위의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받는 다는 것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함이 아닌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영적인 권위는 모범을 보이기 위한 힘이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베드로전서 5:3). 또한 성경에 충실한 지도자는 성경의 원칙에 따르는 것을 신자에게 가르치지만, 성경이 직접언급하지 않는 사생활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사적인 문제에 관한 판단을 신자에게 맡긴다(로마서 14장 참조). 그리하여 자립하는 크리스천을 기르는 것이다. 바바라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바바라는 미국의 어떤 교단에 들어가 거기서 2년간 훈련을 받았다. 어떤 선배 신자의 ‘제자’가 되었는데 매일 빠지지 않고 선배에게 보고하는 것을 강요받았다. 오늘은 몇 명에게 전도하였는가? 몇 시간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는가? 헌금을 얼마 했는가? 마음속에 깨끗하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등등 모든 것에 대하여 선배에게 고백하게 되었다. 또한 무엇인가 계획을 할 때도 우선 선배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바바라는 얼마 안 있어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눈치채게 되었다. 거기서 교회의 방침과 훈련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언제나 듣게 되는 말은 “당신의 영적 지도자를 복종하라” 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조직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었고 마침내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어 자살을 생각하게까지 되었다. 그래서 탈회를 결심했다. 그 결과 십이 주 동안의 리허빌리 기간을 거쳐 지금은 행복한 인생을 되찾았다. 사람을 컨트롤하기 위해 컬트교단은 종종 “지도자에게 복종하시오”라는 성경구절(히브리서 13장 17절)을 악용한다.8)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물려받았고 일반 신도인 당신들보다도 영적인 것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것도 생각할 필요 없이 나에게만 복종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무렇게나 사람을 복종하는 생활을 장려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적 지도자라고 칭하는 자의 말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 성경에 따르고 있는가 아닌가를 살펴보라고 가르치고 있다(요한1서 4장 1절). 또한 지도자의 ‘열매’를 살펴보라고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7장 15_20절). 신용할 수 있고 복종할 수 있는 안심한 지도자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종’의 마음을 갖고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장 42_45절).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예수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 일반 상식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획기적인 말씀이다.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지도자=종’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지도자’라는 말을 새롭게 정의하셨다. 이 세상의 사전에는 ‘지도자는 위에서 권력을 행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9) 그러나 예수는 ‘지도자는 섬기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종’이라든가 ‘섬기다’라는 말의 의미는 지도자가, 하인과 같이 어떤 일이든지 마구잡이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도자는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될 수 있는 대로 그 일에 전념하여, 다른 일은 타인에게 맡겨야 하지만 성경적인 지도자는 항상 자신의 형편이 아닌 타인의 요구 또는 타인의 행복을 최우선시 한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된다. 크리스천은 영적 지도자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에게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4) 종교의 커다란 역할은,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점에 관해서 어떻게 가르치는 가에 의해 세계의 종교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많은 종교는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거나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에 반해 어떤 종교는 믿는 것만으로 신에게 인정받아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기 위해서 유일한 조건은 신앙에 있다고 시종일관 가르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_9).10)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디도서 3:5). 이 은혜의 말씀은 자신의 약함이나 죄를 자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펄쩍 뛸 정도로 기쁜 소식이지만, 자신은 그다지 나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믿는 것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은 뻔뻔스럽다’라고 비판한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컬트교단의 지도자들도 거의 예외 없이 ‘행위=구원’을 설파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안성맞춤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결국 컬트에 있어서, 조직의 이익이나 확대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신자를 움직이게 할까가 영원한 과제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날쌘 방법은 ‘활동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11) 게다가 ‘하나님을 위한 봉사다’라고 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의 존재만큼, 조직의 선전이 되는 것은 없다. 종교를 갈구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우선 그 종교에 입신한 사람을 본다. 그리고 거기서 ‘열심이기 때문에 올바를 수밖에 없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년도보고”(전도보고)를 보고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에 관심을 갖거나 강한 확신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한 제2차세계대전시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 이 가혹한 박해를 견디고 신앙을 지켜 나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조직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조직임에 틀림없다’라고 납득하는 사람도 그렇게 드물지도 않다. 최근 급성장을 이루면서 제자훈련이라는 훈련방식이 문제시되는 교단도, 그 활발한 전도와 열심인 신자훈련 프로그램 때문에 주목을 받고 있다. 처음 예배에 참가하는 사람이라도 따뜻하게 맞이해 준다. 몇 명의 소그룹으로 나누어서 어깨동무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한다. 매일 반드시 누군가 간증을 하도록 지도를 받는다. 자신의 교회의 미적지근함에 실망한 기독교인이 이 그룹에 꽤 참가한다. 아마도 그 ‘열심’이 최대의 매력인 것 같다.
컬트 가운데에서 보여지는 ‘열심’은 틀림없이 올바르지 않은 ‘열심’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경고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열심에 의해 자유를 빼앗기고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4:17, 5:1). 이른바 ‘컬트의 인격’을 나타낼 때는 네 가지의 말을 사용한다. ‘밝음’, ‘행동적’, ‘순종’, ‘열심’ 이 그것이다. 컬트 신자는 이러한 인격을 몸에 지니려고 필사적으로 노력을 하게 되는데, 컬트 가운데에서 특히 중요시되는 것은 ‘열심’이다. 그것이 전도전략에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새 신자는 컬트신자가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사람들은 진지하다. 반드시 여기에는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과 같이 ‘열심이기 때문에 올바르다’라는 단순한 판단은 굉장히 위험하다. 컬트 신자가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에 감동하기 전에, 우선 무엇이 그들을 열심히 활동하게 하는가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다. 왜냐하면 ‘올바르지 않은 열심’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위한 열심’, ‘동료(같은 신자)로써 인정받기 위한 열심’,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한 열심’, ‘노르마를 달성하기 위한 열심’, ‘자신감이 없음을 감추기 위한 열심’ 등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앞에 열거한 ‘열심’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리의 ‘열심’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열심’을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로마서 10:1_4). 올바르지 않은 ‘열심’의 근본은 ‘자기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한’마음이다. 즉 자신이 올바르다(또는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가 올바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라고 말하고 있다(19_20).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없는 것은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뿐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대해 열심인 사람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며,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대속의 완전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컬트 신자의 경우, ‘열심’은 하나의 우상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룹에 대한 ‘열심’에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이 정도로 열심히 활동하는 조직이니깐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지 않거나, 구원해 주시지 않을 리가 없을 꺼야’라고 생각하여 조직에 대한 ‘열심’은 마음속에서 의지하는 하나의 기반이겠지만, 이것은 우상숭배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디도서2:11_14).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재차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참된 ‘열심’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나는 결과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자신을 희생하셨다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 ‘올바른 열심’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열심’이다. 그 이외의 ‘열심’은 모두 착각하고 있는 ‘열심’일뿐만 아니라 거짓인 것이다. |
첫댓글 윗글중에 노르마란 단어의 뜻: 노르마 [명사] 1. 개인이나 공장 따위에 할당된 표준 노동의 양이나 책임량을 이르는 말. 2. (일반적으로) 근무나 노동의 기준량.
간추려 자료실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천불아님
참, 이런 글을 읽을 수록 느낍니다. 그동안 저를 정형화시켜왔던 사고의 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나 하는 점을요. 벗어날 수 있어서 그만큼 다행인 일이지요.
이런 거 퍼오려다가 말았는데...왜냐하면, 기우일지 모르나 저자가 목사라고 또 번역자가 개신교의 현대종교 편집인이라고 색안경을 쓰고 볼 수 있기에...하여튼 매우 좋은 자료입니다.국내에 거의 유일한 이단연구잡지가 아마 현대종교로 알고 있습니다.
이 글을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