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2. 13. 주일예배 설교
시편 119편 113-120절(시편119편 강해 )
거룩한 설렘과 떨림
■ 가수 이상우씨가 부른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저기 보이는 노란 찻집 오늘은 그녈 세 번째 만나는 날 마음은 그곳을 달려가고 있지만 가슴이 떨려오네~...” 저는 이 가사 중에 ‘떨려오네’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녀에게로 가는 이 사람은 왜 떨리는 걸까요? 무서워서 떨리는 걸까요, 설레어서 떨리는 걸까요? 노래 전체를 들어보니 두 가지 다인 것 같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니 설레어서 떨리고, 오늘은 사랑을 고백하려는데 그녀가 거절할까봐 무서워서 떨리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두 가지, <설레어서 떨림>과 <무서워서 떨림> 사이에서 오고가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설렘과 주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단순화하면, 기대와 걱정, 소망과 반성, 열정과 냉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 시편기자는 은신처요 방패이신 주님의 말씀을 바라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114절) 이 고백은 설렘입니다. 주님/주님의 말씀이 자신을 행악자들로 부터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에 갖는 ‘희망으로서의 설렘’입니다.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115절) 악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희망으로서의 설렘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편기자에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악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120절) “이 몸은 주님이 두려워서 떨고, 주님의 판단이 두려워서 또 떱니다.”(새번역) 이 두려움은 ‘주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두려움이자 떨림이었습니다. 더불어 선(善)/정의(正義)를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고 떨림이었습니다.
이렇게 시편기자에게는 ‘주님에 대한 설렘’과 ‘주님께 대한 두려움’이 공존했고, 이 두 사이를 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설렘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야하는 떨림이 사이를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설렘으로서의 떨림과 두려움으로서의 떨림은 다르지만 같은 ‘거룩의 의미/가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이를 오고감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정이 그런 겁니다. 이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 <설렘으로서의 떨림> ‘설렌다’는 것은 감정/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풀어 설명해보면, 주님을 향해 설렘이 있다면 내 신앙은 살아있는 것이고, 내 신앙심은 청춘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반대로 주님을 생각해도 무미건조하고, 별 감흥이 없다면 내 신앙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런데 설렘이라는 것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콩콩대는 것도 있고, 얼굴이 발그레 지는 것도 있고, 살포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참 좋다’는 라는 말을 조용히 내놓게 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활활 타오르는 감정으로서의 설렘만을 상상하지 않길 바랍니다.
신앙적으로 설렘은 주님을 향한 기대요 소망이기에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겁니다. 시편기자가 116절과 117절에서 고백하는 내용을 봅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시편기자는 주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살게 한다는 기대/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대가 아니라 확고한 믿음이었는데, 117절의 ‘구원’(safe and secure)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의 안전과 구출이 오직 주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믿고 의지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 너무도 설레는 겁니다. 거룩이 거룩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 너무도 떨리는 겁니다.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117절하)는 고백은 조건적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을 붙드시면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신 안에 거룩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고 있다’는 신앙고백인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신앙은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시작하셨다면 이미 결과가 나왔음을 믿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작은 신실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 전과정이 찬양과 감사를 동반한 신앙고백의 시간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설렘으로서의 떨림’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설렘’입니다.
■ <두려움으로서의 떨림> 두렵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포에 의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118절상과 119절상을 보면 동의됩니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멸시되고 버림받는다는 것은 공포에 해당됩니다. 비록 악에 대한 것이라 해도, 또한 그것을 목격하는 자리에 있다 해도 이는 공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두려움에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경외’(敬畏)입니다. 선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너무도 존경해서 갖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또한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분을 뵌다는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악을 벌하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이처럼 선을 챙기시는 공의에 대한 기대로서의 두려움이 성서가 말하는 또 다른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두려움은 이중적(二重的)입니다. 악과 선에 대한 각각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별개가 아니라 교차적(交叉的)입니다. 악의 결과를 보기에 두려움이지만 이 두려움이 선을 추구하도록 할뿐만 아니라 신앙의 옷깃을 더욱 여미게 만듭니다. 또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 거룩을 사모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악을 더욱 멀리할수록 말씀을 더욱 따르게 됩니다. 역(易)으로 선을 추구하기 위해 말씀을 따를수록 악을 더욱 멀리하게 됩니다. “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119절)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에게 두려움은 이중적이자 교차적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세상에서 얻지 못할 교훈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율례들에서 떠나거나 벗어난 각종 이론과 담론들 중 상당수가 속임수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이해에 속임수를 넣어 다수(多數)의 사람들을 혼란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을 ‘맹목적 허무주의’로 빠트리는 술수입니다.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118절)
‘맹목적 허무주의’라는 것은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다’고 정의하고 이를 쾌락주의나 소비주의로 연계시키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적 허무주의’의 입장에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전도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헛되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이 모든 것이 무의미가 아닌,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한다’로 승화되는 허무주의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의미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치 높은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함부로 대하지 않음으로 더욱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 우리의 신앙이 세상과 벽(壁)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없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교회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이분법적 이해는 ‘하나님 나라’ 신앙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속한 교회를 믿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상에 속했다고 세상이 제공하는 철학사상에 동의하거나 동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께 속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만들어낸 철학사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들에 설레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설렘>은 오직 주님/주님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떨림>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설명을 대변하는 말씀이 113절입니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I hate anyone whose loyalty is divided, but I love your Law.” 세상과 교회에 양다리를 걸친 신앙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고 세상을 품는 신앙은 옳습니다. <거룩한 설렘>은 말씀을 품고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만 나타나고, <주님을 향한 떨림>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는 사람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을 생각하면 설레고, 주님을 뵈면 떨리는 이런 거룩한 현상이 늘 나타나길 소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