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양면, 하동포구 팔십리, 곡성, 심청전, 용궁
하동군 [ 화개면 & 악양면 ] 지도
주요농산물은 쌀·보리·매실 밤 등
섬진강 따라 구례-해남을 잇는 국도.
정서(亭西)·미점(美店)·축지(丑只)·
신대(新垈)·신성(新星)·신흥(新興)·
중대(中大)·등촌(登村)·매계(梅溪)·
정동(亭東)·입석(立石)·봉대(鳳坮)·
평사(平沙)·동매(東梅) 등 14개 동리
면적 52.69㎢, 인구 4,137(2003).
악양 고소산성은 당나라 군사 주둔 요새.
형제봉 아래 신선대 절벽이 막힌 천연요새.
화개장터 여수와 가까워 소정방 대군이 주둔.
'신라시대 악양은 한반도의 작은 당나라.'
.............중국 악양................
중국 후난 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도시.
현청 소재지이며 웨양 지구의 행정중심지.
양자강과 동정호(洞庭湖) 합류점 동쪽 기슭
악양은 한대(BC 206~AD 220)에 파구(巴丘)라 불린 요새
AD 221년 중국분열 후 오나라의 중요한 군사주둔지 파릉
수(581~618)가 중국통일 이후, 1911년까지 계속 같은 지명.
송대(宋代:960~1279) 웨양 군사행정구역
6.4㎞ 성벽으로 싸인 강력한 요새로 강화.
악양 현재의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368년 명(明)나라(1368~1644)는 부(府)로 승격.
1852년, 태평군이 점령해 南京으로 진격하는 요새.
1854년 관군이 이곳을 탈환후, 중앙 정부에서 지배
1898년 청나라는 악양을 대외무역 통상항구로 개방.
하여, 악양에 외국인 거류지와 상업 구역이 들어섰다.
악양은 중국 내 다른 지역과도 대규모의 교역을 행한다.
또한 악양은 둥팅 호, 샹장 강(湘江)과 그 지류들,
후난 성 북부의 호수들과 수로길 배 갈아타는 지점.
..........................................................
하동포구 팔십리.
옛날에는 세금으로 받은 쌀을 실어가는 조운 통로.
세금으로 받은 쌀은 강가 나루 창고에 보관하는데
그 쌀을 보관하는 창고이름이 해창, 하동창, 사창.
창고가 있던 자리는 하동창 나루,
회창나루, 돈머리 나루 였다 한다.
'하동포구 팔십리는 고대문명 발상지.'
단군조선보다 수천년전 진조선의 영역.
단군 역사는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설.
단군신화 훨씬 이전 또 하나의 단군신화.
....................................
....................................
화개장터에서 화개천과 합류하는 섬진강
강폭도 넓어지고 수량도 훨씬 풍부해진다.
물새가 울고, 달뜨는 하동포구 팔십 리 뱃길.
화개나루에서 섬진강 하구 뱃길 34km.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 7대 장터 화개장터.
장서는 날이면 소금과 어물을 실은 황포돛배들
팔십리 물길을 거슬러 화개나루에 닻을 내렸다.
가까운 광양·남해·여수 멀리는 부산에서 온 배들
구례 평야 쌀보리와 지리산 두릅·더덕을 가득 싣고
섬진강 물길을 따라 되돌아갔을 황포 돛배 뱃사공들
이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의 기억 속에 떠다닐 뿐,
지금은 재첩잡이 전마선이나 조각배들만 오르내린다.
화개장터 뒤로 국도따라 남쪽 이십리 악양리 벌판
이 들녘 한쪽 평사리는 '토지' 박경리 소설 속 무대
지리산 삼신봉과 형제봉 자락에 섬진강을 바라보는 곳.
그러나 '서희 아씨'가 살던 최참판댁은 평사리에 없다.
최참판댁은 상신마을 조부잣집을 모델 삼은 허구의 공간.
최근, 하동군에서는 평사리 상평 마을에 조부자집을 재건
지명대로 평사리는 넓고 평평한 모래밭을 낀 마을이다.
물 밖으로 드러난 백사장만 해도 어지간한 해수욕장 규모.
이처럼 넓고 아름다운 모래밭은 섬진강 하구까지 이어진다.
섬진강 명물 재첩이 무진장 채취되는 하동읍 흥룡리
하동군에서 채취되는 재첩만 해도 1년에 600∼700톤,
값으로 치면 12 여억 원 어치에 달한다고 하는 재첩.
일명 '가막조개' 재첩의 몸길이는 2∼3cm 정도.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하구 모래의 민물조개.
한때 부산 수영강과 낙동강 하구도 재첩의 산지.
현재,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재첩은 섬진강 하류뿐.
섬진 강변과 국도변에는 재첩국 파는 음식점이 즐비.
재첩을 잡는 방식은 남녀가 조금 다르다.
아낙들은 수심얕은 모래밭을 뒤적거려 잡고,
남자들은 틈을 성기게 만든 철제 삼태기를 채취.
긴 대나무 손잡이가 달린 삼태기로 모래밭을 훑으면
어린 재첩은 틈새로 빠지고 다 자란 재첩만 남게된다.
물이 얕은 곳에서는 물 속에 몸을 담근 채 삼태기질
깊은 곳에서는 전마선을 타고 삼태기로 훓어 잡는다.
매화골 섬진 마을
하동 읍내를 돌아 섬진교 아래부터 잔잔한 섬진강
흐름이 해류처럼 더디어지고 때로는 호수처럼 잔잔.
호수 같은 강과 깨끗한 모래사장 강가에 송림이 울울.
하동을 '백사청송(白沙靑松)의 고장' 이라 일컫는 솔밭.
먼 옛날 신라와 백제 사신이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곳이다.
송림 바로 위쪽에 가로놓인 섬진교를 건너면 전라도 광양.
'다리 건너 삼거리 오른쪽 길로 십 리쯤 가면 '매화골'
3월 중순 이른봄, 섬진강가에 활짝 핀 매화꽃 마을.
마을 꽃터널 속을 걸으면 매화 향기에 정신마저 혼미.
이따금 강바람에 눈이 내리듯 우수수 날리는 매화 꽃잎
매화꽃이 절정에 이르는 3월 10일에서 20일경에는
비탈진 매화밭 풀밭에서 풀꽃 들도 하나 둘 꽃핀다.
매화 꽃터널 아래 오솔길따라 굽이 돌아 쫓비산 중턱
지리산을 껴안고 흐르는 섬진강
하동포구 팔십리도 여기서 끝난다.
.........................................
.........................................
하동의 먹거리로는 재첩국과 은어회가 유명하다
은어는 하동 섬진강 맑은 물 1급수에서 만 서식
하동 나들목에서 진월 나들목으로 빠지면 광양제철
남해대교가 지척이라 남해일주도로 드라이브도 할 만.
삼천포와 창선도를 잇는 삼천포 창선대교가 완공되어
삼천포를 들러 대전 진주 고속도로 드라이브도 즐거움.
화개장터와 강 건너 지역을 연결하는 다리가 남도 대교.
그 다리는 전북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 동서화합의 상징
화개장터에서부터 쌍계사 벗꽃 10리 길은 '혼례길'이라 한다.
쌍계사는 차시배지로 유명한 곳이라 길가에 전통찻집들이 많다.
.................................................
.................................................
섬진강 명물인 재첩을 직접 잡는 체험을 하고 싶거나
백련 도요지 새미골가마터에서 막사발을 굽고 싶으면
관광상품 이용하기가 편리(하나강산 (02) 736-7400.)
임진왜란 때 대부분 도공들이 잡혀가 맥이 끊긴 하동 막사발
도요를 되살리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2년간 연구하여 복원.
<취화선> 영화촬영지, <대장금> 드라마 수라간 사기그릇 제작.
서울→하동 청학동→삼성궁→진교면 백련리 도요지 막사발 체험→
섬진강 재첩잡이 체험→악양면 평사리→화개장터→쌍계사→서울.
..............................................................
..............................................................
고속도로를 벗어나 구례에서 하동으로 빠지는 '섬진강 길 팔십리'.
강바람 맞으며 달리면, 섬진강과 화개 천이 만나는 초입, '화개장터'.
김동리 소설 ‘역마’ 의 무대이고 가수 조영남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엔 전국 3대 장터로 꼽혔지만,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 없는 모양.
번성했던 옛 장터 모습은 사라졌고,
주변 식당만이 옛 영화를 대변하듯.
화개에서 쌍계사까지 길목마다 자리잡고 있는 찻집만 얼추 30 여 개.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는 녹차의 시배지이고 야생차의 전통적인 고장
쌍계사 일대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하동 야생차 문화'의 산실인 곳.
벚꽃이 눈보라처럼 흩날려 연인 가슴을 연분홍으로 물들이는 4월 초.
'화개천 야생차밭 다향'도 멋들어진 향내 뿜으면 몰려드는 전국 관광객.
화개천 강바닥에는 여인의 살결 닮은 매끄러운 돌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
한껏 물 오른 수양 실버들의 길게 늘어진 가지.
화개천 위로 늘어뜨린 채 흐르는 물을 감상하듯.
수박 맛 나는 5월의 은어
화개천변 계단식 야생차밭
산허리의 보리밭 이색적 풍경
섬진강따라 국도를 달리면 지리산 남쪽 기슭의 쌍계사.
진주나 하동의 대학생들이 즐겨 찾아오는 데이트 코스.
화개천 다리를 건너면 절로 가는 길 옆엔
산채비빔밥, 은어회, 재첩, 장어구이 식당
쌍계사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운치가 있다.
그러나, 입장료 3,400원은 비싸다는 느낌.
오른쪽 계곡 오솔길은 너도밤나무,
단풍나무, 전나무, 단백나무 숲 속.
100m도 못 미치는 거리를 걷다보면
세속의 번뇌가 모두 씻겨져 버리는듯.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 봉안한 천왕문 지나
구층석탑, 팔영루, 대웅전이 늘어선 쌍계사 경내.
두 개울이 감싸 흐르는 명당 위치에 있어.. 쌍계사.
찾아가는 길
대전-통영간 고속도로를 타고 장수 IC.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방향으로 가다가
구례 쪽으로 방향 잡는 것이 지름길.
구례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하동방향으로 30분 후 화개입구.
화개장터 - 쌍계사 10분거리 = 혼례길.
봄이면 쌍계사 10리 혼례길에 눈이 내리는 듯..
꽃비 흩날리는 듯..화사한 벚꽃 터널이 아름답다.
...............................................................................
...............................................................................
벚꽃은 일본의 국화이고 상징
벚꽃 원산지는 한반도와 일본.
벚꽃은 일본 사무라이의 상징
원래는 우리나라 향토수종이다.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
능벚나무는 이조 왕실의 상징.
'쌍계사 일대와 진해 군항제'
많은 상춘객이 몰리는 벚꽃축제.
'충무공과 거북선'의 상징 군항제.
'과연, 벚꽃축제를 즐겨도 좋을까?'
한일감정이 격화될 때마다 거론된다.
한동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격분.
벚꽃이 향토수종으로 알려지며 잠잠.
벚나무 종류는 장미과에 속하는 교목.
대부분 4월에 꽃이 잎보다 먼저 핀다.
'올벚나무, 왕벚나무, 벚나무, 등'
잎과 함께 꽃피는 종류는 산벚나무, 섬벚나무
올벚나무는 화엄사 계곡에 많이 자생하고 있다.
특히, 쌍계사 지장암 올벚나무는 천연기념물이다.
왕벚나무는 제주도가 원산지,
기타 벚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
올벚나무와 왕벚나무는 향토수종.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퍼진 나무.
일본에 있는 우에노온시 공원(다이도구/JR-지하철 우에노역 인근)
치도리가후치, 신주쿠교엔 , 스미다 공원, 소토보리공원, 간다카와연안
기누타공원, 이노가시라온시공원, 고가네이공원, 국립대학도오리 등등.
동경의 봄은 활짝 핀 벚꽃에 의하여 분홍빛 바다으로 물든다.
일본인은 옛부터 벚꽃을 각별히 좋아하여 즐기는 방법도 다양.
벚꽃나무에 등불을 장식하고 그 아래에서 '술과 대화'를 즐겼다.
벚꽃을 온탕에 가득 띄워 놓고 풍류문화를 즐기는 풍습도 있었다.
벚꽃 혼탕은 전세계 관광객들에게 인기있는 관광상품이기도 하다.
이는 고려 초기에 도화 꽃을 띄워 놓고 혼욕을 즐긴 풍습에서 유래.
벚꽃은 백제의 후예들이 나라를 잃은 후 향수병을 달래기 위한 나무.
결국, 백제의 후예들은 일본 왕실을 장악했고 벚나무를 거리에 심었다.
동경의 유서 깊은 느티나무 가로수 거리가 그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한다.
느티나무 역시 우리나라의 동네 어귀마다 그늘이 시원한 정자목 향토수종.
'한반도는 고대국가 이전부터 동아시아의 해상왕국.'
'여수에 가면 돈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옛부터 중국과 일본을 잇는 무역항이기 때문이다.
겨울에 영하로 내려가지 않는 수심 200~300m 항.
굴곡 심한 해안선에 방파제 같은 한려수도 다도해.
전남 수산물 생산량의 35 %를 찾이하는 황금어장.
2천톤 급의 상선과 어선들이 정박할 만한 넓은 항만.
해상교통이 편리한 만큼 육로 교통은 다소 불편한 곳.
하여, 여수에서 섬진강을 통해 화개장터로 이어진 상권.
'화개장터는 옛부터 섬진강 일대 농수산품 교역장.'
...............
추억의 기차.
................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변 코스모스 만발한 철길
그곳을 달리는 추억의 기차에는 낭만이 가득하다.
'곡성 심청축제를 지휘하는 곡성 군수의 변.'
“수만평 갈대와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섬진강변
자연생태공원의 심청축제에서 심청전 속 인물들
그들을 만난후 섬진강 기차마을 증기기관차 체험."
'섬진강변 자전거 하이킹과 더불어 가을여행.'
옛 전라선 구간(구 곡성역~가정역) 13.2km를 매입 오픈.
기차마을은 곡성군 심청축제와 함께 전력을 쏟는 숙원사업.
정부로부터 기차마을 특구로 지정받은 특화된 관광상품이다.
'기차마을 구 곡성역은 '태극기 휘날리며’영화 촬영지.'
...........
심청 공원.
............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원홍장설화.. 심청공원.
원홍장 설화는 심청전 소설의 원류로 추정되는 전설.
심청공원에는 관음사 사적기 심청전 배역인물 장승 23기
심청 효행 기념비, 관음사 연기설화에 나오는 꽃을 식재.
흰불두화, 흰진달래, 흰만리향화 등 300 그루가 심어졌다.
흰불두화, 흰진달래, 흰만리향은 불교용어
우리나라 말로는 철쭉과 진달래꽃을 뜻한다.
.........
관음사.
.........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觀音寺).
백제 분서왕(308년) 때 처녀 '성덕'이 창건한 사찰.
낙안포에서 '금동관세음 보살상'을 모셔왔다고 한다.
관음사의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충청도 대흥현에 원랑(元良)이란 사람이 살았다.
눈이 멀었으나 마을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던 그.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던 원량에게 불행이 닥쳤다.
바느질 품팔이 부인이 산고끝에 세상을 떠난 것.
원랑은 유일한 혈육 딸 홍장을 젖동냥으로 키운다.
홍정 또한 성품이 현숙해 아버지를 극진하게 봉양.
그러던 어느 날
장님 원량은 홍법사 화주승 성공(性空) 스님을 만난다.
원량을 보자 성공 스님은 사찰 불사를 도와달라며 간청
원량은 스님이 빈털터리 자신에게 시주를 부탁하자 난감.
“내일 길을 나서면 반드시 장님을 만날 것이다.
그는 이번 불사에 큰 시주가 될 것이니라”
성공 스님이 어제밤 꿈 이야기까지 하며 간청하자
원량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자신의 입장을 넋두리.
"집에는 곡식 한 줌 없고 내 땅 한 뼘 없는 처지인데
무슨 수로 시주합니까? 다만 나에게 딸이 하나 있는데,
혹시 불사에 도움될 수 있다면 딸 아이를 데려가시지요.”
성공 스님은 원량을 따라 그의 움막으로 함께 갔다.
아버지 원량은 딸에게 스님과의 약속을 말해주었다.
딸은 자신보다 아버지 앞날이 걱정되어 슬피 울었다.
홍장의 나이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었다.
어린 딸을 보내는 원량 역시 기막힌 심정.
그러나 어찌하랴, 이미 스님과 약속한 것을.
홍장은 애통한 표정을 지으며 스님을 따라 나섰다.
홍장은 아버지와 영영 이별이라니 생각하니 아득했다.
난생 처음 산 넘고 물 건너 소량포 바닷가에 이르렀다.
너무 많이 걸어 잠깐 쉬려고 언덕에 앉아 있었는데,
바다 저멀리 수평선에 배 두척이 질풍같이 다가왔다.
그 배에서 내린 그들은 홍장을 보더니 예를 갖추었다.
“참으로 왕후마마이십니다.”
"......................."
“저희는 진(晋)나라 사람입니다.
최근 왕후께서 돌아가신 후 임금님께서
늘 슬퍼 하셨는데 꿈에 신인이 나타났지요.
‘성상의 새 황후 되실 분이 백제에서 성장하셨고,
단정하기로는 전 황후보다 더하니 가신 이로 여기시고
과히 슬퍼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여 우리가 찾아가는 중.
저희들은 금은보화를 준비해 황명을 받자와
동국으로 오던 중 마마를 뵈옵게 된 것입니다.”
사자의 긴 사연을 듣고 난 홍장은 한숨을 쉬며
“내 한 몸이야 가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다만 아버님을 위해 선근종자(善根種子) 하려
스님과 동행하는 중이니 배에 실은 모둔 폐백을
스님께 시주하면 소녀는 기꺼이 따라가겠나이다.”
진나라 황후가 된 홍장은 관음상을 조성하여
아침 저녁으로 모시며 고향 백제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관음보살상을 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표류한지 한 달만에 낙안 단교 곁에 정박
그곳 수비병들이 잡으려 하자 바다 멀리 가버렸다.
이 때 옥과(곡성군 오성면)에 사는 '성덕' 아가씨.
낙안 해변에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녀가 끌어당기듯 그녀에게 다가오는 배
배 안에 번쩍이는 관음보살상이 모셔져 있었다.
성덕은 관음상을 업고, 고향인 옥과로 출발했다.
성덕에게 등에 업은 관음상은 새털처럼 가벼웠다.
12 정자를 만나 쉬며 고향에 도착한 성덕.
고향에는 관음상을 모실 마땅한 곳이 없었다.
9일 동안 심사숙고 끝에 다시 관음상을 업고서
성덕산을 넘어가는데 갑자기 관음상이 무거워졌다.
성덕은 관음사을 모실 곳이 가까이 있음을 깨닳았다.
마침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좌청룡 우백호가 벌려졌고,
가운데 적당한 사찰터가 있어 그곳에 관음상을 모셨다.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 성덕산 관음사.'
성덕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산아래 마을사람들이 이를 보게 됐고
그들도 함께 기도하자 신기하게 소원이 한가지씩 이뤄졌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훗날 그 산은 성덕 이름을 본따 성덕산
성덕보살은 관음사의 개산조가 되었다.
내륙에 있는 관음성지로 명성을 날리던 관음사
정유재란 전까지만 해도 80동을 자랑하던 거찰.
1832년(순조 32) 큰홍수에 전각의 거의 반이 무너졌고,
금랑각처럼 남아 있는 건물도 물이 차는 등 상당한 피해.
금랑각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36년 청운 스님의 중건.
그 후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물이 없어졌고,
전쟁 후 창훈스님이 근처 대은암 건물을 옮겨와
원통전을 중건하고 1982년 중환 스님이 천왕문을 복원
요즘 만월당과 종각을 짓는 불사가 활발.
원통전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국보 제214호
전쟁으로 원통전도 사라져 둘 다 없어졌다.
곡성(谷城).
전남 북동부 곡성군은 황해도 곡성과 같은 지명.
지명 풍습 전설까지도 유사한 공통점이 많은 편.
하여, 먼저 황해북도 북동부에 있는 곡성부터 소개.
............황해북도 북동부에 있는 곡성군............
고구려 때 십곡성이라 했다가 고려초 곡주, 이조때 곡산.
주로 승격, 군으로 격하되길 반복하다가 1895년에 곡산군
개성부에 속하며 십곡성·덕둔홀·고곡·진서·상산 등 이름
북부 언진산맥, 동부 아호비령 산맥이 뻗어내린 곳.
양대 산맥을 따라 선바위산(1,106m)·명지덕산(909m)
덕업산(1,017m)·대각산(1,278m)·구봉산(906m) 등.
대동강 예성강 지류인 곡산천·대각천·길동천 등
30여 하천이 있고 곡산천 중류 연안에는 곡산 분지.
논보다 밭이 많고 옥수수·쌀·밀·콩 등이 생산되고
산이 많아 소 양 축산업지대이자 중석·아연·납 자원.
특히 중석은 우리나라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였다.
'옛부터 산중삼읍(山中森邑)이라 불릴 만큼 오지.'
이저 신덕왕후 강씨와 관련된 용연(龍淵),
태조 이성계가 말을 타고 달렸다는 치마도
해서금강이 뛰어난 명승지로 알려졌던 고장.
.................................................
남해 고속도로를 통해 광주 광역시와 쉽게 연결되는 곡성.
곡성읍·오곡면·삼기면·석곡면·목사동면·죽곡면·고달면·
옥과면·입면·겸면·오산면 등 1개읍 10개면 125개 동이 있다.
군청 소재지는 곡성읍 읍내리. 면적 547.01㎢,
인구 35,459(2003), 인구밀도 64.8명/㎢(2003).
섬진강·보성강·옥과천 등을 낀 선사 문화 유적지.
문헌상 백제 욕내군(欲乃郡)이 설치되었던 첫 기록.
삼국통일 후 757년 곡성군으로 개칭되어 무주(광주)에 속.
이때 동복현·구복현·부유현 등 3개의 영현을 거느렸던 곳.
9세기 중엽 혜철(惠哲)이 이곳에 선종 태안사 개창.
고려초 곡성은 승평부(昇平府:순천)의 속군이 되고
1018년에는 나주에 예속되었다가 이조 때까지 독립 현
1914년 면으로 병합된 '옥과'는 백제 때 과지현(果支縣)
과지현은 757년 옥과현, 고려초에 추성군(담양)의 영현
1018년 보성군에 예속, 1172년 곡성과 옥과에 감무 설치.
고려말 왜구 침입으로 읍이 함락되자
곡성은 치소를 동악산 아래로 이전했다.
1413년 곡성과 옥과에 현감이 파견
이조 말까지 계속 행정체제가 유지.
임진왜란 때에는 남원부에 잠시 합속.
1895년 군으로 바뀌었으며,
1910년 옥과군은 창평군에 병합
1914년에 구례군 고달면과 함께 곡성군으로 이속
1979년 곡성면이 읍으로 승격했다.
자연환경
곡성군은 소백산맥이 곳곳에 지맥을 형성한 곳
동부에는 깃대봉·곤방산 봉두산 희아산 천덕산
군의 중앙과 서부에는 형제봉 작산 국사봉 등등.
섬진강이 북동부를 흐르다가 고달면 동산리에서 남류,
서부산지 옥과천과 순천 보성강이 섬진강과 합류한다.
옥과천 유역의 무창리,
섬진강 유역의 송전리·
장선리·대평리·승법리
비교적 넓은 평야가 발달했으며,
보성강과 그 지류에는 소규모 평야
산업·교통
총경지면적 99.33㎢ 경지율은 18.1%이다(1996).
농가수는 8,067가구, 농가 인구수는 2만 1,905명
양잠업과 소사육도 활발하고 과일 특용작물 생산지.
곡성군 왜성(矮性)사과는 옛부터 맛이 좋아 군의 명물
'압록리 섬진강 명물은 은어·쏘가리·황어·잉어.'
전주·순천·여수로 연결되는 전라선과 여수-남원 국도
전주-벌교를 잇는 국도, 정읍-화순을 잇는 군 서부 국도
1973년에 놓인 호남고속도로로 광주까지 40~50분 소요된다.
곡성읍 오곡면과 고달면 주민은 버스로 20분 거리.. 남원.
옥과면·입면·오산면·겸면 주민은 차로 1시간 거리 광주
석곡면·목사동면·삼기면·죽곡면 주민은 순천 생활권이다.
유물·유적·관광
전남 곡성군 동리산 태안사, 광자대사탑, 광자대사비
구원리 고인돌군·묘천리 고인돌군·입석리 선사유적,
옥과면 말무덤 등 유적 및 석곡면 돌실나이(삼베짜기)
민속놀이
정월 대보름 <곡성 액막이 놀이>
신승겸과 유팽로의 <말무덤전설〉
〈성덕산 관음사의 연기설화〉
<동락산 노래전설〉
〈산적 정갑산에 관한 이야기〉
민요로는 〈모심기노래〉·〈논매기노래〉<장원질소리〉
그밖에 <이야기 노래>·<풍뎅이 노래> 등이 전해져온다.
특히 은어회는 이곳의 별미로 알려져 있는데,
여름철에는 하루 1만여 명의 피서객이 모인다.
태안사(泰安寺)는 신라 선문9산(禪門九山)의 하나이며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찰로서 경내에 많은 유물
성덕산 관음사, 동악산 도림사 등도 유명한 여름철 관광지
교육·문화
이조시대에는 옥과향교·곡성향교가 있었으며,
근대 교육기관으로 1910년 공립 곡성보통학교
심청전.
'심청전 배경은 어디일까?'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심청 몸을 던졌다는. 임당수
황해도 장산곶 몽금포 앞바다
심청전 문화적 배경은 효녀
이조시대 유교관념 정신세계
심청이 연꽃에서의 부활
불교문화와 유교관의 혼합.
............심청이 팔려가는 대목..............
"...범피중류(泛彼中流) 둥덩둥덩 떠나간다.
삼상(三湘)의 기러기는 한수(漢水)로 날아든다.
장사(長沙)를 지나갈 가태부(賈太傅)는 간 곳없고,
굴삼려(屈三閭)의 어복충혼(魚腹忠魂) 무양(無恙)도 하시던가..."
.................................................................
삼상(三湘)은 호남성 임상현 동정호로 흘러드는 강이름.
"삼상의 기러기가 한수로 날아든다"= 동정호 철새 기러기
하여, 심청가 배경은 양자강 북쪽에서 흘러드는 한수(漢水)
'장사(長沙)'는 지금의 湖南省 長沙市를 말하고
소수(瀟水), 상수(湘水)가 흘러드는 동정호 남쪽
가태부는 가생(賈生)으로 하남성(河南省) 낙양사람.
..........................................................
"...황학루(黃鶴樓)에 당도(當到)하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오 ~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州)는
이태백(李太白)이 놀던 데요 ~
심양강을 당도하니 백락천(白樂天)
일거후(一去後)에 비파성(琵琶聲)이 끊어졌다..."
..............................................................
"黃鶴樓"는 호북성 무창현, 서쪽 黃鶴山에 있는 누각.
日暮鄕關何處是 = "해는 저무는데 고향은 어디인가?"
"白鷺州"는 강소성 남경시 서쪽 양자강에 있는 모래섬.
'심청전 실제 배경무대는 중국 양자강과 한반도 서해.'
심청전은 한반도 옛 민족의 이동경로를 알려주는 듯.
양자강, 전남 곡성, 황해도 곡성을 잇는 옛 무역항로.
심청전 무대는 각각 달라도..뿌리가 같은 민족의 설화.
...................심청전.............................
작자 연대 미상 고전소설이자 판소리 12마당 중 하나.
현재 경판 4종, 안성판 1종, 완판 7종, 필사본 62종.
줄거리.
대명 성화연간 남군 땅에 심현과 정씨부인이 살았다.
심청이 3살때 정씨 부인이 죽고, 심현은 눈 먼 봉사.
심청이 자라서 눈먼 아버지를 부양하던 어느날이었다.
심청을 마중나가던 심현이 물에 빠졌는데
개법당 화주승(化主僧)이 그를 구해주었다.
심현은 고마워 공양미 300석을 시주하기로 약속했다.
심청은 남경 상인에게 공양미 300석을 받고 몸을 팔아
인단소 물에 던져지자 선녀가 심청을 용궁으로 데려갔다.
용왕으로부터 전생과 미래의 운명을 듣게 된 심청.
용궁에서 어머니를 만난 뒤, 다시 인단소에 이른다.
이때 남경상인들이 돌아오다 인단소 연꽃을 발견해
왕에게 바치자, 왕은 연꽃속 심청을 왕비로 맞는다.
심청은 왕을 도와 선정을 베풀게 했고
아버지를 만나려 맹인잔치를 열도록 권유
맹인잔치에서 딸을 만난 심현은 기뻐 눈을 뜬다.
심현은 호부상서 겸 대사마 초국공에 제수되었고
좌승상 임한의 딸과 혼인후 망월산에 사찰을 중수
그뒤 심청은 3남 2녀를 두고,
심현은 2남 1녀를 두고 산다.
심현이 75세에 병을 얻어 죽자,
임부인이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심청은 부모를 고향에 정부인과 나란히 묻은 뒤
3년상을 마치고 죽으니, 이듬해 가을 왕도 죽었다.
심현의 두 아들은 과거에 급제해 문벌을 빛냈으니,
이 모두가 심청의 덕행 때문이라는 후일담이 있다.
....................................................
...............
심청의 바닷길.
................
'심청전’속 인당수, 용궁, 연꽃 등의 내용들
심청전은 바닷가 주변의 이야기를 소설화한듯.
심청이 살던 마을은 전라남도 곡성이었다는 설.
심청은 단지 소설 속의 인물일까?
아니면, 실존했던 사실 속 인물일까?
심청의 바닷길을 따라 추적해보기로 하자.
섬진강변 전라남도 곡성의 작은 마을, 송정리.
심청이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믿고 있는 주민들.
이 동네의 한가운데 우물이 하나 있는데,
심청이가 마을 아낙들에게 젖얻어 먹던 곳
가뭄에 마르지 않는 이유는 심청의 효심 때문
'송정리 주민들은 왜 그렇게 믿고 있을까?'
곡성과 멀지 않은 송광사에 송정리 주민들
심청이 실존 인물이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
관음사 사적기에 효녀와 맹인 아버지의 이야기.
내용은 심청전과 거의 같은데,
여주인공이 원홍장이라는 처녀.
관음사는 원홍장이 보내온 불상을 모셔 창건한 절.
중국으로 간 원홍장이 불상을 고향에 보내온 3 세기.
그러니까 원홍장은 지금으로부터 1700년 전의 인물.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산자락 관음사
관음사는 약 1700년 역사를 간직한 사찰.
소설 속의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고
원홍장은 중국으로 무사히 건너갔다.
원홍장이 불상을 보냈다는 중국 절강성
우리나라 곡성과는 엄청나게 먼 바닷길.
절강성 보타도 앞바다에 신라초라는 바위.
신라 상인들이 관음상을 싣고 가려다
이 바위에 부딪혀 좌초되었다는 전설.
원홍장이 살던 3세기경에는 중국과 상당한 교류
중국 상인들은 하필 내륙의 곡성까지 들어왔을까?
심청마을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검붉은 담.
비만 오면 녹물이 흘러내린다는 돌담,
돌담을 쌓은 돌들이 철 성분을 다량 함유
중국 상인들이 내륙 깊숙한 곡성까지 온 이유
바로 철 광석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당수는 과거 뱃사람에게 두려움의 대상.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최대의 표현은 인신공희.
'사람을 제물로 삼았던 일이 실제로 있었을까?'
중국가는 길목인 위도와 죽망동 일대 인신공희 흔적
인신공회는 중국과 한반도를 오간 상인들의 옛 풍습.
백령도와 부안 외에도 심청 설화나 지명이 많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몇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해상교통과 연결된 곳에 오래된 마을과 절이 있는 점.
내륙 역시 과거에 바다였거나
강을 통해 바다와 이어지는 곳.
심청전은 뱃길로 이어진 중국과의 교류역사
3세기 곡성 심청마을은 가락국의 영역이다.
심청의 바다길은 철기시대 철의 무역 항로.
용궁.
...............용궁 설화(龍宮說話)......................
수중 세계의 왕궁인 용궁이 등장하는 설화.
〈삼국유사〉〈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설화
용궁은 환상적인 바다 밑의 이상향(理想鄕)
삼국유사에 해룡에게 납치되었던 수로부인
바닷속에 칠보궁전 음식이 맛있었다는 내용
진성여왕 때 거타지가 서해 괴물을 퇴치하고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가
고구려 권신에게 들은 구토지설(龜兎之說)
즉 토끼가 거북의 감언이설에 속아 용궁에 갔다가,
병든 용녀를 위해 자신의 간을 약으로 쓰려고 하자
간을 꺼내두고 왔다고 속여 위기를 탈출한다는 내용.
훗날 용궁설화는 어부나 행인이
잉어나 자라 등을 구해주고 나서
용궁에 초대되어 보물을 얻는 설화.
옛부터 한반도에는 수많은 용궁설화.'
.........................................
남해에 거제 해금강이 있다면
서해에는 제2 해금강., 두문진
백령면 연화3리 해안지대..두문진.
선대바위 촛대바위 코끼리바위 병풍바위 장군바위 등
기암절벽이 늘어서 있으며 바다와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
유람선을 타고 관람하는 여행객들은 연신 탄성을 내뱉는 곳.
특히 선대바위는 고려 충신 이대기가 '백령지'를 통해
늙은 신의 마지막 걸작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비경.
또 백령도는 이조 시대의 소설 심청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심청이가 공양미 삼백석을 받고 몸을 던진 인당수
용궁에서 연꽃이 흘러온 곳이 바로 백령도 앞바다.
이 곳을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2층 건물., 심청각
건물 안에는 심청전과 관련된 갖가지 자료가 전시.
용기포구 남서쪽과 남동쪽 해안의 사곶 천연비행장
이탈리아와 함께 세계에서 단 두 곳인 특이한 지형.
해변 모래사장이 콘크리트만큼 단단한 천연 비행장.
과거 한국전쟁 당시 UN군이 천연비행장으로 사용.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된 콩돌해안
모래 대신 콩 크기 둥근 돌이 깔려 있다.
맨발로 밟으면 감촉이 좋은 해수욕장이다.
용궁은 전설속 '바람의 나라.' 풍이족의 궁전.
'신라의 영역' 진한은 풍이족이 세운 바람의 나라.
청동기시대 남해 저지대 민족에서 유래된듯 추정된다.
'신라시대부터 바다속 이상향으로 여겼던 용궁.'
인간이 꿈꾸는 하늘나라 이상향을 천당이라 한다면,
수궁 열락과 풍요를 갈망하는 환상속 이상향은 용궁.
용궁은 인간 세계와 동떨어진 바다 물속이나 외딴 섬.
바다속 신비의 세계를 다스리는 용왕이 산다는 용궁.
용왕은 그 곳에서 선녀의 옹위를 받으며
수국(水國)을 다스리는 이상향의 통치자.
비를 관장하고, 물고기를 다스리는 초인간적 존재
옥황상제 힘을 빌리기 위해 하늘에 오르기도 한다.
용궁은 신선사상, 또는 불교사상과 혼합되어 있다.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기 이전 용에 관한 민간신앙
외래종교인 불교와 결합한 흔적이 곧, 용왕당(龍王堂)
용은 그 보답으로 절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한다는 믿음.
정치적으로 용 신앙을 숭배하던 정치세력인 신라.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수용하며 용왕설화가 성행.
이조시대엔 도교의 영향을 받아 용왕 설화가 만연.
'심청전은 용왕설화가 빚은 이조시대 문학작품.'
우리나라 용왕설화는 삼국시대 신라에서 성행한듯.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가락국에서 유래된듯.
신라 옛 영역 용궁현은 원래, 가락국의 영역이었다.
.....................용궁현(예천읍).....................
경북 북부 내륙의 농산물 집산지인 교통의 중심지
예천읍·용문면·감천면·개포면·보문면·호명면·
상리면·유천면·용궁면·지보면·풍양면·하리면
등 1개읍 11개면 173개 동. 군청은 예천읍 노상리.
면적 660.84㎢, 인구 53,816, 인구밀도 81.5명/㎢.
예천은 예천군과 용궁현이 합해 이루어진 행정구역.
예천군은 삼국시대에 신라의 수주촌(水酒村)이었는데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에 예천군으로 개명.
안인현(安仁縣)·가유현(嘉猷縣)·은정현(殷正縣)·
영안현(永安縣)·감천현(甘泉縣)·축산현(竺山縣)
6현을 관할했고 고려초 940년(태조 23) 보주(甫州)
1018년(현종 9)에 안동부에 속현으로서 병합되었다.
마제석기가 출토된 용문면 어림성터 고인돌군
예천읍 백전리에는 삼국시대의 석실분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 두운이 창건한 용문사,
상리면 명봉리의 명봉사, 감천면의 수락대,
보문산의 보문사, 풍양면 청곡리의 삼수정 등
해마다 봄철이면 왜가리떼가 몰려와
풍양면 우망리 일대가 장관을 이룬다.
....................................................
.......................
용궁 김씨 (龍宮金氏).
........................
1 시조 : 김존중[金存中]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용궁(龍宮)은 경북 예천군에 속한 지명으로,
신라 시대에 축산현,·원산현으로 불리웠으며,
고려 초 용주라 하다가 1012년 용궁현으로 개칭.
김존중은 신라 경순왕 4남 대안군(김은열) 8세 손
인종 때 태자시학, 1146년 의종 때 좌우승선 벼슬
이어 전조를 겸하여 문무백관의 선권(選權)을 장악.
태자소부, 이부상서, 정당문학을 거쳐 용궁군(龍宮君)
하여, 후손이 김존중(金存中)을 용궁김씨 시조로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신종때 예부전서 지철(之鐵),
판도판서를 역임한 지록(之錄)형제와 대장군., 우(祐)
우(祐) 아들 진(璡)은 이성계 원군과 합세 모반군 평정
순조 때 성리학자 호성(昊星), 독립운동가 홍권(弘權)
국현(國鉉) 등은 항일사로 명성을 날려 가문을 빛냈다.
1985년 용궁김씨(龍宮金氏)는 총 3,327가구, 14,853 명
3. 집성촌
경남 산청군 차황면 장위리
경남 하동군 양포면 우복리, 적량면 관리
충남 서천군 서천면 오석리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영천리
.....................
용궁 최씨 (龍宮崔氏)
......................
1 시조 : 최 현[崔 玄]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용궁(龍宮)은 경북 예천군에 속한 지명,
신라시대 축산현, 원산현이라고 하였는데
고려 성종때 용주, 현종 때 용궁(상주 편입)
1914년 군을 폐하고 신하면은 의성군,
나머지는 예천군, 그 일부지역은 용궁면
용궁최씨(龍宮崔氏) 시조는 고려 때 최현(崔玄)
최현은 평리부 밀직사를 지냈으며
아들 안도(安道)는 전리상서를 역임
손자 유(濡)는 군부판서로 왕을 호종.
1399년 조적의 난 때 일등공신 취성군에 봉
공민왕때는 삼사사로 용성부원군에 진봉되고
후손들이 해주최씨에서 분적하여 본관을 용궁.
그외 이조 밀직사사 성우(成雨)는 유(濡)의 아들.
성우의 후손 세담(世潭)이 훈도(訓導)를 역임하여,
첨정(僉正)을 지낸 알과 함께 가문을 빛낸 용궁최씨.
1985년 남한에 총 195가구, 804명 거주.
집성촌 : 경북 군위군 군위읍 사직동
.........
용궁사
.........
수평선 거머쥔 부처님 해룡 타고 오시네
바다, 용, 부처님이 하나된.,해동 용궁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바람처럼 속으로 말하라.' - 나옹화상 -
고려 공민왕의 왕사 나옹화상.
630 여년 전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사람들에게 말없이 살라 가르치는 것 같고,
허공은 언제나 티끌 하나없이 텅 비어 있다.
해동 용궁사 들머리에 세워진 12지신상
용궁사 가는 길목 곳곳에는 황금빛 가을
부산 기장군 기장읍 시랑리 416 - 3번지
이곳에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소원
탐방객 저마다 소원을 기원하는 모습들.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3대 관음성지(觀音聖地).,해동 용궁사.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300년이 흐른 1930년대 초, 보문사를 다시 세운다.
974년 정암(晸菴)스님이 주지가 되어 올린 백일기도
백일기도 마지막 날, 정암스님 꿈에 나타난 관음보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 해동용궁사(海東龍宮寺)라 명명
그때부터 이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곤 했단다.
................................
.................................
바다 위에 조각배처럼 떠 있는 법당
법당으로 들어가는 108 계단에 수평선
마치 바다 속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 같다.
바다 위에 섬처럼 떠도는듯한 해동 용궁사
춘원 이광수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용궁사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