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새보기의 풍경
임병식 rbs1144@hanmail.net
계절이 처서 백로를 지나 추석이 가까워오면 공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코끝에 닿은 청량함은 벼가 익어 가는 들녘의 누런빛만큼이나 확연해 졌다. 때맞추어서 코스모스, 무궁화가 피기 시작하고 보이지 않던 고추잠자리도 홀연히 나타났다. 달라지는 변화는 이 뿐 만이 아니었다. 너른 들녘에 농막이 세워졌다. 내가 바라본 5,60년대의 농촌의 풍경이다.
나는 이때의 풍경을 마냥 잊지 못한다. 농막에 걸터앉아 새를 보던 일이 강렬하게 뇌리 속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풍요로움을 느끼면서도 긴장을 많이 하던 시간. 하지만 그 때 만큼은 먹을 것이 넘쳐났다. 쌀뜨물에 우려낸 감또개며 뒷산에서 따온 풋밤을 곁두리로 먹고. 콩서리라도 하고 싶으면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우면 되었다.
그러나 새 쫓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오직 한해 농사의 성패가 여기게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잠시도 한눈을 팔수가 없다. 그 만큼 새때는 기승을 부렸고 고지를 점령하려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여서 잠시도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새떼와의 전쟁이기도 했고, 자기 논을 지키느냐, 다른 곳으로 몰아내느냐 양자택일을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내지르는 소리는 다급하고 처연했다.
"후여 후여"
외치는 소리와 함께 후루룩 우박 떨어지듯 하는 참새 떼의 날개 짓. 그 풍경은 극도로 긴장감과 함께 높은 음조로 울리는 음향이 온 들녘을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는 결코 한가하거나 여유 있는 가락은 아니었다. 피 땀 흘려 지은 농사가 자칫 파농으로 어어 질 수도 있기에 절규에 가까웠다.
벼는 익기 전 쪼이고 나면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다. 허연 백수만 남게 된다. 그래서 곳곳은 전쟁터가 되고 결투가 벌어졌다. 제 놈들이 사람을 이길까마는 새떼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녀석들에게도 먹은 것은 생존의 문제여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침범을 막아내는 싸움은 처절하였다.
' 후여, 후우여-'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는 차라리 애조에 가까웠다. 그런 소리가 한동안 온 들녘을 공명시키며 퍼져나갔다.
나는 일상이 무료해지거나 가슴 한 구석이 공허해질 때면, 농막에 앉아 새를 내쫓던 일을 회상한다. 그러면서 나직이 '후여' 를 외쳐본다. 그러면 한 가닥은 밖으로 퍼져 나가고, 다른 한 가닥은 여전히 귓전에 맴도는 걸 느낀다.
당시 참새 떼는 오후에 극성을 부렸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는 때여서인지, 이때가 되면 공약을 감행했다. 그래서 이때의 들녘은 긴장감이 넘쳤다. 외치는 소리는 날카로워지고 커졌다.
우리 마을은 좀 특이한 형국을 하고 있다. 마을이 풍치산과 중천골, 안산에 둘러싸여 분지형태를 이룬다. 해서 새 쫓는 소리는 큰 공명이 되어 울렸다. 그런 까닭에 뙈기를 치면 ‘따꿍’하고 울리는 소리가 마치 포탄 터지는 소리를 냈다.
새쫓는 일은 주로 노약자나 아이들의 차지였지만, 그 노동의 강도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이른 봄부터 시작하여 땡볕 아래 김매기를 거쳐 가꾸어 놓은 벼농사를 막바지에 자칫 새떼에게 먹힐 수도 있는 일어어서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새떼가 출현하면 온 들녘은 긴장감이 높아진다.
"후여 후여 후우여-"하는 소리로 가득했다.
4.50년대 우리나라 경제는 쌀 위주로 이루어졌다. 그만큼 쌀농사는 중요하게 받들어 졌고 쌀 증산은 최대의 과업이었다. 거기에 훼방꾼이 늘 쥐와 참새였다. 해서 저녁이 되면 온 농가는 쥐약뿌리거나 쥐덫을 놓았다, 그러면서 낮에는 새보기에 집중했다. 그 결과 쥐는 어느 정도 퇴치의 성과가 있었으나, 참새 떼를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워낙에 수효가 많은 데가 끈질긴 역습작전 때문이었다.
몰려올 때마다 수십, 수백 마리가 공격해 오니 내쫓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놈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기습을 감행했다. 그럴라치면 맞서서 응전이 개시된다. 소리를 내지르거나 깡통을 두들기거나 뙈기를 친다. 그래도 새떼들은 벼 논 위를 낮게 비행하다가 감시가 소홀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돌격을 감했다.
이 때는 이미 늦다. 순식간에 먹어치우기 때문이다. 여간 약고 영리한 놈들이 아니다. 녀석들을 보면 목표지점에 바로 내려앉은 법이 없다. 공중에서 서너 바퀴 선회하다가 허술한 어느 한 곳을 택해 집중 공략을 한다. 이때가 최대 위기가 된다. 방치한 논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눈을 떼지 않고 지키는 농가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나는 새를 보며 뙈기치기를 많이 했다. 팡개를 이용하여 흙을 투척하기도 했지만 소리를 크게 내는 데는 뙈기만한 것이 없다. 태를 머리위에서 대여섯 바퀴 빙빙 돌린 다음 옆으로 내리치면 '따쿵'하고 마치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를 들으면 새들을 기겁하며 날아간다.
그래도 가끔은 대열을 탈출하여 각개약진을 하는 녀석들이 있는데 이놈들이 살금살금 다가오면 이때는 맞춤형인 팡개를 쓴다. 그러면 잔불이 꺼지듯 사태는 마무리가 된다. 팡개는 대나무를 4,50센티 크기로 잘라서 만드는데, 고을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팽매라고도 하고 팽개라고도 했다. 우리고장에서는 팽매라고 불렀다. 이것의 제작법은 끝부분에 흙이 잘 박히도록 십자로 칼집을 내놓은 비교적 단순소박한 기구다. 간단한 것치고는 효과를 발휘했다.
절박한 가운데 악전고투하며 새 떼를 내 몰고 나면 농막에는 고요가 찾아온다. 이때는 집에서 우려서 가지고 온 감을 꺼내 먹거나 잠자리를 잡아서 꼬리에 지푸라기를 매어 날리며 놀았다. 이때 그윽이 바라보는 하늘은 더없이 청명하고도 고왔다.
그런 것이, 오늘의 하늘이라 해서 다를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푸른 하늘과 높이 뜬 새털구름을 좀체로 구경하기가 어렵다. 이유는 공기가 오염 된데다 맑은 동심도 사라져 버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 시절이 많이 생각나고 그렇게 새막에 앉아 새 쫓던 일이 그리워한다. 그래서 가끔 나는 혼자서 심심파적삼아 조용히 ' 후여-후여'를 외쳐본다. 그렇지만 그것은 메아리도 없고 공허에 가까울 뿐이다. 그런 것은 무엇보다도 나이를 많이 먹어 버린 데다 농촌현실이 쇄락해져버린 때문이 아닌가 한다.(1999 )
첫댓글 이제는 '옛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아마 요즘 아이들은 참새 쫓는 이야기를 '고전동화'로 읽고 있을 듯합니다.
총소리와 흡사했던 태 치는 소리가 그립습니다.
가을이 되어 벼가 누렇게 익어가면 메뚜기도 함께 익어가던 그 시절은 추억이기에 그리운 것만은 아닐 테지요.
정말 이제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메뚜기 말씀을 하시니 생각이 나는데, 메뚜기는 이른 아침이나 석양녘에 잡아야 잘 잡혔지요. 대낮에는 움직임도 빠를뿐 아니라 꿰미에 꿰놓으면 목이 떨어지곤 했지요.
문예사조발표. 1996수필문학발표.
2017 그린에세이 9.10월호
후여 후여~ 참새 쫓는 풍경이 정겹네요. 저는 도시에서 살다보니 그런 추억은 전원일기 TV연속에서나 볼 수 있었고 새총으로 참새를 잡아본 경험은 있네요. 제비, 참새..지금은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후여후여는 전라도 지방에서 주로 쓰고 다른 고장에서는 훼이 훼이 하고 하더군요.
나는 전라도 지방의 후여후여가 더 정답다고 생각합니다.
지방마다 참새쫒는 소리도 다르군요.
후여 후우여 후여 후우여- 구슬픈 단조 가락 같은 느낌도 나네요.. 오늘 아침에 김상용님의 백리금파에서도 새쫒는 소리가 우여 라고 씌여 있더니 계절이 주는 들녁풍경이 그려지네요...
공감이 느껴지면서 정겹네요.
다른 고장에서는 대부분 훠이훠이하는데 전라도인 김제지방에서도 그렇게 소리냈다니 작품을 고증받은 기분이 되어 기분이 좋네요.
다른 고장에서는 대부분 훠이훠이하는데 전라도인 김제지방에서도 그렇게 소리냈다니 작품을 고증받은 기분이 되어 기분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