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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필! 나 대학로 몽마르뜨 까페에서 판 돌리던 거 생각나니? 나 고삐리 때 민쯩 위조하구, 가발 쓰구 나이 속여서 판돌이 했자너.
내가 공부는 조또 쥐뿔만큼은 못 해도 음악 선곡 하나만큼은 끝내줬잖아. 그 때 이 엉아 인기 정말루 대단했다. 기지배들이 노래 신청하면서 슬쩍 나한테 앵겨서 뻐꾸기 날리구 난리도 아니었지.
근데 넌 그게 그렇게 아니꼬왔냐, 사내 새끼가 꼴에 질투는. 사실, 생긴 건 까놓고 말해서 내가 니보단 훨 낫지 안 그래? 아, 자식. 그래서 너 주먹빨 하나 믿고 깔치들이 나한테 신청하는 노래 죄다 못 틀게 훼방놨잖아. 김승진이나 박혜성보단 모던 토킹이나 듀란 듀란, 웸이 최고라고 협박하면서... 하여튼 짜식 웃겼어.
근데 왜 갑자기 그 때 얘기 하냐구?
내가 오늘 영화 <품행제로>를 보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너랑 그 시절 얘기가 하고 싶어서 그런다, 왜?
필, 당 영화는 말이야 우리 고삐리적 80년대를 배경으로 당시 고딩들을 쥔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청춘영화야.
그래서 당 영화는 이 고삐리들이 펼치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풀어 놓다가 어는 순간 결정적인 사건을 터뜨리고 우리의 쥔공들이 이를 겪으면서 결국에 정신적으로 성장한다는 청춘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문덕고 짱 먹는 중필(류승범 분)은 민희를 보고는 한 눈에 뻑가. 자신과 정반대되는 범생 삘이 맘에 들었던 거지. 민희 고년도 물론이고. 그래서 얘네들 풋고추같이 순수한 사랑을 나누게 되지.
근데 상만이(김광일 분)라는 새끼한테서 도전이 들어와. 주위에서는 얼렁 한 판 붙으라고 난린데 민희는 싸움하지 말라며 중필을 말리고. 그리고 결국엔...
어때, '청춘'하니까 괜히 그 때 생각나서 심장이 뜨거워지고 당시의 열정이나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 거 같지. 뭐, 꼴리기만 한다고, 아 그 새끼 여전히 밝히네.
근데 필, 당 영화의 이야기 중 짱을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는 설정은 굉장히 마초적인 냄새가 많이 풍기지?
지금도 그런지 잘 몰겠는데 그 당시 남학교에서 이 캡짱 자리는 굉장히 중요한 거 아니였냐. 그래서 허구헌 날 학교에서는 싸움질이 횡행했고 그게 또 큰 구경거리가 되고.
그래서 당 영화 속 중필처럼 짱 자리에 집착하는 모습은 80년대가 남성에게 요구했던 비뚤어진 시대적 이상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설정이라고 보면 돼. 요즘은 말캉말캉한 꽃미남이 각광받는 시대지만 그 때는 사실 남자다운 것이 미덕이었잖아.
때문에 당 영화의 80년대라는 배경이 갖는 의미는 더욱 특별하지. 그래서일까, 당 영화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의 완벽할 정도의 당시 배경 묘사야.
너 생각나지, 수업 파하자마자 미장원에서 핀컬파마하고 여자 꼬시러 동대문 롤러 스케이트장 갔던 기억. 이처럼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상황까지 기억해내 재현한 모습은 당시를 살았던 이들에게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당 영화의 마초이즘이 그 배경 속에서 더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것일테고.
필, 물론 이 같은 80년대의 배경 묘사는 올해 개봉했던 <해적, 디스코왕되다>에서도 꽤 훌륭하게 보여준 전례가 있어, 너도 알지?
근데 당 영화가 이들 영화와 완성도라는 측면에서 한 똥꼬 더 나아간 점이 있다면 배경 묘사가 단순히 보여지는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 속에 그것(배경)이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필, 내 말이 잘 이해가 안되니? 짱구 안 돌아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구만. 그럼 내가 예를 하나 들어서 설명해 줄테니까 잘 들어라, 응.
중필을 짝사랑하는 나영(공효진 분)이 그에게 물어. "<스잔>이 좋냐? <경아>가 좋냐?" 그러자 중필은 단호하게 대답하지. "<스잔>".
이는 "김승진이 부른 <스잔>을 좋아하는 민희를 사랑하니 아님 박혜성의 <경아>를 좋아하는 나를 사랑하니"라는 말을 당시에 존나게 유행하던 노래 제목에 함축시킨 아주 시적인 물음인데 이 부분이 별게 아닌 거 같아도 난 별거라고 봐.
왜냐, 시나리오까정 담당한 조근식 감독의 재치를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배경으로 사용되는 문화적 코드를 단순히 보여주는 역할로만 한정시켜 소모하지 않겠다는 의지이기 때문이쥐.
필, 당 영화는 중필과 같은 반 아이들이 한 책상에 둘러 모여 그의 무용담에 대한 소문을 썰하는 나래이숑으로 시작하고 있어. 그리고 감독은 이 부분을 만화적인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CG를 적극 활용하여 매우 과장되게 구성하고 있지. 때문에 중필도 그렇고 상만도 세상에 얘네들 이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 같은 영웅적 아젠다가 팍팍 흐르더라고.
널부러진 수십구의 태권부원들 앞에서 후까를 잡고 있는 중필의 만화적 면모를 보라! |
그래서 난 중필과 상만이 한 바탕 뜨면 정말 불똥 튀겠다 기대를 했는데 웬걸, 둘이 결국 붙긴 하는데 멋지긴 개뿔이... 아주 실망인 게 소문과 달리 존나 초라해. 그냥 개싸움이야. 우리가 현실에서 엉겨 붙어 뒹굴고 싸움하는 거랑 틀릴 거 하나 없더라.
그니까 결국 관객도 나중에야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감독은 반 친구들의 썰에 의해 묘사되는 중필과 상만의 영웅적인 모습을 CG를 통해 과장되게 구성함으로써 소문의 속성을 보여주는 거지.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몰겠는데, 80년대는 살기가 그리 좋았던 시절은 아니었잖아. 전대갈 군부시절에 자유는 억압받아, 거리엔 맨날 화염병, 삶은 또 얼마나 조까텄냐. 결국 80년대하면 어둡고, 암울하며, 칙칙하고... 뭐 조또 그런 단어들이나 연상되는 시절이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그 때를 돌아보면 그런 씁쓸한 기억들보다는 청계천에서 뽀르노 테입 야매로 사 가지고 와서 플레이 했더니, 살들의 향연은 온데 간데 엄꼬 <전원일기> 나와서 뒤집어 졌던 그런 우스게스런 기억들이 더 머릿속에 깊게 남아 있잖아.
그래서 난 당 영화 속 실제 싸움은 초라한데 반해 소문의 과장된 싸움 묘사는 존나리 유쾌하게 보이는 이 부분을 단순한 재미 차원으로 넘길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
얘기했다시피 실제 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당시 현실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더 느꼈을 꺼란 말이야.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어떠냐? 그 알싸한 '추억'이라는 감정 때문에 그 때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잖아.
바로 이와 같은 이중성의 심리를 당 영화는 소문과 현실의 상이한 묘사로 반영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관객들이 <품행제로>에 쉽게 몰입이 되겠니? 안 되겠니? 되겠지.
또 하나. 이를 통해 드러나는 점은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들에 비해 특히 그 때를 더욱 유쾌한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당 영화의 감독이 1968년 생이라는 부분에서도 단적으로 증명이 되고.
게다가 올해는 <정글쥬스>부터 해서 <일단 뛰어>, <해적, 디스코왕되다>, <남자 태어나다>, <몽정기> 등등 유달리 80년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거나, 청춘을 주제로 했던 영화들이 존나 많이 개봉하지 않았니.
이게 넌 뭘 의미하는 건지 아냐? 당연히 몰겠지. 울나라 영화계의 중심이 이제 2~30대의 젊은 감독에게로 넘어가는 추세라는 거지, 안 그러냐 필?
필, 당 영화가 주는 재미의 좌청룡으로 80년대의 리얼 묘사가 군림하고 있다면 우백호는
단언코 중필 역을 맡은 류승범이라고 할 수
있어.
중필은 당 영화에서 거칠 것없이 주먹 절라 잘 휘두르는 문덕고의 캡짱이자 한편으론 그에 어울리지 않게 사랑 앞에선 행동이 뻔데기 주름살마냥 쫄아들고 말도 더듬는 학생으로 등장하고 있지.
그래서 한 쪽에선 남성성을 강하게 뽐내다가 민희만 보면 그런 모습이 화악 사라지는 야누스적인 면모에는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을 지경이야.
특히 기타를 쥐 뜯으면서 민희가 좋아하는 <스잔>을 불러 제끼다 맘대로 되지 않자 씨바거리면서 발라당 자빠져 버리는 연기는 그런 속 다르고 겉 다른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 훌륭한 연기였어.
그 정도로 류승범은 당 영화에서 양아스럽고 동시에 순진스러운 중필 역을 아주 깔끔하게 소화해 내고 있다 그 말이지.
그에 반해 임은경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보여줬던 마네킹적인 연기력에 비해 월등히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게 사실이야. 아직 스스로의 연기에 자신이 없다고 할까. 그래도 보기에는 정말로 좋았다는 거...헝...
하지만 그녀가 당 영화에서 주목받아야 할 건 연기력이 아니야. 필, 너도 알겠지만 임은경은 '신비의 띠띠엘 소녀'라는 닉네임을 가진, 시대의 첨단을 대표하는 연예인이 아니니. 근데 당 영화에서는 그런 이미지와 다르게 조영남스런 안경을 끼고 예전의 이미지와는 360° 공중제비 돈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기존의 이미지를 파괴해 버리는 감독의 재미난 인물설정으로 이해 할 수가 있어.
기억나는 얼굴 맞지? |
중필의 담탱이로 등장하는 철가면 역의 이창환도 그런 설정의 백미가 드러나는 캐스팅이라고 할만해. 이 배우는 박정희와 닮은 얼굴 때문에 TV 정치드라마에서 독재자 박통 역을 독점했었는데 그런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 속에 끌어와 억압적인 중필의 담임 역을 맡고 있는 거지.
이처럼 당 영화의 감독은 여러 부분에서 재미난 설정 및 연출을 보여주고 있어.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영화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승현과 진유영이 주로 출연했던 <얄개시대>類의 싸구려틱하고 흐리멍텅해 보이는 화면빨로 당 영화를 데코레이숑 하고 있으며 또한 중필과 민희 간의 심리묘사를 꺽어진 신발과 기타, 노래 등 소품을 이용해 표현하는 잔잔한 재미도 주고 있지.
그래서 배경묘사도 그렇고 당 영화를 보면 참, 준비가 탄탄히 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품행제로>가 조근식 감독의 입봉작이라고 하지...
근데 필, 너 내 스타일 알잖아, 몰라? 내가 칭찬만 늘어놓고 말 성격의 잉간이 아니라는 거. 잘 알면서, 자식.
당 영화 다방면에서 훌륭하고 재치 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긴 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게 다 좋다는 건 아니야. 먼저 당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랄 수 있는 배경묘사는 초반엔 <품행제로>의 약점으로도 작용을 하고 있어.
당 영화의 초반부는 학교-미용실-당구장-롤러장-디스코 텍 순으로 마치 추억의 성지 순례하듯 진행이 돼서 배경이 이야기를 뒷받침하거나 함께 보조하며 나아가는 게 아니라 되려 이야기가 배경에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너무 배경에 집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거지.
게다가 당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는 절라 익숙한 이야기라고 앞에서 썰 했잖아. 조느라고 못 들었냐? 이제 나잇살도 쳐 먹었으니 정신 좀 차려라 필.
짱 먹는 넘이 자신과는 정반대의 모범적인 뇨를 만나 러부를 하고, 그 와중에 시시각각 조여오는 싸움의 유혹을 피하지 못해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대신 여친을 실망 시키고 마는 그런 마초 스토리.
이거 영화 <친구>의 분위기도 연상되고 만화 <캠퍼스 블루스>도 연상되는, 책이건 영화건 자주 접하는 얘기잖아. 그래서 자칫 당 영화는 이야기보다 배경이 더 중심에 선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고 그럼으로 해서 싸구려 감상을 불러 일으킬 오해의 소지도 있다고 생각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당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공력에 비하면 그리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부분이라고 본다 나는. 그만큼 <품행제로>가 보여주고 있는 80년대의 재현 및 당시의 코드를 십분 활용한 이야기는 새로울 건 없지만 잊고 있던 기억을 끄집어 내 추억을 자연스럽게 되살려 놓는다는 점에서 새로움 이상의 큰 감정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지.
또한 그 시절을 겪지 않은 젊은 얼라들한테두 당 영화는 재미로 다가 올 수 있을 꺼다. 생소할 지 몰라도 그 배경이 주는 촌스러움과 지금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들의 신기함은 마치 할머니가 화롯불 앞에서 들려주는 미지의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가 있으니까 말이야.
어때, 필? <품행제로>를 보니까 그 시절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나지. 함께 봤으면 더 좋았을텐데 말이다...
그래도 난 이 영화로 인해서 너와 함께 한 그 때를 추억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우린 불알친구니까 너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을 꺼라 믿는다. 그리고 난 그 걸로도 충분하다고 보고.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은 바로 그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