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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몫돈' 마련하기 → '목돈' 마련하기
재테크의 출발은 무엇일까? 부동산·주식 투자를 위한 경제 지식을 쌓는 것도 아니고 잘나가는 펀드에 가입하는 것도 아니다. 전문가들은 저축을 첫손가락으로 꼽는다. 돈을 굴리려면 일단 종자돈을 마련해 놔야 한다는 것이다.
재테크의 기본이 되는 종자돈처럼 ‘한몫이 될 만한, 비교적 많은 돈’을 이를 때 ‘몫돈’이라는 사람도 있고 ‘목돈’이라는 사람도 있다. 무엇이 맞을까?
'아무리 수익률이 높은 상품에 가입했다 하더라도 수익률만 믿고 저축을 소홀히 한다면 몫돈 마련의 길은 좀처럼 당겨지지 않는다' '푼돈 모아 몫돈 만들기는 어려워도 몫돈을 푼돈으로 만들기는 쉽다'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있지만 ‘몫돈’이라고 써서는 안 된다. ‘목돈’으로 고쳐야 어법에 맞다.
‘목돈’을 ‘몫돈’으로 잘못 표기하는 것처럼 ‘목’과 ‘몫’을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몫이 좋은 가게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다' '백화점에서 몫이 가장 좋은 곳은 에스컬레이터 주변이다'와 같이 사용하지만 ‘몫’을 ‘목’으로 바꿔 줘야 의미가 통한다. ‘통로 가운데 다른 곳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중요하고 좁은 곳’을 이르는 말은 ‘몫’이 아니라 ‘목’이다.
‘몫’은 ‘여럿으로 나눠 가지는 각 부분’이란 뜻으로 '기업들이 일 년간 거둔 수익에 대해 주주들의 몫으로 일정 부분을 떼어 주는 것을 배당이라고 한다' '아이들 몫으로 주식 몇 주를 사서 직접 관리해 보게 하면 자녀들의 경제관념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와 같이 쓰인다.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다 → '난관'에 봉착하다
유지경성(有志竟成). 뜻을 지닌 사람은 어떤 ‘어려운 난관에 봉착해도’ 마음먹은 일을 이루고야 만다는 가르침이다. 하나의 뜻을 품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다가 힘겨운 상황에 처했을 때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다'는 말을 하곤 하지만 바람직한 표현이 아니다. '난관에 봉착하다'고 해도 충분히 의미 전달이 된다. ‘난관(難關)’이 일을 해 나가면서 부딪치는 어려운 고비를 이르므로 ‘난관’ 앞에 굳이 ‘어려운’이란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어려운 난국에서 벗어나다'도 마찬가지다. ‘난국(難局)’이 일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국면을 말하므로 '난국에서 벗어나다'와 같이 쓰는 게 바람직하다.
'연봉 상승, 승진, 이직, 자기 계발 등 직장인들의 새해 목표는 매년 거의 대동소이한 것으로 조사됐다'도 한자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같은 의미의 낱말을 겹쳐 쓴 예다. ‘대동소이(大同小異)’가 큰 차이 없이 거의 같다는 것이므로 ‘거의’란 단어를 빼는 게 자연스럽다. '직장인들의 새해 목표는 매년 거의 같은 것으로 조사됐다' '직장인들의 새해 목표는 매년 아주 비슷한 것으로 조사됐다'처럼 ‘대동소이하다’ 대신 ‘거의 같다’ ‘아주 비슷하다’를 써도 된다.
'2013년엔 주민들의 해묵은 숙원사업을 해결하겠다'도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숙원(宿願)’이 오래전부터 품어 온 염원이나 소망을 이르므로 어떤 일이나 감정이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해를 넘기거나 많은 시간이 지나다는 뜻의 ‘해묵다’를 넣지 않아도 된다. ‘주민들의 숙원사업을’이라고 해도 충분하다.
어떤 의미를 강조하거나 기존 단어의 뜻을 보완해 이해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면 겹치는 표현은 삼가는 게 좋다. '손을 놓은 채 수수방관하다' '독자 노선의 길을 걷다' '그대로 답습하다' 등도 그냥 '수수방관(袖手傍觀)하다' '독자 노선(路線)을 걷다' '답습(踏襲)하다'로 쓰는 게 자연스럽다.
‘희로애락’의 비밀
승패에 울고 웃으며,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다가도 한 번의 실수로 분노를 사기도 하는 운동선수들. 스포츠를 ‘희노애락’을 담은 인생의 축소판으로 부르는 이유다.
매 경기 운동선수들이 겪는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아울러 이를 때 흔히 ‘희노애락’이란 말을 쓰지만 ‘희로애락(喜怒哀樂)’으로 바루어야 한다. 여기에 사용된 한자 ‘怒’의 본음은 ‘성낼 노’ 자이므로 ‘희노애락’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지만 ‘희로애락’을 표준말로 인정하고 있다.
한자어에서 본음으로도 나고 속음(俗音)으로도 나는 것은 각각 그 소리에 따라 적는다는 규정 때문이다. 대개 ‘격노(激怒)’ ‘진노(瞋怒)’와 같이 본래 음대로 읽히고 쓰이지만 ‘희로애락’ ‘대로(大怒)’의 경우엔 오랜 시간 언중 사이에서 발음돼 익은소리(속음)인 ‘로’를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사람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일컫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경우도 ‘생노병사’로 사용해선 안 되지만 이유는 조금 다르다. ‘늙을 로(老)’ 자가 첫음절에 올 때는 ‘노인(老人)’처럼 두음법칙에 의해 ‘노’로 쓰지만 둘째 음절 이하에선 발음 그대로 ‘로’로 사용하는 게 맞다.
고문관과 짬밥
영화 '해안선'에 나오는 강 상병은 흔히 말하는 '고문관'이다. 어느 날 밤 경계근무 중 민간인을 간첩으로 오인 사살하고 그 공로로 포상휴가증을 받아들지만, 그때의 충격으로 의병제대를 한다. 그 뒤에도 부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미친 짓을 계속하고 급기야 모두가 미쳐 간다는 내용이다.
'짬밥 많은 선임병들이 조금만 도와주면 되는데 고문관이니 하면서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 같다'에서처럼 군대 얘기를 할 때 흔히 나오는 말이 '고문관'이다.
'고문관'은 미 군정시대에 한국의 국방경비대에 파견 나온 미 군사 고문관들이 한국어를 못하고 어수룩하게 행동했던 데서 유래한 것인데, 주로 군대에서 행동이 굼뜨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관심사병'이란 용어로 대체됐다.
'짬밥' 또한 '연륜'이나 '고참'을 의미하는 군대 속어다. 짬밥의 어원에 대해선 '먹고 남은 밥'을 뜻하는 '잔반(殘飯)'에서 유래했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지만, 짬밥의 뜻은 이제 그 어원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반증과 방증
박근혜 차기 정부에서 미래창조과학부가 정부 내 서열 2위가 될 것이라고 한다. 기획재정부가
1위, 교육부가 3위, 해양수산부가 맨 마지막인 17위다. 정부 부처들은 국무회의를 할 때 이 순서대로 앉고, 여러 장관들이 모였을 때 인사말도 이 순서대로 한다고 한다. 그리고 국무총리가 사고로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에도 이 부처별 순위에 따라 직무를 대행한다.
이렇게 미래창조과학부의 서열이 높게 잡힌 데 대해 언론은 “미래창조과학부가 새 정부의 핵심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서열 2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이 부처가 차기 정부에서 많은 권한을 갖고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맥에서 ‘반증’을 쓰면 뜻이 반대로 된다. 즉 미래창조과학부가 새 정부에서 핵심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방증(傍證)’을 쓰는 게 옳다. 방증은 ‘곁’이라는 뜻의 방(傍)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라 주변의 상황으로 추측할 수 있는 증거라는 뜻이다. “배우가 많은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은 그만큼 연기자로서 성실하다는 방증이다” “농심이 미국 월마트와 직접 거래를 한다는 것은 한국 음식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방증한다” 등이 그런 사례다.
‘반증’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어떤 사실이나 주장이 옳지 아니함을 그에 반대되는 근거를 들어 증명함. 또는 그런 증거’라는 뜻이다. “그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반증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법원은 그가 징계 받은 사유 상당 부분을 유죄로 인정했고 이를 뒤집을 만한 반증도 없다”와 같은 경우다.
둘째는 ‘어떤 사실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는 사실’을 뜻한다. 이 경우는 주로 ‘~는 ~하다는 반증이다’ 구성으로 쓰인다. “우리가 행복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속담은 거꾸로 그만큼 그런 일이 어렵다는 반증이다” 등이 그런 사례다. 반증을 이런 뜻으로 쓸 때는 앞뒤에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자잘못’을 가리다 → '잘잘못'을 가리다
싸우거나 다퉈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종종 쓰이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자잘못’이다. '이번 사고의 자잘못을 철저히 따져 보자' '친구가 잘못한 건지, 제가 잘못한 건지 자잘못을 가려 주세요' '그 어느 쪽의 자잘못을 가리고 탓할 안목이 내겐 없다' 등등.
이렇게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잘하고 잘못한 것을 가려 달라는 의미로 '자잘못을 따지다' 또는 '자잘못을 가리다'는 형태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잘함과 잘못함’의 의미로 이처럼 쓰이는 ‘자잘못’은 바르지 못한 표현으로 ‘잘잘못’이라 해야 한다. '누가 잘하고 잘못했는지 잘잘못을 확실히 하자' '정책의 잘잘못을 짚어 줄 참모가 필요하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잘잘못’보다 ‘자잘못’이 발음이 편리하기 때문에 많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잘잘못’이 ‘잘(함)+잘못(함)’의 구조로 ‘잘함’과 ‘잘못함’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바른 표현이 ‘잘잘못’이라는 것을 기억하기 쉽다.
'배포'와 '배부'
#장면 1. 서울의 한 지하철역에서 무료신문을 펼친 김씨. 거기엔 국정홍보처가 만든 책자가 끼워져 있었다. 언론통제라는 여론의 비판에도 취재 지원 선진화를 내세워 밀어붙이고 있는 기자실 통폐합과 관련된 홍보물이었다.
#장면 2. 금융 전문 인력 취업설명회가 열린 한 대학 강의실. 삼삼오오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학생들의 손에는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설명회를 개최한 금융회사 측에서 취업 희망자를 대상으로 건네준 입사 지원서였다.
국정홍보처가 서울 시내에 뿌린 홍보 책자를 보고 있는 장면 1의 김씨와 취업설명회를 연 회사의 입사 원서를 들고 있는 장면 2의 학생들은 '배포'된 인쇄물을 받은 것일까, '배부'된 인쇄물을 받은 것일까.
'배포(配布)'는 신문.책자 등을 널리 나눠 주는 것으로 '중앙일보는 독일 월드컵 때 한국과 프랑스전 결과를 실은 호외를 발행해 거리응원을 한 시민들에게 배포했다'와 같이 사용한다. '배부(配付)'는 출판물. 서류 등을 나눠 주는 것으로 '교육청은 출신 학교별로 합격 통지서를 배부했다'처럼 쓰인다.
둘 다 나눠 준다는 점에선 의미가 같지만 '배포'는 장면 1과 같이 한정돼 있지 않은 많은 사람에게 뿌리는 것이고, '배부'는 장면 2처럼 어느 정도 제한되거나 정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돌리는 것이란 점에서 차이가 난다. '사원들에게 사보를 배포했다' '행인들에게 광고 전단을 배부했다'고 하면 어색하다. 두 문장의 '배포'와 '배부'를 바꿔 써야 자연스럽다.
기억력이 '월등히' 떨어졌나요?
→ 기억력이 '아주 많이' 떨어졌나요?
나이가 들면서 건망증으로 인한 곤욕을 한두 번쯤은 치르게 마련이다. '어디에 주차했는지 몰라 주차장에서 헤매거나 열쇠를 차에 두고 내리는 등 기억력이 월등히 나빠진 것 같아요' '친구랑 약속해 놓고선 깜빡 잊는 등 예전에 비해 기억력이 월등히 떨어졌어요'란 얘기를 들으면 남의 일 같지 않을 때가 있다.
건망증으로 인한 괴로움을 호소하며 '기억력이 월등히 나빠진 것 같아요' '기억력이 월등히 떨어졌어요'와 같이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월등히’를 ‘아주 많이’ ‘매우 많이’ 등의 다른 말로 바꿔 줘야 의미가 통한다.
‘월등히’는 ‘수준이 정도 이상으로 뛰어나게’라는 뜻의 부사다. '주민들의 생활수준이 월등히 나아졌다' '초기 제품에 비해 청소 기능이 월등히 좋아졌다' '그는 동료들보다 월등히 높은 실적을
올렸'처럼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 경우에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스트레스가 높은 그룹의 경우 활동량이 월등히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와 같이 ‘월등히’를 ‘감소하다’와
함께 쓰는 건 적절치 않다. ‘월등히 나빠지다’ ‘월등히 떨어지다’도 마찬가지다.
두 부사의 뜻을 혼동해 잘못 사용하는 일도 있다. '이번 재활치료에 거는 기대가 사뭇 크다'와
같은 경우다. 이때의 ‘사뭇’은 ‘자못’으로 바루어야 이번 재활치료에 거는 기대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의미가 된다. ‘생각보다 매우’라는 뜻을 지닌 부사는 ‘자못’이다. ‘사뭇’은 거리낌 없이 마구, 내내 끝까지, 마음에 사무치도록 매우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주로 ‘아주 딴판으로’라는 뜻으로 쓰인다. '두 건축물은 같은 시기에 지어졌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달랐다'처럼 사용한다.
‘모름지기’를 ‘모르긴 몰라도’라는 의미로 쓰는 이도 간혹 있다. '그 사람은 모름지기 의사일 것이다'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모름지기’는 ‘사리를 따져 보건대 마땅히 또는 반드시’라는 뜻의 부사다. '청년은 모름지기 꿈이 있어야 한다'와 같이 쓰는 게 바르다.
오늘은 '쉰댄다’ → 오늘은 '쉰단다'
일상생활에서 '오늘은 쉰다고 한다'는 말을 줄여 '오늘은 쉰댄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오늘은 쉰단다'로 바루어야 한다. ‘쉰단다’는 ‘쉰다고 한다’에서‘ '하’가 떨어진 다음 나머지 말이 합쳐진 것이다.
‘쉰댄다’가 맞는 표현이 되려면 ‘쉰대고 한다’는 말이 성립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하다. ‘쉰댄다’는 만들어지는 과정을 추정하기 어렵다. '오늘은 쉰댄다'는 어디서 온 말인지 알 수 없으므로 '오늘은 쉰단다'로 표현하는 게 옳다.
'주인아저씨가 몸이 아파 며칠 가게 쉰대' '방송에 나왔던 원조집은 주말에 쉰대서 다른 가게로 간 거야'의 경우도 잘못된 말일까? 이들 문장은 바로 쓰였다.
‘쉰대’는 ‘쉰다고 해’가, ‘쉰대서’는 ‘쉰다고 해서’가 각각 줄어든 말이다. ‘쉰대’와 ‘쉰대서’의 ‘ㅐ’는 ‘해’의 ‘ㅐ’가 남은 것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명확하다. 줄여 쓰기 전의 문장은 '주인아저씨가 몸이 아파 며칠 가게 쉰다고 해(쉰대)' '방송에 나왔던 원조집은 주말에 쉰다고 해서(쉰대서) 다른 가게로 간 거야'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집에 일찍 간대니까' '모두들 집에 가재요'도 마찬가지다. ‘간대니까’는 성립하지 않는 말로, ‘간다니까(←간다고 하니까)’로 고쳐야 맞다. ‘가재요’는 ‘가자고 해요’가 줄어든 말로 사용할 수 있다.
알았습니다 / 알겠습니다
‘알았습니다’와 ‘알겠습니다’란 말이 일상에서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으나 문법적으로 이들의 쓰임은 다르다.
‘알았습니다’는 윗사람의 지시나 물음을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겠다는 의미로 사용하지만 ‘알겠습니다’는 추측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겠-’이 붙어 ‘알 것 같습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사람을 알겠습니까?' '어머니가 왜 그리 말씀하셨는지 알겠어요?'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겠니?'처럼 묻는 경우엔 추측의 뜻을 지닌 '알겠습니다'로 답할 수 있다. 그러나 수긍이나 긍정의 답을 할 때는 '알았습니다'고 해야 한다.
'박 대리, 추석 전까지는 기획안을 완성해 올리도록 하시오!' '얘야, 고향 가는 기차가 오후 7시 정각에 출발한다니까 늦어도 6시50분까지는 역에 꼭 와야 한다'와 같은 말엔 '알겠습니다'가 아닌 단정적인 표현인 '알았습니다'로 답변하는 게 자연스럽다. 높임의 상대에 따라 '알았어요' '알았네' '알았소'처럼 다양하게 대답할 수 있다.
하야니? / 하얗니?
예를 들어 '그 옷은 하야니 밤에도 눈에 잘 뜨이겠다' 같은 경우 사전 설명대로 ‘하야니’로 쓰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옷은 하야니?' '그 옷은 하얗니?'는 어떨까. 불행히도 이런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큼 사전은 친절하지 않다. 예문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럴 때는 국어 어문 규정집 등을 찾아 볼 수밖에 없다. 규정집의 한글 맞춤법 해설을 보면 「형용사의 어간 끝 받침 ‘ㅎ’이 어미 ‘~네’나 모음 앞에서 줄어지는 경우 준 대로 적는다」라고 돼 있다. ‘하얗+으니’처럼 뒤에 모음이 오는 구성이라면 ‘ㅎ’이 떨어져 나가 ‘하야니?’가 되고 ‘하얗+니’처럼 모음이 오지 않는 구성이라면 ‘하얗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표준국어사전은 의문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로 ‘~으니’와 ‘~니’ 둘 다를 인정한다. ‘~으니’는 형용사 어간 뒤에 붙고, ‘~니’는 동사와 형용사에 모두 붙는다는 차이는 있다. ‘하얗다’는 형용사이므로 ‘하얗+으니’ ‘하얗+니’ 두 가지 구성이 다 가능하다. 그래서 ‘하야니?’와 ‘하얗니?’는 둘 다 맞는 표현이다.
또 하나, 1988년 한글 맞춤법 규정집이 발간될 때 인정됐던 ‘까맙니다, 하얍니다, 퍼럽니다, 동그랍니다’ 등은 1994년에 삭제됐다. 이제 이 경우는 ‘까맣습니다, 하얗습니다, 퍼렇습니다, 동그랗습니다’ 등으로 써야 한다.
한국말이 '서툴어서' → 한국말이 '서툴러서'
이 ‘서툴어’는 ‘서투르다’의 준말인 ‘서툴다’에서 온 것이다. ‘서툴다’를 활용하면 ‘서툴고, 서투니, 서툴면, 서툴어’가 된다. 그러나 이 가운데 ‘서툴어’는 인정되지 않는다. 표준어 규정 제16항에 따른 것이다. 이 항목은 준말과 본말이 다 같이 널리 쓰이면서 준말의 효용이 뚜렷이 인정되는 것은 두 가지를 다 표준어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이 규정에 따라 ‘머무르다, 서두르다, 서투르다’와 ‘머물다, 서둘다, 서툴다’는 모두 표준어다.
그런데 제16항은 이 세 단어의 활용형에 대해 제한을 두고 있다. 이 단어들에 모음 어미가 연결될 때는 준말의 활용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툴어, 서툴어서’ 같은 형태는 사용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머물다’ ‘서둘다’도 '이곳에 오래 머물어서 좋을 것이 없다' '그렇게 서둘어서는 될 일도 안 되겠다'처럼 써도 안 된다. '머물러서', '서둘러서'로 바루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규정을 너무 폭넓게 해석해 모든 준말에는 모음 어미를 연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외우다’와 그 준말인 ‘외다’도 표준어 규정 제16항에 따라 복수 표준어이지만 ‘외우다’에서 활용한 ‘외워’와 ‘외다’에서 활용한 ‘외어’가 모두 인정된다. 규정에서 모음 어미가 뒤따를 수 없다고 한 것은 위 세 단어에 국한된 것이다.
처음 / 첫
'북한에서 발굴돼 국내로 첫 봉환된 국군 유해 아닙니까? 이것이 계기가 돼 봇물 터지듯 국군 유해 봉환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북한에서 발굴된 국군 유해 12구가 60여 년 만에 조국의 품으로
전 국민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겠지만 이때 주의해야 할 표현이 있다. '국내로 첫 봉환된 국군 유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국내로 처음 봉환된 국군 유해'로 바루어야 한다. ‘처음’이 와야 할 자리에 ‘첫’을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두 단어는 쓰임이 다르다.
첫 경험, 처음 겪는 일과 같이 ‘첫’과 ‘처음’은 모두 시간적으로나 순서상으로 맨 앞을 가리키는 말이다. 두 낱말의 뜻이 비슷하다 보니 문장에서의 기능까지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현장을 첫 공개하는 자리라서 긴장된다' '행사에 첫 참가하는 데도 긴장한 기색이 없다'처럼 써서는 안 된다. ‘처음 공개하는’ ‘처음 참가하는’으로 고쳐야 어법에 맞다.
‘맨 앞, 맨 첫째’라는 의미의 명사 ‘처음’은 용언을 꾸미는 부사어로 사용할 수 있지만 ‘첫’은 ‘공개하다’ ‘참가하다’ 같은 동사를 수식하는 기능을 하지 못한다. ‘첫 방송’ ‘첫 참가자’ ‘첫 행사’와 같이 체언 앞에 놓여서 그 체언을 꾸며 주는 관형사 또는 ‘첫걸음’ ‘첫울음’ ‘첫음절’처럼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이 처음임을 나타내는 별개의 단어로 쓰인다.
'국군방송 위문열차는 첫 공연을 언제 했나요?' '국군 포로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건 1994년 10월 조창호 중위가 탈북해 귀환하면서다'와 같이 ‘첫’과 ‘처음’은 품사가 다르므로 구분해 써야 한다.
'안위'를 보호받기 위해 → '안녕'을 보호받기 위해
하나의 단어에는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본래 의미에서 유추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용도를 확실히 알고 제대로 사용해야 한다.
예문을 보자. '국민은 자신의 안위를 보호받기 위해 세금을 내는데, 그 세금 값만큼 정부가 개인정보 불법 유출자를 엄격히 처벌해야 할 것이다.' 이 문장에서 얘기할 만한 ‘안위’로는 두 가지가 있다. ‘안위(安危)’와 ‘안위(安慰)’다. ‘安危’는 편안함과 위태함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고, ‘安慰’는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함을 뜻하는 말이다. 두 가지 ‘안위’를 예문에 대입해 보면 둘 다 어울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위’보다는 ‘안녕(安寧)’(아무 탈 없이 편안함)이 적절하다.
'우리가 신문을 열심히 읽는 이유가 삶의 기본 가치나 그와 관련된 문제들에 항상적인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그 충족을 위해 더욱 분발해 주길 바란다.' '항상적(恒常的)’이란 말은 없다. ‘항시적(恒時的)’(언제나 늘 있는)으로 바꾸거나 ‘항상(恒常)’으로 대체하는 것이 깔끔하다.
'조계종 승려 도박사건’ 동영상 공개의 이면에 백양사 ‘주지’ 자리를 둘러싼 승려들 간의 알력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알력(軋轢)’ 자체가 서로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사이가 안 좋거나 충돌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다 ‘다툼’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알력’만 쓰거나 ‘주지 자리를 둘러싼 승려들 간의 알력다툼’을 ‘주지를 둘러싼 자리다툼’ 등으로 고쳐야 한다.
~오 / ~요
‘이다’의 ‘이-’에 붙는 ‘-오’와 ‘~요’를 구별해서 쓸 줄 알아야 한다. 요점은 ‘이요’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열거할 때 쓰고 ‘이오’는 문장을 종결지을 때 쓴다는 것이다.
ㄱ. 공은 공이요, 사는 사다.
ㄴ. 고래는 젖먹이동물이요, 상어는 물고기다.
ㄷ. 미물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생명이오.
ㄹ. “방금 지나간 분이 새 담임 선생님이다.” “그분이(*)?”
ㅁ. “그곳엔 네가 가야 해.” “내가(*)?”
ㄱ, ㄴ의 ‘이요’는 앞의 사실과 뒤의 사실을 연결하고 있고, ㄷ의 ‘이오’는 문장을 종결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ㄹ,ㅁ과 같이 앞에 말한 내용을 반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ㄹ을 공손한 어투로 고칠 때 문장이 끝난다는 데 끌려 “그분이오?”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그분이요?”가 옳다. 이때의 ‘이’는 ‘이다’에서 온 ‘-이’가 아니라 주어임을 나타내는 조사이기 때문이다. ㅁ의 “내가?”를 높임말로 바꾸면 “내가오?”가 아니라 “내가요?”가 되는 걸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누다 / 싸다
가끔 거리를 지나다가 어린아이가 “쉬 마려워요” 하면 “저기 가서 싸고 와”라고 대답하는 부모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아이들도 “나 X 싸고 올게요”라고 주저 없이 말한다. 그만큼 입에 익은 것이다. 이런 표현이 이 상황에서 적절할까.
사전에서 ‘싸다’란 단어를 찾아보면 우선 ‘X이나 오줌을 참지 못하고 함부로 누다’란 뜻이 올라 있다. 이런 의미로 쓰이는 경우는 아기가 기저귀에다 용변을 본다든지, 어린아이가 잠자다가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든지,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학생이 학교 화장실이 무서워서 참다가 옷에다 실례를 하는 것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아기가 오줌 쌌어. 기저귀 갈아주세요” “어릴 때 이불에 오줌을 싸 혼난 적이 많았다” “오줌이 너무 마려워 바지에다 싸고 말았다” 등이 그런 사례다.
이런 경우 외에 ‘싸다’를 사용하면 속된 표현이 된다. 처음에 언급한 부모와 어린아이의 대화에서는 잠결에 무의식적으로 용변을 보거나, 너무 급박하게 마려워서 실례를 한 게 아니므로 ‘싸다’를 쓰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 자기 자식에게 일부러 저속한 표현을 쓰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야, 저기 화장실이 있으니 가서 누고 와”처럼 ‘누다’를 사용하는 게 좋다.
좁다란 길 / 널따란 길
올레길·둘레길·마실길·바우길 등 걷기 열풍과 더불어 길이 가진 다양한 얼굴과 정취에 눈을 뜨는 사람이 많아졌다.
“평탄하고 널다란 굴목재길은 명상하며 걷기 좋아요” “수타사 산소길은 한두 명이 지날 정도로 좁다란 오솔길이죠” 등 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유의할 점이 있다. 너비나 공간이 매우 좁다는 말은 ‘좁다랗다’가 맞지만 꽤 넓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은 ‘널다랗다’가 아니다. ‘널따랗다’가 맞춤법에 맞는 말이므로 “널따란 굴목재길”로 바루어야 한다.
‘-다랗다’는 일부 형용사 어간 뒤에 붙어 그 정도가 꽤 뚜렷함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인데, 때로는 ‘-따랗다’로 표기해야 할 때가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가느다랗다, 걸다랗다, 곱다랗다, 굵다랗다, 기다랗다, 깊다랗다, 높다랗다, 되다랗다, 두껍다랗다, 머다랗다, 작다랗다, 잗다랗다, 좁다랗다, 커다랗다’ 등과 같이 일반적으로는 ‘-다랗다’로 쓴다.
‘넓다, 얇다, 엷다, 짧다’ 등처럼 어간의 받침이 ‘ㄼ’인 경우엔 ‘-따랗다’를 붙이고 ‘ㄼ’이었던 받침은 ‘ㄹ’로 바꿔 적어야 한다. 겹받침의 끝소리(ㅂ)가 드러나지 않을 때는 원형을 밝혀 적지 않고 소리 나는 대로 표기토록 한 규정에 따른 것이다. ‘널다랗다, 얄다랗다, 열다랗다, 짤다랗다’가 아닌 ‘널따랗다, 얄따랗다, 열따랗다, 짤따랗다’가 표준어다.
종종 ‘넓다랗다, 얇다랗다, 엷다랗다, 짧다랗다’로 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평평하고 널따란 바위” “길고 얄따란 돌멩이” “열따랗게 드리운 구름” “키가 짤따란 나무들”과 같이 써야 한다.
윗옷 / 웃옷
‘윗도리’는 ‘아랫도리’라는 반대말이 성립하므로 ‘윗도리’가 맞다. ‘윗니’ ‘윗사람’은 각각 ‘아랫니’와 ‘아랫사람’이란 말이 있으므로 ‘윗니’와 ‘윗사람’이 맞다. ‘웃돈’은 ‘아랫돈’이 없으므로 ‘웃돈’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면 ‘윗옷’과 ‘웃옷’은 어느 것이 맞을까? 둘 다 맞는 말이다. 다만 경우가 다르다. 우선 ‘아랫옷’이 있으므로 ‘윗옷’이 성립한다. 한자어로 치면 각각 하의(下衣)와 상의(上衣)다. 한겨울 추울 때에는 이러한 ‘윗옷’ 말고도 두툼한 외투나 점퍼를 하나 더 걸쳐야 한다. 이때 입는 외투나 점퍼는 ‘윗옷’과 달리 ‘웃옷’이라 부른다. 이에 해당하는 하의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윗옷’에 하나 더 껴입는 것이 ‘웃옷’이라 생각하면 된다.
매무새 / 매무시
친구의 주선으로 오랜만에 소개팅에 나가게 된 그녀. 설레는 마음으로 힐끗힐끗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옷차림을 점검하고 있다. 고운 옷매무새를 위해 몇 번이고 옷매무시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에서 긴장한 속내가 읽힌다. 이처럼 옷을 입은 모양새와 관련된 말로 ‘옷매무새’와 ‘옷매무시’가 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표현이거나 사투리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옷매무새’와 ‘옷매무시’는 둘 다 표준어다. 각각 ‘매무새’와 ‘매무시’에서 온 말로, 둘은 다른 뜻으로 쓰이므로 단어 선택에 주의해야 한다.
‘매무새’는 옷·머리 등을 수습해 입거나 손질한 모양새를 의미한다. “기다리는 동안 틈틈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매무새가 추레한 사람에게 호감을 가질 여자가 어디 있겠나”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매무시’는 옷을 입을 때 매고 여미는 뒷단속을 뜻한다. 따라서 ‘매무시’는 “손을 씻고 나서 매무시를 다시 했다” “매무시를 잘해야 보기에도 좋다”처럼 사용된다.
즉 ‘매무새’는 어떤 모양을 뜻하고 ‘매무시’는 행위를 뜻한다. 따라서 ‘매무시’는 ‘-하다’를 붙여 동사로 만들 수 있다. “매무시하는 모습을 보니 평소의 꼼꼼한 성격이 확연히 드러난다” “면접을 치르러 온 사람들은 회사 현관 앞에서 양복을 매무시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매무새’는 ‘매무시’가 완성된 형태의 맵시를 의미하므로 ‘매무새’는 ‘매무시’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기억하기 쉽다.
간(間)의 띄어쓰기와 붙여쓰기
이 '간'은 "북한과 미국 간의 회담이 1년여간 중단되었다"처럼 상황에 따라 띄어쓰기를 달리한다. '남북 간' '연인 간' '스승과 제자 간'처럼 앞에 있는 명사들의 관계나 어떤 대상에서 다른 대상까지의 사이를 의미할 때는 의존명사로 띄어 쓴다.
"사업을 하든지 연애를 하든지 간에 열심히 해라"처럼 '거나'나 '든지' 뒤에서 어느 쪽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낼 때에도 '간'을 띄어 쓴다.
그러나 '1년여간' '한 달간' '이틀간'과 같이 '간'이 기간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서 '동안, 사이'를 나타낼 때에는 접미사로서 붙여 써야 한다.
'간'이 자주 쓰이는데도 불구하고 띄어쓰기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으나,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 뒤에서는 붙여 쓰고 나머지는 띄어 쓴다고 생각하면 쉽다.
‘식(式)’의 띄어쓰기와 붙여쓰기
의존명사 ‘식’은 ‘일정하게 굳어진 본새나 말투, 방식’을 뜻한다. “무한 경쟁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은 어떤 식으로든 고객 가치를 높이는 길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미국 남부의 시청자들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투표를 한다는 점이다”처럼 쓰인다. 의존명사 ‘식’은 띄어쓰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띄우기 때문이다.
접미사 ‘식’은 일부 명사 뒤에 붙어 ‘방식’을 의미한다. ‘계단식, 서양식, 현대식, 주먹구구식, 짜내기식, 막무가내식’과 같이 사용된다. 이 ‘식’도 띄어쓰기를 의심할 까닭이 없다. 접미사는 붙이기 때문이다.
'수박 겉핥기 식으로 모든 분야에 접근하는 학문적 시도를 우리는 경계한다.' 와 같이 의존명사로 보거나 명사의 나열(앞의 말이 관형어)로 본다면 띄울 것이고 접미사로 본다면 붙일 것이다.
초등학생 '지키미' → 초등학생 '지킴이'
국가적인 큰 행사를 치르면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도우미’가 등장한 이후 ‘-미’ 자 돌림의 조어가 퍼져 나가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ㄱ. 국내 최초의 실외형 경사 엘리베이터인 ‘남산 오르미’가 설치된다.
ㄴ. 고령의 불우 구민에게 ‘노인 돌보미’ 서비스를 제공한다.
ㄷ.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문화 지키미’로 나서 인기를 끌고 있다.
ㄹ. 이 학교는 문자메시지를 ‘초등학생 지키미’로 활용하고 있다.
우리말에서 ‘미’가 접미사로 쓰이는 경우는 ‘군량미’ ‘정부미’ ‘일반미’처럼 쌀을 나타낼 때뿐이다. 사람·사물의 뜻을 더할 때는 ‘못난+이’ ‘젖먹+이’ ‘똑똑+이’처럼 접미사 ‘이’를 붙인다. 위 예문에서는 ‘오름이’ ‘돌봄이’ ‘지킴이’ '도움이' 등으로 써야 할 것을 소리 나는 대로 표기했다. 인터넷이나 문자메시지에서는 편의를 위해 국어의 형태를 파괴하는 경우가 흔하다. 공공기관까지 이런 행태를 답습하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습니다 / 했음, 있음
“품질 이상 없슴.” 전자제품을 사서 품질 표시란을 들여다보면 가끔 이런 문구를 발견한다. 성능엔 이상이 없을지라도 이 말 자체는 어법상 오류가 있다.
흔히 “갓길 없슴” “학력 제한 없슴” “셋방 있슴” “얼린 생수 있슴” 등으로 표기하지만 모두 맞춤법에 어긋나는 말이다. 바르게 표현하려면 ‘없슴’은 ‘없음’으로, ‘있슴’은 ‘있음’으로 고쳐야 한다.
‘없음 / 있음’은 ‘없다 / 있다’의 어간 ‘없~/있~’에 명사형 어미 ‘~음’이 붙은 형태다. ‘많다 / 적다’가 ‘많슴 / 적슴’이 아니라 ‘많음 / 적음’으로 활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슴’이란 어미가 없는데도 ‘없슴 / 있슴’으로 적는 건 받침에 ‘ㅅ’이 있어 [슴]으로 발음 나는 데다 ‘~습니다’와 관련짓는 경향 때문이다.
종결어미 ‘~읍니다’가 ‘~습니다’로 통일되었기에 ‘~음’이 붙는 명사형도 ‘ ~슴’으로 바뀌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명사형 어미는 ‘~음’이다. ‘깊다 / 얕다’의 명사형이 ‘깊음 / 얕음’이듯이 ‘없다 / 있다’의 명사형도 ‘없음 / 있음’이다. 어미 ‘~었~’ ‘~겠~’ 다음에도 ‘없었음 / 있었음’ ‘없겠음 / 있겠음’과 같이 써야 한다.
1988년 한글맞춤법 개정 때 ‘~읍니다’를 ‘~습니다’로 적기로 했다. 언중의 실제 발음을 연구 검토한 결과다. 좋습니다.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먹었습니다. 해 보겠습니다.로 적어야 한다.
‘했습니다, 있습니다’를 ‘했읍니다, 있읍니다'로 잘못 적어서는 안 된다. 덧붙여 ‘~했다, ~있다 등에 명사형어미 '~음'를 붙여 활용할 땐 '~음’을 그대로 살려 써야 한다. 했음, 있음, 하겠음, 먹었음, 보겠음, 보냈음 등으로 적어야 한다.
되~ / 돼~
'이 영화를 보고 티벳의 정치적 배경을 알게 되서 / 돼서 좋았다' '공포는 내게 최대 약점이자 최고 지원군이 됬다 / 됐다.' '거기 가면 안 되 / 안 돼.' 이 같은 문장을 만날 때 ‘되~’와 ‘돼~’ 어느 쪽이 맞을까 혼란을 겪는 이가 많다. 이때의 돼는 ‘되+어’가 ‘돼’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형의 어간에 ‘~어’를 붙여 봐서 ‘~어’가 있어야 할 자리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한다. ‘되서 / 돼서’의 경우 기본형 ‘되다’의 어간인 ‘되~’에 ‘~어서’를 붙여 보면 ‘되어서’가 어색하지 않으므로 ‘돼서’가 맞다.
그런데 문제는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원래 형태가 ‘되서’가 맞는 것인지 ‘되어서’가 맞는 것인지를 도저히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찬바람을 쐬서 / 쐐서’ ‘어제 선생님을 뵜다 / 뵀다’의 ‘쐬다’ ‘뵈다’ 처럼 어간이 ‘ㅚ’로 끝나는 단어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 어간을 다른 것으로 바꿔 보면 도움이 된다. ‘하다’의 경우 ‘하+어’ 는 ‘하여’로 변하고 이것을 줄이면 ‘해’가 된다. 그러므로 이때 ‘해~’에는 어가 숨어 있다. 이것을 ‘되 / 돼’ ‘쐬 / 쐐’를 구별하는 데 응용해 보자. 어간을 '하~'로 바꿨을 때 말이 되면 '~어'가 필요없는 자리고, ‘해~’로 바꿨을 때 말이 되면 ‘~어’가 필요한 자리다. ‘안 되 / 안 돼’의 경우 '되 / 돼' 자리에 '하 / 해'를 넣어 보면 ‘안 하’는 불가능하고 ‘안 해’는 가능하므로 ‘안 되’가 아니라 ‘안 돼’가 옳다는 걸 알 수 있다. ‘쐬서 / 쐐서’도 어간을 '하 / 해'로 바꿔 보면 ‘하서’는 말이 안 되지만 ‘해서’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쐬서’가 아니라 ‘쐐서’가 바르다.
할 일 없다 / 하릴없다
얼마 전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1930년대 근대화돼 가는 경성을 배경으로 집을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 소설가 구보의 하루를 담고 있다.
소설가 구보는 ‘하릴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할 일 없는’ 하루를 보낸 걸까. 각각의 의미를 정확히 구분하지 못해 ‘할 일 없는’을 사용해야 할 자리에 ‘하릴없는’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릴없다’는 “버스 파업 소식을 접하지 못한 시민들이 승강장에서 하릴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다” “내가 잘못해 일어난 상황이니 혼이 나도 하릴없는 일이다”에서처럼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또 “머리도 못 감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이 폐인의 형국이다” “누더기를 기워 입은 듯한 모습이 하릴없는 거지였다”에서와 같이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할 일 없이’는 말 그대로 ‘마땅히 할 일이 없다’는 의미로, 한 단어가 아니므로 ‘할일없이’와 같이 붙여 쓰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 영락없이’로 바꿔 쓸 수 있다면 ‘하릴없이’, ‘빈둥빈둥’의 의미를 지닌다면 ‘할 일 없이’를 쓴다고 기억하면 된다. 구보는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다.
수 표현의 띄어쓰기
'이팔청춘(二八靑春)'은 16살 무렵의 꽃다운 청춘, 또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을 일컫는다. 여기서 '16'을 한글로는 '열여섯'이라고 쓸 수 있다. 그러면 '열여섯'의 띄어쓰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열여섯'으로 붙여 쓴다.
국어사전에는 '열여섯'이란 단어가 올라 있지 않다. '열여섯'이 합성어가 아니므로 '열 여섯'같이 띄어 써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열여섯'으로 붙여 쓰는 이유는 한글 맞춤법 제44항 때문이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수를 적을 때는 만(萬) 단위로 띄어 쓴다'고 돼 있다. '십이억 삼천사백오십육만 칠천팔백구십팔'과 같이 쓰라는 얘기다. '열여섯'도 마찬가지다. 만 단위로 띄어 쓴다는 것은 만보다 작은 수일 경우에는 언제나 붙여 쓴다는 뜻이다. '열여섯'이 나이를 나타내는 '살'과 결합할 때는 '열여섯 살'처럼 띄어 쓴다. 그러나 아라비아숫자로 쓸 경우엔 띄어쓰기가 달라진다. '16 살/ 16살' 둘 다 가능하다.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지만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된다. 아라비아숫자와 그 다음의 단위명사를 붙여 쓰는 현실을 수용한 결과다. 현실에서 '16살'같이 붙여 쓰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면 '제2 차(제2차, 제 2차) 세계대전' 중에서 어떤 띄어쓰기가 맞을까? '제-'가 붙어 차례를 나타내는 경우의 띄어쓰기에서 많은 사람이 혼동한다. '제2 차(제2차) 세계대전'은 맞고, '제 2차 세계대전'은 잘못이다. 원칙은 '제-'는 접두사이므로 뒤에 오는 말에 붙여 쓰고, '차'는 의존명사이므로 띄어 쓴다. 단, 아라비아숫자 다음의 단위명사는 붙여 써도 된다.
흡연을 삼가해 주십시요 → 흡연을 삼가 주십시오
언제부턴가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숨을 곳'이 없는 세상이 됐다. 이리저리 밀려 찾아간 화장실. '만인의 건강을 위해 흡연을 삼가해 주십시요'라는 표어가 눈에 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어, 그런데 표어에 틀린 글자가 있다. '흡연을 삼가 주십시오'가 바른 표기인데….
'삼가하다'란 단어는 없다. '삼가다'가 원형이다. '삼가다'에 '하다'를 잘못 붙여 쓰고 있는 것이다. '나가다-그만 나가 주세요'처럼 '삼가다-말을 삼가 주세요'로 써야 한다.
그리고'주십시요'는 '주십시오'의 잘못이다. 문장을 끝맺을 때 쓰는 어미는 '-오'이다. "담배 한 개비 빌려 주십시오"라고 해야 한다. 애연가 여러분! 이젠 담배를 삼가고 건강을 챙기십시오.
기지배 / 임마 → 계집애 / 인마
'임마'는 '인마'를 편리하게 발음하다 보니 생긴 것이며, '인마'는 '이놈아'가 줄어든 말이다. '인마'의 'ㄴ'은 '이놈아'의 'ㄴ'에서 온 것이다. '인마'가 '임마'로 발음되는 것은 'ㄴ' 뒤에 'ㅁ'이 올 때는 'ㄴ'보다 'ㅁ'으로 소리 내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신물, 근무, 논문'을 '심물, 금무, 놈문'으로 발음하는 게 편한 이치와 같다. 물론 표준발음대로 하려면 'ㄴ'을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 '인마'는 "야, 너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지 마, 인마. 가끔가다가 네가 엄만지, 내가 엄만지 헷갈린단 말야"(공지영 '즐거운 나의 집')처럼 사용된다.
"기지배, 왜 연락 안 했니" "여우 같은 지지배" "참 이번 기집애는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황순원 '소나기')에서처럼 '기지배, 지지배, 기집애' 등으로도 쓰이지만 이들 또한 표준어는 아니다. '기지배'는 방언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지지배, 기집애'는 '계집애'가 맞는 말이다.
택도 없다 → 턱도 없다
'턱'은 '마땅히 그리해야 할 까닭이나 이치'를 의미하는 말로 "그렇게 착한 영식이가 친구를 때렸을 턱이 없다"처럼 주로 어미 '~을' 뒤에서 '없다'와 함께 쓰이거나, "돈 많은 그가 그런 허드렛일에 관심을 가질 턱이 있나?"처럼 '있다'와 함께 반어형으로 사용된다. 또한 '턱'은 "별로 달라진 것 없이 늘 그 턱이다"에서와 같이 '그만한 정도나 처지'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턱없다'는 "그는 턱없는 거짓말을 자주 한다"에서처럼 '이치에 닿지 않거나 그럴 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우승에는 턱없는 실력"에서와 같이 '수준이나 분수에 맞지 않다'는 의미로 쓰인다. '턱도 없다'가 '턱없다'와 동일한 의미라는 걸 기억하면 '택도 없다'라고 잘못 표현하는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희귀병(稀貴病) → 희소병(稀少病)
‘희귀(稀貴)’는 ‘드물 희(稀)’와 ‘귀할 귀(貴)’로 구성된 한자어로 ‘드물어서 매우 진귀한 것’을 뜻한다. 희귀 금속, 희귀 우표 등을 생각하면 ‘희귀’의 의미가 쉽게 다가온다. 드물어서 귀하게 대접받는 병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희귀병’은 몹시 어색한 용어다.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말이 ‘희소병’이다. ‘희소(稀少)’는 매우 드물고 적음을 뜻한다. 어떤 현상의 많고 적음만을 나타내는 가치중립적 단어다. ‘희소 상품’ ‘인구 희소 지역’ 등처럼 쓰인다. 따라서 드물게 발견되는 병이라면 ‘희소병’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왼종일 → 온종일
‘하루 종일’을 나타낼 때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왼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요즘은 장사가 안 돼 왼종일 손님을 기다리는 게 일이다” 등과 같이 ‘왼종일’이란 표현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온종일’이 맞는 말이다.
‘온종일’은 ‘전부의, 모두의’란 뜻을 지닌 관형사 ‘온’과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시간’을 나타내는 명사 ‘종일’이 만나 이루어진 단어다. ‘온’은 관형사이므로 ‘온 세상’ ‘온 집안’ ‘온 국민’과 같이 띄어 써야 한다. 그러나 ‘온종일’ ‘온몸’ 등은 오랜 시간 사람들이 하나의 단어처럼 써 왔기 때문에 각각의 단어가 아닌 하나의 단어(합성어)로 인정돼 띄어 쓰지 않고 붙여 쓴다.
‘온종일’을 ‘왼종일’이라 부르는 것은 ‘온종일’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온’을 ‘왼’으로 발음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온’보다 ‘왼’이 더 강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새타령’의 노랫말 가운데 “새가 날아든다, 왼갖 잡새가 날아든다”는 부분의 ‘왼갖’ 역시 ‘온갖’을 강조하기 위해 ‘온’을 ‘왼’으로 세게 발음함으로써 나타나는 잘못된 표현이다.
인터넷에는 “웬종일 동생을 찾아 헤맸어요” “웬종일 비가 내려 우울하네요” 등과 같이 ‘온종일’을 ‘웬종일’로 쓴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웬’은 “웬 까닭인지 모르겠다” “웬 태풍이 이리도 자주 오느냐” 등처럼 ‘어찌 된, 어떠한’의 의미를 지닌 관형사다. ‘웬종일’은 ‘어찌 된 종일’ ‘어떠한 종일’로 풀이되므로 뜻이 통하지 않는다.
‘전부의, 모두의’를 나타내는 ‘온’은 의미를 강하게 하기 위해 ‘왼’ 또는 ‘웬’과 비슷하게 발음하기도 하지만 표기할 때는 반드시 ‘온’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면 된다.
주차하다 / 주차시키다
음식점 같은 곳에서 일행에게 “빨리 주차시키고 들어갈게”라고 했다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문제다. ‘주차시키다’와 ‘주차하다’의 의미가 같다고 생각하는 이는 당연히 말하는 당사자가 직접 차를 몰아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다고 받아들일 것이다. 두 단어의 뜻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는 주차요원 등에게 주차하게 하고 음식점으로 들어가겠다는 말로 해석할 것이다.
‘하다’와 ‘시키다’는 가려 사용해야 한다. ‘시키다’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하게 하다는 뜻이다. ‘주차하다’와 ‘주차시키다’는 다른 의미로 쓰인다. 말하는 본인이 차를 주차한다고 할 때는 “빨리 주차하고 들어갈게”처럼 얘기하는 게 맞다.
거짓말하다·소개하다·전가하다 등 ‘~하다’형의 동사를 사용할 때 ‘~시키다’형으로 잘못 쓰는 일이 종종 있다. 상대방의 거짓말을 지적하면서 “너는 왜 자꾸 거짓말시키니?”처럼 표현하는 경우다.
‘거짓말시키니’는 ‘거짓말하게 만드니’란 의미가 된다. “너는 왜 내가 자꾸 거짓말하게 만드니?”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거짓말의 주체가 바뀌어 버리기 때문에 상대의 허언을 꼬집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너는 왜 자꾸 거짓말하니?”라고 해야 옳다. ‘거짓말하다’와 ‘거짓말시키다’를 같은 뜻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족을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게요”라고 하면 어색하다. 말하는 이가 자기 가족을 알리는 것이므로 ‘소개해 드릴게요’로 바루어야 한다.
입바른 사람 / 입빠른 사람
간혹 바른말을 하는 데 거침이 없는 사람을 두고 ‘입빠르다’라고 하는 이가 있지만 ‘입바르다’라고 답해야 맞다.
‘입바르다’가 [입빠르다]로 소리 나다 보니 ‘입빠르다’로 잘못 표기하는 일이 종종 있다. 또 ‘재바르다’가 동작 등이 재고 빠름을 나타내는 ‘재빠르다’보다 여린 느낌을 주는 말로 쓰이다 보니 ‘입바르다’와 ‘입빠르다’ 역시 여린말과 거센말의 관계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두 단어는 의미가 다르다.
‘입빠르다’는 남에게서 들은 말이나 자신의 생각을 참을성 없이 지껄이는 버릇이 있다는 뜻이다. “대쪽 같다는 건 알지만 입바른 소리만 하다가 찍히겠어” “그는 생각 없이 입빠른 소리만 하는 통에 믿음이 안 가”와 같이 옳은 말을 잘할 땐 ‘입바르다’, 경솔하게 입이 가벼울 땐 ‘입빠르다’를 사용한다.
눈치가 빠르거나 자기 잇속에 맞게 행동하는 데 재빠름을 나타내는 말로 ‘약삭바르다(약바르다)’를 쓰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약삭빠르다(약빠르다)’ 형태를 표준어로 삼고 있다.
이전 · 이후 / 이상 · 이하 <기준이 포함됨>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는 모두 기준이 되는 시점을 포함한다. 즉 이전은 ‘기준이 되는 때를 포함하여 그 전’이라는 뜻이고 이후는 ‘기준이 되는 때를 포함하여 그 후’라는 뜻이다. 예를 들어 “원서는 화요일 이후에 제출해 주십시오”란 안내문을 보았다면 화요일에 원서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앞의 세금과 관련된 사례 역시 기준일이 포함되기 때문에 10월 2일에 세금을 내도 불이익이 없다.
‘이상(以上)’과 ‘이하(以下)’도 기준이 포함된다. 놀이공원에 가면 키 제한이 있는 탈것이 있다. “이 시설은 키 130㎝ 이하인 사람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와 같은 안내문이 걸려 있는 탈것에는 엄밀히 말하면 키가 130㎝인 사람도 이용이 제한된다. 1998년 이전의 규정에 따르면 키가 196㎝ 이상인 사람은 군에 입대할 수 없었다.(99년부터는 갈 수 있음) 여기에서 기준이 포함되므로 키가 196㎝인 사람은 군대에 못 갔다.
수량을 나타낼 때 이상·이하와 달리 기준을 포함시키지 않으려면 ‘초과(超過)’와 ‘미만(未滿)’을 쓰면 된다. “대한민국에서 투표일을 기준으로 만 19세 미만인 사람은 투표권이 없다”의 경우 ‘미만’은 기준이 포함되지 않으므로 18세를 넘겨 19세에 하루 차이로 육박해도 투표권이 없다. 한편 “전용면적 25.7평을 초과하는 아파트를 가진 사람은 소득공제 혜택을 받을 수 없다”의 경우 기준이 포함되지 않으므로 25.7평은 소득공제 혜택의 대상이 된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 도둑이 제 발 '저리다더니'
%와 %포인트를 구분해야
이토록 민감한 시청률 변화를 잘못 얘기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드라마 제작사 측에 따르면 지난주 8%의 시청률을 기록해 첫 방송분의 10%보다 2%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의 경우를 보자. 시청률이 10%에서 8%가 됐다는 것을 ‘2% 하락한’으로 표현한 것은 잘못이다. ‘2%포인트 하락한’이라고 해야 바르다.
통계 수치를 다룰 때 혼동해서는 안 되는 게 퍼센트와 퍼센트포인트다.
퍼센트(%)는 전체 수량을 100으로 하여 그것에 대해 가지는 비율인 백분율을 나타내는 단위다. 지난해 단감 수확량이 100개였는데 올해 110개의 단감을 거둬들였다면 10% 증가한 게 된다.
퍼센트(%)포인트는 백분율로 나타낸 수치가 이전 수치에 비해 증가하거나 감소한 양을 말한다. 한마디로 퍼센트와 퍼센트의 차를 계산할 때 사용하는 단위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 공장 가동률이 90%였는데 올해의 경우 95%라면 5%포인트 늘어난 것이 된다.
드라마 시청률이 10%에서 8%가 됐다는 것을 퍼센트포인트로 나타내면 “시청률이 2%포인트 하락했다”가 되고, 퍼센트로 나타내면 10명이 보던 방송을 2명이 더 보지 않게 됐다는 것이므로 “시청률이 20% 하락했다”가 되는 것이다. “시청률이 2% 하락했다”는 쓸 수 없다.
가령 실업률이 지난 2년 동안 2%에서 1%가 됐다면 “지난 2년 동안 실업률이 1%포인트 하락했다” 또는 “지난 2년 동안 실업률이 50% 하락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화물자동차 생산량이 50%에서 60%가 됐다면 퍼센트로는 20%, 퍼센트포인트로는 10%포인트 늘어난 것이 된다. “지난 2년 동안 실업률이 1% 하락했다” “화물자동차 생산량이 10% 늘어났다”고 쓰면 틀린 표현이 된다.
땡땡이 가라 → 물방울 무늬
‘땡땡이’는 게으름을 부리는 것 말고 옷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땡땡이 무늬’ ‘땡땡이 가라’ ‘땡땡이 패션’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땡땡이’는 물방울 무늬를 가리킨다.
물방울 무늬를 지칭하는 ‘땡땡이’도 순우리말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때의 ‘땡땡이’는 일본말에서 온 것이다. ‘점점이, 물방울’에 해당하는 일본어 ‘덴텐(点点, てんてん)’에 접미사 ‘~이’가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땡땡이 가라’에서 ‘가라(柄, がら)’ 역시 무늬·모양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땡땡이 가라’처럼 패션과 관련해서는 특히 외래어가 많이 쓰인다. 패션에서 사용되는 외래어가 전문용어라도 되는 양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말로 충분히 표현이 가능한 것은 바꿔 써야 한다. ‘땡땡이’는 ‘물방울’, ‘땡땡이 가라’는 ‘물방울 무늬’, ‘땡땡이 패션’은 ‘물방울 옷맵시’ 또는 ‘물방울 유행’으로 고쳐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않 / 안
'않다'는 동사나 형용사 아래에 붙어 부정의 뜻을 더하는 보조용언 '아니하다'의 준말이다. 따라서 '않'은 '않다, 않아, 않으니, 않는 않소' 등으로 활용되며, '않'의 형태로만 단독으로 쓰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철수가 먹지 않았다, 영희는 예쁘지 않다”와 같이 동사나 형용사에 덧붙어 함께 서술어를 구성할 때에는 '않다'를 써야 한다.
그리고 '안'은 용언 앞에 붙어 부정 또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부사 '아니'의 준말이다. 따라서 '안 먹는다, 안 어울린다'에서와 같이 서술어를 꾸미는 역할을 할 때에는 '안'을 쓴다.
~로서 / ~로써
ㄱ. 그는 취임식 후 대통령으로서 업무를 시작했다.
ㄴ. 나영이는 학급의 대표로서 학생회에 참석했다.
ㄷ. 말로써 패가망신할 수 있으니 말조심해야 한다.
ㄹ. 남자는 상투를 틂으로써 성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으)로서’는 ‘지위나 신분 또는 자격’을 나타낸다.
ㄱ은 그전엔 대통령이 아니었지만 취임식 후 대통령 신분으로 업무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ㄴ은 나영이가 학급 대표 자격으로 학생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예문은 ‘~(으)로서’로 쓰는 게 맞다. “나는 그를 선배로서 대우했다” “그런 짓은 국회의원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등도 ‘~(으)로서’가 적합한 문장이다. 반면 ‘~(으)로써’는 ‘재료나 원료, 수단이나 도구’를 나타낸다.
ㄷ은 말 때문에 패가망신한 것이니 말이 패가망신의 도구로 쓰였고, ㄹ에서는 상투를 트는 것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수단이다. 그래서 이 예문에는 ‘~(으)로써’가 옳다.
가엾은 / 가여운
정답부터 미리 말하자면 ‘가엾은’ ‘가여운’ 둘 다 맞는 표현이다. ‘가엾다’와 ‘가엽다’가 복수 표준어이기 때문이다. ‘가엾다’는 ‘가엾은, 가엾고, 가엾으니, 가엾지’ 등으로 활용된다. ‘가엽다’는 비읍 불규칙 활용을 하는 단어다. 이런 유의 단어들은 뒤에 오는 모음에 따라 ㅂ이 ‘오’나 ‘우’로 바뀐다. 그래서 ‘가엽다’의 경우 ‘가여운, 가엽고, 가여우니, 가엽지’ 등으로 활용하게 된다.
‘섧다’와 ‘서럽다’ 역시 복수 표준어다. ‘섧다’는 ‘설워, 설우니, 섧고, 섧지’ 등으로 변화한다. 종종 “너무 섧어서 엉엉 울었다”처럼 ‘섧어서’ ‘섧으니’로 쓰는 분들이 있는데 ‘섧다’ 역시 비읍 불규칙 활용을 하므로 ‘설워서’ ‘설우니’로 써야 한다는 걸 기억하자. ‘서럽다’는 ‘서러워, 서러우니, 서럽고, 서럽지’ 등으로 활용한다. ‘여쭈다’와 ‘여쭙다’도 둘 다 표준어이며 위 단어들과 유사성이 있으므로 같이 기억해 두자. ‘여쭈다’의 경우는 ‘여쭈어, 여쭈니, 여쭈는’ 등으로 활용하고 ‘여쭙다’는 ‘여쭈워, 여쭈우니, 여쭙는’ 등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지금 아니 계신다고 여쭈어라” 같은 표현에서 ‘여쭈어라’ 대신 ‘여쭈워라’를 써도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쭈워’나 ‘여쭈우니’보다는 ‘여쭈어’ ‘여쭈니’가 더 일반적인 용어이므로 틀렸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이쪽을 사용하는 게 낫다.
자문을 구하다 → 자문을 하다
‘자문(諮問)’은 물을 ‘자(諮)’와 물을 ‘문(問)’ 자로 이뤄진 단어로,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뤄진 기구에 의견을 묻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무엇을 묻는 게 자문이므로 ‘자문을 구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잘못됐다. 답을 구할 수는 있어도 물음(질문)을 구할 순 없으므로 ‘자문을 하다’로 써야 맞다.
‘자문’이란 말은 물음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며 사용해야 한다. 내가 남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의견을 묻는 건 자문을 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그 문제에 관해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건 자문에 응하는 것이다. ‘검찰총장 자문기구’란 말은 검찰총장에게 자문해 주는 기구라는 의미가 아니다. 검찰총장이 자문하는 기구 또는 검찰총장의 자문을 받아서 응답해 주는 기구란 뜻이다. ‘자문하다-자문에 응하다’가 헷갈리면 ‘조언을 구하다-조언하다’ ‘의견을 묻다-답변하다’ 등의 쉬운 말로 적절히 바꿔 써도 된다.
‘뿐’의 띄어쓰기
‘뿐’이 ‘~을’ ‘~할’ 등의 뒤에서 다만 어떠하거나 어찌할 따름이라는 뜻을 나타낼 때는 의존명사로 띄어 쓴다.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네.' '그는 웃고만 있을 뿐이지 싫다 좋다 말이 없다. '모두들 구경만 할 뿐 누구 하나 거드는 이가 없었다'가 이런 경우다.
‘뿐’이 ‘~다 뿐이지’ 형태로 오직 그렇게 하거나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일 때도 의존명사로 띄어 쓴다. '이름이 나지 않았다 뿐이지 참 성실한 사람이다.' '시간만 보냈다 뿐이지 한 일은 없다'가 이렇게 사용된 예다.
‘뿐’이 명사나 부사어 뒤에 붙어 그것만이고 더는 없음 또는 오직 그렇게 하거나 그러하다는 것을 나타낼 때는 보조사로 붙여 쓴다. '이제 믿을 것은 오직 실력뿐이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말썽꾸러기였다'처럼 쓰이는 경우다. 어렵지만 용례를 유심히 보아 두면 구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안일 / 안이
‘안일하다’와 ‘안이하다’는 둘 다 ‘너무 쉽게 여기는 태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명확히 구분해 쓰기가 쉽지 않다. ‘안일한/안이한 생각’ ‘안일한/안이한 태도’처럼 둘 다 의미가 통하는 경우도 있다. ‘안일하다’는 ‘편안할 안(安)’자에 ‘달아날 일(逸)’자가 만나 ‘편안함만을 생각하고 (현실에서) 달아나려는 태도가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안이하다’는 ‘편안할 안(安)’자에 ‘쉬울 이(易)’자가 결합해 ‘너무 쉽게 여기는 태도나 경향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관심을 덜 둔다는 의미에서는 둘 다 비슷하지만, ‘안일하다’는 편안함만 추구한 나머지 현실을 회피한다는 비판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즉 ‘안일하다’는 ‘나태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나 ‘안이하다’는 ‘나태하다’는 의미에서 약간은 비켜 있다.
따라서 “공사 현장에서의 안일한 자세는 자칫하면 안전사고를 일으킬 수 있다”에서는 ‘안일하다’가, “그 순간만 모면하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문제다”에서는 ‘안이하다’가 더 잘 어울린다. 앞의 문장에서는 애쓰지 않고 편안함만 추구하려는 태도가, 뒤의 문장에서는 너무 쉽게 여기는 태도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또한 ‘안이하다’는 형용사로만 쓰여 ‘안이’만 따로 떼어내 사용할 수 없으나 ‘안일하다’는 형용사뿐 아니라 ‘안일히’(부사) ‘안일(명사)’과 같이 다른 용법으로 쓰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안일과 나태에 젖은 생활을 하고 있다” “안일과 영달에만 급급한 모습이 비굴해 보인다”의 경우 ‘안이’로 대체해 쓸 수 없다.
선거 / 투표
시끄러웠던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5년 동안 나라 살림을 책임질 새 대통령이 탄생했다. 삼삼오오 모여 누구에게 투표했는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지 등에 대해 얘기들을 나누곤 한다.
‘선거’와 ‘투표’는 어떻게 다를까.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용법으로 쓰이는 것 같지만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투표’는 선거를 하거나 가부를 결정할 때 투표용지에 의사를 표시해 일정한 곳에 내는 일을 의미한다. ‘선거’는 일정한 조직이나 집단이 대표자나 임원을 뽑는 일, 선거권을 가진 사람이 공직에 임할 사람을 투표로 뽑는 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투표’는 선거를 하기 위한 절차에 해당한다. 따라서 “너 선거는 했니” “나는 ○○당 후보에게 선거했어”라는 말은 바르지 못한 표현이다. “너 투표는 했니” “나는 ○○당 후보에게 투표했어”라고 해야 한다.
‘선거’는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회의원 선거’ ‘반장 선거’ ‘선거를 치르다’ 등처럼 쓰인다. 선거일이 공휴일이다 보니 투표도 하지 않고 놀러 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선거권은 선거에 참가해 투표를 할 수 있는 국민의 소중한 권리다.
김치 맛있게 '담는' 방법 → 김치 맛있게 '담그는' 방법
이런 경우는 ‘담그다’를 써야 한다. ‘담그다’는 ‘담가, 담그니, 담가서, 담그면’ 등으로 활용한다. 그러므로 ‘김장 김치 맛있게 담그는 법’ ‘담가서 바로 먹는 겉절이’ 등으로 쓰는 게 옳다. “이 무는 육질이 단단해 쪽파를 넣고 김치를 담구면 아삭합니다”처럼 ‘담구다’를 쓰는 것 역시 잘못된 표현이다.
김치에는 배추김치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배추와 무·오이를 절여 넓적하게 썬 다음 여러 가지 고명에 젓국을 쳐서 한데 버무려 담은 뒤 조기젓 국물을 약간 부어서 익힌 김치’를 흔히 ‘석박지’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섞박지’라고 쓰는 게 맞다. 여러 가지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 외에 ‘무를 작고 네모나게 썰어서 소금에 절인 후 고춧가루 따위의 양념과 함께 버무려 만든 김치’를 일컬어 ‘깎두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깍두기’가 맞으니 섞박지와 함께 바른 철자를 익혀 두자.
동주민센터
몇 해 전부터 ‘동사무소’가 ‘동주민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주민 중심의 통합 서비스 제공 기관’임을 잘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행정자치부는 올해 안에 전국 2166개 동사무소의 간판과 안내판을 모두 ‘동주민센터’로 교체할 예정이다. 무려 100억원의 예산이 들어간다고 한다.
‘센터(center)’는 영어에선 ‘중앙’ ‘장소(곳)’ 등의 의미로 두루 쓰이는 말이다. 우리말에도 깊숙이 파고들어 ‘서비스센터’ ‘컨벤션센터’ ‘클리닉센터’ 등 ‘센터’란 말이 흔히 쓰이고 있다. 하지만 일반 기업체도 아니고 국가기관인 ‘동사무소’가 영어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글문화연대 등 한글단체가 명칭 변경은 예산을 낭비하고 우리말과 우리 국민을 깔보는 처사라며 재고할 것을 요구해 왔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명칭 변경 전에 한글단체나 국립국어원 등과 협의 한 번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한글문화연대가 전문기관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반대가 58.7%로, ‘센터도 괜찮다’는 의견(37.6%)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고 한다. 이 단체는 현재 동사무소 이름 변경에 반대하는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동사무소’가 ‘동주민센터’면 ‘면사무소’는 ‘면주민센터’, ‘읍사무소’는 ‘읍주민센터’가 돼야 한다. 그 밖에도 ‘사무소’란 이름이 적지 않으니 관청이 온통 ‘센터’라는 명칭으로 가득할 판이다. 이 정권은 개혁과 혁신을 한다면서 여기저기 영어식 이름을 갖다 붙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했다. 다음 정권에서는 이런 것도 바로잡아야 한다.
아이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 주다
→ 아이 손에 퓨대전화를 '쥐여' 주다
어린아이에게 휴대전화를 내줄 때만큼이나 신중히 사용해야 하는 게 ‘쥐어 주다’와 ‘쥐여 주다’는 말이다. “아이 손에 휴대전화를 쥐어 주나요”와 같이 흔히 표현하지만 “아이 손에 휴대전화를 쥐여 주나요”로 고쳐야 맞다. ‘쥐여 주다’는 ‘쥐다’의 사동사 ‘쥐이다’에 ‘-어 주다’가 연결된 형태다. 왜 ‘쥐어 주다’가 아닌 ‘쥐여 주다’를 써야 할까?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님이 애들에게 밥도 먹여 주고 옷도 갈아입혀 주는 등 고생하신다”고 해야지 “어머님이 애들에게 밥도 먹어 주고 옷도 갈아입어 주는 등 고생하신다”고 하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어머님이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게 아니므로 ‘먹다’와 ‘갈아입다’의 사동사 ‘먹이다’ ‘갈아입히다’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애끊다 / 애끓다
‘애’는 ‘창자’의 옛말이다. ‘애를 끊나니’라는 표현에서 그 슬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애끊다’는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질 듯한’ 상황에 쓰이는 말이다. ‘단장(斷腸)’이란 말도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함’을 뜻한다. 흔히 ‘단장의 슬픔[비애]’처럼 쓰인다.
“청령포 안의 단종(端宗) 어소(御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서 마주한 소나무들 중 몇 그루는 담장을 넘어 큰절을 올리듯 절묘하게 굽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니 나 또한 마음의 큰절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소를 나와 내딛는 걸음마다 단종의 애끓는 마음이 알알이 닿는 느낌이었다.”
예문의 ‘단종의 애끓는 마음’ 자체는 틀린 표현이 아니다. ‘애끓다’는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라는 뜻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임금 자리에서 밀려나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당한 단종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애끓는 심정’이기도 했겠지만 애가 끊어질 듯 매우 슬프지 않았을까.
‘애끓다’와 ‘애끊다’는 ‘끓다’와 ‘끊다’에서 두 단어의 의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애끓다’는 걱정·분노·울분·원망 등으로 속이 끓거나 타는 듯한 상태를, ‘애끊다’는 슬픔이 극한에 이르러 마음이 쓰리고 아픈 상태를 가리킨다.
사동사는 문장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 행하지 않고 남에게 행동이나 동작을 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 어머님이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는 주체가 아니라 애들에게 밥을 먹도록 해 주고 옷을 바꿔 입도록 해 주는 것이므로 사동사를 써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손에 무엇인가를 쥐도록 해 줄 경우도 마찬가지다. ‘쥐다’의 사동사 ‘쥐이다’를 사용해야 한다. “아버지는 초등학생이던 딸의 손에 처음 골프채를 쥐어 줬다”처럼 써서는 안 된다. ‘쥐여 줬다’로 바루어야 한다.
'나의' 살던 고향 → '내가' 살던 고향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가 지은 시에 홍난파가 곡을 붙인 ‘고향의 봄’이다. 국민동요라 할 만큼 많이 불리는 노래로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노래 제목보다 ‘나의 살던 고향’이란 첫 구절이 귀에 더 익어 책이나 음식점 이름 등으로 두루 쓰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살던 고향’은 ‘의’를 잘못 사용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친다. ‘내가 살던 고향’이 정상적인 우리말 어법이다.
우리말에선 원래 조사 ‘~의’가 흔하게 쓰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가리키는 ‘나, 너, 저’를 예로 들면 조사 ‘ㅣ’가 붙어 ‘내, 네, 제’로만 사용됐다.
‘~의’가 붙은 ‘나의, 너의, 저의’ 형태는 조선 후기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해 개화기에는 흔히 쓰이게 됐다고 한다. 일본어에서 여러 가지 문장성분으로 사용되는 조사 ‘노(の)’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시 ‘나의 침실로’는 ‘내 침실로’가 원래 우리말 어법이다.
요즘 들어선 ‘~의’를 남용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정치의 변화하는 모습을 고대하고 있다”는 “정치가 변화하는 모습을~”로, “스스로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스스로 한 약속을~”로 바꿔야 한다.
“소득의 향상과 식생활의 서구화로 쌀의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에서는 명사와 명사 사이에 모두 ‘~의’를 사용했으나 이 역시 ‘명사+의(の)+명사’로 이뤄진 일본어식 표현이다. ‘의’를 빼고 “소득 향상과 식생활 서구화로 쌀 소비량이 부쩍 줄었다”로 하는 것이 훨씬 간결하고 깔끔하다.
'수십만개’의 띄어쓰기
한 개도 없더니
한 개도 없더니
마음 슬픈 밤에는 하늘 가득 별이다.
수만개일까 / 수십만개일까?
울고 싶은 밤에는 가슴에도 별이다.
온 세상이 별이다.
위 시에서 밑줄 그은 ‘수십만개’의 띄어쓰기가 바른 것은?
①수십만개
②수 십만 개
③수십만 개
④수 십 만 개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국어시험 문제 중 하나다. ‘수십만(數十萬)’은 십만의 두서너 배가 되는 수, 또는 그런 수를 뜻하는 관형사 또는 수사다. 이때 ‘수(數)~’는 몇, 여러, 약간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다. ‘수십, 수백,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수억만’이 모두 같은 경우다. 뒤에 붙은 ‘개’는 낱으로 된 물건을 세는 단위를 뜻하는 의존명사로 띄어 써야 한다.
'빅뱅의 책은 수십만 달러의 선인세를 주고 들여온 그 어떤 자기계발서보다 더 많은 감동을 안겨준 책이다.' '유투브는 세계적으로 사용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매일 수십만 건의 동영상이 올라오고 있다'처럼 쓰인다. 그러므로 정답은 ③수십만 개.
잘못하다 / 잘 못하다
우선 ‘잘하다’를 보자. 이 말의 대표적인 뜻은 ‘옳고 바르게 하다’(“평소에 처신을 잘해라”), ‘좋고 훌륭하게 하다’(“공부를 잘한다”), ‘익숙하고 능란하게 하다’(“수영을 잘한다”), ‘버릇으로 자주 하다’(“그녀는 웃기를 잘한다”) 등이다.
‘잘하다’의 반대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잘못하다’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그릇되게 하다’ ‘옳지 못한 일을 하다’를 의미한다. 둘째는 ‘못하다’이다. ‘못하다’는 ‘(어떤 일이나 행동을) 능력 부족으로 일정한 수준에 못 미치게 하다’,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보다, 또는 다른 대상에 비해) 그 질이나 수준이 낮다’를 뜻한다.
그러면 ‘잘 못하다’는? 이것은 하긴 하는데 잘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못하다’는 보조동사이며, ‘잘’은 ‘잘하지’에서 ‘하지’가 생략된 것으로 본다. 이렇듯 ‘잘못하다’와 ‘잘 못하다’는 띄어쓰기 하나 때문에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첫날밤 / 첫날 밤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가슴이 뛰고 설렌다. 일평생의 동반자를 만나 두 사람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 첫걸음을 떼는 날. 결혼식이 있는 날. 이날 신랑과 신부가 맞이하는 초야(初夜)는 우리말로 ‘첫날밤’이다.
‘신혼여행지에서 호텔 예약이 잘못돼 우리는 첫날밤을 장급 여관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치 첫날밤을 맞은 신부처럼 가지런한 몸짓으로 말없이 방문을 들어섰다.' 이처럼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밤이라는 뜻으로 쓰일 경우 ‘첫날밤’ 이렿게 붙여 쓴다.
띄어 쓰는 ‘첫날 밤’은 어떤 때 사용되는가. '지금도 싱가포르로 여행을 가서 지낸 첫날 밤이 기억난다.' '애들이 미국에서 왔다. 2년 만이다. 행복한 서울의 밤을 만들어 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도착 첫날 밤을 고스란히 설쳤다.' 이럴 때는 첫날과 밤을 띄어서 '첫날 밤'으로 쓴다.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밤은 첫날 밤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첫날밤'으로 붙여 쓰고, 어디론가 여행을 가거나 집을 떠나, 다시 말해 장소를 이동해 그곳에서 보내거나 맞이하는 첫째 날 밤을 얘기할 때는 첫날과 밤을 띄어 쓴 ‘첫날 밤’이 바른 표기다. 첫째 날 밤은 ‘첫날 밤’으로 띄어 쓰는 것이다.
챙피→ 창피
‘애기’는 ‘아기’에서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말로 ‘아기’가 바른 표현이다. ‘ㅏ, ㅓ’ 등이 ‘ㅣ’ 앞에서 ‘ㅐ, ㅔ’로 바뀌는 현상을 ‘ㅣ’ 모음 역행동화라 한다.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는 이유는 발음하기 쉽기 때문이다. 맞춤법에서는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말을 방언으로 보아 원칙적으로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발음의 편의성으로 인해 ‘어미’를 ‘에미’로, ‘아비’를 ‘애비’로 부르는 사람이 많지만 이를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런 예다.
‘챙피’도 대표적으로 잘못 쓰는 말 가운데 하나다. '그 사람이 보내온 문자는 보는 내가 다 챙피할 지경이었어'에서처럼 부끄럽다는 의미로 ‘챙피하다’고 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역시 ‘창피하다’에서 ‘ㅣ’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난 말로 바른 표현이 아니다. '넌 창피한 줄도 모르지' '창피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에서와 같이 ‘창피하다’고 해야 한다.
맞춤법이 인간관계를 좌지우지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맞춤법을 틀려도 창피한 줄 모르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영어 철자를 틀리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면서 우리말을 잘못 쓰는 것은 창피한 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들이켜다 / 들이키다
물이나 술 따위를 단숨에 마구 마시다고 할 때 ‘들이키다’로 표현하는 이가 많다. “치킨을 안주로 맥주를 들이키는 문화”와 같이 쓰는 건 잘못이다. 동사 ‘들이켜다’가 와야 한다. ‘들이키는’을 ‘들이켜는’으로 고쳐야 바른 문장이 된다.
‘들이켜다’는 몹시·마구·갑자기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들이-’와 물이나 술 따위의 액체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기다는 의미의 동사 ‘켜다’가 결합해 만들어진 말이다. 들이켜니, 들이켜고, 들이켜면 등으로 활용된다. '맥주의 참맛은 땀 흘린 뒤 한 잔 들이킬 때의 시원함이 아니겠는가'처럼 사용해선 안 된다. ‘들이킬 때’를 ‘들이켤 때’로 고쳐야 한다. ‘들이켜다’는 공기나 숨 따위를 몹시 세차게 들이쉬다는 뜻도 있다.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들이켰더니 머릿속까지 청량해지는 느낌이다'와 같이 쓰인다.
‘들이키다’는 안쪽으로 가까이 옮기다는 의미의 동사로 들이키니, 들이키고, 들이키면 등으로 활용된다. '지하철에 앉을 땐 서 있는 이를 위해 발을 들이키는 게 예의지'처럼 사용한다.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화분을 들이켜라'의 경우엔 ‘들이키어라’가 ‘들이켜라’로 줄어든 것이지 ‘들이켜다’가 기본형이어서가 아니다.
물·술 따위를 목구멍 안으로 빨아들이다, 공기·냄새 따위를 입이나 코로 빨아들이다는 뜻의 동사 ‘들이마시다’도 ‘들여마시다’로 잘못 알고 있는 이가 꽤 있다. ‘들이마시다’는 접두사 ‘들이-’와 ‘마시다’가 결합한 말이다. '두부는 위 속에 머물며 알코올 흡수를 낮추고 공복감에 맥주를 들이마시는 것을 방지한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라'와 같이 써야 한다.
안갯속 / 안개 속
미세먼지와 관련해 신문 등에서 '안갯속 살인자, 미세먼지' '잿빛 먼지 안갯속으로 빌딩 숲 모습 감춰'와 같은 글의 제목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안개가 끼어 있는 상황을 나타낼 때 위에서와 같이 ‘안갯속’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 ‘안갯속’은 한 단어로 인정돼 표제어로 올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든 ‘안갯속’을 써도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안갯속’은 안개가 끼어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안갯속’은 어떤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프로농구 우승 경쟁 안갯속으로' '선거의 향방은 안갯속으로'와 같이 쓸 수 있다. ‘안갯속’은 무슨 일에 대해 갈피나 방향을 잡을 수 없음을 뜻하는 ‘오리무중’과 비슷한 말이다.
그렇다면 진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는 상황을 가리킬 땐 어떻게 써야 할까. '짙은 안개 속 과속이 사고를 불렀다' '자욱한 안개 속 도심' 등과 같이 ‘안개 속’으로 써야 한다. 또한 ‘안개 속’은 한 단어가 아니므로 띄어 써야 한다.
이와 비슷한 게 ‘뱃속’과 ‘배 속’이다. 둘은 서로 의미가 다르다. '욕심은 났지만 친구에게 양보하고 나니 뱃속이 편하다' '그 사람은 뱃속이 검으니 조심해야 한다'에서처럼 ‘뱃속’은 ‘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안갯속’과 ‘뱃속’은 관용적으로 사용돼온 비유적 표현이므로 한 단어로 인정된 것이다.
‘배 속’과 같이 ‘배’와 ‘속’을 띄어 쓰면 말 그대로 배의 안을 의미한다. '배 속 태아의 발길질이 신기하기만 하다' '탈이 났는지 배 속이 콕콕 쑤시고 아프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아내분 / 부인
‘아내’는 ‘혼인하여 남자의 짝이 된 여자’를 이르는 단어다. 한자어 ‘처(妻)’와 의미가 같다. ‘-분’은 앞에 나오는 말에 ‘높임’의 뜻을 더해주는 접미사다. 그래서 남의 배우자를 높여 일컫는 말로 ‘아내분’이란 표현도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고도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를 수 있다. ‘부인’을 쓰면 된다. 위의 사례는 간단하게 ‘부인께서’ ‘부인 생일에’ ‘○○○씨 부인’으로 표현할 수 있다.
‘부인’은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르는 단어인 만큼 “나는 부인이 친정에 가서 당분간 혼자 지내야 합니다”와 같이 남 앞에서 자신의 아내를 ‘부인’이라고 일컬으면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처가/ 집사람이/ 안사람이 친정에 가서”라고 하면 된다.
‘영부인’이란 표현도 있다.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많은 이가 ‘퍼스트레이디’를 일컫는 말로 알고 있으나 남의 아내를 높여 일컫는 일반적 표현이므로 대통령만이 아니라 ‘김 과장님 영부인’처럼 써도 된다.
‘영애(令愛)’ ‘영식(令息)’ 등도 대통령의 딸과 아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의 딸과 아들을 이를 때 두루 쓸 수 있다. 물론 따님·아드님처럼 쉬운 말로 쓰면 더 좋다.
추켜세우다 → 치켜세우다
‘치켜세우다’는 ‘정도 이상으로 크게 칭찬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한때는 사람들이 그를 영웅으로 치켜세운 적도 있었다” “감독은 선수들을 치켜세웠다”처럼 쓰인다.
그러나 많은 이가 ‘치켜세우다’를 ‘추켜세우다’로 잘못 쓰곤 한다. ‘추켜세우다’는 ‘위로 치올리어 세우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쓰는 단어다. “그는 놀란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몸을 추켜세우고는 딱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가 이런 경우다.
“모두가 그를 애국자라 추어올렸다”에서와 같이 과하게 칭찬한다는 의미로 ‘추어올리다’를 쓰기도 한다. ‘추어올리다’ 대신 ‘치켜올리다’나 ‘추켜올리다’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모두 잘못된 표현이다.
‘치켜올리다’는 ‘추켜올리다’와 ‘추어올리다’의 북한어다. ‘추켜올리다’는 크게 칭찬한다는 뜻이 아닌 ‘위로 솟구어 올리다’는 의미만 지니고 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추켜올리며 걸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정리하면 ‘치켜세우다’와 ‘추어올리다’만 크게 칭찬한다는 의미로 쓸 수 있다.
'와중에'의 올바른 사용
연도 / 년도’
한 해를 마무리할 때다. 회사에서는 각종 결산을 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학기와 학년을 마무리해야 하고 졸업과 입학을 앞두고 있다. 이 시기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연도’와 ‘년도’ 표기에 관한 것이다. ‘결산연도/결산년도’ ‘회계연도/회계년도’ ‘졸업 연도/졸업 년도’ ‘입학 연도/입학 년도’ 중 어떤 표현이 맞는지 헷갈린다는 사람이 많다.
‘연도’와 ‘년도’ 둘 중 하나가 틀린 표현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연도’와 ‘년도’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각각 올라 있는 단어로, 상황에 따라 골라 써야 한다.
‘년도’는 “이제 며칠 있으면 2020년도가 된다”에서와 같이 해(年)를 뜻하는 말 뒤에 쓰여 일정한 기간 단위로서의 그해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연도’는 사무나 회계 결산 등의 처리를 위해 편의상 구분한 일 년 동안의 기간을 의미한다. 대표적으로 ‘결산연도’가 있다. 경제 활동에 대한 계산을 마감하는 대상이 되는 연도를 결산연도라 한다. 보통 해당 연도의 1월 1일부터 12월 말일까지가 대상이 된다. ‘회계연도’ 역시 회계의 편의를 위해 보통 1개년을 기준으로 한 일정한 기간을 의미하므로 ‘년도’가 아닌 ‘연도’를 써야 한다.
‘졸업 연도’ ‘입학 연도’의 경우에도 일정한 1년간의 기간을 나타내므로 ‘년도’가 아닌 ‘연도’를 사용해야 한다.
‘2013년도 출생자’ ‘2020년도 예산안’ 등처럼 특정 해를 나타내는 말 다음에는 ‘년도’가 쓰이고, ‘발행 연도’ ‘제작 연도’ 등과 같이 숫자가 아닌 낱말과 결합할 경우 ‘연도’가 쓰인다고 생각하면 구분이 쉽다.
첫댓글 좋은 정보.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