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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주일설교- 산너머 산 험난한 성경 해석
하나님의 말씀 함께 보시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을 한 절씩 교독해서 읽고 마지막 절은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아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다 같이 읽겠습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육신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이제 담임 목사님께서 나오셔서 산너머 산 험난한 성경 해석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해 주시겠습니다.
목사님 십자가 강도의 구원이 궁금해요. 생각이 없는데 사서 보시기 바라고요.
오늘 설교 제목을 보니까 어떠세요? 험난하겠다 싶죠? 오늘 설교가 쉽지 않겠다.
산너머산 험난한 성경에서 이런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제가 산을 아주 좋아하는데 운동을 하기 위해서 산을 찾습니다.
그래서 운동하기 위해서 산행할 때뿐만이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산너머 산을 직면할 때가 많아요. 산 넘어 산을 경험할 때가 많아요. 여기서 산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생각지 못한 변수 또 반론들을 뜻합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저는 예외 없이 산 너머 산을 경험을 했어요. 산을 처음 탈 때는 신나요? 곽소영 목사가 지금 와가지고 첫날 탈 때 굉장히 좋아하더라고. 근데 이제 그다음 날 계속 산 넘어 산을 넘어가니까 힘들어 죽으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산을 처음 탈 때는 시인하지만 계속해서 산을 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근데 넘어야 될 산을 다 넘어야 돼요. 그래야 산삼이 나타나요. 산을 하나만 넘고 그러면 소나무밖에 못 봐요. 그래야 산삼이 나타나고 더덕이 나타나고 성공적인 산행을 할 수가 있고, 또 여러분 넘었던 산을 다 넘어야 넘어야 될 산을 결국 다 넘어야 산행을 끝낼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반론의 산들을 다 넘어야 진짜 해석이 완성이 되는 거예요. 내가 깨달았다. 그 깨달은 게 아니에요.
내가 연구했다. 연구한 게 아니에요. 그냥 다 자기 생각이야. 계시다 깨달았다. 그거 믿으면 안 돼. 다 자기 생각이야. 주석을 봤다 연구했다. 강의 설교 이런 거 믿으면 안 돼. 다 자기 생각이야. 여러분 반론들을 전부 잡아야 돼. 반론들을 전부 다뤄야 돼. 이 반론의 선을 완전하게 넘을 수 있어야 돼. 그래야 여러분 해석이 완성이 된 거예요.
이것이 제가 설교할 때마다 해석에 그치지 않고 설명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나중에는 반론을 다루는 이유예요.
근데 반론을 다루는 시간이 사실은 제일 어려워요. 제일 힘들고 제일 딱딱합니다. 요즘 목회자들을 보면 반론을 그렇게 길게 다루는 설교가 별로 없어요. 과거에는 안 그랬어요. 존 웨슬리나 존나든 에드워드나 차스핀이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설교를 보면 바벨론을 5가지 6가지 10가지 막 쫙 다릅니다.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반론을 다 더해 그러지 않으면 사람을 속이는 거지 진짜 성경의 의미를 드러낸 게 아니에요.
그러지 않으면 성경에 대한 진짜 해석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제가 반론을 다룰 때마다 왜 딱딱하고 어려운 이런 반론들을 다뤄야 하나 다른 목사님들은 안 그러시던데 이렇게 생각하는 성도님들이 꼭 있어요. 꼭 이 자리에도 있어요.
소수지만 그 목사님들은 주석이나 강의 설교집에서 읽고 배운 것들, 즉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이미 여러분 합의가 되고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들을 설교를 합니다. 주로 그래서 간단하게 때로 반론을 다루기는 해도 저처럼 1시간 혹은 2시간에 걸쳐서 반론을 다룰 필요가 없어요. 사실 이 반론이 오늘 한 시간에 끝날 줄 알았어요. 근데 교계 한 고명한 분이 새로운 반론을 문자로 보내서 내 해석에 대한 반론을 문자로 보내 마세요.
그래서 어제 설교 준비하는데 그것까지 하니까 그것까지 준비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
제가 12시 10분에 설교 준비가 끝났어요. 밤 12시 10분 집에 가니까 12시 반 자려고 누웠는데 막 성경이 깨달아져 미치겠어.다시 일어서 일어나서 성경을 피고 연구하고 쓰고 다 잘 나오니까 또 깨달아져 또 불 켜고 일어나고 10번 이상을 그런 것 같아.새벽 2시 40분까지 그러고 있었어요.
새벽 2시 40분까지 말씀하고 씨름하고 연구하다가 게지금 조금 전에 내가 이 안약을 넣고 왔어요.
새벽 2시 40분 그다음에 이제 비로소 누워서 잠을 자는데 이제는 깨달아진 건 없는데 웬종일 연구한 데다가
새벽 2시 40분까지 연구하니까 이 머리가 정신이 깨어 있어.정신이 늘 하는 말이지만 정신이 깨어 있어. 정신이 깨어 있어서 침대에 누워 있어. 잠을 자는데 잠이 안 와요. 정신이 그렇게 2시간 이상 이었어요. 그러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몰라. 그다음에 이제 오늘 아침에 이렇게 나와서 설교를 한 거야. 그래서 제가 목소리 톤을 낮게 하는 거야. 체력이 딸릴 수 있다.나중에 이 설교 제대로 못할 수 있고 목이 갈라질 수 있다.그래서 일부러 지금 작은 톤으로 여러분들에게 설명을 하는 거예요.보통은 그래서 이 설교가 무슨 얘기냐 지금 산 넘어 산인데 비박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당일 치기로 안 된다. 이거 당일 치기로 가까울 게 아니 너무 넘어야 될 산이 많아가지고 나도 1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두 타임은 최소한 할애를 해야 돼.그러니까 이틀을 산행을 하려고 그러면 천상 산에서 비박해야 돼.
비박이 뭔지 아세요? 텐트 갖고 가는 게 아니라 넓은 비닐로 이렇게 둘둘 말아서 가지고 가가지고 양쪽에 산에서 막대기를 꽂아가지고 그 위에 줄을 연결하거나 긴 나뭇가지 하나 연결하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씌우는 거예요.
그러고 난 다음에 흙으로 이렇게 해서 그 안에서 자는 거야.그게 여러분 비박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음 주까지 이제 비박해야 됩니다.보통 반론을 가끔 다루기는 해도 저처럼 이렇게 1시간 또는 2시간에 걸쳐서 어떤 해석에 대해서 반론을 다룰 필요가 없어요. 목사님들은 대부분 그러나 저는 고군분투를 한 끝에 어느 주석이나 강의 집에도 나오지 않는 초유의 해석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런 초유의 설명들을 설교할 때가 많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제가 해석만 하고 반론들을 다 다루지 않으면 다른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뭐라 그랬어요? 여러분들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들을지 몰라도 그 사람은 대부분의 그걸 지적을 한다고 그다음에 반론을 한다고 그냥 반론에 대해서 내가 설명을 할 수 있는 건데 설명을 안 하면 성도들이 그 얘기만 듣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변 목사님 해석이 틀렸구나 이게 맞는 거구나 이렇게 돼버린다니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돼버리고 모든 것이 무효가 돼버린다니까. 그러니까 반론을 다루는 것은 설교에 있어서 선택 사항이 아니에요. 반론은 필수적인 거예요.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성경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서 반론은 제가 선택할 자유가 없어요. 반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도 반론은 좀 안 했으면 좋겠어.
반론은 어려워 딱딱해 여러분들이 이렇게 선택할 자격이 없어요.
설교자에게도 선택할 자격이 없고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도 선택을 그냥 대강대강 대강대강 성경을 알고 대강대강 신하라면 그러면 되지만 정말 진리를 옳게 분별하고 정말 성경을 제대로 깨닫고 말씀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에서 사역하겠다 그러면 여러분 바론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야만 해석이 유효한 것이지 아무리 해석하고 아무리 설명하고 아무리 설교에서도 반론을 다 다루지 않으면 해석은 그 해석은 유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더구나 본문에 대한 새 해석은 새 해석은 이보다 7배나 중요한 진리들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 해석이 옳다는 것을 빈틈없이 증명해야 비로소 그 뒤에 어마어마한 진리들을 깊고 오묘한 진리들을 신비한 진리들을 여러분들하고 나눌 수 있어요. 근데 그 뒤에 안만설님에게 맺자 반론을 제대로 다루지 않으면 이거는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은 거예요.그 해석이나 설교가 반석이에 집처면 흔들리지 않아야 되는데 모래의 집 같아서
다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예요. 그 설교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들이 인내심을 가시고 초집중해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를 비로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기도 부탁하고 싶은 것은 어제 제가 새벽 2시 40분까지 씨름을 한 게 똑같은 주제를 가지고 지난주 수양관에서 올라가서 월요일 밤인가 화요일 밤에는 새벽 3시 40분까지 시립했어요.
이동기 목사님하고 토론하면서 새벽 3시 40분까지 그다음 날에도 또 씨름하고 그 어제는 새벽 2시 40분까지 똑같은 걸 가지고 씨름을 했어요. 주석에도 이게 굉장히 어렵다. 그렇게 나와 있더라고 근데 정말 굉장히 어렵더라고 어떤 게 맞는지를 알려고 그러면 이게 너무 어렵더라고 정확하게 알려고 그러면 너무 어려워 여러분들 기도하실 때 마태복음 5장 22절 22절인데 21절에서 26절까지 정확하게 분별하고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저에게
부어달라고 어제 또 해석이 뒤집혔어요.
새벽 2시 반까지 40분까지 하면서 그래서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지혜와 분별력을 달라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꼭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기도가 세가지고 하나님이 역사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제 새벽 2시 40분에 자고 실제 잠은 그로부터도 2시간이나 지나야 아마 잠이 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졸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졸 테니까 저는 그래도 내가 좋을 테니까 여러분은 절대로 졸지 말고 집중해서 오늘 말씀을 잘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따라해볼까요? 첫 번째 산 14절에 나오는 왜냐하면 참 대지부터 딱딱해요. 그죠? 첫 번째 산 14절에 나오는 왜냐하면 이 산의 이름은 왜냐하면이라는 산이 이제 왜냐하면 산을 제일 먼저 우리가 올라가고 정복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로마서 7장 7절 이하 13절과 14절 이하 25절의 관계에 주목해야 됩니다.
7절에서 13절은 구원받기 전인 육신이 있을 때 즉 율법 아래에 있을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14절에 25절은 여러분들이 잘 들은 대로 구원받은 신자가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길 때의 상태를 묘사한 거예요.그러니까 두 단락이 서로 내용이 다르죠. 그죠?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두 번째 단락을 시작하는 14절에 두 번째 단락에 시작하는 14절에 우리말 성경에는 없으면 이게 이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한데 왜냐하면 이 있어요. 이런 얘기 많이 들었을 거예요. 여러분 왜냐하면이 있어요. 그래서 토마스 슐라이너는 본문이 구원받기 전의 상태다. 제가 본문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당일 본문은 뭐를 읽었든지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을 가리키는 겁니다.그죠? 거기에 나오는 탄식 그걸 가리키는 겁니다.그걸 여러분 이해하고 그렇게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본문이 구원받기 전의 상태라는 견해의 근거들을 소개하면서 이것을 이렇게 언급을 했습니다.
두 번째 구조적 논쟁은 13절과 14절 사이의 연관성과 관계에 있다. 13절은 율법이 아니라 죄가 사람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14절을 소개하는 가르는 율법이 아니라 죄가 어떻게 인간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이유로서 기능한다.이제 만일 14절에서 25절이 13절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또한 13절이 비중생자를 가리킨다면 이 구절이 사망과 율법 경험을 연결시키기 때문이다.14절에서 25절은 당연히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13절과 14절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전에 논의의 주제가 율법이라고 할 때 바울이 비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부터 중생자의 경험으로 변경시켰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까 7절에서 13절이 불신자의 경험이기 때문에 그다음에 가르로 시작하기 때문에 14절부터 14절에 25절 본문도 불신자의 경험이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거든요. 그러면 이게 저가 본문에 대한 저의 해석하고 다르잖아요.그죠?
그래서 이 산을 넘어야 된다는 거야. 왜냐하면 이라는 산을 넘어야 된다는 거 가을이라는 산을 왜냐하면 이라는 산을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된다는 거야.그래야 재해석이 옳은 해석이 되는 거지. 이걸 못 넘으면 이거 왜 그런데 왜 여기 왜냐면이라고 돼 있지 이걸 못 넘으면 죄 해석은 여러분 틀린 해석이 되는 것이죠.틀린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이것 때문에 본문이 구원받은 신자가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길 때 상태라는 제 해석이 틀린 것이 아니냐 이런 반론이 가능하다는 거예요.이런 반론 그 반론에 대해서 답을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 반론을 무마시키지 않으면 제가 본문에 대해서 해석한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무효가 된다
그런 애기입니다. 바울은 7절 이하 13절까지 자기 과거의 경험을 달았어요. 그것을 통해서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죄를 이어 순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근데 14절부터는 바울의 경험이 아니에요. 13절까지는 바울의 경험인데 14절부터는 바울의 경험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1인칭 단수와 현재 시대 때문에 14절 이후에 사용된 1인칭 단수와 현재 시대 때문에 이것이 바울의 경험이다. 그다음에 그의 현재 상태를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구원받은 신자들의 현재 상태다. 정상적인 상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바울은 이미 7절부터 1인칭 단서를 사용했어요. 그 이유가 뭐냐? 그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의 전형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고 율법으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그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판단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바울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14절 이후에도 계속 자신을 예로 들고 있다는 거예요. 더구나 그때부터는 이제 전에는 과거 시제였는데 14절부터 현재 시제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게 굉장히 어려운 것인데요. 그러나 바울이 현재 시를 사용한 이유는 본문이 자기 현재 상태여서가 아니에요. 자기 현재 상태이기 때문에 상태를 현재 체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단지 본문을 포함해서 본문에서 본문을 통해서 자신을 포함하고 있는 거. 그래서 1인칭 단속은 나를 하는 거예요. 자신은 예외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도들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고 자신도 율법 조문에 무엇을 행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상태가 아니지만 1인칭 단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다음에 이것이 구원받은 신자들이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길 때 되어질 상태를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1인칭 단서뿐만 아니라 과거 시대와 달리 현재 시대를 사용했다는 거예요. 7절이 13절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지만 14절에 25절은 구원받은 후의 상태, 구원받은 사람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 율법 조문에 묵은 것을 섬길 때 되어질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1인칭 단수뿐만이 아니라 현재 시즌을 사용했다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라는 거예요. 이걸 정리를 해보면 7절이야 13절은 구원받기 전인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상태입니다. 그다음에 14절에 25절은 구원받은 신자가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길 때 되는 상태를 리얼하게 묘사를 한 거예요. 리얼하게 1인칭 단수가 현재 시제를 사용해가지고 그게 자기도 율법을 따라 행하면 능력이 이렇게 될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걸 여러분 리얼하게 묘사를 한 거예요. 그래서 과거와 현재 과거와 현재 이렇게 시제가 서로 달라요.
하지만 이게 다른 점만 있느냐 다른 점만 있으면 가을 쓸 수가 없어요. 연결이 안 돼 그냥 다른 주제로 딱 넘어가야지 가르는 가요와 같은 거기 때문에 이게 다른 점만 있느냐 그렇지가 않아요. 둘 다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길 때 되는 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이런 공통점이 있잖아요. 그죠 믿기 전과 후라는 시제의 차이는 있어도 둘 다 율법으로 섬길 때 성령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율법 조문에 묵은 것을 섬길 때 되어지는 사람의 상태를 설명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러므로 두 단락을 14절에서 왜냐면으로 연결한 것이 조금 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거야. 지난주에도 설명을 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이에요. 또한 본문을 구원받은 신자가 율법 조문에 묵은 것을 섬길 때 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이렇게 보아도 14절에 왜냐하면과 모순이 아니라는 거예요. 14절의 왜냐면과 조화가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14절에 왜냐하면을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이미 설명해 드린 본문이나 해방에 대한 저의 새로운 해석이나 설명이 틀렸다 그렇게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산 하나는 넘었어요. 이제 산 하나 넘었는데 이건 좀 얕은 산이에요. 이렇게 높지 않은 산 두 번째 따라 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산 로마서 8장 1절에 결코 이 산이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이 높은 산이고 이게 산이 가파른 산이에요. 산은 높은 산이 단순히 힘든 게 아니라 가파른 산이 7배는 힘든 거예요.이 산은 높은 산이고 이 산은 가파른 산이에요. 로마서 8장 1절에 결코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두 주 전에 제가 로마서 8장 2절에 해방의 참 의미를 설명한 설교를 올렸는데요. 거기에 바다 별빛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우리 교회 성도님이 댓글을 다셔서요.댓글을 달았는데 이런 댓글입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해방이 거듭남을 의미한다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해석되는 것이 아닌지요.
왜냐하면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2절에서 말하는 것인데, 2절에서의 해방을 거듭남으로 보면 거듭났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얘기인지 이해되시죠? 해방을 나처럼 해석을 하면 해방을 거듭 날과 동일시하면 결코라는 단어 때문에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된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되기 때문에 해방을 그런 의미로 볼 수가 없다 그런 내용이에요. 해방을 그런 의미로 볼 수가 없다. 이게 정당한 질문이에요. 정당한 질문인데 제가 댓글을 다 읽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제가 다른 댓글은 다 못 읽어도 산행 일기 그게 얼마나 힘들게 쓰는 일기인데 그게 그게 얼마나 설교 준비 다음으로 힘든 게 사내 일기 준비에요.산내일기 댓글 반드시 봅니다. 그리고 산행일기에 댓글을 달았는데 회원 등급이 낮다. 반드시 반드시 승격시켜줍니다. 댓글 너무 안 다셔 그다음에 주일날 예배 설교 댓글 반드시 봅니다.이 두 가지에 대한 거는 제가 반드시 봅니다. 하나도 안 빼고 모든 댓글들을 다 읽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댓글 보는 게 낙이니까 만날 사람도 없고 누구 만날 사람도 없고 전화할 사람도 없고 이게 댓글 보는 게 낙이니까 댓글 좀 열심히 웬만하면 좀 달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애만 놈은 좀 따라주시길 바라고요. 참 진심이야.
아무튼 여러분 그래서 해방이 제가 설명한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느냐 이런 내용인데요. 내가 이 댓글 보고 우리 교회 성도님들 참 무섭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참 무섭다 그런 생각이 제가 그전에 이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 답을 미리 써놓지 않았다면 원고에 이미 다 써놓은 내용을 지금 설교하고 있는 건데 그러지 않으면 어쩔 뻔했는 거야.
여러분 이래서 복잡하고 어려워도 반론들을 다루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에요. 반론을 다루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우리 교회 성도님도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는데 신학자들이 가만히 있겠느냐고 목사들이 가만히 있겠다 일방적으로 말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반드시 복잡하고 어려워도 반론들을 다뤄야 나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진리들을 가족들에게 설명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도 그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하면 반론에 답을 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냥 설명만 해석에 대한 설명만 들었다고 그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이 아니에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에요. 반론들까지 숙지를 하고 소화를 해야 정말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소화한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그래서 반론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이런 거 왜 이렇게 어려운 얘기들을 자꾸 다루지 그건 필수적이기 때문에 다루는 거예요.필수적이기 때문에 안 다뤄도 되는 거면 다룰 필요가 없죠. 그거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고요.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1절을 읽을 때마다 이 성도님이 지적한 1절을 읽을 때마다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이해가 되질 않더라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아.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에요.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는 죄를 이기고 순종해서 정제를 받지 않도록 조심해라 노력해라 이렇게 말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왜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 나 같으면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을 텐데, 나 같으면 절대로 성도들에게 말하지 않을 텐데 바울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 나와 다르게 바울은 왜 이렇게 말을 했을까? 이것이 늘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칼빈주의자들은 이 단어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근거이냐 신이 나서 막 떠들어댑니다. 주석들을 보면 봐라.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그러지 않았냐 그리스도인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버림받는 거 아니다. 막 신이 나서 막 그건 떠드는 거야.
떠드는 거 설교가 아니고 그냥 막 신이 나서 떠들어댑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지 그거를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싶었어요. 몇 년 전인지 몰라 10년 전인지 20년 전인지, 30년인지 40년 전 오래전부터 그 이유를 알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실제로 수년 전에 이 구절에 그 모든 주석을 다 펴놓고 읽었어요. 로마서 8장 1절에 대한 모든 주석을 편노스 읽고 그러면서 답을 찾았어요.
어디에도 답이 없더라고. 어느 주석에도 어느 강연 설교집에도 이걸 다룬 게 제대로 다룬 게 없고 여기에 대한 시원한 답이 없어요. 그래서 해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냥 덮어뒀습니다. 근데 이번에 본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면서 이게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른 거예요. 이게 다시 문제가 돼버린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제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2절에 이은이 보여주는 것처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이에요. 해방했기 때문에 그래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죠? 그렇게 보이죠. 그렇게 보입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그렇게 보입니다. 그다음에 해방이나 해방된 자들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해야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가 있고 버림받지 않는다고 제가 설명하고 해석한 제 견해가 틀린 것처럼 느껴집니다.
보는 것이나 느껴지는 하면 안 돼. 말씀에 기초해서 믿음으로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느껴져요.
그죠? 이게 문제잖아요.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이 오래도록 이해가 불가능했던 8장 1절에 결코에 대한 해석에 도전을 해야 됐어요. 이젠 결코 해라는 산을 올라가야 돼. 어떻게 하든 이 산을 정복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본문에 대한 설교가 다 무효야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결코 에 대한 해석에 도전을 했습니다.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지난 수십 년 동안 불가능했던 거예요. 주석을 다 뒤져봐도 불가능한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해석해야 되는 거야. 지금 불가능에 도전을 해야 되는 거야. 근데 하나님의 은혜예요. 때때로 성경 연구하는 게 굉장히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이게 정신적인 영적인 노가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께서 때때로는 막 은혜를 부어주는 것 같아 정말 하나님의 은혜예요. 왜냐하면 오랫동안 해석이 불가능했던 그것이 그냥 한 1분 만에 한 1~2분 만에 그냥 순식간에 이해가 되는 거예요. 궁금하고 뭐 생각하자 말자 추석을 다 지던 게 그냥 순식간에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지금 설명해 드릴 건데요.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까요? 즉 바울은 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닌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단언한 것일까요? 왜 이런 우리라면 절대로 하지 않는 이런 단언을 할 것인가요? 그 답이 어디 있냐 그러면 그 답은 3절 원문에 있는 왜냐하면에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없어요. 근데 원어 성경에는 있어요. 3절 원문에 있는 왜냐하면 있어요. 2절에 보면 이은 그랬어요. 이은 그죠? 그래서 이 절이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우리 댓글을 단 성도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근데 이눈의 원어가 뭐냐? 가르예요. 가르 왜냐하면이에요. e는 왜냐하면 이는 왜냐하면 똑같은 거 아니에요.
아무튼 여러분 이게 가루예요. 근데 이 가루라는 단어가 이거를 2절에서는 이누이라고 번역을 했다고요.
근데 2절에만 있느냐 그거 아니라는 거야. 3절에도 왜냐에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게 이 자리에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예요. 2절 이후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3절과 4절에서도 사실상은 4절 이후 14절까지 계속해서 왜 그리스도 예수라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 그 이유들을 쭉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게 뭘 말해주느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단순히 2절이 설명하고 있는 게 아니다. 2절뿐만 아니라 2절이야 4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까 14절까지라고 그랬는데 거기까지 설명하면 너무 길어요.이것만 설명해도 이해가 되기 때문에 그냥 2절에서 4절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2절에서 4절을 봐야 된다는 거예요. 단순히 2절을 보지 말고 왜 신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지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2절만 보지 말고 2절에서 4절까지는 전부 보아야 된다는 거야.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함께 2절에서 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2절에 보면 신자가 결코 정죄를 받지 않는 이유가 뭐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됐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기록돼 있죠. 죄와 사망에 의해서 해방됐기 때문에 즉 비로소 본문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에요.
이거는 이제 해석이죠. 설명해 드린 본문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해방시키셨을까요? 죄와 사방에서 해방시켰어요. 왜 해방시켰을까요?
그 이유가 3절이야 4절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왜냐하면 원문에 있는 거를 집어넣었어요. 그죠 그러니까 왜 해방시켰느냐 우리를 왜 해방시켰지 그 무슨 목적을 가지고 무슨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방시켰지 왜냐하면 그러면서 결국 뭐라 그래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습니까? 왜 방시께서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우리 삶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우리 삶 속에서 율법의 욕구를 이르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거예요. 실제로 4절은 신화절이라 그래서 이게 신화절이라 그래서 목적을 보여주는 목적절이에요.
실제로 해방을 왜 우리를 해방시켰는지 그거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그랬어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을 해올 수 없는 그것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상태냐 본문하고 똑같은 상태 육신으로 말미암 연약하여 할 수가 없어 죄를 이길 수가 없어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어 좀 온도 약간 올려야 되는데요.그게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여러분 이게 뭐예요? 본문과 똑같은 상태를 말한 것이죠.그런데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바울이 말을 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하게 하실까요? 하실까요? 그 뒤에 그 기록이 돼 있는데 그 방법이 뭐냐면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주셔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그렇게 하는 거예요.한마디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함으로써 그 일을 하는 것이 그것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그것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에 기록돼 있는 그대로예요.
갈라디아서 3장 14절은 우리 교회 성도님은 다 알기 때문에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오신 성령님을 통해 해방이 되었다고 무조건 혹은 자동으로 율법의 의거가 이루어지느냐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4절에 기록돼 있는 대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단지 해방되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신자들이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야 하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것이라서 결코 정제함이 없다.바울이 1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이러는데 바울은 2절뿐만이 아니라 4절까지 내다보면서 1절에서 결코 정지함이 없다 단언을 한 것입니다.바울은 그 말을 할 때 4절에 나오는 조건을 마음속으로 포함시켰어요. 당연히 그 조건을 참신자들이 충족시키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1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렇게 말한 것이 그러므로 여러분 1절에 나오는 1절에서 바울이 결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결코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거 말장난이죠.결코라는 단어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믿습니까? 그리고 그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도 아니다. 믿습니까? 그냥 예수 믿고 성령으로 해방된 사람은 그 뒤에 말씀대로 살든지 말지 한 번 그 영어 해.그런 개념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믿습니까? 3주 안에 왜냐하면을 놓쳤기 때문에 개혁개혁 우리 개혁 계장 성경 읽으면서 목사님들이나 신자들에게 그런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얘기예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이 그날 갑자기 1~2분 안에 저에게 주신 해석이 이거 이상한 게 아니네. 처음으로 그게 보이는 거야. 수십 년 동안 궁금했는데 처음으로 그게 뭐야 그런데 지금 한 설명이 완벽하지 않다는 거 아세요?
지금 한 설명에 한 가지 약점이 있어요. 한 가지 약점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은 바울이 사전의 조건을 마음속에서 포함시켰고 당연히 참신자들이 그 조건을 충족시키리라고 예상했다고 말한 것이 왜냐하면 이것이 가정이기때문이에요. 가정 가정 그래서 저와 견해와 다른 목사들이나 목사들이나 교수들이 그러나 그것은 단지 당신의 추측일 뿐이지 않느냐 그거는 가정이고 추측일 뿐이지 증거가 없지 않느냐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거는 단순히 가정이 아니에요. 이것은 단순히 여러분 추측이 아니에요.로마서에 로마서에 확실한 근거가 있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팩트라는 거예요. 가정이 아니라 이것은 완전히 팩트다. 저는 그동안 로마서 6장에 대해서 자주 이렇게 말을 했어요. 로마서 6장의 전반부는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내용이고, 로마서 6장의 후반부는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는 내용이다. 여러분이 로마서에 제가 다룰 때 들으셨을 거예요. 실제로 6장 16절과 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이 돼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6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장 19절 너희 육신이 연약함으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을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그러니까 실제로 후반부는 버림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그런 내용이죠. 그죠 말씀대로 잘하면 사망한다 이러니까 상을 못 받는다가 아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버림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근데 지난 시간에 우리가 다뤘잖아요. 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래서 로마서 6장 전반부는 죄를 이기고 말씀대로 살라.후반부는 반드시 그렇게 살라는 내용으로 들었는데 이 구절에 보니까는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산다는 내용이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또 어떤 성도님들이 이게 과거 시대가 아니라 원어에 이는 현재의 시대입니다. 달았더라고 게시물을 올렸더라고 무서워 아무튼 이게 현재든 과거 시대든 결과는 똑같아요. 결과는 똑같아서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만 아무튼 여러분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산다는 내용이네 이런 생각이 들고 그래서 헷갈릴 수가 있어요. 정말 이게 그렇게 살라는 내용이 맞나 후반부가 반드시 그렇게 살라는 내용이 맞나 헷갈릴 수 있지만 근데 여러분 하지만 22절 마지막에 뭐라고 기록돼 있어요?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렸는데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랬어.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러므로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내용이에요. 계속 그렇게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때문에 토마스 슐라이너는 그러므로 21절 22절의 목적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드리도록 신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걸 가리키지 여기 충성 이런 게 아니거든요.
지금 말씀대로 사는 거 말하는 거 그러니까 말씀대로 살라는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서 2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22절의 내용은 말씀대로 단순히 살고 있다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계속 말씀대로 살라 그런 내용이라는 거예요. 계속 말씀대로 살라 왜냐하면 그 마지막이 영생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 서로 모순이 아니잖아요. 그죠?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해요. 지난 시간에 설명해 드렸습니다만 제가 다른 걸 설명하면서 이사야 이거를 깨닫고 굉장히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어요 굉장히 감격했어요. 굉장히 감사해요. 이 사실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중요한 해석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두 가지 중요한 해석에 대한 근거가 됩니다.
하나는 방금 전에 설명한 로마서 8장 1절에 결코를 설명한 것에 대한 근거, 결코를 설명하는 대한 단서가 됩니다.
즉 방금 말한 바울이 참신자들이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율법의 욕구를 이루는 삶을 이루는 삶을 살 거를 예상하고 결코라고 말했다.이 가정에 대한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 가정이 실제로는 그 가정이 옳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로마 교회의 성도들은 어떤 분들이냐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침 복음과 진리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가르침을 주기도 전에 22절에 의하면 이미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어요.
현재 시대니까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살고 있어요. 바꿔 말해서 열매 맺는 삶 바꿔 말해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로마서 6장을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았어도 우리가 구원받았어도 버림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 이런 교훈을 받아야 또 7장을 통해서 반드시 말씀대로 살아야 되는데 그러려면 율법 조문에 묵은 것으로 섬기면 안 되고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된다. 그래야만 죄를 이길 수 있다. 그래야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
그다음에 8장을 통해서 아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해방되었지만 육체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행해야만 율법의 글을 이룰 수가 있다. 이런 가르침을 받는단 말이에요. 이런 가르침을 받기 전에도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게 살았던 로마 교회 성도들이 이런 명백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이런 명백한 다른 사도나 다른 설교자를 통해서 들을 수 없었던 이런 명백한 가르침을 듣고 그 말씀을 받고 난 다음에는 말씀대로 살지 않겠느냐 그 가르침을 받고 난 다음에 도리어 역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당연히 아니죠. 당연히 여러분 더 말씀대로 살 것이에요. 더 거룩하게 살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그것을 예상하고 8장 1절에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단언한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에요. 그런 가정이 정당하다는 것이에요. 믿습니까? 그것이 단순히 추측이 아니라 그것이 여러분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1절에 나오는 결코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또 여러분 이 구절은 22절은 8장 1절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복음은 바울의 복음인가 그걸 설명할 때 제가 설명해 드렸는데요.
로마서 8장 31절에 39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하나님 사랑 아무도 끊을 수가 없다.한 번 구는 영원한 구원 그거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다. 거기서도 가정을 얘기를 하거든요. 바울이 신자들이 계속 말씀대로 살 거를 예상하면서 이런 확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 설명이 옳았다는 것이야. 그 설명이 진짜 성경적이고 그 설명이 옳았다는 것이 로마서 6장 22절을 통해서 그 근거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죠 확실하게 설명이 되고 확실하게 증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내용인지 몰라요. 굉장히 중요한 단서고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에요. 한편 저는 로마서 8장 1절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말씀한 것과 정확히 같은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로 29절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오.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에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칼빈주의자들은 이 구절만 인용하면 이 구절만 딱 인용을 해요. 그러면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막 이렇게 주장을 하는데 아주 지겨워 진료 아주 우기는 아주 개변론자들이야. 칼빈을 정직하지 않아 개변론자들 그다음에 그들은 미혹된 자들이야. 미혹된 자 칼빈의 비성경적인 교리에 미혹된 자 성경을 봐도 보아도 보질 못해 들어도 듣질 못해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해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 듣는 것처럼 칼빈 주의자들에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굉장히 이게 개신교의 슬픈 일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참 비극이고 이건 참 슬픈 일입니다. 아무튼 그러면 그렇게 막 주장을 하는데요. 그러나 바로 전에서 주님이 뭐라고 말씀했느냐 이렇게 말했어요. 27절에 보니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은 양들에게 한 말씀이고 양들의 특징이 뭐냐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거예요.
둘 다 현재 시대예요. 양들이 계속 목자의 음성을 듣고 양들이 계속 목자를 따른다는 뜻이에요.
순종하며 따른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이런 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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