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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았오
임병천
오늘은 어디로 가서 누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내 마음처럼 숨을 쉬는 사람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집에 머물러 컴퓨터 나의 페이지를 열어놓고 독백이나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살았오.’하면 사람들은 ‘옛날에는 다 그랬어’라고 쉽게 말을 한다. 기쁨은 두 배 슬픔은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을 터득했다면, 이야기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도록 공감하는 ‘으응’의 대꾸가 있다면 혹시 소설가도 탄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노여움을 사서 단칼로 코가 잘려서 돼지의 코가 납작해졌다는 아이들의 동화처럼 산신령이나 성주신의 노여움을 사서 남의 말을 되도록 듣지 않게 만들어졌을까? 고라니나 메토끼들이 귀까지 작다면 천적들이 나타나도 마음이라도 편하게 될 것이다.
이웃 일본에서도 딸을 낳으면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기원하는 기원제가 옛날부터 있었다고 한다. 장자 우선에 아들 선호 전통을 바탕으로 가난이 대물림 되면서 딸을 낳으면 ‘딸고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들이든 딸이든 태어나는 자리에서 분비물이 나오도록 젖꼭지를 꼭 짜줘야하는 통과 의례가 생략된 우리 어머니는, 한 쪽 젖이 납작하게 붙어버린 이른바 구두젖이 되었다. 우리 두 여동생이 자라났던 과정을 보면 나의 젖먹이 시절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한 쪽 젖 만 물게 되니까, 오른 쪽 젖꼭지가 갈라져 피가 나오고, 피가 멎으면 고름이 고였던 것이다. 배가 고파서 젖을 물면 고름과 피가 나오니 어머니는 아프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들은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처럼, 토실토실 해야할 허벅지가 늙은이 주름살이 생겼던 것이다. 심봉사는 심청이에게 동냥젖이라도 얻어먹이지 않았나? 구두젖이 원인인지 왼쪽 젖에 암이 발생하여 일흔이 되기 전에 어머님은 고인이 되셨다. 나는 우리 나이로 5살 때, 6ㆍ25전쟁으로 아버지께서 방공호를 파는 것을 보았고, 형과 그리고 그 또래 되는 청년들이 전장으로 가기 위해서 지서에 모이는 것을 어머니 등에 업혀 보게 되었다. 당시 나의 기억은 이처럼 단순하지만, 남한의 모스크바라고 할 정도로, 우리 동네는 인민군이 밀려오고 퇴각하는 사이 가난한 사람들은 쉽게 인민군에 가담하여 부자를 죽이고, 보복을 당하여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것을 서서히 알 수 있었다. 그러한 살육의 현장에서도 정이 많은 사람들은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의 나뭇지게를 빼앗었던 사람은 여지없이 비참한 꼴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지방을 돌아다니며 잊혀져 가는 비참한 전쟁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끝이 없다. 커다란 책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숨을 크게 들이키고 재래식 화장실 큰 인분통에 들어가 뒤를 쫒는 빨갱이를 따돌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휴정협정이 성사되기 직전에는 전쟁이 더욱 치열했단다. 휴전 협정이 되면서 미국의 원조로 우리 동네 하천 제방공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때 다른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데, 나는 약하기도 했지만,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내가 출생신고가 되면 형은 쉽게 제대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는 산에서 꼬부라진 소나무를 베어오셔서 나에게 맞는 조그만 지게를 제작하여 선물하시며, 넓은 들판 제방공사장에서 땅떼기를 하도록 하셨다. 지게에 흙을 지고 논에 객토를 할 때에는 코피까지 흘리기도 했다. 내 나이 11살에 형은 약 4년간의 병영생활을 마치고 제대를 했으며,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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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쟁을 겪은 형은 매우 엄격해서 나를 군대식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후 밥을 빨리 먹
는 것이 나의 습관으로 정착되어버렸다. 성품이 우유부단한 아버지는 고모(친고모는 별세하
셨음)집에서 일년간 일을 해 주고도 품삯 한 푼 받지 못했다. 고모부는 이름 있는 목수로 시골부자로 살면서 처음부터 우리 아버지를 머슴처럼 이용할 작정이었다. 머슴도 돈을 줘야하는데, 돈을 주지않으려고 작은 벽장문 2개 짜주고 눈가림 했다면 처남을 노예로 생각한 것이 아닌가? 독립의 가치나 철학이 어느 정도라면 처남을 부려먹고 멥쌀 찹쌀 한 말 없이 입을 닦고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신문지 넓이의 벽장문 만드는 첫날부터 11시쯤에 와서 대패를 갈고 톱날을 만지다가, 점심식사하고 일을 하는 척하다가 뻔뻔스럽게 일어나 가곤 했던 것이 무려 한 달 정도였다. 자기들 형제끼리는 그렇게 우애가 돈독하게 살았으면서 처갓집 촌수는 개촌수라서 이렇게 바보취급해야되는가? 논어나 맹자의 가르침에 여자나 처갓집은 노예로 생각하라는 가르침이 있을까? 이성은 없고 본능만이 존재하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가 아닌가? 헌금 주머니를 문틀에 걸어놓고 주기적으로 불우한 이웃을 찾아가는 탈무드의 가르침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고아가 되어, 이런 사람 밑에서 한 평생을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것이 공자문화를 대변하는 것이라면 공자는 죽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이러한 사람들이 사장을 하면 직원들 보나스 주기가 아까워서 단명할 것이고, 이러한 사람이 협력의 대명사 테레사 수녀가 된다면 계돈모아 챙기듯 후원금 몽땅 싸들고 LA부근에 큰 별장을 사고 호화생활을 할 것이 분명할 것이다. 이 탈무드의 가르침을 적용할 것도 없이 인간성부재가 아닌가? 우리가 버린 지체 부자유 고아들까지 양부모들이 비행기를 태워서 데려가 먹이고 입히고 대학을 나오게하고, 자립하도록 하는 것은 그 나라 정부에서 많은 돈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쉽게 잘라 말을 한다. 과연 그럴까? 남의 자식을 그것도 지체부자유 아이까지 자립할 때 까지 키운다는 것은 경하하고 칭찬할 일이 아닌가? 서울에 사는 나의 여동생이 곤경에 처해 있지만, 나도 고아들을 하나라도 입양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나도 오바마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아기의 기저귀를 채워줘야하고, 대학까지 마치게 하고 그리고 자립할 때 까지 나의 건강과 안사람의 건강,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이 허락되지 않고 있다. 지금 월급의 몇 배가 나온다고 해도 쉽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식생활은 주부가 편할 수 없게 되어있다. 밥상에는 꼭 김치가 있어야 하고, 따뜻한 찌게나 국이 있어야 하고, 통과의례로 봄에는 고추장 된장 간장 담그기가 있어야 하고 겨울 준비로는 김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가 쉬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명절만 되면 여자들은 바쁜데 남자들은 화투치고 술을 마시지만 , 나의 의지와 실천이 아니면 친척의 고아라도 같이 살기 힘든 일이 아닐까? 같이 살았다 해도, 해외 입양 고아가 훌륭한 인물로 양육할 노하우를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작은 탱자를 큰 감귤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토실토실한 모습이 없었던 우리들 4남매에게 씩씩하고 풍만한 젊은 시절이 있을 수 없었고, 섭취하는 음식을 소화하고 흡수하는 작용에 있어서, 약간의 결함으로 건강상 이상 징후가 일찍 나타났었다. 나이 40도 안 된 어느날 식도인지 인후인지 갑자기 전기가 지나듯, 무엇이 빨리 올라 스치듯 한 후 통증이 지속되기 시작했다, 병은 자랑해야 한다고 했던가.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병은 이상하게 고치기 쉬운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비인후과를 통원하며 치료를 받았지만, 아무리 병원을 오래 다녀도 2-3일 지나면 다시 발작하곤 했었다. (주사를 맞은 것도 모르고 결혼식에서 맥주를 들이켰지만) 그러다가 우연히 신탑골 친구 집에 들릴 기회가 있었다. 경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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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갖고 특수작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기 때문에 느릎나무를 구해서 복용하면 나을 것으로 알고 복용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식도가 아픈데, 허리가 낫는다면 나도 좀 먹어보면 안 되겠나?’고 가까이 했지만, 약이라는 것은 서로 같이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말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위인들의 격언인가? 속담인가? 성경에 있는 말씀인가? 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쉽게 한 대접 시원하게 대접받은 며칠이 지난 후, 목구멍의 좋지 않은 통증은 나도 모르게 사라지게 되었다. 수술 기구가 허벅지의 동맥을 타고 심장까지 올라가서 심근 경색 혈관을 수술하는, 발달된 시대의 현대적 의술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느릎나무액 한 대접으로 얻은 신기한 효험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많다.
몇 년 전 가까운 정미소 C부인은 비슷한 통증을 병원에서 의사의 의견에 충실하게 따르다가, 수술을 받고 난 후 갑자기 운명을 달리 했었다.
또 다른 딱한 갑장친구는 용감하게 심장 수술을 받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이 세상을 등졌다.
제왕절개 세계 제일, 항생제 남용 세계 제일, 잘 난 의사들 중에서 왕따가 될려고 히포크라테스선서를 준수하려고 할까? 칼을 대기만 하면 큰 돈,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하는 것이 대부분 의사들의 주특기가 아닌가? 나는 가난했으므로 그런 의사한테 가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의 어린 시절 감기에 걸리면, 우리들에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았다.
부잣집이나 민간요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호박에 꿀을 넣고 푹 익혀서 환절기에 어린 아이들에게 먹게 했던 것이 가장 좋은 감기 예방 민간요법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잦은 감기 몸살에 홍역을 피하고, 호열자라고 하는 콜레라에, 송날 묘마당을 몇바퀴 뒹굴고 소오줌을 먹으면 치료된다고 했던 하루거리 말라리아에 걸린 때도 있었다. 여러 가지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지만, 성인이 되어 양봉을 하다가도 죽을 고비가 있었다. 밭뚝을 밟고 껑충 건넜는데, 발밑이 물컹해서 되돌아보니, 똬아리를 틀고 있는 시커먼 살모사가 아니었던가. 살모사의 자비가 없었으면 나는 30년 전에 옛날 사람이 되엇을 것이다.
맑은 물 먹겠다고 한일 펌프 샘모다를 배달하고, 계쌀 한 푼 받지 못하고 유치장까지 갔으니, 샘모다 값은 말도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한 사람들이 장독대에 정안수 올려놓고 제 자식 잘 되라고 허리 굽히며 뭐라고 기도할까?
남편을 여윈 과부가 기울어져가는 가세를 지혜롭게 일으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격다짐이 최고의 수단일 것이다. 남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하면 내 눈에서 피가 난다는 말은 유치장 벽에나 있는 말인 것 같다. 학력도 인품도 형편없어도, 간통죄로 유치장을 들락날락 했어도 씨족이 많다고 해서 (그 과부의 내연의 남편) 군의원이 되고, 조합장이 된다는 것은 모두의 수치이지만 수치를 수치로 모르는 것이 또 수치가 아닌가? 바다가 조용하면 배울점이 없다는 말에 위안을 해야할까?
애프터 유만 할 수 있어도 영국에서는 살 수 있다. 아이 앰 소리만 해도 미국에서 살 수 있다는데 이러한 두 마디 말만 알아도 남에게 폐를 끼치고 재미있는 듯 쳐다볼 수 있을까?
동네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말려들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한 목소리로 그런 여자와 거래를 했다는 자체를 실수라고 한다. 일가친척이 무엇인지, 일가라고 부드럽게 다가서던 T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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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과 그 처갓집(김정희의 작은 집)의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쌀계를 들었을 때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했었다. 알고 보니 처갓집 재산을 독차지 하게 된 T를 놀려보려는 그 여자의 심보도 모르고 자기 동생까지 끌어 들여 여러 사람이 피박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새롭게 일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발을 헛디디게 해서는 안된다는 탈무드의 가르침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염라대왕인지 아닌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슨 약이 필요할까? 한 번 나갔으면 논둑을 메고 죽어도 객지에서 죽을 일이다. 대건 중학교에서 2학년 2학기 장학생 한 번 되면서 우등생으로 알려졌었는데, 어떻게 교대까지 나온 사람인데, 젊은 나이에 직장을 버리고 촌으로 들어왔을까? 물어볼 것도 없이 딱한 일이 아닌가? 좀 지나치게 말한다면 시체가 된 노루에게 까마귀떼가 모이는 형국과 비슷한 일이다.
경쟁력의 대명사 나폴레옹은 나를 보고 못 난 놈이라고 할 테고, 협력의 대명사 테레사 수녀는 나를 보고 봉사 한 번 크게 한 것으로 치부하라고 할까? 오누이는 타협의 대명사라는데 피눈물을 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자를 그래도 한 동네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작은 것을 봉사하고 희생했더라도 부처처럼 얼굴이라도 잘 생겼으면 남들에게 인정이라도 받을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날 건축자제 대여업을 하는 K사장 현장에서 잠시 일을 돕기로 했다. 점심을 먹던 어느 날 거실의 책장에 색다른 책이 꽂혀 있었다. 일본 사람 후지다 뎅이 일본에 와서 살던 유태인을 관찰하고 썼던 유태인의 상술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읽은 것도 어언 1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머릿속에 뚜렷한 것은 어머니 면허증이라는 것이다. 여성이 결혼하기 전에 장차 어머니가 되어서 아이들을 양육하는 소양을 테스트 받고 얻어지는 면허증인 것이다. 신기한 책의 내용에 너무나 감흡하여 딸들에게 읽을 것을 권했다. 그 책을 읽은 우리 딸은 나에게 탈무드라는 책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는 내용은, ‘칭찬은 저축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껏 소비하라.’다. 사람들은 좋은 말을 할 때가 별로 없다. 키가 큰 사람이 허리를 꾸부리며 인사를 잘 하면, 그 사람 참 간사하다고 말하고, 어쩌다가 옷을 깨끗이 입고 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 그 사람은 참 거상에 벗어난다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몸매를 하고 처세를 해야 할까? 어린이든 성인이든 누구나 사랑을 받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해야 간사하지 않고 거상에 벗어나지 않을까? 100가지를 잘 하고 1가지가 틀리면 욕을 먹는 세상에서 칭찬을 저축해서는 안된다는 짧은 한마디는 일거에 나는 우울증에서 벗어나게하는 순간이었다. 교육 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했어도 커다란 축은 칭찬이라는 것을 터득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칭찬이라는 낱말을 넣어서 8가지 짧은 글짓기를 해서 H친구에게 보였더니 칭찬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칭찬의 자리에 친절 겸손 연민 감사 칭찬 인내 희생을 넣어 다시 고쳐보았다. 그리고 G부인에게 보여주었더니 아주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비문학을 찾아서 이 글을 보여주었다, 좋은 말만 하는 것이 시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을 대전일보에 제출하게 되었다. 어떻게 평가했던지 담당자는 이 글을 신문에 올려주게 되었다. 어느 날 초촌면사무소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민원실 여직원이 아저씨의 글이 신문에 실렸다는 말을 할 때 여러 사람이 나를 쳐다보게 되었다. 이 글 한 편은 너무 외로운 것 같아 다시 ‘연민’ ‘당신의 작은 손길’을 올리게 되었다. 가게에 물건을 넣어주는 외지인이, 요사이 여기 사람 시가 신문에 자주 오르는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고 하는 말을 먼 발치에서 듣기도 했다. 그러나 군의원이라고 하는 어떤 사람, 그리고 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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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는 어떤 사람은 입을 삐죽거리고 이름과 욕을 섞어가면서 별 볼일 없는 글이 신문에 왜 자꾸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축하해야할 때 축하할 줄 모르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아파하는 근성을 누구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러나 초등학교를 졸업한 갑장 친구는 축하한다고 하면서 과자를 푸짐하고 사들고 왔었다. 어떤 어른은 나를 초촌면의 자랑이라고 하면서 칭찬하셨다. 이것으로 시인이라는 명예가 사실상 부족한 점이 없지 않은 것 같아서 오페라 해설집을 읽고 싶었다. 이 책을 읽어보고 난 후 비로소 창의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특히 10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정신-마귀의 본질’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감격했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어려운 시대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긍정의 가치를 모르고 모든 것을 부정(스타카토)한다. 나는 이 말을 딱 한 번 사용했다. ‘요사이 모임에 왜 나오지 않느냐’는 동창이라는 사람의 관심있는 말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정신 마귀의 본질이라는 말을 했더니, 며칠 후 모임에서 이 말을 트집 잡아 여러 사람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어 간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거리를 걸어주는 사람이 잘못이라고 해야할까? 아름다운 일은 가슴에 남고 불쾌한 일은 눈앞에 어른거린다는 말이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 생활에서 백제 초등학교로 전근되면서 아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백두산 관광 때 가져온 옥돌과 스펀지를 들고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옥돌의 성질과 스폰지의 성질을 발표하게 하고, 옥돌이 저 잘랐다고 모든 것을 뱉는 사람보다는 스폰지처럼 물을 흡수하듯 남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코가 큰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일본 사람은 가까이 다가서며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고, 닮으려고 하는 대단한 호기심 때문에 딸을 포루투칼 사람에게 바치면서 조총을 만들 수 있었지만, 조총으로 수백만명의 백성이 죽었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쇄국 정책을 고집하다가 국치일의 수모를 당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친절하고 인사성이 좋다고 하는 사람에게, 남도 다도해에서 근무하게 되었다고 하니까 해산물을 먼저 생각한다. 그래서 섬 염소 한 마리와 해산물을 싣고 오전 9시에 출발해서 오후5시경에 도착해서 생질 재호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키고 도계장에 출근하는 지어미를 일찍 퇴근시켜 8시쯤 음식상이 마련됐다. 주인 없는 공사 없다고 서툰 개식사를 하는 중 집에 오는 시내버스 뉴스에서 흘러나온 시쓰템이라는 말을 인용했다. 아무리 변변치 못한 음식상이라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있다면 혀꼬부리지는 말을 했다고 해서 콧방귀를 껴야할까? 그 뿐인가? 예식장에서 신부가 예쁘지 않아도 예쁘다고 해야 하며, 선물이 좋지 않아도 감사하다고 해야 한다는데, 내 글은 읽어보지도 않고 시집을 나눠주는 사람에게 콧방귀를 껴야할까? 시 몇 수로 여러 사람의 관심을 또 다른 시상을 얻기 위해서 영어에도 관심을 기울이면서 절실하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에세이로 표출하여 부여뉴스에 가끔 투고하기로 했다. 연무대 사는 선배님은 내 글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카피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돌려준다고 한다. 인동초 마담은 내 글이 부여뉴스에 나오면 오려서 팜플렛을 한다고 한다. 몇 사람만 더 나의 글을 사랑하기를 소망하면서 더 좋은 글이 나오도록 노력할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색다른 책이 나오면 짧은 기간에 사회가 들썩한다는데, 유태인의 상술을 읽어봤다는 그리고 ‘어머니 면허증’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30년이 지났어도 들어 보지 못했다. 이것은 문화체증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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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는 송별회가 어라하에서 있었다.(2009. 02. 24) 이 자리는 나에게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자리입니다. 고지혈 치료제를 5년간 먹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 더 있어주시죠. 우리 아이를 1년만 더 맡아주시요.’라는 말을 관리자로부터 학부모로부터 ‘이 덕영’ 선생님처럼 들을 수 있다면 아이들을 가르키는 교사에게는 가장 큰 칭찬의 선물이 아닐까요? 그러한 찬사를 받기 위해서 체육시간에 운동과 영어를 함께 하게하면서 열심히 노력을 해봤지만 고약한 말만 들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나에게 영어를 하면서 어떻게 월급을 받을 수 있느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의 생김새가 부처처럼 얼굴이라도 잘 생겼으면 이러한 일을 당하고도 인내로 넘기면 부처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겠지요. 나는 그러한 성인이 못 됩니다. 어떤 형식이든지 교훈을 주지 않으면 그것도 인간의 역할을 다 한다고 할 수 없겠지요.
2000년 전에 유태인이 세운 칭찬의 철학은 아직도 이 땅에 정착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빈 잔을 채우고 ‘위하여’삼창을 건의하면서 남자 중에서 칭찬을 제일 잘 하는 사람 우 종열 여자 중에서 칭찬을 제일 잘하는 사람 최 재순을 위하여를 삼창하면서 잔을 내리고 보니 유병교를 잊었다. 다시 유병교의 ‘칭찬을 위하여’ 삼창을 하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다시 칭찬이 돌아온다, 세련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분위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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