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체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인간의 지적 감성적 실용적 영역에 대한 접근. 둘째 인간의 영적 영역에 대한 접근.
풀이하자면 이 세상엔 인간에게 접근하는 수많은 사상과 가르침들이 있는데
첫째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자기계발 같이 지적 영역에 대한 영향력이요,
둘째는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설교, 성경 강해 같이 영적 영역에 대한 영향력이다.
이 둘째 것이 이 세상이라는 환경에서는 특수 분야인 것은,
그것이 인간 안의 지적인 영역이나 육체를 상대하기보다 영적인 영역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인간 안의 영적인 영역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영이란 구원, 하나님 신앙, 하나님과의 교제를 실현하는 인간 내부의 최상위 특수 본질로서,
설교나 신학은 우선적으로 바로 이 영에 관련된 분야다.
물론 설교가 인간의 지적인 영역과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라 주된 역할이 그렇다는 말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의 성향은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교는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자기계발처럼 인간본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관한 학문이요 인간 생활에 관한 학문이요 인간본위의 학문이다.
인문학은 설교 또는 신학이 들어설 공간을 주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의 관심은 인간 자신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 사상, 문학, 예술, 자기계발이 인간의 교양을 위한 적절한 분야라는 인식에 비해
'설교'하면 일반인들 안에 떠오르는 우선적 것은 '종교적 교훈' '종교적 잔소리' 정도로,
이런 생각은 하나님을 회피하고자 하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 가진 비뚫어진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실태에 대해서나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설교는 철학이 아니다. 설교는 사상이 아니다. 설교는 문학, 예술, 자기 계발, 인문학, 연설이 아니다.
세속적 관점이나 인문학의 영역에서 본다면 설교는 이방인이다.
그런데 그 이방인이라는 것은 의사가 집도하는 칼이 식칼이나 과도나 빵 자르는 칼에 비해 이방인이라는 것,
엑스레이 광선이 전등이나 가로등이나 랜턴이나 샹드리에에 비해 이방인이라는 것,
성찬식 포도주가 술이나 음료수나 수돗물에 비해 이방인이라는 것,
장군의 갑옷이 잠옷이나 외출복이나 정장이나 작업복에 비해 이방인인 것과 같은 이방인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설교가 인간 생활에 정말 이방인일까?
이것 없이는 죽는다. 이것 없이는 인간의 중심 실체에 접근하지 못하며 인간의 실태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것 없이는 어둡고 무서운 영적 전쟁터에서 수많은 위험을 피할 수 없다.
이것 없이는 인간의 땅이라는 이 저지대에서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못하며
그분과 교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설교는 설교 같은 설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 같은 설교라는 말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설교가 철학이나 사상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자기계발이나 시사에 경도된 설교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설교자의 권위가 자기 자신이나 이 세상의 제도에서 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설교가 결코 인본주의적 설교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은 설교가 인간에게 환영 받을 목적으로 전해지는 설교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기름 부름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의 바탕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본주의와 복음주의적 신앙의 인격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도 은혜를 입은 죄인임을 기억하면서 신실하게 전하는 말씀이어야 할 것이다.
그때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이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자기계발이 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 생명, 구원, 신앙, 변화가 인간에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어떤 분야에 이런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설교는 하나님의 입김이다.
2024. 4. 30
이 호 혁
첫댓글 말씀속에서 늘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