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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도리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함원신
백승종 (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사학자)
1. 밝맑 이찬갑
풀무학교는 발맑 이찬갑 선생과 그의 교육 동지 주옥로 선생 두 분이 세운 학교다(이하 존칭 생략). 어느 분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전자는 풀무학교의 이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후자는 학교가 처한 현실을 대변하는 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풀무학교의 이상을 파악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 이 글에서는 설립자 두 분 가운데서도 특히 이찬갑의 언행에 주목하게 된다. 주옥로의 교육사상은 다음 기회에 별도로 다루어볼 생각이다.
풀무학교가 개교된 것은 1958년 4월 23일, 이찬갑은 54세였다. 초로의 신사였던 그는 개교 이래 교내에 있는 사택에 기거하며 밤낮으로 교육에 헌신하였다. 하지만 1960년 겨울, 불의에 연탄가스 사고를 당해 몸져누웠다. 그가 풀무학교에서 가르친 기간은 짧았던 것이다. 하지만 삼년 밖에 되지 않는 그 세월 동안 이찬갑이 풀무에 쏟은 사랑과 희생은 엄청나 아직까지도 풀무학교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사람들은 그를 “풀무학교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가르침에서 교육의 이상을 발견하고자 노력한다.
이와 관련하여 일찍이 주옥로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되는 그의 발자취 때문”에 누구도 그를 쉽게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스스로 ‘밝맑’이라는 호를 써온 이찬갑은 밝음과 맑음으로 인생의 지표를 삼았다. 그는 불의를 절대 용납하지 못했고, 매사에 불같이 뜨거운 열성으로 대응했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잘못을 적당히 참고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잘못을 극진하게 타이르다 못해 만일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싶으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엄하게 꾸짖었다.
이찬갑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엄했다. 매사에 그는 원칙만을 강조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들과도 마찰이 일어날 때도 적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독선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는 언제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진실한 친구들은 불같은 그의 성격을 오히려 좋아했다.
이찬갑의 성격은 급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깊이 성찰했다. 사실은 이것이 그의 진면모였다. 그는 고요한 시간 홀로 책상 앉아 깊은 사색에 잠길 때가 많았다. 매사에 엄하고, 추상같으면서도, 사색적이던 이찬갑에게서 가족과 친구들은 까닭을 알 수 없는 외로운 그림자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분이었습니다. 가끔 주위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외톨이라고 말씀하셨다는데, 그건 뜻을 알아주고 함께 하는 동지들이 적다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의로운 일을 하셨다는 점에서는 결코 외롭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역사학자인 장남 이기백의 회상이다. 이것은 이찬갑이 자기 한 몸의 안일 즉, 세속적인 성패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증언이다. 이찬갑의 평생 화두는 빼앗긴 조국 “조선”의 회복, 나아가 한국사회를 사람 살만한 세상으로 다시 만드는 일이었다. 1943년 그는 자신의 고민을 다음과 같이 글로 토로한 적이 있다.
“조선이 돈이 많으면 살까. (중략) 지식이 많으면 살까. 아니다. 모두 아니다. 깨어나는 것이 문제다. 눈을 뜨는 것이 문제다. 움이 돋는 것이 문제다. 이때는 자다가 깰 때이다. 그렇다. 그래서 이것이다.”
이 짤막한 글에서 보듯, 이찬갑의 관심은 “조선”으로 표현되는 민족공동체의 현실을 개선하는데 온통 집중되었다. 그는 민족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의 자각을 염원했다. 이찬갑의 심중에는 어두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다름 아닌 자각이었다. 그런데 자각은 산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요컨대 교육을 통한 개인의 자각이야말로 식민지의 한 청년 지식인이던 이찬갑이 궁리 끝에 얻은 현실 타개책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의 정치 현실은 이찬갑에게 학교를 세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나라가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고서도 13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 1958년 4월 23일에야 이찬갑은 동지 주옥로와 함께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에 풀무고등공민학교(풀무학교)를 세우게 된다. 당시는 학교 건물이라고 해야 허름한 초가지붕 아래 단칸 교실이 있었을 뿐이고, 가르칠 교사도 공동설립자 두 사람이 전부였다. 학생수 역시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이찬갑은 청소년시절부터 남다른 경험을 많이 쌓았다. 그는 1904년 5월 13일, 조선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롭던 시절에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의 여주이씨 집성촌이었다. 그 마을 여주이씨 집안의 맏손자 이윤영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민족운동가 남강 이승훈의 종증손이었다. 남강 선생과는 이웃에 살았던 관계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교도 남강이 설립한 오산소학교와 오산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이찬갑은 오산중학교를 중간에 자퇴했다.
오산학교 재학시절, 그는 교장선생님인 고당 조만식을 각별히 존경했다. 그런데 1921년, 총독부의 거센 사퇴압력을 못 이겨 고당이 강제 퇴임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했고, 그러자 이찬갑은 오산학교를 자퇴했다. 그 뒤 주변에서는 복학을 거듭 권고했지만 이찬갑은 끝내 거부하였다. 이로써 그의 정규 수학 기간은 9년에 그쳤다. 하지만 주경야독에 힘쓴 결과, 그는 식견 있는 지식인으로 성장하였다.
19세 되던 1923년, 그는 김경의와 결혼했고, 5년 뒤인 1928년 서울에 올라가 피어선 고등성경학원에서 학업을 시작했으나 불과 수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신학교 분위기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1928년 9월, 이찬갑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 년 동안 동경의 빈민굴과 농촌지역을 순회했다. 이로써 장차 조선의 농촌교육이 나아갈 지표를 마련했다.
이 찬갑에게 일본은 실로 묘한 존재였다. 그것은 식민지 권력의 총본산 즉, 악의 근원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식민지 권력은 이찬갑에게서 아버지 이윤영을 앗아간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아버지 이윤영은 1911년에 일어난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고, 그로 인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이찬갑에게 일본은 추상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실로 뼈저린 원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가 조선민족과 더불어 식민지란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탐색하게 만드는 희망의 터전이기도 했다. 조선의 미래를 밝힐 등불을 이찬갑은 일본에서 찾고 있었다. 일본 체류 기간 동안 그는 협동조합이라는 존재에 눈을 떴고, 동경에서 오산으로 돌아오자마자 오산 양계조합장과 소비조합 전무이사를 맡아보며 농촌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조합운동에 전념하면서 식민지 조선사회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농촌교육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몇 년 뒤 다시 도일(渡日)한 그는 일본 내 농촌교육의 새로운 총아로 등장한 덴마크 식 국민고등학교에 심취하였다. 특히 그 창시자인 그룬트비히의 사상에 크게 공감하였다. 훗날 풀무학교를 세우게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청년 이찬갑을 정신적으로 더욱 깊이 감화시킨 것은 기독교였다. 특히 <<성서조선>>이라는 신앙잡지의 역할이 컸다. <<성서조선>>의 편집인 겸 발행인이던 김교신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처음 시작한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다. 김교신은 함석헌 등과 더불어 성서의 토대 위에 조선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함석헌은 이찬갑의 고향 정주의 오산학교에 재직하면서 성서집회를 이끌었다. 이찬갑은 바로 그 모임에 참가했다.
총독부는 <<성서조선>>과 그 독자들을 위험시했다. 1942년 여름, 일제는 김교신의 권두언 <조와(弔蛙)>를 문제 삼아 필화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김교신, 함석헌 및 송두용 등 이 그룹의 지도자들이 총망라된데 그치지 않고, 각지에 흩어져 있던 <<성서조선>>의 독자들까지 모조리 검거 투옥되었다. 이 잡지에 간간히 글을 투고해온 이찬갑도 꼼짝없이 붙들려 가서 6개월이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이 되자 이찬갑은 공산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판단해, 1948년 5월 전 가족을 이끌고 월남했다. 그는 장차 시작할 교육 사업을 위해 전국 여기저기를 다니며 교사경험을 쌓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의 대연초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전후에는 경기도 여주로 옮겨 대신중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나중에는 인천 해성고에서도 교단에 섰다. 이렇게 수년간에 걸친 교육 경험을 쌓은 뒤, 마침내 그는 주옥로와 함께 풀무학교를 연 것이다.
2.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이찬갑의 뇌리에는 늘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학교는 “애국자의 소굴”인 동시에, “아무런 특색도 없는 간판뿐인 학교”즉, 부정하고 극복해야만 될 이른바 못된 학교의 상징이었다. 오산학교는 초창기에 매우 가난하였지만, 애국애족 정신으로 충일해 활기가 넘쳤다. 오산은 우국지사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고국 땅에서 마지막으로 밤을 지새우며 망국의 울분을 토해내는 이를테면 애국자들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그 학교 교정에 들어서기만 하면 누구든 저절로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가득 차 눈시울이 붉어지기 마련인 학교였다.
하지만 망명지사의 발길이 완전히 끊어진 식민지시기 후반이 되자, 오산학교의 사정은 달라졌다. 겉보기로는 더욱 훌륭해졌다. 멀리 유럽 유학까지 가서 마치고 돌아온 신지식들이 앞 다퉈 교편을 잡았으며, 실험실, 수영장, 대규모 강당과 영사기까지 최신 시설과 장비를 두루 갖춘 전국적인 명문사학이었다. 최고의 시설과 질적 수월성을 자랑하는 교사진에 힘입어 오산학교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상급학교 진학률이 가장 높은 모범적인 학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이런 외화(外華)야말로 이찬갑의 눈에는 불만스럽기 짝이 없는 허황한 반짝거림이었다. 이찬갑은 풀무학교에 재직하던 시절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정성과 정신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서슴지 말고 그날로 교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그가 후기의 오산학교를 문제 삼은 것은 바로 그 정성과 정신을 찾을 수 없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찬갑은 오산학교를 가리켜 “그 썩은 오산”이라고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1920년대 초반 오산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고 그런 다음부터 교사들의 월급이 많이 올랐다. 그러자 교사들은 그 지역에 살던 일반 서민들과는 차츰 괴리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학교와 지역은 차츰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점을 이찬갑은 무척 가슴 아파 했다. 그에게 있어 학교와 지역은 서로 손발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후기의 오산학교는 전혀 그렇지 못했던 관계로, 이찬갑에게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이찬갑은 초창기의 오산학교에서 교육의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비록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그다지 높지 못했을망정, 아울러 재정적으로도 항상 크고 작은 어려움에 시달렸을망정, 초창기 오산학교를 지배한 것은 왕성한 자립정신이었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끝없는 열성이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우리 학교”라 부르는 지역의 학교였다. 이 오산학교는 학교의 것이 모두 마을의 것, 조선민족의 것이었기 때문에, 교사와 학생들이 독립을 위해 쏟은 뜨거운 눈물은 아름다웠다. 그것은 어설픈 몇 가지 새로운 학과 지식에 견줄 것이 아니었다. 이찬갑은 늘 이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가 심중에 깊이 간직한 바람직한 학교는 단순히 개인의 지적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 아니라, 민족공동체의 생사가 달린 원대한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성스런 공간이었다.
그 러므로 학교는 상급학교에 가기 위한 지식을 돈으로 거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이찬갑의 확신이었다. 학교는 온전한 인간을 길러내는 곳이어야 했다. 일찍이 초창기 오산학교를 이끈 다석 유영모 교장선생님은 입버릇처럼 주장했다고 한다. “일만하면 짐승, 생각만 하면 도깨비, 우리나라엔 도깨비와 짐승은 많아도 일하며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 이와 같은 유영모의 사상에 깊이 감화된 이찬갑은 풀무학교 학생들에게 “짐승”과 “도깨비” 이야기를 무수히 반복 설명했다고 한다.
요컨대 이찬갑이 못내 그리워한 것은 오산학교의 초창기 모습이었다. 이 학교의 나중 모습은 못 마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전인교육에서 멀어져 간 학교, 지역사회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학교가 되고 만 까닭이다. 오산학교에 대한 이찬갑의 이러한 비판은 학교가 현실 사회의 중요 현안을 외면한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해방의 날이 밝아오자 이찬갑은 농촌 교육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담은 글인 <새날의 표어>를 지었다. 이것은 초창기 오산학교의 모습을 염두에 두고, 당대의 일대난제로 손꼽히던 농촌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간명하게 서술한 것이다.
“헤쳐 감의 표징인 부지런히 일하며 / 찾아감의 표징인 부지런히 공부함 / 이로 우리 삶의 터전을 삼음
해 뜰 때 문을 열고 해질 때 집에 들며 / 언제든 참과 옳음 무어든 밝고 맑게 / 이로 우리 삶의 규범을 삼음
이 수난의 상징인 농촌을 들러 메임 / 이로 우리 삶의 의무를 삼음
참 됨의 새 인간에 이 겨레가 깨나며 / 영원의 새 나라에 이 겨레가 살아감 / 이로 우리 삶의 이상을 삼음.”
평소 이찬갑은 재능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인격은 똑같이 고귀하다고 확신했다. 교육의 사명은 모든 인격체가 “깨나”게 돕는 것이며, 그들이 “영원의 새나라”에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짐승”과 “도깨비”가 따로 없게 누구나 일과 공부를 병행하게 길러내야만 되었다. 풀무학교에서 공부와 노작의 병행을 강조하는 데는 이런 숨은 뜻이 있다.
이런 교육이 시작되어야 할 곳은 한국사회에서도 “수난의 상징인 농촌”이어야 옳다는 것이 이찬갑의 신념이었다.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지배계층이 아니라, 무식할지라도 건강한 농민대중이 우선 자각하여 겨레의 짐을 져야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초창기의 오산학교가 그러했듯. 시골 어딘가에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할 새 학교가 건설되어야 했다. 풀무학교는 이런 깊은 숙고 끝에 어렵게 출범하였다.
이찬갑의 이러한 교육사상에 토대를 제공한 것은 천만 뜻밖에도 19세기 후반, 덴마크를 전쟁의 폐허에서 구한 성직자 그룬트비히였다. 1864년, 덴마크는 10년 동안 계속된 독일과의 전쟁에서 무릎을 꿇었고, 패전의 대가로 곡창지대인 남부지방을 독일에 빼앗겼다. 패전국 덴마크에게 남은 것이라곤 황무지나 다름없는 거친 땅뿐이었다. 국민들은 모두 실의에 빠져 헛되이 세월을 탕진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성직자 그룬트비히는 그의 나이 이미 65세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수도 코펜하겐을 떠나 스캄링스방켄(Skamlingsbanken)이란 먼 시골로 내려가 시민들을 모아 놓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덴마크 백성대학(국민고등학교)의 시작이었다.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신념으로 그는 날마다 집회를 열어, 덴마크 시민의 영혼에 불을 지르는 일대 사업에 착수했다. 그룬트비히의 구국일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 사람들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패전으로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새 삶의 꿈과 용기를 얻었다. 면모가 일신된 덴마크 사람들은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과거의 황무지는 옥토로 바뀌었고, 그 위에 세계굴지의 낙농과 축산왕국 덴마크가 재탄생했다.
그 룬트비히가 시민들 앞에서 봇물처럼 쏟아낸 열변 중에 끊임없이 강조한 것이 바로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이었다. 이것이 아니고는 실의에 빠진 덴마크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은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룬트비히가 운영한 백성대학에서는 단 한 시간도 농업기술을 직접 가르친 적이 없었지만, 거기서 덴마크의 역사와 고유한 신화 및 노래를 학습한 시민들은 역사적 사명을 자각해 새 나라를 만들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찬갑은 과거 덴마크에서 일어난 이 놀라운 역사적 변화를 알게 되자, 대단히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그 자신도 이러한 학교를 세울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나 그룬트비히를 그대로 모방하자는 것은 아니요, 한국의 실정에 맞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찬갑은 무슨 일을 하든 외래사조의 단순 모방을 거부하고, “조선식”으로 재창조하기를 주장했다.
여기서 언급되어야 할 한 가지 아이러니한 일은 이찬갑이 그룬트비히를 알게 된 것도 일본 체류를 통해서였다는 사실이다.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로 조선을 망가뜨린 장본인 일본에서 다름 아닌 조선을 소생시킬 희망을 또 얻었다는 점, 이것이 식민지 조선과 그를 지배한 식민제국의 비극적인 관계였다.
일본은 1937년 7월, 이른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에 드리워진 암울함은 도를 더했다. 전시총동원체제가 들어서면서 사상통제가 전례 없이 엄격해졌고,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데 혈안이 된 식민지 당국은 배급과 공출과 동원 체제를 구축하며 식민지 백성들을 억압했다. 당시까지 학교에서 실시해온 “조선어” 교육도 장차 철폐될 예정이었고, 식민지 조선의 청소년들을 전쟁터로 강제 동원할 참이었다. 이찬갑은 자신의 표현대로 “이 어두워가는 시대”의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8년의 일이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몇 군데 농촌학교를 시찰함으로써, 언젠가 자신이 세우고자 하는 농촌 교육의 청사진을 완성하는데 마지막 정성을 기울였다.
그룬트비히가 그의 시선에 포착된 것은 바로 그때 거기서였다. 마침 뜻있는 일본인 교육자들은 그룬트비히와 그가 창시한 덴마크 백성대학을 전범으로 삼아 일본의 농촌부흥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찬갑은 이미 책을 통해 그룬트비히라는 이름은 접하고 있었지만 그 교육의 구체적인 실상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시찰을 통해 그는 새롭게 “그 나라의 역사와 말”의 의미를 깊이 공감하고 이해했다. 이로써 장차 그가 한국의 농촌 교육문제를 풀어갈 단초가 확고히 마련되었다.
역사와 말에 대한 그의 사랑은 공허한 탁상공론이 아니라 실천적이었다. 그는 생활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된 책을 구입하는 데는 조금도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한글학회가 펴내는 <한글>지를 계속적으로 구독했고, 우리말로 된 시집과 소설책도 그는 가능한 범위에서 모두 사들였다. 장차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나 나라가 해방될 때 우리말을 되살리는 데 필요한 자료가 될 거라고 믿어서였다. 또한 그 자신 역사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같은 책은 수 십 번 되풀이 하여 읽었다.
민족의 역사와 말에 대한 이찬갑의 강조는 풀무학교 초창기의 시간표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역사 수업은 일주일에 무려 5시간이나 되었다. 국어 시간 역시 4시간이었다. 국어 교과서를 읽고 문법을 배우는 것 외에도 문장의 모범이 되거나 뜻이 있는 글들을 따로 뽑아서 아침저녁으로 가르쳤다. 그는 역사공부를 통해 민족이 지난날의 무지와 “죄”를 회개하고 깨어나며, 우리말로 된 글을 익혀서 영혼의 순수성을 회복하기를 염원했다. 그리하여 이 땅에 각성된 민중에 의한 새 나라가 건설되리란 희망에 부푼 채 이찬갑은 교단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3.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교육
이 찬갑이 말하는 “깬” 사람은 곧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위대한 “평민”이었다. 해방 직후 그가 교육에 관해 쓴 일종의 수상록인 <다시 새날이 그리워>를 읽어 보면, 자각한 농민이 바로 위대한 평민이었다.
“자연의 오아시스인 농촌이 없이 교육의 싹이 트일 수도 없으려니와 이상의 발화점이랄 교육이 없이 교육(인간의 이상)의 꽃이 피어날 수도 없는 것.”
하 필 왜 농민이고, 농촌교육인가. 이찬갑의 판단에 따르면, 식민지 시기부터 도시에서 진행되어온 이른바 근대 교육은 그 폐해가 이미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구제불능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이 당면한 비참한 교육현실을 다음과 같이 질타하며, 대안을 모색했다.
“이 땅의 교육 상태인 현재의 이 감시와 다툼의 밑에서 우승열패, 생존경쟁, 입신양명, 감투바람만이 조장되어 아부, 기만, 살벌, 암흑이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길러냄의 연구와 번갯불의 토의에서 튀어나고 떠메고 감의 사명감에서 빛나는 개성, 이상사회가 전개되는 교육이어야 한다.”
개인의 출세를 위한 교육, 경쟁을 당연시 하는 교육은 결코 참된 교육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 이찬갑의 견해였다. 참된 교육은 경쟁이 아니라 학생 각자의 숨은 재능을 찾아 길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은 제 한 몸의 부귀를 효과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짐을 짊어지고 나가려는 절실한 각오와 “사명감”을 일깨우는 것, 그리하여 이상사회의 실현을 앞당기는 방법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찬갑으로서는 학생들에게 날마다 무조건 일정한 분량의 신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은 무용한 일이었다. 그가 학생들과 함께 탐구하는, 깨달음의 학습을 중시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다. 교실에서 교사는 일방적으로 학생을 가르치는 방식을 버리고, 학생 스스로가 저절로 변화되게 만드는 데 교육의 중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한국의 농촌사정은 극히 불우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찬갑은 그런 실정을 정확히 알고, 장차 농촌이 헤쳐 나가야할 미래의 사명을 이렇게 말했다.
“수천 년 된 농업 국가이면서 식량 하나 자급할 수 없는 거지의 나라임을 똑똑히 알아 농촌의 일을 우리가 맡자. 수난의 상징인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상징인 농촌을 사랑하라.”
누 가 보아도 한국 농촌은 식민지시기 이후 낙후될 대로 낙후되어 소생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것은 욱일승천하던 서구 열강에 견주어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고아나 다름없던 한국의 처지와 마찬가지였다. 이찬갑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열악한 지위, 한국사회에서도 맨 밑바닥인 농촌을 제각각 “수난의 상징”으로 파악했다. 다름 아닌 이들 수난의 땅에서 헌신할 사람을 기르는 것, 여기에 한국교육의 사명이 있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요컨대, 이찬갑은 수월성을 앞세워 능력을 자랑하며 장차 출세하여 뽐내는 지배자를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공동체의 무거운 짐을 떠메고 앞으로 나갈 평범하지만 올곧은 사람, 그런 위대한 평민을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위 대한 평민이 되는 것이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란 점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자각하고, 이 깨침을 앞장서 전파한 이는 다름 아니라, 일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 신앙운동의 선구자 우치무라 간조였다. 그가 말하는 “평민”은 신분이나 재산 또는 직업의 높낮이와는 무관하다. 제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더라도, 내심 스스로를 평민으로 간주하고 공중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모두 다 평민이란 말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예수도, 루터도, 크롬웰도, 링컨도 모두 위대한 평민으로 불릴 만하다고 우치무라 간조는 강조했다.
이찬갑은 그 자신이 식민지 조선의 무교회주의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관계로, 우치무라의 위대한 평민에 관한 생각을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문집을 유심히 살펴보면, 인생 계획을 밝힌 짤막한 글에서 “평생 독립적”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언제까지나 “이름 없이 살겠다.”는 다짐도 되풀이 했다. 이것은 그가 어떤 경우라도 절대 남에게 짐이 되지는 않겠다는 굳센 다짐인 것이며, 솔선하여 자기 자신부터 더불어 사는 평민의 고된 길을 꿋꿋이 걸어가겠다는 힘찬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4. 농촌 중심의 새 문명 건설
이 찬갑의 교육이 지향한 목표는 각성된 개인이 민족 공동체를 위해 자발적으로 짐을 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산업화로 상징되는 현대 도시문명에 맞서 농촌 중심의 새 문명을 창조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이점은1958년 4월 23일 풀무학교 제1회 입학식에서 그가 읽은 기념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그 요지는 “기존의 도시, 물질, 출세 교육에서 벗어나 농촌, 정신, 민중교육으로 이 민족을 소생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기성 교육계의 주된 관심을 여보란 듯 일거에 뒤집어엎었다. 도시가 아니라 농촌, 물질이 아닌 정신, 출세 지향적 교육이 아니라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교육이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찬갑이 꿈꾼 대안문명은 다분히 성서적인 것이기도 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환락의 도시, 바벨탑으로 대변되는 물질만능의 도시가 세계문명의 중심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이찬갑의 견해, 퇴폐한 도시가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서 한가로이 양을 치며 땀흘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정신문명의 중핵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단순히 목가적인 전원사회를 이상세계의 터전으로 간주한 점에서만 보면, 이찬갑의 생각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들과도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심지어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까지도 대개는 도시생활 중심이 아니라 농촌 중심의 문명한 삶을 꿈꾸었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중심의 생활이 편리하고, 도시야말로 보다 철저하게 문명의 이기를 향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이를테면, 문명의 중심을 도시로 인식하고 있지만, 이런 생각은 인류의 긴 역사에 비춰 볼 때 도리어 일천할 뿐이다.
이찬갑은 농촌이 중심 되는 정신문명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므로, 현세의 세속적인 가치를 몽땅 부정했다. 대신에 그는 정신적 자각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이 학교는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이 있어야 된다는 세상에 정신뿐이어야 하고 정신 만이어야 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간판을 얻고 출세를 해야 한다는 세상에 그런 것처럼 우습고 어리석은 놀음은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교육은 참된 깨우침을 불러일으키는 부르짖음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신세계 발견의 부르짖음이 아니면 아니 될 것입니다. 참말 참된 자리에서의 깨우침, 불붙는 이상에서의 부르짖음이 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농촌에서 학교를 만들어 보려했던 이찬갑은, 홍동에 내려오기 전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경험한 적도 있었다. 그가 주옥로와 더불어 홍동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하기로 논의한 것은 1955년부터였다. 그 뒤 3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여러 가지 논의가 오가다가, 마침내 홍동면 팔괘리의 야트막한 산기슭에 작은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이찬갑의 교육이상은 도저히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4.19이후에도 다시 혼미를 거듭했고, 민중의 자각을 드러내는 사건들도 한동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풀무학교 제1회 졸업식을 2개월 앞둔 1960년 12월 17일, 이찬갑과 풀무학교에게는 비극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그날 밤, 이찬갑은 사택의 추운 방을 덥히려고 사그라져가는 연탄불을 잠시 방안에 들여 놓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연일 과로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다시는 교단에 서지 못하였다. 병석에 누워 정신이 흐릿하고, 거동도 불편한 와중에서도 그는 “풀무학교에 가야 한다”며 몇 차례씩이나 짐을 싸곤 했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 이찬갑이 세상을 뜬지도 4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 지금까지도 풀무학교에는 그의 정신이 살아 있다. 학생들의 인사말 “밝았습니다”와 “맑았습니다.”는 곧 이찬갑의 호 “밝맑”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찬갑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것은 비단 그 뿐이 아니다. 거센 세파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물질에 의존하지 않는 풀무학교 교사들의 줏대도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풀무학교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조직이 없는 곳이며, 날을 정해놓고 졸업장을 주는 졸업식 대신 “창업식”을 거행하는 곳이다. 이러한 풀무의 전통은 그 근저에 더불어 사는 위대한 평민 교사 이찬갑의 숨결이 어려 있다.
이 즘 홍동면에는 밝맑 기념 도서관 건립이 한창이다. 이찬갑이 덴마크의 백성대학의 한국적 실현을 꿈꾸던 홍동에는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주민 누구나 국어와 역사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평민강좌’가 열리고 있다. 또한 홍동에서는 농촌문명의 탄생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마을 만들기 백 년 대계가 실행에 옮겨지고 있고, 생태철학을 토대로 한 유기농업도 활발하다. 풀무학교에는 생태농업을 배울 수 있는 전공부가 따로 개설되어 있기도 하다. 오산 시절부터 청년 이찬갑이 관심을 가졌던 각종 조합 활동도 풀무학교의 교사와 졸업생들을 통해 면면이 이어져 홍동 지역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있다. 이찬갑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일찌감치 홍동을 떠나갔지만, 풀무학교와 홍동 지역은 그를 헛되이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다.
참고문헌
백승종, <<그 나라의 역사와 말. 일제시기 한 평민 지식인의 세계관>>, 그물코 2008
이찬갑, <<새날의 전망. 밝맑 이찬갑 선생 추억 문집>>, 풀무학원 1974
이찬갑, <<산 믿음의 새 생활>>(증보판), 시골문화사 1994(초간은 1983)
이찬갑, <신문스크랩북> 1-7, 1937-1940
이한기, <풀무학교에 쏟은 불꽃 열정. 밝맑 이찬갑>, <<우리교육>> 제49호(1994), 86-91
주 옥로, <한국의 나타니엘>, <<새날의 전망>>, 1974
홍순명, <<더불어 사는 평민을 기르는 풀무학교 이야기>>, 내일을 여는 책 1998 외 다수
첫댓글 늘 깨어있는 삶!
중요한 삶의 지표를 찾고
마음에 간직하고
실천하는 사람!!!
우리모두 그런사람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