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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mejis Theme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저자 : 알랭 드 보통
역자 : 정영목
제1장
낭만적 운명론
1.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라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 꿈 속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마주치게 되는 것을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을 수 없을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그리움을 해소해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이성의 검열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에서 정해진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20. 낭만적 운명론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랑에 대한 요구가 선행하고 그 다음에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타난다는 주장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짝의 선택은 우리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테두리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다른 테두리, 다른 비행기, 다른 역사적 시기나 사건이 주어진다면,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은 클로이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사랑하게 된 사람이 클로이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내 실수는 사랑을 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필연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제2장
이상화
1.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94, 불가리아 태생의 유대계 영국 작가)의 말이다.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한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 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을 통하여 어떤 주어진 얼굴, 잠깐이나마 기적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얼굴에 우리의 에너지를 집중함으로써 환멸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아닐까?
9. 정말 무서운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클로이가 인간일 뿐이라는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던 내 욕망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 여행과 존재로 인한 그 모든 스트레스를 감안한다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약간 변형하자면] 희망이 자신에 대한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아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 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의에 사랑의 방역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 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빠져나가고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어떻게 해서든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 [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13.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대개는 무의식적인] 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2단계에 불과하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그러나 우리의 정직한 면 때문에 이런 기만은 결코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 속에서 상상했던 대로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느냐, 그 사람은 사랑이 없을 때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붕괴를 막기 위해서 우리가 발명해낸 환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 의심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제3장
이면의 의미
1.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한다. 그 땅에서는 모든 웃음과 모든 언어가 만이천 가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열두 가지 가능성의 열린 통로로 나타난다. 정상적인 생활에서는 [그러니까 사랑 없는 생활에서는] 액면 가치로 받아 들여질 수 있는 몸짓과 말들이 이제 어떤 사전으로도 다 풀어낼 수 없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구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의심들이 한 가지 중심적인 질문으로 환원되고, 구애자는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6.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속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제4장
진정성
1.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그 반대일 경우에는 태평함이 요구되는 이 게임에서 진지한 욕망이 장애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찾고, 그 완벽함과 자신을 비교하면 열등감을 느낀다.
5.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같이 있는 사람에 관계없이 안정된 동일성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전제한다.
제5장
정신과 육체
11. 전통적인 이원론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은 스펙트럼의 양 끝에 앉아 있다.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사랑을 한다.
12. 인간은 둘로 나누어져 행동을 하는 동시에 뒤로 물러서서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분열로부터 반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분열을 다시 통합할 수 없다면, 어떤 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그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면, 그것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병이 된다. 기분 좋게 절벽 너머로 달려가다가 밑이 허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추락해 죽고 마는 만화 속 인물과 비슷하다. 자의식이 강한 사람과 비교할 때 자연스러운 사람은 얼마나 운이 좋아 보이는지 모른다. 주체/객체 분리로부터 자유롭고, 중심의 자아가 하는일을 끊임없이 묻고, 평가하고, 지켜보는 거울 또는 제3의 눈에 대한 찜찜한 느낌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제6장
마르크스주의
1.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에 빠져 어떤 사람을 보면서 그/그녀와 함께 천국에서 누리는 기쁨을 상상할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위험을 잊기 쉽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그녀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하고, 멍청하고, 따분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답고, 똑똑하고, 재치 있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약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그녀가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것은 그/그녀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12.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안전하게 고통스럽다. 자신 외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초한 달콤씁쓸하고 사적인 고통이다. 그러나 사랑이 보답을 받는 순간 상처를 받는다는 수동적 태도는 버려야 하며, 스스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책임을 떠안을 각오를 해야 한다.
16. 어쩌면 어떤 사랑은 아름답거나 강한 존재 - 신, 클럽, 그녀/그 - 와 사랑의 동맹을 맺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약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사랑해준다면 [신이 우리 기도에 응답한다면, 클럽 회원권을 보내준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 우리를 애초에 사랑으로 몰고 간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저 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를 믿게 되었으니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23.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둘 다 똑같은 의존적 요구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는 그 요구 때문에 상대에게 끌렸다. 우리 내부에 부족한 것이 없다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상대에게 비슷한 부족상태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 답을 찾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제품만 발견하게 되었으니까. 우리는 상대 역시 우상에 대한 요구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무력감을 피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업는 동시에 업히는 책임을 떠맡기 위해서는 신과 같은 존재에 대한 찬양과 숭배 뒤에 숨고자 하는 어린아이 같은 수동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24.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모두" 아주 완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관된 전개, 안정된 인격, 고정된 방향, 주제의 통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환각을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장점들을 만들어낸다.
26. 서양 사상에는 결국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는, 일방적으로 사모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오래 되고 우울한 전통이 있다. 사랑이 보답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목표를 성취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 버린다. .......... 시인은 되풀이하여 남자의 간절한 제안을 거절하는 여자에게 탄식을 늘어놓는다. 4백 년 뒤의 몽테뉴 역시 무엇이 사랑을 자라나게 하느냐에 대해서 그 시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드니 드 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27. 이런 관점에 따르면 연인들은 갈망과 짜증이라는 두 극단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클로이와 나는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나선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한쪽의 사랑이 늘어나면 다른 쪽의 사랑은 줄어들고, 그런 식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가다 결국 망각으로 사라져버릴 위험.
29.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사랑이 보답받는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느냐가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혐오가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의 보답을 받게 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에게 잘 맞지 않는다고 [자신의 쓸모없는 면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잘 맞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제7장
틀린 음정
1.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전에 어디선가, 어떠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이ㅡ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등과 옆구리가 둘에, 손과 다리가 넷, 하나의 머리에 두 얼굴이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자웅동체였다. 이 자웅동체들은 워낙 막강하고 자존심도 강해서 제우스는 이들을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밖에 없었다. 그 날부터 모든 남자와 여자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반쪽과 결합하고 싶어하게 되었다.
3. 철학자들은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생각할 때 그곳을 차이가 용해되는 용광로로 생각하기 보다는, 비슷한 마음과 통일성, 유사성과 동일성, 공동의 목표와 가정을 기초로 세워진 사회로 보는 것 같다.
. 사랑의 비판자들은 융합, 즉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지워져서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해왔는데 그것은 정당하다. 이런 의심은 상대에게 나와의 차이보다는 유사한 면이 더 많다고 가정하는 것이 더 편하며, 상대에게서 반대되는 증거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늘 상대에게 우리가 모르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아는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그러나 비평가들이 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몸을 분리하고 있는 살갗은 단지 육체적 경계일 뿐 아니라, 더 깊은 심리적 모순들 - 초월하려고 해보아야 바보짓을 뿐이다 - 의 대리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5. 따라서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자신이 뛰어드는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나서야 그 물에 빠진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정치, 예술, 과학 그리고 져녁에 무엇을 먹고 싶은지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환 뒤 두 사람은 서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은 상호 이해, 그리고 가정된 것이 아니라 확인된 유사성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상대를 진정으로 알 때에만 사랑이 자라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왜곡된 사랑의 현실 [우리가 알기 전에 태어나는 사랑] 에서는 아는 것이 늘어날 경우, 그것은 유인이 아니라 장애가 될 수도 있다 - 유토피아가 현실과 위험한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8장
사랑이냐 자유주의냐
6. 이상주의적인 분위기에 젖어버리면 우리는 낭만적 사랑이 기독교적 사랑과 비슷하다고 상상하게 된다. 너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한다라는 보편적감정, 조건이 없고, 어떤 경계도 설정하지 않고, 마지막 구두까지 사모하는 사랑,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러나 연인들에게 말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을 보면 기독교적인 사랑은 침실로의 이행에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적 사랑의 메시지는 특정한 경우보다는 보편적 경우에 어울린다. 모든 여자에 대한 모든 남자의 사랑, 서로 코 고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두 이웃간의 사랑에 어울리는 것이다.
9. 모든 부모가, 장군이,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남의 속을 뒤집어놓기 전에 하는 낡은 말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너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네 속을 뒤집어놓는다. 나는 네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영광을 주었으니 이제 너에게 상처도 주겠다.
18. 안전한 정치의 최고 옹호자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가 1859년에 출간한 [자유론]은 사랑 없는 자유주의에 대한 고전적인 옹호이다. 밀은 국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 국민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하며, 다른 구두를 신으라거나, 어떤 책을 읽으라거나, 귀를 닦을라거나, ,이를 치실로 닦으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력 있게 주장했다. 고대 국가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는 "국가 모든 구성원의 신체 및 정신 규율 전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근대 국가는 가능한 한 뒤로 물러서서 국민을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관계에서 괴로워하면서 그저 옴짝달싹할 수 있는 여지만이라도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처럼, 밀은 국가가 국민을 내버려두라고 요청해다:
"자유라는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빠앗으려고 하거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추구하는 자유이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어떤 구성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유일한 경우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막을 때이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에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그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이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제9장
아름다움
1. 아름다움이 사랑을 낳을까, 아니면 사랑이 아름다움을 낳을까? 클로이가 아름답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사랑할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름다울까? 무한히 많은 사람들에 둘러 싸여 사는 우리는 왜 우리의 욕망이 이 특정한 얼굴, 이 특정한 입이나 코나 귀를 선택했는지, 왜 이 목의 곡선이나 보조개가 우리의 완벽성의 기준에 그렇게 정확하게 응답했는지 묻게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하나는 아름다움의 문제에 대해서 각기 다른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얼굴의 풍경만큼이나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사랑의 미학을 재규정하게 된다.
제10장
사랑을 말하기
12.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라 로슈푸코(프랑스의 작가, 모럴리스트) 의 말인데, 역사는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제11장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7.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뻔한 것에 현혹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 눈이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입에서 매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클로이의 독특한 버릇들은 더 큰 완전성을 가리키는 기호들로, 그것은 연인만이 읽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 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9.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그래서 방관자 자리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따분해 보인다. 방관자들은 묻는다. 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한 인간 외에 무엇을 보는 걸까?
20.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이상적인 남자나 여자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아이스 콤플렉스가 완전한 망상인 것만은 아니다. 사막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 지평선에서 무엇인가를 본다. 다만 야자나무는 시들었고, 우물은 말랐고, 오아시스는 메뚜기로 뒤덮였을 뿐이다.
제12장
회의주의와 신앙
2. 철학자들은 인식론적 의심을 탁자, 의자,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뜰의 존재, 그리고 이따금씩 원치 않는 아내의 존재에 한정시킨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중요한 것, 예를 들어 사랑에까지 확대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이 객관적 실재와 관련이 없는 내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나타난다.
3. 생존의 문제가 아닐 때에는 의심도 쉽다. 우리는 여유가 있는 만큼 회의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를 지탱하지 않는것들에 대해서는 회의를 품는 것이 무척 쉽다. 탁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면 그것은 지옥이다.
제13장
친밀성
16. 두 사람이 서로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함께 이야기하는 언어는 일반적인 언어, 사전에서 정의된 담론의 언어로부터 멀어진다. 익숙함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두 연인이 함께 짜 내려가는 이야기와 관련을 맺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가 없는, 친밀성에 기초한 집안 언어이다. 그것은 공유된 경험의 축적을 암시하는 언어이다. 거기에는 관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 언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과 달라진다.
제14장
"나"의 확인
2.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받기 전에는 온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3. 인간이 "사회적 동물" 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오직 인간만이 연체동물이나 지렁이와는 달리 자신을 규정하고 자의식을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제대로 된 느낌에 이를 수 없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라는 것은 완전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유동성에 남들이 윤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 역사를 짊어지고 나가는 것을 도와줄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나 자신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 때로는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4.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제대로 된 정체성을 소유할 능력을 상실한다. 사랑 안에서 자아가 지속적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신의 눈길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누가 자신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는 신이나 짝이라면 더욱 좋다. 사람은 자신에게 전 세계와 다름없는 타자[또한 자신도 그 사람을 위한 세계이다]의 눈을 통해서 존재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의 역사를 수도 없이 말해주었는데도 우리가 결혼을 몇 번 했는지, 자식이 몇 명인지, 우리 이름이 브래드인지 빌인지, 카트리나인지 캐서린인지 자꾸 잊어버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마음 속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새겨두고 있는 사람의 품에서 우리의 분열증으로부터 달아날 피난처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은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닐까?
13.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에 대한 느낌을 달라진다. 우리는 조금씩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부조리한 사람은 나에게서 나의 부조리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그러나 진지한 사람은 나의 진지한 측면을 끌어낼 것이다. 누가 내가 수줍어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마 결국 수줍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 과정은 순환적이다.
제15장
마음의 동요
1. 언어는 그 안정성으로 우리의 우유부단함에 아첨한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언어 덕분에 우리는 지속과 고정이라는 착각속에 숨을 수 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모든 것이 흘러가버리는 것은 불가피한 일임을 지적하고 있지만, 강이라는 단어가 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근 것러럼 보인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그 말이 나의 감정들의 유동성과 변덕스러운 가운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전달해줄까? 그 말 속에 이 사랑과 얽혀 있는 그 모든 배신, 권태, 짜증, 무관심이 들어설 공간이 있을까? 내 감정은 양면 공존의 운명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어떤 말이 그 상태를 조금이나마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까?
21. 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우리에게 부당해 보이는 적대감과 분노를 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안에는 모순된 감정들이 수도 없이 많으며, 유아적인 반응들이 광법위하게 켜켜이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감정과 반응에 대해서 거의 또는 전혀 통제력이 없다.격분, 잡아먹고 싶은 충동, 파괴적인 환상, 양성애적 소질, 유년기의 편집증들이 좀더 품위 있는 감정들 내에 잔뜩 진을 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알랭은 말했다. "절대로 사람들이 악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바늘을 찾으면 된다." 그 말은 말다툼이나 공격 뒤에 놓인 자극물이 무엇이었는지 찾아보라는 뜻이다.
제16장
행복에 대한 두려움
1.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12.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대나 기억 - 상대적으로 보호를 받는 자리 - 에서 벗어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며,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다. 헌신을 한 판의 달걀이라고 본다면, 현재에 헌신하는 것은 달걀을 과거와 미래의 바구니에 나누어 담지 않고 모두 현재의 바구니에 담는 위험이다. 이 비유를 사랑으로 옮긴다면, 내가 클로이와 행복하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는 것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내 모든 달걀이 그녀의 바구니 안에 확실하게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16.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혼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생긴다." 파스칼의 말이다. 맥없이 사회적 영역에 의존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독자적인 능력을 쌓을 필요를 옹호한 말이다. 그러나 사랑에서 이것을 성취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가? 프루스트는 무함마드 2세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는 하렘의 한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즉시 그녀를 죽이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으로 종속되어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무함마드 2세를 흉내내기는 커녕, 오래 전에 자족성을 성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 나는 내 방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럼으로써 다른 인간에게 기초하여 자신의 삶을 구축하는 데에서 오는 위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8.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답을 알 수없을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질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제17장
수축
6. 상대방에게 무엇 때문에 나를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묻지 않는 것은 예의에 속한다. 개인적인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속성이나 특질을 넘어선 존재론적 지위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이다. 사랑 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부유함 속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애정/소유를 얻고 유지하는 수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서 아마 연인들은 위대한 혁명가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1.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없는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어차피 드러난 답에 따라서 행동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 답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답은 인과론적으로 유효한 추론의 결과가 아니며, 사실 뒤에 오며, 물밑에서 일어난 변화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며, 인과관계를 혼동한 피상적인 분석일 뿐이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길래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로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18. 일반 테러리스트들은 건물이나 초등학생들을 폭탄으로 날려보냄으로써 이따금씩 정부로부터 양보를 강요할 수 있지만,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접근방법이 근본적으로 일관되지 않기 때문에 실망을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은 더럽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제19장
선악을 넘어서
9.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함고 동일시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사랑을 선과 동일시하고 무관심을 악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돵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은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10.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도덕적 행동이 비도덕적 행동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고통이나 쾌락과는 관계없이 의무감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의무감에만 인도되어 어떤 행동을 할때 나는 도덕적이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도덕률에 일치한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행동이 도덕률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기질의 결과로 이루어진 행동은 도덕적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경향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공리주의적 관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이다. 칸트의 이론의 핵심은 도덕성이란 어떤 행동을 수행하는 동기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제20장
심리적 운명론
1. 무엇인가 비참한 일이 일어날 때면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끔찍하고 견딜 수 없는 벌을 받는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일성적인 인과론적 설명을 넘어서는 설명을 찾게 된다. 참담한 사건일수록 객관적으로 보면 가당치도 않은 의미를 갖다붙이게 되고, 심리적 운명론으로 빠져드는 경향도 강해진다. 나는 비통함 때문에 당황하고 진이 빠진 상태에서 의문부호들, 혼돈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의 상징들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왜 나인가? 왜 이런 일이? 왜 지금?" 나는 나를 둘러싼 불합리를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서 과거를 샅샅이 뒤져서 바를 수 있는 약이 될 만한 것,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들을 연결시킬 수 있을 만한 고리를 찾아내려고 했다. 내 삶의 무작위적인 점과 선에 어떤 패턴을 강제하려고 했다.
제21장
자살
7. 인간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으며, 그것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되었다. 성난 개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자신을 화나게 한 사람이나 물건을 물어뜬는다. 그러나 성난 인간은 침울하게 방 안에 틀어박혔다가 말없는 종이 한 장만을 남기고 총으로 자신을 쏜다. 인간은 상징적이고 비유적인 피조물이다. 나는 내 분노를 전달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음으로 그 분노를 상징하려고 했다.
제22장
예수 콤플렉스
1. 고뇌에 괜찮은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런 비참한 상황을 나 자신이 특별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리 왜 내가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증거, 따라서 어쩌면 그들보다 낫다는 증거가 된다.
제23장
생략
1. 영혼은 낙타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아랍 속담이 있다. 우리는 시간표가 꽉 짜인 현재의 무자비한 역학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마음의 자리인 영혼은 기억의 무게에 힘겨워하며 노스탤지어에 젖어서 느릿느릿 뒤따라온다. 만일 모든 연애가 낙타에서 짐을 더 얹는 것이라면, 사랑의 짐의 의미에 따라서 영혼의 속도는 더 느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의 낙타가 마침내 클로이의 기억이라는 엄청난 무게를 떨쳐버렸을 때, 낙타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11. 낙타는 시간을 따라 걸어가면서 짐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계속 등에 실린 기억과 사진들을 흔들어 사막에 떨어뜨렸고, 바람이 그것들을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낙타는 점점 더 가벼워져서 나중에는 그 독특한 모습으로 뛰어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현재라고 보이는 조그만 오아시스에서 이 지친 짐슴은 나의 나머지를 따라 잡게 되었다.
제24장
사랑의 교훈
1. 우리는 사랑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교훈들이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아니면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실수를 무한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유리가 맑아 보이기는 하지만 뚫고 날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파리들이 계속 미친 듯이 유리창에 머리를 박는 것처럼, 지나친 의욕, 고통, 씁쓸한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도록 어떤 기본적인 진실들, 지혜의 조각들을 배울 수는 없는 것일까? 식사, 죽음 돈에 대해서 지혜로워질 수 있듯이 사랑에 대해서도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야심은 정당한 것이 아닐까?
18. 나는 좀더 복잡한 교훈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의 모순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교훈, 지혜에 대한 요구를 지혜가 무력해지는 상황과 조화시킬 수 있고, 첫눈에 반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그 불가피성과 조화시킬 수 있는 교훈, 사랑을 평가할 때에는 교조적 낙관주의나 비관주의로 달아나지 말아야 하고, 두려움의 철학이나 실망의 윤리학을 구축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은 분석적 정신에게 겸손을 가르쳤다. 아무리 확고부동한 확실성에 이르려고 몸부림을 쳐도 분석에는 절대로 결함이 없을 수 없다는 교훈, 따라서 아이러니로부터 절대로 멀리 벗어날 수가 없다는 교훈을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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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을 처음으로 알게 된 책이다.
책을 읽고, 알랭 드 보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다.
연애에 대한 이야기에 철학적인 심리구조를 풀어가는것에
색다른 신선함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나의 머리속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출판된 알랭 드 보통의 소설 모두를 주문했다.
알랭 드 보통 둥둥 떠다니다 잡히다.
# 1. 내 책꽂이에 남겨진 이 책을 독서광인 남동생이 보고
딱! 자기 스타일의 작가라며 알게 된것을 좋아했다.
# 2. 타 카페 카페지기로 있으면서 회원중 한분이 게시판으로 나에게 상장을 수여하였고
어느날 오프모임에 부상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을 주셨다.
# 3. 나너할배가 나에게 댓글을 달아주셨다.
내게 처음답해주신 댓글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학동역 커피빈 지점!! ㅋㅋ (아고라방, 댓글에서 보았습니다.~~^^) 나너너나님 글을 읽으니, 갑자기 알랭드보통의 '행복의 건축' 이 생각나네요... 예전 다 읽지 못한책이었는데, 그당시엔 도시 빌딩사이를 지날때도 아~ 아름답다~라고 느낀거 같습니다.~^^
09.03.13 09:44
09.03.13 12:12
# 4. 우공이산님의 글에서 알랭 드 보통 발견
-> 우공이산 정규앨범 1집 <아우어> 발매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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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어느 날 애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전화도 안해준다고 투덜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 남동생
그 후 술을 마시며 이야기 하다 동생은 말한다.
'남자 전화 기다리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가슴이 무너졌다.'
ㅋㅋ
그래서 그런가..
책 내용중
'전화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속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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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반납 기한이 되서 돌려주는 바람에 아직 다 못 읽었답니다.^^ ㅋ 보통의 책 중에...<불안>이랑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영어 제목이 consolidation of philosophy 였던가...?), 두 개 모두 괜찮았습니다...^^
키작은나무님이 다니시는 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지면서~~ 두권 모두 저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읽어봐야겠어요.
네~~~^^
개인적으로 연애할 때 들었던 많은 생각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어서,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네요. 철학적인 질문들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탁월한 소설. " 나는 사랑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상상하고 그 눈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라 나는 그녀에게 누구인가?였다." 읽는 내내 사랑에 빠져 있는 느낌이 드는 책.
모순된것도 많이 이해하게 해줬던거 같아요~~ 지금은 또 다 잊어버렸지만, 다시 한번 읽어봐야할거 같아요~~( 기억력이 꽝이라~~ ㅋㅋ)
오
반가워라

그 책 5년전쯤에 읽고, 제자한테 빌려줬는데,,, 아주 좋더라구요. 오드리 헵번님 고맙습니다. 그 외에도 <여행의 기술 >,<불안>, <동물원가기>, <행복의 건축>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은 읽었구요. 지금은 <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읽는데 아주 좋아요. 전, 철학 전공하여 다양한 세계에 관심과 미적감각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그 작가의 글을 접할 때마다 희열을 느끼더라구요. 


저도 반갑습니다. 저도 다 읽었어요~ 철학을 전공하셨다니, 도움을 더 받고 싶네요~ 괴팍한 성격은 어캐 헤쳐나가야 하는지..의문인데,,좀 알려주셈!^^ ㅋㅋ 피카소님의 댓글을 보자니, 더욱 알랭 드 보통이 그리워지네요~~^^ 고맙습니다.~
오메~~ 오드리헵번님~ 제가 철학을 전공했다는게 아니구요, 알랭 드 보통이 철학을 전공했다고 했답니다. 저는 철학을 좋아하지만, 아는게 별루 없어요. 제 짝이 철학에는 능통해요. 또 뵈어요~~~~
고맙습니다...헵번님...저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인 것 같네요...행복한 4월의 주말 보내시길..
네~ 고맙습니다. 비단안개님도 행복한 주말~ 휴일 되시길 바래요~~~~^^*
아- 너무 좋은 책 추천하셨어요... 한글자 한글자에 빠져들게 만드는 책이더군요 ^-^...
고맙습니다.~~^^ 작은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