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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씨대종회 원문보기 글쓴이: 11장문식(문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鄕約 ]
제도
규약
향촌규약(鄕村規約)의 준말로, 지방자치단체의 향인들이 서로 도우며 살아가자는 약속.
넓은 의미로 향촌규약, 향규(鄕規), 일향약속(一鄕約束), 향약계(鄕約契), 향안(鄕案),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안(洞安), 족계(族契), 약속조목(約束條目)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가진 다.
원칙적으로 향약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향촌자치와 이를 통해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숭유배불정책에 의하여 유교적 에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하여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각종 재난(災難)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라고 할 수 있다.
향약(鄕約)이라는 용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니면서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실체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 <주자증손여씨향약 朱子增損呂氏鄕約>이 전국적으로 시행, 보급되면서부터이다.
즉, 향약을 최초로 실시한 것은 중국 북송(北宋) 말기 섬서성 남전현(陝西省 藍田縣)에 거주하던 도학자 여씨(呂氏) 4형제(大忠, 大防, 大釣, 大臨)였다. 이들은 일가친척과 향리 사람들을 교화 선도하기 위하여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라는 4대 강목을 내걸고 시행하였던바, 이것을 후대에 남전향약이라고 일컫게 되었다.
그 후 남송 때 주자(朱子)가 이 향약을 가감 증보하여 보다 완비한 <주자증손여씨향약>을 그의 문집인 ≪주자대전≫에 수록하였다. 그리하여 향약은 향촌사회의 규약이되 주자학적 향촌 질서를 추구하는 실천규범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향약은 중국 송대의 <여씨향약>에서 전래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민족사회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공동체적인 상규상조(相規相助)의 자치정책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가 동왕 18년(935) 신라 경순왕(金傅)이 항복하자 그를 경주지방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여 부호장(副戶長) 이하 향리들의 일을 처리하도록 한 데서 시작된 고려의 사심관제도는 그 기능이 4가지였다.
즉, ① 인민을 종주(宗主)하고, ② 신분의 유품(流品)을 밝혀 구분하며, ③ 부역을 고르게 하고, ④ 풍속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즉, 중앙 귀족으로 편제된 호족(豪族)들에게 그 출신 고을에서의 기반을 인정하면서 교화와 세금 부과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여 향촌 운영을 맡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심관제도는 고려왕조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시기적으로 부침되다가 충렬왕대와 충숙왕대에 혁파되었고, 그 뒤 여말선초에 사심관의 기능과 같은 유향소(留鄕所)가 설치되었다.
유향소는 그 설립 목적이 지방의 악리(惡吏)를 규찰하게 하여 향풍을 바르게 하는 데 있었다. 악리는 이른바 원악향리(元惡鄕吏)를 가리키는 것으로, 감사 수령 밑에서 직접 백성과 접촉하여 행정사무를 담당하는 향리가 수령 방백 이상의 실권을 잡고 가렴주구의 수탈을 자행하는 것을 말하였다.
이들의 발호를 성문율로 규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이후 ≪경국대전 經國大典≫이 반포된 뒤이며, 그 이전에는 향촌의 유력자들로 하여금 유향소를 설치케 하여 향리의 악행을 규찰케 하였다.
즉, 조선왕조 초기 법전이 완성되기 전에는 지방의 품관(品官) 여러 명에게 유향소를 조직케 하여 원악향리의 발악에 대비하는 한편, 향리의 풍속을 돈독하게 하여 행정규찰 및 지방자치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이들의 정원은 지방의 부(府) 이상은 5인, 군은 4인, 현은 3인의 품관을 각 경재소(京在所)가 선정하였다.
유향소를 설치한 정확한 연대는 사료상 나타나지 않고 국초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처음부터 유향소가 국왕의 명으로 설치된 것이 아니라 지방 군현의 유지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 건국과 함께 향리 교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면서 새 왕조의 면모를 보이기 위해 태조가 직접 <향헌조목 鄕憲條目>을 지어 반포함으로써 유향소의 조직화와 보편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유향소는 그 뒤 태종대에 없앴다가 세종대에 다시 설립하였고, 세조대에 또다시 없어졌다가 성종대에 되살아났다. 다시 연산군대에 폐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며, 중종대와 선조대에도 유향소와 경재소의 파거론(罷去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존폐 논란은 당시 정치세력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훈구파 관료들은 유향소 폐지론에 적극적이었고, 사림파는 유향소 유지론을 주창하였다.
그리하여 중종반정 후 정계에 등장한 사림파 관료들은 유향소의 부진한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 <여씨향약>을 실시하여 풍속 교정의 임무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즉, 중종 14년 ≪소학 小學≫의 내용에 들어 있는 <여씨향약>을 외방 유향소 및 한성 5부, 각 동 약정(約正)에게 공급하여 향약을 실시하도록 명하고 있다.
중종 12년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은 <여씨향약>을 간행 반포하고, 이어서 ≪언해본여씨향약 諺解本呂氏鄕約≫을 단행본으로 간행 반포하여 향약을 전국에 공고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종 14년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 이하 70여 명의 신진 사류들이 참화를 당하자 향약은 폐지되고, 그 뒤 명종(明宗) 때 강제로 시행하기보다는 각 지방의 특수성에 적합한 향약을 설정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이후 조선적 향약 성립의 한 시대적 배경이 되었다.
- 조선적 향약 -
<여씨향약>이 보급, 시행되기 이전부터 우리 향촌사회에는 자생적인 결계(結契)가 향촌민들에 의해 조직되어 왔으며, 중앙 정부에서는 교화와 지방 통치에 대한 보조기능을 목적으로 한 <향헌 鄕憲>을 반포하여 유향소를 통해 시행코자 하였다.
조선 중종 12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국령(國令)으로 향약의 시행을 독려하였으나 전국적으로 동시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송대 여씨 형제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지역적 정서 속에서 만든 향약이, 시대와 지역이 다르고 사회적·문화적 환경이 다른 조선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모순과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각 지방에 적합한 향약을 만들어 지역에 따라 차별성 있는 향약이 실시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향약의 시초는 태조 이성계가 친히 만든 <헌목 憲目> 41조였다. 이 <헌목>을 그의 손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증보하여 56조로 된 <항헌>을 만들어 반포하였다.
태조의 <헌목>은 조선 후기의 향약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즉, 향원(鄕員)의 대상을 향중사족(鄕中士族)으로 한정하여 내외 혈통에 하자가 없는 자 및 그 자제에 한했던 것이다.
이는 양반 가운데서도 그 지역사회의 지도적인 현족(顯族)으로 조직된 향규였다. 한편, <향헌>은 <헌목>과 형식은 달랐으나 세족(世族)의 변별을 엄격히 할 것을 논하는 등 신분적 특권과 절제를 역설함으로써 향규의 성격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헌목>과 <향헌>은 그 뒤 공통의 향규로서 조선왕조 500년간 준행되어 왔지만 향약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향헌>은 향촌사회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군림하는 사족 중 현족들을 위한 향규라고 할 수 있다.
<헌목>과 <향헌>의 뒤를 이어 조선 향약의 대표적인 역할을 한 것은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악 禮安鄕約>과 율곡 이이(李珥)의 <서원향약 西原鄕約>, <해주향약 海州鄕約>,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 <해주일향약속 海州一鄕約束>이다.
<예안향약>은 명종 11년 퇴계가 향리인 예안에 낙향한 후 지방 교화가 미진한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선배인 이현보(李賢輔)의 유지를 이어 제정한 것이다. 이 향약은 극벌·중벌·하벌의 3대 항목으로 나누어 과실을 징벌하는 조목을 들고 있다.
즉, 극벌은 부모불순자(父母不順者) 외 6항목, 중벌은 친척불목자(親戚不睦者) 외 16항목, 하벌은 공회만도자(公會晩到者) 외 4항목을 설정하였지만 구체적인 치벌(治罰)방법은 명기하지 않았다. 끝에 원악향리 등 4조목을 부기하였으나 이것 역시 징벌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그러므로 <예안향약>은 완비된 내용의 향약은 아니지만 과실을 처벌하는 것을 주안으로 하고, 기타 입교예속 등은 학교교육에서 권도할 것을 주장한 퇴계의 평소 지론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 향약은 <주자증손여씨향약>과는 관계가 없었으니 우리 나라의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징계하여 가풍과 향풍(鄕風)을 진작케 하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 향약은 퇴계 생존시에는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그 뒤 영남 학파의 전통을 이은 제자, 문인들에 의하여 영남지역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용되었다.
율곡 이이는 <서원향약>을 비롯한 4종류의 향약을 제정하고 일생을 향약과 관련하여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청년 시절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향리 교도에 진력한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서원향약>은 율곡이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부임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미풍양속을 진작키 위해 전임 목사들이 <여씨향약>을 참작하여 만든 향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든 것이다.
이 향약의 특징은 반(班)·양(良)·천민(賤民) 등 모든 주민을 참여시키는 계조직을 향약조직과 행정조직에 연계시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청주목은 25장내(掌內)였는바, 면 단위 계장과 동몽훈회, 색장을 두어 향약계의 실제적인 단위로 운영하였다. 향약의 내용에서도 조선 초기 <향헌>의 내용을 많이 차용한 것 같다.
즉, 이 향약은 권면해야 할 선목(善目)과 규계해야 할 악목(惡目)을 구분, 정리하여 과실상규 조목과 환난상휼 계조직의 약속조목을 혼합한 향규약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임원 구성은 도계장 4인, 매장 내 각 계장 1인(도합 25인), 동몽훈회 1인, 색장 1인, 매리(里)에 별검을 두었으며, 향회독약시 좌차규식(座次規式)은 신분과 직임에 따라 구분하고 같은 신분이나 직임일 때는 연령순으로 좌차를 정하였다.
<해주향약>은 해주 석담지방 향민 전체를 대상으로 입약된 것이 아니라 해주지방의 유생이나 향사족들이 권선징악과 상호부조를 통하여 향사풍(鄕士風)을 강화하게 하기 위한 향규약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해주일향약속>도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여 형식적으로는 향약 같지만 내용상에서는 조선 초기 <향헌>이나 퇴계의 <예안향약>과 같은 향규임을 알 수 있다. 즉, <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채용하면서도 그 외의 각 조목은 그 지방실정에 맞도록 규정한 것이다.
예컨대, 4대 강목 중 과실상규와 환난상휼의 2강령에 관한 조목은 더욱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특히 관속의 중대한 범죄가 바로잡히지 않을 때는 약원들을 중심으로 여론을 일으켜 관권을 견제하고 향권을 지켜 나가려는 지방자치적 성격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음이다.
율곡이 만든 일련의 향규 조약들은 그의 학문을 이은 기호지방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보은군수(報恩郡守) 김홍득(金弘得)이 1747년에 작성한 <보은향약 報恩鄕約>이다.
- 향약의 종류 -
중앙집권적 관료제 사회로 신분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 초기에는 자치적 기능이 미약했고, 향촌사회의 독자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건국 초부터 지방에서 시행되고 있던 향규는 중앙집권을 위한 보다 효과적인 지배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관치(官治)의 보조 기능에 그칠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현 단위든 자연촌락 단위든 간에 자치적 기구가 존재했고, 자치적 기능도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향청(鄕廳)을 근거로 하는 사족(士族) 또는 향족(鄕族)들의 활동은 향촌사회의 권익과 특성을 대변해 주었으며, 촌락에서 자생적인 촌계는 당시의 생활이나 문화 수준에서 필요했던 상부상조의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시키고 안정된 사회생활을 지속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향약은 그 성격, 기능, 내용에서, 특히 시대적 배경 속에서 향규(鄕規)·동계(東契)·주현향약(州縣鄕約)·촌계(村契)로 나누어 보는 것이 조선적 향약을 더 잘 이해하는 지름길이라고 볼 수 있다.
[향규]
향규는 향중지규(鄕中之規)의 준말로, 조선 초기부터 다양한 명칭으로 사용되어 왔다. 즉, 일향약속, 완의, 입의, 약속조목, 향립약조, 향헌, 향사당약속, 향안규식, 향약절목, 향약장정, 향약 등으로도 불렸다. 향촌사회는 향규에 의하여 향안(鄕案)이 작성되었는바, 향안은 일향(一鄕) 현족(顯族, 士族)의 명단이었다.
사족은 향촌의 지배적 인사로서 향촌 질서를 확립하고 수령권에 대해 향권을 보호한다는 차원에서 향안을 작성하였으며, 조선 전기부터 있어 왔으나 임진왜란 후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사족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향안 작성이 시도되었다.
향안은 입의(立議), 인명(人名), 임원(任員)의 수결(手決)로 구성되어 있으며, 입의는 향규로서 향원들 사이의 규약이었다. 향규는 향임(좌수, 별감)의 선임, 향안의 입록 기준 및 그 절차, 향원의 준수사항 등을 그 내용으로 담고 있다.
17세기 향안은 향촌사회 사족들 간의 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신분간의 배타성 및 지역적 폐쇄성을 가지고 있었다. 즉, 향안에 입록되기 위해서는 부·모·처족에 하자가 없는 삼향(三鄕)이어야만 직서(直書)될 수 있고, 이향·일향·무향(無鄕)은 권점(圈點)을 거쳐 기록되었다.
향안에 입록된 자를 향원(鄕員)이라고 하였고, 향원 중에서 향임(鄕任)을 선출했으며, 향회(鄕會)를 구성, 공론에 의하여 향촌의 여러 가지 일들을 운영하였다.
[동계({{L:洞契//J23206
)]}} 향규는 원칙적으로 향촌민 지배를 위한 향권(鄕權)에 관한 것이고, 향약은 원칙적으로 서민을 교화하기 위한 것이어서, 엄밀히 논하면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향규가 관권(官權)에 대항하여 향권을 지킨다는 것은 반대로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퇴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양반으로서의 행실에도 문제가 많았다.
한편, 서민들도 임진왜란을 겪은 뒤 막심한 피해를 당하여 겨우 생명만 부지하게 된 형편이었으므로 인륜이나 명분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에 상하민이 모두 무너진 질서와 생활윤리 등을 시급히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상하민을 망라한 새로운 향약, 즉 지역적인 자치조직으로서 상하 합계의 동계인 동약(洞約)이 출현하게 되었다.
사족 사이의 향규와 하층민 사이의 촌계가 일원화되어 지역사회 전원을 참여시키는 동계는 선조 34년(1601) 경상도 예천 고평동에서 정탁(鄭琢)에 의해 만들어진 <고평동동계갱정약문 高坪洞洞契更定約文>이 시초이고, 이러한 추세는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 동계는 임진왜란 후 실정에 맞게 간편한 것을 위주로 하였는데, <여씨향약>과 관계없는 우리 나라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속례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전체 구성을 권면조(勸勉條)와 금제조(禁制條)로 나누고, 권면조는 진충사군(盡忠事君), 창의복수(倡義復讐) 등 11조, 금제조는 불구급난(不救急難), 천벌금림(擅伐禁林) 등 18조로 시국과 사회생활을 반영한 독특한 약조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약문에는 고평동의 상민도 계중(契中)에 들게 하여 하계(下契)라는 용어가 처음 보인다.
조선 후기 동계는 임란 후 전후 복구의 급한 고비를 넘긴 뒤부터는 상하 협력보다는 상계에 대한 하계의 순종을 강조하는 수분(守分)이 첫째가는 덕목으로 고취되는 등 사족의 동민 지배기구로 성격이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부농층 서얼들이 면리(面里)의 실무를 맡게 되자 사족들의 향권은 약화되어 갔다. 그것이 영조 15년(1739)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제정한 경상도 대구의 <부인동 동약 夫仁洞 洞約>이다.
사족의 촌락 지배기구인 동약의 공동체적 기반이었던 동답(洞沓)을 에워싼 분쟁, 신흥 세력의 저항으로 동답과 동약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이 <부인동 동약>에 기술되어 있다. 즉, 부인동 동약의 분쟁은 공전(公田) 운영에서 발단이 되었으며, 공전은 당초 촌계에서 촌민이 공동으로 마련한 동답에서 유래하고 있었다.
그것을 동약존(洞約尊) 최흥원의 오랜 독단적 운영으로 최씨 가문이 사유화하게 되자 여기에 대해서 자기들의 지분을 주장하며 동약을 해체시키는 분계(分契) 편에 섰던 것이 부농 최씨 가문의 서얼들이었다.
사회·경제적 변동의 확산, 즉 화폐경제의 침윤, 수취체제의 변동에 따라서 동계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면총제(面摠制)하에서 각종 요역(徭役)과 관전(官錢)의 부담이 동 단위로 부가되었으므로 동계 사이에서 부담의 불균형, 고헐(苦歇)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또한 주민들의 불평과 호소를 조정하는 관의 태도도 일시적인 것이었으므로 동계 사이의 갈등 대립은 심화 확대되어 동계 자체의 붕괴를 가져왔고,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각종 목적계가 성황을 이루게 된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주현향약(州縣鄕約)]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동에 대비하기 위하여 뜻있는 수령이 앞장서서 지역사회의 상하 주민 모두를 의무적으로 참가시켜 운영하던 향약으로, 동계의 확대판이었으며 18세기에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수령이 향약을 선도하게 된 원인은 유향분기(儒鄕分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효종(孝宗) 5년(1655) 영장사목(營將事目)이 반포되어 향청의 좌수가 군역차정의 책임을 맡게 되자 향임이 향리 수준으로 격하되어 사족들이 향임을 기피하게 되었다.
또한 숙종(肅宗) 5년(1675)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이 반포되어 상인(常人)과 천인(賤人)의 역이었던 면임(面任)을 지배 계층의 영향력 있는 인사로 임명하려 했으므로 사족의 기피 현상은 필연적이었다.
사족들이 향임을 기피하게 되자 이 자리를 향외인(鄕外人)인 낮은 가문 출신들이나 서얼들이 차지하여 향족(鄕族)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향안입록을 둘러싼 신구 세력간의 싸움이 일어나고, 사족의 이해를 반영한 향규는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조선시대의 통치는 교육의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화와 행정이 본래 하나로 운영되어 약임(約任)이 일원적이었다. 교화가 자주 교체되는 수령보다 토착 세력인 향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향청을 향약당(鄕約堂)이나 풍헌당(風憲堂)이라고 하였다. 그러던 것이 유향분기 이후 향족이 향청을 차지하게 되자 사족은 향교나 서원으로 근거를 옮겼다.
이것이 곧 사족의 향권 포기는 아니었으나 경제적인 부를 축적한 향족층과의 대립은 당시 대세였고, 이에 따라 향촌의 교화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동법 시행에 따른 광범위한 사회변동, 종모법(從母法) 실시에 따른 노비의 격감, 균역법의 실시로 양역이 줄자 노비는 모두 도망하여 양반들의 생계가 막연하게 되었다.
또 상민층은 그들대로 역(役)을 피하고 걸핏하면 양반을 능멸하는 등 상약하강의 형세가 만연되어 갔으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질서의 동요를 방관할 수만은 없는 실정이었다.
교화의 진작, 수분(守分)의 강조는 시급한 과제였고, 이것을 향청에만 맡길 수 없게 되어 수령이 직접 나서서 관권을 뒷받침으로 기층민의 촌계를 조직화함으로써 더욱 철저히 지배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현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향규와는 달리 반상(班常)을 망라하여 지역 전원을 참여시키는 상하 합계의 동계가 나타났지만 이 동계는 지역촌을 단위로 한, 문자 그대로 동계였다.
그러나 면리제(面里制)가 발전하고 수령권이 강화된 배경 속에 군현 단위의 주현향약이 등장하여 교화와 부세를 수령이 직접 관장하게 되었다.
주현향약의 필요성은 이미 명종 15년(1560) 율곡 이이가 <파주향약서 坡州鄕約序>에서 향약이 유명무실한 이유를 서술한 데서 비롯된다. 즉, 향약은 첫째, 시행했다 말았다 하는 시행에 일관성이 없었던 점과 둘째, 마을마다 촌계를 갖고 있을 뿐 관권의 뒷받침이 없어 범법자가 있더라도 징계되는 바가 없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약조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면서 향약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주현(州縣)은 면(面)을, 면은 리(里)를 감독하고 뒷받침하는 일이 필수적이며 수령이 선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현향약은 17세기 <김기향약 金圻鄕約>과 <포산향약 苞山鄕約>으로부터, 19세기에는 <강릉정동면향약절목>에서 보이지만, 가장 활기를 띤 시기는 18세기였다. 그 중 영조 23년(1747) 군수 김홍득(金弘得)에 의하여 충청도 보은에서 실시된 향약조목이 대표적인 주현향약이었다.
이 <보은향약>에서 군수 김홍득은 농민들의 유랑과 망명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하여 이들에게 권농을 강조하여 상부상조하는 농업공동체적인 향약을 권장하였다. 이와 함께 부세의 지나친 부담을 줄이고, 향족·향리층에 의한 무궤도한 침탈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즉, 사회·경제적인 변동 속에서 향약을 통하여 농민의 토지 이탈을 막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안정시켜 그들을 공동체 속에 결속시킴으로써 농업경제에 바탕한 체제의 안정을 도모코자 하였다.
주현향약은 면(面)을 기간 단위로 하여 기존 자연촌에서의 동계·촌계 등을 하부조직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향교조직을 이용하였으며, 전 지역주민은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다.
또한 향약강신회에서 선·악행자를 권면 규제하고 상하간의 수분을 강조하여 신분제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주현향약의 성패는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었고, 시행의 지속성 여부는 신관 수령의 지지를 얻어야 하므로 사실상 지속되기 어려운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촌계(村契)]
계(契)는 ‘모인다[會]’의 뜻으로 여러 사람이 어떤 일을 함께 하려고 모이는 것을 말하므로 단체를 이루는 것은 무엇이든지 계라고 할 수 있다. 계에는 단체성에 의한 자율기능과 모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경제적 기능이 있다. 자율기능은 옛 공동체에서 비롯한 것이며, 경제적 기능은 고려 이래 보(寶)에서 유래했다고 하겠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계의 종류로는 자치적인 말단 행정조직으로서의 계가 있는바 한성부 호적에 가좌동계, 여의동계 등이 그것이며, 상공 분야로는 보부상계, 육의전계 등이 있었다.
또 촌락 단위로 보면 금송계(禁松契), 군포계(軍布契), 우계(牛契) 등이 있었으며, 기타 화수계(花樹契), 갑계(甲契), 상도계(喪徒契) 등도 있었다. 특히 1938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480종류의 계가 있었으며, 전체 계의 수는 29,257개, 계원수는 903,640인이었다.
이러한 계의 연혁은 마을이 생긴 역사와 같다고 할 수 있으며, 사람이 사는 곳에는 자연히 자생적인 상규상조지도(相規相助之道), 즉 생활의 규칙이 없을 수 없으므로 이것이 촌계의 규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향규·향약도 자생적인 촌계 규칙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촌계는 성문화되지 않고 불문율, 관습으로 전습된 것이 상례였다. 촌계의 주요한 소관사는 촌제(村祭), 두레 및 촌회(村會)의 운영이었다.
촌제는 서낭제·산신제·동제·당제·당굿 등으로도 불리는바 ‘동제(洞祭)’라는 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제는 한밤중에 지내는 제사와, 제사 후에 모든 주민이 참여하는 축제로서의 굿과, 동제 전후에 열리는 마을의 자치회인 동회(洞會)라는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촌과 동은 각기 자연촌을 의미하기도 하고 지역촌을 의미하기도 하여 규모상으로는 구별하기 어렵고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동계와 촌계는 같은 뜻이었다.
동제는 자연촌 주민들의 안온한 생활을 위하여, 즉 풍년과 재액 방지 등을 하늘과 신에게 비는 뜻에서 연 1회 또는 2회 공동으로 제사지내는 중요한 연중행사로 제사의 대상은 큰 수목이나 바위이고, 제신은 산신·서낭신 등의 자연신이었다.
제사 후에는 제수로 마을의 전 주민이 참여하는 동연(洞宴)이 열렸으니 공동체적인 친목을 다지는 기회였고, 풍악은 향토 오락으로서 으뜸가는 중요한 행사였다. 촌계의 또 다른 중요한 일은 두레였다. 두레는 마을 단위로 조직되며 15, 6세에서 55세 정도 이하의 모든 성인 남자가 참여하여 평균 30명 내외로 구성되었다.
두레패, 두레꾼이라고 불리는 두레의 성원에는 여자와 노인, 어린 소년은 제외되며 두레에 참여하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권리로서 참가를 거부하면 처벌되고 흘러들어온 외지의 일꾼은 가입이 거부되었다. 두레패는 마을의 전 경지면적을 공동으로 경작하고 과부나 병자, 노약자 등은 무상으로 하여 두레 공동노동의 사회보장적 혜택을 받았으니, 두레는 우리의 독자적인 풍습이다.
이 밖에 촌계에서는 제방·교량·동사(洞舍) 등 마을 공공시설의 보수·유지, 촌회에서의 임원 선출, 공금의 출납보고, 축제의 조직, 포상에서의 상부상조, 두레의 조직운영 등 농사의 지도 감독 등에 관한 역할을 맡았다.
또한 남의 논밭 경계를 침범하는 자, 남의 관개수로를 훔친 자, 게을러서 양전을 썩힌 자 등은 처벌되었고, 산림도 마을의 공유 재산으로 인정하여 공동으로 관리했으며, 기타 영농이나 생활상의 분쟁을 조정 해결하였다.
또한 도난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면 촌계에서 돌보았고 심지어 과년한 처녀 총각의 혼사문제까지 주선하여 마을은 흡사 대가족과 같았으며, 특히 상선벌악(賞善罰惡)에 치중하여 도의선양에 힘써 효자 열녀 등이 나왔다.
촌회는 <주자증손여씨향약>이 전래된 뒤에는 그 영향을 받아 향약적인 것으로 바뀌었으므로 촌회의 모임을 향약강신회(鄕約講信會)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향약 자체는 중국에서 전래되고 수용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사회에 고대로부터 내려온 자생적이고 전통적인 촌회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선적 향약에 대한 역사인식은 한국사 전반에 대한 주체적 입장에서의 해석이며, 촌계에서 상부상규하는 것 자체와 협동의 전통은 우리 민족사를 지켜온 초석이라 할 것이다.
- 각 도 향약·동계의 운영 실례 -
[경기도]
경기도의 향약·동계는 <이리동약 二里洞約>, <죽주향약 竹州鄕約>, <우하영향약 禹夏永鄕約>, <파주향약서 坡州鄕約序>, <소고니가좌동금송계좌목 所古尼可佐洞禁松契座目>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리동약>은 1756년(영조 32)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광주부 경안면 이리동에서 시행했던 동약이다. 순암은 넓은 의미에서 동약을 풍약(風約)과 동약(洞約)으로 구분하여, 풍약은 리(里)를 단위로 하고, 동약은 두 개의 리를 합하여 한 동(洞)으로 만들어 이를 대상으로 실시하려고 하였다.
동약의 내용은 상·중·하계로 구성되었으며 전 주민이 참여하여 마을의 안정을 도모하려 하였고, <여씨향약>의 4대 덕목을 바탕으로 부조(附條)를 첨가하여 선목(善目) 16조, 과목(過目) 16조, 유하계문(諭下契文) 14조로 되어 있었다. 집회는 연 2회로 3월 3일과 9월 9일로 정하였으며, 임원은 집강(執綱)을 비롯하여 유사(有司), 장무(掌務), 색장(色掌) 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순암이 시행한 <이리동약>의 특징은 동약과 함께 사창(社倉)을 실시하여 회원들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코자 한 데 있었다고 하겠다.
<죽주향약>은 현재 안성군 보개면 남풍리에서 시행되었던 동약으로 잠호(潛湖) 김재익(金載翼:1736∼1825)의 문집인 ≪잠호집 潛湖集≫에 수록되어 있다. 동약의 구성은 향약범례약속, 죽주향약서, 풍촌금양겸향약계서로 되어 있고, 연 1회 집회를 가지며, 사석(師席)을 비롯한 교장(敎長), 도약장(都約長), 유사(有司) 등의 임원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특히 매월 초에 길일을 택하여 도약장 집에서 선악적(善惡籍)을 검토하고 상벌을 논의하였다. 상벌은 선행 35항목, 악행 25항목을 선정하여 평가하였다.
<우하영향약>은 쇄석실 우하영(禹夏永:1741∼1821)이 수원에서 실시했던 향약이다. 그 내용은 <여씨향약>의 4개 항목 외에 충효상면(忠孝相勉)을 첨가해서 5대 강목으로 구성하여 신분 질서 유지와 농업의 권장, 교화 진작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향촌민 규제에 있었다.
임원은 일읍(一邑)에는 도헌(都憲) 1인, 부헌(副憲) 2인, 각 동에는 동헌(洞憲) 1인, 공원(公員) 1인, 집강(執綱) 1인을 두도록 하였으며, 선행자에게는 호역(戶役)을 면제시키고, 범죄자에게는 태형(笞刑)을 가한 후 관아에 보고하여 의법처리하도록 하였다.
<파주향약>은 1560년(명종 15)에 작성되었으나 그 서문만 전해지고, 향약의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향약의 서(序)를 율곡 이이(李珥)가 작성한 것으로 보아 주현향약의 성격을 지녔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소고니가좌동금송계좌목>은 현재 이천군 대월면 가좌리에서 1838년(헌종 4)으로 추정되는 무술년(戊戌年)에 실시되었던 금송계로 서문(序文), 소지(所志), 완문(完文), 입의(立議),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농촌사회의 자치적 상호 규제에 의하여 한 마을의 구성원이 자치적으로 산림보호조직을 만들어 산판을 보호하고 공회를 통하여 능률을 높이며, 수령에게서 처벌권을 위임받아 운영하는 등 조선시대 송계(松契)의 일반적인 경향에 따라 시행되던 촌계(村契)의 일종이었다.
[강원도]
강원도는 영동지방, 특히 강릉과 삼척에서 시행되던 향약이 대표적인 것으로 강릉의 <약국계 藥局契>, 향약계(鄕約契)인 <성산면향약절목 城山面鄕約節目>과 <정동면향약절목 丁洞面鄕約節目>, 삼척 도하면(道下面)에서 운영되던 동계인 <송정동계 松亭洞契>, <지흥동계 智興洞契>, <천곡동계 泉谷洞契>를 통하여 조선 후기에 들어와 영동지방의 사족들이 어떻게 향촌을 지배했는지와, 상하 합계에 의한 목린계(睦隣契) 조직의 당위성, 동역(洞役) 운영을 위한 동계조직의 필연성 등을 구명할 수 있다.
<강릉 약국계>는 1603년(선조 36), 강릉이 영외(領外)에 위치하여 무의무약(無醫無藥)한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활인명(活人命)을 목적으로 결계(結契)하여, 이후 200년간 지속된 조선 후기 대표적인 촌계의 하나였다.
이 계의 조직과 운영은 사족이 전담했으며, 약국은 공국(公局)의 성격을 띠었고, 운영은 계중(契中)의 공의(公議)로 결정되었다. 조직은 계수(契首) 1인, 계장(契長) 2인, 항정유사(恒定有司) 4인, 5현유사(五縣有司), 각면 유사 각 1인씩을 두었으나, 실제 운영은 계장과 항정유사가 관부의 승인하에 주도하였으며, 향소(鄕所)에서 검칙(檢飭)을 받았다. 약국을 운영하기 위하여 관에서 약전(藥田)을 지급받았으며, 의생(醫生) 양성과 약재 확보를 위한 재원은 각 리(里) 단위로 미두(米斗)를 수합하여 충당했다고 한다.
양난 이후 17세기 후반에 나타난 상하 합계에 의한 향약계는 목린계(睦隣契)적인 성격이었다. 즉, 하민(下民)의 참여를 전제로 한 상하 합계가 면 단위에서 조직되면서 자연촌을 단위로 하는 하계(下契)인 기층민들의 조직이 상계(上契)인 사족 중심의 조직에 흡수, 통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상하 합계의 출현은 사족에 의한 촌락에서의 기반 확보라는 필연성에 의해서였으며, 향약의 기본 성격인 신분에 따른 수분(守分)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강릉에서 향약계는 1857년(철종 8) 강릉부사였던 유후조(柳厚祚, 1798∼1876)가 <향약절목 鄕約節目>을 마련하여 정인심 후풍속(正人心 厚風俗)을 목적으로 시행케 하였다. 당시 21개 면(面)으로 구성되어 있던 강릉부의 각 면 단위로 향약계를 조직하도록 하였으니, 그 중 현존하는 절목이 <성산면향약절목>과 <정동면향약절목>이다.
18세기 말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영동지방 삼척부 도하면(道下面)의 3개 동계가 공식적으로 조직되어 운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796년(정조 10) 이전부터 조직된 <송정동계>, <지흥동계>, <천곡동계>가 그것이며, 대리(大里:洞)인 송정동, 지흥동, 천곡동이 소리(小里)인 용정동, 시변, 하평동을 합동(合洞)하는 형태로 조직되었고, 그 목적은 각종 동역(洞役)의 평균 분정(分定)을 위한 것이었다.
[충청도]
조선 후기 충청도의 대표적인 향약과 동계는 우선 사족 중심의 공주 <부전동 동계 浮田洞 洞契>에서, 주현향약은 보은군수 김홍득(金弘得)이 시행한 <보은향약 報恩鄕約>에서 고찰하고, 이어서 구한말에 시행되었던 <화양동 향약 華陽洞 鄕約>, <제천향약 堤川鄕約>, <하곡동약 荷谷洞約>에서 살필 수 있으며, 상천민 사이의 상호부조를 위해 조직되었던 촌계는 1910년대 전후에 조사 보고된 통계 자료를 중심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부전동 동계>는 부전동이 조선 전기부터 사족(士族)이 강했던 반촌(班村)으로 16세기에 동계를 만들었으나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양난, 이괄의 난, 자연 재해 등의 사회변동으로 이 지역 사족들이 하민(下民)을 포섭하는 상하 합계 형식의 동계를 운영했던 것이다.
수 세기(17세기∼19세기)에 걸쳐 운영되었고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친 <부전동 동계>는 사족 지배에서 일탈되어 가던 하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상하 합계 형식의 동계에서 출발하였다.
18세기에는 군현 단위의 관주에도 향촌통제책이 실시되자 사족은 향권을 상실하고, 18세기 말에는 부전동 하민들이 사족의 통제를 거부하고 독립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19세기에 들어오면 동계를 통한 사족의 하인 지배는 불가능해지고 결사체적인 성격만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 하민들도 촌계조직에 의하여 상부상조의 결사체를 유지했는데, 임술민란(壬戌民亂, 1862) 때는 촌계가 공주지역 농민항쟁의 주체인 초군(樵軍)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보은향약>은 주현향약으로 수령이 직접 도집강(都執綱)이 되어 향약을 총괄하였다. 보은군수 김홍득이 1747년(영조 23) 향약을 입안하였는바, 그 구성은 향약서(鄕約序), 향약조목(鄕約條目), 향약후부록(鄕約後附錄), 별록유민인등(別錄諭民人等)으로 되어 있었으며, 향약조목은 조목·향회독약법·시벌지례(施罰之例)로 나뉘어 있었고, 그 시행 주체는 향소(鄕所)에서가 아니라 향교조직을 통해서 실시되었다.
특히 <보은향약>에서는 향약조목 별록으로 농가의 부업 내지는 경제생활, 사회생활에 대한 권장사항으로 축산에서부터 유실수의 식목에 이르기까지의 약조를 설정하였으니, 이는 군민 상하의 향촌 안정을 도모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에는 19세기에 들어와 <화양동 향약>, <제천향약>, <하곡동약> 등이 시행되고 있었다. <화양동 향약>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적손인 송재경이 만든 것으로 입의, 향약절목, 입약범례, 벌목, 회집동약법발문의 6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61조로 되어 있는 입약범례는 율곡향약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입증되며, 이 향약의 특징은 향약의 변용, 변모의 모습을 행문격식을 정하여 향약문식을 사용하였다는 데 있다.
<제천향약>은 1904년 <제천향약계입의>를 제정하여 제천 관내 8개 면에서 일률적으로 시행된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계열의 유림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던 향약이다.
즉,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은 국권을 상실한 시대적 상황을 목격하고 일본제국주의를 비롯한 외세를 물리치는 데는 향약의 상부상조하는 협동과 단결이 필요함을 느끼고 제자 항재 이정규(恒齋 李正奎)에게 명하여 만든 것이 이 향약이었다.
<하곡향약>은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의 문인인 명와 이기진(明窩 李起鎭)이 충주 하곡동에서 1905년에 만든 것으로, <제천향약>과 같이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외세의 침입을 막고자 오가작통(五家作統)을 바탕으로 조직된 향약이었다.
[경상도]
영남지방의 향약 및 동약을 통하여 사족 중심의 지배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의 역할과 성격을 검토하고, 영남지방의 자치기구가 갖는 독자적인 성격을 구명해 보았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전인 16세기에 시행되었던 퇴계 이황(李滉)의 <예안향립약조 禮安鄕立約條>와 <온계동계 溫溪洞契>, 난후 17세기 초의 <김기향약 金圻鄕約>, 17·8세기 밀양의 <인조무자절목 仁祖戊子節目>, 영천의 <망정향약 望亭鄕約>, 대구의 <부인동 동약 夫仁洞 洞約>의 사례를 분석, 정리하면 조선시대 향촌 자치기구로서의 향약 및 동약의 보편성과 영남지방의 특수성이 나타나게 된다.
<예안향립약조>는 1556년(명종 11) 퇴계가 향리인 예안에 퇴거한 가운데 작성된 향규로 조선적 향약의 시초였다. 이 향약은 퇴계의 스승 농암 이현보(李賢輔)의 교시와 그 일문의 적극적인 협조 및 일향 사족의 공론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실시되지는 못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향약의 한 전범(典範)으로서 이후 영남지방 향약 시행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동계가 사족 거주 촌락 단위에서의 규약이라는 전제하에 사족 상호간에 상부상조를 통한 결속력과 공동체적 유대를 공고히 하고 일향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본다면 퇴계 가문이 향촌의 사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온계동계>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온계동계>는 처음에는 족계(族契)의 단계에서 동 전체의 구성원을 대상으로 하는 동계로 발전하였고, 1548년(명종 3)경부터 시행되어 1554년(명종 9) 퇴계에 의하여 <온계동중친계입의서 溫溪洞中親契立議敍>와 길흉사의 부조내용 및 강신(講信)에 관한 조목을 작성함으로써 만들어졌다.
미증유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 후 피폐된 향촌사회를 복구하기 위하여 향리의 사족들은 상민들과의 협력이 절실했고, 이에 따라 상하 합계의 동계가 1601년 예천의 고평동에서 비롯되면서 영남 각 지역을 비롯하여 17세기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17세기 새로운 향약의 전형으로 <김기향약>이 나왔으니, 이 향약은 <주자증손여씨향약>의 4대 강목을 기초로 퇴계의 벌조(罰條)와 고유의 상규(常規)인 길흉조경(吉凶弔慶), 환난상구(患難相求), 춘추강신(春秋講信)을 결합한 것이었다.
특히 이 향약의 특징은 첫째 과실상규에서 상인약조(上人約條)와 하인약조(下人約條)로 구분하여 변화된 사회인식을 수용하고, 둘째 상부상조의 공동체적 관계 유지를 통하여 상·하민 간의 부조를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김기향약>은 임란 이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등장한 새로운 향약의 전형으로서 향촌 재건 및 지배를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었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지배 계층의 대응책이었다.
<김기향약>의 영향은 17·8세기 영남지방 각 지역에서 답습되고 있었으니, 1648년 밀양의 <인조무자절목>, 1735년 영천군 망정동의 <망정향약>, 1739년 대구 부인동의 <부인동 동약>으로 이어졌다.
밀양의 <인조무자절목>은 당시 밀양부사 강대수(姜大遂)가 <김기향약>에다 입의(立議) 18조를 첨가하여 제정한 향약이다. 이 향약의 특징은 첫째 교화의 강조, 둘째 향리(鄕吏)의 통제, 셋째 상부상조 기능의 강조였다.
이 향약이 계속해서 시행되지 못한 이유는 밀양 사족의 갈등, 즉 남인계와 노론계 사족간의 대립이 향촌을 분열시키고 있었으며, 향리를 천거하는 데 향청(鄕廳)을 거치도록 한 규정에 향리층이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영천의 <망정향약>도 <김기향약>을 모태로 하여 망정동민들이 1735년(영조 11)부터 1738년경까지 50여 년간 실시했던 향약이다. 이 향약은 전 동민을 대상으로 임원은 사족이 담당하였으나 구성원은 양반뿐만 아니라 외거노비와 솔거노비라도 지원하면 가입이 인정되었다.
그리하여 향적(鄕籍)이 상청(上廳)·중청(中廳)·하청(下廳)으로 구분되어 상청에는 양반, 중청에는 서얼·평문 중 출신급제자 및 향교 서재 교생, 하청에는 평민과 외거·솔거노비가 입록되어 있었다. 운영의 중요 내용은 상부상조에 관한 것이 절대적이었다.
대구 부인동에서 1739년(영조15) 백불암 최흥원(崔興遠)에 의해 만들어진 <부인동 동약>은 동약소(洞約所)를 중심으로 4개의 자연 촌락을 묶어서 형식상으로는 <김기향약>을 바탕으로 동중구규(洞中舊規)를 첨가하여 시행하였다.
이 동약의 특징은 동약강사(洞約講舍), 선공고(先公庫), 휼빈고(恤貧庫)를 설치하였다는 것인데, 선공고는 전세 납부를 담당하고 휼빈고는 진휼과 상장(喪葬)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동약도 족적 기반이 강하여 약원(約員)은 전 동민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설립 당시 동민만을 입록시키고, 이후의 이래민(移來民)은 입록시키지 않는 제약도 있었다.
[전라도]
호남지방의 향약·동계는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그 종류나 양이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까지 시행되고 있거나 최근까지 시행되던 향약과 동계가 많다.
특히 15세기 중엽인 1451년 광주지방에서 <광주향약절목 光州鄕約節目>이, 1475년에는 태인 고현동에서 <고현동약 古縣洞約>이 실시되어, 어느 도보다 빨리 향약과 동계가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영광지방에는 남극재(南極齋)의 사계(射契)와 노인계(老人契)가 있는 바, 사계는 1587년에 만들어져 이후 300여 년간 지속된 계조직이었다.
이 계는 창립 당시의 자료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지만 그 후 1602년에 만들어진 좌목(座目)의 입의(立議)가 현존하고 있는데, 계원간의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물품의 부조 내력, 노동력 제공, 상호간의 연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계와 함께 남극재에서 병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노계(老契)였다. 이 계는 1796년에 만들어져 현재 노인당(노인회)까지 연결되어 있다.
임실지방에는 삼계면 삼은리에서 오천민(吳天民)에 의해 시행된 <삼은동약 三隱洞約>과 병자호란 뒤 이주환, 이득환이 당시 현감이었던 조진석에게 건의하여 시행한 <임실향약 任實鄕約>이 있었다. 이 두 개의 향약과 동약은 다른 지방의 그것과 비교하여 큰 차별성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태인지방의 <고현동약>은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서 1475년 불우헌 정극인(丁克仁)에 의하여 만들어진 다음 지금까지 약 520여 년간 시행되어 온 동계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일찍 시행되었던 동약이다.
정극인이 작성한 <동약규례 洞約規例>는 존재하지 않으나 광해군시대의 <동약규례>와 1644년(인조 22)의 <증보규례 增補規例>가 현존한다. 이 규례 31조를 통하여 조직, 운영, 상벌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증보규례>에는 상호부조의 규정이 추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광주지역에는 1451년에 만들어진 <광주향약 光州鄕約>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이루어진 <양고동 동계 良苽洞 洞契>가 있다. <광주향약>은 문헌상 세종 연간에 김문발(金文發)에 의해 실시되었으나 현재 그 실체는 알 수 없고, 이선제(李先齊, 1399∼1484)가 만든 향약이 전해지고 있다.
이 향약의 내용은 퇴계 이황의 <예안향립약조>와 거의 흡사하여 15∼16세기 조선 향약의 일반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양고동 동계>는 그 약문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주자증손여씨향약문>과 <예안향립약조>를 전제한 ‘약조(約條)’ 및 순수한 양고동의 것인 입약범례(立約凡例)로 되어 있다. 입약범례는 25개조로 혼상부조(婚喪扶助)에 관한 내용이 9개조, 강신계회 9개조, 동답(洞沓) 3조, 임원 4조로 혼상과 상장(喪葬)에 무게를 두고 있다.
영암지역에는 1565년(명종 20) 군서면 구림리에서 임호(林浩)와 박규정(朴奎精)에 의해 만들어진 <구림동계 鳩林洞契>, 15세기 덕진면 영보리에서 낭주 최씨(郎州崔氏), 거창 신씨(居昌愼氏),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족적 결합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보동계 永保洞契>, 1667년 남평 문씨(南平文氏)들이 영보리에서 장암동으로 이주하여 만든 <장암동계 場巖洞契>가 있다.
<구림동계>는 본래 임진왜란 전에 만들어졌지만 이 난으로 동계와 관련된 기록이 소실되자 광해군 원년에 완의(完議)를 만들면서 복구한 1646년의 <중수계안 重修契案>이 조선시대 말까지 존속되었다.
이 계는 사족 중심의 향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상하 합계로 만들어졌으며, 그 주된 내용은 혼상부조로 특히 상사(喪事)의 부조가 중심이었다. 동계원은 70명으로 한정하여 그 전통은 현재도 지켜지고 있으며, 계의 운영은 보미(補米)를 수합하여 필요한 경비에 사용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보미의 수합이 순조로워 이를 재원으로 전답을 구입, 의장(義庄)을 마련하였으며, 계답은 하인에게 병작(竝作)시키고 수조(收租)는 전적으로 유사가 책임졌다.
<영보동계>는 기본 조목으로 부상(賻喪), 입약(立約), 곡물취리(穀物取利), 정풍속조(正風俗條)의 4가지를 두고 있었다. 즉, 부상에서는 4상부조(四喪賻助)가 주목적이었고, 곡물취리는 동계 운영에 따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고, 입약과 정풍속조는 낭주 최씨, 거창 신씨의 사족 기반을 다지는 족적 결합의 기초 조약이었다.
이 동계도 <구림동계>와 별 차이가 없으나 계원의 입계(入契) 절차가 까다로웠고, 강신회의 횟수가 4회(2·3·9·10월)로 일반적인 춘추 2회(3·10월)보다 2배나 되었다.
이 계는 18세기 중엽부터 상하 합계로 발전하였으니, 그것은 동계를 동약으로 바꾼 데서 알 수 있다. 이후 <영보동계>는 동계와 동약으로 2분된 형태의 조직을 갖게 되었는데, 전자는 1772년의 <부상계헌 賻喪契憲>이며, 후자는 1778년의 <영보동헌 永保洞憲>이다.
<장암동계>도 남평 문씨라는 씨족을 기반으로 성립한 동계였으며, 이후 점차 향촌 통제적인 규약을 첨가하면서 동족적인 사족계(士族契)보다는 상하 합계의 형태로 발전하여 촌락공동체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해남지역에서는 마산면 산막리에서 30여 년 전까지 원주 이씨(原州李氏)의 동족 가문을 중심으로 실시했던 동계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바, 현재 1720년의 <계안>에서 1915년의 <동상안중수 東床案重修>에 이르기까지 12종류의 동계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하여 <산막동계>의 구성, 조직, 기능, 운영 등을 알 수 있는바, 대체로 호남지역에서 실시되던 동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의 금안동(金安洞)에서 실시되었던 <금안동동계 金安洞洞契>는 ‘동계안(洞契案)’을 비롯한 40여 종의 고문서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동민들의 진술을 통하여 그 성립과정과 조직구조 및 운용을 밝혀 볼 수 있다.
금안동은 영암의 구림마을, 정읍의 태인과 함께 호남의 명촌(名村)으로 각기 12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세 마을이 동계를 가지고 있었다. 즉, 금안동의 <금안동계>, 태인의 <고현동약>, 구림마을의 <구림대동계>가 그것이었다.
<금안동계>는 1601년(선조 34) 임진왜란 직후 금안동의 사족인 나주 정씨(羅州鄭氏), 하동 정씨(河東鄭氏), 풍산 홍씨(豊山洪氏), 서흥 김씨(瑞興金氏) 등 4성씨가 주축이 되어 <구동중좌목 舊洞中座目>을 만들면서부터 생겨났다. 현재도 금안동에는 이들의 후손에 의하여 ‘4성계(四姓契)’와 ‘대동계(大同契)’가 마을의 중요한 일을 주관하고 있다.
금안동의 입향조는 여말선초 나주 정씨의 정가신(鄭可臣)으로, 이후 임진왜란 전까지 새로운 성씨가 입향하게 된 동기는 당시 혼속(婚俗)인 서류부가(壻留婦家) 때문이다.
나주 정씨와 사돈관계에 있었던 성씨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여산 송씨(礪山宋氏), 서산 김씨(瑞山金氏), 하동 정씨(河東鄭氏), 풍산 홍씨(豊山洪氏), 완산 최씨(完山崔氏) 등으로, 이들이 동계에 참여하고 그 중에서 나주 정씨, 풍산 홍씨, 하동 정씨, 서흥 김씨의 4성이 동계의 약내(約內)로서 마을을 주도하였다.
<금안동계>의 조직은 상계원(洞員, 約內, 上契)과 하계원(田民, 下契)으로 구성되어 상하 합계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운영기구로는 동임(洞任)과 약임(約任)이 구분되지 않고 교화와 정사를 아울러 맡아 보았으며, 1702년(숙종 28) <동중완의 洞中完議>를 통하여 3동수(三洞首) 7집강(七執綱)으로, 다시 1739년(영조 15)부터 3동수 4집강으로 고정화되었다.
이러한 <금안동계>는 동중의 춘추강신(春秋講信)과 공회(公會, 洞會), 그리고 촌회(村會)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운영되었으니, 춘추강신은 기강을 바르게 하고 동임을 분정하여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다. 그러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도 겸하여 유희적 친목기능도 있었다.
동회는 상하가 모두 모여 태권(怠倦)을 경계하는 데 목적을 두어 선악적(善惡籍)을 통하여 상선벌악을 강조, 사족들의 향촌 지배방식인 신분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촌회는 전민(상민)들만의 모임으로 생활방식과 노동방법을 의논하고 상부상조하는 자리였다.
이처럼 동계는 동회와 촌회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국가 수취체제에 대응하고 마을 공동 재산의 유지, 관리 및 노약자에 대한 경제적 배려, 구황식물의 구비 등 마을 전체의 일을 운영해 나간 공동체였다.
- 연구 성과와 의의 -
향약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연구는 의외로 부진하여 1938년 ≪진단학보≫ 9에 발표된 유홍렬(柳洪烈)의 <조선에 있어서의 향약의 성립>이라는 논문이 아직도 통용되는 듯하다. 그리고 1974년에 개판된 이홍직(李弘稙) 편(編) ≪국사대사전≫의 향약 항목에 대한 참고문헌으로도 유홍렬의 논문을 들고 있을 뿐이다.
광복 후에는 1969년에 간행된 ≪이홍직박사회갑기념한국사학논총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에 수록된 정형우(鄭亨愚)의 <조선향약의 구성과 그 조직>이 주요한 업적일 뿐 향약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부진하고, 그 업적도 엉성한 편이다.
최근의 연구 성과로는 1981년 ≪한국문화≫ 2에 실린 김인걸(金仁杰)의 <조선 후기 鄕權의 推移와 지배층 동향>이 <목천동약 木川洞約>을 여러모로 분석한 장편의 노작(勞作)으로 고문서·읍지·문집 등을 이용한 심층적인 연구이다. 1983년에는 김무진(金武鎭)이 ≪학림 學林≫ 5에 실은 <栗谷鄕約의 사회적 성격>이 있는데, 향약조문(鄕約條文)의 해석 비교와 그때의 사회 형편을 살핀 것이다.
향약은 우리 사회에 유교적 예속(禮俗) 내지는 미풍양속을 보급·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은 중국 ≪여씨향약≫의 4대 강령(四大綱領)인 덕업상권·과실상규·예속상교·환난상휼의 취지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첨삭하여 조선적 향약을 마련한 이황·이이 등의 노력으로 우리 사회에 순조롭게 수용된 뒤 널리 보급되어, 이른바 지방자치를 실현함으로써 사회 안정에 이바지한 전통적인 향촌의 자치규약이다.
기성 향약에 관한 상식이 이 정도인데, 향약 연구사상 획기적인 다가와(田川孝三)의 향규에 관한 연구가 1975∼1976년에 발표되었다. 그가 발표한 <李朝의 향규에 대하여>는 대표적인 향약으로 알려진 이황의 <예안향약 禮安鄕約>이나 이이의 <해주일향약속 海州一鄕約束>이 실은 향약, 즉 지역사회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것과는 다른 향규라는 것이다.
지역마다 향안(鄕案)이라는 것이 있어 이 안(案)에 오른 자, 즉 향원만이 좌수(座首)·풍헌(風憲) 등 향임(鄕任)에 임명될 수 있다는 것이 향규로 볼 수 있는 첫째 이유이고, 기타 좌수의 선출 절차·향원이 될 수 있는 자격 규정, 향안입록 절차, 향원간의 규약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지역마다 유력한 양반으로 조직된 향안조직이 있었다고 한다.
이 향안조직은 지역 유력자들의 모임으로 이 조직의 구성원만이 향안에 등록되고 등록된 자들만이 관권(官權)에 대하여 일정한 독립성을 갖는 향임에 임명되어 현(縣) 이하의 면(面)·이(里)를 자치적으로 운영했다는 것이다.
다가와는 자신의 논문에서 태조헌목(太祖憲目)·남원부약속조목(南原府約束條目) 등 15개의 향규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도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광복 전부터 향약을 연구하여 1972년 ≪조선향약 敎化史 연구≫라는 규모가 크고 방대한 저서를 낸 다바나(田花爲雄)는 이황의 <예안향약>, 정확하게는 예안향립약조(禮安鄕立約條)를 연구하였다.
그는 이황의 <예안향립약조>를 ≪여씨향약≫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과거의 견해에 대하여 분명한 이의를 제기, 향규 발굴의 길잡이가 되었다. 따라서 향약 연구는 다바나와 다가와의 연구로 큰 진전을 보았는데, 국내에서의 반응은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한 듯하다.
1978년에 김용덕(金龍德)이 ≪한국사상≫ 16에 발표한 <향약과 향규>는 단편이지만, 향규에 대해서 논급하면서 이 둘의 차이점을 처음으로 비교하였다. 그 뒤 1984년 ≪진단학보≫ 58에 한상권(韓相權)의 <16, 17세기 향약의 기구와 성격>이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2세기 동안에 기능한 향약의 여러 측면을 거의 모두 고찰한 논문으로, 여기서 그가 주장한 논지가 모두 타당하다든가 연구가 철저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대한 찬부를 떠나 누구나 많은 시사를 받게 되리라고 여겨진다. 더욱이, 관련 기초 사료는 거의 다 검토되고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또, ≪진단학보≫ 같은 호에 실린 김준형(金俊亨)의 <18세기 里定法의 전개>라는 논문은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문제와 이정법의 제기, 이정법 시행의 촌락사회적 배경, 이정법 시행과 그 이후의 추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연구는 향약 시행의 기반이 되는 면리제(面里制)나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대한 개척적이고 선구적인 고찰로 주목된다.
또한, ≪진단학보≫ 같은 호에는 동계의 성격 변화를 중심으로 고찰한 김인걸(金仁杰)의 <조선 후기 향촌사회통제책의 위기>라는 논문도 실려 있다. 사족을 중심으로 한 동계의 성격 변화를 <고현동약지 古縣洞約誌>·<서호동헌 西湖洞憲> 등 구체적인 사료를 분석하여 향촌사회의 추이를 연구한 것이다.
사료별로 변화의 양상이나 위기를 논하기보다도 위기의 양상에 따라 유형별로 사료를 정리, 검토하면 논지가 더욱 간명해지지 않았을까 한다.
김인걸은 그 전년인 1983년에도 ≪김철준박사화갑기념사학논총 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에 <조선후기 향안의 성격변화와 在地士族>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17세기 향안의 기능과 17, 18세기 향안 작성의 동향 등을 재지사족(지방 향리의 유지)의 향권의 변동이라는 시각에서 실증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 밖에도 주목할 만한 향약관계 연구 업적으로는 1973년에 ≪전남대논문집≫ 19에 실린 최재율(崔在律)의 <한국농촌의 향약계에 관한 연구>로, 이는 구림대동계(鳩林大同契)를 처음으로 연구, 소개한 것이다.
또한, 1986년 ≪한국사연구≫ 55에 발표된 김무진(金武鎭)의 <조선 중기 사족층의 동향과 향약의 성격>이 있고, 연구 시각의 참신함과 사료의 치밀한 검토로 주목되는 1983년 ≪한국문화≫ 4에 실린 이태진(李泰鎭)의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 1989년 ≪진단학보≫ 68에 실린 <17, 18세기 香徒組織의 分化와 두레발생>이 있다.
한편, 향약과 표리관계에 있는 계(契)에 대한 많은 연구를 쌓아온 김필동(金弼東)은 1989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 계의 구조적 특성과 그 변동에 관한 연구≫에서 자신의 연구를 집대성했는데, 자료면에서나 방법론에서 향약 연구 전반에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향약 연구를 보다 심층적으로 탐구해 나가기 위하여 1983년 김용덕을 중심으로 ‘향약연구회(鄕約硏究會)’라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 모임은 처음에는 다만 향약을 심층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결성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마을의 공동 경작놀이·마을굿 등 생활사적인 면으로 관심을 확대하여 이름도 ‘향촌사회사연구회’로 바꾸고 1991년 2월까지 47회의 연구발표회를 거듭했으며, 1990년 5월에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조선 후기 향약연구≫라는 제목으로 민음사(民音社)에서 출간하였다.
이 책은 총서(總序)에서 연구회의 취지, 연구 경위와 중간 성과 등을 밝혔거니와, 김용덕은 1986년 ≪한국사연구≫ 54에 <향규연구>와 1988년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 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에 실은 <동계고 洞契考> 및 1990년 ≪조선 후기 향약연구≫에 수록된 <김기향약연구 金圻鄕約硏究> 등에 기초하여 결론 부분에 몇 가지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였다.
또 앞에서 언급한 1983년 ≪김철준박사회갑기념사학논총≫에 <埋香信仰과 그 수도집단의 성격>등을 발표한 바 있는 이해준(李海濬)은 <조선 후기 동계·동약과 촌락공동체조직의 성격>이라는 문제작을 발표하였다.
<부인동동약 夫仁洞洞約>을 중심으로 1982년 ≪민족문화논총≫ 2·3합집에 <조선 후기 향약의 일고찰>과 1985년 ≪교남사학 嶠南史學≫ 1에 <16세기 안동지방의 동계>를 발표한 바 있는 정진영(鄭震英)은 ≪조선 후기 향약연구≫에 실은 <18, 19세기 사족의 촌락지배와 그 해체과정>에서 역시 부인동의 경우를 사례로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규대(李揆大)의 <19세기의 동계와 洞役>, 보은의 향약 조목을 검토한 박경하(朴京夏)의 <18세기 州縣鄕約의 성격>, 최호(崔虎)의 <조선후기 밀양의 사족과 향약> 등이 수록되고 있어서 조선 후기 향약의 제 측면은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한결 밝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제 겨우 궤도에 오른 상태이고 앞으로의 진전 여부는 모두의 과제이다.
자료면에서도 향약 내지 향촌사회사 연구는 이제 겨우 새로운 자료가 속속 발굴되고, 간행되는 작업도 비교적 활발한 첨단 분야이다. 수백 년에 걸치는 동계의 변천을 상세하게 알려 주는 <부전동동계 浮田洞洞契>의 문서가 영인되어 소개된 것은 1989년 1월의 일이었다(熊津文化 1, 公州鄕土文化硏究會).
이보다 앞서 1986년 10월에는 김인걸·한상권 편의 3권으로 된 ≪조선시대 사회사연구사료총서≫가 간행되었다. 1권은 향약, 2권은 향안·동계, 3권은 족계(族契)·상계(喪契)·갑계(甲契) 등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1987년에는 정진영 등이 편찬한 ≪영남향약자료집성≫이 영남대학교에서 출판되었으며, 1989년 7월에는 이규대 등이 편집한 ≪영동지방향토사연구자료총서≫로 향약·계편이 관동대학교에서 간행되었는데, 다른 자료 간행도 여러 곳에서 준비중에 있다.
한편, 향약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1983년 12월 김용덕을 중심으로 향약연구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 뒤 7년여 동안의 중간 성과는 1990년 5월 ≪조선 후기 향약연구≫라는 공저로 출간되었다. 앞서 1983년 1월 이후 진행된 연구 성과를 보태어 요점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아 있는 향약자료에서 이름은 같은 향약이지만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것은 성격이 크게 다른 향규·동약·주현향약, 그리고 촌계(村契)의 넷으로 구분된다.
향규란 지역사회의 주민 가운데 양반, 그것도 현족(縣族)만을 대상으로 하며, 유향소의 운용 규정·향안 등록절차 등을 정한 향중지규(鄕中之規)란 뜻이니 이이의 <해주일향약속>, 이황의 <향립약조> 등이 여기에 속한다.
동약이란 동계와 같은 뜻으로 임진왜란 후 복구를 위하여 지역 전체 주민이 협력해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에서 상하 합계가 요망되었고, 상하를 망라한 만큼 수효가 방대하여 군현 단위로는 조직이 어려웠기 때문에 몇 개의 마을을 합친 지역촌, 즉 동 단위로 동계가 출현하였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유지의 선도로 시행되었으며, <목천동약>·<부인동동약>이 유명하다.
18세기에 들면서 광범한 사회경제적 변동, 유향(儒鄕)의 분기(奮起), 면리제(面里制)의 발달 등을 조건으로 유지의 수령이 선도하는 주현향약이 나타나는데, 우리가 흔히 향약이라고 하면 주현향약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유향의 분기가 진행됨에 따라 향청은 대개 향족이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들에게 교화를 위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동요하는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도 명분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어 지역사회의 전체 주민을 의무적으로 참여시켜 수분(守分:분수와 본분을 지키는 것) 강조하고 상벌을 행하는 주현향약이 출현한다. 주현향약의 실시는 관권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마을의 촌계를 말단 하부구조로 포섭한다.
계는 약(約)과 같은 뜻이니 향약의 행사를 계사(契事), 향약의 면(面) 책임자를 계장이라고 하며, 동계를 동약이라고도 부른다. 동시에 계에는 회(會), 즉 모인다는 뜻이 있으니 촌계는 자연촌의 모든 공사(公事)를 의미한다.
이러한 촌계는 아마 마을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가 있는 곳 거기에 상부상규하는 질서가 따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촌계에 관한 자료는 작지만, 촌계는 거의 모든 마을에 있었던 아주 보편적인 사실이었다. 촌계에서 서낭제 등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제사를 주관했고, 두레 등 공동노동을 조직하여 운영했으며, 두레놀이며 마을굿 등 유흥과 공동오락을 즐겼으니, 이러한 공동체적 생활을 통하여 마을은 한 가족과도 같았다.
제언(堤堰:댐)·도로·교량·동사(洞舍)의 수리, 도정(淘井:샘을 치는 일)하고 병약자를 돌보며, 혼인과 초상에 관한 일을 서로 돕고, 마을 전체를 흐뭇한 인정으로 묶어 주는 전통적인 관습에 어긋나는 자는 벌을 주는 등 동리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상벌에도 치중하여 마을은 한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었다.
촌회에서의 상벌은 ≪주씨증손여씨향약≫이 우리 사회에 전래된 뒤 그 영향을 받아 향약적인 외모를 띠어, 자생적이고 전통적인 촌회의 모임은 향약강신회(鄕約講信會)라는 이름으로 불린 모양이다.
즉, 향약은 중국에서 전래되고 수용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이며 전통적인 우리 촌회에 입힌 의상(衣裳)에 불과한 것이므로, 우리는 분명하게 주객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이전의 정설과 정반대되는 향약에 대한 새로운 심층적 인식은 한국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의 진전인 동시에, 촌계에서의 상부상규하는 자치와 협동의 전통이야말로 가난과 전쟁으로 얼룩진 고난을 이겨낸 우리 민족사의 비밀의 열쇠라고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옛 촌계에 담긴 인정과 의리 및 협동정신은 계승해야 할 귀중한 전통이며, 촌회에서의 자치는 오늘날의 지방자치에도 보배로운 모범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