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cafe.daum.net/soongsari/8ydw/4658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본문: 딤후 3:4-5
요절: 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말세에 있을 사회적 현상을 다룹니다. 그때에는 사회의 악덕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와서 교회가 거의 파괴될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면 갈수록 개인 경건이 중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 교회가 아무리 타락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나쁘고 고통스러운 시대에도 여러분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며 애써 주님의 몸 된 거룩한 교회를 이루어나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15. “배신하며”
배신이란 자기들 사이에서만 알고 있어야 할 비밀을 고의로 타인에게 누설하여 동료를 어렵게 하거나 죽음에 내어주는 것으로서 매우 비열한 행위입니다. 특히 핍박 시에 자기가 득을 보려고 다른 형제를 밀고하는 행위인데, 한국에서 신사참배 시에 이러한 현상이 자주 있었다고 합니다. 즉, 한 신자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은 다른 신자를 밀고한 것입니다. 혹은 평소에 감정이 있는 사람을 곤란에 빠트리고자, 몇 사람만 알고 있는 그의 비밀을 적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이러한 일이 교회에도 빈번해집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 24:9-10).
또는 사랑과 신뢰를 악으로 갚는 것도 배신입니다. 그러므로 교인은 자기가 형제에게 배신당했다고 해서 크게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세가 가까웠으므로 이러한 일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한 자는 실망에 빠지지 말고, 곧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잘하면 됩니다.
16. “조급하며”
이것은 성격이 급해서 심사숙고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며, 흥분한 가운데 결정을 내리며, 분노 가운데 엄한 조치를 하며, 화가 나서 험한 말을 내뱉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이 자기를 온전히 지배하기까지 묵상해서 조급한 마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들은 문제에 임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충고도 잘 듣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에 대해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자기 주님과 대화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17. “자만하며”
문자적 의미는 “연기로 가득한”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대단한 인물로 착각하여 다른 사람 앞에서 그렇게 처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연기만 가득합니다. 그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사람이므로, 너무 자기를 드러내어 상대하기에 부담스럽습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형제간의 교제가 불편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므로 꾸짖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람은 항상 낮은 자리에 앉고, 단지 주님만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 받으시도록,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자로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이렇게 해서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도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빌 2:5-11).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쾌락을 사랑한다는 말은 philedonos로서, philos(사랑하는)와 hedone(쾌락)의 합성어입니다. 쾌락은 인간 내부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유혹입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명예욕과 함께 쾌락의 욕구는 아무리 억제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신을 잘 섬기고자 쾌락을 절제하는 종교도 있고, 예배와 쾌락을 적당히 섞는 종교도 있는데, 불교는 전자이고, 가나안 종교는 후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우상과 함께 쾌락을 즐기는 가나안 종교로부터 끊임없이 유혹을 받았습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남미와 독일에서 극성한 카니발도 원래는 종교적 행사였습니다. 이들은 이 행사를 통해 그들의 쾌락을 즐기고자 하는 마음을 마음껏 드러냅니다. 그런데 말세에는 이러한 것들이 교회에 그대로 들어와 교인이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성적인 죄를 더이상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교회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서 교제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쾌락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입니다. 우리가 쾌락이라는 우상에 주의하지 않으면 쉽게 이 우상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즐기자는 생각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거룩하고 정숙한 마음을 앞지르게 되면 심각하게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늘 절제하는 삶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말씀은 우리가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경건의 의미는 매우 간단합니다. 이것은 계명을 실제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자가 실제적인 적용을 애써서 피하므로, 경건이라는 말이 오해되고, 심지어는 조롱당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능력이 있는 신자는 매우 드뭅니다. 말세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집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미 종교지도자들을 두고 하신 비판을 사도가 이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메시아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을 때에는 이들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단한 경건의 모양을 갖추었는데, 경건의 능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들의 거짓 경건을 날카롭게 들추면서 비판하셨습니다. 이들의 삼대 경건은 연보(십일조, 각종 헌금, 자선 등), 기도, 금식인데, 이것이 모두 위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며, 한국 신자의 경건(연보, 기도, 주일 성수, 금식, 전도, 선교)의 실행도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과 우리는 경건생활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받으시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십니다. 이 분노는 마 23:13 이하에 잘 표현되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이 가르침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저가 반복해서 설명하면, 경건이란 계명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참된 경건의 삶을 사는데 실패하는 주 요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경건을 실천하는 위선입니다. 당시 유대인이 길거리에서 기도하는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으며, 누구든지 겉으로 보면 경건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지금도 경건한 유대인은 머리 뒤편에 둥그런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킵니다. 이러한 것이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경건의 모양은 결코 비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면도 있습니다. 단지 경건의 내용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유대인의 이러한 모습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 6:1). 그리고 수난 바로 전에 지도자들의 위선을 매우 강력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이들 내면에는 탐욕과 더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가장 타락한 교회들까지도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하며, 큰 소리로 “주여, 주여”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것을 본 서양 교인은 기절할 정도로 놀라서 한국인의 경건을 매우 높이 살 것입니다. 기도원에는 사람이 들끓고, 많은 사람이 금식 기도를 합니다. 헌금도 대단히 많이 해서, 큰 교회에는 돈이 남아돌아 가서 이것이 가난한 자에게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범죄에 사용됩니다. 선교사도 대단히 많이 파송합니다. 이 모든 것에 분노하며 구역질을 내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로부터 경건의 능력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세에도 모든 종교가, 특히 교회에서도 이러한 외적 경건을 그대로 갖추고 있을 것입니다. 유럽 국가교회에서도 예배는 계속될 것이고, 한국 교회에서도 경건하게 보이는 예배는 계속될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국가적 행사는 교회에서 많이 합니다. 여기에는 물론 타종교인도 참석합니다. 이것은 마치 거룩한 곳에 개들이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교황은 선풍을 일으키며 세계를 누비고 다닐 것이며, “Urbi et orbi”(일반사면)를 남발할 것입니다. 어쨌든 말세에도 기독교는 겉으로 보면 경건해서 사람은 계속 교회로 들어오고 선교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참된 신자는 교회의 이러한 위선적인 경건 때문에 괴로워할 것입니다.
이러한 활발한 종교적 활동에도 예수님은 대단히 분노하십니다. 이들의 문제는 단순한 무지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알고서도 속인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옥한음 목사의 고백에서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저는, 비슷한 반응을 가끔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청중의 반응에 예민해지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을 일부러 골라서 설교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대신 죄라든지, 회개라든지, 순종이라든지, 거룩이라든지 하는 듣기 피곤한 말씀은 할 수 있으면 피하거나 꼭 말을 해야 할 때에는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예수님이 절대로 바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절대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일이 강단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그 결과 저도 모르게 복음을 조금씩 조금씩 변질시키는 설교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신도를 속인다는 것을 알고서도 계속 그런 일을 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을 하고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신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이미 수만 명, 수백만 명을 미혹한 사람이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이미 아주 굳어졌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그를 추종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된 큰 원인 중의 하나는 거짓 목사, 거짓 교사의 책임이 매우 큽니다. 이들은 바리새인이 한 것과 비슷하게, 하나님 계명을 잘못 해석하거나 의도적으로 거짓으로 해석하여 거짓 경건의 목록을 만들어 성도에게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헌금생활과 주일 성수를 잘하고, 기도하고 각종 모임에 참석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가끔 금식하며, 주의 종에게 순종을 잘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즉, 목사가 결정한 경건 생활만 잘 하면 천국 가는 데에 지장이 없다고 속인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복음주의 모습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한국의 타락한 개혁주의는, 개혁주의 교리를 잘 이해하고 이것을 진리로 알고 수호하며, 소정의 규정을 잘 지키면, 자기가 선택받은 자라고 착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거짓 경건의 한 유형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자기가 선민이라고 착각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말씀과 경건에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말씀 자체와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세우기 위해 말씀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말씀은 두려움과 감사함으로 영접하고 실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실천, 즉 실제적인 경건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이들이 진정한 경건을 모르는 이유는,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중생은 이들이 말하는 중생과 의미가 상당히 다릅니다. 이들은 비췸, 각성, 통(通), 깨달음(영지), 득도, 생각이나 심경의 변화 등을 거듭남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중생이란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입니다. 성령님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삶과 생각은 이전과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회복되어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되고, 진리와 거룩한 것을 갈망하게 됩니다. 옥한음 목사와 같이 거짓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불법(anomia)이 편만합니다. 교회도 이에 편승하여 “진정한 복음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행하면서도 양심에 걸림이 없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계명을 정의하여 자기가 법을 만드는 율법 제정자, 즉 하나님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당연히 거짓 경건도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안내서인 계명을 저촉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치워버리는 사람과 관계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는 교인은 악에 무뎌져서 자기도 악행을 하고 남의 악행도 잘 이해합니다. 이것은 이들이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에게는 더욱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께 헌신하고,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