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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두 개
La théorie de l'écoute du vivant chez Henri Bergson
Mes chers concitoyens !
서론
귀는 두 개이다. 하지만 두 개의 귀는 하나의 소리를 듣는다. 달리 말해 하나의 소리는 두 개의 귀로 각각 이중분절(doubler)된다. 이렇게 귀가 두 개인 것은 인간만은 특징은 아니다. 거의 모든 생명체에게 듣기는 본원적으로 이중분절된다. 대부분의 생명체들의 귀가 그렇게 진화되었다. 그렇지만 소리 자체가 이중화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는 존재 바깥에서도, 존재 안에서도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귀는 하나의 소리에 상응한다. 이러한 이중분절은 철학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런 형상적 특질들에 도취되어서는 안된다. 중요한 것은 귀가 두 개인 것이 아니라, 존재가 하나의 소리에 대한 듣기를 이중분절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방향(sens)과 층위(strate)의 이중분절(doublement)을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존재론적 의의가 있겠다.
정신적 귀와 신체적 귀 ; 언어
정신적 귀는 불가사의하다. 2024년 12월 3일 한국에서 대통령은 친위 쿠테타를 일으켰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les hommes révoltés, 까뮈)은 한국 국회의사당 앞에서 함성을 질렀다. 이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 끊임없는 함성들 안에서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저항에 대한 잘 정리된 해설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 하나하나를 듣는 것에 크게 집착하지 않으므로, 심지어 그가 듣고 있는 것은 구호들조차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는 간간이 그 저항하는 말들(les mots révoltés) 그 자체를 따라 외치고 다른 저항하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흔들리기도 한다. 즉, 그는 저항하는 생명체의 소리(les vivants révoltés)를 물리적 귀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귀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자, 지금 여기서 우리가 듣고 있는 언어의 사태가 이렇다. 번역하기 전에 존재하는 언어, 이해 이전에 들리는 언어가 지금 이 거리의 바닥에 퍼져있다. 야수가 인간을 향해 덤벼들 때에 Homo loquens는 외쳐서 자신의 방향과 현전을 알렸다. 그러한 차라리 비명에 가까운, 그러나 원초적 의미를 간직한 언어가 이와 같았다. 여기에는 단순한 만큼 강령한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있다.
언어가 여기서 시작한다. 그래서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경험은 언어의 바닥에 서 있는 경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건대, 이는 귀가 듣고 정신이 받아들인 언어가 아니다. 이는 육체적 귀와 동시에 정신적 귀가 듣는 언어이다. 정신적 귀와 육체적 귀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동관계이다. 그는 육체가 정신과 반응하기까지의 이러저러한 과정에 대한 규명은 지금 이자리에서는 합당하게 미룰 수 있다. 반응으로서의 언어는 이렇게 언어와 밖을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사유한다. 그만큼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언어가 세계를 분획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순한 언어 상태가 있는데, 특히 이러한 언어의 안은 관념의 연쇄 혹은 연합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성이 그 고리들을 분석할 여지가 없다. 단순한 말들은 이렇게 발화되고 청취되지 않는다.
표층의 언어와는 달리 이 저층의 언어(ce langage sous-jacent) 내부에는 층위들(la stratification)이 있다. 언어의 외부에도 여러 층위의 분류학이 있을 것인데, 이 지면에서는 다루지 말자. 여기서는 그는 인과의 고리들이 아니라, 마땅히 이 위상학적인 층위들(les strats topologiques)을 사유해야 할 것이다. 이 언어의 저층에서의 복합성은 단순성과 반대말이 아니다. 마치 지층저럼, 여러 층들이 일반적으로는 평행하는 층위들을 형성하지만, 화행론적으로 층들은 뒤얽혀 있다. 그는 언어학적 관점들을 연구하면서(la phonétique, la phonologie, la morhologie, la lexicologie, la syntaxe, la sémentique) 일반적으로 대열을 이루어 생성하는 언어와 화행론적으로 진화하는 언어를 모두 볼 수 있다. 옐름슬레우는 말한다 : “말은 스트라타의 만남과 교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다. 언어는 사실 궁극적으로 언어의 임의적인 모든 것이다. 말은 실제로 진행되는 모든 전략적 상호 관계의 집합으로 정의된다.On peut définir la parole par la rencontre même et l’entrecroisement des strata. La parole en effet est, en dernière analyse, tout ce qui est arbitraire dans le langage. La parole se définit comme l’ensemble des relations interstratiques effectivement exécutées ”[옐름슬레우, la stratification de langue, (67) “또한 전체에 대한 완전하고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즉각적인 수준과 관련된 다른 수준에 대한 설명으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Il paraît que le niveau qui est en tête de cet ordre hiérarchique est le niveau d’appréciation collective qui, en conséquence de cette circonstance, peut être considéré comme la substance par excellence, la seule substance (dans le sens plus étroit de ce terme) qui du point de vue sémiotique soit immédiatement pertinente. ”(54) “기호학적 기능으로 구성된 상호의존성은 명확하게 통사적인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우리가 말한 것처럼, 연대), 따라서 기학적 관계는 내용의 형태와 표현의 형태에 의해서만 계약되는 정확한 공식으로 대체 될 것입니다.Il paraît certain que l’interdépendance constituée par la fonction sémiotique est d’ordre nettement syntagmatique (donc, comme nous l’avons dit, une solidarité), et que, en conséquence de ce fait, la relation sémiotique doit être considérée comme contractée par la forme du contenu et la forme de l’expression seules.” (46) 그리고 이 내용과 표현이라는 동시적이며 즉각적인 이중분절은 베르그송의 청각이론에서는 육체적 귀와 정신적 귀의 이중분절에 상응한다. 육체적 귀의 이론은 의학에서 다루어야 한다. 베르그송의 주제가 이것은 아니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에서 역설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정신적 귀의 직접적인 자료들(les données immédiates de l'oeille mentale)이다. 이는 그의 첫번째 저작 “의식의 직접적인 소여들에 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의 핵분열(fission)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정신적 귀에 대한 베르그송의 강조를 상기하자. “따라서 유일한 가설만이 그럴 듯한 것으로 남는데, 그 것은 이 영역이 청각 중추 자체와 관련하여 감각 기관에, 즉 여 기서는 귀에 대칭적인 위치를 점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 정신적인 귀oreille mentale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귀는 형이상학적 실체(la substance)이다. 베르그송이 이렇게 청각의 실체가 귀라고 말할 때 뜻하는 것은 두 귀의 상응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귀만이 아니라 정신적 귀도 생명체의 듣기 (l'écoute du vivant)의 필수 기관이다. 이러한 상응에 대한 베르그송의 취향은 그의 철학의 특색이기도 하다: 개념적 실체에서부터 사유하는 논리학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생명체에서부터 공명하기 시작하는 생리학적 형이상학. 상응이라고 내가 말했을지라도, 어찌 보면, 정신적-초월성과 귀-내재성이 함께 묶인 이 말은 (l'alliance de mots)협정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정신적 귀는 더욱이 불가사의하다.
동어반복을 무릅쓰고 말해보자. 정신적 귀는 신체적이지 않고, 달리 말해 신체에 있지 않고, 그래서 이는 정신적인데, 이 정신적 귀가 듣는 것은 플라톤이 사유 그 자체라고 칭했던 자신과의 대화로서 어떠한 정신적인 소리가 아니라, 함성과 소음들이다. 이 소리들을 심지어 뇌, 뇌수질, 신경계, 지각 체계의 어떤 부분을 통해서가 아니라, 형이상학적 실체를 통해서 곧바로 직관한다는 것이다. 기억 국재화 이론(la thérorie de mémoire spatiale)에 언제나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베르그송, 그에게 육체적인 청각의 기관들은 정신적 귀의 “전신 교환국”과 같다. 이 교환국이 번호에 따라 명령을 분배한다. 메카니즘에 따라 행동(action)이 지속한다. 베르그송을 따르면, 이러한 명령의 주체, 청각적 행동의 주체는 정신적 귀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일종의 애매성이 남아있다. 베르그송은 동시에 말하고 있다 : 육체적 귀와 정신적 귀는 대칭이다. 육체적 귀와 정신적 귀는 동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한다; 정신적 귀는 육체적 귀를 주도한다. 정신적 귀는 육체적 귀와 구별될 뿐만이 아니라, 정신적 귀는 정신적 에너지(l'energie spirituelle)의 실체(substance)이다. 이 모호함의 한가운데에는 그의 기억과 지각 구별하기의 난해함이 자리 잡고 있다. 뒤에서 다시 보게 될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는 이중분절을 통한 층위(stratification)로서만 해소되는 난해성이다.
자, 정신적 귀는 기억의 다른 이름으로, 생물학적이며 진화적인 실체로서 인류이 모든 과거를 기억하는 형이상학적 육체이다. 정확히 말해, 신체 없는 기관이다(l'organ sans corps). 하지만 베르그송은 분명히 말하는데, 이 거억이 곧 바로 사물을 지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은 지각을 무개적인 자료(les données immédiates)로 삼지 않는다. 지각은 추억들(les souvenirs)이 아닌 기억(une mémoire)을 이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창조적인 것은 기억이고, 창조적인 진화의 본질은 기억에 보존된다. 사물에 습관적으로 곧바로 작용하는 것은 지각 체계인데, 이는 육체적 귀가 실현하는 작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처음의 불가사의함으로 돌아온다. 정신적 귀는 육체적 귀에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동시적인가? 아니라면, 불가사의한 방식을 통해, 정신적 귀는 육체적 귀를 이끄는가?
방향과 층위 : 청각의 이중분절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듣는가?[Qu’entend-on parmi ces hommes révoltés ?] 내 안의 무엇인가가 이 함성과 함께하도록 나를 이끄는 것인가? 내 안의 어떤 것이 없었다면 애초부터 아무것도 나는 들을 수 없었을까? 그는 이를 조금 더 어렵게 말해볼 수도 있다. 나의 내재성이 민중의 함성을 듣도록 나를 이끌고 있는가? 아니면, 그 함성의 청취 자체가 내 내재성이 외재성과 함께 작동한다는 증거일까? 이 물음은 그 자체로 이중분절하고 그 분절된 것은 다시 이중분절한다. 요컨대 1)-1 내재성이 외재성을 이끄는가? 1)-2 외재성과 내재성은 동행하는가? 2)-1 내재성으로부터 외재성이 나타나는가? 2)-2 내재성과 외재성은 공연하는가? 기실 베르그송의 모호성은 이 두 갈래와 두 갈래의 두 갈래가 모두 함께 공명하면서 발생한다.
―방향의 이중분절
청각은 1)-2 사물이면서 동시에 1)-1 기억이다. 베르그송은 청각의 회로도(schema)에는 앞면과 뒷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청각의 이중분절에 대한 다른 묘사이다.
1)-2 물질로서 : 우선 청각의 중추가 있다. 전면의 감각 기관에서 자료들(les donnés)을 접수하고, 이 자료들은 이 중추를 따라서 지각이라는 반응을 완수한다. 나는 함성을 들었다. 선두의 사람들이 분노를 외치고, 후미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는다. 선두에서부터 소리는 뒤로 퍼져나가는데, 뒤로 갈수록 소리에 소리가 더해져서, 나에게 와서는 마치 거대한 사물처럼 압도적으로 지각된다. 증폭된 사물이라는 것, 주파수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 이 청각적 사물의 주요한 특징이다. 내재성과 외재성은 객관적으로 평행한다.
1)-1 기억으로서 : 또 다른 한편, 역시 청각의 중추가 있다. 청각적 귀의 잠재적 대상은 이 중추로 자료들(les données)을 전송하고 이 중추가 기능하면서 잠재적 대상은 실재적 대상으로 재인식된다(reconnu). 우리는 인민의 적을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에는 우리의 생생한 삶을 억압하는 금수에 대한 관념이 분명하게 있다. 독재는 최악의 적 중 하나이다. 의식은 재인식의 장(champs)이다 : 나는 지상의 생명력 그 자체의 지속을 위하여, 이번 생은 헌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내재성은 외재성을 이끈다.
Pour Heidegger, cette germination de l’extériorité à partir de l’immanence se révèle à travers « l'écouter silencieusement » ( Hören, 청종聽從 ). La poésie est toujours basée sur une certaine humeur fondamentale et émane de cette humeur fondamentale. Par conséquent, comprendre un poème ne consiste pas simplement à comprendre le poème avec votre tête, mais à être captivé par l'ambiance fondamentale qui le domine et à écouter la voix de l'existence émanant du poème. Un bon poème nous entraîne dans une certaine humeur fondamentale. a un pouvoir puissant, et grâce à lui, il permet aux lecteurs de voir le monde et les choses complètement différemment qu'avant. Selon Heidegger, « l'écouter silencieusement » ( Hören ). le son de l'existence signifie être captivé par une certaine humeur fondamentale. Dans la philosophie occidentale traditionnelle, l'existence en tant que réalité ultime est considérée comme une entité distincte des humains, comme l'Idée de Platon. comme Cependant, Heidegger considère l’existence comme un son silencieux qui parle aux humains. L'être parle aux humains et révèle fondamentalement le monde et les choses. Et les humains n’existent en tant que vrais humains qu’en écoutant ces mots d’existence et en les laissant habiter dans leur propre langage
― 층위의 이중분절
청각은 2)-2 기억이면서 동시에 2)-1 추억이다. 베르그송은 청각의 원뿔에는 상부와 하부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청각의 이중분절에 대한 다른 묘사이다.
기억과 추억 그리고 지각은 존재의 심층을 구성하는 수직의 지각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게 기억과 지각은 뒤섞일 수 없다. 누군가 이 정언(affirmation)에 거부감이 든다면, 그가 논리학적 방향으로 잘못 향했기 때문이다 ;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앞서 그 사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성을 지각하는 것은 앞서 그 함성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개념적으로는 완벽하게 옳다. 하지만 생생한 지각은 개념 이전에 현전한다. 이름할 수 없는 지각들은 예를 들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숱하게 많다. 라이프니치는 지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소리가 어떠한 감각의 값을 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아주 가볍게 우리를 스쳐지나가는 인식들을 존재론에 삽입하는 것은 일종의 과장법일 뿐이다. 실체를 다루려면 기억(mémoire)을 사유해야 한다. 따라서 존재와 지각의 관계는 인식론적 관계가 아니다. 그렇지만 사태가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순수 기억은 완전히 독립적인가. 기억(mémoire)은 지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고, 지각은 기억(mémoire)에 어떠한 것도 새로이 삽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원초적으로 아무것도 지각할 수 없었다면 어떤 것도 기억(mémoire) 안에는 없었을 것이다. 기억은 마치 영원처럼, 지각은 마치 몸처럼, 존재를 구성하는데, 이는 서구 철학의 유서 깊은 물음, 영혼과 몸체의 이원론에 대한 물음들과 매우 유사하다. 여기서 이에 답하는 것보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다. 베르그송의 텍스들을 유심히 읽어보면, 그가 기억(mémoire)과 추억(souvenir)을 미묘하게 구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억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는 우리의 전체 과거 자체이다. 그렇지만 기억이 단순히 시간적인 과거의 다른 명칭인 것은 아니다. 이 기억은 우리 뒤에서 가만히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 근거(raison)인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내어미는 동력이다. 권능의 이중분열 le doublement de puissance : 기억은 생물학적 바탕일 뿐만 아니라 생리학적 동력이다. 이 권능은 절대적인 실재(l'Etre)이면서, 유동적인 주체(le sujet)이다.
2)-2 따라서 우선 우리에게 청각은 일종의 기억(mémoire)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들을 수 있다는 잠재성이 청각의 절대 실재로서 있다. 누군가 이 함성을 들었는지, 듣고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청각을 실존하는 것이고, 절대적 실재성으로서 우리가 고려하는 존재의 사실이다. 태어날 때부터 귀머거리라 할지라도 청각 그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은 잠재적이기만 해서, 실재적일 수 있는 기회를 상실했을 뿐이다. 이 절대적 실체로서 청각에 접속하는 이러저러한 노력들이 강구된다. 그러니 청각의 기억은 우리가 청각적인 사물을, 침묵을 포함하여, 생산하게 하는 동력이다. 아마도 가장 정교한 청각적 방법론은 음악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서만 우리는 음악의 실체는 청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1 이어서 우리에게 청각은 한 류의 추억(le souvenir)이다. 개체는 기억(mémoire)을 바탕으로 스스로 자신의 잠재성을 만든다. 만들 수 있는 잠재성이 추억인데, 심지어 이 잠재성을 만드는 과정에서 남는 흔적조차도 추억이다. 이 추억들의 이러저러한 분류학을 위하여 우리는 심리학을 매우 쓸모있게 인용할 수 있겠다 : 트라우마, 자아, 성(sexualité), 등등. 추억은 지각과 숱하게 접촉하면서 결과적으로 기억과 지각을 매개한다. 그리고 사실은 추억이 분석되는 만큼 기억과 지각은 구별된다. 함성들에 대한 추억(souvenir)을 고찰하면할 수록, 우리는 존재의 동력으로서 기억(mémoire)을 구별할 수 있다. 내가 이 함성이 예전의 함성과 인접한 관념이라고 여기는 것은 내가 그것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앞서 말한 논리학적 방향의 사유를 허용한다. 기억과 추억, 추억과 추억, 추억과 지각은 연결conection, 연접conjuction, 이접disjuction 된다. 심지어 이 쌍과 쌍도 이렇게 연결conection, 연접conjuction, 이접disjuction 할 수 있으므로, 이는 우리 추억의 무한한 다양체를 이룬다 : doubler에서 multipler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가. 반대로 왜 돌은 아무것도 노래하지 않는가. 돌은 어떠한 추억도 생산하지 않을 뿐더러, 어떠한 분위기도 지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지구에 대한 기억의 가장 순수한 형식을 재현한다.
2)-2 다시. 그는 존재의 기억 위에 서 있다. 듣는다는 절대 사실 위에 직립해 있다. 이 펼쳐져 있는 사실은 누구도 꺾을 수 없다. 함성들은 이렇게 모두다 동일한 평면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동일한 본능을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분노는 본능이다. 이 기대는 이러한 공감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성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성이 해체하여 시시비비를 가리기 이전에 누구도 구축할 수 없이 이미 있으며 심지어 차차로 커지고 있는 어떠한 절대 평면이 모든 존재의 바닥에 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직관한다. 이 자리 : 언어의 저층이자 존재의 심층. 이 기억은 모두의 것이지만, 누구의 것도 아니다. 모두가 함께 진동할 수 있지만 누구도 분리하여 소유할 수 없다. 이보다 더한 소리의 특성은 없다.
이 기억의 바닥 위에서, 소리의 심층에서 서로는 서로의 추억이다. 나는 그와 소리를 나누어서, 목소리를 발산했다. 우리는 함성의 크기와 함성의 리듬과 함성의 박자와 함성의 멜로디를 지각하고, 이들을 추억으로 삼고, 이러한 소리의 추억들을 따라서 나는 이 소리의 실재에, 다시 말해, 소리의 기억에 다가간다. 이는 경화된 사물의 정체성과는 아예 다르다. 이는 운동의 정체성이다. 파르메니데스는 거부하겠지만, 생성 그자체의 개념화가 있는 것이다.
가청 주파수가 우리 모두를 하나로 꿰어내고 있다.
결론 : 건반 없는 현 혹은 있기임
이제 건반 없는 현을 사유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메타포로 청각을 표현한다. 현과 건반이 그것이다. 여기서 건반은, 그가 밝히고 있듯이, 명백하게 감각기관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이 남는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non-dit가 있다. 바로 이 현과 건반을 건드리는 작동하는 권능(la puissance d'agir)으로서 연주자이다. 베르그송이 악기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메타포들의 악기는 피아노일 것이다. 그렇다면, 건반과 현 외에 non-dit는 피아니스트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송은 현이 진동하면서 감각기관이 건반처럼 작동한다고 말하는데, 이 현이 아무런 출발점 없이 저절로 진동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감각기관은 어떤 주체적 운동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는 말하는 생명체는 아니다.
현들과 함께 피아니스트를 청진해(ausculter) 보자. 피아니스트가 시작한 운동은 현을 따라 해머에 전달되고, 소리를 낼 것이다. 이 현은 아래위로 떨리면서 이중의 층위들을 만들고, 앞뒤로 요동치면서 이중의 방향들을 만든다. 나는 지금 층위와 방향들로 분절하여 말하였으나, 진실은 정확히 함께 작동하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피아니스트의 태어나는 힘이 이 움직임을 통해 소리가 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숨겨진 메타포에서 피아니스트는 사람이 아니라, 태어나는 힘 그 자체이다. 영혼의 음악적 권능이 피아노를 통해 물질적 힘으로 변전한다. 베르그송은 아마도 이 영혼의 권능이 의인법적 사물로 고려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아예 거론하지 않기를 택했을 것이다. 반복되는 이러한 분절들 속에서도 분리되지 않는 층위와 방향, 이것이 베르그송이 말하는 언제나 울릴 준비가 되어있는 잘 조율된 현이다. 현의 철학은 진실로 존재론의 존재론이다. 태어나는 힘은 태어나는 층위들, 태어나는 방향들 요컨대 무한한 양태를 발산하고, 이것은 하나하나가 관념과 관념을 만들고, 일련의 사유로서 존재론을 이룬다. 이 사에 개념들이 흔적으로 일관되게 그리고 그럴듯하게 고정되지만, 사유 그 자체는 존재론적으로 여전히 층위와 방향을 가진 하나의 힘이다. 한 명의 피아니스트가 수천가지의 소리, 그러나 평생 동안 하나의 음색을 만든다. 그렇게 하다하게 많은 존재론들이 태어나지만, 그럼에도 이 존재론들에는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 : 방향과 층위. ◯
베르그송, 영혼론에 대한 수업.
이렇게 제기해 보자. 사람들이 몸체와 영혼의 연관들에 대한 연구에서 잘못된 길을 만드는 동안에, 사람들이 모든 영향들을 느낄 수 없는 정도까지 부인하기에 이르는 동안에, 바로 영향의 관념을 해명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원인성의 수학적 개념활동을 다소 의식적으로 보고해왔다는 것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다. 수학에서, 결론은 원리로부터 온다. 이 원리에 결론이 내포되어 있다. 연역이 원리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연역이 우리 정신에 자연스러운 활동인 것처럼, 우리가 A와 B 두 항의 원인성의 연관을 규명함에 따라서, 우리는 항 A 안에서 점점 더 B가 나오는 원리를 마치 필연적인 결론처럼 보는 것에 기울게 된다. 이로써 이러한 과정은 우리를 우연, 자유를 거부하도록 이끄는데, 우리가 원인성의 개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더 명석하게 함에 따라 그렇다. 그렇지만 이러한 명료는 아마도 임시적인 것일 뿐이다. 이 명료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실재적 인식을 담고 있다. 이것은 가능하다. 이러한 인식이 발전되면서, 이질적인 항들 사이에 있는 파생의 연관을 우리 정신에게 명석하게 드러내는 것 말이다. 이 연관은 원리로부터 결론까지의 수학적 연관과 조금도 닮지 않은 것이다.

첫댓글 나경원은 윤석열의 탄핵 국면에서, 국회의원이 거리의 소리만을 듣고 행동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 전에 이 글을 썼는데, 내가 쓴 이 글과 정확히 반대의 이야기를 해서 놀랐다. 거리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지경의 사람이라면, 함성을 듣고서 움직일 수 없게 된 작자라면 국회의원을 왜 할까?
“거리의 외침에 빠르게 응답하는 것만이 성숙한 민주주의일까. 과연 그 외침이 국민 모두의 생각일까” “형식적 절차의 성숙이 민주주의 성숙일 것이고, 그리하여야 선동 정치를 막아낼 수 있다” “가짜뉴스로 인한 소고기촛불시위를 우리는 똑똑히 기억한다. 이제 탄핵절차도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상에 부합해야 할 것”
흥미있는 글이다.
공부, 학습에서 즐거움(열 悅)을 느끼는 것이 공자의 첫째 즐거움이라 했다.
오관(안이비설신,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합하여 공통감각이라고 부른다.
공통감각의 생성은 신체의 조직화(phusis+logos, physiologie)인데 ‘
조직화에서 발생의 역량이 오관에 있기보다, 스토아의 의미에서 생명(영혼)의 발생에서, 즉 삶에서 먼저이라는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생명체로서 인식에서 조직화(유기체화)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의 조직화(위계화, 지층화)가 다른 양태임도 생각해 보자.
공통감각(sens commun 상식)을 층위로서 양식(bons sens)가 근대를 연다고 한다.
공통감각의 종합이 구성인지, 구축인지, 조성인지에 대한 논의가 있을 것이고, 고대에서 조성이라는 쪽에서는 오감이 연대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현대에서 의식을 다루면서 다섯 감각기관이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 인습? 교육? 세뇌?, 망상(파라노이아)?
다음에 시간을 내어서 젊은이를 위한 글을 한번 써야 할 것 같다.
그리스어 aisthesis의 라틴어 번역어가 sensus인데 여기서 sens이 직접 비롯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그리스어에는 방향의 의미가 없다. 감각의 의미만 있다. 받아들이는바로서 의미라는 어의와 함께. 방향의 의미는 독일어 sinn이 착종된 어의이다. 이 독일어에는 방향의 의미가 있다. 인도유럽어의 재구어로서 sin에서는 충분히 방향 감각의 의미가 함께 유추된다. 그런데 또 영어에서는 감각의 의미만 있다. Cassin Barb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