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 까마귀 (三足烏)를 찾아서 - 누루하치의 묘
전장의 패장은 말이 없는 법이다
죽은 자 역시 말이 없다.
역사는 승리자의 몫이라 했던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진실은 진실이다. 지구는 돌고 해가 동쪽에서 뜨듯이.
중원의 마지막 승리자 청나라 개국황제 누루하치의 묘
나라를 건국한 황제의 능이라지만 그 규모에 놀라웠다.
계단을 세면서 올랐는데 백 일곱이다.
내려올 때 다시 세었더니 백 아홉이다.
다시 세야하는 고민을 지나가던 중국인이 해결해 주었다.
"원 헌드레드 에잇",
누루하치 할아버지는 간도지방 함경도 사람이다.
명나라 목을 조이고 대륙을 통일한 여진의 족장 출신
청(淸)이라 개명하기 전 까지는
금나라 아골타의 후예임을 천명하고 나라이름을 후금이라 정했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인 김 함보의 후손이며(금사본기)
한민족의 이웃이고 부류인 여진족의 족장,
그래서인지 누루하치 살아생전에 한반도 조선과의 충돌은 없었다.
그의 아들 청태종과 조선과의 충돌,
조선조정은 숭명배청(崇明背淸)의 빗나간 외교(사대事大)의 자충수를 두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혹독한 결과를 치러야 했다.
천년 역사의 신라 왕조는 스스로 고려에 항복한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결사반대를 주장한 김씨 성의 통일신라 유민들이 요동반도로 이주
본토박이 여진족에 어울려 권토중래의 터전을 닦는다.
요즈음 우리동네(산촌)에 조선족 동포를 포함해서
필리핀, 베트남 부인(며느리)을 맞이한 집들이 다섯이다.
태어난 아이들의 표정들이 각양각색이다.
그랬다. 천년 전에도 그랬었다.
요동 땅에서 절치부심하는 신라유민과 당시 같은처지 발해유민의 만남
당시 신라유민 사내들은 발해유민의 여인들 부인으로 맞이했다.
천년 전 남남북녀의 만남, 흥미진진한 사연이며 또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
여진의 땅에서 동화된 남북의 한민족인들은 여진의 지배층으로
신분상승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천년역사의 문화적 배경과 한반도 '야(연)금술'에 북방유목민 '기마술'의 궁합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네이션이 아닌가, 생뚱맞은 이야기라고?
대마도와 요동반도, 지금의 비행기로 삼십분
한반도 삼국시대, 그시절에도 배타고 한나절이면 충분한 거리다.
이십 일세기, 한반도 왕년의 수영선수가 부산에서 대마도까지
홀로 헤엄쳐서 열 세시간에 건너간 기록이 증명해주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다, 천년 전 차라리 고향(조국)을 떠나는 뱃길은 하루면 충분했다.
요동에 정착 여진의 지배층이 된 신라 김씨의 후예 중
아골타는 결국 '김씨의 나라, 금나라'를 세우고야 만다.
자칭 금나라의 후예라 천명하고 마지막으로 중원대륙을 통일한 청나라(후금) 누루하치는
만주(여진)족 중에서 지배층으로 군림한 신라의 후손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후손들 손으로 세운 나라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작금의 중국인들 알량한 동북공정의 술책은
한민족의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젓가락도 안대고 거저먹겠다는 것인데 스스로 족쇄를 묶는 자충수일 뿐이다.
송과 명의 역사는 모르겠지만 원나라(칭기스칸)와 금나라(아골타),
청나라(누루하치)의 역사는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진시황이 무덤에서 일어나 또 분서갱유를 저지를 수도 없고 말이다.
한반도의 김 아무개가 귀신도 모르는 술수로 대륙의 땅을 다시 내놓으라며
중국인들(한족)은 송의 시대 땅으로 돌아가고, 황하 이남에서만 살라고 다그치면
윽박지르면 어쩔거란 말인가, 있을 때 잘하란 말이 있다.
현재의 중국 정부는 팔십 년 전 눈보라 치는 산중 일만 키로미터
고난의 빨치산 대장정(大長征)을 기억해 보기 권한다.
신라인의 후예라며 대륙을 호령한 누루하치는
아는지 모르는지 양지바른 만주 봉천(무크덴) 땅 큰집에 비석으로 누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출처: 무위당사람들 글: 간결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