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금성나씨(錦城羅氏)- 原 羅州羅氏(원 나주나씨)
【시조】나총례(羅聰禮)
【인구】40,493명 (2000년 현재)
【주요파】
▲광우공파 ▲송도공파 ▲죽헌공파 ▲청백리공파 ▲동추공파 ▲교위공파 ▲송재공파
▲장사랑파 ▲판결사공파 ▲흥덕공파 ▲계은공파 ▲체암공파 ▲청유공파 ▲덕부공파
▲이호공파 ▲찬영공파
조선 예종(睿宗) 기축년에 눌재문양공(訥齋文梁公)인 양성지선생께서 왕명으로 엮은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과 英祖 경인년에 영의정 金致仁 등에 명하여 홍문관에서 편찬한 문헌비고초에 의하면 [羅氏祝融之後로 本䢵姓이러니 春秋時에 封於羅하야 仍以邑爲氏하다]하였고 [羅州羅氏始祖聰禮 三韓功臣 大匡]이라 밝혀져 있다.
나성(羅姓)은 본시 축융(祝融)의 후예로 광정공(匡正公)이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하게 되었고, 한고조 때 주공(珠公)이 예장땅 봉함을 받고 예장나씨(豫章羅氏)라 하니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일본(一本)이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나지강공(羅至强公)이 동이족으로 동족인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조정 공의의 부당성을 반대하다가 뜻이 막히자 망명길에 올라 바다를 건너 발라현 지금 나주에 도착하였다. 그 후 신라조정에 출사하여 좌승상(左丞相)에 오르고 자손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대대로 살게 되었는데 효공왕 때에 이르러 나주사손의 벼슬을 하고 사관나주(賜貫羅州)하였다.
그러나 소목계통(昭穆係統)을 밝히기 어려워 연대 계승이 소명한 때로부터 위시조(爲始祖) 기일세(起一世)하니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공이시다.
근안컨대 고려사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이니 삼한공신 대광 총례의 십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해동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니 제족중 소위 안정(安定) 군위(軍威) 수성(壽城) 비안(比安)등의 나씨가 개출어나주(皆出於羅州)에서 분관(分貫)하였다.
고려초로부터 대대로 빛나서 칠대광(七大匡) 이상서(二尙書) 사부원군(四府院君)과 육봉군(六封君)을 받은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때 도첨의를 지낸 금성부원군 6세(六世) 국영(國英)은 말년에 정중부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나주)하여 스스로 호장(戶長)이 되셨고, 슬하에 대호군 인겸(仁謙)과 상장군 수겸(守謙) 형제를 두니 대호군계의 9세(九世) 득황(得璜)은 방호사에 이어 형부상서에 오르고 아들 금성군 유(裕)는 황명회원대장군이요. 아들 익희(益禧)는 첨의참리 금성군으로 시호가 양절(良節)인데 충목왕 때 금서 신아동(新芽洞=文平)으로 이거하였고 서해도 안렴사를 지낸 13세 문규(文奎)는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으로 봉강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상장군계의 10세 인송(仁松)은 한림학사로 시호가 문절(文節)이고 충렬왕 때 도첨의를 지낸 순(珣)은 금성부원군이요 고려말 예문관제학을 지낸 불사이군의 수절신 15세 계종(繼從)은 동학사 삼은각에 배향되고 죽헌사를 세워 제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사이군의 유훈을 지켜 영채된 듯 하였으나 성종11년 경자시에 10명이 나주골에서 합격한 경사를 노래한 금성별곡(錦城別曲) 5장 중에 나환흥(羅渙興) 나경원(羅慶源) 형제 무고하고 나진문(羅振文) 나처광(羅處光) 시기가풍(始起家風)하며 나현(羅顯) 나빈(羅贇) 사촌형제 공등연방(共登蓮榜)하니 경기하여(景幾何如)로다 하였다.
이어 중종 때 대과에 세 번 장원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송제공 세찬(世纘)은 을사명현으로 시호가 희민인데 건송제사향(建松齊祠享)하고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만들어 매 해전에서 공훈을 세운 체암공 대용(大用)은 경기수사에 오른 선무공신으로 건소충사향(建昭忠祠享)하고
정유재란 때에 협천군수 청류공 적(迪)은 거의토적(擧義討賊)한 의병대장으로 일문삼절(一門三節)이다.
이와같이 현조들의 관(貫)이 사승과 공과문적에 모두 나주인이라하였고 또 과방록에도 송제공을 위시하여 창주공 무송(茂松) 구화공 무춘(茂春) 간암공 충좌(忠佐)등이 역시 나주나씨로 기록되어 행세하여 왔으나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반란과 동왕6년 경술 흉변에 소조(所祖)를 달리하는 나씨와 일주동관(一州同貫)으로 인한 혼효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영조23년 정묘수보시(1747) 변의문(辨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이신 고로 이관금성하고 현재에 이르렀으나 이관당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재한 제족중에는 지금에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이 나주로 되어있어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씨족은 조기이래 자손들이 번연현달하여 36여세에 그 수 5만여에 이르고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인물이 연면불체하여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이다.
특히 경술국치 이후 항일독립투쟁한 3.1운동민족 대표 나인협(羅仁協)과 나용환(羅龍煥)이 있고 광복군의 나월환(羅月煥) 장군 등이 있다.
또 독립운동가인 의열단의 나석주(羅錫鑄) 의사는 금성나씨가 배출한 근대 인물이다. 황해도 재령 출신인 그는 23세 때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귀국,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26년 김창숙 등과 모의하여 일본의 식민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다. 그리고 추격하는 일본 경찰과 접전을 벌이다 자결했다.
나도향으로 더 많이 알려진 소설가 나경손도 금성나씨 후손이다. 그는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종화 등과 함께 문예동인지 "백조"를 발간했다. 나도향은 특히 우리나라 신문학 사상 최초로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뽕", "물레방아", "벙어리 삼용" 등이 유명하다. 소년시절부터 천재작가라는 평을 받았으나 25세로 요절했다.
MBC TV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4년 시리즈 첫 번째 편의 주제를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홍암 나철로 잡았다. 2004년 2월 29일 밤 11시30분 ‘독립투쟁의 대부―홍암 나철’이란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1919년 임시정부 의정원 29명 중 21명이 대종교인이었고, 종두법의 지석영을 비롯, 한글학자 주시경, 민족사학자 신채호·박은식, 독립군 지도자 이동휘·김좌진, 소설가 홍명희 등도 마찬가지였다. 대종교는 무장독립투쟁은 물론 한글문화운동·민족사학 등을 포함한 독립운동의 핵심단체였던 것. 그 한가운데 금성나씨 나철이 있었다. 이번에 일본 외무성 사료관에서 ‘을급 비밀’로 분류된 나철의 동향보고서가 발견돼, 대종교 활동 이전 나철의 행적도 추측해볼 수 있다.
브리테니커 온라인 백과사전에 기록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철羅喆(1863 전남 보성~1916. 8. 15 구월산)
대종교를 중창(重創)한 인물.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금성(錦城).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1865~1916)·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扶助)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 三一誥〉와 〈신사기 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靈戒)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 理大全〉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殉敎朝天)했다.
금성나씨는 신라말부터 서기 1732년 까지 본관이 나주였고
이로부터 1758년까지 27년간 거평으로 살다가
그 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250여년간 금성나씨이니
영조 4년 戊申(무신)(1728년)에 羅崇大(나숭대)의 逆變(역변)이 있었고 그 뒤 1년을 지나서 庚戌(경술)년에 또 羅弘彦(나홍언)의 역변이 있어서 나주에 거주하는 우리 나씨는 이들 艅艎(여황)의 나씨와 혼동되어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영조 8년 壬子(임자)(1732년)부터 관청에 제출하는 호적에 본관을 世居地(세거지)인 居平(거평)으로 改變(개변)하였다가 영조 23년 정묘에 錦城(금성)은 나주의 古號(고호)이고 또 선세에 錦城郡(금성군)이 여러 位(위) 있다는 의미에서 전남일대에 거주하는 종족을 수합하여 금성으로 본관을 쓴다는 辨疑文(변의문)을 내고 보첩을 만들었고 영조 35년 己卯(기묘)(1759년)에 이르러 호적에 본관을 금성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금성나씨에서 분관된 나씨로는
安定(안정)나씨는 고려 恭愍王(공민왕) 때 휘 天瑞(천서)공이 나라에 공이 많아서 安川君(안천군)에 봉해진 연고로 그 자손들이 安定(안정)으로 본관을 쓰게 되었고,
軍威(군위)나씨는 고려 恭愍王(공민왕) 때 천서공의 아우인 文瑞(문서)공도 나라에 공이 있어 赤羅(적라)땅에 봉해진 고로 軍威(군위)라 본관을 쓰게 되었는데, 적라는 군위의 옛이름이다.
또 壽城(수성)나씨는 고려 禑王(우왕) 14년 戊辰(무진)(1388년)에 휘 光佑(광우)공이 비로소 壽城(수성)땅에 잉거하게 된 연고로 자손들이 그 곳에 살면서 수성이라 본관을 쓰게 되었다.
첫댓글 http://cafe.daum.net/hsfrs (한국 참풍수 지리학회)에 가보면 관심있는 문중들은 글과 사진등을 올려서 잘 소개했더군요.
우리 금성나씨도 짧게 올리기 보다는 충분히 소개해야 되리라 봅니다.
요약하여 간단명료하게 올려야 할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철선생은 나주나씨에 올려 져 있으니 확실한 자료 구비하여 정정을 해야 합니다.
심공라정호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나철선생의 내용에 관한 업급을 하신 나진 회장님의 의견도 충분히 반영하여야 할 부분이오니 나철 후손을 찾아 관계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