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애송시 / 김문희 >
벽모 의 묘 / 황석우
어느 날 내 영혼의
낮잠 터 되는
사막의 수풀 그늘로서
파란 털의
고양이가 내 고적한
마음을 바라다보면서
이 애, 너의
온갖 오뇌(懊惱), 운명을
나의 끓는 샘 같은
애(愛)에 살짝 삶아 주마.
만일에 네 마음이
우리들의 세계의
태양이 되기만 하면,
기독(基督)이 되기만 하면
* 벽모의 묘 : 파란털의 고양이 *
(『폐허』 창간호, 1920.7.)
꽃이 시드는 동안 / 정호승
꽃이 시드는 동안 밥만 먹었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꽃이 시드는 동안 돈만 벌었어요
번 돈을 가지고 은행으로 가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오늘의 사랑을 내일의 사랑으로 미루었어요
꽃이 시든 까닭을 문책하지는 마세요
이제 뼈만 남은 꽃이 곧 돌아가시겠지요
꽃이 돌아가시고 겨우내 내가 우는 동안
기다리지 않아도 당신만은 부디
봄이 되어주세요
산산조각 / 정호승
룸비니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 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불쌍한 내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 주시면서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카페 게시글
★문인협회소식
4월 애송시(김문희선생님)
신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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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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