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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南齋
‘居昌地域의 壬辰亂史 硏究’ 학술대회
오전
우척현 전투(牛脊峴 戰鬪) 기념비로 소개된 김면장군 전적비
거창에 임란의병에 관심을 갖게한 우척현 김면장군 전적비가 그 동안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온 동기가 되었고, 대구에서 10수차례 발표한 학술대회에 비추어 의병활동으로 가장 중요한 경남 거창지역에서 처음으로 경남지역 학술대회(지난해 합천학술대회가 경남지역에서는 첫번째이지만 발표 내용이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의 발표였슴)란 점이 전문가들에게 안타까움을 준다.
10월 25일 ‘居昌地域의 壬辰亂史 硏究’ 학술대회가 10시부터다 서울서 출발해서는 당일 참석할 수 없기에 하루 일찍 서산 강릉유씨삼충사회장 松林 유영운 회장과 하루 전 24일오후 3시에 만나서 부근 맛집을 검색하니 ‘동바리 설렁탕’이 뜬다.
전화로 위치를 묻고 동바리가 무슨 뜻이냐? 물으니 상호란다
내일 거창문화원 상살미홀에서 학술대회가 있어 ‘상살미’는 무슨 뜻일가? 궁금했는데 문화원 조재원 학예사는 거창 부근에 상살미라는 그리 높지 않는 언덕이 있다고 한다.
거창 숙소는 터미널 부근에 깨끗한 모텔이 있어 일찍 자리에 들었다(호텔숙박료 5만원)
아침 일찍 전남 고산에서 출발한 石靑 김재교 작가와 해장국을 아침으로 하고 행사장에 도착하였다.
밀양변씨 대종회장 변상기, 거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靑潭 이점국
임진란 학술행사장에는 언제나 반가운 모습을 볼 수 있어 즐거움이다.
변상기 회장님에게 부탁한 변청(卞淸)과 변희황(卞希璜)의병장 관련 자료를 받고 8.16 우척현 기념책자도 전했다.
문성연 우척현전투 전승기념제전 위원장과 涎河 김옥자 부부
涎河 김옥자, 강석진 국회의원 신효정 사모님
(성균관 유림) 석전보존회 박만길 상무, 방허당, 공재춘, 松林 유영운 강릉유씨 삼충사회장
사회: 조순 (대구가톨릭대학교 안중근 연구소 교수)
박홍갑(전 국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제1주제: 임진란기(壬辰亂期) 유학(儒學)의 전개와 거창(居昌)학맥(學脈)
거창군 연역과 제지사족
지금의 경남 거창군은 조선시대 거창현 지역에다 안음현[안의현]과 삼가현 일부를 합친 것이다.
거창현은 지금의 거창읍, 고제면, 웅양면, 주상면, 남상면, 남하면, 가조면, 가북면 일대 영역이고, 지금의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은 안음현 영역이었고, 신원면은 삼가현 영역이었는데, 1914년 거창군으로 합쳐진 것이다.
거창의 어원은 “매우 넓은 들” 혹은 “널은 벌판”이란 뜻을 가진 거열(居烈), 거타(居陁), 아림으로 불려왔는데, 이 지역 최초의 국가가 거열(居烈)로 알려져 있다.
거열군이 거창군으로 변경된 것은 경덕왕 16년(757)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진주목 거창현 성씨(姓氏)조에 의하면
거창현(居昌縣)
토성(土姓) 5성: 유(劉), 정(鄭), 장(章), 신(愼), 주(朱)씨.
내성(來姓) 1성: 최(崔)
가조(加祚)
속현성(屬縣姓) 5성: 사(史), 조(曺), 갈(葛), 유(劉), 신(辛)
오늘날 거창에 정착하여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성씨는 거창 신(愼), 거창 장(章), 거창 유(劉)씨 3성이다.
임진란기 학맥형성과 거창 인물(居昌人物)
김신옥(金信玉), 정유명(鄭惟明), 문위(文緯), 성팽년(成彭年), 전팔고(全八顧), 전팔급(全八及), 유중룡(柳仲龍), 등과 같은 쟁쟁한 거창 인물들이 직간접으로 남명(南冥)과 연을 맺었다.
임진란 당시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을 맡은 김면(金沔)은 남명 제자였는데, 이들의 의병진(義兵陣)이 거창에 설치되었기에 영남 의병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런 여건들로 인해 거창에는 남명의 ‘경의(敬義)‘ 정신을 계승한 제자들이 많았고, 또한 이들이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서 큰 활약을 해 냈는데, 정유명을 비롯하여 문위(文緯), 성팽년(成彭年), 전팔고(全八顧), 전팔급(全八及), 유중룡(柳仲龍) 등이 그들이다.
정유명(鄭惟明:1539~1596),
자(字)는 극윤(克允)이며, 관향(貫鄕)은 초계(草溪), 호(號)는 역양(嶧陽)이다. 일찍부터 갈천 임훈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또 옥계(玉溪) 노진(盧縝)을 스승으로 섬긴 지 오래 되어, 옥계 또한 이를 중하게 여기었다. 명종(明宗) 21년(1566)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노진 등이 여러 문생(門生)들과 지곡사(智谷寺: 산청읍 소재)에 모여 여러 날 강론하였을 때 참석하였다.
공은 선조 6년(1573)에 진사시험에 입격하였으나 늙은 모친을 위해 상경하지 않았다. 그의 효행은 조정에도 알려진 바 있었고, 평생 가업을 경영하지 않아 가난하게 살았으며, 동지들과 역계(嶧溪) 가에다 집을 지어 강학 장소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늙은 어버이를 위해 과장(科場)에 출입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후학을 가르치고 자제를 가르치는 것을 일로 삼았다. 죽음에 앞서 자녀들에게 선조(先祖) 받드는 일과 『가례』 준수를 당부한바 있는데, 자녀들에게 『가례』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준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다 본 선견지명이었다.
정유명이 성리학적 삶의 실천을 위해 주목한 것은 ‘성경(誠敬)’이었다. 그는 일찍이 고인(古人)의 중요한 말을 기록해 놓고 두 아들로 하여금 익히게 하였는데, 성경(誠敬)이 바로 첫 번째의 조목이었다. 손수 ‘성경(誠敬)’ 두 글자와 ‘스스로 속이지 말 것’, ‘혼자 있을 때 삼간다.’는 등의 말을 써서 벽에다 붙여 놓고 스스로 살피었다. 독서(讀書)할 때 사서(四書)를 근본으로 삼았고 성리(性理)에 관한 여러 글도 깊이 연구하여 익히 강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먼 곳에서 갈천(葛川)을 찾아 와 유학하는 선비들 중에는 더러 공에게 먼저 찾아와 질문하기도 하였다. 글을 지을 때 간곡하고 명쾌하여 사정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였으므로 갈천이 자주 칭찬하기를, “정 아무개의 글은 나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63)
선조 25년(1592)에 왜적이 쳐들어와 방어벽이 무너지자 크게 통곡하며, “어떻게 이 왜적을 우리 임금에게 보낸단 말인가?” 하면서 맹세코 왜적과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향리(鄕里) 자제들과 의병(義兵)을 모아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과 호응하여 전략을 세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때 금산에 머물던 적 기병(騎兵) 4백여 명이 무주(茂朱)에 머물자, 합천 진사 박이문(朴而文)과 함께 소를 올려 김성일을 우도 감사에 유임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아 냈다.64) 전란이 끝난 뒤 기근(饑饉)으로 백성들이 서로 죽음을 구제해야 할 때에 작서(雀鼠)가 밭 두둑에서 이삭을 잘라가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이 남겨두지 않고 다 베어 버렸는데, 공이 그 말을 듣고 책망하기를, “이 때가 어느 때인가? 사람도 서로 잡아 먹어려 하고 있으니, 한 되 한 말은 잠시 동안 연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찌 사수(死數)를 엿보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굶주린 사람을 모면 밥을 나누어 주고 식량을 떼어 주어 살아 난 사람이 많았으니, 공의 자상하고 측은한 마음은 천성이 본래 그러하였다. 공의 성품이 온아(溫雅)하고 행실이 단상(端詳)한 면들이 잘 드러난다 할 것이다. 남의 선을 드러내고 악을 덮어 주었으며 다른 사람이 나를 헐 뜯으면 받아 들이고 따지지 않았다. 평소 가부가 없는 것 같았지만 의리에 처하거나 사람의 잘못을 책망할 적에는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여 범할 수가 없었다. 동터기 전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가묘(家廟)를 알현하였으며, 외출할 적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고하고 돌아 와서도 그렇게 하기를 죽을 때까지 하였다
제사(祭祀)가 있으면 제수(祭需)를 반드시 몸소 점검하였고 비록 혹독한 추위를 만나도 깨끗이 씻었으며 재계하는 날에는 글도 보지 않았다. 따라서 정유명의 생활 철학은 이 시대가 요구한 성리학적 행실 철학에 기초한 것들이 몸에 밴 것이었고, 이는 바로 남명(南冥)이나 갈천 임훈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차남 정온(鄭蘊)에게 경계하기를, “학문을 하는 실제는 구두문자(口讀文字)의 사이에 있지 않다. 사람에게 다만 하나의 마음과 몸이 있는데, 깨우치고 가다듬지 않고서 마구 내버려 둔다면 결국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흉년이 들어 정온이 재화를 불릴 것을 말하니, 공이 묵묵히 듣다가, “의리를 헤칠 것이니, 너희들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하였으니, 궁한 것으로 인해 지조를 바꾸지 않는다는 참 선비의 정신을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은 그에게 “사우(師友)간에 훈도한 힘과 학문을 강마한 공부에서 얻어 심신(心身)으로 체인(體認)하여 성정을 함양한 것이 정말로 깊다. ..... 그러므로 공이 굽힌 것이 아니라 공이 폈다고 여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65) 선조 29년(1596) 향년 58세로 세상을 마감했고, 안의 역천사우(嶧川祠宇)에 배향되었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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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국조인물고』 권40 사자(士子), 정유명 비명(碑銘)
64) 『난중잡록』 권2, 임진년 8월 27일: 『학봉일고』 부록제2권. 문수지(文殊誌)
65) 金瑬, ‘정유명 비명(碑銘) 『국조인물고』 권40.
66)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문위(文緯: 1554~1631)
가북면 용산마을 남평 문씨 마을 출신이다. 자는 순보(順甫) 호는 모계(茅溪)이다. 할아버지는 현감(縣監)을 지낸 문웅(文雄)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문산두(文山斗)이다. 어머니는 선교랑(宣敎郞) 오세평(吳世平)의 딸 함양 오씨(咸陽吳氏)이다. 그의 선대는 단성(丹城)사람이었는데, 그의 4대조 문수공(文粹恭)이 단성에서 용산촌(龍山村)에 이사하여 살았으므로, 대대로 거창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산두(山斗)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인데, 어려서부터 두터운 인정을 심고 문장에 두루 미쳤으며, 또 예가(禮家)에 조예가 깊어 향리(鄕里)에서 종사(宗師)로 여겼다. 명종(明宗) 9년(1554)에 태어난 공은 6, 7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여 9세에는 『상서(尙書)』를 배웠고, 약관이 되어서는 스스로 성인(成人)이 되어 도(道)를 구하는 뜻이 있었다. 남명선생(南冥先生)을 덕산(德山)에서 찾아 뵈었으며, 덕계(德溪) 오건(吳健)에게 『주역(周易)』을 배웠다.
오건이 사망하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에 종유하여 학업을 강론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하기를 즐겨 스스로 터득하려고 노력하였다. 함께 교유한 이들이 모두 당세의 알려진 인물이었다.67) 모계는 수우당 최연경(崔永慶)의 깊은 인품을 사모하여 수우당이 합천 정인홍 집으로 방문했을 때 만난 일이 있다. 그리고 이듬해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나 최영경이 죽음에 처하게 되자 신원 상소를 준비했다. 수우당과 모계의 관계는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서도 잘 나타난다.68)
임진년 왜적이 침입할 때 공의 나이 39세였는데, 향리의 군사 약간명을 뽑아 의병대장 김면(金沔)과 합류하여 왜적을 변암(弁巖) 사이에서 막으며 책략을 세운 것이 많았다. 이듬해 김면이 전염병으로 군중(軍中)에서 졸(卒)하자 공이 뒷일을 잘 맡았으며, 그의 상사(喪事)를 의식대로 치렀으므로 사졸(士卒)들이 도망할 생각을 잊었다. 그해 5월에 모부인(母夫人)이 졸하고, 정유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큰 난리와 큰 흉년 중에 처하였지만 한 가지 일도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최질(衰絰)을 벗지 아니하고 3년 상을 마치자 사람들은 그 일을 어렵게 여겼다. 상복을 벗고는 모계리(茅谿里)에다 집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기 10여 년 만에 문밖에는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다. 부제학(副提學) 김우옹(金宇顒)이 그의 독실한 행실을 듣고 추천하였으며, 재상(宰相)인 류성룡(柳成龍) 역시 공의 현명함은 자목관(字牧官)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추천하였다. 1604년(선조 37)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고, 1607년(선조 40)에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옮겼다. 광해군 9년(1617)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69)
이후 낙향하여 은거에 들어갔는데, 1617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거창 현감인 부친을 따라 왔다가 모계에게 수학하였다. 이 보다 앞서 모계가 동몽교관으로 있을 당시 서울에서 어린 허목을 만난 적이 있으며, 허목은 모계가 별세하자 그의 스승을 위해 행장(行狀)을 짓는 등 끝까지 예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허목 외에도 모계의 문인으로는 정시수 윤사임 임덕부 변창후 이응백 정필달 조경 등이 있다. 모계는 1620년 한강이 별세하자 그의 스승을 위해 위패를 정주(程朱)와 함께 배향할 것을 도모했다. 서계서원(西溪書院)이 설립되자 스승 덕계의 위패를 봉안했고, 천곡서원(川谷書院)에다 한강의 위패를 정주(程朱)와 함께 봉안했다. 아울러 덕계와 한강 언행록(言行錄)을 저술하여 제자로서의 도리를 다했다. 남명 문하를 대표하던 정인홍이 살던 곳과 30리 거리에다 사귄지 오래 되었지만, 하루 아침에 교유를 끊어 버렸다.70) 인조반정으로 고령 현감(高靈縣監)에 제수 되던 나이가 70세였는데, 몇 개월 뒤 병을 핑개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1631년(인조 9년) 12월 24일 78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모계집(茅谿集)』이 있고, 거창 가북면 산수동의 다발산(多發山)에 묘소가 있다. 서변리에 용원서원(龍源書院)에 배향되었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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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국조인물고』 권39 음사(蔭仕). 문위(文緯) 묘지명.
68) 『광해군일기』 권121. 광해9년 11월 3일 갑자.
69) 『광해군일기』 권121. 광해9년 11월 3일 갑자.
70) 이정희, 2002.‘『모계집』해제’ 『남명학연구』 12.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71) 『모계집(茅谿集)』 ‘모계선생연보’ 참조
성팽년(成彭年: 1540~1594)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이다. 증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영해 도호부사(寧海都護府使) 성이건(成以乾)이며, 조부는 중훈대부(中訓大夫) 위원군수(渭原郡守) 성윤동(成允仝),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성한량(成漢良)이다. 1540(중종 35)에 갈천(葛川) 임훈(任薰)에게 배웠으며, 정유명(鄭惟明), 신권(愼權)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1564년(명종 19)에 갑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72) 임진란이 일어나자 정유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당시 의병장인 김면(金沔)의 휘하에 들어가 참모로 활약하였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 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55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지평에 추증되었다. 성팽년의 문인으로 동계(桐溪) 정온(鄭蘊)이 있으며 『동계집(桐溪集)』 안에 [성석곡전]이 수록되어 있다.73)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9호인 일두정여창선생사당비 비문(碑文)을 썼다. 저서로 『석곡집(石谷集)』이 있으며, 묘소는 위천면 금원산(金猿山) 아래에 있다. 인조 때부터 후손들이 석곡의 사당을 짓기 위해 노력했고,74) 1694년(숙종 20) 구연서원(龜淵書院)에 신수이(愼守彛), 신권(愼權)과 함께 배향되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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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嘉靖四十三年甲子七月二十日司馬榜目』(국립도서관:高朝26-29-1)
73) 『국역동계집』(민족 문화 추진회. 2000)
74) 『인조실록』 권436. 인조 23년 1월 20일 갑진.
75) 『石谷集』『안의읍지(安義邑誌)』『거창군사』(거창군, 1997)
전팔고(全八顧: 1540~1612)
가조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경필(景弼), 호는 원천(原泉)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전맹언(全孟彦), 아버지는 선무랑 용궁 훈도(宣武郞龍宮訓導) 전확(全擴)이고, 어머니는 여우문(呂遇文)의 딸 성산 여씨(星山呂氏)이다. 전팔급(全八及)의 사촌이다. 학문에 능통하여 11세 때 『논어(論語)』와 『중용(中庸)』을 독파하였다. 20세 때는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문하생이 되었다가, 25세 때 덕산으로 가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 되어 학문을 익혔다. 1587년에 원천정(原泉亭)을 건립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옥계(玉溪) 노진(盧縝), 사호(思湖) 오장(吳長), 문위(文緯) 등과 강론하며 학문과 도의를 연마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 당시 수우당 최영경과 주고받은 편지로 인해 옥고를 치렀다. 선조(宣祖) 임금이 거창(居昌)의 현호(縣號)가 삼봉(三峰)이라 한다는 것을 본 후 이곳에 사는 전팔급(全八及)과 전팔고(全八顧) 형제를 잡아다 심문한 것이었다. 이 때 최영경(崔永慶)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성혼(成渾)이 즉시 정철(鄭澈)에게 편지를 보내어 효제(孝悌)하고 청수(淸修)한 것으로 힘껒 구제했다
.76)
임진란이 일어나자 그가 세운 원천정(原泉亭)을 근거로 의병을 일어켰다. 합천에서 정인홍이 의병을 일어켜 경상우도의 전팔고(全八顧), 하혼(河渾), 권양(權瀁), 문경호(文景虎), 정인영(鄭仁永), 정인함(鄭仁涵) 등을 참좌(參佐) 각수 유사에 삼았다. 부산 등지가 잇달아 함락되자 향교와 서원의 생도들을 모아 요소에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우현(牛峴)에서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을 만났다. 또한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總兵)이 대구에서 거창으로 진을 옮겼을 때 때 맞추어 군량 공급하여 위기를 면하게 하였다. 이에 명나라 황제가 첨지(僉知) 벼슬을 내렸고, 선조가 대사헌(大司憲)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였다. 1612년(광해군 4)에 73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한강집(寒岡集)에 만사가 실려 있다.77) 그의 호를 딴 원천마을이 있고, 저서로 『원천집(原泉集)』이 있다. 가조면 장기리 원천마을 용천사(龍泉祠)에 형사보(刑士保), 유자방(柳子芳), 이계준(李繼俊), 전팔급(全八及), 서숙(徐䎘)과 함께 배향되었다.78) 숙종 때 전국의 서원과 사우를 통폐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원천서원(原泉書院)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곳에 배향된 인물은 윤순거(尹舜擧)와 변벽(卞璧), 전팔고(全八顧) 등이었는데, 변벽과 전팔고의 경우에 직명(職名)이 쓰여 있지 않았다는79) 보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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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후광세첩(厚光世牒)』 제2권. 『문정곡사적(文靖公事蹟)』 동서당화록(東西黨禍錄)
77) 『한강집』속집 제7권.
78) 『원천집(原泉集)』 『원천선생연보(原泉先生年譜)』
79) 『서원등록』 肅宗 45년(1719) 4월 1일
전팔급(全八及: 1542~1613)
전팔고의 종제(從弟)인 그는 전팔고와 함께한 인물이다. 가조면에 태어난 전팔급의 자는 경추(景追), 호는 원계(原溪)이다.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성리학에 몰두하여 그 학문이 깊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문하에서 배움을 쌓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모계(茅溪) 문위(文緯)와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 정인홍을 따라 거창에서 창의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인홍이 실각하자 그 업적이 가려졌다. 용천사(龍泉祠)에 형사보(刑士保), 유자방(柳子芳), 이계준(李繼俊), 서숙(徐䎘)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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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거창군사 편찬위원회 『거창군사』(거창군.1997)
유중룡(유중룡: 1558~1635)
거창현 무등곡(無等谷: 현 남하면)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여견(汝見), 호는 어적산인(漁適散人)이다. 증조는 용양위 사직(龍驤衛司直)을 지낸 유정손(柳正孫), 조부는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 유하(柳賀) 아버지는 증 좌승지(贈左承旨) 유유춘(柳有春), 어머니는 부장(部將)을 지낸 경지(慶祉)의 딸이다. 덕계 오건(吳健)의 문화에서 학문을 배웠다.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동방 급제한 정경세(鄭經世), 이전(李㙉), 이준(李俊)과는81) 평생 교유하며 도의(道義)를 맺었다. 그 외에도 오운(吳澐), 이대기(李大期),박이장(朴而章), 이후경(李後慶), 문려(文勵), 윤경남(尹景男),변혼(卞渾), 권치원(權致遠), 송군옥(宋君沃), 노경복(盧景福), 조응인(曺應仁), 정온(鄭蘊), 유희춘(柳希春), 오장(吳長) 박수종(朴壽宗) 등의 명현들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문위(文緯), 박성(朴惺) 등 8인과 함께 발문(發文)하고 의병을 맹약하였다. 김면(金沔) 진중(陣中)에 합류하였고, 이후 우현(牛峴)과 상암(箱巖) 등 여러 격전지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김면(金沔)이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자 유중룡은 직접 호상(護喪)하였다. 그리고 이 해 여름 아우 유계룡(柳季龍)과 함께 곽재우(郭再祐)진중에 들어가 왜적을 물리쳤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전략을 논의하였다.
40대 후반인 1600년(선조 33) 문과 별시에 급제한 후82) 찰방(察訪) 등을 거쳐 1603년(선조 36) 예조 좌랑(禮曹佐郞)83) 1604년(선조 37) 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에 차례로 임명되었고, 전적(典籍)과 사예(司藝)를 거쳐 1607년(선조 40) 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1612년(광해군 4)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올랐고,84) 1613년(광해군 5)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부임하였다. 광해군 동안 정국이 혼란한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가 인조반정 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뽑혔다. 이에 특진으로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敎理)를 거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오른 후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3권 1책의 『어적집(漁適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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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문과방목』 宣祖 33년 更子 別試 兵科
83) 『선조실록』 권167. 선조 36년 10월 19일 신축
84) 『광해군일기』 권138. 광해 11년 3월 18일 신축
김재선(웅양면), 김정호(거창읍 아림약국), 김옥자(
김신옥(金信玉: 1534~1598)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공서(公瑞), 호는 쌍봉(雙峰)이다. 조부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김적(金磧),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김세염(金世염)이고, 어머니는 진사 전식(全軾)의 딸이다. 남명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오건(吳健), 조종도(趙宗道), 김효원(金孝元),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박제인(朴濟仁) 등과 교류가 깊다. 임훈(任薰)과 정유명(鄭惟明)에게도 영향을 받았고, 정온(鄭蘊), 성팽년(成彭年)과는 깊이 사귀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하였고,85) 1568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86) 홍주 교수(洪州敎授)와 송화 현감(松禾縣監),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남겼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송암(松菴) 김면(金沔)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란의 공으로 통전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그의 묘는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에 있다.(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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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嘉靖四十三年甲子七月二十日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高朝26-29-1])
86) 『국조방목』 宣祖 1년 戌辰 增廣試 兵科.
87) 거창군사편찬위원회,『거창군사』(거창군,1997),『선산김씨대동보』(선산김씨대종회,2007)
변혼(卞渾: 1559~1626)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명숙(明叔)이다. 아버지는 변희숙(卞希璹), 부인은 일선 김씨(一善金氏) 김익(金翼)의 딸이다. 9세에 문위의 부친 학산(學山) 문산두(文山斗)에게서 학문을 익혔다. 젊어서 책을 읽으며 여가에 무예를 익혔다. 1591년(선조 24)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사인(士人) 전우(全雨)와 함께 초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곧 거창 의병장인 송암(松菴) 김면(金沔)을 도와 출전했는데, 항상 선봉장으로 우지령과 병암 등에서 적을 격퇴하여 거창 진입을 막았다.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이 변혼을 칭찬하여, “공이 아니었으면 거창은 방어가 불가능 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문경(聞慶) 가수(假守)가 되어 전란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하였다. 문경 현감(聞慶縣監) 당시 이웃 고을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과 협력하여 기관을 설치하고 적을 체포하여 참수하자 적도(賊徒)가 흩어져 감히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였다.88) 정유재란 때 왜적이 황석산성을 공격해 오자 군마를 양성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명나라 장수가 가조현에 머물고 있을 때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명에 따라 접반사로써 군량을 제공하였다. 선조 37년(1604) 거제 현령(巨濟縣令)에 임명되고,89) 이후 첨사와 군수 등을 거쳐90) 삭주부사로 역임했다. 1626년(인조 4) 3월 25일 68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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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갈암집』 별집 제4권, 墓表,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姜公(德龍) 墓表』
89) 『宣祖실록』 권180, 선조 37년 10월 15일 신유
90) 『광해군일기』 권8, 광해 6년 10월 3일 임오
91) 거창군사편찬위원회,『거창군사』(거창군,1997),
92) 『난중잡록』 1. 임진년(상) 6월 3일:『연려실기술』 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김면(金沔)
윤경남(尹景男: 1556~1614)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술(汝述), 호는 영호(瀯湖)이다. 증조는 사간(司諫) 윤경(尹耕)이고, 조부는 회령 판관(會寧判官) 윤삼빈(尹三聘) 아버지는 윤은신(尹殷臣), 어머니는 호군(護軍) 이효원(李孝元)의 딸이다. 12세에 학산(學山) 문산두(文山斗)에게 문위(文緯)와 함께 글을 배웠다.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은 채 동계(桐溪) 정온(鄭蘊), 존재(存齋) 곽준(郭䞭), 어적(漁適) 유중룡(柳仲龍)과 교유하였다. 임진란이 발발하자 그는 문위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인 송암(松菴) 김면(金沔) 휘하에 들어가 진을 거창으로 옮기고 참모로 활약하였다. 당시 김면(金沔)은 곽준(郭䞭), 문위(文緯), 윤경남(尹景男), 박정번(朴廷璠) 유중룡(柳仲龍)을 참모로 삼아, 박성(朴惺)으로 하여금 의병과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92) 각지에 격문을 띄어 4~5일간 2,000여 명을 모았다. 김면(金沔)과 함께 출진하여 낙동강의 전선을 공격하여 왜적 80여명의 수급을 베고 적선 2척을 획득해 배 안의 보물들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 진중으로 보냈다. 금산(金山)과 지례(知禮)의 적들이 우현(牛峴)을 넘는다는 것을 듣고는 거창이 진주 이상의 요충지이며, 거창을 잃으면 10여 읍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김면(金沔)은 병사들을 인솔하여 거창으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금산과 지례의 적들을 막을 수가 있었다. 그 후로도 두곡(豆谷), 사랑암(沙郞巖)에서 전투를 하였다. 임진년 10월 10일에 합천 군사 500명을 이끈 정인홍이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자 군관으로 종군하여 적을 물리쳤다.93)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김면이 진중에서 병으로 타계하자 문위와 함께 뒷일을 처리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에 김성일이 포상할 것을 건의해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에 제수 되었지만 사양하였다. 명군이 거창에 이르자, 윤경남(尹景男)은 도사 김영남(金潁男) 현감(縣監) 김락(金洛)과 함께 인무와 마필을 동원하여 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해 우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했다.94) 1599년(선조 32)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이후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선조 32) 4월에 장수 현감에 제수되었고, 1605년(선조 38)에 선무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608년(선조 41)에 광흥창 주부( 廣興倉主簿)로 옮겼다. 1609년(광해군 1)에는 개령 현감(開寧縣監)에 임명되었고, 1612년(광해군 4)에는 운봉 현감이 되었다. 운봉 현감으로 있던 1614년(광해군 6) 2월 3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영호실기(瀯湖實記)』가 있다. 1893년(고종 30)에 자헌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성균관제주(資憲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에 증직 되었다.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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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난중잡록』 1. 임진년(상) 6월 3일:『연려실기술』 16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김면(金沔)
93) 『학봉일고』부록 제3권, 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편-『折亂中雜錄:山西 趙慶男』편.
94) 『고대일록』 계사년 8월 30일.
95) 거창군사편찬위원회,『거창군사』(거창군,1997),
맺는 말
임진란 당시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김면(金沔)의 의병진이 거창에 설치 되었는데, 이 지역에는 남명의 ‘경의’ 정신을 계승ㄹ한 제자(弟子)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정유명(鄭惟明), 문위(文緯), 성팽년(成彭年), 전팔고(全八顧), 전팔급(全八及), 김신옥(金信玉), 유중룡(柳仲龍) 등이 그들이다.
제2주제: 임진란기(壬辰亂期) 거창지역 의병·관군의 항왜활동(抗倭活動)
김경록(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0 金沔 의병부대: 우두령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영웅적으로 투쟁
0 김면: 가조, 영계, 우두령, 변암, 장곡 등지로 지휘 본부를 이동.
경상도 의병 都大將 김면, 참모 곽준을 문후
우병사 김면: 3월 11일 진중에서 사망.
순찰사 김성일: 5월 2일 진주 순영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