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미륵대원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58
창건 및 연혁
1987년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011년 7월 28일자로 ‘중원 미륵리사지’에서 ‘충주 미륵대원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주변 지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동남부 지방에서 서울로 오는 길목으로 교통의 요지이면서 동시에 국방의 요지였다.
이 절은 오랫동안 잊혀진 채 일부 민가가 들어서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한 보살이 찾아와 미륵불상을 덮은 다래 덤불을 걷고 암자를 마련한 후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은 옆에 세계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창건연대나 내력, 사원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한다. 석굴은 거대한 돌을 쌓은 위로 목조로 세운 자취가 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발굴 당시 ‘미륵당초’라고 새겨진 기와가 나와서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사원으로 추정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며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누이인 덕주공주가 월악산에 덕주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애불을 만들자 태자는 북향의 석굴을 지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
1977년 1차 발굴조사 당시, ‘明昌三年金堂改蓋瓦(명창삼년김당개개와)’, ‘彌勒堂(미륵당)’, ‘彌勒堂寺(미륵당사)’, ‘院主(원주)’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미륵을 모시는 사찰이자 원(院)을 겸하는 사찰이며, 1192년(고려 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된 것은 13세기이며, 이후 곧 복원되었고 조선 초기에 크게 수리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수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1936년 발생한 큰 수해로 인한 것으로 추정한다.
성보문화재
입구에서 절터를 바라보면, 당간지주의 각 부분, 돌거북, 오층석탑(보물)과 석등, 석축 안의 미륵불상(보물)과 이런저런 건물 주춧돌까지, 절터 안의 거대한 석조물들이 펼쳐져 있다.
미륵대원터는 다른 절과는 달리 남쪽을 등지고 북쪽을 향하여 펼쳐져 있다. 맨 안쪽에 본존불이 있고 그 앞으로 석등과 오층석탑이 일직선상에 놓인 단탑식 절집 구조이다.
불상 뒤편에는 큼지막한 돌덩이가 한 개 있다. 근처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 돌을 들어내면 물줄기가 보인다고 한다. 절터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 한 줄기가 석굴 아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적인 습도 조절 장치가 아니었을까.
석굴 앞 왼쪽 좁은 개천 옆으로 거북바위라 불리는 암반 위에는 지름 1미터 정도의 둥근돌이 있다. 온달 장군의 공깃돌이라는 전설을 담고 있다. 절터를 지키는 세계사 측에서는 보주탑이라 한다.
입구 쪽에 자리한 돌거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좌대로 꼽힐 만하다.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썩썩 다듬어 이룬 것으로, 머리 부분을 점차 용의 모습으로 표현해가던 나말여초의 돌거북 유형과 달리 세모진 머리에 동그란 눈, 너부죽하게 다문 입, 조그맣게 뚫린 콧구멍 등이 표현되어 있다.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되었다. 현재 비석은 없다.
절터의 가장 북쪽인 입구에는 바깥면에 연꽃이 새겨진 당간지주와 둥근받침이 새겨진 당간 좌대 등 부러지고 해체된 당간지주의 부분들이 있다.
절터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보면 절터를 조금 벗어난 곳에 널찍한 장방형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 건물 자리는 절에 딸린 부대시설이나 병영으로 추정한다.
하늘재를 향해 조금 더 올라가면 높이 3.3m의 삼층석탑(충북 유형문화재 제33호)이 있다. 다시 하늘재 쪽으로 더 올라가면 길가 오른쪽에 커다란 불두(佛頭) 하나가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