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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번역문 초고는 여러 사람의 검토와 조언을 거쳐 <빼앗긴 고향> 제3호에 게재됩니다. 그 후 올해 연말쯤 <현진건 중문 소설집> 등으로 출간됩니다. 번역에 참여하신 분들은 모두 공저자로 등록됩니다.
(지난 호에서 계속) 어제 일로 심신이 피곤하였던지 그 이튿날은 늦게야 잠에서 깨어났다. 간밤에 오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명랑한 햇발이 미닫이에 높게 걸렸다. 아내는 또 장롱 문을 열고 전당포에 가져갈 것을 찾고 있다. 이때 누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부부는 ‘누가 왔을까?’ 하며 귀를 기울인다. 밖에서 누군가가,
“아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내가 급히 방문을 열고 나간다. 처가의 하인 할멈이 와 있다. 할멈이 나에게 장모의 말을 전한다. ‘오늘이 장인 생신일세. 빨리 오게!’ 대답은 아내가 한다.
“그렇지! 오늘이 이월 열엿샛날이지! 깜빡 잊었고 있었네!”
시큰둥한 할멈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아씨도 딱하십니다. 어쩌면 아버님 생신을 잊으신단 말씀이오? 아무리 부부 사이가 재미 나기로서니 ….”
나는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아내가 자기 아버지의 생신까지 잊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자 아내의 처지가 더욱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오늘이 본가 아버님 생신이에요. 어서 오라고 합니다 ….”
내가 대답한다.
“어서 가구려 ….”
아내는 하염없이 얼굴을 붉힌다.
“당신도 가셔야지요. 우리 같이 가요.”
나는 평소에도 처가에 가기를 매우 싫어했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에 가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두루마기를 입었다.
아내는 머뭇머뭇하며 눈썹 사이를 보일 듯 말 듯 찡그린다. 그러더니 곁눈으로 살짝 나를 엿보더니 돌아서서 급히 장롱 문을 연다.
‘입을 옷이 없어서 망설거리는구나.’
나도 슬쩍 돌아서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는 서로 등지고 서 있지만, 아내가 거의 텅 빈 장농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만한 옷을 찾지 못해 눈살을 찌푸린 모습은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진다.
“자아, 가셔요.”
정신없이 섰던 나는 아내가 부르는 소리에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명실로 짠 서양 옷을 입은 아내가 나를 위로하는 듯 방그레 웃는다. 나는 더욱 쓸쓸하였다.
우리 부부가 사는 집에서 처가까지는 거리가 꽤 멀었다. 나는 천천히, 아내는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의 간격은 점점 멀어졌다. 나는 한참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나를 따라오려고 애를 쓰며 주춤주춤 걸어온다. 거리에 다니는 모든 여자들이 하나같이 비단옷을 입고 고운 신을 신었는데 아내만 허름한 옷에 낡은 신발을 신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슬픈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한참 후에 나는 넓고 높은 처가 대문에 닿았다. 내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니 낯선 사람들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본다. 그들 눈에는,
‘이 사람은 이 집 하인인가 보다.’
하고 얕잡아 보는 빛이 서려 있는 것 같다.
이윽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이 어수선하게 내게 인사를 한다. 그 인사하는 소리가 어쩐지 내 귀에는 비웃는 듯이 들린다. 나를 모욕하는 웃음소리 같기도 하다. 나는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후끈거렸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 제일 친근하게 나를 대하는 이가 아내보다 세 살 많은 처형이다. 내가 어려서 장가를 들었을 때 그는 나를 못 견디게 괴롭혔다. 그때 나는 그가 싫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그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정겹게 만들었던 듯하다.
그는 인천에 산다. 그의 남편이 근래에 곡식으로 벌이는 투기를 해서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처형은 부유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듯이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얼굴에도 부자다운 빛깔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숨기려고 짙게 분칠을 한 보람도 없이 눈 위에는 퍼렇게 멍든 자국이 드러난다.
“왜 혼자 오셔요?”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하다 말고 처형은,
“그러면 그렇지! 혼자서 왔을 리가 있나!”
라며 혼잣말을 주고받는다. 아내가 도착한 것이다.
오늘따라 아내의 수척한 얼굴이 더욱 수척해 보인다. 그런데도 아내는 눈물이 괸 듯한 눈으로 하염없이 웃는다. 나는 처형과 아내를 유심히 번갈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의 얼굴은 흡사하다. 그런데 얼굴빛은 어쩌면 저렇게 다른지! 하나는 이글이글 만발한 꽃 같고, 하나는 시들시들 마른 낙엽 같다. 아내를 형이라 하고 처형을 아우라 해도 모두들 속을 것이다.
다시 한번 아내를 바라보며 나는 말할 수 없는 쓸쓸한 생각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딴 음식은 별로 먹지 않고 못 먹는 술만 넉 잔이나 마셨다. 하지만 술기운은 올라도 마음은 계속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집에 가려고 일으켰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방바닥이 폭풍에 휩싸인 파도처럼 높았다 낮았다 한다. 어질어질해서 곧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장모가 당황해서 일어서며,
“술이 그렇게 취해 가지고 어디를 가겠나? 여기서 잠시 자고 가게.”
한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에요. 집에 가겠어요.”
하고 취한 소리로 중얼거리었다.
“저를 어쩌나!”
장모는 걱정을 하시더니,
“할멈! 어서 인력거 한 대 불러오게.”
한다.
취중에도 나는 ‘인력거를 태우지 말고 그 인력거 삯을 나에게 주면 책 한 권을 살 수 있는데…’ 하고 생각한다. 인력거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 자다가 잠에서 깨어 보니 방 안에 벌써 남폿불이 켜져 있다. 아내가 외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다. 화로에서는 무엇이 끓는 소리가 보글보글하다. 아내는 내가 잠에서 깬 것을 보더니 급히 화로에 얹은 것을 만지며,
“인제 그만 일어나 진지를 잡수셔요.”
한다. 아내가 부리나케 일어나 아랫목에 파묻어 둔 밥그릇을 꺼내어 미리 차려 둔 상에 얹어 내 앞에 갖다 놓는다. 그러면서 화로를 당겨 더운 반찬을 집어 얹으며,
“자아, 어서 일어나셔요.”
한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양 부시시 일어났다. 머리가 아프고 목이 몹시 말랐다. 그래서 국과 물을 잇달아 들이켰다.
“물만 잡수면 어떡해요? 진지를 좀 잡수셔야지.”
아내는 그렇게 걱정을 하며 밥상머리에 앉아 고기도 뜯어 주고 생선뼈도 추려 주었다. 이것들은 모두가 다 오늘 처가에서 가져 온 음식들이다. 나는 맛나게 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내가 식사를 마치자 아내가 밥을 먹기 시작한다. ‘아내는 지금껏 내가 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면서 밥을 먹지 아니하였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낮에 처가에서 본 일을 회상하였다.
어제 이후 우리 부부 사이에는 무슨 벽이 있는 듯하던 것이 차차 없어져가고, 그 대신 상대에 대한 가엾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일어났다. 우리는 정겹게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장인 생신 잔치에서 처형 눈 위의 멍든 자국으로 옮겨 갔다.
처형의 남편이 밤낮으로 요리점과 기생집에 돌아다니다가 어떤 기생에게 미쳐 날뛰면서 집에만 오면 처형을 괴롭히고, 걸핏하면 폭력을 행사한다고 한다. 이번에도 별로 대단치 않은 일로 밥상을 던져 처형의 눈 위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것 보아! 돈푼이나 있으면 다 그렇게 되는 게야!”
“정말 그래요. 가난하게 살아도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지요.”
아내는 진심으로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아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만족을 느꼈고, 마치 무슨 승리자나 된 듯이 마음으로 우쭐거렸다. 그래서 남몰래,
‘맞아! 그렇고말고! 이렇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다.’
라고 다짐하였다.
4
이틀 뒤 해질 무렵에 처형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그때 나는 방 아랫목에 앉아 정신없이 무슨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비단옷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렸다. 방 윗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갔다.
“아이고, 형님 오셨어요!”
아내가 인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서 처형이 들어온다. 계집 하인이 무엇인가를 들고 뒤따라 들어온다.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처형도,
“그날 매우 고생하셨지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어째서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라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는 불쑥 계집 하인이 든 것을 빼앗더니 그 속에서 신문지로 싼 것을 끄집어낸다. 처형은 그것을 나의 아내에게 주며,
“내 신을 사면서 네 신도 한 켤레 샀다. 그날 네 신발이…”
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문다. 말하는 중에 처형은 곁눈으로 나를 힐끗 보았다.
“그것을 왜 또 사셨어요!”
해쓱한 얼굴에 반가운 빛을 띠며 아내가 고맙다는 뜻의 인사를 한다. 처형은 아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말을 계속한다.
“오늘 남편을 졸라서 돈 백 원을 받았지. 그래서 종로에 가서 옷감도 바꾸고 신도 사고 ….”
자랑과 기쁨의 빛을 얼굴에 번쩍이며 보자기를 푼 처형이,
“이것들이야!”
하고 우리 앞에 물건들을 펼쳐 놓는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쨌든 값이 비싸고 품질이 좋은 비단인 듯하다. 무늬 없는 것도 있고, 무늬 있는 것도 있다. 회색, 옥색, 초록색, 분홍색 비단들이 갖가지로 윤이 흐르며 색색으로 빛이 난다. 그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 황홀하였다. 칭찬하는 발언을 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참 좋은 것들인데요.”
하고 말하다가 문득 쓸쓸해졌다. ‘저것을 보는 아내의 마음은 지금 어떠할까?’
“좋은 것들로 골라 샀군요.”
아내의 말이다. 아내는 예의를 차리느라고 그렇게 칭찬하는 말은 하지만 별로 부러워하는 기색이 없다. 나는 그런 아내를 보며 조금은 ‘뜻밖이네’ 하는 느낌을 받았다.
처형은 자기 남편을 헐뜯는 말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내가,
“왜 벌써 가시려고 해요? 모처럼 오셨는데…. 반찬은 없지만 저녁을 드시고 가셔야지요.”
하고 만류하니, 처형이 두 손을 내저으면서 말한다.
“아니야. 저녁에 남편이 어디에 가야 하는데, 내가 그 전에 짐을 챙겨 놓아야 해. 그러니까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돼. 아직 차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정류소에는 서둘러 나가야지. 만일 차를 놓치면 남편이 얼마나 기다리겠니?”
여러 차례 붙들었지만 처형은 끝내 대문 밖으로 나가버린다. 우리는 그를 마중한 뒤 방에 들어왔다. 내가 웃으며 아내에게,
“그런 인간이 기다리는데 급하게 갈 까닭도 없지….”
라고 말하니, 아내는 하염없이 웃을 뿐이다.
“그래도 옷감 바꿀 돈을 준 남편이니, 그가 기다리는 것이 애처롭기는 하겠지.”
남편을 ‘밉다, 보기 싫다, 지저분하다’ 등등 여러 가지로 나쁘게 말했지만, 그래도 물질적으로 도움이 되면 그 생각을 잊고 기뻐하는 처형이 나는 가련하게 여겨졌다.
“참, 그런가 보아요.”
아내도 웃으며 내 말에 호응한다. 이때 아내는 처형이 사준 신을 싼 신문지가 눈에 띄었는지 (혹은 내 눈치를 보느라 보고 싶은 마음을 그 동안 참았는지 모르나) 그것을 조심조심 펼치려다가 다시 머뭇거린다. 신문지 속에 자신을 해롭게 할 무엇이 들어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서 펼쳐보구려.”
하고 권하자, 아내는 내 말을 듣더니,
‘아, 좋아라!’
하는 듯한 동작으로 신문지를 활발하게 풀어 젖힌다.
“정말 이뻐요!”
아내는 근래 들을 수 없었던 기쁜 목소리를 내면서, 신을 방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놓더니 버선을 당겨서 곱게 신어 본다.
“어쩌면 이렇게 딱 맞을까!”
연이어 감탄사를 토해내는 아내의 얼굴에 기쁜 빛깔이 넘쳐흐른다.
“…….”
아내의 기뻐하는 모습을 묵묵히 보면서 나는,
‘여자는 어쩔 수 없어!’
하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이어서,
‘지금까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뿐이야!’
하고 판단했다. 그러자 밤빛 같은 검은 그림자가 내 가슴을 어둡게 하였다.
아내는 아까 처형의 옷감을 볼 때에도 마음속으로는 무척 부러워하였을 것이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따름이다. 내가 ‘어서 펼쳐 보구려.” 하자 그제야 숨기고 있던 생각을 속임없이 나타낸 것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아내는 새 신을 신은 발을 위로 조금 들어 올리면서,
“신 모양이 어때요?”
하고 묻는다. 나는,
“매우 이뻐!”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겉으로는 좋은 듯 말했으나 내 마음은 몹시 쓸쓸하였다. 내가 아내에게 신 한 켤레를 사주지 못했고, 그런 까닭에 아내가 남에게서 얻은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구나 ….
그런데 어찐 된 일인지 이번에는 불쾌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형이 제 남편이 밉다면서도 그가 기다릴까 염려되어 급히 가던 모습이 생각난 것이다. 그것으로 미루어 아내의 마음도 알 수 있다. 부득이하기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정신적 행복에 만족하려고 애를 쓰지만 실제 생활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다. 다만 아내는 참고 있을 따름이다. 나는 그 점을 헤아려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아내에게 좋지 않은 말을 했던 일이 후회된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아내가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줄 날이 오겠지!’
나는 마음을 좀 너그럽게 먹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내를 보았다.
“나도 어서 출세를 해서 비단신 한 켤레쯤은 사주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
아내가 이런 말을 듣기는 참으로 처음이다.
“네에?”
아내는 제 귀를 못 미더워하는 듯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얼굴에 살짝 열기가 오르며,
“얼마 안 되어 그렇게 될 것이야요!”
라고 힘있게 말하였다.
“정말 그럴 것 같소?”
나는 약간 흥분하여 반문하였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아직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은 무명작가인 나를 아내 혼자서 깊이깊이 인정해 준다. 그러기에 물질에 대한 강한 본능적 요구도 참아 가며 오늘날까지 크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나를 도와 준 것이다.
‘아아, 나에게 위안을 주고 원조를 주는 천사여!’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으며 두 팔로 덥썩 아내의 허리를 잡아 내 가슴에 바싹 안았다. 그 다음 순간에는 뜨거운 두 입술이…….
아내의 눈에도 나의 눈에도 그렁그렁한 눈물이 물 끓듯 넘쳐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