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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22일 월요일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복음서 여러 곳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 아래와,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던 여인이며(마태 27,56.61 참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1-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의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서방 교회에 두루 퍼져 나갔다.
말씀의 초대
아가에서는 밤새도록 성읍과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이를 찾은 신부의 기쁨을 노래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고 하시며, 가서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이제는 더 이상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그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들음’을 통하여 힘을 드러냅니다. 특히 ‘들음’은 ‘착한 목자의 비유’(요한 10장 참조)에서 예수님의 양들이 가진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양들은 ‘들음’을 통하여 착한 목자와 깊은 일치의 관계를 맺습니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10,3-4).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가장 먼저 ‘들음’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에 참여하였어도 그분의 말씀이 들리지도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처럼 우리 믿음도 들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여 참으로 살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오늘 나는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생명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누군가를 깊이, 그리고 극진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생기게 되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와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연결되며, 일상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결국 그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고 그의 슬픔이 내 눈물이 됩니다.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그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됩니다.
일곱 마귀의 횡포로 인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걸어갔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런 진한 사랑 체험을 하게 됩니다. 내 인생이 이쯤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삶에서 그런 사랑, 그런 축복이라곤 꿈도 꾸지 못했는데, 그분의 등장으로 인해 뜻밖의 기적이 찾아온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고통스러울수 없는 큰 고통과 병고의 표현이 일곱입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부서질 것 없는 폐허가 곧 일곱입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봤었는데, 더이상 부드러울 수 없는 세상 자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셨습니다. 따뜻한 손을 내미시며 나를 죽음의 구렁에서 빼내주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삭막하고 혹독한 겨울 같은 인생이었는데, 그분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화사한 봄날로 급변했습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은 삶의 유일한 의미요 기쁨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그녀는 열두 제자들처럼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녀는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여사도로 거듭난 것입니다.
오늘 나는 과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새 삶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힘겨운 고통에 바닥에 퍼질러 앉아 울고 있다가도 내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힘을 얻고 일어서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살레시오 피정 센터 주관 프랑스 성모 성지 순례단 모집
우리 신앙 여정의 동반자이신 성모님의 친밀한 현존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2024년 9월 20일(금)~10월 1일(화) 총12일
순례 장소: 소화 데레사 성녀 고향 리지유, 퐁맹 성모 발현지, 예수 성심 발현지 파레르 모니알, 라쌀레트 성모 발현지, 루르드 성모 성지, 로카 마두르 검은 성모님 성지, 파리, 몽생미쉘 등
동반 사제: 살레시오회 이해동 라파엘 신부
*미국 포담 대학교 대학원 영성 상담 심리 전공, 웃음 치료 및 레크리에이션 전문가로 순례자들을 기쁨과 감동의 순례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우의 ‘인생예찬’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아라./ 인생은 한갓 헛된 꿈에 불과하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이어니/ 만물의 외양의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무덤이 그 종말이 될 수는 없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영혼에 대해 한 말은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향락도 아니요 슬픔도 아니다./ 저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길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우리의 심정은 튼튼하고 용감하나/ 싸맨 북소리처럼 둔탁하게/ 무덤 향한 장송곡으로 치고 있으니./ 이 세상 넓고 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노영 안에서/ 발 없이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죽은 채 매장하라!/ 활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느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치느니,/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우리가 떠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발자취를 남길 수가 있느니라./ 그 발자취는 뒷날에 다른 사람이,/ 장엄한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가/ 파선되어 버려진 형제가 보고/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될지니./ 우리 모두 일어나 일하지 않으려나./ 어떤 운명인들 이겨낼 용기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일하며 기다림을 배우지 않으려나.”
가슴을 뜨겁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롱펠로우의 삶은 그가 예찬한 것처럼 멋지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은 오랜 투병생활을 하다가 외롭게 숨졌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부엌에서 화재가 발생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롱펠로우의 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습니다. 임종을 앞둔 롱펠로우에게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숱한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당신의 작품에는 진한 인생의 향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롱펠로우는 마당의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저 나무는 매우 늙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단맛을 내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것은 늙은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돋기 때문입니다.’ 롱펠로우에게 힘을 준 것은 바로 부정이 아닌 긍정의 마인드였습니다. 인생은 환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을 고목(古木)으로 생각하는 사람과 고목의 새순으로 생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이 바로 인생의 새순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새로운 감정이 생깁니다. 우울한 생각을 하면 우울한 감정이 생깁니다. 감사의 생각을 품으면 감사할 일들이 계속 생깁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모두가 포기했을 때, 모두가 두려워 숨어 있을 때에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주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하여라. 나는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을 위한 사도’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옛것의 기준은 시간의 순서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나이가 아닙니다. 옛것의 기준은 부정과 불평 그리고 불만입니다. 새것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고난의 순간에도, 역경의 순간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두 새로운 피조물, 새것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그럼에도>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요한 20,1)
아직도
어두울 때에
그럼에도
빛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뿌열 때에
그럼에도
믿음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망설일 때에
그럼에도
희망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사릴 때에
그럼에도
사랑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직도
움츠릴 때에
그럼에도
살림의 사람은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y Magdalen)
신분 : 신약인물, 예수의 제자, 부인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마들렌, 막딸레나, 메리, 미리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묘사되었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마지막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으며(요한 19,25), 저녁때가 되어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요셉이란 이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실 때도 그 맞은쪽에 있었고(마태 27,61),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에 몇몇 여인과 함께 무덤으로 달려가 그리스도의 시신이 없음을 발견했으며(루카 24,3), 무덤 밖 동산에서 슬피 울고 있을 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부활하신 스승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사명을 받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복음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또 다른 마리아로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루카 7,36-50)와 성녀 마르타(Martha, 7월 29일)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 그리고 클레오파(Cleophas)의 아내 마리아(4월 9일)가 있다. 이 중에서 죄 많은 여자와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 인물인지 성경에 분명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방 교회 전통에서 오래 전부터, 특히 교황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604년) 이후로는 위의 두 마리아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서방 교회 전승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여인으로서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여겨왔다. 실제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모습의 성녀를 그림으로 많이 표현해왔다.
로마 순교록은 베타니아의 성녀 마리아를 예수님 부활의 첫 증인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중세 시대에 있었던 세 명의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 성 요한(Joannes)과 약혼한 사이로 나오기도 한다.
또 성령 강림 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 사도와 함께 에페수스(Ephesus)로 가서 전교하다가 그곳에 묻혔다고 전해온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오빠인 성 라자루스와 동료들과 함께 배를 타고 표류하다가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 도착해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 때 순교했다고도 한다.
2016년 6월 3일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의무 기념일을 축일로 승격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경신성사성 차관 아서 로시 대주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단히 사랑했고, 아울러 그분에게 사랑받은 이 여성의 중요성이 자비의 희년에 새롭게 조명되길 바란다.”며 “이 결정은 여성의 존엄성과 새로운 복음화, 그리고 하느님 자비의 위대함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라고 밝혔다.
이어 “성녀는 특히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 소식을 알림으로써 그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며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걷는 교회는 성녀의 이런 특별한 역할에 주목하고 전례를 통해 공경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성 필립보 에반스(Philip Evans).
활동년도 : 1645-1679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영국 웨일스(Wales) 남동부 지방의 만머스셔(Monmouthshire) 출신인 성 필리푸스 에반스(Philippus Evans, 또는 필립보)는 세인트오메르(Saint Omer)에서 교육을 받다가 20세 때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1675년에 벨기에 남동부 리에주(Liege)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남부 웨일스 지방의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가 글래모건(Glamorgan)의 스켈(Sker)에서 1678년 12월에 체포되었다.
그는 영국 왕을 국교의 최고 수장으로 모시고 교황권을 배격한다는 선서를 거부하여 카디프(Cardiff) 성에 투옥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성 요한 로이드(John Lloyd)를 만났다. 이 두 사람은 티투스 오츠(Titus Oates) 음모의 일환으로 체포되었으나, 그들의 공범 여부에 대한 증거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소되어 잉글랜드(England)에서 불법적으로 사제직을 수행한 죄로 카디프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요한 로이드(John Lloyd)
활동년도 : +1679년
신분 : 신부,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로이드,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영국 웨일스(Wales) 중동부 포이스(Powys) 출신의 성 요한 로이드(Joannes Lloyd)는 교구사제였다. 그는 에스파냐 바야돌리드(Valladolid)의 성 알바누스(Albanus) 왕립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1649년 선교사 서원을 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웨일스 지방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그는 1678년 11월 티투스 오츠(Titus Oates) 음모의 혼란 중에 글래모간셔(Glamorganshire)의 펠린(Penllyn)에서 체포되어 성 필리푸스 에반스(Philippus Evans)와 함께 웨일스의 카디프(Cardiff) 성에 투옥되었다.
그는 몇 달에 걸친 혹독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가톨릭 사제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다음 해 7월 22일 카디프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970년 10월 25일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스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