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70년대, 신성일 출연 영화 포스터 모음 (배경음악 : '64년 영화 맨발의 청춘 주제곡 최희준 노래)
신성일 (1937~2018)
신성일, 한 때 그 이름은 우리나라 영화의 그 상징 자체였습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전성기를 보내면서
수백편의 영화에 출연한 기록을 갖고 있는 배우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의 이름을 빼면 이야기가 안되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1937년에 태어나서 2018년 11월 4일 새벽에 운명하였으니 한국 나이로 82세, 고령의 나이였지만 100세 시대
를 맞이한 것을 감안하면 평소 건강하기로 알려진 신성일이었기에 지병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더 오래 살 수
있었고, 80세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의욕이 넘쳤던 상황이라서 그의 암투병과 죽음은 많은 영화인
들에게 깊은 애도를 받고 있습니다. 동 시대 활동했던 신영균(1928년생),남궁원(1934년생), 순재(1935년생)
등이 아직도 정정히 살아계시기 때문에 더욱 그렇죠.
배우, 신성일, 그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는 화려한 은막의 스타였지만 후대에 많이 평가절하되기도 합니다.
우선 여성편력이 심한 바람둥이 이미지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고, 다른 성우의 목소리도 주로 더빙한 영화가
대부분이라서 그의 연기력이 평가절하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수백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작기록은 오히려
배우로서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은 사실 시대적인 차이를 감안해서
평가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 이병헌 등 연기파 배우들이 득세하는 현재의 영화
계와 수평비교를 할 수는 없지요.
신성일 출연작중 대표적인 대흥행작 겨울여자와 별들의 고향
1960년대, 한국 영화는 굉장한 전성기를 이루었습니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대였지만 무엇보다 영화에 대한
사랑이 꽤 깊었던 시대였지요. 당연히 은막의 스타는 국민적인 우상이기도 했고, 서울인구 200만명에 불과
하던 시대에 연 1억명의 관객이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TV가 보급되기 전의 시대, 영화보기는 거의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서 지금의 드라마를 대체한 영화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편수
가 만들어졌고, 년 20-30편 넘게 출연하는 것은 예사였습니다. 몇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죠. 지금처럼 선수층이 넘치던 시대도 아니라서 당시의 한국 영화를 몇 편 보면 같은 배우가 중복
출연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연배우 뿐만 아니라 조연배우들도 많이 부족했던 시대였으니. 박암, 허장강,
최남현, 한은진 그런 배우들을 만나는 것은 60년대 한국 영화 몇 편만 뒤지면 그들의 얼굴을 여러 편에서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60년대에 신성일은 별중의 별 같은 존재였습니다. 60년대 영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자배우로서는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년 수십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도 달라질 정도였기 때문에 앞다투어 그를 출연시키려고 경쟁이 붙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출연한 영
화편수는 현재 KMDB 사이트의 숫자만 무려 524편이라서 실제로는 거의 600여편에 도달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1967년에만 47편 출연, 1968년에만 46편 출연했을 정도로 전성기 시절에 출연한 편수는 가히 엄청난 숫자입
니다. 물론 그의 출연작품 중에서 필름이 존재하지 않는 작품이 훨씬 더 많지만 그나마도 그는 최고의 스타
였기 때문에 아직도 보관중인 출연작 필름이 대략 150여편 정도는 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은 우리나라 60-70년대 영화사의 중대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1964년 11월 동료 여배우 엄앵란과 결혼
다작출연시대 매일 매일 촬영을 하고 여러 작품에 겹치기 출연을 하는 시대에 모든 작품에 집중해서 연기하기
는 어려웠을 것이고, 더구나 그 시대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어서 모든 영화가 후시녹음을 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촬영을 먼저 하고 장면을 보며 후시녹음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영화제작 방식이었고, 이건 70년대 후
반까지 그런 시스템이었습니다. 최불암, 이순재, 이낙훈 등 자기 목소리로 직접 더빙하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신성일의 경우는 경상도 사투리가 핸디캡이 되었는지 전담 성우의 목소리로 더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건 남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김지미도 그랬죠. 유명스타 중 대표적인 성우더빙 배우들 3인입니다.)
후에 신성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근사한 음성을 지녀서 오히려 직접 더빙을 했어도 괜찮았을 거라
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는 꽤 구수한 목소리와 상당한 입담을 지닌 인물입니다. 시대를 다르게 만났다면 근사
한 목소리 연기가 충분히 가능했을 인물입니다. (그건 남궁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자기 목소리로
연기한 후기 영화들에서 그는 무난한 음성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당시의 영화들을 보면 정말 눈뜨고 못봐주겠는 졸작들도 많았지만 그 와중에 배우들이 꽤 집중을 하고 촬영한
것이 느껴지는 썩 볼만한 수작들도 많았습니다. 60년대 영화들이 오히려 스크린 쿼터 따내기 위해서 의무제작
을 무성의하게 하거나 에로영화 위주로 제작하던 80년대 영화들보다 훨씬 우수하고 볼만하다는 것은 한국고전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다작 배우인 신성일의 경우에도 정말 범작인 영화들이 꽤 많지
만 제법 볼만한 괜찮은 영화들도 꽤 있습니다. 그가 신상옥, 김수용, 이성구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감독들과
꽤 많이 작업을 했으니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강명화(67)' '안개(67)' '내시(68)' '청춘극장(67)' '김약국의
딸들(63)' '태백산맥(75)' '왕십리(76)' 등의 영화들이 그런 작품들이고, 그런 작품들은 오히려 그가 출연한
대흥행작들인 '별들의 고향(74)' '겨울여자(77)' 등 보다 더 우수한 작품들입니다.
내시(68)에서 윤정희와 공연장면
강명화(67)에서 이낙훈(우측에서 2번째), 윤정희(맨 우측)와 함께
그는 1960년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를 통해서 영화계에 얼굴을 비추었고, 이후 단기간에 스타덤에
오르며 60년대를 지배하는 간판 남자배우가 되었습니다. '로맨스 빠빠'는 그를 영화에 출연시켜 알린 작품
이기도 했고, 그의 배우자가 된 엄앵란과 함께 공연한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에도 '청춘교실(63)'
'맨발의 청춘(64) 등 여러 영화에서 공연을 했고, 1964년 11월 워커힐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려 부부가 되었
습니다. 당시로서는 톱스타 커플의 결혼으로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것은 당연합니다.
아시다시피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결혼생활을 그다지 순탄치 못했습니다. 그건 신성일의 지나친 여성편력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남자였던 신성일은 결혼 이후에도 수많은 여성들과 불륜을 벌였고,
엄앵란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을지는 뭐 짐작이 갈 정도입니다. 훗날 신성일은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를 마치
자랑하듯이 떠들었을 정도니.....
사실 두 사람의 결혼이 순탄치 못한 것은 예고된 사실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엄앵란도 나름 톱스타였지만 신성일
의 위상과 비교될 레벨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신성일은 60년대의 독보적인 원톱 남자배우였고, 그를 따라갈
인기를 누린 배우 자체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연예계 스타의 인기위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
었고, 한 때 신성일은 한국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연예인 순위에서도 1위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서 엄앵란은 주연과 조연을 오가는 배우였고, 배우로서의 인기는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는
김지미, 최은희, 조미령 등 보다 확실히 아래였고, 60년대 중후반은 윤정희, 문희, 남정임 트로이카에 훨씬
밑돌았습니다. 그리고 나이도 신성일보다 연상이었고. 물론 배우로서의 레벨이 불륜을 용납하는 이유가 될 수
야 당연히 없지만 자유로운 영혼 신성일을 엄앵란의 품속에 가두어 놓기에는 확실히 당시 신성일의 위상이나
성향을 보면 무리였습니다.
그럼에도 엄앵란은 평생 신성일과 이혼을 안하고 아내로서 꿋꿋하게 살았고, 그의 죽음까지 함께 동지로서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상당한 멘탈을 가진 여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성으로서 아내로서, 어쩌면 신성일
이라는 한국이 낳은 독보적 스타와 결혼함으로서 겪어야 할 고초를 기꺼이 받아들인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