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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한반도 한국의 비밀(7-2)
(가’) 조선의 임금은 여일인(予一人), 여소자(予小子)라는 천자(天子)의 호칭을 사용했다.
-계곡선생집 제9권 제문(祭文) 42수(首), 순조 9년 기사(1809,가경 14) 11월26일 (임오), 태조 7년 무인(1398,홍무 31) 9월12일 (갑신), 태종 4년 갑신(1404,영락 2) 11월16일 (갑인), 단종 2년 갑술(1454,경태 5) 2월13일 (갑오),
예종 1년 기축(1469,성화 5) 5월20일 (계묘), 성종 2년 신묘(1471,성화 7) 3월27일 (경자), 연산군 1년 을묘(1495,홍치 8) 6월2일 (계축), 중종 11년 병자(1516,정덕 11) 12월22일 (무진), 선조 1년 무진(1568,융경 2) 2월25일 (을사),
효종 10년 기해(1659,순치 16) 윤 3월10일 (경오),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순치 17) 1월3일 (기미), 숙종 7년 신유(1681,강희 20) 10월27일 (병오), 경종 2년 임인(1722,강희 61) 9월21일 (계묘),
영조 15년 기미(1739,건륭 4) 5월6일 (신해) , 정조 2년 무술(1778,건륭 43) 1월12일 (계유), 순조 1년 신유(1801,가경 6) 7월4일 (무인), 헌종 4년 무술(1838,도광 18) 2월13일 (을묘), 철종 1년 경술(1850,도광 30) 2월1일 (갑자)
-백호전서 제39권 잡저(雜著) 독서기(讀書記) 효경외전 하(孝經外傳下) 명기편(名器篇)에 ‘천하에 임금이 된 이를 천자(天子)라 하니, 제후(諸侯)로부터 조회를 받고 직책을 나누어 주며, 정사를 주고 일을 맡기며, ‘한 사람[予一人]’이라고 한다. 이는 다 빈자(擯者)가 하는 말이다. 천하란 밖으로 사해(四海)까지 미치는 지역 모두를 말한다. 한(漢)에서는 만이(蠻夷)에 대하여는 천자라고 칭하고, 왕후(王侯)에 대하여는 황제(皇帝)라고 칭하며, 근례(覲禮)에는, ‘백부(伯父)는 이리 오시오. 나 일인이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여(予)는 여(余)의 고자(古字)이다. 천자가 상을 벗기 전에는 ‘나 소자(小子)’라고 하고 살아서도 이름, 죽어서도 이름을 부른다. 살아서는 이름을 불러 소자왕(小子王)이라고 하고, 죽어서도 소자왕이라고 한다. 진(晉)에 소자후(小子侯)가 있는 것은 천자 호칭을 참람되게 칭한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일인(予一人)과 여소자(予小子)가 원래 무엇인지
언급하고 있는 기록은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이다.
문종실록의 기록에서는 ‘여소자’(予小子) 이 3자(字)가 바로 군상(君上)의 칭호라 했다.
즉 여소자(予小子)의 의미는 백호전서의 기록처럼 천자(天子)를 의미이다.
이는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도 동일하다.
또 백호전서의 기록에서 여일인(予一人)은 천자가 제후(諸侯)로부터 조회를 받고
직책을 나누어 주며, 정사를 주고 일을 맡기며 자기 스스로를 자칭하기를
여일인(予一人)이라 했다. 이 역시 예기(禮記) 곡례하편(曲禮下篇)의 기록이다.
이처럼 조선의 임금은 당대의 천자(天子)였던 것이다.
(나’) 조선의 임금은 천자(天子)가 제후(諸侯)에게 하사하는 동궁(彤弓)을 하사했다
-세조 4년 무인(1458,천순 2) 2월12일(신축), 세조 6년 경진(1460,천순 4) 11월11일(계미), 성종 8년 정유(1477,성화 13) 11월2일(을축), 태종 5년 을유(1405,영락 3) 6월27일(신묘).
-(네이버 백과사전) 시경(詩經) 소아(小雅) 동궁편(彤弓篇)의 주석(註釋)에 따르면 ‘적궁(赤弓).주궁(朱弓)이라 하였는데 색깔을 붉게 칠하여 장식한 활이다. 소(疏)에 따르면 옛날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정벌(征伐)의 공(功)이 있거나, 여타의 유공(有功)이 있는 제후(諸侯)에게 하사하였으며[天子賜有功諸侯 諸侯有征伐之功 王以弓矢賜之也], 천자나 제후만이 사용한 활이었다고 하는데 전쟁에 나갈 때에만 지니고 나갔다.’고 한다.
정조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의 기록 동궁지십편에서
‘천자가 공이 있는 제후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활과 화살을 하사한 것이다.’라고 했다.
세조실록 4년 윤자운(尹子雲)의 시에서 자신이 ‘동궁’(彤弓)을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세조실록 6년의 기록에서 신숙주가, 성종실록의 기록에서는 허종,
태종실록에서는 조준이 조선 태조에게 ‘동궁’(彤弓)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동궁’(彤弓)은 천자와 제후의 전유물이었으며 제후에게 있어 동궁(彤弓)은
천자에게 받은 공훈에 따른 포상인 것이다.
임금의 저작인 홍재전서에서도 동궁(彤弓)의 의미는 천자가 공 있는 제후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조선의 임금들은 신하에게
동궁(彤弓)을 하사했다. 정말 조선이 제후국이었다면 일개의 제후가 천자를 흉내 내어
천자의 행위를 한다는 것은 소중화가 아닌 유교적인 질서를 문란케 한 반역행위이다.
조선이 천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고려(高麗)를 황제국(皇帝國)이라 했다
-세종 23년 신유(1441,정통 6) 윤 11월9일(임신)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고려가)만승천자(萬乘天子)로서 지존(至尊)의 자리를 스스로
가볍게 하여...’라고 기록하고 있다. 원문에서는 ‘萬乘自輕至尊’을 만승(萬乘)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만승은 ‘만대의 병거’(兵車)라는 뜻으로 천자(天子)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해서 만승천자(萬乘天子)라고도 말한다.
또한 천자의 신하인 제후는 천승(千乘)이라 한다.
고려가 다른 나라에 조공을 바치다 세월 보내던 나라였다면 고려에 대해 천승(千乘)이라
기록해야 마땅하다.
(라’) 중원 대륙의 역사는 조선의 역사였다
-홍재전서 제173권 일득록(日得錄) 13 인물(人物) 3
-홍재전서는 정조 임금의 저작이다.
기록에서 ‘서씨(徐氏) 성을 가진 사람으로 현달한 경우는 우리나라만 한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 일례로 한(漢), 오(吳), 남송(南宋), 북제(北齊), 원위(元魏), 수(隨)대의
서 씨들을 열거하고 있다. 즉 정조 임금 당대의 역사관은 대륙의 그 수많은 왕조가
남의 나라의 역사가 아닌 조선의 역사라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한(漢), 오(吳), 남송(南宋), 북제(北齊)원위(元魏), 수(隨)대의 서 씨들이 남의
나라 역사라면 장황하게 열거할 필요가 없으며 적어도 고려조의 서 씨들을 열거해야
이치적으로 타당 하다.
(마’) 명조(明朝)황실의 계보는 조선이 관리 하였다
-세종 10년 무신(1428,선덕 3) 10월24일 (임인)
-세종실록에서 ‘옛날 진(秦), 한(漢)의 종정(宗正), 종백(宗伯)이란 관직의 직책은
황족의 명적과 황족에 대한 규찰에 대한 일을 하는 직책이다.’라고 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역사에서 조선은 제후국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조선의 종부시(宗簿寺)라는 직책은 곧 황제국에 있었던 종정
벼슬과 같다고 한다. 그것도 송나라의 종정시와 수옥첩관·대종정사를 합하여
하나로 만든 것이라 했다.
조선은 일개의 제후국인데 천자국 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조선이 하고 있다.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가 하는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역할은 황제국=천자국에 관한 역할들로 제후국에서
관심을 둘 영역이 아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가 하는
역할을 설명하면서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이러한 설명과 더불어
‘황제의 옥첩은 10년에 한 번씩 바치고, 종친선원적경도(宗親仙源積慶圖)와
종번경서록(宗藩慶緖錄)은 매년 써서 용도(龍圖)·천장(天章)·보문각(寶文閣)으로
보냈다.’라는 부연 설명을 달고 있다.
황제의 옥첩을 관리하는 사람은 소종백(小宗伯)=종백(宗伯)=종정(宗正)=종정시(宗正寺)로
이들은 황제와 친족관계에 있는 황족들이다.
조선과 명은 별개의 나라이고 명은 황제국인데 어찌하여 명나라 황제의
옥첩(황실의 계보)을 조선이 바친단 말인가? 명나라가 천자국이라면 황제의
옥첩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명나라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바’) 조선의 제주도는 현재의 제주도가 아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8권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미수기언 제48권 속집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제주도에서 영릉향(零陵香)이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의하면 영릉향(零陵香)이 바질(basil)이라고 한다.
네이버 백과를 보면 바질의 원산지는 열대 아시아이다.
또 위의 미수기언의 기록에서 제주도에서 산출되는 과실 중에 등자(橙子)와
감자(柑子)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등자(橙子)란 오렌지(orange)를 의미 한다.
네이버 백과를 보면 오렌지의 원산지가 인도라고 되어 있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원산지 아시아 열대지역에서 인도,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또 위의 기록에서 감자(柑子)는 귤 종류와 유사한 과일이다.
중국의 인터넷을 통해서 보니 감자(柑子)는 만다린 오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감자(柑子)를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한국산 만다린은 1911년 일본에서
미온장주 15그루를 들여오면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미수기언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1911년보다 훨씬 이전인
1600년대 약 300년 전에 제주도에 이미 만다린 오렌지가 있었다.
즉 현재의 제주도는 역사에서 말하는 제주도가 아니라는 증거 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등자(橙子)=오렌지(orange)와 영릉향(零陵香)=바질(basil)은
현재의 제주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산물이다. 이뿐이겠는가? 위의 기록에서
제주도에서 두충(杜冲)이 산출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경희 한의대 교수 안덕균은
‘두충(杜沖)이라는 것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우리나라에 심기 시작한 것은 100년 정도
되고 본격적으로 재배된 것은 한 삼십년 정도 된다.’라고 말한다.
‘(주)계림조경자재’라는 사이트에 ‘환경조경신문’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기사에서
국내에 식재된 모든 두충(杜沖)나무의 모수 2본이 1920년대 중국에서 도입된 이래로
홍릉수목원에 있다고 한다. 현재 한국의 두충(杜冲)의 재배 역사를 살펴보면 역시
현재의 제주도는 역사에서 말하는 제주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뿐 이겠는가? 탐라지역의 산물 중에 지네와 향서(香鼠)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지네는 산출 되지만 향서(香鼠) 즉 사향뒤쥐는 산출 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서 지네에 관한 기록과 사향뒤쥐에 관한 기록은 황당하다.
지네가 1자 넘는 것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열대지방의 왕지네목은 가장 큰 순각류를 포함하는데, 동인도제도의 대왕지네는 길이가 280㎜에 달한다. 왕지네류는 심하게 물 수가 있고, 땅지네류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느린 파동운동을 한다. 작은 돌지네류(돌지네목)는 몸이 짧은데, 집그리마류와 함께 가장 빨리 움직이는 순각류이며 몸을 곧게 유지하면서 달린다. 한국에는 왕지네목·땅지네목·돌지네목·그리마목에 속하는 9과(科) 40여 종(種)의 순각류가 알려져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동인도 제도의 대왕지네이다.
열대지방의 대왕지네가 지네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특히 동인도 제도의 대왕지네의 길이가 28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미수기언에서는 제주 즉 탐라 지역의 지네가 1자(약 30cm) 넘는 것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탐라의 지네는 열대지방의 지네류와 같은 지네류였던 것이다.
송대(宋代) 주거비(周去非)의 저작인 ‘영외대답’은 대륙의 광서지역과 더불어
안남, 점성, 삼불제, 조와국, 파사, 여인국 등에 관한 역사, 지리, 풍속, 물산, 등
인문에 관한 기록이다. 권9 금수문(禽獸門)에 향서(香鼠) 즉 사향뒤쥐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사향 뒤쥐는 넓게 보면 광서지역과 더불어 안남, 점성, 삼불제,
조와국, 파사, 여인국 등에 서식하고 있는 금수임을 알 수 있다.
또 파란 백과사전을 보면,
"식충목 뒤쥐과의 작은 포유동물. 몸길이 11∼15㎝, 꼬리길이 6.5∼8㎝, 몸무게 약 80g. 몸의 형태는 땃쥐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크고 실팍하게 생겼다. 몸의 색깔은 연한 갈색이다. 주둥이는 뾰족하며, 귀는 크고 거의 털이 나지 않는다. 꼬리에는 긴 털이 드문드문 나 있다. 야생형과 인가주변에 사는 가주형(家住型)이 있다. 한국에 사는 것은 배에 실려 들어온 귀화동물이며, 가주형이다. 수컷의 옆구리에는 측선(側毛)이 있어 사향과 비슷한 강한 냄새를 풍긴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는 차례로 꼬리의 밑동을 물고, 일렬로 줄지어 걷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 중국·인도·동남아시아 등에 분포한다."
또 다른 백과사전 등을 보면 대체적으로 사향뒤쥐의 원산지는 인도라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탐라의 1척이나 되는 거대 지네와 사향뒤쥐를 참조해 보면 적어도
탐라의 위치는 동남아시아나 인도 지역이다.
(사’) 조선의 북쪽에 달단(韃靼)이 있었으며 동유럽의 경계에 있었다.
(아’) 조선의 역사에 나오는 옥저는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초류(草類), 성호사설 제1권 천지문(天地門) 여국(女國), 해국도지(海國圖志) 券 31, 연경제전집 외집 58 필기류 난실담총 차한일기
태조 1권 총서 69번째기사, 세조 26권, 7년(1461 신사 / 명 천순(天順) 5년) 11월 9일(을사), 성종 12년 신축(1481, 성화 17) 10월 17일(무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61권 본조(本朝)의 비어고(備禦考) 1 왜적(倭賊)을 막은 데 대한 시말(始末) 1
후한서(後漢書) 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
-달단은 어떤 종족을 말하는 것일까?
현재의 역사에서 ‘달단은 북원국(北元國)을 세워 달단(韃靼)이라 불린 데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 몽고 전체의 이름이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으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달단(韃靼)이란 종족명은 북원국(北元國) 성립 이전에 사용된 용어였다.
고려의 학자인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전집 제34권의 기록을 보면 그 당대에 이미
달단(韃靼)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달단(韃靼)은 몽고이며 북원국이었던
것이다. 이 달단(韃靼)이란 민족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던 종족일까?
성호사설에서 직방외기(職方外紀)를 인용하면서 역사에서 말하는 여인국을 설명하는데
이 여인국은 달단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을
것 이라 했다.
해국도지의 기록은 중국의 서북쪽이 동유럽과 달단에 접해 있다고 했다.
또 연경제전집의 기록에는, 흑룡강의 북쪽이 서쪽으로 유럽지역에 접해 있다고 했다.
즉 달단은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달단이 몽고이며 북원국이었다. 후한서에서 여인국 관련 기록이 있는데 이 여인국
인근에 옥저(沃沮)가 있었다고 했다.
역사의 기록에서 달단의 인근 지역에 여인국이 있다고 했다.
달단이나 여인국이나 동유럽 경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인국과 관련된 옥저(沃沮)
역시 동유럽 경계에 있었던 것이다.
고대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궁시(弓矢)와 기마(騎馬)에 뛰어난
용맹무쌍한 ‘여인군단’에 대해 언급했다. 성호사설에서는 여국이 구라파와 아세아의
경계 지역에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헤로도토스는 흑해 근처에 여국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가 있다.
이 나라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플로스치케’라는 바위 동굴도시가 있는데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들었다고 한다. 최대 5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동굴도시라 한다.
그루지아라는 나라를 보자.
위키백과에 유럽어 명칭 '조지아'는 페르시아어-아랍어로 조지아인(gurğ, ğurğ)을
이르는 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말이 서유럽 십자군과 성지 순례자들에게 전해져서
'조지아'(또는 Jorgania, Giorginia)가 되었으며,
이름의 기원이 조지아인들이 숭상하는 성 게오르기오스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장 카르댕 같은 사람들이 퍼뜨린 다른 설명으로 '조지아'를 의미상 그리스어나
라틴어 낱말인 '게오르고스'(γεωργός, '농부'), '게오르기쿠스'(Georgicus, '농업의')와
연결 짓는 설도 있다. 이들은 '게오르기'(Georgi)를 언급하는데 이는 그저 농경 부족을
일컫는 말로, 이들이 정착하지 않은 판티카페아 강 건너편(타우리카)의 전원적인
이웃 부족과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19세기에 학자들은 이러한 유럽어 기원설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한다.
마리펠리시테 브로세는 조지아란 이름이 Kuros-Cyrus-Kura-Djurzan를 통해
므트크바리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조지아'는
신페르시아어 gurğ/gurğān에서 비롯된 시리아어 gurz-ān/gurz-iyān과
아랍어 ĵurĵan/ĵurzan을 11세기나 12세기에 차용한 말로 보이며,
신페르시아어 낱말 자체는 고대 이란어와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원을 알 수 없는
vrkān/waručān에서 나온듯한데 이 말은 동부 트란스카스피의 지명
고르간(Gorgan, 중세 페르시아어로 '늑대들의 땅'을 뜻하는 varkâna에서 나온 말)과
비슷하다. 이 말은 옛 아르메니아어 Virk' (Վիրք)와 어원이 같은 듯 하며,
그리스-로마식 표기인 이베리(Ἴβηρες, 이베리아 반도의 이베리아인)의 기원일
수도 있다.
러시아어 타칭 지명인 '그루지야'(Грузия)도 페르시아어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은 1389년 이그나티 스몰냐닌의 여행 기록에서는 구르지(гурзи)로,
1466~1472년의 아파나시 니키틴의 기록에서는
'구르진스카야 젬랴'(Гурзыньская земля, '구르진 땅')이라고 나온다.
이 러시아어 표기는 현대 히브리어 '그루지아'(גרוזיה)로 전해졌다.
이 낱말은 '게오르기아'(גאורגיה)와 '구르지아'(גורג'יה)와 같이 쓰였으나,
1970년대에 '그루지아'가 대세가 되는데, 아마도 당시 2개 언어를 구사하는
조지아-러시아 유대인들이 대량 이주한 것 때문인 듯하다.
2005년 8월에 주이스라엘 조지아 대사 라샤 즈바니아는 히브리어 구사자들에게
'구르지야' 대신 '게오르기아'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또 2009년 12월, 조지아 정부는 리투아니아에 '그루지야'(Gruzija) 대신
'게오르기야'(lang|lt|Georgija)로 불러줄 것을 공식 요청하였고,
이 요청은 리투아니아어 위원회에 전달되었다.
위의 위키백과에서 말하는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의 국호(國號)의 기원설이
아주 복잡함을 알 수 있다.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북옥저가 있는데 일명 치구루인데 남옥저와의 거리가 팔백여 리나 된다. 그들의 풍속은 모두 남쪽 지방과 같다. 국경은 남쪽으로 읍루와 접해 있다. 읍루 사람은 배 타고 도둑질하기를 좋아하니 북옥저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바위틈에 숨어 있다가 겨울이 되어 배가 통하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부락으로 나온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대의 옥저인들은 읍루인들의 노략질을 피해 여름에 바위에 집을 짓고 있다가
겨울이면 나온다고 했는데 일컬어 ‘치구루’라 했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 ‘溝婁者高麗城名也’(구루라는것은 고구려의 성곽을 말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그루지아(Georgia)라는 나라에 ‘우플로스치케’라는 바위
동굴도시가 있다. 고대에 그루지아(Georgia)인들이 살던 유적지이다.
역사적으로 달단이나 여인국이나 동유럽 경계에 있었고, 흑해 인근의 여인국과
관련된 옥저(沃沮) 역시 동유럽 경계에 있었으므로 구루(溝婁)라는 별칭의 옥저(沃沮)가
그루지아(Georgia) 나라의 국가명의 기원으로 본다.
또한 구루(溝婁)가 자치통감에서 고구려의 성곽을 말한다고 했다.
이 구루(溝婁)가 오늘날 한국어 "동굴"의 "굴"에서 온 말이 아닐까?
즉 구루(溝婁)는 동굴로 이루어진 성곽 혹은 동굴로 이루어진 도시로 보이며 이것이
오늘날 그루지아(Georgia) 나라의 국가명의 기원의 어원이자 기원으로 판단된다.
(자’) 흑룡강은 감숙성에 있었으며 흑룡강의 발원지는 백두산이다.
(차’) 흑룡강은 백야현상이 일어나는 지역이다.
(카’) 흑룡강 인근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다.
문헌-심전고(心田稿)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거등만록(車燈漫錄), 만기요람 군정편 5(軍政編五) 백두산 정계(白頭山定界) 홍세태 백두산기(洪世泰白頭山記),
해봉집(海峯集) 권지(券之)2 칠언사운(七言四韻) 안변가학루운(安邊駕鶴樓韻),사가시집 제21권 시류(詩類) 또 길성 김 태수의 시에 답하다 2수,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외집권58 필기류,난실담총(筆記類,蘭室譚叢),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지56 초사담헌삼(草榭談獻三),임하필기(林下筆記) 제39권 이역죽지사(異域竹枝詞) 아라사국(俄羅斯國), 계산기정 제5권 부록(附錄) 호번(胡藩), 심전고 제2권 유관잡록(留館雜錄) 제국(諸國),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 권지12 잡저(雜著) 자집고이의(子集考異議),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홍재전서(弘齋全書) 제116권 경사강의(經史講義) 53, 강목(綱目) 7 [당 태종(唐太宗)],
청장관전서 제58권 앙엽기 5(盎葉記五) 황하(黃河)의 진원(眞源), 흑룡강여도설(黑龍江輿圖說), 연경제전집 외집 58 필기류 난실담총 차한일기, 네르친스크 조약 尼布楚條約 (漢文界碑)
-역사에서 말하는 흑수(黑水)는 흑룡강(黑龍江)을 말한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의 기록에 의하면 흑룡강(黑龍江)의 옛 이름은 흑수(黑水)라
기록하고 있으며, 청(淸)나라의 학자인 효람(曉嵐) 기윤(紀昀)은
흑수(黑水=흑룡강(黑龍江)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네이버 백과에 의하면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은
‘최상류부의 오논강은 몽골고원 북부에서 발원하여 야블로노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실카강과 합류하며 이어서 우안에서 아르군강을 합쳐 블라고베셴스크 부근에서 좌완으로부터 재야강이 합류한다.’고 했다.
그런데 역사에서의 흑룡강은 감숙성 지역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에서 감숙성에는 흑룡강이 없다. 또한 현재의 역사에서 흑룡강이 있는
지역은 감숙성 지역이 아닌 전혀 엉뚱한 극동지역에 있다.
만기요람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만기요람의 기록에서 백두산은 조선의 북쪽 국경에서 불과 300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계절이 여름인데도 ‘얼음과 눈이 쌓여서 바라보면
아득한 하나의 은 바다를 이루었다.’라고 했다. 과연 현재의 백두산이 이러한가?
또한 흑룡강의 수원지가 백두산이므로 조선의 강역이 감숙성에 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위의 사가시집의 기록과 위의 해봉집(海峯集)의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다.
조선의 철령이 감숙성 지역의 흑룡강에 접해 있었으며 또한 그 지역에 감숙성에
있었던 옥문관이 있었으며, 총령 지역에 있었던 천산(天山)은 조선의 철령과
이웃해 있으며, 조선의 강역이 서역의 서융과 접해 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조선의 서북방계는 감숙성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오늘날의 감숙성이 아니라
지금의 코카사스=카프카스 산맥일대가 진정한 감숙성 지역이자 조선의
서북경계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일어났던 라선정벌은 오늘날의 흑룡강이 아닌 코카사스 산맥과 관련된
흑룡강 일대에서 벌어진 사건들 이었던 것이다.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은 조선의 학자인 성해응의 저작이며, 임하필기는 조선의
학자인 이유원의 저작이다. 연경제전집, 임하필기, 계산기정, 심전고의 기록을 보면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한(漢)나라 때의 견곤(堅昆)부족과 정령(丁令)부족이었고,
당(唐)나라 때의 힐알사(黠戛斯)부족 또는 골리간(骨利幹)부족이었으며,
원(元)나라 때의 아라사(阿羅思) 및 길리길사(吉利吉斯) 등의 부족이었던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연경제전집에서는 구체적으로 러시아민족이 북극지역에 살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북극지역이 흑룡강의 아극살 지역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차한 또는 라선이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산기정에서도 악라사 즉 러시아라는 나라는 흑룡강 북쪽에 위치해 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심전고에서도 러시아=악라사가 흑룡강의 북쪽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고,
황당하게도 중국에서 2만 여리 떨어져 있다고 기록했다. 왜 황당한 기록일까?
위의 기록을 현재의 상황에 대입하여 보면, 현재의 역사판도에서 청나라의 수도였다는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가 2만 여리가 된다는 기록인데,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현재의 북경에서 감숙성까지의 거리는 2만 리가 아닌 수
천리에 불과 하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분명히 흑룡강=흑수는 감숙성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 감숙성 흑룡강의 북쪽에 러시아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러시아 민족이 사는 지역은 북극지역으로서 흑룡강 북쪽
아극살성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러시아 민족의 터전은 위의 기록처럼 북극지역이다.
또한 현재의 러시아 민족의 터전을 기준으로 보면 흑룡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곤륜산과 총령이 현재의 코카사스=카프카스 산맥일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위의 기록들처럼 러시아 민족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살던 지역에 특이한 자연적인 환경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이형상의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이 사는 곳은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
(其地晝長夜短。夜不甚暗)의 기록처럼 ‘백야’(白夜)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다.
백야현상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문헌은 ‘신당서’(新唐書)이다.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의 기록처럼 당나라 때 당 태종이 골리간 지역에 이르러
견곤도독부를 설치했다고 했다. 고문헌에서 이 지역의 백야현상에 대해 비유하여
시문(詩文)등에서 주로 세월이 빨리 흘러가는 것을 표현하는 기록이 참으로 많다.
위의 기록을 보면 ‘해가 넘어가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하여 다 익을 때쯤이면 해가
다시 뜬다.’는 기록을 생각해 보면, 고기를 삶아 익힐 때 까지 불과 몇 시간
정도에 불과 한데 벌써 해가 뜬다는 기록으로 그 만큼 밤이 짧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골리간 지역은 밤도 어둡지 않다고 한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도 골리간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가 되면 순전히
낮만 계속되는 시기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산시문집의 기록에서는 북쪽의
골리간(骨利幹)지역이 완연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대왕의 저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도 백야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홍재전서에서도 백야현상 관련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일부 인용했고,
당나라에 온 골리간(骨利幹)의 사신이 ‘당 나라에는 밤이 40각(刻)이라는 말을 듣고
얼토당토않은 말이라고 하며 비웃었으니.’라는 기록은 골리간 지역에 백야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문헌적으로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을 통해 흑룡강 골리간(骨利幹)
지역의 백야현상을 알게 되었겠지만,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던 계기는 조선과
청(淸)에 의한 ‘라선정벌’이다.
성호사설에서 나선정벌에 대한 기록인 ‘차한일기’를 기록했는데, 그 기록을 보면,
‘효종(孝宗) 9년에 중국(中國 청淸)이 우리에게 군사를 동원하여 중국을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
그리고 조선 군대의 이동경로를 보면,
‘무술년 봄 3월 1일에는 두만강(豆滿江)을... 19일에 영고탑(靈古塔)에 당도하였다... 6월 5일에 배를 출발하여 10일에 흑룡강에 도착하였다...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하였다.’ 이 기록의 달과 날짜를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6∼7월이므로
고문헌의 기록들이 음력에 의한 기록일지라도 12월 15일에 두만강에 도착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 지역의 백야현상을 생생히 목격했고, 신당서(新唐書)라는
고문헌 등과 목격한 기록 등을 통해서 병와선생문집(甁窩先生文集)등에서
‘그 땅은 낮이 길고 밤이 짧다. 밤에도 어둡지 않다.’라는 백야현상에 관련된
기록들을 남긴 것이다.
역사상의 기록에서는 감숙성 흑룡강 지역은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곳이다.
네이버 지식을 보면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스웨덴 지역 등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에서는 러시아 민족은 감숙성
흑룡강 일대에 살았고 그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에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현재의 감숙성 지역은 백야현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지역이다. 즉 백야현상이 그것도 ‘다산시문집’의 기록처럼 완연히 나타나는 지역이
총령과 곤륜산이 관련된 감숙성 흑룡강 일대이므로 가장 부합한 지역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가까운 코카사스 산맥 밖에 없다.
역사상의 진정한 총령은 코카사스 산맥이었던 것이다.
연경제전집의 기록엔 네르친스크 조약의 결과 대흥안산=흥안령이 청조와 러시아의
경계가 되었으며 이 일대에 흐르는 강은 격이필제하(格爾必齊河)이며 이 지역은
흑룡강의 북쪽 경계로 서쪽으로 서양(西洋)에 접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청조(淸朝)의 학자 도기(屠寄)의 기록인 흑룡강여도설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그 주변에 흥안령(興安嶺)이 있으며 그 흥안령의 한 산맥이
아륵탄산(阿勒坦山)이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아륵탄은 몽고어로 금(金)이라
기록하고 있다. 청장관전서에서도 아륵탄은 몽고어로 금(金)이라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역사에서 황하의 그 근원지는 대륙의 청해성(靑海省)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흑룡강의 그 인근지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으며 또 흑룡강은
지역적으로 서양(西洋)에 접한 지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의 대륙 청해성 지대가 서양에 접한 지역이며 그 인근에 흑룡강이 있는가?
현재의 흑룡강은 극동에 있어 황하와 흑룡강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흑룡강 그 인근 산맥에 황하의 두개의 발원지 중 하나인
아륵탄산(阿勒坦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위의 흑룡강여도설의 기록에
아고차극성(雅庫次克省)이 현재의 역사에서 야쿠트 공화국이라 한다.
현재의 흑룡강을 극동으로 옮겨 놓았으니 당연히 아고차극성(雅庫次克省) 또한
극동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현재의 학설이 사실이라면 야쿠트 공화국에 아륵탄산이 있으며 곧 아륵탄산은
황하의 발원지이므로 야쿠트 공화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야쿠트 공화국에 황하의 발원지가 있는가?
또 흑룡강이 서양에 접해 있다고 하자 혹자는 러시아가 서구의 세력이므로
러시아에 접해 있으므로 서양에 접해 있다고 기록한 것이라 한다. 과연 그런가?
이와 관련된 기록을 보면,
영환지략(瀛寰志略) /亞細亞
‘...北距北冰海,東距大洋海(即東海,南距印度海(即南海及小西洋海,西距紅海、地中海、黑海,是為亞細亞之全土.’
(아시아의) 북쪽은 북빙해에 이르며 동쪽으로 대양해 즉 동해에 이르며 남쪽으로 인도해 즉 남해 및 소서양해에 이르며 서쪽으로 홍해, 지중해, 흑해에 이르며 이는 아시아의 전토가 된다.)
위의 연경제전집의 기록을 보면 흑룡강의 그 북쪽이 서쪽으로 서양에 접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관련하여 위의 영환지략의 기록을 보면, 아시아의 서쪽 경계는
홍해, 지중해, 흑해이다. 즉 홍해, 지중해, 흑해의 서쪽이 서양=구라파=대서양=유럽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즉 흑룡강의 발원지는 서양=구라파=대서양=유럽과 가장 인접한 가장 큰 산맥인
코카사스 산맥인 것이며 그 흑룡강 인근의 산맥에 당연히 황하의 발원지
아륵탄산(阿勒坦山)이 있었던 것이며 성호사설의 기록에서 여국(女國)은
‘북호(北胡)의 서쪽으로서 아세아(亞細亞)와 구라파(歐羅巴) 중앙에 끼여 있다.’고
했으므로 역사상의 여국은 옥저와 관련된 역사이므로 옥저와 관련된 고구려 일대가
코카사스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역사였던 것이다.
위의 심전고의 효람 기윤의 기록을 보면, 감숙성에 흑수=흑룡강이 있다고 했다.
즉 감숙성 자체가 서양에 접해있었다는 것이다.
영환지략의 기록처럼 감숙성 인근 지역에 흑해 또는 지중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고증이 필요하지만 유프라테스 강이 황하로 생각 된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의 원류가 되는 산은 아라라트산이라 한다.
코카사스 산맥의 아라랏트산(山)은 현재 대륙에서 쓰여지는 아라랏트 산의 한자명은
아륵산(阿勒山)이다. 즉 아라랏트의 한자표기가 아륵(阿勒)이라 한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유프라테스 강은 지형학 상 3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유프라테스 강 상류 북쪽 지류인 카라(혼탁하다) 강과 동쪽 지류인 무라트(맑다) 강으로 시작한다. 두 지류는 아르메니아 고원의 좁고 깊은 협곡들이 이어진 다소 넓은 계곡을 흐르다가 엘라 남서쪽 50km 지점에서 합류한다. 이곳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이 되어 터키 남부의 타우루스 산맥의 주요지맥 사이로 험준한 굴곡부를 계속 흘러 터키의 시리아 고원에 있는 삼사트 마을에 다다르면 그 낙차가 300m에 이른다.
이와 관련하여 청장관전서의 기록을 보면 황하의 발원지가 2군데인데
하나는 성숙해라는 맑은 물줄기이고 또 하나는 아륵탄산(阿勒坦山)에서 발원하는
혼탁한 물줄기라 한다.
(타’) 조선시대 일본은 현재의 일본이 아니다
-일동기유(日東記游) 제 3권 정법(政法) 22칙, 속동문선 제6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증일본국승봉교제(贈日本國僧奉敎製),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7월 큼 27일(무오),
간양록 적중봉소(賊中封疏) 록(錄)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곤(坤) 문견총록(聞見總錄) 총론(總論), 청장관전서 제65권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 물산物産
-일동기유(日東記游)란 문헌을 네이버 백과를 통해서 보면 1876년(고종 13)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김기수(金綺秀:1832∼?)의 견문기록으로 수필로 된
원본 4권으로 되어있는 규장각 도서이며 끝에 후서(後敍)가 붙어있는데
후서에 의하면 김기수가 일본에 갔다 온 다음해인 1877년에 황해도
곡산군수로 있을 때 정리한 것이라 한다.
제1권에는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수록했고, 2,3권에서는 일본의 여러
인물들과의 교유하고 문물을 견문한 내용, 4권은 귀국하여 별단을 올리기까지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는 어느 혹자의 말을 빌어서
‘일본은 주(周)나라 태백(泰伯)과 중옹(仲雍)의 후손[後裔]이다.’
또한 글의 말미에 있는 글처럼
‘옛말에도 화인(和人 일본인)을 태백, 중옹의 후손이라 한 것이 있다.’라는 글의
논거로서 문헌적으로 사기(史記)의 기록을 말했으며,
강절지방은 오나라, 월나라의 옛 땅이고 그리고 일본 땅은 대륙의
강절지방(강소성, 절강성)과 홍수(泓水)사이에 있으므로 일본인은 태백과 중옹의
자손이 맞다는 기록이다.
저자가 만약 지금의 일본 열도에 갔다면 이런 글을 남길 이유가 없다고 본다.
역대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막연하게 일본은 어느 나라 남쪽, 동쪽에 있다는
기록만이 존재하였지, 이처럼 구체적으로 일본이 어디에 있었다고,
지명을 언급한 문헌은 없었다.
대륙에 일본이 있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문헌은 ‘일동기유’가 최초로 본다.
일동기유의 저자 또한 그 당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사실에 대한 무지에 의한 결과로 쓰여진 게 아니라 그 당대의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술했던 것이다. 일동기유에서는 일본이 대륙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속동문선의 기록에서 ‘오랑캐 재물은 민절(중국 동남 해안 지방)에 통하고’
蠻貨通閩浙라고 기록하고 있고 일동기유의 기록에서 일본의 강역은 강절(江浙)
일대라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들은 각기 다른 기록인데도 지역 편제상 절강지역이라는 일치점이 드러나는
기록 이다.
즉 위의 기록들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일본은 대륙에 있었으며 그 일본이 있었던
지역은 아열대 혹은 열대 지역으로 코뿔소와 코끼리가 많이 나는 지역이고
또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월(越)의 활동근거지 이므로 월(越)의 그 실체는
왜(倭)였던 것으로 본다. 현재의 열도 일본은 허구상의 조작된 것이며
앞으로 일본을 찾는 키워드는 ‘아열대 혹은 열대 지역으로 코뿔소와 코끼리가
많이 나는 지역’이다.
관련하여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을 보면, 후한(後漢) 때 선비(鮮卑)의
단석괴(檀石槐)가 오후(烏侯)의 진수(秦水)에서 물고기가 있는 것을 보고 잡지
못했는데 왜인(倭人)들이 그물로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
세대를 진수 옆으로 옮겨서 고기를 잡아서 군량에 보충하였다. 여기서 선비의 단석괴는
오늘날의 카스피해, 아랄해를 할거지로 하는 철륵민족을 몰아냈다.
그러므로 선비의 단석괴의 활동 강역은 오늘날의 중앙아시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에서는 선비의 단석괴가 왜인(倭人)들이 그물로 잘 잡는다는
말을 듣고 왜국을 공격하여 천여 세대를 진수 옆으로 옮겨서 고기를 잡아서
군량에 보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식선에서 생각해 보면,
여기서 단석괴가 일본 열도에 와서 왜인들을 잡아 갔다면 이는 역사가 아닌
환타지소설이 되고 만다. 즉 일본 열도는 허구이다.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의 기록을 보면, 현재의 일본 열도는 지진 다발지역인데
기록에서의 왜장들의 집은 그 무거운 구리를 주조하여 기와를 만든다고 한다.
현재의 일본 열도 가옥들과 극명한 차이를 이룬다.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에서는 일본의 월후주(越後州)에는
‘못 하나가 있어 기름이 항시 물 위에 뜨는데, 움켜 오면 등불로 사용하기에 좋으나,
나쁜 냄새가 나므로 취수유(臭水油)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청장관전서 제65권에서는 석유(石油)가 월후주(越後州)에서 나며
등유(燈油)로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둘 다 같은 지역에서의 석유(石油)에 관한 기록 이다.
또한 축전주(筑前州)에는 화정(火井)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또한 유정(油井), 석유(石油)에 관한 기록이다. 또 일본의 담로주가 어디인지 잘
모르지만 열도 일본의 그 어디를 기점으로 해서도 그 남쪽에 남만국(南蠻國)은 없다.
그런데 담로주(淡路州) 남쪽에 남만국(南蠻國)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온천 등에 관한 기록을 미루어 열도 일본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기록을 세밀히 고찰해 보면 현재의 일본열도와 기름이 솟아나는 연못의 유전과
화정(火井)과 남만국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기록 하나만으로 보아도 열도 일본론은 허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혹자는 ‘일본 열도에서 석유가 나온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화정은
천연가스가 나오는 곳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하여 일본 열도론의 허구를 주장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의 유전관련 개발은 근대에 이루어진 것이며 자연적 발생이 아닌 인위적이란 것이다.
자연적으로 연못에서 나오는 석유는 일본 열도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조선시대 일본은 현재의 일본이 아니었다.
(타’) 진단국(震旦國)은 중국(中國)을 이르는 말이자 고려(高麗)를 이르는 말이다.
-동문선 제110권 소(疏) 정지상(鄭知常), 동문선 제27권 제고(制誥) 관고(官誥) 최응청(崔應淸), 동문선 제112권 소(疏) 법수재 소(法壽齋疏) 석복암(釋宓菴).
-동문선에서 고려의 정지상의 글은 고려에서 행한 불교 법회에 관한 글인데
불교의 가르침이 온 진단에 향응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서 행한 불교관련 법회에 진단 즉 중국(中國)을 언급한다는 것은 고려가
중국임을 말하고 있다.
또 최응청의 글을 보면, 신령스런 법사가 진단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 신령스런 법사를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삼았다. 이 선각국사는
음양지리설(陰陽地理說)·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으로 널리 알려진 신라 말의 승려
도선(道詵)이다. 이 도선대사가 진단에서 나왔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역사의 중심으로 중국이라는 그 중심에 있는 나라가
신라, 고려임을 말한다. 또 석복암의 글을 보면 조계종의 고려의 원오국사는
진단의 큰 사문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동문선의 기록을 통해서
월인석보에서 말하는 중국을 생각해 보면 중국은 신라와 고려, 더 나아가 조선의
중국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 고려에서 석유가 산출되었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1, 오주연문장전산
-해동역사의 기록을 보면 석유의 특징들을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해동역사가 인용한 이시진의 본초강목에서는 석암으로 부터 즉 땅의 지표로부터
나온다고 말했고, 이것은 고려에서 산출되며 원유상태의 석유특징인 검은색을 띤다고
말했고 불이 붙는다며 석유 고유의 특징을 말하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가 인용한 작몽록의 다른 기록을 보면,
‘서북 방성고(防城庫)에 못[池]을 파서 맹화유를 저축했는데 한 달이 되지 못해서 그 못의 흙이 모두 적황색(赤黃色)으로 변하였으므로 또다시 못을 파서 옮겼다.’ 하였다.
이는 자연 상태로 지표에 분출되어 있는 원유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는 석유가 산출되는 국가라는 기록으로 볼 때 한반도 고려론은 허구이다.
오늘날 대륙에서 근대로 부터 지금까지 개발된 유전을 제외하면 자연 분출로 석유가
산출되는 지역적 고려는 분명히 대륙에 존재했다.
(하’) 조선에 자연 발생적인 염정(鹽井)이 있다
-경세유표 제11권 지관 수제(地官修制) 부공제(賦貢制) 5
-한반도에 자연발생적인 염정(鹽井)은 없다.
조선후기의 대학자인 정약용의 경세유표 제11권의 기록을 보면
경세유표에서 말하는 염정(鹽井)은 염전(鹽田)을 하려고 인위적으로 바닷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황해도 지방에 땅이 갑자기 꺼져서 못이 된 곳이 있다. 그 깊이는 측량할 수 없다. 그 맛은 쓰고 고약하다. 이것은 모두 염정(鹽井) 지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을 상세히 보면 자연적으로 형성된 염택(鹽澤), 염정(鹽井)임을 알 수 있다.
경세유표에 황해도 지역에 있는 염정(鹽井) 지역과 관련하여 서책을 인용하여
다른 지역의 소금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그 부연설명을 읽어보면 ‘북방은 전적으로 해지(解池)에서 생산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해지(解池)는 염정(鹽井), 염택(鹽澤)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북방소금과 관련된 나라는 거란(契丹)과 서하(西夏)이다.
이것으로 황해도가 어디에 존재하였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자료가 되는
기록이라 생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