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욕의 언어
율장에서는 ‘기어(綺語) 하지말라’고 한다. 열반하신 해인사 지족암의 일타스님은 기어를 ‘부품한 말’이라고 번역했다. 부품하다는 말은 부풀렸다는 의미이다. 현대사회에서 부풀린 말의 전형은 광고언어라고 하겠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이용한 체제이고 자본주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광고언어와 광고영상이다. 그것은 애욕이라는 욕망을 가장 ?은 시간에, 가장 선명하게 표현하여 가장 인상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건 부품한 말이 수반되어야만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청춘남녀가 구사하는 ‘둘만의 언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즉 다수의 대중들을 상대로 한 일방적으로 강요된 언어이며, 더 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말이 넘쳐나는 시대와 세계에 무차별 무한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공익광고를 제외한 모든 상업적 광고문안의 기본컨셉은 애욕의 충족이다. 언어의 마술사들은 인간애욕의 객관적인 형상화 작업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곤두세운 채 늘 열어놓는다. 그 공덕으로 모든 유행어 가운데 그들이 생산해낸 언어들이 적지않다. 그 덕분에 참신한 시각으로 눈길을 끌고있는 광고문안이 TV 라디오 신문 잡지 길거리의 전광판 찌라시 등 곳곳에서 넘쳐난다. 심지어 그 ‘참신’이라는 말마저도 ‘charm新’으로 바꾸어 표기한다. 아파트 분양광고에서는 ‘다 모여라’를 ‘多 모여라’고 바꾸어 놓았다. 영어와 한자 그리고 한글이 잘 조합되어 소리는 물론 의미까지 살리면서 눈에 보이는 언어로 만드는 기술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
술은 애욕을 상징하는 또다른 코드이다. 하지만 ‘애주가’라는 찬미의 말도 함께 듣게 된다. 그러기에 술광고에 ‘愛’라는 글자가 절대로 빠질 수 없다. 하지만 그것도 세련되게 들어가야 한다. ‘산사춘愛 빠졌다’는 광고는 ‘에’를 발음이 비슷한 한문‘愛’로 바꾸었다. 술을 사랑할만큼 맛이 좋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글자를 인위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긴 소리로만 따지자면 이두식 표현과 비슷한 점도 있다. 따라서 신라시대 설총의 표기방법론을 오늘날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오히려 옛것을 오늘에 되살리는 온고지신의 정신에 투철하다고 해두자. 물론 한글을 사랑하는 모임의 식구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시월에(10月에)’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시월애’라고 한 영화가 있다. 그걸 ‘時越愛’라고 바꾸어놓고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야기’라고 부제를 붙여놓았다. 보문사가 있는 석모도를 배경으로 한 멋진 연인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우짜든지 좀 거칠긴 하지만 튀는 이름으로 제목부터 남의 눈길을 끌고자 하는 또다른 애욕의 의욕적인 발상이 눈에 거슬리긴 해도 그 사고의 신축성은 높이 평가 받을만 하다.
그 ‘시월애’는 절대로 영화제목으로 끝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그것은 애욕의 광고언어로서 생명력이 없다는 방증이 된다. 아니냐 다를까 이 말은 차(茶) 광고에 그대로 원용되고 있다. ‘시월애 국화차, 겨울애 다즐링 홍차, 사월애 보성녹차, 사랑애 자스민 녹차’로 진화되어 가지에 가지를 계속 쳐나간다. 말장난에 불과한 언어적 유희이긴 하지만 말의 본래기능인 의미전달적 측면에서 본다면 성공적이라고 하겠다. 특히 마지막 녹차에는 ‘사랑’과 ‘애’가 그대로 직설적으로 합성되었다. 따라서 ‘애욕의 언어’로서도 완벽하게 구조를 갖춘 셈이다.
비슷한 용례로 ‘시실리(영어표기로는 시칠리아)’를 들 수 있겠다. 가야산 백운동 골짜기에 있는 버섯모양의 지붕을 가진 작은 레스토랑의 상호이다. 이탈리아 남부 지중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데 이를 소리나는대로 ‘時失里’라고 한문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한글로 의미를 풀어 함께 병기했다. ‘시간을 잃어버린 마을’. 금강산 내금강에서 어떤 나뭇꾼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몰랐다고 하는 전설에서 빌려온 이름이다. 이름이 좋아서 그런지 여기저기 ‘시실리’ 간판이 보인다. 동화사 가는 길 팔공산 어귀에서도 같은 이름의 가게를 본 적이 있다.
시간을 잊어버리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나무꾼처럼 신선들이 바둑 두는 걸 옆에서 관전하든지, 아니면 직접 오락의 세계로 뛰어들어도 된다. 그리고 조금 밋밋하고 싱겁긴 하지만 수행을 통해 삼매에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다. 찰나적인 몰두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몰두라면 좋겠다. 몰두의 결과가 소모성이 아니라 좀더 자기발전에 도움이 되는 몰두라면 더욱 좋겠다. 애욕이 이기적인 욕심을 확장시키는 그런 애욕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수행에 대한 애욕으로 돌려질 때 그 애욕은 그야말로 발심이 되고 원력이 된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듯 애욕과 원력도 알고보면 둘이 아닌 것이다.
첫댓글 원력과 애욕이 둘이 아닌 수행에 대한 애욕으로 ~~ 감사 합니다 ,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