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자유라지만
김 국 자
전철 안은 통로마저 가득 찰 정도로 만원이었다. 충무로 역에 도착했을 때, 내리는 사람들이 많아 빈자리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건너편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신문을 보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눈을 감고 있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사람마다 얼굴 모양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다. 피부가 뽀얀 사람이 있는가하면 지나치게 검은 사람이 있으며 입고 있는 복장도 가지각색이다. 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사람이 있고, 넉넉해 보이는 청바지에 남방셔츠를 입은 사람도 있다. 바지에 티셔츠만 입은 사람이 있고 점퍼를 걸친 사람도 있다. 그렇게 남성들의 복장은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여성들의 복장은 참으로 다양했다. 길이가 긴 치마를 입은 사람이 있는가하면, 무릎만 살짝 가릴 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은 사람도 있다. 연세가 지긋한 여성일수록 치마 기장이 길고, 젊은 여성일수록 치마 기장이 짧았다. 그런데 바로 건너편에 서 있는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가 입고 있는 복장은 도저히 외출할 때 입기엔 곤란한 차림이었다. ‘세상에! 세상에! 저런 옷을 입고 어떻게 외출했을까?’ 집에서 잠잘 때나 입었으면 좋을 것 같은 그런 옷이었다. 원피스라고 해야 옳을까? 속치마라고 해야 옳을까? 등판은 완전히 노출되었고 유방이 보일 듯 말 듯 가느다란 끈 달이에 팬티까지 훤히 비치는 매미 껍질처럼 얇은 옷감이었다. 보자기라도 있으면 가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라보기조차 민망해 시선을 돌리고 있는 동안 다음 역에서 승객이 여럿 올라탔다. 출입구 쪽에 고등학생 정도의 여학생들이 서너 명 몰려들더니 대중을 의식하지 않은 채 깔깔거리며 시끌벅적 떠들었다. 소란스러워 힐끔 쳐다보았더니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더 엉망이었다. 청바지의 무릎이며 엉덩이에 구멍이 숭숭 뚫려 맨살이 허옇게 드러났다. 더운 날씨에 털실로 짠 니트 모자를 쓰고 목까지 올라 온 폴라 티를 입었다. 넓은 바지 길이는 길바닥을 쓸고 다닐 정도로 길었다. 반면에 손으로 한 뼘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짧은 바지를 입은 여학생은 배꼽이 완전히 드러난 짧은 셔츠를 입었다.
가리지 않아도 될 목과 머리는 가리고, 가려야할 배꼽은 왜 개방하는지 모르겠다. 날씬한 애들은 애교로 볼 수 있다. 뚱뚱한 몸매에 배꼽을 내놓고 다니는 여자를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유행도 신체조건이 따라야한다. 옛 선조 들이 이런 모습을 보시면 무어라할까? ‘아니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냐!’ 고 호통을 치실 것 같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우리들 처녀시절에도 브래지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우리보다 더 나이든 선배 여성들은 유방을 튼튼한 광목으로 바짝 조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땐 저렇게 등판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시대가 올 줄 상상도 못했으리라.
삽삽하게 푸새한모시 적삼을 입고 외출하던 어머니모습이 떠오른다. 아무리 더워도 참고 견디던 시대는 전설 속으로 묻히고, 남의 시선 아랑곳없이 제멋대로 입는 시대가 되었다. 아무리 자유로운 시대라지만 자신의 신체를 보호할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여성들의 지나친 노출은 남성들의 시선을 자극하게 마련이다.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성희롱이니 어쩌니 남성들만 나무랄 수는 없다. 제발 단정한 옷차림으로 자신을 보호했으면 좋겠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단정한 옷차림에 있다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