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키는 1929년 7월 28일 뉴욕에서 재클린 리 부비에(Jacqueline Lee Bouvier)란 이름으로 존 버논 부비에 3세(John Vernon Bouvier) 와 자넷리 부비에(Janet Lee)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 존과 자넷의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다.
존은 월가의 증권중개인이었는데 그는 결혼 전부터 방탕한 생활과 바람둥이로 유명했다. 그러나 귀족 가문이었던 부비에 家와 결합을 원했던 자넷의 아버지 제임스 리는 방탕한 기질의 존을 사위로 삼았다. 마찬가지로 존은 처가의 재력에 주목하고 그녀와 결혼을 추진한다.
재키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다섯 살 무렵 재키의 유모와 동생 캐롤라인과 함께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던 중 혼자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재키는 자신을 보고 다가온 경찰관에게 "내 보모와 여동생이 길을 잃은 것 같아요."란 말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그런 때이른 조숙함은 엄마 자넷에게부터 받은 교육 탓이었다.
그녀는 존과는 달리 딸들에게 엄격했고, 이런 어머니의 교육으로 재키는 똑똑하고 직선적이며 승부욕이 강한 아이로 성장했다. 부모의 불화와 그에 따른 이혼도 그녀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엄격한 자넷과 자유분방한 존은 사고방식부터 생활방식에 이르기까지 판이했다. 한 번도 가난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자넷은 남편의 빈한한 재정상태를 못 견뎌했다. 거기다 존은 상습적으로 바람을 피워댔다.
처음부터 삐걱거리는 결혼 생활을 했던 재키의 부모는 1930년대 말 별거를 결정햇고 재키가 열한 살이던 1940년 이혼에 합의했다.
부모의 이혼은 재키에게 충격을 주었고, 특히 아버지 존을 더 좋아했던 재키로서는 존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힘들어했다.
비록 주말에는 만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존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성장하는 딸에게 어떻게 하면 남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을 것같이 불가사의하고 신비스런 미소로 스스로를 가꾸어라. 비밀스러움은 남자들을 미치게 만들어 너희들에게 꼼짝 못하게 만든단다" 아버지를 유난히 따랐던 재키가 이 말을 가슴속에 깊이 새겼음은 물론이다. 1942년 무렵, 자넷은 부유한 사업가인 휴 오신클로스( Hugh D. Auchincloss)와 재혼해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1944년 재키는 당시 다니고 있던 홀톤 암스(Holton Arms)학교에서 '미스 포터스 스쿨'이라는 기숙학교로 전학했다. 그리고 1947년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던 바써(Vassar)대학에 진학했다.
2학년 시절 재키는 프랑스로 가 외국연스프로그램에 합격해 소르본느에서 1년간 공부하게 된다. 그 후 다시 조지워싱턴 대학에 편입했고, 이 해에 [보그/Vogue]지가 개최한 작문대회(Prix de Paris writing award)에서 1등을 해 파리와 뉴욕에서 진행되는 1년간의 저널리스트 연수과정 대상자로 뽑혔다.
그러나 어머니와 계부의 반대로 연수를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계부의 소개로 [워싱턴 타임즈 해럴드(Washington Times-Herald)]사진 기자로 일하게 된다.
기자로 일하던 시절인 1951년 재키는 금융기관에서 일하고 있는 존 허스테드(John Husted)와 약혼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존 F.케네디(John F. Kennedy)로 인해 1년만에 깨지고 만다. 재키와 케네디가 만난 것은 재키와 케네디의 친구인 찰스 바틀렛이 주선한 한 사교모임에서였다.
1951년 5월에 있었던 이 모임에서 재키를 처음 만난 케네디는 그녀에게 관심을 표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호감만을 확인한 채 헤어졌고 그들이 가까워진 것은 이듬해 겨울 무렵이였다.
그리고 케네디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 취임 축하 무도회 때 재키를 동반하면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매력적인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는 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재키와 만나던 초창기에는 그녀역시 그들 중 한명에 불과했다.
재키가 결혼을 염두에 두고 케네디를 만났던 반면 케네디는 결혼까지 생각하진 않았던 것. 그러나 케네디는 곧 그녀와 결혼해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대통령을 꿈꾸고 있던 그에게 결혼은 필수적이었고, 그 이미지에 맞는 인물로서는 재키가 적임자였다. 결국 재키와 케네디는 1953년 6월 24일 약혼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해 9월 12일 성 메리 성당에서 3천여 명의 축하객과 카메라 플래시 세례속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1955년 8월에 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민주단 전당대회가 있었다.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 지명전에 나섰고, 임신 중이었던 재키 또한 남편을 위한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가 되지 못했고, 재키는 무리한 활동으로 인해 아이를 두 번째로 유산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한동안 냉랭해 이혼설까지 나오던 두 사람의 관계는 1957년 3월 재키가 임신을 하자 다시 좋아진다. 그리고 그해 11월 27일 딸 캐롤라인이 태어난다.
1958년 케네디는 상원의원 재선에 몰두해 있었다. 상원의원 재선은 그가 노리던 대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재키의 심한 낭비벽. 케네디가 불평을 털어놓을 정도로 재키는 자신을 치장하는데 많은 돈을 쏟아 부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칫 재선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었다. 또한 재키는 언론을 매우 싫어했다. 자신이 전작 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과 딸 캐롤라인이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케네디는 재키의 이런 행동을 고치도록 하고 재키를 정치일선에 끌어들여야했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재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편의 정치에 조금씩 관여하게 되었고 어느새 전국을 돌며 캠페인에까지 동참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녀의 숨겨진 정치적 능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재키는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에 능숙했고 이 능력은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 그녀의 정치참여로 케네디 선거캠프는 활기를 띠었고 결국 케네디는 상원의원에 재선됐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대권에 도전하는 것. 하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는 케네디 뿐만 아니라 재키에게도 힘든 여정이었다. 당시 임신중이던 그녀는 유산을 각오하고 남편의 선거를 도와야했던 것이다.
재키는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연단에 올라 남편을 위해 연설을 했고 TV에 출연했으며 사람들을 만나야했다. 재키의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케네디는 196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1월 25일 아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주니어(John Fitzgerald Kennedy)가 태어난다.
31세의 젊고 아름답고 우아한 퍼스트 레이디는 미국에서 뿐만아니라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녀의 인기는 남편 케네디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한편으론 남편보다 더 인기 있는 스타였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케네디의 계속되는 혼외정사였다. 케네디는 끊임없이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재키는 이혼만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과 퍼스트 레이디란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케네디와 헤어질 수 없었다.
또한 재키는 이미 퍼스트 레이디가 갖고 있는 이점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재키로서는 케네디의 혼외정사를 묵인할 수만은 없었고 나름의 방법(비꼬거나 화를 내거나 아예 무시하거나)으로 케네디를 힐난했다.
또한 여론에서는 케네디의 바람에 대해 재키도 맞바람으로 대응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었다. [케네디 부부의 러브스토리]의 저자 에드워드 클라인은 재키가 케네디와의 결혼 생활 중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연인을 두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1963년 초 재키는 임신을 했고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 공식적인 행사를 자제했다. 하지만 8월 7일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는 태어난 지 3일만에 숨을 거뒀다. 재키가 큰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했다.
훗날, 결혼하게 된 선박왕 오나시스(Aristole Onassis)를 만난 것은 이 즈음이었다. 오나시스와 친했던 재키의 동생 캐롤라인이 재키의 슬픔을 달래기 위해 오나시스와 상의해 재키를, 오나시스의 호화 요트 '크리스티나'에 초청한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재키가 오나시스의 초청을 받아들이는데 반대했다. 오나시스의 평판도 평판이거니와 당시 그는 미국 법무부로부터 몇 차례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고 사기혐이로 기소된 적도 있었다.
이런 오나시스와 미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같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 년 앞둔 재선에 트집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재키는 '크리스티나'승선에 응했고 오나시스는 재키를 극진히 모신다. 덕분에 재키는 이 여행에서 아들을 잃은 슬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여행에서 활력을 되찾은 재키는 1963년 11월 21일 정치적 이유 때문에 텍사스를 방문했다. 당시 텍사스는 민주당원들이 진보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다투고 있었고, 케네디는 대선 이전에 이들을 하나로 규합할 필요가 있었다.
케네디는 인기 스타인 재키를 동반하는 게 선거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 두 사람은 텍사스로 향했다. 그리고 이튿날인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시가 행진을 하던 케네디는 어느 곳에선가 날아온 총탄에 저격 당했고 수많은 의혹만을 남긴 채 사망했다.
케네디의 장례식이 있던 1963년 11월 25일, 상복을 곱게 차려입은 재키는 침착하게 장례식을 주관해 케네디의 마지막 길을 조용히 배웅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감동했다.
"케네디 암살 후 단 나흘만으로 그녀는 역사 속에 영원히 살아 남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녀가 장례식장에서 보여준 침착한 태도는 미국인들의 가슴속에 깊게 각인 되었다.
백안관을 떠난 후 재키는 한동안 워싱턴에 머물다가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이들 교육에만 신경 쓰며 지냈다. 언론에의 노출을 극도로 싫어한 그녀는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 언론 지면에 등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생활을 보호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 동안 재키는 오나시스와 친밀한 관계로 발전했다. 언론은 이를 주목했고 급기야는 재키와 오나시스가 함께 있는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결합은 불가능할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키는 오나시스와 재혼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68년 3월 존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면서 재키는 고민에 빠진다. 형수 재키가 오나시스와 결혼을 발표하면, 자신의 이미지가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케네디가 오나시스와의 결혼을 미뤄달라고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재키는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1968년 6월 6일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하자 재키는 남편과 시동생을 죽인 미국이라는 나라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재키는 로버트의 장례식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나는 이 나라가 싫다. 나는 미국을 경멸하고 내 자식들이 더 이상 이 곳에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케네디家가 암살 대상이라면 내 자식들이 첫 번째 목표물이다. 이곳을 떠나고 싶다."
1968년 10월 20일 그녀의 바램대로 그녀는 오나시스와 결혼해 미국을 떠난다. 두 사람의 결합은 서로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우선 오나시스는 자신의 나쁜 평판을 쇄신할 필요가 있있고 재키는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치벽이 심한 그녀로서는 미국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과 케네디 가에서 주는 돈으로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다.
이같은 사실은 오나시스와 재키가 결혼하기 이전에 체결한 혼전계약에 잘 나타난다. 재키가 자신의 변호사를 시켜 오나시스와 협상한 계약서에는, 오나시스는 결혼과 동시에 재키에게 3백만 달러를 일시불로 지급하고 재키의 자녀가 21세 때 찾을 수 있도록 1백만 달러를 별도로 지급할 것이며, 오나시스가 죽거나 이혼할 경우 재키에게 매년 20만 달러씩을 지급해야 한다는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대신 오나시스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 재키는 상속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오나시스와의 결혼은 그녀의 이미지를 한번에 실추시켰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녀의 재혼과 재혼 상대자에 대해 분노와 실망을 표했다.
인기있는 '퍼스트 레이디'에서 사기꾼이라 불리던 '갑부의 아내'로 변신산 재키의 모습에서 대중은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재키와 오나시스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0년을 고비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오나시스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재키에게 있었다.
재키는 오나시스와의 결혼 생활 중에도 미국에서 열리는 케네디 관련 행사에 계속 참여했으며 오나시스가 질투를 느낄 정도로 케네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한다. 또한 재키의 낭비벽 역시 오나시스를 괴롭혔다.
이런 저런 문제가 겹쳐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오나시스는 자신의 전 애인 마리아 칼라스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둘의 소원한 관계는 1973년 1월 오나시스의 아들 알렉산더 오나시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 충격으로 건강까지 악화된 오나시스는 유서를 이렇게 고쳐쓴다.
"이미 나의 부인 재클린 부비에와는 미국에서 공증까지 받은 합의서를 교환했기 때문에 재키는 상속권을 포기하게 돼 있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이 차지할 몫을 제한한다. 만일 재키가 상속문제로 소송을 걸 경우 오나시스 가계 구성원들이 모두 나서서 엄청난 비용을 물더라도 법정투쟁으로 맞서야한다."
재키와 오나시스 사이에 말다툼은 점점 늘어갔고 재키의 낭비벽도 심해졌다.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오나시스의 카드로 구입한 물건을 재활용 시장에 되팔아 치울 정도였다.
오나시스는 결국 이혼을 결심했으나그것은 1975년 3월 15일 그가 사망함으로써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고 오나시스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 재키는 그의 딸 크리스티나와 벌인 장장 18개월에 걸친 소송으로 2천6백만 달러를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남편과도 사별한 재키의 행보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재키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과 언론들은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궁금했다.
그러나 재키는 대중의 호기심과는 달리 '바이킹 프레스(Viking Press)'란 출판사에 취직했다.
이제 언론은 두번의 결혼과 두 번의 사별 경험이 있는 그녀의 특이한 남성편력에 집중했다. 그녀가 만나고 다니는 여러 남자들과 재키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여러가지 추측 기사가 난무했지만, 그녀는 오나시스와의 사별 이후 결혼하지 않았고 언론과 거리를 유지했다. 재키는 케네디 사후 25년 동안 언론의 인터뷰 요청을 완전히 거절했다. 언론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과 자식들의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레드북]지의 편집인 엘렌 리바인은 그런 재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녀는 미국판 다이애나비였다. 그녀와 인터뷰를 할 수만 있다면 살인이라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녀가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그녀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언론과의 '거리 두기'로 인해 재키에 대한 평판은 다시금 좋아졌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지도 않으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고 자식들의 교육에 신경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미국인들은 케네디 대통령 시절의 재키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재키가 1980년대 초부터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뉴욕의 다이아몬드 상인 모리스 템플스먼이었다. 당시 부인과 별거 상태에 있던 모리스는 뉴욕시 5번가에 있는 방 열 다섯 개짜리의 호화아파트에서 재키와 동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스는 재키에게 매우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재키의 자식과 손자를 재키만큼 아끼고 사랑했으며 재키를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재키의 주의 사람들은 모리스와 재키가 오랜 시간을 견뎌낸 노부부처럼 지냈다고 말한다.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던 재키는 1993년 감기증상으로 뉴욕 맨해튼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검사 결과 그녀가 비(非)호킨스 임파선 종양이라는 일종의 암에 걸려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결국 재키는 일 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1994년 5월 19일 65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는 딸 캐롤라인과 JFK 2세, 그리고 모리스 템플스먼이었다.
재키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재키가 생전에 거주하던 뉴욕시 5번가에 위치한 아파트에는 추모행렬이 줄을 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재키의 장례식은 단출하게 치뤄졋다. 그리고 그녀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존F.케네디 옆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