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영 교수(성결대학교)
우리 성결 대학교를 설립하신 고 영암 김응조 목사는 한국 보수교단과 신학계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물로서 96년의
생애(1896.1.26-1991.4.17)를 통하여 큰 발자취를 남기셨다. 개화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각자요 일제 치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독립운동가이자 문서선교사이며 순회부흥사로 한국교회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으신 분이다. 해방 이후 민족의 혼란기에는 재림의 신앙으로
겨레의 영혼을 일깨운 목회자요 부흥사로, 한국교회가 자유주의 사조에 물들어 감에 따라 정통적 보수신학과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한국인 신학자 초유로
신구약 66권을 완전 주석한 <성서대강해>를 집필하는 한편 고 홍대실 권사님의 협력속에 보수신학의 도장인 성결대학교를 설립하시는 등
일생을 온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바친 신앙의 거인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암의 제자된 우리들이 세월과 함께 영암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점차 망각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런 점에서 예성 90주년 및 개교 35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통해
우리의 대 스승이자 성결대학교의 설립자인 영암 김응조 목사님의 생애와 신앙, 그리고 신학사상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발표자는 영암의 생애 및 신앙에 대해서는 개관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소개해 드리고, 영암의 신학사상과 그 특징에
대하여 자세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영암의 생애와 신앙
한 신학자의 학문체계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심오한 연구를 통한 체험적인 신앙과 삶의 조화가 두드러진 영암의
경우, 그의 신앙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생애 조명은 더 없이 중요한 일이다. 영암이 남긴 자서전「은총 90년」은 단순한 삶의 연대기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신학관이 형성된 과정을 의식하고 쓴 신학적 고백이라는 점에서 영암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고 있다. 이에 필자는
먼저 그의 생애를 요약 소개함 으로써 영암 신앙과 신학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1.영암 김응조 목사는
구한말 개화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한국교회 초기 신앙인이다.
(1896년 1월 23일 출생, 1909년 3월
입신)
영암 김응조 목사는 1896년 양력 1월 23일(음 12월 3일) 경북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383번지에서 출생했다.
영암이 태어난 해는 갑오경장이 일어난 지 2년 후인 고종 33년이 되는데 이 때는 근세조선 말기로서 오랜 쇄국정책으로부터 개화기를 맞이하던
시기이며, 국제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에 따라 나라가 일대 시련을 겪던 때이다. 영암은 자신의 성격을 "옛 날 칼빈이 출생지 비카델
사람들은 자리의 영향을 받아서 의지가 강하고 … 정의감이 굳센 것처럼 칼빈의 성격이 향도의 영향을 받아서 동일한 기질을 소유한 것처럼 필 자도
향도의 영향을 받아서 어느 정도 칼빈의 성격과 비슷한 점도 없지 않다고 자인 하는 바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영암이 태어난 때의 우리
나라 종교적 분위기는 대원군의 반기독교정책으로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해를 당하였고 민비와 대원군 사이에는 정권 쟁탈전이 반복되던 때 였다. 대원군
정권이 물러나자 종교의 자유가 있게 되어 외국으로부터 선교사가 속 속 내한하여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영암이 스스로 지적한 것처럼 영암은
민족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점에 태어났으니 민족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 하겠다. 영암이 처음으로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것은 13세 되던
해이다. 그는 7세 무렵에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13세 되던 해, 오랫동안 출타해 있던 서 당 훈장의 아들인
최봉희(崔鳳熙)씨로부터 처음으로 "예수교"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이 때가 1909년 3월,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인 융희(隆熙) 3년이며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이등박문이 통감부를 설치하여 조선의 실권을 장악할 때였다. 이 땅에 기 독교 복음이 들어온 지 25년 되는 해로서 영암의
신앙은 한국교회 초기신앙이라 할 것이다. 이때 영암의 선친 김원섭씨는 온 가족과 함께 입신(入信)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구한말의 뿌리깊은
유교의 전통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침략자 일본에게는 적 대적 위치에 있던 서양 기독교를 온 가족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2.영암 김응조 목사는 체험적이자 실천적 신앙의 소유자이다.
1)일찍이 중생(重生,
Regeneration)의 은혜를 체험, 구원의 확신을 가짐(1911 년 4월 15일)
14세가 되기까지 7년간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선친의 남다른 교육열에 힘입어 신학문을 공부하게 된다. 동네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가난한 살림에 논을 팔아 아들을 경산(慶山)에
있는 계동학교(啓東學校)로 유학 보낸 아버지의 결단은 그 당시로 보아 일찍이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은 개화의식과 전진사상에 의한
것이다.
영암의 신학문 수업은 그에게 신앙의 성숙과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그 때 그의 신앙은 지극히 단순하여 어느 날 주일학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는 "나는 공부해서 모세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모세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은 영암에게 일평생 영향을 미쳐 생전에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새끼 모세"라는 표현을 즐겨 할 정도였다. 2년간의 계동학교 유학시절은 그에게 있어 처음으로 기도에 눈 뜬 시대이기도
하다.
영암은 후일 그때를 회상하여 "나의 벧엘 경험"(창 28:10-19)이라 표현, 집을 떠나 빈들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야곱의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심경을 대변하였다. 영암은 이렇듯 기도의 사람으로 무장한 가운데 1911년 15세 되던 해 4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은 "피득 목사"라고 영암이 기억하는 유태계 선교사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암은 수세(受洗)의 순간에
중생(重生)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영암은 계동학교에서 2년간 공부하고 영해읍 보통학교 4학년 졸업반에 편입하여 1년간
일본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다음 대구에 있는 미션계통의 계성중학교에 입학 하여 계속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때가 1913년, 영암의 나이 18세
되던 해였다. 학비 를 조달하기 위하여 땅파기, 지게 지고 농사하기, 벽돌 운반하기, 기계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학업 성적이 평균 90점에 미치지 못하면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의지로 열심히 공부하여 모범생이 되었다. 영암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그 원동력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과 부모의 은혜와 자신의 건강에 있다고 믿었다.
이처럼 투철한 신앙 일념으로 공부하던 영암에게도 한 때
세상 명예에 대한 유혹과 욕심이 있었다. 평소 존경하던 분 중에 어느 교회 장로로서 변호사가 있었는데 영암은 그분에게 영향을 받아 법률을
공부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표현대로 "모세가 변하여 변호사기 되었다." 영암은 계성중학교에서 4년간 공부하고 21세에 서울로 올라와 법률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만다. 후일 그의 간증대로 사상의 위기요 세상영달에 대한 유혹이었다. 다시 모교로 돌아와 교원 양성을 위한 사범과 마치고
당시 소학교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했다.
2)일찍이 목회자로서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신학교에 입학함(1917년)
학교를
사임한 영암은 성우로 올라와서 해외 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그때가 1917 년, 21세 무렵이다. 그 방편으로 그는 선교사들과 접촉하고 교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외국으로 갈 수 있는 현실적인 길은 선교사를 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장로교, 감리교 할 것
없이"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서, 이때까지는 사실 영암은 특별한 교단의식이 없었던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선교사를 만날 목적으로 벚꽃이 만발한 어느 동산을 찾아갔다. 그때가 1916년 4월 15일,
그 동산이 바로 아현동에 위치한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였다. 그것에서 영암은 주의 종으로 공부하기 위한 회심의 결단을 하게 되었다.
즉시 신학교 입학을 희망했으나 입학 연령이 1살 미달이었다. 당시 서울 신학교는 학칙상 만 22세에 이른 사람을 받아주었던 것이다. 애석한
일이었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인내와 연단의 기간으로 알고 고향에 내려가 1년을 기도로 준비하고 1917년 서울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잠시 일본 동지사대학(同志 社大學) 유학을 권유받고 고민하기도 했으나 결심한 대로 신학을 택한 것이다.
입학한 후
일본 동양선교회 대표 C. 카우만의 초청으로 영암은 7인의 신학생들과 함께 1년간 일본 전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영적 체험은 후일
영암의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일본 동양선교회는 전국민을 상대로 호별 전도라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한국 신학생 가운데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는 학생을 선발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영암이 청소년기에 일본어를 특별히 공부한 것도 하나님께서 이 때를 위하여
예비시킨 일이었다. 영암을 미신으로 가득한 일본 사람들의 배타심과 일본 정부가 정책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여 많은 열매를 맺었다.
3) 당시 영적 불모지였던 일본 전도여행 중에 재림(再臨, Second coming
of Christ)의 환상과 성결(聖潔, Sanctification)의 은혜를 체험함(1917년 9월 13일).
영암에게 있어 일본
전도여행이 무엇보다 의미 있었던 것은 그가 이방지역에서 재림의 환상과 성결의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다. 영암은 자신의 재림에 대한 환상을
1917년 9월 13일 체험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흰 구름을 타고 수많은 천사들의 나팔소리 중에 오시는 예수님을 환상 중에 본 것이다. 그와
함께 "요한1서 3장 3절" 말씀을 받았는데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도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성결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튿날 밤에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나 눈물로 회개하게 되었다. 부지중에 "주여, 내 죄를 용서하시고 나로 깨끗케 하여 주옵소서" 통회의 연속이었다. 이윽고 "내가 너를
깨끗케 하노라" 하는 주님의 음성과 함께 마음이 유리같이 맑아지면서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이처럼 영암은 일본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던 중 재림의 확신과 성결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4) 일제에 항거, 학생대표로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자 선각자임(1919년 3월 5일 가담, 1년 6개월 옥고).
1년간의 일본 전도를 마치고 1918년 4월 귀국하여
공부하던 중 1919년 3울 기미독립 운동에 영암은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된다. 3월 1일 애국지사 33인은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전국에서 온 국민이 일제히 독립의 함성을 외쳤다. 영암은 이날 연희전문, 배재전문, 이화전문, 감신, 서울신대생 200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고 3월 5일에는 선언문을 휴대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다가 그곳에서 체포당했다. 이 사건으로 영암은 4년 구형에 2년 실형 언도를 받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성경 읽기와 전도에 힘써 마태복음부터 에베소서까지 암송했다고 한다. 후일 그는 신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옥중에서 배운 성경이 더 많다고 증언했다. 영암은 3년 동안의 신학교 과정 가운데 1년을 일본전도로, 1년 6개월을 독립을 외치다 치른
옥고로 보내었으니 강의실에서 공부한 기간은 불과 1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1920년 10월 1일 25세의 나이로 영암은 서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영암의 신학사상이 말씀의 바탕 위에 체험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것도 이처럼 신학과정을 실천 신학적 차원에서 보낸 것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암은 1977년 독립운동가로서의 공로로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고, 1987년에는 교육 공로자로 대한민국 국민포장을
받았다.
5) 바쁜 목회사역 중 얻은 여러 지병을 신유(神癒, Divine Healing)의 은혜로 고침 받음(1930년 9월
10일)
영암은 민족의 암흑기에 25세의 나이로 전도자가 되어 그의 삶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헌신하기 시작한다. 25세에 전도자로
인생을 새 출발한 영암은 존 웨슬리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쳤듯이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붉은 글자를 한국지도 위에 그려놓고
민족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서원하였다.
그후 영암은 첫 임지인 철원교회를 비롯하여 공주교회, 안성교회, 서울 아현교회 등에서
목회하였다. 특히 아현교회는 당시 성결교단 안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교회였으므로 안수 받지 않은 전도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목회지였다.
영암은 삭발을 하고 사역에 임하여 큰 부흥을 일으켰다. 영암이 목사 안수를 받은 해는 1926년 4월, 전도사 시무 5년 만이었으며 영암의 나이
30세 되던 해이다. 안수와 함께 영 암은 전국 5개 지방 가운데 제일 큰 지역인 북부지방 감리목사로 파송받아 5년 동안 한반도 북부지방 교회를
순회 감독하며 사역하였다.
그러던 중 영암은 34세 무렵부터 건강을 해쳐 급기야는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쪽 따뜻한
지방인 목포교회로 임지를 옮겨 요양하면서 목회를 계속하였다. 몸은 점점 쇠약하여 신경쇠약, 소화불량, 피풍, 신경통, 치질, 폐렴 등 여섯 가지
질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때의 고통과 절망감을 영암은 "빨리 죽는 것이 축복이요 하루 더 사는 것이 저주라고 생각했다" 표현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영암은 마지막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리기 위해 백일 작정으로 유달산 반석 위에서 매일 아침 5시부터
7시까지 기도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10일, 기도 후 노곤하여 잠시 잠이 든 순간 앉아있던 바위가 갈라지는 환상을 체험하게 되었다.
갈라진 바위틈에서 백옥 같은 생수가 터져 나오더니 자신을 둥둥 띄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순간 자신의 몸이 보여졌는데 몸이 유리알처럼 맑아
있었다고 한다. 깨어보니 기이한 환상이었다. 이것이 영암 김응조 목사의 생애에 있어 유명한 신유의 은사 체험이자 심령의 변화체험으로 기록된다.
그때부터 자신의 아호를 "영암(靈巖)"(고전10:4)이라 하게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한 생애에 크나큰 전환점이 된
셈이다.
영육간에 엄청난 은혜를 체험한 후 영암은 새로운 능력을 받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으며 1931년 호남지방
감리목사, 1936년 중부지방 감리목사로 활동하면서 1937년에는 서대문 독립문교회 당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가 신학교 졸업과 함께 외쳤던
"조선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 그대로 영암은 우리 나라 전 지역의 교회들을 위해 일하게 된 셈이다.
3.영암 김응조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지켰다.
그러나
영암에게는 1937년을 전후하여 매우 어려운 시험을 겪게 된다. 1937년 4월 18일 일본 천장절행사가 배재학당에서 있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목회자들을 일경들이 강제로 남산 신궁으로 끌고 갔다.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위해서였다. 영암은 그 날 어떤 선교사 부인이 뒷문 가시철문을 열고
나가는 틈에 같이 빠져나와 화를 면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형사들이 매일 찾아와 참배를 강요하였고 또한 교단 일부에서는 참배가 국가의식일 뿐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해서 영암은 적잖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영암은 "나는 이것은 약자의 변명이라고 적극 반대했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인왕산 송림 속에서 매일 아침기도로 하나님께 물었으나 역시 응답이 없다. 나는 생각하기를
교회의 책임자로 있으면 면치 못할 터이니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국 영암은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공직을 사임, 독립전도의 길을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민경배 교수는 「한국기독교회사」에서 영암을 비롯한
당시 교계 지도자 수명의 이름을 신사참배자로 규정하고 있으며 최근 영암의 생애와 사상을 쓴 한숭홍 교수도 사료의 재확인 없이 민경배 교수의 저서
내용을 재인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경배 교수 역시 자신이 확인한 사료에 의해 신사참배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1966년 임종국
씨의 「친일문학론」에 실린 내용을 비판이나 확인 없이 재인용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임종국의 주장은 정확한가? 이것은 영암의 신사참배 진위를
기고한 반론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즉 정상운 교수가 확보한 당시 사료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천장절행사 참가자 명단에는 김응조 목사가 들어
있으나, 임종국씨가 무책임하게 주장하고 그것을 민경배, 한숭홍 등이 확인 없이 재인용한 문제의 1938년 4월 25일의 신사참배 결의 선언문에는
김응조목사의 이름이 빠져 있음 을 밝혀낸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필자가 영암과 평생을 신앙의 동지로 살아온 성결교 원로 김정호 목사(93세)에게
확인한 결과도 "한 마디로 영암은 신사참배하지 않았다. 영암이 그런 분이었다면 내가 신앙의 선배로 존경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답변이 었다.
4.영암 김응조 목사는 문서선교의 개척자로, 일제 암흑기에 민족의 비전을 제시한 초교파 부흥사로
공헌하였다.
공직을 떠난 영암의 생활은 피폐해 질 수밖에 없어 집에서는 학생 하숙을 치면서 자비량 전도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때의
전도계획으로 시작된 것이 초교파적인 전국 순회부흥회와 문서전도지인 「생명지광」(生命之光) 발행이었다. 영암의 사역 가운데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 문서선교인데 이 「생명지광」의 반포가 사실상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배달 3천부 정도 발행하여 국내는 물론 만주와 일본에까지 독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 주된 내용은 설교와 성경강해, 신학사상, 전기, 신앙간증, 설교법, 예화 등이었다. 한 달에 세 곳 이상 집회를 인도하면서
기차 안에서, 혹은 집회 후 여가를 이용하거나 밤을 새면서 집필하고 발송을 하는 등 영암의 초인적인 열정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잡지는 1943년 폐간 될 때까지 6년 이상 발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3년 12월에는 성결교단이 강제 해산되었으며 영암은 계속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가서 복음을 증거 하였다.
문서선교와 함께 시작한 전국 순회부흥회는 가는 곳마다 부흥과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으니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교회까지 사임한 신세였으나 오히려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암은 전국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유명한 목회자가 되어갔던 것이다. 영암이 평소 "나는 교파에 속하였으나 교파주의자는 아니다" 라고 말한 것도 이때 교파를 초월하여
순회부흥전도자로 활동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1945년 영암의 나이 50세에 이르러 조국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영암으로 하여금 광복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실 여호와 이레의 준비를 하신 듯, 영암은 해방을 앞두고 부흥회 등 일체의 사역을 중단하고
1년 가까이 은둔 생활 을 하게 된다. 해방과 더불어 영암은 다시 부흥운동에 나섰다.
해방과 함께 닫혔던 교회들이 속속 문을 열었고
따라서 영적 부흥이 절실했던 터였다. 성결교단도 재림사상으로 말미암아 강제 해체된 상태에서 다시 재건의 출발을 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영암이 인도한 부흥회는 1945년 광복 후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집회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9월
10일에는 성결교회 재건총회가 열렸다. 그러나 광복 후 1950년 한국동란까지 근 5년간의 영암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영암 자신도 자세하게 기록해
놓지 않았다. 다만 「은총 90년」 약력난을 보면 "1945년 9. 10∼1950년 6. 24 : 조국해방 과 동시에 초교파적 부흥운동으로
장(長)·감(監)·성(聖)·침(浸) 4교파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영암은 조국 해방기로부터 조국
전쟁기까지 민족적인 최대의 영적 혼란기를 교파를 초월하여 오직 민족복음화 운동에 전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동란의
와중에서, 특히 1.4후퇴 때 부산으로 내려간 영암은 그곳에서도 집회를 계속했는데 특히 이때에 행한 그의 재림론 강의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1954년 펴낸 그의 「말세와 예수의 재림」은 아마도 동란 중 부산 피난시절에 행한 강론을 묶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위 책의
"序論"에 보면 말미에 "1954년 3월 1일 한양성(漢陽城)에 돌아와서, 저자식(著者識)"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부산 피난 시에 열린 총회는
무엇보다 성결교의 상징인 「活泉」속간호부터 영암은 이명직(李明 稙)·문복호(文 浩)·황성택(黃聖澤)·이천영(李泉泳) 등이 함께 집필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문을 닫은 지 1년만인 1951년 서울신학교가 총회의 결의에 따라 다시 문을 열었고 1952년 영암
김응조 목사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영암은 신학교 교수직 등 교단 내외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 앞장섰으며 1956년에는 성결교회 제 11대 총회장
으로 피선되는 등 교단과 신학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5.영암 김응조 목사는 교회와 신학계의 세속화를 거부, 성경적
복음주의 보수신학의 도장인 성결교신학교를 설립한 신학자이자 교육자이다(1962).
영암은 1957년 회갑을 기념하여
7개월간 미국을 순방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한편,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과 대화하고 신학계의 동향을 살필 기회를 가졌다. 그 결과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와 신학계가 급격히 세속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영암은 한국교회와 신학계도 머지않아 서구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될 것으로 판단, 귀국하는 즉시 보수적 관점의 성경주석을 쓰게 된다.
이와 아울러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보수교단의 상징처럼
되어 있던 성결교단마저 1961년 WCC 가입문제로 양분되자 뜻있는 교단 지도자들과 전국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사조를 배격,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교단 분열 후 영암은 성결교회 본래의 성서주의 보수신앙을 고수하고 복음적 사명을 완수할 교회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1961년
12월 30일 성결교신학교 재단 이사회를 구성하고 1962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 영암의 사저에서 성결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개교 이래 1980년까지 초대 교장을 역임하시고 30여년 이상을 강단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이 시기는 영암의 대표작
<성서대강해> 신약 상권(1961년 2월)과 하권(1962년 2월)이 나올 무렵이었으니 영암은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주석집필과 한편으로는 보수신학의 도장인 신학교 설립을 동시에 추구하는 등 초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볼 때 영암은
예성교단의 지도자일 뿐 아니라 자유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교회를 지켜온 초교파적 지도자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6.영암
김응조 목사는 생애를 통하여 43권의 신학관계 저서를 남긴 대저술가이다(1937년∼1988년).
1953년 서울을 수복하여 영암은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신학교 재건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1956년 4월 제 11회 총회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회고컨대 입신한지 48년,
헌신한지 40년, 봉역한지 37년이다. …공부하거든 모세 되게 해달라고 한 기도가 성취되어 헌신 40년으로 모세와 같이 임무를 마쳤다 …하나님을
위하여는 과거 40년은 물론이요 앞으로도 마지막 호흡까지 갚을 각오를 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니 모 두가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이라 할 수
있다." 1957년에는 회갑 기념사절로 7개월 간 미국을 순방 60여 지방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미국에서 귀국한 영암은 서구 기독교의
세속화와 신학의 위기를 목격한 결과가 되었으며 그래서 그는 무엇인가 새롭게 각성하여 "무엇보다 한국에 필요하고 급선무는 보수적 성서해석이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착수하게 된 것이 한국교회사에 한 획을 그은 「성서대강해」작업이다. 이 책은 당시로부터 교계의 대호평을 받아
증판을 거듭, 한국신학계에 3대 주석서의 하나가 되었다. 그후 1962년 2월까지 영암은 구약 전 3권, 신약 전 3권을 완성하여 초고
「신구약대강해」를 집대성하는 위업을 쌓았다. 누군가 마틴 루터에게 있어 종교개혁 못지 않게 그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문서사역이 더 큰
업적이라 했듯이 영암이 90평생 그리스도를 위해 수많은 일을 했으나 한국을 성경 위에 세우고자한 이른바 "성서한국"의 비전을 안고 "성서적
보수신학"의 교범으로 완성해 낸 「성서대강해」저술 작업이야말로 영암의 생애에 가장 큰 공헌으로 기록되고 있다. 영암은 후일 이 초고를 개작해서
1973년 전 12권 원고 약 5만매의「성서대강해」를 증보, 하나님과 한국교회 앞에 바쳤다. 현재 우리 학교에서는 이 「성서대강해」를 오고 오는
세대에 길이 전수하여 한국교회의 강단을 말씀으로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낡은 활자와 한문·고어체 문장을 현대문으로 고치는 개정작업을 1992년부터
진행, 현재 14권의 개정판을 출판하고 있으며, 오는 1998년도 상반기 중에는 완성할 예정이다.
이처럼 초인적인
정력으로 남달리 많은 일을 한 영암은 <성서대강해>를 전후하여 쉴 사이 없이 집필을 계속, 생애를 통하여 41권의 저작을 남겼다.
그의 저서를 연대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실천신학 목회학」(1973),「부인설교집」(1939),「말세와
예수재림」(1954),「성서아동설교집」(1937),「사막의 생수」(1954),「부흥의 불꽃」(1954),「다니엘서 강의」(1953),「설교예제
500문제」(1955),「기독전」(1956), 「바울전」(1956),「성서절기설교」(1959),「하늘의 만나」(1967),「하나님의 장막」
(1967),「기독교 2천년사」(1968),「황야의 과객」(1968),「성서난해구 해석」(1968),
「신구약성서답안」(1968),「구약성서대강해-상」(1959),「구약성서대강해-중」(1960),
「구약성서대강해-하」(1960),「신약성서대강해-상」(1961),「신약성서대강해-중」(19 61),「신약성서대강해-하」(1962),「성서적
정통신학」(1969),「구약역사철학」(1970), 「모범설교예제」(1973),「하늘의 메시지」(1971),「나는 기도해서 얻었다.」(1971),
「성서대강해-1」(1980),「성서대강해-2」(1981),「성서대강해-3」(1981),「성서대강
해-4」(1981),「성서대강해-5」(1981),「성서대강해-6」(1981),「성서대강해-7」(1981)
,「성서대강해-8」(1981),「성서대강해-9」(1981),「성서대강해-10」(1981),「성서대강해-11」(1981),「성서대강해-12」(1981),「사중복음-교리」(1985),「생수를
주리라-설교」(1988).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