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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情)이 가득한 교회
창세기 45:1~8, 마가복음 14:3~9
김기찬이라는 사진작가의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집이 있습니다. 과거 후미진 골목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을 흑백사진으로 담아낸 사진들을 모아 책으로 낸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정겨웠던 시절, 사진의 대부분은 마음속에 희미하게 묻혀 있는 오래된 기억의 조각이고, 점점 사라져가는 우리의 정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사진 몇 장 소개하겠습니다. 화면을 보시죠. 저는 저 사진들을 보는 순간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났습니다, 어느 날씨 추운 날 학교에 갔다 왔는데, 어머니가 안 계셨습니다. 그런데 조그만 쪽지가 경대(요즘의 화장대) 거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밥상은 부엌 마루에 차려 놓았고, 밥은 아랫목 이불 속에 있다.” 아랫목 이불 속으로 손을 넣으면 따뜻한 밥그릇이 잡힙니다. 가끔 뚜껑이 조금 열린 날에는 밥풀 몇 개가 이불에 불어 있습니다. 그 이불에 붙어있는 밥풀을 떼어 먹는 재미도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밥뚜껑을 여는 순간 맛있는 밥 냄새가 물씬 풍겨났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속으로 “엄마 냄새야.” 라고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습니다. 엄마의 정겨운 냄새가 배여 있는 밥그릇은 그냥 밥만 담은 밥그릇이 아니라 애정이 담긴 애정 그릇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대청마루에서 어머니가 이불을 시침질(천을 여러 겹 맞대어 듬성듬성 꿰매는 일)하고 있는데 그 이불보가 너무 뽀송뽀송해서 저는 누이와 함께 이불 위에 올라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거렸습니다. 어머니는 야단을 치기는커녕 귀여운 자식 이불 위에 마냥 내버려 둔 채 시침질에 열중이고, 이보다 좋은 마당이 어디 있냐는 듯 저와 누이는 엄마 앞에 마음껏 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넓고 따뜻한 이불은 엄마의 마음입니다. 엄마의 시침질은 사랑을 수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젠 세상이 각박해져서인지 그런 이불을 볼 수 없습니다. 정감이 물씬 풍기는 그런 이불이 그립습니다. 분명 옛날 보다는 잘 사는 세상이 되었다는데, 옛날 그 넓고 따뜻한 이불 같은 정감은 보기가 힘들어집니다.
한때 한국에 와서 일했던 외국인 이주노동자 가운데 인도네시아 출신 보나 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가 한국 체류기간이 끝나 자신의 나라로 돌아갈 때, 저하고 식사를 하면서 ‘한국’하면 뭐가 생각나느냐? 돌아가면 뭐가 제일 그리울 거 같으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재빨리 한국말로 대답합니다. “정이요, 정!” “정이라고? 너 정이 뭔지 아니? 어떤 게 정인데?” 이때 그는 말합니다. “우리 동네 슈퍼 아줌마가 우리 고생한다고 돈 안 받고 더 줄 때, 식당에 갔는데 자꾸 밥 더 먹으라고 공기 밥 퍼 주고 반찬 더 갖다 주고 그럴 때, 이런 게 한국사람 정이예요.” 참 잘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에 가장 한국인다운 정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정(情)’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독특한 인간관계를 말할 때 ‘정을 주고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정(母情), 애정(愛情). 우정(友情), 온정(溫情), 열정(熱情) 등의 단어가 자주 널리 쓰이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 ‘정’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영어로 옮기는 것도 어렵습니다. 정을 영어로 동정, 자비, 연민, 고마움, 친밀, 따뜻한 마음 등 여러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이 모든 표현이 정의 의미를 온전하게 담아내지 못합니다. <한국인의 의식구조>라는 책을 쓴 이규태 씨는 ‘정’을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만의 고유한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이어령 씨는 한국인을 ‘정으로 뭉쳐진 집단’이라고 말하면서 ‘정’을 가리켜 손에 확연하게 잡히지는 않는 것 같지만 달빛처럼 따스한 무언가가 그윽하게 가슴에 흐르는 힘이라고 말합니다.
초코파이 라는 제품하나로 오랫동안 과자 산업의 부동의 1위를 차지한 기업이 있습니다. 그 회사 초코파이의 특별한 맛도 있지만, 그 초코파이가 많이 팔리게 된 것은 TV 광고 효과도 톡톡히 보았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정 시리즈”입니다. 옛날 TV 광고를 기억이 하시는지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이야기는 백혈병에 걸린 한 여학생이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 침울하게 앉아있는 병실에 교복을 입은 한 친구가 찾아옵니다. 쑥스럽게 모자를 벗는 친구의 머리를 보는 순간, 환자복을 입은 소녀의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그 학생은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진 친구를 만나러 오면서 머리카락이 없는 친구가 무안해 할까봐 자신의 머리도 빡빡 밀고 온 것입니다. 이 때, 교복 입은 친구는 뒤에 감추었던 초코파이를 내밀며 말없이 웃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라는 가사의 노래가 나오며 자막에는 ‘情’이라는 한자가 큼지막하게 떠오릅니다. 그 순간 화면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도 정겨움을 안겨줍니다. 정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의 사람들의 심리를 노린 광고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정입니다.
정은 시간도 초월합니다. 한 번 만나 정이 드는 사람도 있고, 오랜 시간이 지나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기도 합니다. 정을 억지로나 강제로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정나미가 떨어지게’되는 현상도 나타납니다. 정은 어떤 예나 격식에서 오지 않습니다. 친절하다고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말할 때마다 ‘하이’, ‘하이’하며 친절하게 구는 일본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헬로’, ‘탱큐’하는 미국 사람들이 무조건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예의가 깍듯하고 친절하다고 누구나 다 마음을 열고 마음을 나누어줄 정 있는 사람들은 결코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예나 격식은 오히려 정나미를 떨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불친절하고 막말을 해도 정이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동네나 욕쟁이 할머니가 있습니다. 주로 식당 주인 할머니들이지요.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대체로 그 욕쟁이 할머니를 좋아합니다. 그 욕에서 흠뻑 풍기는 정 때문입니다. 정말 묘한 정이지요. 그 할머니의 욕은 정감이 서려 있는 욕이지요. 자신에게 잘해주어 예쁘게만 보여서 정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밉게 보여도 정이 생깁니다. 고운 정도 있지만 미운 정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45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본문은 야곱의 아들 요셉이 형들의 시샘을 받아 은 스무 냥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후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들과 극적으로 해후하는 장면입니다. 1절입니다.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은 “그 정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요셉은 정을 억제하지 못했을까요? 사실 형들에 대해 요셉은 깊은 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고 억울한 옥살이까지 합니다. 요셉의 인생 전반부는 한으로 농축되어 있습니다. 한은 피해자의 감정입니다. 한을 푸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복수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연을 철저하게 끊어버리는 결별입니다. 한에 대한 대응 방식은 철저하게 복수하고 결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수와 결별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더 큰 갈등과 분열의 관계로 초래할 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 이스라엘과 아랍의 수천 년 내려온 싸움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시는 같은 형제이면서도 이스라엘과 아랍은 복수와 결별로 해결 지으려고 했기에 끊임없는 갈등과 그로 인한 전쟁의 악순환을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수와 관계를 끊어버리는 결별은 다시 한(恨)을 깊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가족처럼 가까운 인간관계일수록 한을 복수 혹은 결별로 하는 것으로 풀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입으로는 ‘안 보고 살면 그만이지.’ 하지만, 마음의 눈은 언제나 그 쪽을 향해 있습니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옛 말은 결코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 때문에 한 맺힌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42:22에 의하면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버린 데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들이 자책하는 것을 몰래 들은 요셉은 통곡을 합니다. 2절입니다.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형들의 마음을 알게 된 요셉은 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의 한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한 맺힌 미움이 증오나 보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으로 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떠나갈 정도의 痛恨의 눈물을 흘리는 요셉에게 형들도 悔恨의 눈물을 흘립니다. 통한(痛恨)과 회한(悔恨)을 관통하는 것, 바로 그것이 정입니다. 오직 정만이 한을 무너뜨립니다.
힘으로 인한 복수를 통해 한을 푸는 것이 아니라 정을 통해 형제와 하나 되는 것, 여기서 요셉은 엄청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4~8절에서 요셉은 말합니다.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이곳에 나를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가뭄으로 인해 굶어죽게 되어 풍족한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에 대해 요셉은 자신에게 그토록 모진 고난을 입힌 형제들이었지만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며 자신을 이 고생길로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을 정으로 승화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분단된 우리나라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동족상잔과 이산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한반도가 통일을 위해 택해야 할 유일한 길은 무력의 길이 아니라 정의 길이라는 것을 요셉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별 대신에 정으로, 복수 대신에 정으로 60년 분단의 한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통일이 된다면 이 나라는 ‘정겨운 나라’ 가 될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이스라엘 대해 끙끙 앓으면서 미운 정 때문에 차마 심판하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신약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재산을 갖고 떠난 탕자인 아들을 기다립니다. 그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이지만 먼발치에서 보고 있다가 돌아오는 아들을 달려가 껴안습니다. 아들에게 버림받은 한 맺힌 아버지이지만 그 한을 정으로 풀어내시는 것입니다. 집은 가족이 사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꿈꾼 공동체는 가족처럼 정겨운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소외된 자, 가난한 자의 한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을 가족처럼 대하는 ‘정’이라고 여겼습니다. 정 많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최고의 의리파인 베드로도 소녀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1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왜 나를 배반했냐고 묻지 않고 제자들을 위해 손수 생선을 구어 아침상을 차리십니다. 그 아침상은 정감이 넘치는 상이였습니다. 십자가의 한을 품을 만한데 예수님은 정감어린 아침상으로 그 한을 무너뜨리십니다.
정은 일방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아픈 마음을 정으로 쓰다듬은 한 여인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을 주신 예수님이시기도 하지만 정을 받은 예수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14:3에서 한 여인이 예수님에 체포되기 전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여기에 박정(薄情)한 사람들은 그 여인의 깊은 정을 헤아리질 못하고 쓸데없는 낭비라고 비난하며 차라리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4:4~5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되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지를 책망하는지라.”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옳을 듯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의 함정입니다. 여러분, 비교를 통해 상대방의 아름다운 행위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오 헨리의 단편 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아내 델라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 짐의 시계 줄을 사주고 남편은 시계를 팔아 아내에게 머리빗을 사줍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크리스마스 날 남편과 아내에게 선물을 사주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더 훌륭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척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두 부부의 억제할 수 없는 애정을 말하는데 갑자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문제를 비교로 꺼낸다면 두 부부의 애정이 넘쳐나는 선물 교환은 천하고 수준 낮은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비교의 함정은 무서운 것입니다. 정말 정나미 떨어지는 비교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이에게 아빠와 엄마 중 누가 좋으냐고 묻는 질문과 같습니다. 아빠는 아빠대로 좋고, 엄마는 엄마대로 좋은 것이 아닙니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하고 예수님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정으로 비싼 향유 담은 옥합을 깨뜨린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비교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의 인간성입니다.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라는 질문이 좋은 질문이 아니라 아이를 당혹스럽게 하려는 짓궂은 질문이요,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의 심성이 짓궂은 심성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인을 비난한 사람들의 비교 역시 한 여인의 억제할 수 없는 정의 아름다운 행위를 격하시키려는 좋지 못한 마음이라는 것을 말해 줄 뿐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6~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 말씀처럼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마음만 먹는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남이 쓰는 돈 갖고 설왕설래만 할 뿐입니다. 내 돈 아니라고 제법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자기 돈 내라면 언제나 자기 형편 때문에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편은 제 욕심에 따라 달라집니다. 형편이 나아지면 남을 도울 수 있을까요? 깊이 생각해봅시다. 우리에게도 형편이 정말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옛 시절보다 지금은 한결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더 정 없는 사회, 정말 인정머리 없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형편은 언제나 더 나은 형편을 지향합니다. 사람의 욕심이지요. 더 나은 형편을 지향하는 한 지금 형편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하는 대로”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때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 없는 이 사회, 인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의 사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 여인을 비난했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하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 즉 ‘정’이 없었습니다.
여인은 지금 억제할 수 없는 정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정을 토해내는 순간, 계산은 없습니다. 계산적인 사람들은 이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 씩이나 된다고’ 계산하였지만 만일 그 여인이 더 비싼 향유를 살 수 있었다면 사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었을 것입니다. 정이 넘쳐나는 이 여인, 죽음을 앞 둔 예수님은 이 정을 담뿍 받으면서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런 정을 받음으로 예수님은 짧은 그의 사역 이였지만 그의 고난을 기꺼이 감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회의 문제가 밥에 굶주린 것이 아니라 정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은 살리는 일입니다. 정은 신앙입니다. 어떻게든 서로 오순도순 의존하며 살리는 것입니다. 살리는 일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은 신앙입니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그런 세상 한복판에 서로를 살리는 정겨운 공동체를 만들라고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정이 넘쳐나는, 정이 더 깊어지는, 정이 하늘까지 높아져 하늘 마저 감동시키는, 정을 억제할 수 없는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새찬송가 595장 - 나 맡은 본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