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 역사서 연구
이스라엘 역사에는 두 가지 종류의 기록이 있다.
하나는 신명기 역사(Deuteronomistic History)이며, 다른 하나는 역대기 역사(Chronicler's History)이다.
그러나 이 역사를 기록한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이지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들 역사가의 이름을 우리는 신명기 역사가, 역대기 역사가라고 부른다.
A. 신명기 역사
신명기 역사서에 포함되는 책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사무엘 하, 열왕기 상, 열왕기 하이다.
신명기 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신명기서의 중심사상을 근거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1. 신명기 사가에 대한 일반적 이해
신명기사가(Deuteronomistic)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의 2대 역사가, 즉 신명기사가와 역대기 사가 중 하나이다.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술의 의도는 자기 민족이 멸망한 후 포로가 된 암울한 시기에, 자신들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그래서 자기 민족의 미래, 즉 이스라엘의 "평화를 여는 시도"로 기록된 것이다.
마틴 노트는 처음으로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를 신명기 역사가의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신명기의 율법과 언어, 사상이 유사하고 교훈적인 말들도 유사한 점이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복잡하지 않고 기교가 없으며 정교하지 않다(언어의 특징: 구약에서 가장 쉬운 언어이다).
(2) 역사의 주요시점마다 중요인물을 내세운다.
(신-모세. 여호수아-여호수아. 사사기-각 사사들. 삼상하-사울, 사무엘, 다윗. 열왕기- 솔로몬).
(3) 주요시점에서 과거 미래를 상세히 서술하는 특징이 있다.
(4)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할 것을 강조한다(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단순한 편집이 아니고 계획적인 작품이다. 즉 신학적인 의도를 가진다.
결론적으로 신명기사가는 편집자일 뿐만 아니라 한 역사작품의 저자이다.
전승 받은 자료를 계획적으로 편집했다.
1943년에 간행된 마틴 노트의 저서에서 그는 신명기 역사서들이 바벨론 침입으로 인한 유대의 멸망과 예루살렘의 파괴, 그 후 포로기의 암담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과거사에 대한 재해석의 작업으로서 이루어진 저작이라고 주장하였다.
노트의 이론은 신명기로부터 열왕기까지의 저작들이 이스라엘 멸망을 과거를 통해 설명하려는 목적을 지닌 단일 저자에 의해 기록된 저서라고 보며, 그는 이 역사서를 신명기적 역사서라고 부른다.
2. 신명기 역사서의 구조 및 내용
1) 구조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1) 원신명기에 서론 부분이 첨가되었다(신 1-3장).
(2) 여호수아서 부분으로 가나안 정복과 야훼의 계약 성취로 나타난다.
(3) 왕국시대 이전에 겪었던 어려움이 기록되어 있다(사사들의 활동).
왕국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4) 왕조발생과 성장의 부분이다(삼상 7장-왕상 8장).
(5) 분열왕국 시작과 쇠퇴하는 왕국에 되한 부분이다.
기간은 모세시대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약 700년 동안의 역사이다.
2) 내용 - 이스라엘 역사 속에 현존하시는 야훼
(1) 모세를 통해 야훼의 존재가 전달된다(신1:1-삿2:10).
모세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점령을 위한 준비를 한다(신 1:1-32:52).
모세가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정착을 통해 이 축복이 성취된다(신 33:1-수 21:45).
여호수아의 마지막 연설, 계약체결, 가나안인과의 공존(수 21:1-삿 2:10).
(2) 야훼의 존재는 이스라엘의 주권자로서이다(삿2:11-삼상12:25).
이스라엘은 야훼의 부름을 받은 사사를 둔다(삿 2:11-8:35).
이스라엘은 스스로 세운 왕을 둔다(삿 9:1-52).
이스라엘은 야훼의 부름을 받은 사사들의 치리(삿 10:1-삼상 12:25).
(3) 야훼의 존재와 이스라엘의 왕(삼상13:1-왕하25:30).
사울의 등극(삼상13:1-삼하 1:27).
다윗과 솔로몬의 등극(삼하 2:1- 왕상 11:43).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국(왕상 12:1-25:30).
3. 신명기(Deuteronomy) 신학
신명기 역사 안에 나타나는 구원도식은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의 범죄 - 하나님의 심판 - 백성들의 회개 - 하나님의 구원
네 가지 사상은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관을 이룬다.
그리고 이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간섭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명기사가의 작품의 연대는 대체적으로 신명기책은 주전 7세기 후반에, 그리고 여호수아-열왕기는 요시아의 종교개혁 이후에 시작된 일차 편집 작업에 이어 바벨론 포로기의 이차 편집 작업에 의해 현재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B.C. 621년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고 그러한 신앙적인 관점에서 그때까지 전승되어 오던 오경을 기초로 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썼다.
신학적 의도
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멸망과 포로유배에 대한 일련의 대재앙들에 대해 신명기 역사가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해답을 주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계속된 배신의 역사였고 결국에는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적인 재난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것 때문이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2) 토라에 대한 순종과 실천에 대한 강조
토라에 대한 모든 준수는 율법적인 계명에 대한 실천의 문제를 넘어서서 이방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신앙에 대한 강조이다.
이스라엘은 야훼만을 따르고 섬겼는지 아닌지, 또한 왕이 야훼께 그 마음을 바쳤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몇 세기 동안 시험을 겪었다.
시험에서 얻은 결과는 사사시대나 왕정시대나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부정적이다.
특히 제의적 잘못에 대한 부분이 크게 부각된다.
이방신 숭배에 따른 제1, 2 계명의 위반은 이스라엘 전체의 구원과 멸망에 대한 기준이 되고 있다.
3)심판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의 선포
신명기 사가는 예언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성격으로 구분한다.
(1) 재앙의 선포
신명기 역사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예언자를 통하여 재앙을 선포하고 있다.
재앙의 모습은 이방인에 의한 남북왕국의 멸망이다(왕하17:2, 왕하24:2, 20:12, 21:10, 22:16, 23:27).
신명기 역사서 안에 자주 등장하는 야훼의 종으로서의 예언자는 재앙과 심판에 대하여 선포한다(왕하 17:23, 21:10).
(왕하 17:2)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다만 그 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왕하 24:2) 여호와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왕하 20:12)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왕하 21:10)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여 이르시되,
(왕하 22: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왕하 23: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왕하 17:23)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든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드디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내쫓으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2) 회개의 촉구
왕하 17:13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한 훈계의 예언적 메시지이다.
따라서 예언자의 역할은 훈계를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왕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지정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하고 또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3) 미래에 대한 예언 선포
이 부분은 특히 미래의 희망에 대한 메시지이다(왕상 8:46, 8:57등).
(왕상 8:46)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원근을 막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왕상 8:5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시던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시오며 버리지 마시옵고
4. 신명기 역사서 이해
<여호수아>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 계속하여 모세의 지도 아래 광야의 여정을 보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때 모세는 그의 모든 권한을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자신은 요단강 동편에 남게 된다.
여호수아서는 모세로 부터 영도권을 부여받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지역의 정착지 확보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점령하기 이전에, 사해 남쪽에는 에돔 왕국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는 모압, 시혼, 암몬, 옥등의 왕국들이 있었다.
요단 서편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중앙 정부 없이 도시 국가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여호수아서는 1장에서 12장에 요단 서편을 점령하는 기록이 있다.
먼저는 서편의 중앙지대를 점령하고(여리고, 아이 등), 다음에는 남부 지역인 기브온,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 마지막에는 북부지방(가나안 북부, 갈릴리 호수 북쪽의 하솔)에 대한 점령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3장에서 22장까지는 각 지파에게 영토를 분할하는 내용이 나오고, 마지막 23장에서 24장에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세겜에 모여서 그들의 신앙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린다.
여호수아서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가나안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힘과 용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 주셨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했던 땅에 대한 성취가 여호수아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주신 법(율법)과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와 함께 힘찬 첫 출발을 시작하였다.
<사사기>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은 지도자가 없는 기간을 갖게 된다.
주위에는 가나안 사람들의 침투가 있었으며 이를 해결할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여호수아 이후부터 왕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간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이름을 "사사"라고 부른다.
사사기 2장 16절에는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셨다고 하였다.
즉 사사는 왕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세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Charisma)을 받았고, 그 직분은 혈통으로 계승될 수 없었다.
이들은 왕권을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전시에는 싸움을 이끈 전쟁의 지도자였고, 평소에는 고향에서 사람들 사이의 중재를 맡는 판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사사시대에는 중앙 집권적인 정치권력이 없었으므로, 따라서 정규군도 존재하지 않았고 유사시에는 12지파에서 민병이 출동하여 이를 막아내곤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이러한 체제가 위협을 받게 되는데 주로 블레셋의 공격 때문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왕정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초대 왕으로 사울을 택하게 된다.
왕조 이전에 이들이 다스린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부르며 그 기간은 왕조가 수립 때까지 약 200년 동안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4단계가 반복되는 과정이다.
제1단계 - 이스라엘의 범죄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삿 3:7)
제2단계 - 하나님의 심판(징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삿 3:8)
제3단계 - 이스라엘의 회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삿 3:9a)
제4단계 - 하나님의 구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삿 3:9b)
이처럼 4단계의 과정이 사사시대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고 때로는 이방의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라고 신명기 사가는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 상,하>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사 중에 마지막 사람이었다.
사무엘 상하가 그의 이름에서 연유되어 표제가 되었지만 사무엘이 사무엘서 전체를 기록한 것은 아니다.
다만 왕조 초기에 블레셋과의 갈등 속에서 열두 지파를 연합시키고 왕정이 출발하는 데 필요한 사울이라는 인물을 발견하고 그에게 기름 부은 지도자였다.
사무엘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은 사울이며 그는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서쪽으로 몰아내고 암몬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동쪽으로 몰아내는 유능함을 보여 주었다.
그는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는 인정을 받았지만 내부의 통치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사울의 왕국이 아직은 과도기적 성격이 뚜렷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각 지파들은 아직까지도 중앙집권적이 아닌 지파동맹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왕권을 수립하기까지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수도로 정한 기브아는 왕궁에 해당할 만한 커다란 궁궐도 없었으며 관료제도나 행정조직도 발달하지 못했다.
사무엘 상하에서 집중점은 왕조의 발생과정과 초기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등극한 것은 약 1020년경이며, 사울의 뒤를 이어 2대왕으로 등극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는 사울과는 달리 왕조를 형성하였고 그의 왕조는 솔로몬을 이어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윗이 왕권을 수립한 후 다윗의 조정에서는 새로운 왕조신학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는 내용이다(삼하23:5).
이것을 다윗 계약이라고 부른다.
(삼하 23:5)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다윗 계약의 내용은 첫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으며, 그에게 영원한 왕조를 약속해 주셨다는 것이다(삼하7:8-17).
(삼하 7:8-17)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들과 이 모든 계시대로 다윗에게 말하니라.
둘째는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는 것이다(시132:13-14).
다윗 왕조의 수도 예루살렘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 132:13-14)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열왕기 상,하>
다윗이 죽고 그 뒤를 그의 아들 솔로몬이 잇게 되는데, 열왕기의 내용은 솔로몬의 등극 과정과 그의 통치, 남북의 분열과 열왕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의 업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성전 건축이다.
그러나 그는 이웃나라와 경쟁으로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였고, 여러 나라의 공주들과 정략결혼을 함으로 이방신 숭배 의식을 도입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는 궁궐의 막대한 예산을 꾸려가기 위하여 무거운 세금과 노동력을 부과하였다.
이런 결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으며, 급기야 북쪽의 열지파는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남북이 분열되고 말았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왕국을 수립한 후 단과 벧엘에 북왕국의 성전을 세웠다.
신명기사가는 이 행위를 북왕국이 저지른 죄 가운데 용서받지 못할 큰 죄로 보았다.
신명기에 규정한 "예배장소의 단일화" 원칙에 위배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신명기 사가는 계속적으로 북 이스라엘의 왕들을 평가하면서 북이스라엘에 대하여 부정적인 역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국력을 비교해 보면 남유다보다 군사적으로, 경제력으로 우월하였다.
그렇지만 북이스라엘은 정신을 집중시킬 마땅한 신학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 역사는 반란과 혁명이 연속되어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였다.
여로보암에서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19왕이 다스렸으나, 오므리왕조와 예후 왕조만이 각각 4, 5대의 짧은 왕조를 형성했을 뿐이며, 19명의 왕 중 8명이 암살되는 비운의 역사였다.
결국 북왕국은 건립 후 약200년 뒤인 호세아왕 때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 의해서 멸망당했다(주전 722년).
남쪽 유다는 르호보암의 중심으로 다윗의 왕조가 계속 지속되었다.
계속적으로 수도 예루살렘은 정치, 종교적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렇지만 다윗왕조가 백성들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그런 훌륭한 왕조는 아니었다.
남유다의 왕들 중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두 왕이 있다. 히스기야와 요시아이다.
히스기야는 주전 715-687년에 통치한 왕으로 정치와 종교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정치개혁을 살펴보면,
유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 앗수르의 침공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앗수르에 많은 조공을 받쳐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정책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앗수르의 사르곤 대왕이 죽은 뒤 그 아들 산헤립이 즉위하자 이틈을 타서 바벨론에서 반기를 들었고,
블레셋, 모압, 에돔, 그리고 애굽이 반앗수르 정책을 취하였고, 히스기야도 이 대열에 가담하여 그 동안 바쳐오던 조공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요새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자주 독립정책은 산헤립의 보복적 침공으로 좌절된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모든 성읍은 점령당하고 많은 공물을 받쳐야만 했다.
다음으로 종교개혁을 알아보면,
히스기야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끝났지만 정치개혁과 동시에 실시한 종교개혁은 앗수르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종교적인 물건들을 성전에서 제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토속종교의 산물인 산당, 주상, 아세라 목상 등을 제거하였다.
이때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구리뱀도 부수어 버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유월절 행사이다.
이 유월절 행사는 거국적으로 계획되었으며, 북이스라엘의 유민들도 초청하였다.
아무튼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실시한 히스기야의 개혁들은 박수를 보낼 만하다.
요시아는 아몬의 아들로 아몬이 신하들에게 살해당한 후 겨우 여덟 살에 왕위에 올랐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나쎄는 히스기야의 개혁을 모두 원점으로 돌려 놓았으며, 이러한 영향이 아몬에 이어 요시아에게 까지 미쳤다. 요시아는 기세가 꺾이는 앗수르의 모습을 보면서 사마리아와 므기또, 갈릴리 지방을 유다에 합병시켰다.
결국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므로 요시아의 정치개혁은 비교적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정치개혁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다.
이때 성전을 수리하던 중 율법서가 발견되었다.
종교개혁은 이 율법서의 발견으로 더욱 활기를 띄었으며, 율법서를 기준으로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합법적인 성전이라는 정책으로 지방의 모든 성소는 폐지 시켰으며, 앗수르의 모든 제의를 금지시켰다.
이처럼 유다의 왕 중에 히스기야와 요시아는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신명기 사가는 이들 역시 비판을 한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해 종말을 고하게 된다(주전587년).
그러면 왜 유다는 멸망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유다왕들의 불순종이었다.
대표적으로 므낫세 왕은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과 같이 유다 역시 버리겠다고 한다(왕하23:26-27, 왕하 24:3-4).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왕하 23:26-27) 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2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택한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에 두리라 한 이 성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왕하 24:3-4) 3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 때문이며 4 또 그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의 피가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열왕기의 기록은 포로로 잡혀온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중 옥에서 풀려 나오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왕하25:27-30).
(왕하25:27-30) 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윌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이월 그 달 이십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신명기의 역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생활을 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왕정이 수립되고, 분열되었으며,
두 왕국이 각각 멸망할 때까지를 기록하면서 이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를 기록 보존한다는 차원 이상의 것으로 신명기 사가는 신명기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과거역사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속된 배신의 역사였고 결국에는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B. 역대기 역사
1. 일반적 이해
역대기 사가(歷代記史家)의 역사서란 역대기상하, 에스라, 느헤미야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 역사서를 기록한 기자를 "역대기 사가"라고 부른다.
역대기 역사는 신명기 역사를 토대로 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재정리했다.
신명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는 같은 시기(왕조역사)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서로 대조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였고 따라서 두 역사가의 서로 다른 의도와 목적이 비교되면서 연구되어 왔다.
신명기 역사서가 여호야긴의 석방 사건을 끝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역대기의 역사는 인류시초인 아담에서 부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포로귀환 공동체 시대까지 기록하고 있다.
특히 포로귀환 이후 시대의 기록은 유대교 발생의 배경이 되기 때문에 중요시되고 있다.
우리가 역대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소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이란 2세대에 걸친 오랜 세월이었고,
자연히 포로지에서 탄생한 2세나 3세들이 귀환 공동체의 대부분을 구성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이 매우 낯선 고장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과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남아있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에서도 순수한 야훼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바벨론에서도 안식일과 회당제도를 통하여 순수한 야훼 신앙의 과거 전승을 되새겼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의 이스라엘 전승을 이어 받아서 그것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문서화해서 가지고 온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의 출애굽과 시내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던 야훼종교라는 커다란 줄기를 이어받은 부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소위 "땅의 백성들"이라 하여 그 곳에 남아 이방 종교와 타협하였다.
즉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지고 난 후의 70년이란 공백 기간 동안 그 땅을 지배하던 이방인들의 종교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일제 신사참배와 비교).
이런 상황 속에서 누가 진짜 유대인인가?
누가 진짜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인가?의 문제가 제기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역대기 역사가의 대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제시되었다.
1)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예배 계승이다.
스룹바벨의 제2성전은 규모, 규격, 예배순서가 솔로몬의 성전과 같다.
포로귀환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야훼 예배를 통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2) 순수한 혈통을 찾는다.
바벨론에서 돌아 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본토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 되어 있다.
왜냐하면 본토에 남이 있던 사람들은 제사장까지도 그 땅을 지배하던 사람들과 피가 섞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라-느헤미야서에는 개혁시 이방사람과 결혼했던 사람들은 제사장일지라도 파면시킨다.
즉 과거 전승의 연속과 순수한 혈통의 보존을 통해서 역대기 역사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특히 역대기 기자는 다윗 통치에 대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담에서 사울까지 족보 역사를 역대상 1-9장에, 다윗 왕조를 10-29장까지 19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어서 다윗의 역사를 역대기 전체 분량의 3/1이나 차지하게 하고 있다.
역대기 사가가 다윗을 강조한 이유는 그의 독특한 신학에서 비롯되었기에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그가 그처럼 다윗을 강조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무엘서를 대본으로 다윗의 일기를 기록할 때 다윗의 명예를 손상시킨다고 생각되는 곳은 모두 삭제한 것이다.
가령 사울의 죽음을 탄식하는 부분, 다윗과 사울왕가와의 분쟁, 다윗왕궁 내부의 암흑상, 그리고 밧세바의 사건이나 압살롬의 사건은 일언 반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다윗과 그의 시대를 이상화했고, 다윗이 종교의식의 규정을 훌륭히 지켰고, 성전제도가 군주제의 처음부터 있었던 것처럼, 긴 추가문을 수록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보아 "역대기" 저자는 후세의 유대교 확립 이후, 성전 제사장의 한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다윗은 이상적인 왕이며, 이상적인 시인이며, 이상적인 종교가로 추앙하게 되었고, 여기에 메시아 사상의 메시아의 원형으로 다윗을 부각시키게 된 것이다.
다윗이 메시아상까지 추앙된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다윗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본적이 없다.
다윗시대 때는 통일국가였으며, 주변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평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독립국가 체제를 잃어버렸고 외국에게 지배당한 상태이며, 과거의 영광을 되돌아보던 시기이다.
그들에게는 언젠가 다윗과 같은 힘을 가진 메시아가 나타나, 외국을 섬멸하고, 신의 백성을 구출해 줄 것이 틀림없다고 믿는 것은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런 생각들은 다윗을 이상화하고, 메시아의 모습으로 다윗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메시아는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신앙도 생겼다.
2. 역대기 저자 문제
역대기 사가는 누구인가?
탈무드에서는 역대기의 저자를 에스라로 규정하고 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에스라의 신분이 서기관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그가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후대에서는 에스라설을 부인하고 역대기 기자는 레위인으로서 제사적인 임무를 가지고 있던 성전 직원 중의 한사람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제사장보다는 레위인에게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는 다음과 같이 역대기의 저자가 요약된다.
1) 한사람이 전체를 다 기록하였다.
2) 저자는 두 사람이거나 한 학파이다
3) 역대기 역사서는 각각 그 저자가 다르다.
3. 시대적 배경
역대기 사가에 대한 시대적인 배경은 포로귀환 이후 시대이다.
즉 516년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 이후에서부터 그리스 제국의 확장시기까지이다.
유다를 점령하고 포로를 끌고 갔던 바벨론은 주전 6세기(599-500) 초엽까지만 하여도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페르샤의 고레스가 바벨론의 동편에 있는 메대와 페르샤 두 왕국을 하나로 병합하고 바벨론을 공격하고 드디어 주전 539년에 승리한다.
제국의 영역을 더 넓힌 고레스는 여러 민족의 고유한 관습과 종교를 신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유대민족은 따라서 포로귀환과 동시에 성전을 재건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왕성하던 페르샤 제국도 어느듯 사양길에 접어들게 된다.
페르샤 대왕 다리오는 새 수도를 페르오폴리스에 세우고(페르샤만 바로 위쪽, 인도와 가까운 지역) 인도 서부 지역을 정복하였다.
그리고 513년 그리스 지역인 마케도니아를 정복하였지만 490년 마라톤에서 그리스 군에게 패배한다.
그 후 페르샤는 바다에서도 패배하였다(살라미스 해전). 그 후 페르샤와 그리스는 힘의 균형을 어느 정도 이루면서 다투었으나, 주전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에게 패망한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 속에서 아직 까지 주권을 회복하지 못한 유대민족은 강대국의 이권 속에서 이리 저리 밀리는 신세가 되었다.
우선 페르샤 시대 때, 유대는 페르샤의 각 민족의 관습을 우대하는 식민지 정책에 힘입어 유다지역에 총독을 두고 자치 기구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미 자치기구를 인정받았던 사마리아가 유다지역을 계속적으로 예속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느헤미야 등은 유다지역을 독립적인 자치기구로 인정받기 위하여 노력한다.
사상적인 면에서 유다지역은 페르샤의 멸망과 더불어 잘 발달한 헬라의 정치와 제우스신을 비롯한 다신론, 이원론 등 철학(아리스토텔레스-알렉산더가 영향 받음, 소크라테스 등) 유입으로 야훼 유일신 사상이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 페르시야 문화가 끝나고 희랍문화가 봇물 터지듯 휩쓸려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야훼종교의 전승을 이어갈 수 있느냐는 역대기 사가가 당면한 과제였다.
이것은 외부적인 어려움에 해당한다.
그러나 외부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그것은 그토록 원하던 성전 재건이 이루어 졌는데도 여전히 페르샤의 속국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국에 대한 실망과 열등감이었다. 이런 어려움은 특히 제의 분야에서 더욱 고조되었다.
그 모든 이유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의 분야에서 타락이 초래되었고(말라기의 내용), 이런 타락은 유다전역에 걸쳐 악을 다스릴 수 있는 가치기준을 흐려지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민족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해 줄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역대기 역사를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일제 식민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민족사관을 주장하였듯이 역대기 사가도 잘못된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다의 멸망이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됨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다윗왕 시절처럼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부흥을 희망하였던 것이다.
4. 자료
역대기 사가는 대체로 현존하고 있는 자료들, 곧 신명기 역사서인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자신의 중요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맞춰 따라가면서 자신의 역사서를 서술하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에 도움을 주는 자료를 선택하고 발췌하였으며, 신명기 역사서에 전혀 담지 않은 특수 자료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공문서, 전기, 실록, 제표 등의 문헌, 구전 및 예언집, 성전 및 관청의 서고 자료 등을 이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역대기 사가가 사용한 자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용한 자료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 자료 (족보책, 역대지략)
(2) 정경에서 온 자료
(3) 느헤미야의 실록
(4) 에스라의 보고문
(5) 아람어로 된 자료
(6) 명단록
5. 역대기 역사의 구조
(1) 아담에서 포로귀환민까지의 계보와 명단 : 역대상 1장-9장
(2) 다윗의 통치 : 역대상 10장-29장
(3) 솔로몬의 통치 : 역대하 1장-9장
(4) 분열 왕국의 역사(남유다 중심으로) : 역대하 10장-36장
(5) 제1차 포로귀환과 성전재건 : 에스라 1장-6장
(6) 에스라의 귀환과 개혁 : 에스라 7장-10장
(7) 느헤미야의 1차 개혁(성벽 재건) : 느헤미야 1장-12장
(8) 느헤미야의 2차 개혁 : 느헤미야 13장
6. 포로기
바벨론에 의한 남유다의 멸망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722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함으로 이스라엘은 전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으며, 많은 사람이 포로로 끌려가고, 낯선 이방 민족이 들어와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하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파동맹적 전통이 남왕국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초점이 남유다에 향하게 되었으며 모든 전통이 유다에 있었다.
그러나 남유다마저 바벨론에게 함락 당하자 이스라엘은 국가도, 주권도 없는 식민지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권국가의 백성에서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되고 세 차례에 걸쳐(렘 52:28-30)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때 포로로 유배당한 자는 비교적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역하 24:14) 여전히 팔레스틴에 남아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지었다.
앗수르나 바벨론은 팔레스틴을 정복하면서 지도층 인사와 유력한 사람을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요새화된 성읍을 철저히 파괴하였고(애가 2:2,5)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한편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은 포로민으로서 특별한 고초를 겪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포로민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바벨론에 복종한 뒤에 얻어지는 것이며 대부분은 나라 잃은 설음과 분노로 살아갔다(시 137편).
이 시기에 또 다른 특징은 바벨론 이외에도 다른 지역으로 유다 백성이 흩어져 갔다는 것이다.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모여 하나가 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분열왕국을 거치더니 급기야는 타민족의 지배로 인해 그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존립이 끝나고, 그 제도도 아무 가치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지켜오던 제의도 지속될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 볼 때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의 국가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위기의 상황은 여러 번 반복되었다.
첫 번째는 광야의 시기이다.
이때는 주위의 환경이 너무 어려웠으므로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희망이 약해져서 이스라엘은 유랑자의 모습이 되었다.
이 시기는 땅 없는 시기였고 그로 인해 그들에게는 생존권의 위협을 받는 시기였다.
이런 외부적인 조건으로 인해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간다는 생각은 포기하거나 잊혀진 것이며 아울러 야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거나 망각한 것으로 나타난다. 신앙적인 위기 상태였던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포로기였다.
이때도 물론 땅이 없는 시기였다.
이스라엘의 왕조시대는 야훼 하나님이 함께 동행한다는 신앙고백이 그들의 국력만큼이나 커지는 시대였다.
특히 다윗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그들은 인접 국가들에게까지 야훼신의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다윗 왕조의 깃발이 내려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다른 나라들처럼 될 위험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직접 겪은 어려움은 그들이 속한 땅을 떠나 바벨론으로 이주를 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분은 더 이상 자유민이 아니었고, 주권을 잃어버린 식민지 백성으로 그들의 생활 주거를 옮겨야 하는 처지였다.
우리는 그 일행을 바벨론 포로라고 명명하지만 그 당시의 포로는 현대개념의 전쟁포로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포로들의 생활 모습은 성경구절을 통하여 볼 때 바벨론 이주 후 감옥에 갇히거나 눈에 띄는 압제나 학대의 내용이 문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 정체성과 안정을 가져다주었던 곳으로부터 추방당한 상태에 있었다.
포로기 동안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삶의 모든 조건들과 형식들로부터 소외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위기였다.
그것은 문화적인 면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화가 열악한 팔레스틴에서 비롯된 절제가 강조된 문화라면 바벨론은 그 반대로 팔레스틴 지역보다는 풍부함에서 비롯된 문화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문화는 바벨론의 문화 속에 흡수되거나 사장되어 버릴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더구나 고대사회의 문화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으며 이스라엘의 야훼사상이 바벨론의 종교들에 휩쓸려 그 정체성을 잃게 될 위험성이 짙었다.
이 위기는 유랑하던 광야시절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P기자에 대하여
사경(창, 출, 레, 민)은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는 수차에 걸친 편집단계가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
최종적인 편집은, 유대 왕국이 망한 후, 바벨론 포로기 동안 사제(P기자)기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P기자에게는 또는 편집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고유한 사제적 전승 자료들이 있었다.
특히 제의에 관한 제도나 규율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사제들에 의해 발전되고 보존된 전승들이었다.
P기자는 자신의 뚜렷한 신학적 견해와 의도를 가지고, 전승된 사제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거기에 고대 전승자료(이미 J와 E가 합해져서 JE가 된 Old Epic Traditions)들을 첨가하여 신학적 저작을 형성하였다.
P기자의 시대 구분( B. W. Anderson의 견해)
(1) 창조의 단계로서, 하나님의 안식으로 종결된다.
(2) 노아의 단계로서, 대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땅의 모든 생물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하늘의 무지개는 이 노아계약의 표징이 된다(편무계약-일방적계약)
(3) 아브라함 족장의 단계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대대로의 후손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다.
할례는 이 계약의 표징이다(창 15장, 자손번창과 땅 약속-편무계약).
인간에게는 책임이 없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
(4) 시내산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의 단계이다.
이때의 표징은 안식일이다.
이 시내산 계시의 특별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다.
모세계약이라고 부른다(출19장-24장).
쌍방계약(하나님과 이스라엘)으로 만약(if)~계약을 지키면......, 으로 된 조건부 계약이다.
쌍무(방)계약은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에 따라 지속된다.
이 계약은 국가가 형성된 후에도 북쪽 이스라엘에서 신학적 주류를 이루었다.
왜 P기자는 이와 같은 계약사상을 고취 시켰는가?
P기자의 역사적 정황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7세기 말에 바벨론 제국이 재기하더니 6세기 초에 그 힘이 남쪽 유다에 미치었고, 587년에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유다왕국은 종말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이스라엘의 지도급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또한 신학적 위기였다.
이때에는 남왕국을 지배하였던 다윗 계약 신학도 비운의 역사적 사실 앞에 흔들리게 되었다.
다윗계약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왕과 "영원한 계약"을 맺으셨다(삼하 23:5).
중심내용은
(1)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 왕조의 영속을 약속하심.
(2) 시온의 성전을 그가 거하시는 성소로 택함(시78, 89, 132).
이런 다윗 계약은 유대왕국의 멸망과 예루살렘이 초토화되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성이 되었다.
이것은 메시아 기대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다윗계약에 의하면 여호와가 시온을 자기의 거처로 선택했다는 것과 다윗왕조가 영원히 통치하고 그 원수들에게서 승리하리라는 약속이 불변하다고 하였지만 역사적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호와긴이 포로로 끌려와 바벨론 궁정에 있었지만 허수아비 같은 유다의 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거짓말쟁이인가?
이 물음에 선지자(특히 예레미야, 에스겔4-5장)들은 모세 계약의 특징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에 내린 심판이다라고 해석하였다.
모세계약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전망도 암담하였다.
이때 P기자가 아브라함의 계약을 재발견하였던 것으로 본다.
P기자의 신학을 정리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이스라엘의 불복종으로 말미암은 역사적 심판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브라함 계약에 근거한 것으로 이스라엘의 불복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서약에 의하여 영구히 존속한다는 것이다.
이런 명백한 메시지를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포할 목적으로 붓을 들었던 것이다.
첫댓글 귀한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