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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고찰
짝사랑
흔히 ‘사랑하고 싶다’고 말 할 때 그것은 ‘사랑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애초 이러한 사랑에는 이기성이 개입되어 있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내게 보이는 관심과 보살핌을 통해 내가 사랑을 받고 있어서 느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 때 느끼는 기쁨이 행복은 될지언정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나)가 타자(너)를 향하여 관심에서 비롯된 행위를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의 행위로서 사랑은 하는 것, 곧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이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주체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주체의 사랑은 의지와 반하는 끌림(인력)에 의한 반응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성에 대한 사랑의 경우는 타자의 매력에 대한 끌림(인력)이 사랑에 앞서 일어난다. 이에 반해 타자의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된 사랑은 공감요인에 의해 발휘되는 사랑으로 넓은 의미의 아가페에 속하며, 아가페는 순수한 의미의 이타적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공동체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에 의해 작동되는 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의 자극이 타자로부터 주어지지 않고 주체의 내면에서 발현되는 사랑의 범주도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자발적인 사랑이며 그것을 종교적 영적 사랑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유형을 분류해나가자면 더 세분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공동체(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의 사랑에 한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다시 주체의 의지를 앞서는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와 보자. 이것은 동물적 성본능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짝사랑을 생각해보자. 짝사랑은 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사랑의 원형이다. 하지만 짝사랑은 아픈 사랑이며 슬픈 사랑이다. 사랑의 대상인 타인이 나의 관심과 보살핌을 거부하거나 피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쪽팔리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해보자. 이렇게 상대로부터 긍정적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사랑일 때, 그 사랑은 짝사랑이며 짝사랑은 상처가 된다. 나(주체)는 사랑하지만 비참과 불행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의 원형인 이성에 대한 짝사랑의 불완전함으로 고통 받는다. 심지어 짝사랑은 기억의 폐쇄회로에 갇혀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베르테르의 슬픔’은 결혼제도를 통한 사회의 억압과 인간이 타고난 기억의 부작용 때문에 자살로 귀결된다. 엄밀한 의미에서 베르테르의 사랑에는 상호성이 개입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제약이 그것을 짝사랑이 되게 하고 말았다. 이렇게 좀 더 억압적 사회에서 짝사랑은 스토커나 성폭력 같은 사회병리학적 비정상성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한 마디로 이성을 향한 자연의 명령은 사회적 금지와 줄다리기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명령은 여전히 현대와 같은 문명인들에게도 가혹하다.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사랑을 갈구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공동체(사회)’와 ‘동물’의 이중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말하자면 모든 사랑은 이중적이고 이중구조 안에서 작동한다. 성본능과 공동체본능이 혼합되어 작용되는 것이다. 성본능이 작용하는 세속적 사랑으로는 사랑의 원형인 짝사랑과 이상형인 상호사랑이 자리 잡는다. 이타적 사랑과 영적 사랑은 공동체본능이 우세한 사랑이라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받기를 원하지 않고 주는 사랑은 종교적이고 때로 희생적이어서 숭고한 사랑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대와 같은 이기적 사회에서 이타적 사랑과 영적 사랑보다 세속적 사랑이 더 큰 중심을 이루고 있고, 공동체적 사랑의 범위는 그것이 여전히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될지라도 축소되어 있다.
아마도 세속의 이상적 사랑은 이성(남녀)의 상호사랑일 것이다. 사랑의 원형인 짝사랑이 이성에 대한 일방적인 사랑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세속의 사랑은 사랑이 가진 본래적 의미 곧 주체가 타인에게 관심과 배려를 보이는 일방향의 짝사랑 대신, 주체가 타인에게 베풀고 타인도 그에 응답하며 상호교섭을 지속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게 된다. 이 안에는 이기적 요소와 이타적 요소가 함께 엉켜 있다. 따라서 ‘사랑하고 싶다’는 말의 ‘사랑하다’는 앞에서 얘기한 관계의 일방적 방식인 짝사랑 대신, 상호적 방식 곧 상호주관적 교섭의 지속을 의미하는 상호사랑을 의미하게 된다. 세속적 사랑의 이상인 상호사랑을 표현한 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호주관적 교섭의 지속이라는 특성으로 사랑은 자연스럽게 가족과 같은 공동체성을 지향하게 된다.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은 엄격히 이분되는 것이 아니라 뒤섞여 있고 전이되고 확장된다. 그것은 사랑의 방향이 기본적으로 주체에서 타자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본응은 공동체본능으로 전이되고 확장될 수 있다. 사랑 안에 점차 이타적 특성이 강화되어 간다. 그것은 인간이 공동체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개인으로 만족하는 동물이 아니다. 공동체 안에 조화로운 개인을 지향한다. 따라서 사랑의 성격도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그래서 ‘상호주관적 교섭의 지속’으로서의 상호사랑은 성을 단순한 짝짓기의 수단으로 이해하는 피상적인 수준을 벗어나 보다 고차원적인 공동체로 지향하려는 유동적 힘도 가지게 된다. 공동체본능이 우세한 이타적사랑과 영적사랑만이 고차원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사랑의 담론은 다양하게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보노보
유전과 습성 면에서 인간과 가장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침팬지와 보노보를 떠올려 보자. 다소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지만, 침팬지의 권력 위계적 공동체와 보노보의 성적 친화의 공동체는 다양한 인간사회를 성찰할 수 있는 양극단의 사유모델을 제공해준다. 사회적 관계형식을 규정하는 것이 하나는 힘(폭력)을 중요 동인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성을 중요 동인으로 삼고 있다. 물론 침팬지라고 해서 폭력으로만 관계가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위계 서열 내에서 안정을 위해 털 고르기 등 끊임없는 상호교섭이 병행된다. 그리고 이런 부단한 교섭의 방식으로 공동체의 결속력이 공고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비록 폭력이 위계관계로 한 공동체의 질서를 창출하더라도 곧 긴장을 해소하고 결합과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상호교섭 행위들을 실행하게 된다. 그래서 전쟁과 사랑 또한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보노보는 부단히 다대다(多對多)의 성적 교섭을 통해 친밀에 의한 조정력을 창출하고 침팬지보다 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성은 공동체 결속의 욕구와 기능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보노보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하지만 보노보에는 못 미친다. 선사시대와 원시사회 중 일부에서는 보노보와 유사하게 다양한 성적 상호교섭을 통한 자유와 평화의 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드물게나마 지금도 15세 전후에 성인식을 치르면 완전한 성적 자유를 누리는 원시공동체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결혼의 유형도 일부일처만이 아니라 일부다처 외 일처다부 등 여러 유형이 존재한다. 이런 다양성은 인간의 공동체 안에서 성이 결속의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당장 신라시대 기록에 남은 귀족과 화랑들의 성적 자유는 현대를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에 남겨진 성희를 즐기는 토우들의 모습을 보면 성에 대한 사회적 금지보다 관대와 개방이 느껴진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사시대의 초기사회와 원시사회에서 성이 공동체의 결속과 화합에 보노보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화 과정을 통해 성의 보노보적 자유와 평화는 동물적 본성으로 배제되어 왔다. 대신 문명의 발달은 권력과 위계를 동력으로 삼는 침팬지의 양식으로 발전해온 듯하다. 성을 평화로운 결속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보노보와는 달리 인간의 문명사회들은 점차 침팬지적 권력에 의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사회를 만들고 그에 맞는 결혼과 가족 제도를 구축하게 되었다. 자유로운 성은 점차 결혼과 가족 제도 안에 갇혀 금지되게 되었다.
자고로 문명사회는 법과 도덕으로 성을 금지하고 처벌하기 시작했다. 고대문명의 모든 법규와 종교는 세속법과 십계, 오계 등의 종교계율을 통해 살인, 도둑질, 강간을 첫 번째 금기로 선언하고 있다. 위계사회의 구조가 보다 강화될수록 성의 억압도 강화되고 문제도 많아지게 되었다. 성과 공동체 사이의 사랑의 이중성 문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회적 고질병이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은 공통적으로 침팬지적 권력과 위계에 의해 사회를 발달시켜온 결과 고도의 피라미드 사회를 만들게 되었고 성을 억압하는 각종 사회적 제도를 창출하게 되었다. 특히 근대 유럽문명은 가부장이 지배하는 사회의 전형을 국가, 군대, 자본이 결합한 무소불위의 복합체로 구성하게 되었다. 프로이트가 근대가 설정한 부르주아 가족주의의 성억압을 포착하고 인간심리의 원형적 구조를 부르주아 가정 안에서 찾은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만큼 프로이트가 부르주아 가족주의의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명에 의해 설정된 성과 가족의 이데올로기가 프로이트에게도 여전히 내면화되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사회도 마찬가지다. 이슬람, 유교, 불교문화권도 가부장의 권력에 의한 사회구조와 성의 억압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폭력(힘)의 행사를 무력화시킬 만큼 사랑과 평화가 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호모 파베르적 인간은 끊임없이 수단을 발명하고 확장하는 종이다. 발명과 기술의 힘은 점차 인간문명을 침팬지들이 가진 유동성을 압도하는 위계고정의 가부장사회를 구축한 것이다. 즉 인간은 단순한 공동체적 동물이 아니라, 공동체에 구속된 동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에 억압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폭력의 법에 맞서며 평화의 사랑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19세기에는 폭력에 맞서는 사랑으로 성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계몽사상 이후 자유주의의 대두와 함께 아나키즘과 페미니즘이 그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사드와 푸리에
19세기 사드와 푸리에로 대변되는 성의 담론을 살펴보자.
왜 프랑스일까? 영국과는 달리 절대왕정의 귀족국가였던 프랑스야말로 중앙집권적 위계국가의 전형이었다. 1789년 그것을 깨는 프랑스혁명이 있었다. 사드의 『소돔의 120일』은 이런 폭력적 힘의 위계에 의해 구축된 권력이 성을 왜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도이즘 등의 온갖 변태성욕 파티는 폭력을 독차지한 권력자들의 성적 폭력이자 짝사랑파티였다. 거기에 주체와 상호교섭 할 대등한 타자란 없다. 타자는 물질화하여 동물과 동급이거나, 추락한 인간이기에 그 이하다. 타자의 유동적 변형에 의한 변태성욕이야말로 상호성이 차단된 폭력적 권력이 취할 수 있는 유일의 사랑이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역겨운 고백 이상이 아니다. 상호성이 차단된 짝사랑이 폭력의 힘을 빌려 벌인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략은 사랑의 불능과 성의 불능을 의미할 뿐이다. 대신 폭력에 의해 뒤틀린 성을 예술이 판타지로 미화할 뿐이다. 평등한 타자가 없는 짝사랑의 성은 절대권력을 쥐는 순간 변태성욕이 될 수밖에 없다. 절대권력은 타자학살의 변태성욕 판타지로 종결된 뿐이다. 사드는 프로이트에 앞서 프로이트보다 더 예리하게 시대를 통찰하였고, 역사적 권력과 성의 결합을 가장 예리한 판타지로 비판했던 것이다.
우리는 구약의 소돔성에 내린 저주도 기억한다. 제목에서 연상되듯 사드의 책은 구약의 18,19세기 번역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소돔성 이야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안에 권력은 비판받고 있지 않다. 다만 문란한 성과 탐욕스런 이기심이 비난 받을 뿐이다. 그리하여 소돔성의 타락은 소돔에 사는 거의 모든 인간의 종적 타락으로 규정받고 처벌받는다. 사드가 통찰한 폭력에 의한 지배에서 파생한 타락과 다른 것이다. 소돔성은 폭력에 의한 위계 사회의 문제를 간과하고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치환하여 인종적 해결로 처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악의 도덕적 이분법은 냉혹한 폭력과 닮게 된다.
그러나 사드의 시기 푸리에는 폭력적 위계사회의 지배와 착취, 그리고 억압된 성을 해방할 새로운 사회를 제시한다. 그의 팔랑주(공동체)는 일종의 보노보 사회이다. 팔랑주에서 사람들은 평등하고 서로를 성적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타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성을 사용한다. 팔랑주의 사랑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짝사랑을 넘어서는 일대다(一對多) 다대다(多大多)의 상호사랑이라는 점이 다르다. 마치 화랑도에서 한 명의 뛰어난 원화가 있어서 20~30명의 화랑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이성은 물론 동성과 양성 모두에게 성이 개방된다. 프리에의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를 보면 모든 가능한 성의 조합이 공동체의 화합을 위해 허용된다. 물론 이기심과 질투에 대해서 경계를 하기도 한다. 프리에가 성을 자유롭고 평등한 신세계를 열어가기 위한 적극적인 수단으로 삼은 것은 너무나 혁신적인 일이었고, 시대를 앞선 통찰이었다. 보노보와 원시사회에서 보여줬던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바로 성을 통한 일대일의 친밀함을 다대다(多大多)의 친밀함으로 확대해 공동체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다. 일방적 짝사랑의 왜곡된 모습인 권력에 의해 독점적 성이 아니라, 타인의 응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타인을 기쁘게 해주는 적극적 방식으로서의 세속적 사랑도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상호사랑도 다른 형식으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20세기에 푸리에적 문제의식은 빌헤름 라이히에게 계승된다. 라이히는 성해방을 통해 권력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푸리에의 의도를 정확히 계승하고 확장하였다. 특히 라이히는 노동자와 학생의 성억압과 자유를 파고 들었다. 하지만 라이히의 성해방론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좌우 모두에게서 배척받게 된다. 오직 니일의 섬머힐 학교가 라이히가 제기한 아동의 성적 자유 문제를 교육에 적용한 중요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라이히의 문제의식은 20세기 후반 히피문화와 패미니즘에 자양이 되기도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성에 대한 급진적 자유론을 폈던 라즈니쉬라는 신비가도 있었다. 물론 그의 말로도 라이히처럼 누명과 배척으로 끝나고 말았다. 1975년 『살로, 소돔의 120일』을 만들어 사드처럼 지배집단을 비판했던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온갖 변태성욕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내었지만 역시 암살을 당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김지하의 『오적』이 닮아 있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들 작품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본질을 권력의 정체인 폭력에서 찾고, 폭력과 성의 왜곡상을 고발하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변신은 뛰어났다. 자본은 성을 다양하게 상품화하여 성적 억압을 성적 자유로 위장하는데 성공하였다. 지금처럼 성이 과장되고, 지금처럼 성이 다양하고, 지금처럼 성이 왜곡된 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배와 착취의 관계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의 성은 태생적으로 폭력과 결탁된 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류는 유사 이래로 소돔성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오직 피억압자를 성적 타락의 죄목으로 비난하여 성이 가지는 열광과 자유의 힘을 억압하고, 변태적 파티를 즐길 분이다.
사랑이 기본적으로 이중적 속성이 포함된 것을 전제하더라도, 성이 이중적인 사회는 여전히 억압사회다. 주변에는 여전히 낙태, 유기아동, 미혼모, 동성애, 강간 등 성적 차별과 폭력이 넘친다. 성적 자유란 문란이고 타락이 취급받고, 두려움의 대상이다.
나는 우리가 성과 사랑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의 차별과 피해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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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딩 6학년 이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던 공포의 질문.
<넌 사랑이 뭐라 생각해>에 몸서리치던 지난 날.이 떠오르는군요. 훌쩍.
그래서 요런 차트를 만들어 나름 진지하게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전했다가 아주 전될 뻔했더랬지요.
도대체 왜 화를 내는지 의아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들이 원한 대답은 요딴 게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지요ㅋㅋ
세월이 흘러 요즘은 <사랑과 성>에 대해 나름의 이빨을 날려줘야 <짝짓기 전략>상 유리하므로,
아마도 신입생들부터 감을 잃은 복학생까지 초집중 숙독이 가능한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ㅋㅋ
하여튼 기지가 넘치는 범국민 사랑 플로우 차트입니다. ㅋ. 잡치기님도 햇살 같은 긍정적 닉네임으로 바꾸면 혹 알아요? ㅋ
권력은 인류의 성을 억압해야 성산업 세계경제가 돌아가고, 공격적전쟁도 화끈히~치룬다는 성정치학자들의 생각!? 욱끼죠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