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콜로라도 주립대 로고 덴버캠퍼스
건축대학원에서
1989년 8월 초, 늦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나는 먼저 캘리포니아주
LA에 도착해서 처가 가족과 상봉했고, 콜로라도주 덴버로 가서 University of
Colorado 건축대학원에 입학 절차를 끝낸 후, 9월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배움에는 끝이 없고 배워야 뜻을 세울 수 있다’고들 하지만, 젊은 시절에 못다 한
공부를 낯설고 언어가 다른 이국에서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비록 토플을 준비하면서
4년 동안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공 서적을 빨리 읽어 이해하고,
교수님들 강의를 제대로 알아듣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학을 시작한 지 2주째 되었을 때, 나는 유학을 한 것을 참 잘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왜냐면 건축계획시간에 아주 작은 분자의 크기로부터 거대한 우주
공간까지의, 공간(空間)에 대해서 보여주던 시청각 강의를 통해 그때까지 내가
생각했던 공간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4년 동안
애써 유학을 준비한 보답을 얻은 듯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컸지만
유학하던 내내 나는 젊은 학생들보다 2배, 3배 더 노력해야만 했다.
그래서 강의시간에는 맨 앞 좌석에 앉아 강의내용을 녹음하며 필기했고, 쉬는
시간에도 옆 젊은 학우들 노트를 빌려 요점을 정리했다. 그리고 여러 과목
수강으로 시간에 쫓겼던 나는 전공 서적을 읽을 때는 모르는 단어에 밑줄 쳐서
아내의 도움을 받아 이해했고, 설계 작품 발표회 때는 많은 패널과 모형을
만들면서, 아이들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나의 유학 기간에는 온 가족이 함께 힘과
정성을 모으면서 굳게 단합했던, 매우 특별하고 소중했던 기간이었다.
미국 생활 적응
내가 유학길에 오른 1989년 8월에는, 큰아들이 국민학교 4학년, 둘째 아들은
3학년이, 막내딸은 1학년을 겨우 4개월 마쳤을 때였다. 그런 그때 나는 영어로
수업받을 준비를 했지만, 우리 3 아이들은 영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히 아내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라 도와줄 것으로 믿었고, ‘언어는 어릴수록
더
쉽게 체득한다.’는 말을 믿고는, 크게 걱정을 않고 그냥 출국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는 곧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 까닭의 한 예로, 미국
생활을 위해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지으려고 할 때 이름 카탈로그에서 큰아들 이름을
Michael, 작은아들은 Brian으로 택해 짓고는, 마지막으로 딸 이름을 택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그때 어린 딸이 좋은 영어 발음으로 자기의 이름을 “Louisa”로 정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깜짝 놀란 나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물으니, 딸은
그 이름은 〈Sound of Music〉에 나오는 셋째딸 이름이라며 그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갖고 싶다고 요청했었다.
영어 ABC도
모르던 딸은 미국에 도착해서 며칠 동안 미국 영화 DVD를 보면서, 화면만
본 것이 아니라 영어로 진행된 내용을 듣고, 발음까지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서 더욱 확신을 가진 나는 콜로라도 덴버로 가서 세 아이를 학교에 등록시킬
때, 처음 미국으로 오면 보통 6개월을 늦춰서 학년을 택한다는데, 나는 아이들이 겪을
어려움은 크게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6개월을 앞당겨 등록시켰다.
‘어차피 영어는 지금부터 배울 것이니 학년은 높여도 좋을 것 같다.’라는 짧은 생각이었으니,
‘모르는 사람이 더 용감하다’는 격이었다. 그래서 9월에
시작되는 미국학교의 새로운
학년에 4, 5학년이 된 두 아들은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2학년이 된 딸은
통학버스로 30분이 넘게 걸리는 도심의 유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콜로라도 학년 편제는
1~2학년은 유년, 3~5학년은 초등, 6~8학년은 중학, 9~12학년은 고등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딸이 첫 등교를 하기 전날 우리 가족은 딸이 다닐 학교를 미리 돌아보면서
익히게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영어를 전혀 쓸 줄도 읽을 줄도 말할 줄 모르는 딸을
혼자 통학버스에 실어 보내면서, 낯선 미국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지 크게 걱정했었다.
그래서
그날 학교 수업을 듣던 내내, 과연 어린 딸이 학교에 잘 갔을까? 화장실에도 가야
할 텐데…… 점심은 먹을 수 있을까? 귀가 통학 버스를 놓치지는 않을까? 라고 염려를
하면서 강의도 흘려들은 채, 딸의 미국에서의 첫 학교생활을 걱정했었다. 그런 후
귀가하면서 “무사히 집에 돌아와 있어야 하는데.”라고 걱정했으나, 집에 도착하니 딸은
이미 돌아와서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처음 받은 영어 숙제하기에 바빠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미국 학교생활은 걱정 속에 시작되었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하면서
온 가족이 Jung’ School에 등록해서 태권도를 수련했다. 왜냐면 체력도 중요했지만 세
아이들이 미국 생활에 기죽지 않고 잘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서였고, 그때 나는 미국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운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유학 생활 3개월이 지난 후에 딸아이 학교를 방문하던 날, 우리 부부는
딸에게 특별히 친절하시다는 선생님을
만났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고마운 분이 바로
교장 선생님이었고, 또한 딸은 자원봉사 교사인 흑인 할머니의 특별 개인 수업까지 받으며,
영어와 학교생활을 잘 익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6개월이 된 후 나는 세 아이들로부터
“아빠 영어는 완전 시골식이야.”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았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환경 적응, 언어 습득, 무술 숙달은 아이들이 어른보다 훨씬 더 빠르고 더 잘
적응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덴버에서 지내는 동안 비록 힘든 유학 생활이었지만, 즐기려는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아파트 단지 수영장에서 수영도 했고, 주말이면 틈을 내어 근교의 유명
관광지와 시내의 중심 번화가와 학교 캠퍼스도 돌아보았다. 그리고 Boulder를 방문해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지인(조양호 님)을 만나 가족 간에 우정을 나눴고, 공원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박물관을 방문해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돌아봤으며,
도장에서 개최하던 관원들 파티와 한인 학생들 파티에도 참석하곤 했었다.
또한 유학 생활의 나날이 매우 바빴지만, 우리 가족은 안식일이면 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잘 유지하였다. 다행히 내가 속한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모르몬교)는,
지구상 수많은 나라에 퍼져 있지만, 예배 순서와 조직과 활동이 모두 통일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서도 교회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도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으면서 막내딸이 침례를 받아서 회원이 되었고, 신권을 가진
가정 복음 교사와 방문교사의 방문을 받으면서 교회에서도 우리 가정의 형편을
잘 파악했으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때 한국에서
중요한 직책인 감독과 고등 평의원 직책을 오랫동안 맡아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었고 떳떳하게 느껴졌었다.
내가 유학했었던 콜로라도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Colorado) 본교는,
덴버부터
북쪽으로 차로 40분 정도 걸리던 대학도시 Boulder City에 있었고, 대학은 110년이 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대규모 캠퍼스였으며, 미국 중서부 지역의 명문대학교였다. 그리고
학생들은 미국 전 지역과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왔고, 아시아 지역에서 온 학생도 많았다.
그때
내가 공부했던 건축대학원은 콜로라도주 주청사가 있는 덴버시 도심에 있어서
건축과 학생들은 바로 도심의 고층 빌딩을 매일 접할 수 있었고 잘 조성된 관광지와 거리를
활보하면서, 선진국 대도시의 도시 계획과 건축물들을 쉽게 관찰하고 배울 수 있었다.
Colorado 봄은 늦게 시작되지만, 온통 대지는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청명하고 밝은 하늘이 계속되었지만, 간혹 구름 덮인 하늘이 변덕스럽게
교차되었고 매화꽃이 피는 5월에 눈이 내릴 때면, 흰 눈 속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던 설중매
(雪中梅)를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콜로라도의 여름은 햇볕이 따갑도록 더웠지만 건조한 기후 탓에 녹음이
우거진 나무나 건물 그늘로 가면 매우 시원했고,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과
대회에 참석하려는 사업가들과 방학을 맞아 로키산맥의 아름다운 관광지를 찾는
방문객들로 활기에 차 있었다.
또한 파란 하늘에 길게 꼬리를 남기면서 비행기가 날던 가을이면, 로키산맥 숲과
도심의 가로수 단풍은 환상적으로 물들고, 거리에 흩날리는 낙엽도 매우 운치가
있었으며, 시민들은 낙엽을 쓸어버리지 않고 오래 밟으며 즐겼다. 그리고 음식물을
가지고 주택가를 거닐 때면 냄새를 맡고 먹을 것을 보채며 주위를 맴돌던 예쁜
다람쥐 무리도 볼 수 있고, 할로윈 날을 맞아 무서운 복장을 한 아이들이 이웃집을
돌며, 과자 모으는 것도 보았으며, 평원에서 수확된 풍요로운 농산물을 보며, 미국
추수 감사절의 의미도 잘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콜로라도 겨울은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면서 무척 추웠다. 때로는 차를
타려고 손잡이를 잡으면 손이 달라붙기도 했고, 얼어붙은 자동차에 키를 꽂아서
시동 걸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자주 눈이 내려 위험했지만, 아름다운 동화 속같은
설경들을 볼 수 있었고, 도심지와 고속도로에 쌓인 눈은 곧 제설차로 치워졌었다.
또한 잔디 위에 흰 눈도 햇빛이 비치면 빠르게 녹고, 주택과 아파트는 난방시설이
잘되어 있었고, 주민들은 승용차를 이용하는 생활이라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겨울 어느 오후에 학교에서 귀가하던 중 폭설이 내렸고, 제설차는 환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부지런히 쌓인 눈을 치워 큰 문제는 없었지만, 눈 속을 헤쳐
APT 단지에 왔을 때는, 쌓여 있던 눈 때문에 주차하기가 어려웠고, 음지쪽 빙판길을
걸을 때는 매우 조심해서 걸어야 했으며, 운전할 때는 더욱 정신을 집중해서 안전
운전을 해야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