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씨(原州邊氏)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 마을-경북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 마을
안동시 서후면(西後面) 금계리(金溪里) 마을은 금제(琴堤), 검제(黔堤)라는 별칭과 더불어 영원히 재앙이 없는
천년불패(千年不敗)땅으로 불려 왔다. 안동 3태사 후손 문중 성씨인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의 시조묘가 들어선 이 곳에 원주변씨(原州邊氏)
간재종택(簡齋宗宅)도 마을을 지키고 있다. 간재종택은 임진왜란의 공신이자 하늘이 내린 효자로 불렸던 조선중기의 학자, 간재 변중일(邊中一)의
종택과 정자다.
『영가지(永嘉誌)』에
“금계(金溪)는 일명 금지(金池)라고 하는데, 옛날의 이름은 금제(琴堤)라고 하였다. 방언으로는 금(琴)을 검다는 뜻의 ‘검(黔’)자로 표기했기
때문에 검제라고 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다.마을
북쪽으로 천등산·조골산·학가산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주산(主山)인 상산과 주봉산이 있으며, 그 아래로 넓은 언덕이 펼쳐져 있다. 상산과 주봉산
골짜기에서 모인 물이 개울을 이루어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면서 남쪽의 송야천으로 흘러든다.
금계리는 금계1리의 알실·음지·복당·사망·검제, 금계2리의 미리미·작장골·마누이·텃골·경광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금계리에 거주하는 총 150여 가구 가운데 원주변씨는 약 25가구이며, 그 밖에 의성김씨 50가구, 안동권씨 22가구, 안동장씨 20가구 등이
살고 있다.
원주변씨(原州邊氏)는
황주변씨(黃州邊氏)에서 분적(分籍)한 성씨이다. 황주변씨는 송(宋)이 망하자 고려 황주로 귀화한 중국 농서(隴西) 사람 변요(邊幺)의 아들
변여(邊呂)를 시조로 한다. 변여의 6세손 변안열(邊安烈)이 원주원씨(原州元氏)의 딸과 혼인하여 원주에 정착하였다. 변안열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영삼사사(領三司事)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으나 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고 우왕(禑王)을 복위시키려다 김저(金佇)와
함께 죽었다. 후손들이 변안열을 시조로 하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다.안동의
원주변씨는 고려 충신 변안열(邊安烈)의 5세손 변광(邊廣)이 15세기 초에 안동에 정착한 이래로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이후 변광의 장남
변영청(邊永淸)의 호를 따서 동호공파(東湖公派)를 형성하였다. 변영청의 둘째 손자인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은 크게 이름을 떨쳐 가문의
위상을 높였다.
변안열의
현손 부사직(副司直) 변희예(邊希乂)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동생과 함께 낙향하여 영주 화천에 정착하였다가 아들 변광(邊廣)이 안동 금계촌(현
서후면 금계리)에 살던 판서 권철경(權哲經)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금계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변광의 아들 동호(東湖) 변영청(邊永淸,
1516~1580)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49년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 대구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장문보(張文輔)와 함께 화남삼절이라 일컬어진 인물이다. 변영청은 또 안동 임청각을 세운 이명(李洺)의
손녀사위이다. 변영청의 아들 변경장(邊慶長)은 153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변경장의
맏아들 변희일(邊喜一)은 임진왜란에 의병장으로 동생 변중일과 함께 가산을 털어 군량미 1백 섬을 마련하여 상주 진영으로 보내는 등 많은 공을
세워 진위장군 충순위첨지에 제수되었다.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83∼1660)은 형 변희일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의병진에 참여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으며 효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1686년(숙종 12) 충효각(忠孝閣)이
세워졌다.
변영청의 동생 변영순(邊永淳)은 봉화 거촌(巨村)으로 이거하였고 현재 서후면 금계리 일원에는 변영청의 후손 30여 호가 살고
있다.
관련유적으로는 변영청의 동호종가(東湖宗家)와 동호정(東湖亭), 변중일이 살았던 간재종택(簡齋宗宅)과 무민당(无憫堂), 변중일을
기리는 충효각(忠孝閣)이 서후면 금계리에 있다.
안동 지역 원주변씨들이 자랑하는 대표 인물인 변중일(邊中一)은 조선 중기 안동 출신의 유생이자 효자.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변중일(邊仲一), 자는 가순(可純), 호는 간재(簡齋). 증조부는 변광(邊廣), 조부는 변영청(邊永淸), 아버지는 생원 변경장(邊慶長),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정희순(鄭希舜)의 딸이다.
변중일은
안동부(安東府) 금계촌(金溪村,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임진왜란 당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었으나 할머니
이씨(李氏)가 더위를 먹어 설사가 매우 심한 까닭에 피할 수 없었는데 변중일은 할머니를 모시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포 소리가 요란한
끝에 왜적이 몰려오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해 했다.변중일은
먼저 어머니를 업어다 빽빽한 삼밭 가운데 모시고 난 뒤 돌아와 할머니를 업고 달아나려고 했는데 천식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곁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빌 뿐이었다. 잠시 후 한 왜적이 돌입하여 때리며 끌고 가려 하다가 할머니가 땅에 엎어지자 칼로 베려 하였다. 이에
변중일은 “차라리 나를 죽이고 팔십 되신 조모를 살려 달라.” 하고 간청하자 여러 왜적들이 급히 달려와서 부축하여 일으킨 뒤 얼굴의 흙을 털어
주며 들어가 시병하게 하였다.왜적들이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이만한 효성은 참으로 처음 보는 일이로다.” 하였다. 이어 서로 돌아보며 의논하기를 “우리 군대의 발이 닿으면 자칫 해를
당할 염려가 있다.” 말하고는 깃발 하나와 칼 하나를 변중일에게 주면서 신표로 삼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왜적이 집기 하나 손대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으며, 어머니도 온전할 수 있었고 할머니의 병도 나았다.당시
한양을 지키지 못하여 온 나라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영남을 안찰하면서 어느 지역을 초유(招諭)할 때 변중일은
분연히 말하기를 “국가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데 비록 초야에 묻힌 미거한 몸이지만 어찌 힘을 다하여 국가에 충성하지 않겠는가?” 말하고는 쌀 백
섬을 상주로 보내어 군수품으로 쓰게 하였다.그런
뒤에 형 변희일(邊喜一)과 더불어 진양(晉陽)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김성일이 병사했음을 알고는 몸을 맡길 곳이 사라졌음을 통분해 하다가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의 진중으로 급히 가서 군중의 기무에 투신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다시 창궐함을 보고 다시
화왕산성(火旺山城)으로 가서 다른 창의한 이들과 힘을 합하여 적을 물리치기로 맹약하였는데 이때의 사정을 기록한 「화왕동맹록(火旺同盟錄)」이
전한다. 난이 안정된 뒤에 여러 친척들이 변중일의 효행을 열거하여 관청에 알리고자 하였는데 내세울 일이 아니라 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선대에
사패(賜牌)로 받은 노비 30구가 가락 땅(김해)에서 살고 있었는데, 임금이 주신 것을 버릴 수 없다 하여 변중일이 가서 그들을 추쇄하려다가
도리어 뜻밖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특명으로 사면되었으며 노비 100구를 하사받았다. 서울에
머물 때에 형방 색리 최옥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일찍 과부가 된 최옥의 딸이 어느 날 밤 변중일의 침소로 찾아든 일이 있었다. 변중일은
남녀의 분별을 들어 타이르고 거절한 뒤에 곧 다른 집으로 처소를 옮겼다.만년에는
금계의 동쪽 언덕에 집을 짓고 ‘간재(簡齋)’라고 편액한 뒤 그것을 호로 삼았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몸을 정결히 하고 사당에 절한 뒤에
물러나서는 방안에 앉아 종일토록 절제하며 서책을 가까이하였으며, 때로는 거문고를 옆에 끼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조용히 시를 짓고 수창하기도
하였다.뒤에
행의(行義)로 천거되어 건원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죽자 소식(素食)을 하고 복상하였으며, 인산(因山:왕의 상) 2년째에
북향한 채로 땅에 엎드려 슬피 울었다. 나이 팔십이 넘어 통정의 품계에 오른 뒤 1660년(현종 1) 10월 20일 정침에서 향년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으로 『간재집(簡齋集)』 2권 1책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회동(檜洞)에 있으며, 변중일은 불천위(不遷位)로
추대되었다.
1686년(숙종 12) 경상도안찰사가 변중일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려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지고,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마을 입구에 정충효각(旌忠孝閣)이 건립되었다.
2000년 국세청의 인구조사 통계에 따르면 원주변씨는 총 11,503가구, 인구 37,505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