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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道東書院)
토요일 느긋하게 가는길
황사 먼지와 돌풍으로 인해 목도 깔깔하고
눈이 따갑다.
주말이지만 날씨탓인지 도동서원앞에 차를 멈추니 한무리의 어린이 탐방객들만 있다.
몇년전에 한번 다녀간적이있지만 그때는 카메라가 없어서 기록을 남기지 못하였다.
오늘따라 황사가 심해 사진이 선명하지도 않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앞으로 낙동강이 유유히흐르고 뒤로는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자리해있으며
다람재에서 내려다보면 그정경이 마치 동양화를 연상케한다
이서원은 원래 조선오현중 한분이신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위해서 건립한 서원으로
1568년 유림에서 비슬산 기슭에 사우를 지어 향사를 지내오다가 1573년 쌍계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1597년 왜란으로 전소되었다.
그후 1605년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건립하고 보로동 서원(甫老洞書院)이라 불리다가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있다.
도학의 대종, 한훤당 김굉필
도동서원은 현재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로 되어 있지만,
옛날로 치면 경상우도의 우뚝한 유림(儒林)의 고장인 현풍(玄風)에 있다.
도동서원은 도산․옥산․병산․소수서원과 함께 조선 5대 서원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 권위와 명성은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1454~1504)로부터 나온다.
역사책에 나오는 김굉필의 인간상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유배 가고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당한 사림파의 문인으로 되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역사 서술이란 간혹 이렇게 가볍고 잔인한 데가 있다.
옛 사람들이 훌륭한 유학자를 표현할 때는 거유(巨儒)․굉유(宏儒)라고 하는데, 이것으로도 김굉필을 말했다고 할 수 없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릴 때는 달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위의 달무리를 그려 달이 드러나게 하는 공염법(空染法)이 있는데,
한훤당의 주위를 보면 점필재 김종직이 그의 스승이고, 벗으로는 일두 정여창, 추강 남효온, 임계 유호인이 있고,
제자로는 정암 조광조를 비롯하여 이장곤․성세창․김일손․김안국 등이 있으니 일세의 거공명유(鉅公名儒)들이 망라된다.
한훤당 김굉필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퇴계가 한훤당을 가리켜 “근세도학지종(近世道學之宗)”이라고 말했듯
그는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대종(大宗)이다.
그리하여 중종 때부터 근 50년간의 논의를 거쳐 광해군 2년(1610)에 문묘(文廟)에서 제향할 유학자로
동국5현(東國五賢)이 결정될 때 그 순서가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등의 순이었으니
한훤당은 오현 중에서도 수현(首賢)이었던 것이다.
서원앞 400여년된 은행나무(김굉필나무이다.)
도동서원의 내력
한훤당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지만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나서 1507년(중종 2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로 증직받고,
1575년(선조 8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증직되고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610년(광해군 2년)에 문묘에 동방오현의 수현으로 받들게 되었으니 생전에 받지 못한 대우를 사후에 더 없는 영광으로 받은 셈이었다.
16세기 중반 서원이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할 때 퇴계 이황과 한훤당의 외증손이자 예학에 밝았던 한강 정구는
1568년(선조 2년) 한훤당을 모시는 쌍계서원을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04년(선조 37년) 지금의 자리에 먼저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강당과 서원 일곽을 완공하였다.
선조는 이 서원에 도동서원이라는 사액을 내려주니 그 뜻은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였다.
도동서원은 1865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47개 서원․사당만 남기고 모두 철폐할 때도 훼철되지 않아 조선 5대 서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대니산(戴尼山) 밑에 있다.
본래 이 산의 이름은 태리산(台離山) 또는 제산(梯山)이라고 불렸는데 한훤당 선생이 이 산 아래 들어와 살게 되면서
사람들이 대니산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대(戴)는 머리에 인다는 뜻이고, 니(尼)는 공니(孔尼)를 뜻하는 것이니
공자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처럼 높이 받드는 산이라는 의미가 된다(공자는 짱구여서 공구/孔丘라고도 했고,
니구산/尼丘山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공니’라고도 불렸다).
도동서원 가는 길은 병산서원 가는 길 못지않게 아름답다. 현풍에서 대니산 너머 도동서원으로 가자면 다람쥐처럼 보인다는 다람재가
제법 높고 험하여 나는 걸어서 간 적은 없다.
그 대신 고개 마루에서 반드시 차를 멈추고 거기서 도동서원을 조망하고 간다.
요새는 여기에 한훤당의 시비도 세워놓았고 정자를 지어 도동서원과 도동리 옛 마을을 품에 안고 먼 산자락 사이로 돌아가는 낙동강 가의
그림 같은 강마을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한훤당 500주기 추모비
김굉필의 일생
김굉필은 단종 2년(1454), 무관으로 어모장군(御侮將軍)이었던 김뉴(金紐)의 아들로 서울 정동(貞洞)에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猷)였다. 본관은 황해도 서흥(瑞興)이지만 예조참의를 지낸 증조부가 현풍 곽씨와 결혼해
처가인 현풍으로 내려오면서부터 현풍인이 되었고,
할아버지가 개국공신인 조반의 사위가 되어 서울 정동에 살게 되어 여기서 태어난 것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갖추었던 중소지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그는 호방하고 거리낌 없어 저잣거리에서 잘못된 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메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19살에 순천 박씨와 결혼해 합천군 야로(冶爐)현에 있는 처갓집 개울 건너편에 서재를 짓고 한훤당이라는 당호를 붙이고
지내다 뒤에 현풍으로 돌아와서는 지금 도동서원 뒷산인 대니산(戴尼山) 아래에 살았다.
이 시절 한훤당은 서울의 본가, 야로의 처가, 성주 가천(伽川)의 처외가 등지를 오가며 선비들과 사귀고 학문에 힘썼다.
1474년 봄 20세의 한훤당은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는데,
그때 한훤당이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소학 책 속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네(小學書中悟昨非)”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점필재는 “이 구절은 성인이 될 수 있는 근기(根基)”라며 찬탄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오로지 <소학(小學)>만 공부했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했다.
10년 동안 <소학>만 읽고 다른 책은 보지 않았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라고 했다.
<소학>이라는 책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를 말한 교과서다.
내용인즉 가정예절부터 부모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고(敬長), 임금에 충성하고(忠君),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과 친하는(親友) 길(道) 등이다.
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의 몸가짐을 이야기하는 <소학>만 10년간 읽고 다른 책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佛家)로 치면 거의 수도승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학승(學僧)이 아니라 수도승(修道僧)의 자세였고,
이렇게 해서 얻은 그의 도력(道力)은 주위로부터 자연히 존경받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 36세 되던 1480년(성종 11년)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고, 1494년에는 학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점을 들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 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이어 여러 낮은 관직을 거쳐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형조좌랑까지 올랐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에서 유발된 무오사화 때 한훤당은 오직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같은 도당(徒黨)이라는 혐의를 받고
곤장 80대에 원방부처(遠方付處)라는 유배형을 받고 평안북도 희천(熙川)으로 귀양갔다.
그때 한훤당은 나이 45세였다. 여기서 한훤당은 운명적으로 조광조를 만났다.
당시 조광조는 열네 살로 찰방인 아버지를 따라 평안북도 어천(魚川)에 가 있었는데,
인근에 한훤당이 유배왔다는 것을 알고 찾아가 사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다.
47세 되던 해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移配)되어 북문 밖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가 일어나 무오사화의 관련자들에게 죄를 추가하여 한훤당은 사사당하니
7년간의 귀양살이 끝에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향년 51세였다. 묘소는 현풍 선영 가까이에 모셨다.
선생의 저술은 무오사화 때 이미 후환이 두려워 모두 불태워버렸고 친지 간에 오간 글의 소장을 꺼렸기 때문에
집안에 내려오는 <경현록(景賢錄)>이 전부인데, 10여 수의 시와 네댓 편의 문(文)이 전부이기 때문에
그의 도학을 문헌으로 알아볼 길이 없다.
그러나 사후 문묘종사 등 사림의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그의 도학에 대해서는 거의 이론이 없는 칭송으로 가득하여
이를 모두 모아 편집한 <국역 경현집>(1970, 한훤당기념사업회)은 900쪽에 달하니
한훤당은 역시 몸으로 도학을 세운 분이라 할 것이다.
한훤당 선생을 입향한 전국에 현존하는 서원은 이곳 도동서원과
전남 순천옥천서원 ,나주의 경현서원, 화순의 해망서원, 상주의 도남서원이 있다.
전남쪽에 입향서원이 많은것은 아마도 유배지에서도 많은 지방 유생들에게 성리학을 전수한것이라 할수있다.
오늘은 어린이들이 대구시티투어 버스로 관람을 와서 문화유산 해설사의 해설을 듣고있다.
철종 6년(1855) 증축한 수월루.
그러나 도동서원 건축의 높은 격조에 큰 손상을 주었다는 주장도 있다.
도동서원 앞에 당도하면 사람들은 우선 김굉필나무라고 이름 지은 은행나무의 늠름한 자태에 입을 벌인다.
외증손 정구가 이 자리에 도동서원을 세울 때 심은 것으로 수령이 400년 이상 된다.
아마 다섯 명이 손을 잡아야 했을 것이다.
도동서원은 가파른 비탈에 자리 잡아 앞마당부터 사당까지 계속 석축으로 이어진다.
막돌허튼층쌓기로 폭과 높이를 달리하며 전개해 올라가는데 우선 은행나무에서 서원을 가로막듯 서 있는 2층 누마루인
수월루(水月樓)까지만도 4단이다.
무려 18단이나 된다.
이처럼 자연의 형질을 변형시키지 않고 각 레벨을 살리면서 건물을 배치한 것이 도동서원 건축의 큰 자랑이고 특징이다.
그런데 도동서원 건축의 이런 특징이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서원 안쪽을 가로막고 버티듯 서 있는 수월루 때문이다.
본래 1605년 창건 당시에는 수월루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철종 6년(1855) 증축한 것이다.
많은 건축가는 이 수월루가 불필요한 건축적 과장이라며 도동서원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동서원 건축의 높은 격조에 큰 손상을 주었다고 불만을 말하고는 한다.
본래 도동서원의 대문은 매우 작은 환주문(喚主門)으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갓 쓴 이의 갓이 닿을 정도로 낮다.
그리고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아주 높직한 석축 위에 올라앉아 마루에 앉으면 환주문을 눈 아래에 두고
은행나무 너머 낙동강을 멀리 내려다보는 조망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펼쳐지는 시야가 이 수월루로 인하여 막혀버린 것이다.
철종 때 증축한 분들의 뜻은 “서원의 제도에 맞으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 출입하기 가파르고 갑갑하다” 이유로 수월루를 세웠다는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서원의 정문격인 수월루 유생들의 휴식처나 강독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수월루에서 보면 낙동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동서원의 중정당
보물 제380호로 지정할 때 돌담까지 포함시켰다. 그만큼 도동서원의 기와돌담은 아름답고 특징이 있다.
자연석 석축으로 기초를 삼고 그 위에 황토 한 겹, 암키와 한 줄을 반복하며 가지런히 쌓고 기와지붕을 얹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수막새 기와로 별무늬를 넣었다.
도동서원은 멋이 아니라 기능에서도 다른 서원보다 뛰어나다.
제사를 지내는 데 필요한 구조물을 빠짐없이 갖추었다.
사당 옆 담장에는 사각형으로 뚫린 빈 공간이 있는데, 이는 제사가 끝난 다음 제문을 태우는 차(次)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정당 서쪽 마당에는 사각돌기둥에 네모난 판석을 얹은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생단(牲壇)이라고 해서 제사 때 사용하는 생(牲, 소․양․염소 같은 고기)을
제관들이 제사에 적합한지 아닌지 검사하는 단이다.
이들 시설물은 기능도 기능이지만 서원 건축의 한 액세서리 같은 장식효과가 있다.
그 점에서는 중정당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정요대(庭燎臺)가 압권이다.
긴 돌기둥 위에 네모 판석을 얹은 이 정요대는 일종의 조명시설로,
제사 때 이 판석 위에 관솔이나 기름통을 올려 놓고 불을 밝힌다.
서원의 중앙 강당인 중정당이다.
도동서원의 건축
평면은 여느 서원과 다를 것이 없다. 높직이 올라앉은 중정당을 중심으로 안마당 아래쪽 동서로 동재(東齋)와 서재(書齋)
두 기숙사를 두고 뒤편 위쪽으로는 사당을 모셨다.
이는 우리나라 서원 전체에 해당하는 보편적 건축 형태다.
환주문을 보면 문지방이 있을 자리에 꽃봉오리 돌부리가 있어 여닫이 문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지붕은 사모지붕에 오지로 구운 절병통이 예쁘게 얹혀 있다.
환주문에서 중정당으로 가는 안마당에는 가지런히 돌길이 놓여 있고, 중정당 석축 앞에 낮게 단을 쌓았는데,
이 돌길과 석단이 만나는 자리에 고개를 내민 돌거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돌거북은 위에서 보면 꼭 올빼미 같지만 바짝 쪼그리고 앉아 정면으로 보면 이빨이 옆으로 나온 영락없는 거북이인 것을 알 수 있다.
중정당으로 오르는 석축에는 두 개의 돌계단이 좌우로 비껴 있는데 디딤돌이 일곱 단이나 될 정도로 높다.
이 석축은 마당의 얼굴이기 때문에 막돌허튼층쌓기로 되어 있지 않다.
반듯한 돌을 차곡차곡 이 맞추어 가지런히 쌓았는데 돌의 크기도 제각기 다르다,
석축이 머릿돌을 받치고 있는 자리에는 여의주를 문 네 마리의 용머리가 실감나게 조각되어 앞으로 돌출해 있다.
이 용머리 조각을 근래 어느 문화재 절도범이 뽑아간 것을 찾게 되어 네 마리 중 한 마리만 원래대로 남겨놓고
세 마리는 복제품으로 대신하고 원본은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렇게 정성스러운 치장을 하고도 모자람이 있었는지 석축에는 다시 세호(細虎)라고 불리는 다람쥐 모양의 조각을 양쪽에 배치했다.
이것도 ‘비대칭의 대칭’ 원리에 의하여 한 마리는 올라가고, 한 마리는 내려가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 곁에는 꽃 한 송이씩이 배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이처럼 곳곳에 조각을 가하여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 곳은 도동서원 외에는
창덕궁에나 가야 있다. 왜 도동서원에는 이처럼 많은 조각이 새겨져 있을까?
돌 축대가 18단이나 되고 보니 이 지루하고 딱딱한 돌길에 조각을 새겨 시각적 긴장을 풀어주려던 것 아닐까?
서원에서 수월루쪽으로 보면서
서원뒤쪽엔 사당이 있다.
사당올라가는 계단
사당 이곳에는 한훤당과 한강정구의 위패를 모신 제향공간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기둥에 맞배지붕으로된 건물로 정면 3칸에는칸마다 밖여닫이널문을 달았고
내부는 통칸으로 틔웠다. 정구선생은 서원건립시주도적인역할을하였고
유품정리할때의 공헌을 인정해서 1678년 추가 배향하였다.
향사는 매년 음력 2월 중정일과 8월중정일에 지내고있다.
앞쪽을 흘러가는 낙동강으로 낙동강 개발에 흙탕물이 흐른다.
환주문과 돌담
돌거북
정요대(庭燎臺)
거인제와 거의제로 나누어져있다 각각 동서로 배치되어있다. 동제인 거인제
수월루의 이층
환주문과 토담 토담은 아름다운 토담으로 전국에서 최초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마당을 가득덥을때를 생각하며 수월루를 나온다.
400여년전에 한강 정구선생이 도동서원 사액기념으로 심었지만 지금 이나무는 김굉필 나무로 불러진다.
낙동강 1300리 다람재에 올라 다시한번더 도동서원을 내려다본다.
그옆으로 2층 정자를 지어놓았고 그옆에는 한훤당의 시가 있다.
노방송(路傍松)--다람재에 있다.
일노창념임로진,/노노영송왕래빈,/ 세한여여동심사, /경과인중견기인
다람재에서 내려다본 도동서원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 한훤당의 벗이었던 추강 남효온이 <사우록(師友錄)>에서 기록으로 남긴 한훤당과 점필재의 결별 사건을 소개해 주었다.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날이 개면 나다니고 장마 지면 멈추는 것을 어찌 완전히 잘할 수야 있겠습니까?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誰信牛耕馬可乘)?’
이에 점필재 선생은 그 운(韻)을 따라 화답하기를‘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구구하게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勢利區區不足乘).’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점필재가 한훤당을 덜 좋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갈라졌다(貳於畢齋).”
기본적으로 한훤당은 철저히 도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점필재는 사정이 좀 달랐다는 것이다.
점필재는 사림파의 힘을 키워야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싫어도 훈구파 한명회의 압구정에 붙인 찬시도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한훤당의 눈에는 이것이 거슬려 이런 시를 지어 비판하고, 종국에는 갈라서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분이 갈라섰다는 ‘이어필재’에 대해서는
퇴계와 남명 같은 이들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있으니
후대 학자들이 이 문제를 본 요체는 스승과 갈라선 한훤당의 처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있었다.
사실 한훤당이 스승과 결별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윤리적 배반이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읽었다는 <소학>의 윤리강령에 ‘융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점에서 한훤당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퇴계와 남명까지 나서서 그를 두둔했다. 퇴계는 학문상의 이유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라 할지라도 지향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다.
점필재 선생은… 그 뜻이 항상 문장을 위주로 하였으며, 학문을 강구하는 면에 종사한 것은 별로 볼 수가 없다.
(그러나) 한훤당은… 마음을 오로지 옛 사람의 의리를 힘써 행한 것은 분명하니…
추강의 말에 심히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남명은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처신의 문제로 보면서 한훤당을 지지했다.
“점필재의 행동은 뒷세상에 비난받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만일 한훤당이 점필재와 갈라지지 않았더라면
또 뒷날의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실상 선생이 갈라서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옛날 이야기이지만 그 행간에 서린 의미를 보면 우리 현대사회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원칙론과 현실론 사이의 괴리, 후배들의 선배에 대한 가혹한 비판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새겨들을 수 있다.
뿌연 황사가 종일 눈이 따가울정도이다.
5시경에 벌써 컴컴해진다..
가보려해도 항상 가까이 있어 뒤로 미루어 놓았던곳을 찾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