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놀이
김회직
미국의 잭슨폴록이 이끈 추상표현주의로 ‘액션페인팅’이라는 회화가 있다. 형식보다 그리는 행위자체를 중시하고 있어서 “캔버스는 표현보다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투기장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폴록을 비롯한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은 그림 속에 어떤 이야기나 상징적인 요소들이 내포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다시 말하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게 물감을 흘리거나, 마구 흩뿌리는 행위가 그들의 회화작업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질탕한 “색깔놀이”라고 할 수 있다.
액션페인팅은 어느 누구라도 해볼 만하다. 색깔놀이인데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물감과 캔버스만 있으면 된다. 유화물감이나 아크릴물감을 사용하면 더욱 좋겠지만 취미로 하는 것이니 구태여 전업 작가들이 사용하는 비싼 물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페인트상점에서 파는 수성페인트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캔버스 역시 꼭 유화용이 아니라도 좋다. 베니어합판이나 두터운 골판지 또는 포장상자 등 잘라 쓸 수 있는 것이면 된다.
먼저 흰색수성페인트와 ‘수성도료 조색제’라고 하는 빨강, 파랑, 노랑, 검정색 안료를 준비한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각각의 색깔 안료를 조금씩 부어놓고 흰색수성페인트를 넣어 섞는다. 색깔의 짙고 연한 정도는 흰색수성페인트의 양에 따라 달라진다. 크림처럼 흘러내릴 정도로 묽어야 하니 물을 조금씩 첨가할 수도 있다.
어두운 색부터 캔버스에 물감을 흘린다. 아니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여기저기 물감을 흘려놓으면 된다. 물감위에 다른 물감을 재차삼차 겹쳐 흘리기를 해도 무방하다. 우연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붓 대신 두꺼운 종이나 비닐판 같은 것을 사용해 빗자루 쓸 듯이 살짝 쓸어주기도 하고, 부분적으로 두세 번씩 쓸어 변화를 주거나 헤어드라이기로 바람을 불어 물감을 밀쳐내기도 한다. 그게 끝이다. 이제는 물감 스스로가 번지고 얽히는 것을 지켜보면서 완전히 건조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상상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화폭위에 펼쳐질 것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완전 건조된 화면위에 수성바니시를 한두 번 칠해줄 것을 권하고 싶다. 꼭 유화를 보는 기분이 될 테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실험을 거듭하면서 시행착오를 겪다보면 나름대로 자신만의 기준이나 테크닉이 생길 것이다. 그게 개성이고 작품성이다. 어느 누구든 처음부터 작가라는 명패를 들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전업작가, 아마추어작가, 유명작가, 무명작가는 순전히 자기할 나름이 아닌가? 세상에 널려있는 ‘너도 작가’ ‘나도 화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뉴노멀(New Normal)’시대라는 말이 있다. 경제활동 인구수가 감소함에 따라 세계경제환경이 급변하고, 인류존재가치에 새로운 표준이 등장하면서 삶의 방법이나 규칙이 달라지며, 결과중심이 과정중심의 근로철학으로 바뀌는가 하면, 권위의식이 약화되는 반면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일을 새롭게 밝히려는 강한 의지가 성공비결인데다, 가치창조의 원리가 전문화에서 융합으로 바뀌고, 소유물이 아니라 함께 공유하는 경제 패러다임이 될 것이란다.
그림을 그려보고 싶지만 기초가 없어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기초가 없다는 것은 시야를 넓히려는 의욕이나 용기가 부족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뉴노멀시대가 아니라 아직도 올드노멀시대에 머물러있다는 뜻이다.
아무런 기초가 없어도 도전이 가능한 액션페인팅, 그 추상표현이야말로 뉴노멀시대에 적합한 대중미술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잭슨폴록을 닮으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는 한순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지만 삶은 무질서하고 피폐했다. 피카소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자학 속에서 오랫동안 절망, 폭력, 우울, 강박증에 시달렸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그는 운전대를 잡은 채 힘껏 액셀을 밟아 나무를 향해 돌진한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렇게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잭슨폴록은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라는 신화로 남게 된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그림 중 하나로 무려 1800억 원이라는 고가에 경매되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뉴노멀시대는 결과중심이 아니라 과정중심이라고 했으니 죽어서 영광이 아니라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위해 취미를 살리고 즐기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더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색깔놀이라는 액션페인팅, 시간보내기 지루하고 심심할 때 그냥 장난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물감을 흘리거나, 찍거나, 긁거나, 뿌리거나, 이리저리 흔들어 보거나, 바람에 날리거나, 살짝 쓸어보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구사해가며 색깔과 놀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서산마루에 걸릴 것이다. 혹 누가 아는가? 기막히도록 극적이고 기발한 색깔놀이를 개발하여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유명작가의 반열에 올라서게 될지.(2021)
첫댓글 김선생님 멋진 작품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번 해 보고 싶어 지네요.
색이 무척 곱고 신비스럽습니다.
42호 수필예술에도 작품 한점 미리 부탁 드립니다.
한 번 해보세요. 생각보다 쉽습니다. 색깔끼리 알아서 신비로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색깔 놀이, 정열적입니다. 잔잔한 가슴에 한줄기 파도가 덮치듯 정신이 번쩍 납니다. 김 선생님 말씀처럼 '장난삼아' 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다 혼날까 싶어 엄두를 못내겠네유.
물감을 흘려놓고, 헤어드라이기로 바람을 불어주면 색깔이 밀리면서 화면이 신비로움으로 채워집니다.
물감위에 다른 물감을 흘려놓고 밀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본문 글자가 작아서 저는 김 선생님 옥고를 끝까지 꼼꼼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시력 안 좋은 사람이 글자작음 탓만합니다.
그래도 오늘은 마음 단단히 먹고 김 선생님 옥고를 성실하게 읽었습니다.
참으로 따뜻하면서도 친숙한 예술의 경지를 느껴 봅니다.
미술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도 일깨웁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글자가 작아서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글자 크기를 키우겠습니다.
심심할 때는 이것저것 해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림 한 점을 놓고 부분적으로 촬영해서 편집을 하면
의외의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시는 분은 감수성이 예민해서
누구라도 해볼만 한 게 색깔놀이인 듯 합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추상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읽고 보니 그 신비로움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서 누릴 영광을 위해 다만 즐기기.. 천재화가의 요절을 안타까워하며 생각해봅니다. 검색해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김지안 작가님이 색깔놀이를 해보시면 참으로 재미있고 신선한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추상화를 자주 대하다 보면 오히려 구상화보다 더 깊이 빠져든다고들 합니다.
잭슨 폴록을 검색하시거나 유튜브에 들어가 보시면 희한한 추상화들을
많이 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내내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