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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예수께 묻기를,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으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 같으니 이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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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는 많이 변했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만 변했다. 모든 차원에서 깊은 인간 관계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대들의 아내는 이미 아내가 아니라 단순한 여자 친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의 남편 또한 이제는 남편이 아니라 단순한 남자친구일 뿐이다. 우정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깊은 만남은 아니다. 결혼이란 그대 깊은 만남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 그것은 깊은 강물로의 뛰어듦이다. 그대 자신을 그 깊은 곳으로 내던지지 않는다면 그대는 결코 도약할 수가 없다.
그대는 표면에 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깊은 곳은 그대의 것이 아니다. 물론 깊은 곳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위험할 수밖에 없다. 표면에 떠 있으면 그대는 매우 능률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에 있으면 그대는 자동인형같이 움직일 수가 있고 전혀 깨어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대 깊은 곳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그대는 더욱더 민감해져야 한다. 매 순간순간 죽음이 도사리고 그대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깊은 심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인간 관계는 천박해졌다. 인간 관계는 더욱 유치해져 왔다.
남자친구나 여자 친구는 재미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모든 사람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는 없다. 여자 친구와는 그대는 성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거기 사랑은 자라나지 않는다. 그대, 사랑은 깊은 뿌리를 필요로 한다. 성은 표면에서도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동물적이고 생리적인 작용일 뿐이다. 깊은 사랑의 일부분일 때 성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깊은 사랑의 일부가 아니라면 성은 가장 추한 일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이다. 거기 영적인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순히 서로 만지기만 하고는 이내 헤어진다. 만난 것은 육체이지 그대가 아니다. 너와 나의 만남은 아닌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게 진행되어 왔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가장 위대한 관계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이다. 그대,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하는 그러한 관계의 차원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대는 결코 예수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내는 여자 친구로, 남편은 남자친구로 대체될 수도 있지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존재했던 관계는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니면 그러한 관계는 이제 그와 반대의 관계, 정신고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로 대체되고 말았다.
정신분석의와 환자 사이에는 병적일 수 밖에 없는 병리학적인 관계가 있다. 환자는 진리를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을 찾아서 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건강(health)이란 단어는 그 의미가 매우 깊다. 그것은 전체성(wholeness)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성(holiness)을 의미하고, 자기 존재의 깊은 내면의 치유를 의미한다. 환자는 건강을 위해서 의사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위해서 온다면 그는 곧 제자일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다.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소극적인 것이다. 그는 다시금 정상인으로 되기를 강요받아 의사에게로 온다. 다시금 정상적인 사회인의 일부로서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에게는 재조정이 필요하고, 정신분석의는 그가 다시 정상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누구에게 적응하기 위해서인가? 이토록 완전히 병들어 있는 이 세계,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인가?
그대가 말하고 있는 정상적인 인간이란 다름 아닌 정상적인 병, 정상적인 정신착란, 정상적인 광기를 지닌 인간일 뿐이다. 정상적인 사람도 역시 미쳐 있다. 단지 사회와 문화에 의해서 허용되는 영역 안에서 미쳐 있을 뿐 미쳐 있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가 그 영역을 벗어나서 경계선을 넘어 버린다. 그러면 그는 곧 병든 사람이 되고 만다. 병들어 있는 바로 그 사회가 그 사람은 병들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의는 그 경계선 위에 서서 그 사람이 되돌아올 수 있도록, 군중 속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정신과의사는 스승이 될 수가 없다. 그 자신 전체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환자는 제자가 될 수 없다. 환자는 매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자는 혼란 속에 있고, 그러나 혼란의 상태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노력은 적응을 위한 것일 뿐 건강을 위한 것은 아니다. 정신과의사는 스승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에서는 그들이 스승으로 행세하고 있다. 머지않아 동양에서도 그들은 스승으로 위장 행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 그들은 스승일 수가 없다. 그들 스스로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적응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병든 자가 다른 병든 자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병든 자가 또 다른 병든 인간에게 전체성을 가져다 줄 수는 없다. 한 미치광이가 다른 미치광이로 하여금 그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것처럼.
프로이드나 융, 아들러파의 정신분석의들도 완전히 병들어 있다. 평범한 정신분석의 뿐만이 아니라 그들 중의 탁월하다고 하는 정신분석의라는 사람들조차 병리적으로는 환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겠다. 프로이드는 누군가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몸을 떨곤 했다. 기절을 하여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이집트의 미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고, 두 번째도 역시 융이 찾아와서 죽음과 시체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하더니 자리에서 넘어지고 실신하여 의식을 잃고 말았다.
만일 프로이드에게 죽음이 그토록 공포스러운 것이었다면 그의 제자들은 또 어떠했을까? 그리고 왜 죽음이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을까? 그대는 깨달은 자, 붓다가 죽음을 두려워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일 두려워한다면 그는 더 이상 깨달은 자일 수가 없다.
융은 바티칸 궁전과 특히 그곳의 도서관을 방문하기 위해서 몇 번씩이나 로마엘 가보고 싶다고 말했었다. 바티칸 도서관은 최대의 도서관으로서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종교의 극비 기록들을 소장하고 있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차표를 사러 갔을 때마다 그는 몸을 떨기 시작하곤 했다. 로마로 가려고 할 때마다 언제나 그랬다.
“이것이 모크샤(Moksha), 절대적인 자유로 가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 나에게 벌어질지 나는 두렵다.” 그래서 결국 그는 차표를 사는 것을 포기하고는 돌아오곤 했다. 몇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마침내는 “아니다. 나는 갈 수가 없다.”라고 결심해 버렸다. 그는 결코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 왜 정신분석학자인 그가 로마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그것은 로마가 종교의 상징이고 모든 종교를 대표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융이라는 사람은 그의 마음 둘레에 하나의 철학을 만들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철학이 무너져버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낙타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낙타는 히말라야 가까이게 이르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융이 창조했던 철학의 전부가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그토록 광대하고 우주적인 체계를 창조했지만 오늘날 그 모든 체계는 이미 폐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로마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은 곧 과거가 창조한 위대한 체계의 폐허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의 작은 체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가 닦고 치장하고 있는 이 작은 한쪽 구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대의 철학은? 한때 위대했던 철학들마저 이제는 전락하여 먼지로 변해가고 있다. 로마로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라. 그대, 아테네로 가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학교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장 위대한 체계도 결국에는 먼지로 화할 뿐이고, 그 어떤 사고도 종국에는 쓸모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사고란 인간이 창조해 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고가 없는 상태 속에서만 그대는 신성을 알게 된다. 사고를 통해서는 그대는 영원을 알 수가 없다. 사고는 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는 영원의 것일 수가 없다. 그대, 어떤 철학도, 어떤 사고의 체계도 영원한 것일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융이 두려워했던 바로 그 두려움이다. 적어도 융은 네다섯 번 여행 예약을 하고 또 그것을 취소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장 위대한 정신분석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로마에 가기를 그토록 두려워했다면 그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 그대라도 그만큼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가 융보다 나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대는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융은 로마에 가면 자신의 머리가 온통 뒤집히리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모든 사상 체계의 폐허를 눈 앞에 보는 순간 전율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를 움켜잡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것이었다. “나의 체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나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몸을 떨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의 회상록 속에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고 나서 결국 나는 그 계획을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나는 로마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같은 일이 프로이드에게도 여러번 일어났다. 그것을 단순한 하나의 우연으로 여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도 역시 로마에 가려고 했었고, 또한 마찬가지의 공포에 젖었었다. 왜인가? 프로이드라 하더라도 그대와 똑같이 화를 낸다. 프로이드라 하더라도 그대와 마찬가지로 성욕을 느낀다. 프로이드라 하더라도 행동에 있어서 그대와 마찬가지로 신경질적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인가? 그는 그대들보다는 더 지성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천재일지도 모르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조금은 도울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의 것에 관한 한, 존재 내부의 가장 심오한 곳, 가장 깊은 곳의 정수에 관한 한 그는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장님에 불과하다.
그렇다. 그대여, 정신의학은 종교가 될 수 없다. 훌륭한 병원이 될 수는 있어도 사원은 될 수 없다.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병들고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정신과 의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정신분석의는 스승이 아니고 환자도 제자가 아니다.
환자로서 스승에게로 온다면 그대는 반드시 스승을 놓쳐버릴 것이다. 그대여, 스승은 정신과의사가 아니다. 사람들은 나에게로 와서 말한다. “나는 이러한 정신적인 불안, 신경불안증, 그 밖에도 이런저런 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말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불안을 치료할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그대 자신을 치료하려고 한다. 나는 그대의 병과는 관계가 없다. 나는 그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병은 바깥에 있는 것이고 그대 존재가 있는 곳에는 병이란 없다.”
일단 그대가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기만 하면 그때 모든 병들은 사라진다. 기본적으로 그대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 자신으로부터 도망쳐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의 근본적인 만남을 회피해 왔기 때문에, 병이 그곳에 있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대는 자신을 바라보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대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그대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대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지 않는다면 스승은 어떤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승은 단지 그대가 그대 자신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뿐이다.
그대는 왜 그토록 두려워하는가? 과거의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그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많은 것이 바뀌어져야만 하고, 강요되며, 아이는 훈련받아야 한다. 아이는 사회나 부모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을 많이 갖게 되고 따라서 그 부분은거부되고 억눌리게 된다. 아주 작은 부분만이 받아들여지고 칭찬받을 뿐이다. 따라서 아이는 자신 속에 있는 부분들을 정리해 나가야 한다. 자기 존재의 많은 분야들을 거부해야만 하고, 그 분야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너무나 부정을 당하기 때문에 그 자신 그러한 것들이 자신에게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억압이라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이 억압 위에서 군림한다.
그 아이의 거의 대부분의 존재가 억압당해야 하고 철저하게 어둠 속에 던져져 버린다. 그러나 그 억압된 부분들은 어느 날엔가는 자기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반란을 일으키고 반동을 꾀한다.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밝은 곳으로 뛰쳐나오기를 바라고 그대는 다시금 그것들을 억눌러야 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자신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 억압된 부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억압된 부분은 다시금 얼굴을 내밀 것이고, 언제나 분명하게 거기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무의식의 층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대가 그대 자신과 만날 무의식의 층이 거기 따라나온다. 그대가 지금 까지 부정했던 모든 것들이 더불어 나타난다. 바로 그러한 것이 그대에게 두려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아이들, 그의 있는 그대로의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러한 두려움은 항상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이의 전부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면적으로 아이를 받아들이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한 일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억압은 많든 적든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어느 날엔가는 자기 자신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하는 구별에 대하여 완전히 잊게 되는 바로 그 날, 그대는 제자가 될 수 있다. 무엇이 받아들여지고 무엇이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잊어버리는 날, 그대는 곧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대 자신에게 그대의 존재의 전부를 드러내 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날, 그대는 비로소 한 사람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그대, 스승은 한 사람의 산파에 불과하다. 스승은 그대가 거듭 나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도와줄 뿐이다. 그러면 스승과 제자 사이, 거기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제자는 스승을 신뢰해야 한다.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만일 거기 의심이 있다면 그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을 수가 없게 된다. 그대 누군가를 의심할 때, 그때 상대방은 타인이 되고 그대는 마음문을 닫아버린다. 그대는 자신의 문을 활짝 열어놓을 수가 없다. 그 낯선 사람이 그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사람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있을 수가 없다. 그대는 자신을 방어해야 한고 주위에 무장된 벽을 쌓아 놓아야만 한다.
그대, 스승과 함께라면 그대는 그 무장을 완전히 해체시켜야 한다. 그 해체는 완전해야만 한다. 가령 사랑하는이 앞에서도 그대는 조금은 무장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라도 그렇게까지 열어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 스승 앞에서의 그 열어놓음은 완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도 불가능하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대가 그대 자신을 닫아 놓는다면 거기 관계는 있을 수가 없다. 그대여, 전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오직 그때에만 신비는 드러날 수 있다. 오로지 그때에만 신비의 열쇠는 그대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숨긴다면 그것은 곧 그대가 스승과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고, 그땐아무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다.
싸움은 스승과 함께 하기 위한 열쇠가 아니다. 전적인 받아들임이 열쇠이다. 그러나 그대여, 이제 세상에는 전적인 받아들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그렇게 되도록 조장해 왔다. 3, 4세기 동안에 인간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 되도록 배웠다. 받아들임이 아니라 투쟁을, 순종이 아니라 반란을, 믿음이 아니라 의심을 배워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즉 과학은 의심을 통해서 발전해 나가기 때문이다. 과학은 깊은 회의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다. 그것은 신뢰를 통해서는 일할 수 없다. 그것은 논리와 논쟁과 끝없는 의심을 통해서 성장한다. 의심을 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 과학적으로 되어 간다. 그 길은 종교의 길과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종교는 신뢰를 통해서 성장한다. 그대, 신뢰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종교적으로 된다. 과학은 기적들을 가져왔고 그 기적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종교는 보다 더 큰 기적들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깨달은 이, 붓다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그대가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대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는 단지 하나의 육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도 역시 그대와 마찬가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그도 또한 나이를 먹을 것이고 어느 날엔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면을 넘어서면 그는 죽지 않는 존재, 그에게는 죽음이란 없다. 그러나 그대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선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그대들에게는 내부에 있는 것, 미지의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 신뢰하는 눈만이 점차로 느끼기 시작하고 민감하게 될 수가 있다. 그대가 신뢰할 때 그것은 곧 두 눈을 감아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맹목적인 것처럼 신뢰 또한 맹목적이다. 아니, 사랑보다 신뢰가 더욱 맹목적이다.
두 눈을 감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여, 내적인 변형이 일어난다. 이 두 눈, 외부를 향해서 열려 있는 이 두 눈을 감아버릴 때, 그때 눈을 통해서 나가는 에너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에너지는 역행하기 시작한다. 눈으로부터 바깥의 대상을 향하여 흐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에너지는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완전히 전환한다.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한다. 에너지는 고정되어 있을 수가 없다. 한쪽 출구를 막아버리면 그것은 곧바로 다른 출구를 찾아낸다. 두 눈을 닫아버리면 그 두 눈을 통해서 움직여 나오던 에너지는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하나의 전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에너지는 그대 안에 있는 제 3의 눈에 충격을 가한다. 제3의 눈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외부의 대상을 향해 눈을 통해 빠져나가던 에너지가 근원을 향해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바로 제3의 눈이 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제3의 방식이 된다.
그 제3의 눈을 통해서만 붓다를 볼 수가 있다. 오직 그 제3의 눈으로만 예수를 볼 수가 있다. 그 제3의 눈을 갖고 있지 않다면 비록 예수가 거기 있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예수의 고향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그를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목수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하나의 내면적인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나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라고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너는 미쳤든가 아니면 바보이다. 그것도 아니면 너는 매우 교활한 인간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목수의 아들이 하루아침에 하느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그대여, 길은 있다.
육신으로부터는 오직 육신만이 태어날 뿐이다. <내면의 참된 자아>는 육신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탄생되며 신성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그대는 그것을 보기 위한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한다.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미묘하고 섬세한 일이다. 그대는 대단한 훈련을 거쳐야만 한다. 그것은 마치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 그대가 갑자기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면 그대는 “이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하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그토록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긴 훈련이 필요하다. 여러 해 동안 그것을 감상해야만 하고, 비로소 그때에만 그대의 귀는 그 미묘한 음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클래식 음악에 견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때는 매일 일상적으로 듣는 음악, 이를테면 영화음악 같은 것은 전혀 음악이 아니고 단순한 소음이거나 바보스러운 짓들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대의 귀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대는 그런 소음들과 함께 살면서 그것을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서는 매우 귀족적인 귀가 필요하다. 하나의 훈련이 필요하고 훈련이 되면 될수록 그대는 더욱더 그 미묘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대여, 클래식 음악도 예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는 우주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 한 조강의 사념의 구름조차 사라질 때까지, 그대 내면의 존재 속에 조금의 움직임도 없을 때까지 침묵해야만 한다. 오로지 그때에만 그대는 예수를 들을 수 있고, 예수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오로지 그 때에만 그대는 예수를 알 수 있다.
예수는 수없이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나의 말을 알아들을지니, 눈이 있는 자들은 나를 보라! 내가 여기에 있다!” 왜 그는 이 말을 거듭 되풀이해서 말했던 것일까? “눈이 있는 자들은 보라!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은 들으라!” 왜?
그는 오로지 제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 다른 이해의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은 몇몇의 사람들만이 예수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적은 몇몇의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들은 많이 배운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학의 교수들이 아니었다. 당치도 않다. 그들은 지식인도 철학자도 아니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아, 그들은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보라, 그들은 어부였고 농부였다. 그들은 구두 만드는 직공이었고, 창녀들이었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 모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소위 특별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이미 사라져 버린 그 유별난 무엇인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겸허함이고 신뢰감이다. 그대가 지적인 훈련을 받으면 받을수록 거기 믿음의 가능성은 더욱 적어진다. 지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보다 큰 믿음이 가능해진다.
농부는 믿고 있다. 그에게는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는 들판에 씨를 뿌리고, 그에게는 그 씨앗들이 자나랄 것이고 적절한 계절이 오면 싹이 틀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확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씨앗들은 반드시 싹이 튼다. 그는 기다리고 기도한다. 그리하여 적절한 계절이 오면 씨앗은 싹이 트고 열매를 맺는다. 그는 기다리고 믿는다. 그는 나무들과 풀들과 강물, 그리고 산들과 더불어 함께 산다. 거기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무들에게는 속임수라는 것이 없다. 나무로부터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장을 할 필요는 없다. 언덕들에게는 속임수란 없다. 언덕들은 정치가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다. 그대는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할 필요가 없다. 어떠한 방위수단을 마련할 필요도 없다. 그대는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문을 활짝 열 수 있다.
산이나 언덕에 올라갈 때면 그대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 기쁨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언덕들로부터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대가 무장을 해제시켜도 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는 기쁨이다. 그대, 한 그루 나무에게로 걸어갈 때 그대는 문득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것은 그 나무로부터 오는 느낌이 아니다. 그 느낌은 그대의 내부로부터 온다. 나무와 더불어 있으면 그대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고 마음 편하게 한가로이 노닐 수가 있다. 꽃은 돌연 그대를 습격하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도둑이 될 수 없으며 그대로부터 어떤 것도 훔쳐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산에 갈 때나 바다에 갈 때나 숲으로 갈 때나 나무와 함께 있을 때나 그대는 경계심을 버리고 무장을 해제한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깊은 신뢰가 있다. 공업화나 기계화, 기술 발전이 진전되지 않은 나라일수록 더욱 많은 대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따라서 더 깊은 신뢰의 마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를 믿는 광신자들은 나올 수 있어도 예수가 거기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들 광신자들도 정신병자에 지나지 않으며 예수는 단지 하나의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예수가 뉴욕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비록 그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가 거기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기술 발전이 없는 사회, 과학이 없는 시대에 태어났다. 그는 목수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소박한 자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에게는 믿음과 신뢰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예수는 호숫가로 걸어갔다. 태양은 아직 수평선 위로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어부가 그곳에서 막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던 중이었다. 그때 예수가 그들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보라, 그대는 어찌하여 그대들의 삶을 헛된 일에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물고기를 낚는 일에 힘을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을 사람을 낚는 자, 사람의 어부로 만들 수가 있다. 와서 나를 따르라!”
만일 그대가 사무실이나 가게에서 앉아 일하고 있을 때 그가 와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라져라.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내 시간을 빼앗지 말라.” 그러나 그대여, 그 두 명의 어부는 가만히 예수를 응시했다. 어떤 의심도 없이 그들은 예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고, 그리하여 이 남자, 예수는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의 눈, 아아, 그 두 눈은 호수보다 더 깊어 보였다. 그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광채는 태양보다 더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무 미련없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의 뒤를 따랐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단 하나의 의문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낯선 자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그 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에 그를 본 적도 없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의 부름, 그의 초대만으로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의 부름을 듣고 그를 응시하였다. 그리고는 그의 진실함을 느끼고 그를 따랐다.
그들이 바로 마을을 벗어나 언덕에 이르렀을 때, 한 남자가 급하게 달려와서는 두 명의 어부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도대체 어딜 가는 것인가? 너희 부친께서 돌아가셨다. 빨리 돌아가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말했다. “집에 가서 돌아가신 부친을 묻고 돌아와도 되겠습니까? 그 일이 끝나면 우리는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예수가 대답했다. “죽은 자의 일로 근심하지 말라. 마을에는 죽어있는 자들이 수없이 있다. 그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묻을 것이다. 너희는 와서 나를 따르라. 죽은 자의 일로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라.” 이리하여 그들 두 어부는 예수를 따라 갔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이다. 그들은 예수를 듣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옳았다. “너희들이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가 죽었으면 죽은 것이다. 너희들이 돌아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을에는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 충분히 있다. 그들이 뒤처리를 할 것이다. 그들이 장례식을 치러줄 것이고, 그들이 매장을 해줄 것이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라.”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 갔으며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신뢰란 뒤돌아봄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신뢰란 되돌아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여, 의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뒤돌아본다. 언제나 다른 구멍을 생각하고 언제나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한다. 그리고는 언제나 자신이 올바른 길을 선택했는가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까, 아니면 이 미친 사람의 뒤를 따라가야 할까? 누가 알겠는가? 이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아무도 하느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게다가 이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두 어부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를 따랐다.
예수와 같은 사람을 따른다면 머지않아 그대는 그에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대는 그를 따라야만 한다. 머지않아 그대는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뿐만이 아니다. 그를 통해서 그대는 또한 그대 자신도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 처음에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대, 처음부터 의심한다면 그때 문은 닫히고 만다.
이러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는 3세기에 걸친 과학의 성공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과학은 그토록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과학은 기적을, 물론 쓸모없는 기적을 낳았다. 왜냐하면 그 기적은 인류의 행복에 조금의 기여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적이라는 것이 그것을 통해서 행복이 증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낱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오히려 행복은 줄어들었다. 기술 발전이 진행될수록 생활은 편안해진다. 그러나 행복은 줄어든다. 이러한 것이 바로 과학이 이룩해 놓은 기적이다. 기계 장치로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그대는 더욱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그대가 덜 필요해질수록 그대는 점점 자신이 하찮고, 보잘 것 없으며, 무의미한 존재인 것으로 느끼게 된다. 멀지 않아 컴퓨터가 그대를 대신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는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컴퓨터가 모든 일을 해줄 것이기 때문에 그대에게는 어디론가 가서 자살해 버리는 일만이 남아 있게 될 것이다.
행복한 느낌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 나온다. 그대가 필요한 존재일 때 그대는 행복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대는 자신의 존재가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자신의 삶이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자신 없이는 모든 일들이 어렵게 될 것이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대가 없다 해도 무엇 하나 변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대가 없다면 모든 일은 더 잘 되어갈 것이다. 기계가 그대보다 모든 일을 더 잘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방해물일 뿐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일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이제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제품이 되어 버렸다. 해마다 모든 것이 새로운 판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신형의 차들이든 무엇이든 모든 것들이 신형이 되어 나온다. 오직 인간만이 구형으로 남아 있다. 산더미 같은 신제품들 속에서 오직 그대만이 낡은 채로 남아 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무의미함을 느낀다.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이들까지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가, 복지 단체가 그들을 보살펴 줄 것이다. 그대의 늙은 부모들조차 이제는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양로원, 국공립의 양로원들이 있어서 그들을 편안하게 모실 것이다. 누가 그대를 필요로 하겠는가? 그리고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대가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옛날에는 그대는 필요한 존재였다. 유대 신비주의자 중에 힐렐(Hillel)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강하 믿음의 소유자로서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하느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만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당신 또한 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되어버릴 것입니다. 나 힐렐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당신에게 기도하겠습니까? 누가 당신을 우러러보겠습니까? 나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하지만 당신에게는 또한 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우주 전체가, 그리고 하느님까지 그대를 필요로 했을 때는 그대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존재 의의가, 하나의 향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쉽게 방치될 수도 있다. 그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그대를 안락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대를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기술 발전은 보다 좋은 집들을 만들어주기는 했지만 좋은 인간을 만들지는 못했다. 보다 나은 인간을 위해서는 다른 차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차원은 기계의 차원이 아니다. 그 차원은 깨달음의 차원이지 기계화의 차원은 아니다.
과학으로는 붓다나 예수와 같은 인물들을 만들어 낼 수가 없다. 과학은 깨달은 이들의 출현이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는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로 와서 왜 깨달은 사람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이냐고 묻는다. 왜 예수나 붓다 같은 이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바로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는 점점 더 단순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사회, 순진한 사람들이 발붙이고 살기 어려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 해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거기 깨달은 이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그들을 알아보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그들은 틀림없이 거기에 있다. 매일 사무실로 나가면서 그대는 그들 곁은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는 그들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대는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사라져 버렸다. 그대, 이것을 기억하라. 예수는 믿음의 시대에, 그것도 깊은 믿음의 시대에 살았다는 것을. 그의 모든 영광, 그의 모든 중요함이 그러한 믿음의 차원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대, 예수의 이 작은 이야기로 들어가자.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기를,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 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자들은 질문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물음은 순진무구한 것이었다. 물음이 순진무구한 것일 때 예수는 비로로 대답할 수 있다.
어떤 때의 질문이 순진무구한 것일까? 그대는 답을 알고 있는가? 만일 그대가 이미 답을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대의 질문은 순진무구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대는 “신은 있는 것일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대는 이미 그 답을 갖고 있다. 그대는, “그렇다. 신은 존재한다.”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그대는 단지 그 생각을 확고하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왔던 것이다. 아니면 그대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으면서 이 사람이 과연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나에게로 왔다. 만일 답이 이미 거기에 있다면 그 질문은 교활한 것이다. 그것은 순진무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대답할 수가 없다. 예수는 오로지 순진무구한 질문에 대해서만 대답할 수가 있다.
제자가 물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답이라곤 없다. 그는 모른다. 단순히 그는 모르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이다. 그대, 이것을 기억하라. 무엇인가를 물을 때, 혹시 그대는 이미 하나의 답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묻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잘 기억하라. 그대는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묻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그렇다면 거기 만남은 불가능하다. 내가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답은 그대에게 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비어 있지 않다. 답은 이미 거기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편견을 지기고 있고 물들어 있다.
질문에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다. 하나는 아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그 질문은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에는 논쟁은 있을 수 있어도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대가 무지할 때 묻는 질문이다. 그대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묻는 질문이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 물을 때 그대는 한 사람의 제자가 된다. 이제 그것은 논쟁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단지 목이 말라서 물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프기 때문에 그대는 밥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모른다. 그래서 그대는 묻고 있다. 그대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제자는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 묻는다. 모를 때에 그대는 겸허하다. 알고 있을 때에 그대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그래서 예수는 이기주의자에게는 말할 수가 없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묻기를,
제자란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는 끊임없이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많은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용어 그 자체가 많은 불화를 만들어내었다. <나라, 왕국>이란 말은 정치적인 말이고 따라서 정치가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정치가들이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나이는 언젠가 지상에 도래할 왕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사나이는 자신이 그 왕국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사나이는 혁명을 일으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나이는 다른 왕국을 세우려 하고 있다.”
그래서 왕이나 성직자들, 총독과 관리와 세리들은 모두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이 사람은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군중들은 모두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군중들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은 불타오르고 완전히 새로워졌다. 무엇인가 어떤 일이 그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성직자들과 총독 빌라도, 헤롯 왕, 온 지배층이, 성직자나 정치가를 막론하고 모두 이 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인물로 여겨졌다. 그토록 순진하고 순수한 이는 이전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험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는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았다.
예수와 같은 사람이 오해받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문제는 그가 그대가 사용하는 언어로 말을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그는 그대들의 언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 다른 언어는 없고, 그 언어조차도 이미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그 언어들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하느님의 왕국,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왕국이라니? 그 말은 위험한 말이다. <왕국>에는 정치적인 어떤 의미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는 이 세계의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틀림없이 혁명가였다. 그는 혁명의 대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적인 세계의 혁명이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왕국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조차도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가 스승 앞에 올 때에는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만난다. 그것은 마치 하늘과 땅의 만남과 같다. 그것은 서로의 경계선상에서의 만남이다. 그대가 믿음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하늘로 옮겨갈 수 있지만 믿음이 없다면 그대는 땅에 붙들리고 만다. 만일 믿음이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날개를 펴서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지만 거기 믿음이 없다면 그대는 땅에 매달리고 만다.
이 사람은 그대에게 위험을 안겨다 준다.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어떤 형태의 나라인가? 이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과는 전혀 정반대의,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나라이다. 예수는 설명에 설명을 거듭했지만 이해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예수는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한 자로 될 것이다. 가장 나중인 자가 가장 먼저인 자로 될 것이다.” 예수는 바로 노자(老子)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바로 노자와 같은 인물이었다. “나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나중인 자가 가장 먼저인 자로 될 것이다.” 그는 바로, 가장 겸허한 자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고, 가장 가난한 자가 가장 부유해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 자가 그곳에서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대가 강둑에 서 있다고 하자. 강은 조용히 흐르고 있고, 물결 하나 없으며, 그대는 강물에 반영된 그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그 반영된 모습은 거꾸로 된 모습일 것이다. 반사된 모습은 언제나 거꾸로 된 모습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실제로 거꾸로 서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똑바로 해놓으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뒤집어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거꾸로 해놓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의 혼돈 상태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붓다는 거지가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중인 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왕이었다. 그러나 신의 나라는 가장 나중인 자에게 속한다. 그는 이 세상의 왕국을 떠났다. 이 세상의 왕국은 쓸모없고 무의미한 짐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그것을 지고 다니지만 그것은 결코 자양분을 주는 샘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대를 파괴한다. 그것은 하나의 독약과 같다. 비록 그것이 그대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작용한다 해도……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인 한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말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느리게 퍼지기는 하지만 독약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했다. “상관없어. 나는 급하지 않으니까.”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대의 삶은 더디게 퍼지는 독약과 가다. 마지막에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를 죽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대는 별로 서두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그대를 죽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세상의 왕국은 죽음에 속하지만 하늘 나라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말한다. “준비된 자는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넘치는 생명을 주리라.”
예수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목이 말랐고 그때 마침 그곳에 우물이 하나 있었다.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예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몹시 목이 마르다. 나에게 물 한 잔만 달라.”
그 여인이 말했다. “저는 아주 천한 계급에 속하므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물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수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물을 달라. 그 대가로 너에게도 나의 샘에서 물을 길어 주리라. 네가 한 번 그 물을 마시면 너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은 묻고 있다. “하늘 나라는 무엇과 같습니까?” 우리들이 모르는 것은 오직 <무엇과 같은>이라는 표현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신화가 탄생한다. 신화는 그대가 모르는 것, 그대의 지적인 능력을 통해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이미 알고 있는 용어들로서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신화이다. 그대의 현재의 상태에서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 그것이 신화이다.
하늘나라는 직접적으로 설명될 수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대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는 그것에 대하여 설명할 길은 없다. 무엇을 말하더라고 그것은 오류를 범할 뿐이다. 진리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나 노자, 붓다 같은 이들은 여러 해 동안 끊임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진리가 말해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대가 알고 있는 어떤 상징들을 통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대들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 미지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화…… 이것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들이다.
게다가 신화를 분석하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어서 그것을 산산조각으로 나누어서는, “이것은 신화이지 진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분석하고 해부하고 신화에다 외과수술을 가하고서는, “이것은 신화이지 참 역사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누구 하나 신화를 역사라고 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또한 신화는 단순한 상징이기 때문에 해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델리(Delhi)> 방향이라고 쓰인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도로 표지판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그 돌을 해부한다. 그 화살표와 페인트와 화학약품과 모든 것을 해부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우둔한 녀석이 이런 짓을 했을까? 여기 델리 같은 것은 없지 않은가?”
신화는 이정표, 화살표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단순한 방향 표시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하늘 나라는 <무엇과 같은지> 말해 달라고 묻는 이유이다. 그대여, 우리는 하늘 나라는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는 없다. 그 질문의 특성, 우리들에게는 하늘 나라란 무엇인가 하고 물을 능력이 없다고 하는 특성을 잘 보라. 그것은 우리들의 분에 넘치는 일이다. 또한 우리들은 오직 그것을 무엇과 <같은>가 하고만 물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곧 이런 의미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잠깐의 섬광이라도 볼 수 있는 그러한 표지판을 만들어 주십시오.”
그것은 곧 맹인이 빛이란 무엇과 같은가 하고 묻는 것과 같다. 그대 눈이 멀어 있을 때 그대가 어떻게 빛이란 무엇인가 하고 물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게 묻는다면 그 물음 자체가 답을 방해한다. 그것은 대답되어질 수가 없다. 빛을 알 수 있는 것, 거기에 필요한 것은 그대의 두 눈이다. 그러나 “빛이란 무엇과 같은가?” 하고 묻는 것은 곧 “맹인들이 알고 있는 어떤 언어로 그것을 말해 주십시오.”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화는 눈 먼 자의 언어로 표현된 진리이다. 우화란 모두 맹인의 언어로 치장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대, 그것들을 해부하려고 하지 말라. 해부한다고 해서 그대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단순히 가리키는 표지일 뿐이다. 그리고 그대가 신뢰하기만 한다면 그 표지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 된다.
일본에는 불상이 하나도 없는 절이 하나 있다. 참배자들은 안으로 들어가서는, “불상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묻는다. 거기 불상은 하나도 없다. 단지 거기 단상 위에 하늘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이다. 절의 주지 또한 “이것이 부처입니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 주지가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아는 바 없다. 어쨌든 그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다. 그대, 붓다란 무엇인가? 단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일 뿐이다.
제자들은 하늘 나라가 무엇과 같은가 하고 묻고 있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화로, 우리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말해 주십시오. 우리에게는 어떤 경험도 없습니다. 그것을 흘낏이나마 볼 수 있도록 무엇인가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으니 이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을 친다.”
예수는 이 겨자씨의 비유를 곧잘 말하곤 했다. 많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더욱 작다. 그러니 어떻게 그대가 그를 가리킬 수 있겠는가? 시야의 경계선 상에 겨자씨는 존재한다.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에서는 가장 작다. 그 너머는 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이다. 그 너머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겨자씨가 경계선이다. 그것은 매우 작기는 하지만 그대가 볼 수는 있다. 그것을 넘어서면 그대는 아주 극미한 세계로 들어간다. 그것은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세계이다. 겨자씨는 바로 그 경계선 위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 겨자씨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게는 또한 매우 신비한 성질이 있다. 즉, 그 씨앗이 자라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식물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씨앗은 가장 작지만 자라나게 되면 가장 커다란 식물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우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큰 것이다. 삼라만상은 그 나무, 그 식물이고, 하느님은 그 씨앗이다. 하느님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우주가 현현해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 씨앗을 쪼개어 본다고 해서 거기에서 나무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대는 씨앗을 분해할 수는 있지만 거기 숨겨져 있는 나무를 발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여기 나무 같은 것은 없다. 아무 것도 없는 이 씨앗 속에 커다란 나무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다니 어리석은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분석가들이 언제나 범하고 있는 오류이다. 그들에게 “이 꽃은 아름답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을 연구실로 가져가 어디에 그 아름다움이 있는가 찾아내기 위하여 그것을 해부할 것이다. 그들은 그리하여 꽃의 화학적 성질이나 기타 다른 것과 맞부딪칠 것이다. 그들은 또 그것들을 해부하고, 분석할 것이며, 꽃의 제각기 다른 부분을 뽑아내어 수많은 병에 넣고 표를 붙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시험관을 들여다보아도 거기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들은 연구실 밖으로 나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당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었다. 보라, 아름다움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꽃 전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해부해 보았다. 거기 아름다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들 중에는 그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해부할 수 없다. 그 전체는 각각의 부분들보다도 더욱 위대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이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진리는 부분들이 합쳐진 것보다 위대하다. 그것은 단순히 부분들이 합쳐진 합이 아니다. 그것은 부분 전체보다도 더욱 위대하다.
멜로디는 음부호들의 합계, 소리들을 합친 것이 아니다. 멜로디는 그 이상의 무엇이다. 모든 음의 부호들이 만날 때 하나의 하모니가 창조된다. 개개의 음부호 속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하모니가 되어 나타난다. 나는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대는 나의 말들을 분석할 수도 있고, 사전에서 그 말들을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사전에서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대는 말한다. “모든 말들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왜 근심하겠는가?”
언젠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친구인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갔었다. 그 친구가 여러 날 동안을 와달라고 성화였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는 훌륭ㅎ나 웅변가, 대단히 시적인 웅변가로서 아주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그가 설교를 할 때마다 교회는 초만원이었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은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간 적이 없었다. 그 친구가 되풀이 부탁했기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좋다. 이번 주말에 가겠다.”고 말하였다. 그 일요일을 위하여 목사는 자신의 최선을 다하여 준비를 했다. 마크 트웨인이 온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그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모든 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 마크 트웨인은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목사는 여태껏 연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 온 힘을 다 불어넣었고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설교였다. 한 편의 교향시, 하나의 교향악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그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크 트웨인이 자리에 죽은 듯이 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칭찬하는 기색이 없었다. 군중들은 수 없이 황홀해 하고 박수를 쳤다. 오직 마크 트웨인만이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어떤 의사 표시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무관심하게 앉아 있었다. 무관심한 태도는 부정적인 것보다 더 가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면 적어도 그대는 그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나타낸다. 그것에 반대하고 있다면 적어도 그것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관심이라는 것은, 이것은 전적으로 무익한 것이다. 반대할 가치조차도 없다는 의미이다.
설교가 끝난 후 마크 트웨인은 목사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왔다. 목사는 아무 것도 물을 수 없었고, 그들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차가 멈추고 마크 트웨인이 내리려고 할 때 비로소 목사가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설교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군.”
그러자 마크 트웨인이 대답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집에 책 한 권이 있는데 자네는 그것에서 베껴왔을 뿐이다. 그 설교는 빌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자네는 저 교회에 오는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는 글을 쓰고 공부하는 사람이다. 실은 우연하게도 어젯밤 나는 그 책을 읽고 있었다.”
목사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자네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나는 어디에서도 그 설교를 베끼지 않았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자네가 했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책 속에 다 있다. 내일 그 책을 보내 주겠다.” 다음 날 그는 한 권의 큰 사전을 보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자네가 한 말 모두가 이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이 분석가의 마음이다. 그는 시를 그 자리에서 죽일 수 있다. 그는 그것이 단지 말이 연결되어 있는 것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말의 사이사이를 보지 못한다. 그는 행간을 볼 수가 없다. 시는 바로 그곳에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환희나 하느님, 모든 중요한 것들은 언제나 말 사이에, 행간에 존재한다.
겨자씨는 가장 작으면서도 가장 큰 것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다. 그대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하느님은 가장 작은 것, 겨자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삼라만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삼라만상이 거기 존재한다면 씨앗도 틀림없이 거기 존재한다. 씨앗이 없이 어떻게 거기 나무가 존재할 수 있을까? 씨앗 없이 나무가 있을 수 있을까? 그대가 볼 수 있는가 아닌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우주만물은 궁극의 원인이 없이, 원천이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갠지스 강은 거기에 흐르고 있다. 그 갠지스 강이 원천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광대한 우주, 그대는 그것이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 우주는 광대할 뿐만이 아니라 거기 그 속에는 훌륭한 조화가, 우주적인 교향악이, 위대한 우주의 질서 구조가 있다. 우주는 혼돈이 아니다. 그 속에는 훌륭한 질서가 있어서 모든 것은 다 제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아는 이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상태야말로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방식 중에서 가장 최선의 것이다. 이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대, 거기에는 씨앗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씨앗은 가장 작다. 겨자씨보다도 더 작다. 겨자씨는 하나의 신화로서, 무엇인가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예수에게 묻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부였고, 농부였고, 소작인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유를 들어 말하면,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말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것을 해부하면 그대는 놓치고 만다. 그대여, 종교를 해부해 버리면 그대는 놓치고 만다. 그대의 과녁은 빗나가고 만다. 분석하면 볼 수 없고, 분석을 하지 않으면 볼 수 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거기 믿음을 사용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씨앗 속에서 나무를 볼 수는 없어도 그대는 그 씨앗을 밭에 뿌릴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 이것은 한 알의 씨앗이다. 나는 이것이 아무로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들로 나가서 이 씨앗을 심을 것이다. 적절한 토양을 찾아서 이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기다리고 기도할 것이다. 사랑을 하고 희망을 가질 것이며 나는 꿈을 꿀 것이다.”
그 이외에 그대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대는 씨앗을 뿌리고, 기다리고, 꿈을 갖고, 희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다. 그 이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 씨앗은 새로운 것으로 변해 있다. 새싹이 흙을 비집고 솟아나온 것이다. 이제 씨앗은 더 이상 한 알의 씨앗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것은 꽃피어나고 있다.
한 알의 씨앗이 한 그루의 나무로 되어갈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 역시 그 비유의 일부이다. 씨앗은 죽어야만 한다. 오로지 그때에만 그것은 한 그루의 나무로 될 수가 있다. 하느님은 이 우주 속으로 죽어갔다. 신은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 수가 없다. 신은 이 우주 안에 있다. 신은 이 우주 안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그대가 신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대는 히말라야든 메카(Mecca)든 카시(Kashi)든, 그대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가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대는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신은 바로 이곳에, 모든 곳에 편재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씨앗이 이제는 나무 전체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그 씨앗은 나무 속에서 죽어 나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대는 그곳에서 씨앗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은 이 우주 속으로, 이 실재하는 것들 속으로 죽어 들어가서 우주 그 자체가 되었다.
신은 분리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목수처럼 무엇인가를 만들고 나서 그것과는 분리된 채로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씨앗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무는 씨앗으로부터 생장하지만 그때 씨앗은 나무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대가 다시금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나무가 사라져버렸을 때 뿐이다.
힌두교도들은 신을 볼 수 있는 것은 창조의 처음 때에나 우주의 마지막 어느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 처음 때, 아직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씨앗은 반드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신을 보아야 할 그대는 거기에 없다. 그대 또한 그 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그 나무의 잎사귀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신은 세계 전체가 녹아 없어졌을 때, 그 나무가 늙어서 죽을 때, 결국 이 세계의 종말에 이르렀을 때 거기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일은 모든 나무에게서 일어난다. 나무가 늙게 되면 새로운 씨앗이 다시 나타난다. 수백만의 씨앗들이 다시 나타난다.
세계의 마지막, 쁘랄라야(pralaya)에서 그대는 다시 수백마의 신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대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문제이다. 신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즉, 그대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나뭇잎 하나하나 속에서 신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대는 신을 볼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어떤 특별한 이미지, 크리쉬나(Krishna)나 람(Ram)을 찾고 있다면 그대는 결코 신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 또한 하나의 나뭇잎들이다. 물론 더 아름답고 더 싱싱하고 더 푸르른 나뭇잎들이다. 그들은 신에 대하여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다.”고 예수가 말했을 때 그는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미학이다. 거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서도 수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씨앗이 죽을 때 우주가 거기에 있다. 씨앗이 죽을 때 거기 나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이다. 이곳에 바로 하늘 나라이다. 그리고 만일 그대가 어딘가 다른 곳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그대는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대, 만일 하늘 나라를 들여다보고 싶어한다면 그대 또한 한 알의 씨앗이 되어 죽어야 한다. 그러면 돌연 나무가 거기 존재한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신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대>는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거기 <그대>가 존재한다면 하느님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씨앗이 거기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사라질 때 신은 거기 존재한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나는 일이란 존재하니 않는다.
그대가 없을 때 하느님이 거기 존재한다. 그대 쪽이 비어 있을 때 그때 신은 존재한다. 거기 더 이상 그대가 사라지고 없을 그때 신이 거기에 있다. 또다시 역설이다. 씨앗은 그 안에 나무를 포함하고 있지만 씨앗은 또한 나무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씨앗이 너무 이기적이라면, 자신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씨앗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그때에는 바로 그 그릇 자체가 하나의 감옥이 되어 버린다. 나무를 보호했던 껍질 자체가 그것이 흙 속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의 감옥이 되고, 그렇게 되면 나무는 그 안에서 죽어 버린다.
그대는 감옥이 되어 버린 씨앗과 같은 자들이다. 붓다와 같은 이, 예수와 같은 이는 감옥이 아닌 씨앗이다. 그 씨앗, 그 껍질은 죽어 없어지고 바야흐로 나무가 싹트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으니 이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로되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을 친다.”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적합한 토양이 필요하다. 단순히 씨앗이 죽은 것만으로는 안 될 것이다. 돌 위에 떨어져 죽는다면 나무가 자라나지 못할 것이고 단순히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적합한 토양, 적합한 밭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의 의미이다. 그것은 일종의 훈련이다. 씨앗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적합한 밭이 찾아져야만 한다. 그대는 그대들 안에 나무를 가지고 있고 스승은 단지 그대들에게 적합한 밭은 줄 수 있을 뿐이다. 스승은 그대를 경작할 수 있고, 잡초를 뽑아버릴 수 있다. 스승은 그 땅을 쓸 만한 것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스승은 그 땅에 비료를 뿌려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는 소작농인 것이다.
그대는 모든 것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직 그대들에게는 소작농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씨앗을 아무 곳에나 뿌리고 다닐 것이다. 포장된 길 위에 떨어져 그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 위에 떨어져서 발에 밟혀 그곳에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대가 죽어가고 있을 때는 그대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아이가 태어날 때에는 산파가 필요하다. 산파가 없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탄생의 순간이란 매우 미묘한 것이기 때문에 산파가 필요하다. 진리가 탄생하는 순간은 더욱 위대한 순간이다. 그대 안에 신이 태어나는 그 순간은, 그대여, 그 어느 순간보다도 더욱 위대하다. 그대, 스승은 단지 한 사람의 산파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기 스승이 없다면, 많은 위험한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유산할지도 모르고, 태어나기도 전에 아이가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대, 스승은 그대가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존재이다. 새로 태어나는 싹은 연약하여 무방비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대가 믿는다면…… 그리고 믿음이 필요하다. 거기 다른 방법은 없다. 왜냐하면 그대가 의심할 때 그대는 움츠려들고 씨앗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 믿음을 갖고 있다면 씨앗은 죽을 수 있다. 그 씨앗은 나무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문제이다. 씨앗은 자기가 죽으면 나무가 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대, 씨앗을 확신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부조리한 것이다. 신앙은 확실히 부조리이다. 그대는 자신이 산야신, 구도자를 될 수 있음을, 모든 것을 손에서 놓을 수 있음을,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씨앗이 거기 더 이상 없다고 해서 나무가 자라난다는 보장이 있을까? 누가 그대에게 보증을 설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보증을 설 수 있겠는가? 가령 누군가 보장을 한다 하더라도 그 씨앗은, 그 보증이 주어지는 당사자는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떠한 보증이 씨앗에게, “네가 없어지면 나무가 태어날 것이다.”라고 증명할 수 있겠는가? 어떠한 보증도 불가능하다.
여기에 신앙의 부조리가 있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곧 신앙의 의미인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을 믿는 것, 믿을 방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믿는 것이다. 깊은 믿음 속에서 씨앗은 죽고 나무가 태어난다. 그러나 경작된 밭이 필요하다. 적합한 토양이 필요하다. 그대여,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그러한 경작된 밭으로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을 친다.”
그대의 나무가 진실로 자라났을 때는, 그것이 한 그루의 <깨달음의 나무>로 되었을 때에는 ,길을 찾는 수많은 새들이 날아와서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튼다. 예수 밑에서 많은 <하늘을 나는 새들이>보금자리를 얻었다. 붓다 밑에서 수많은 공중을 나는 새들이 보금자리를 얻었다. 심원하고 깊은 것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나무>나 <붓다의 나무>는 보금자리가 되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미지의 세계가 맥박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도약할 수가 있었다.
“하늘 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 같으니……” 그대가 곧 하늘나라이다. 그대는 곧 한 알의 겨자씨와도 같다. 그대여, 죽을 준비를 하라. 그대의 죽음에 대하여 준비를 하라.
물론 두려움과 전율과 불안이 있을 것이다. 도약은 줄곧 어렵기만 할 것이다. 수없이 그대는 후퇴할지도 모른다. 수없이 그대는 운명의 갈림길까지 갔다가 물러서고 도망칠 것이다. 거기 하나의 심연이 있기 때문이다. 씨앗은 다만 이 심연을 알 수 있을 뿐, 씨앗은 나무를 알지 못한다. 씨앗이 나무가 싹트는 것을 볼 수 있는 길은 없다. 씨앗은 죽어야만 하고 그 후에 일어날 일, 미지의 세계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만일 그대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난다. 밭으로 가서 씨앗을 뿌려라. 나무가 싹이 트면 땅을 파고 거기 씨앗이 있는지 찾아보라. 그것은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거기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붓다를 파보라. 그대여, 가서 예수를 파보라. 그대는 그 사람을, 그 씨앗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더 이상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인 것이다. 씨앗은 분명히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나왔지만 이제 그 씨앗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껍질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이 나무는 결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로부터 온 것이다.
그대, 예수를 보라. 거기 이제 더 이상 씨앗은 없다. 오직 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대,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거듭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 사념과 육신을, 에고와 자기 동일시를 떨쳐 버려라. 그때 갑자기 그대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그대 내부에서 자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대는 하나의 자궁이 된 것이다. 그대는 임신을 한 것이다. 그리고 영적인 임신이야말로 창조의 정점이다. 그것을 통해서 그대는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에 비할 것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조각이나 그림을 그대가 만들었다고 해도 이 자신을 창조하는 것에 비교될 것은 아무 것도없다.
“……그것이 밭에 떨어지면……” 그대여, 죽을 준비를 하라. 그러나 도약을 할 준비를 하기 전에 경작된 밭이 되어라. 제자가, 배우는 사람이 되어라. 겸허해져라. 마치 그대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되어라. 머지않아 그대는 실제로 사라진다. 그대, 그것을 위해 준비를 하라.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라.
그렇게 되면,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되어 하늘을 하는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을 친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대는 여기 이곳에 내 가까이에 있다. 나의 씨앗은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여기 이곳에 있는 것은 그대들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 때문이다. 아니, 나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정확한 것이 아니다. <나>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씨앗은 사라지고 이제 나무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가 나를 통해서 그대들 자신의 가능성을 흘낏 볼 수 있기라도 한다면 그것으로 일은 다 된 것이다.
“하늘나라는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 같으니……” 그대가 곧 씨앗이다. 그대가 그 나라의 가능성이다. 그대여, 죽을 준비를 하라. 그것이 다시 태어나기 위한, 거듭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첫댓글 하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 말씀해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