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만나 내뱉은 말은 다름 아닌 평안하냐는 말이었다. 그동안 잘 있었느냐, 혹은 놀라지 않았느냐를 물을 법도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평안의 유무가 예수님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부나 명예, 건강, 애정 등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평안한 삶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평안이 빠진 삶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평안이 사라지고 그 대신 불안, 염려, 걱정,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삶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은 불러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지만 평안하거나 긍정적인 생각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야 겨우 얻어진다. 평안한 삶은 누구나 바라지만 평안을 누리고 있는 이가 적은 것은 그만큼 얻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안 없는 행복한 삶은 언감생심이다.
1. 자신이 누구인가 깨달으라.
망둥어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갯벌 속에 사는 물고기이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속에서 살고 물이 빠지면 육지에서도 산다. 물이 없는 진흙 속에 머리를 처박고 살아도 자신이 물고기임을 아는 까닭에 멀리가지 않는다. 물이 없는 곳에 산다고 자신이 물고기임을 잊어버렸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것이 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면 공허한 삶을 슬퍼하고 우울해하거나 오직 쾌락만을 좇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죽음이 올 때까지 철저하게 즐기고 사는 것이 인생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삶도 뒤끝에는 공허하고 허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평생 돈이나 권력, 명예를 좇거나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며 사는 이들도 영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실망감과 허무함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네 조상들은 인생무상(人生無常)이란 말을 즐겨 쓰곤 했다.
크리스천이라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이고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공부시간에 받아들여야하는 사실로만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그들이 교회에 오는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얻고자 함이고 이 땅에서 축복을 받아 누리고 싶어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이유가 오직 쾌락과 만족을 얻는 데 있다는 말과 별 다름 없다. 그래서 이들은 교회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이 되지 않거나 소원하는 기도응답이 속히 이루어 지지 않으면 불평과 불만이 쌓이고 원망과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 이유는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안락한 삶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평안도 자리 잡고 있지 못할 것이다. 누리고자 하는 생활스타일과 얻고자 하는 욕망은 언제나 처음보다 커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전도와 헌금을 빌미로 축복과 성공, 치유 등을 무분별하게 남발하던 교회지도자들의 탓이다. 교회를 채우고자 급급했기에 극히 일부의 하나님의 뜻을 전체인양 말하거나 성경을 왜곡하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일도 흔하다.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 하고 대접하기보다 대접받는 일에 더 익숙하다. 헌금과 십일조를 내고 있기에 자신의 몫을 챙기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하다.
자신이 누구이며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치열한 물음과 깨달음이 없다면 교회에 오는 목적조차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것도 성경공부시간이 아닌 일상의 삶속에서 자연스레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누군가가 넣어준 것일 게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고 있다는 생각이 치열한 깨달음으로 자신의 것이 되어야할 것이다. 비록 가진 것이 넉넉하지 못하고 직업이나 신분이 자랑할 만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당당한 자부심만 있다면 잔잔한 평안이 삶에 깃들겠지만, 세상과 세상의 것에 대한 탐욕을 거두지 않는다면 평안은 평생 동안 자신의 몫이 아닐 게다.
2. 탐욕을 버려라.
우리네 조상들의 성품은 예의를 숭상하고 유유자적을 즐기던 넉넉함이 대세였다. 그렇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급격한 경제발전을 거치면서 예의는 사라지고 거칠고 조급한 성격으로 바뀌어졌다. 그 모습을 지금의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땅이 크고 부존자원은 많았지만 많은 인구에 자본이나 기술이 부족해 가난하기만 했던 나라에서 개방의 물결을 타고 세계의 자본과 기술이 몰려오면서 부가 쌓이기 시작했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만만디를 숭상하던 사람들의 성품이 급하고 거칠어지지 시작했다고 한다. 모두가 가난할 때는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되지만 탐욕이 들어서는 순간 삶속의 평안은 순식간에 사라지게 된다.
마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황금만능의 물질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탐욕은 자연스레 몸에 밴 성품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크리스천이라면 세상을 향한 욕심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믿음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탐욕은 과도한 욕심을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친 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만을 요청할 것을 말하셨다. 일용할 양식이란 생존에 필요한 생계비를 함축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생계비는 사람마다 다르다. 시골에서 부부가 농사지으며 살면서 공산품을 제외한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하고 있다면 생활비가 적게 들겠지만, 많은 부양가족을 거느리고 물가가 비싼 대도시에서 산다면 많은 생활비가 들 것이다. 수입이 없는 대학생에게는 경차라도 사치스럽겠지만 큰 회사의 CEO라면 대형차도 필수품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기에 일용할 양식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누구나 안락하고 수준 높은 라이프스타일을 소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자족과 절제가 몸에 밴 상태에서의 생계비를 말하고 있다. 재산이 많더라도 절제하며 사는 이도 있고 가난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며 방탕하게 사는 이들도 많다. 재산이나 수입의 과다에 상관없이 자족과 절제의 성품을 지니고 있는 지가 일용할 양식을 넘어서는 탐욕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나님은 탐욕을 우상숭배라 칭하며 가장 싫어하시는 최우선순위로 정해놓으셨다.(골3:5) 그 이유는 돈이 아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인 탐욕이 모든 악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뿌리 채 뽑기를 원하시는 성품이지만 돈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하기에 늘 경계하고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탐욕의 덫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자기 안에 평안이 없다면 탐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탐욕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섬김을 받기 원하는 사탄이 돈을 앞세워 연약한 영혼을 넘어뜨리는 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공격무기이기 때문이다.
3. 남과 비교하지 말라.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마라톤에서 완주하는 가장 큰 비결은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에 있다. 경주의 처음에 조급한 사람들이 앞 다투어 뛰어갈 때 같이 경쟁하다가는 페이스조절에 실패해 중도에 경기를 포기하기십상이다. 학창시절에는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을 부러워하며 사회에 나오면 돈 잘 버는 이들만이 눈에 보인다. 그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늘 뒤떨어지며 초라한 모습에 열등감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앞서가는 이들을 바라보며 건강한 동기부여를 받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늘 비교하는 습관으로 열등감에 휩싸이는 것은 평안을 잃게 되는 나쁜 버릇이다. 아무리 공부 잘 하는 학생도 자신보다 더 나은 학생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며, 회사에서도 자신보다 능력 있는 사람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자신보다 더 크고 너른 아파트, 고급 자동차, 연봉이 많은 직업,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만 바라보면 입맛이 떨어지고 살아갈 힘이 사라진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 사람들의 잣대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 안에 있는 자녀들은 모두 귀하고 소중하다. 그리고 똑같은 모습으로 지으신 것이 아니고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성품, 모습으로 지으셨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 재산이 많고 적거나 혹은 재능이 뛰어나고 형편없거나 용모가 잘 생기고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재산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며 재능이 많다고 부유하게 사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역할과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귀히 쓰이는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남과 비교해 어떻게 생각할 지라도, 자신은 하나님 앞에 둘도 없이 지어진 특별한 존재이다. 자신과 같은 용모와 재능, 성품과 개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의 잣대는 돈 많은 사람과 신분이 높거나 재능이 많은 사람 혹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람을 선호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각각 특별하게 지으셨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이나 은사를 잘 계발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충실하게 살아간다면 평안한 삶은 저절로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자신과 다른 남들과 비교해서 우울해하고 불평하며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비록 가진 것이 없으며 재능도 부족하고 못생겼다고 할지라도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은사를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평안이 넘치는 삶을 누릴 수 있다.
4. 삶의 덫을 조심하라.
잠 22:3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믿음이 좋고 성품이 깨끗한 사람일지라도 고통스런 삶의 역경을 맞닥뜨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지혜가 없어서이다. 지혜가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꾼다면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을 뜻한다. 덫은 산에서 짐승을 잡는 도구이다. 짐승들이 좋아하는 미끼를 그 안에 걸어놓고 그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 교묘하게 설치해 놓는다. 그러면 조심스럽지 못한 짐승들이 먹음직스러운 먹이만 보고 덥석 물다가 그만 덫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어리거나 경계심이 부족한 동물이다. 노회하거나 의심이 많은 짐승들은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평소에 보지 못한 맛난 먹이가 이렇게 쉽게 발견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삶의 경험으로 보아 잘 알고 있기에 쉽게 접근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경험이 적은 어린동물이나 경계심이 부족한 짐승들은 한순간에 재앙에 빠지고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인생에도 덫이 있다. 이 덫에 빠지면 거의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허다하다. 그 덫은 알코올중독을 비롯한 각종 중독, 불륜, 악성부채, 우울증 등을 말한다. 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인생의 즐거움을 선물한다. 그렇지만 쾌락 안에는 가시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술에 빠져 인생을 망가뜨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박의 쾌락도 짜릿하지만 이에 걸려들면 거의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시대는 음란의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와 같다. 한순간에 불륜에 빠져버린다면 행복한 가정과 소중한 가족들을 잃게 된다. 그렇지만 강력한 쾌락의 유혹을 거절하지 못하기에 눈물과 회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악성부채도 삶을 옭아매는 처참한 덫이다. 자신이 갚을 수 없는 빚을 말하는 악성부채는 누구나 두려워하지만, 빚을 무서워하지 않는 소비습관 때문에 그 위험은 우리 가까이에 늘 존재한다. 마치 상어가 우글대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과 같다. 누군가가 잡아먹히는 것을 눈으로 보고 있지만 아무도 자신이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우울증의 커튼 뒤에는 사탄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래서 자기연민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자살로 마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모든 덫들의 공통점은 재앙의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쾌락과 탐욕을 앞세워 다가가다가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덫에 걸리면 그 순간부터 삶의 평안함이 사라지고 대신 고통과 회환으로 채워진다. 지혜로운 사람은 재앙을 보면 멀리 피하는 사람이다.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만이 자신의 평안한 삶을 남의 손에 주어버리는 것이다.
5. 빚을 얻지 말라.
자족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환경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만족해하는 성품이다. 사도바울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자족에 있다고 고백하며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빌4:11~13) 있는 그대로를 만족하며 사는 것이 바로 자족이다. 자족이란 주어진 환경이나 형편을 기꺼이 받아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야 어떤 환경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고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평안한 삶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되어서가 아니라 감사의 성품을 몸에 밸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잠 22: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그렇다면 자족하지 못하는 삶은 무엇일까? 그것은 빚을 지는 행위를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파트나 자동차를 살 때 으레 대출을 얻어 구입한다. 그 이유는 대출이자보다 집값이 더 많이 오르기 때문에 재테크전략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남들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얻어 사려는 행위는 자족함이 없어서이다. 비싼 이자를 지급하면서까지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빚을 얻는 행위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신용카드는 일반적인 소비습관이지만 3개월만 결제하지 못하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모든 대출이 회수되고 추가대출이 금지된다. 그래서 돌려막기를 하다 급기야는 끔찍한 사채까지 손을 대기도 한다. 사채를 쓰기시작하면 대부분 악성부채의 덫에 걸려들게 된다. 합법적인 이자만 연40%에 이르고 연체이자는 부르는 게 값이다. 그래서 사채를 쓰는 이들은 이 덫에서 거의 빠져나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사람들이 친근하게 생각하는 신용카드의 소비행태가 악성부채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점이 더더욱 무섭다. 살다보면 직장에서 해고를 당해 3개월 동안 수입이 없는 일도 생길 것이고 투자나 사업에 실패하는 일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빚이 있다면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빚을 갚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은 자유가 없다. 금융기관의 빚이라면 시도 때도 없는 추심기관의 독촉에 시달려야 하고 개인적인 빚이라면 그들과의 돈독했던 관계가 원수 같은 사이로 변해있을 것이다. 부모형제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와 동료 사이에도 금이 가 있을 터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가정이 끝없는 부부싸움에 이혼을 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빚은 평안한 삶을 빼앗는 아주 흔한 원인이다.
6. 자신과 하나님의 역할을 구별하라.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삶이 고단하고 팍팍하기도 하며 그 반대로 평범한 믿음에도 평안하고 형통하는 사는 이도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믿음에 대한 태도에 있다. 견고한 믿음이라 여겨지는 것조차 맹목적인 믿음인 경우가 적지 않다. 맹목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의적인 믿음인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희생적인 신앙행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 기복적인 신앙으로 성경적인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기복적인 신앙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볼 수 있듯이, 신앙행위가 더욱 희생적일수록 그들의 신을 감동시켜 축복을 얻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드리거나 금욕적인 태도는 물론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믿음은 기복적인 신앙관과는 다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적인 신앙행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약속한 축복을 얻지 못하고 있음이다. 하나님은 공의롭게 세상을 다스리신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원칙을 공평하게 적용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평안한 삶을 위해 중요하다.
맹목적인 신앙과 성경적인 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한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 일에 부지런 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많이 드려도 먼저 부지런하게 일해야 생업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것이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 희생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열심히 기도하지만 정작 자신의 사업체를 돌보지 않는다면 낭패를 당할 것이다. 만약 직장인이라면 먼저 회사에 충실 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지만 새벽기도나 철야예배에 참석하느라 회사에 와서 졸거나 수요예배에 참석하느라고 업무를 등한시한다면 해고 일 순위가 될 것이 뻔하다. 또한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 진료를 하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무시하고 믿음을 앞세워 하나님의 치유에만 매달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초자연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일상의 삶 속에서 자연스레 임하는 일이 더 많다. 이는 하나님이 세운 원칙에 어긋하지 않는 일이기도하다. 가정에서도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지혜롭게 솔선수범해야한다. 가장이라면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 주부라면 주부의 몫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희생적인 신앙생활을 앞세울지라도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성경에서는 악하다고 말한다.(딤전5:8) 이처럼 자신이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한다. 자신의 몫을 하나님이 대신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연약한 인간이기에 최선을 다했다고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 없다. 거대한 제도와 막강한 자연환경과 예측할 수 없는 금융환경 앞에서 인간은 연약할 수밖에 없다.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고 항상 낫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사업체를 경영할지라도 적자를 면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 믿음을 기쁘게 여기시며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할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전지전능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출발이다. 이처럼 평안한 삶은 자신과 하나님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자신의 몫을 게을리 하지 않는 데 있다.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할 것이고,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바로 건강한 믿음이다. 건강한 믿음이 평안한 삶의 초석인 셈이다.
7. 단순하게 살라.
궁벽하고 외진 산촌에 사는 사람들은 생활이 불편할지는 몰라도 걱정거리는 별로 없다. 농사를 지어 충분한 식량을 쌓아두고 추운 겨울을 지낼 땔나무만 있다면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새 봄이 와서 밭을 일구면 먹을 양식이 다시 생길 것이고 따뜻해지면 땔나무도 필요 없다. 그렇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일 년 내내 걱정거리가 떠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이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때문이다. 그래서 아침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 너무 바쁘다. 생업을 위해 새벽처럼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고, 모임에 참석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갖가지 취미활동과 동호회, 자녀 교육, 운동, 자기계발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심지어 휴일조차 심신을 푹 쉬는 날이 아니라 운동이나 연극영화 관람이나 각종 모임이나 여행 등으로 과도하게 몸을 움직여 평일보다 더 피곤하다. 밤늦은 귀갓길의 전철에서 지친 몸으로 꾸벅꾸벅 졸면서도 왜 이리 바쁘게 사는지 이유조차 모른다. 너무 바빠 생각하는 일조차 귀찮기 때문이다.
단순한 삶은 평안한 삶에 필수적이다. 단순하게 살려면 탐욕을 버리고 쾌락을 즐기는 삶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생계를 위한 시간이나 최소한의 사회생활, 운동 등을 제외하면 고요하고 깊은 기도와 사색의 삶으로 채워야 한다. 그러한 삶은 도시에서 시도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각종 동창모임이나 친구들과의 친목모임을 위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포기해보라. 그리고 거실에서 TV를 없애고 게임을 하거나 인터넷을 돌아다니는 것만 포기해도 많은 시간들이 생길 것이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을 갖고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고 있다. 필자는 만만치 않은 생업과 여러 사역으로 적지 않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삶은 늘 조용하고 단순하다. 그 이유는 열매 없는 일을 벌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친목모임을 위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며 TV시청이나 쇼핑, 인터넷게임 등 시간을 때우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들을 만들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수시로 기도를 시도하고 사색하는 시간을 즐긴다. 물론 이러한 삶이 무료하기도 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평안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젖어 살게 된다.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삶이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내려놓고 고요하고 단순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영적인 삶은 단순한 삶이 켜켜이 쌓아지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8. 하나님의 평안을 누려라.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을 살다보면 많은 두려움과 걱정거리에 맞닥뜨리게 된다. 가족들의 부양과 생계비, 자녀교육, 노후대책은 평생 고민해야할 걱정거리이고,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재앙은 두려움의 원천이다. 게다가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수시로 자신을 괴롭히고 평안한 삶을 빼앗아간다. 이를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애쓰며, 갖가지 보험에 가입하고, 불행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한다 할지라도 어느새 두려움이 스며들고 불안과 염려가 파고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잊기 위해 술과 쾌락을 찾는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미래는 불투명하고 막강한 사회제도나 자연환경에 비해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평안을 즐기는 비결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평안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 품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만족하였듯이 전지전능한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한다면 놀라운 평안을 얻게 될 것이다. 이를 모르지 않지만 하나님의 평안을 받아 누리는 것은 만만치 않다. 하나님이 내안에 거주하는 삶을 유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희생적인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간절한 기도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쉼 없는 기도를 습관으로 몸에 배야 가능하다. 쉼 없는 기도란 일상의 삶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내 안에 거주하셔서 나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깨끗하고 거룩한 성품으로 바꾸도록 해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 뜻대로 살려고 애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랫동안 경건의 훈련으로 성령으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며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내주하시는 삶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경지에 오른다면 환경이나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게 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