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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조선 | 일본 |
지휘관 | |
이순신 김억추 |
도도 다카토라 구루시마 미치후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사카 야스하루 |
병력 | |
판옥선 13척 | 전선 133척
수송선 200척 이상 |
피해 상황 | |
전선 피해 없음. 2명 사망, 3명 부상 | 전선 31척 격침. 92척 파손 및 대파. 12,000여 명 사상 추정 |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병사(病死) 소식을 듣고 철군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명나라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함께 퇴로를 막기로 하였다. 그런데 철수부대를 실은 왜선의 해로를 열어줄 것을 조건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에게서 뇌물을 받은 진린은 이순신에게 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권고하였다. 이순신은 이에 강경하게 반대하여 진린을 설득한 후 함께 왜군을 치기로 하였다.
고니시는 경남 사천(泗川)에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의 소시라노부[宗調信]에게 구원을 청하여 전선 500여 척을 노량 앞바다에 집결시켰다. 그러자 이순신은 휘하 장병에게 진격 명령을 내려 노량 앞바다로 쳐들어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때 왜군은 이순신을 잡을 목적으로 그를 포위하려 하였으나 도리어 진린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觀音浦)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이순신은 적선의 퇴로를 막고 이를 공격하여 격파하는 동시에 적에게 포위된 진린도 구출하였다.
이 해전에서 400여 척의 전선을 격파당한 왜군은 남해 방면으로 도망쳤는데, 이순신은 이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죽는 순간까지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추격을 계속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유언했기 때문에, 조선군은 왜군을 격파한 후에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들었다. 이 추격전에서 왜군은 다시 50여 척의 전선이 격파당하고 겨우 50여 척의 남은 배를 수습하여 도망쳤다.
이 전투에서는 이순신 외에도 명나라의 등자룡(鄧子龍), 조선 수군의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흥양현감(興陽縣監) 고득장(高得蔣) 등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7년간이나 끌던 조선과 일본 간의 전쟁은 끝났다.
◎노량해전의 발발 당시의 조선과 일본.
1598년 전쟁이 막바지로 가고 있을무렵 의 9월 일본에선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사로 왜군을 철군하기 시작했고 순천성에 있던 고니시
부대도 퇴각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조선 삼도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의 부대가
전남 여수와 광양쪽에 진을 쳐 왜군을 포위한 상태였다. 왜군은 어렵게 구원군
이 있는 진영으로 무사히 전령을 보내 조선군을 격퇴할 것을 요구, 당시 이순신
은 일부러 전령을 일본진으로 보내 11월 18일 밤 전병력을 순천성공격에 투입
할 것을 거짓 토설하게 해 일본구원군은 곧바로 최대한 빠른 뱃길인 노량을 지나
순천성을 구원을 가기로 한다.
◎노량해전
노량해전은 1598년 11월 18일 술시(밤 9시~11시) 부터 다음 날인 11월 19일
정오가 되서 끝난 대 전투이다. 이 때 일본군은 구원군 병력은 4만 7천의 병력
과 400여척의 안택선과 100여척의 누각선으로 구성된 수군으로 조명연합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군은 화포 300기 를 통한 수군 총
1만 6천의 병력, 50여척의 판옥선, 20여척의 소선의 불가했다. 명군은 수군제독
진린이 이끄는 5천의 수군과 40여척의 호선과 사선이 있었다.
결론은 전함 500척과 전함 100여척이 겨우 넘는 가 질수 없는 전쟁을 하게된다.
그래도 이순신이 순천성의 일본군을 묶어놓기 위해 배에 백성들을 태워 군함이
온 척을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시작은 조선군의 매복공격으로 일본군이 혼란상태에 빠지자 와키자카가 이끄는
일본군은 이에 맞서 공격하게 된다.
약 12시간이 넘는 공격전 끝에 일본군은 본국으로 퇴각하고 이순신은 이 전투에
서 전사하게 된다.
◎노량해전에서의 각국의 피해 손실
이 전쟁에서의 피해는 조선군은 1만 6천중에 1만 3천명 전사. 판옥선 50여척중
26척 소실 소선 전부 파괴를 당하고 명군은 2천여명 전사 17여척의 호선, 사선
이 소실됬다.
적군인 일본군은 380여척의 안택선과 70여척의 누각선 소실과 4만 1천명의 전사
자를 남기고 본국으로 철수하게 된다.
◎노량해전에서의 조선수군의 전략.
그럼 어떻게 수적으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수군이 어떻게 일본군의 배를 많이
격퇴시켰고 어떻게 많은 숫자의 일본군을 죽일수 있었을까?. 노량해전 때 쓰였던
조선 수군의 작전을 알아보자.
작전1. 순천성의 왜군을 봉쇄시켜라!
이순신이 가장염려 했었던 것은 순천성에 있는 왜군과 구원을 오게 되는 왜군과
연합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럼 아무리 천하의 이순신이라 해도 1만 6천의 병력
으로 거의 7만이 되는 왜군과는 지는 것을 이순신은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그 것을 위해 전령을 일부로 일본의 구원군 본진에 닿게 해 조선수군이 전병력을
이끌고 순천성을 공격할 것이라고 거짓토설하게 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일본
구원군은 뱃길이 가장 빠른 노량을 향해 온 것이다.
그럼 순천성의 일본군은 어떻게 했을까?! 이순신은 수십선의 소선에 백성들을
태워 순천성 밖에 멀리서 불을 들게 한것이다. 그럼 밤이고 안개가 꼈기 때문에
전함인지를 순천성의 일본군은 조선수군으로 착각을 하게 한 것이다.
이런 작전을 써서 노량에서의 대승을 거둘수 있게 한 것이다.
작전2. 매복계
이순신이 일본군을 노량으로 이끌게 한것은 조선수군이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도
록하게 한것이다. 노량은 여러 섬이 있어서 길이 좁고 험하며 평소에도 빛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밤에서는 아무것도 안보이게 된다. 이순신은 미리 조선전함
을 노량에 배치해 공격을 한것이다. 당시에 일본군 대장인 와지자카는 노량을
통할 때 확인사격을 할만큼 아주 병법에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위기에도 침착한
조선군의 또하나의 작전에 말려든 것이다.
작전3. 원거리서 공격하라.
이순신은 조선군에 무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주무기인 조총보다
조선군의 포가 공격범위가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은 천자총통,
지자총통, 화차와 임진왜란 때 발명된 비격진천뢰의 공격범위를 계산하고
일본군이 어느정도에 오면 포격을 할것을 미리 계산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들고 있었으나 조총은 군함파괴용이 아니라 군사를 죽이는
살인무기였고 조선무기보다 공격범위가 적었기 때문에 공성전 때는 유리했지만
이와 같은 해전에서는 불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수군은 강한 선제공격을 통해 일본수군을 많이 없앨 수 있었고 그 결과 조선
수군은 승리 할 수 있었다.
작전4. 갈고리를 통한 신전술
조선수군은 주무기가 활이었기 때문에 먼거리서 쏘는 조총과는 상대가 안될정도
로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이순신이 활용한 것은 갈고리, 갈고리로 상대
의 군함을 끌고와 화살의 공격범위를 만들게 하여 적을 죽이는 방법을 썼다.
또 반대로 일본군이 갈고리를 걸어 조선수군의 배에 갈고리를 걸었다면 휴대용
으로 미리 칼을 소지하게 해 줄을 잘라 버리거나 갈고리를 건 일본군에게 집중
적으로 화살을 쏘게 했다. 이순신은 일본군이 조선군보다 칼,검술에는 뛰어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서로 붙으면 승산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거북선의 지붕에 칼을 단 것도 그것일 것 같다.
또 반대로 조선군이 갈고리를 걸어 붙게해 일본군의 배로 건너가 싸우게 한 작
전도 서슴없이 했다.
작전5. 사기를 높여라.
이순신은 군사를 사랑한 아주 칭송받는 장군중 하나다. 이순신은 무엇보다 전쟁
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뽑았다. 이순신은 군사들의 사기
를 높여주기 위해 무술놀이나 승전을 당부하며 사기를 높이는 등 훈련을 통해
군사들의 자신감을 높여주었거나 군율을 어기면 가차없이 죽이는 등 군사들의
전의를 다지게 하였다. 이렇게 사기가 올라간 조선군과 일본군은 비교도 안되게
차이가 났다. 그래서 이순신은 적탄에 맞고도 사기를 위해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장수들에게 일러둔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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